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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기 17장 / 매 맞아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이야기 2부
    말씀 나눔방 2023. 8. 14. 20:32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 말씀 : 출애굽기 17장외

     

     

     

    제가 1부에서 호렙산은 낮의 세계, 빛의 세계를 나타내고, 시내산은 어둠의 세계, 부정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호렙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개역개정)

     

    여러분! 우리는 어느 때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우리가 말씀 교제 내용을 편집하고 문서화하여 인터넷에 게시하고 앞으로는 동영상을 제작하여 유튜브에 올리는 일을 제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를 받아 마시는 일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고 또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을 전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며 또 예수님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나누고 전하는 이러한 일들이 생명수를 받아 마시는 여러 일들 중에 가장 큰일인 것은 그 일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주된 사역이며 그 일들 가운데 성령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수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마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 기도하고 묵상 등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들도 분명 생명수를 마시는 일들 중에 하나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기도와 묵상과 찬양 또한 생명수를 마시는 일들 중에 하나이지만, 

    무엇보다도 은혜 받은 말씀을 이런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와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며 그때 우린 그리스도의 생명을 풍성히 받아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 속에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 마시므로 생명의 호흡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숨을 들이 마신 다음에 내쉬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은혜받은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 마시고 내쉬는 영적인 생명의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제한 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또 어떤 봉사자들은 이 말씀들을 편집하여 문서로 만들어 인터넷에 게시하여 전하는 것 또한 생명수를 많이 받아 마시는 일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의식하고 한 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받아 마시는 일 중에 매우 큰일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생명수를 받아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생명수를 마시고 싶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 마셔야 되는지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러한 교제 말씀들을 문서로 만들고 또 받은 은혜를 전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그 가운데 역사하셔서 생명수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만일 은혜의 말씀을 전할 사람이 없다면 “벽에 대고 얘기를 하든지 의자를 두고 예수님이 이러한 분이시다”라고 얘기하라고 제가 어떤 봉사자들에게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내 입술을 통해서 내가 받은 은혜의 말씀들이 고백 되고 선포되는 가운데 성령님이 공급해 주시는 생명수가 내 영혼에 촉촉이 적셔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생명수의 흐름이 내 안에서 멈춰서 고여 있으면 안 되고 강물처럼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내 안에 있던 생명수가 흘러나가 내가 비워지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수가 비워진 그 자리에 다시 흘러 들어와 내 영을 더욱 풍요롭게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수를 다시 공급받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생명수를 마시는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을 나타낸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먼저 이사야서 12장 3절, 4절입니다.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개역개정)

     

    또 오순절 날 천하 각국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경건한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 나라의 언어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모두 놀랄 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한 사도행전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21, 개역개정)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자에게 성령께서 내주하시므로 생명수가 흘러 들어가 그 영혼이 흠뻑 적셔지므로 그가 거룩한 자로 새롭게 조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출애굽기 17장 6절, 

    모세가 광야에서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의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내리쳐서 그 쪼개진 그 반석에서 생명수를 내게 한 이야기 2부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17장 6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메마른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 광야 여행길 처음과(출애굽기 17장) 마지막(민수기 20장), 곧 시나이반도 남쪽과 북쪽에다 생수를 내는 반석을 예비해 놓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를 가든지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그 반석은 그들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항상 그들을 따라다니며 언제나 그 생수를 공급했다는 의미라고 1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반석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시고 계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 말씀의 쪼개진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사신 33년 반 동안의 인생과 그 삶의 절정인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 인자로서 오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성육신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별로 놀라워하지 않지만, 

    사실 그것은 처음부터 너무나 은밀히 감춰져 있었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너무나 알기를 원했던 것이지만 누구도 생각하지도 못했고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너무나 놀라운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지니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모세의 지팡이에 매 맞아 쪼개진 그 반석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성육신하셔서 인자로서 사신 그분의 삶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의 짐을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팡이에 매 맞는 형벌을 받아 죽으신 그분의 모든 인생을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그 생명수의 흐름은 하나님을 찾는 목마른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만세 전부터 준비되었던 것으로 과거에도 흘렀고 지금도 흐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흐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생명수에 그 영혼이 흠뻑 적셔진 자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구애를 받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자들,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아는 자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아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 그 생명수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성육신하시고 인자로서의 삶을 사셨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세의 지팡이에 맞아 쪼개져 생수를 흘러 내보낸 그 반석은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우리 대신 하나님의 법의 심판을 받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친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 심판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와 권위의 표현인 그 율법의 지팡이로 심판을 받아서 매 맞음을 당한 것으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17장 6절, 쪼개진 호렙산 반석 이야기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19장 34절 말씀,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의 창에 찔려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시므로 구약의 예표는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창세기에 아담이 그의 옆구리에서 취한 갈비뼈로 하와가 산출된 것 또한 주님께서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피로 우리의 죄가 씻겼고 주님이 흘리신 물, 그 생명수를 마시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는데,

    우린 이 사실을 아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되며 그 생명수의 흐름이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 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생명수를 마시길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활 안에서 생명수의 흐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후에도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4, 개역개정)

     

    그 생명수는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왔던 것으로 에덴동산에서는 생명나무로부터 그 생명수가 발원되어 네 개의 큰 강을 이룬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세기 2:10, 개역개정)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왔던 그 생명수가 에덴동산에서는 생명나무에서 발원되어서 네 개의 강을 통해서 흘러 나간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그 생명수의 흐름이 끊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죽으셨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부활의 영이신 주의 영을 통해서 그 생명수는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그 생명수는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므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만세전부터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왔고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부터 발원되어 나온 그 생명수의 흐름이 있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오십 일째 되는 오순절에 주의 영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전에는 주의 영이 오시지 못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공개적으로 합법적으로 생명수가 흘러 들어온 사건이 오순절에 주의 영이 임하는 사건인데,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의 흐름이 계속 지속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전까지 왜 멈춰졌을까요?

     

    그것은 그 비밀과 중요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반석은 비밀스럽고 신령하며 감춰진 영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4, 개역개정)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26~27, 개역개정)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너무나 놀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시기 전까지 곧 성육신하시기 전까지, 인자로서 33년 반을 사시기 전까지,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시기 전까지는 그 생명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왔던 그 생명수가 결코 흐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것이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며, 또 33년 반 동안을 인자로서 사신 삶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육신도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 그분의 33년 반 동안의 삶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육신을 하셨기 때문에 인자로서의 33년 반의 삶이 있을 수 있었고, 그 33년 반 동안 점과 흠이 없는 의로운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 정점인 십자가 죽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그분의 성육신, 그분의 인자로서의 33년 반 동안의 삶, 십자가 죽음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고 서로를 구분하여 그 경중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는 물과 피가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단계 곧 성육신하셔야 했고 또 인자로서 33년 반 동안을 사셔야 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성육신과 인자로서의 삶과 그분의 죽으심은 모두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 생명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부활의 영을 통해서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신부들에게 임하여서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을 얘기하고 있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2장 13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됐고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됐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말 성경)

     

    여기서 침례의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죄에 죽고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의에 산다는 것이며 이렇게 침례 받은 자들이 한 성령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그 물을 간절하게 간구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갈망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네게 그 생수를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너에게 말한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으리라."고 하시니 (요한복음 4:10, 개역개정)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인자로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을 사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까지는 우리 인류에게 그 생수가 절대 공급될 수가 없었지만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통해서 그동안 감추어 왔던 비밀이 온 세상에 공개적으로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한 그 생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성육신도, 33년 반 동안의 그분의 인생도, 갈보리 언덕에서의 죽음도 결국은 이 생수를 흘려 내기 위한 준비 단계였고 궁극적으로는 그분이 부활의 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수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얘기한 이 생수는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인데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기 전에는 그 생명수는 절대 흘러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비해 놓은 반석이신 인자가 우리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팡이에 매 맞아 쪼개져 죽지 아니하면 우리 인류를 위한 그 생명수는 결코 흘러나올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인간 스스로는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결코 없기에 죽어야 하는 운명에 갇혀 있었는데 한없는 긍휼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을 사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에 의해서 그 옆구리를 창에 찔림 받아 죽임을 당하셔서 피와 물을 흘리신 일, 

     

    곧 하나님의 권위인 율법의 지팡이에 의해서 그 반석이 우리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고 쪼개져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시므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를 흘러나오게 할 수 있었고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분의 의를 힘입어 그 생명수를 값없이 마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6~27, 개역개정)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매 맞아 깨어지기 전까지, 곧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의 심판을 받기 전까지는 그 생명수는 흘러나올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그 심판은 하나님의 불 심판입니다. 

    그것은 죄악된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에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렸던 유황불 심판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내리는 그 진노의 심판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그 생명수를 결코 받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한복음 19:28 개역개정)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그 불의 심판을 견디시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야 될 그 진노의 심판,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불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통과하심으로써 우리가 그 생명수를 마실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자신은 호렙산 반석처럼 산산이 깨어지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지팡이, 권능의 지팡이로 매 맞는 진노의 심판을 홀로 받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 생명수에 대한 얘기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생명수가 흘러나온 것은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가 우리에게 공급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안식일로 기념했지만, 

    지금은 팔 일째 날, 한 주의 첫째 날에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날을 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그 일곱째 날을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기 때문에 그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지만, 지금은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팔 일째 날, 곧 주일을 새로운 기념일로 지키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께 주지시켜 드립니다.

     

    생명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영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생명수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야 했고 다시 사신 그분께서는 영화롭게 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3:13, 개역개정)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만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며 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부활의 영 만을 영접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는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9, 개역개정)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의 삶을 경험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누가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누가복음 24:26, 개역개정)

     

    부활 안에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하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영화롭게 되셨을까요? 아니면 성육신하셨을 때 영화롭게 되셨을까요? 33년 반 동안의 삶을 사시는 과정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신 것일까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된 때는 부활하신 때입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세 가지 사건, 성육신과 33년 반 동안의 삶과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주님이 영화롭게 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이 영화롭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수를 나눠 주실 수가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표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믿고 따르며 함께하는 자들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영화롭게 되신 후에 비로소 생명수가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33년 반 동안의 삶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이루신 것이 그분의 부활로 이어져 영화롭게 되심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던 영원한 생명수를 가져와 우리에게 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수인 그 영은 생명의 영이요, 창조의 영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신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수가 흐르는 일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린 보통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고통받아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 만을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개역개정)

     

    이 말씀에서 분명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린 보통 그 순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습관에 따라 ‘물과 피’로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아무 의미 없이 임의로 쓰인 것이 아니라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아 쉽게 지나치는 것입니다.

     

    순서상 피가 먼저 나온 이유는 구속의 순서에 관한 문제 때문이라고 제가 1부에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옆구리에서 그 피와 함께 나온 물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하는데, ‘피와 물’ 모두 인간의 구속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속의 순서상 인간의 죄가 먼저 모두 제거되어야 했기에 그리스도께서 피를 먼저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생명수가 흐른다 할지라도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나서 그 생명수, 부활의 영을 영접하는 일이 순차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을 영접할 수 없고 그로 인하여 생명수의 흐름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이며 주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흐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1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인자로서 사신 33년 반 동안의 삶 중 공생애 이전의 삶은 성경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이야기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조금 언급하고 있을 뿐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 공생애의 사역과 십자가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십자가보다는 많이 대두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성경이 최종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아니고, 예수님이 33년 반 동안의 삶도 아니고, 십자가인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 그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이 하나님 자신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개역개정)

     

    부활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부활이 먼저입니까? 

    보통 생명이 있어야 뒤에 부활이 있다고 1천 명중 999명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말씀에서는 순서상 부활이 먼저 나옵니다.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으로는 생명이 먼저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어야 부활이 있을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의 영적인 뜻을 지금 당장에는 여러분들이 깨닫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 말씀을 염두에 두고서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신성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순서상 부활이 생명 앞에 대두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9장 25절에서 부활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부활이라고요? 

    여러분!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누굽니까?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실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시길 바랍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개역개정)

     

    1장 14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개역개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은 요한복음 10장 25절에서는 자신을 부활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반대로 한번 생각해 보면 부활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 곧 예수님이 말씀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 말씀이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는 부활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또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육신 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부활이 하나님 자신,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알겠는데, 부활은 죽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부활일 수 있을까라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활은 반드시 죽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다시 사는 부활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의문이 마음속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죽음 없는 부활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활하시기 위해 죽으실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죽음을 당하는 일을 겪어야 했습니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부활하시기 위해 죽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부활 그 자체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부활 그 자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죽음 가운데로 들어가셨어야 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부활을 절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겪지 않으셔도 부활 그 자체이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힘든 줄 압니다. 이해가 되었다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면 그냥 접어 두시고 나중에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심으로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 가운데 거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자신이 부활이심을 우리 인간들에게 증명하고 보여주고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의도적으로 사망 가운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활 그 자체이면서 영원한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령한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뭔가 조금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분은 부활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음이 그분을 결코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죽음이 주장할 수 없는 부활 자체이신 그분이 그렇게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망의 사슬에 묶여 있어 죽어야 하는 인류에게 어떻게 부활을 설명할 수가 있으며 그 부활을 설명해도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활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온 인류가 겪고 있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을 기도하는 마음, 생명의 마음으로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개역개정)

     

    성경에서 말한 것에서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해하기가 좀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육신이 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말씀이신 그분이 누구입니까?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자신을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자신이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 누구라고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라고요? 육신이 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누구라고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라고요?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부활 그 자체이십니다.

     

    사망은 부활 자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까? 

     

    사망의 운명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증명해 냄으로써우리가 부활의 주를 따라서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부활이신 그분에게 동참하는 것이 영원한 부활 속에 사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그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인자가 되시고 33년 반 동안 인자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부활 자체이신 것을 보여주고 증거로 나타낼 수가 결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성육신도 중요하고 십자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부활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육신과 33년 반의 생애와 십자가의 사건이 먼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중요한 것을 단 한마디로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다’는 이 한 마디에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감추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그 빛을 비춰 주실 때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인자로서의 삶을 사시다가 사망 안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는 부활을 전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부활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말이지만 놀라운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그분은 부활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언젠가 누군가 읽고 깨닫게 된다면, 진리의 생수를 마셔서 거듭나서 새롭게 재조성 될 자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입어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자들로 변화될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그래서 이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쉼터를 열 군데를 운영하고 교회를 열 군데를 운영하고 학교를 열 군데를 운영하는 일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여건이 만들어지면 이러한 말씀들을 마음껏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형상과 모양 대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이 얘기를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저는 알기 때문에 다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주님을 더욱 깊이 아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과 더 많은 말씀 교제를 나누는 것을 통해서 매일매일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싶고 그 가운데서 저도 생명수를 마음껏 마시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으십니까? 저는 갈망하고 있고 갈급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제한적인 환경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일은 저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도움과 봉사와 후원 그리고 기도가 너무나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부활이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2천 년 전에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33년 반 동안의 인생을 사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죽음 가운데 있다가 그 사망의 문을 열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광을 되찾으셨습니다.

     

    부활 그 자체이신 하나님, 이를 반대로 말하면 부활을 위해서 그분이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셔서 33년 반 동안의 인자로서의 삶을 사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부활을 증거하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도록 성육신과 33년 반 동안의 삶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모두 거치셔야 했고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자신이 부활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확실히 공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부활보다는 십자가를 대부분 더 강조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부활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십자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부활, 부활,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탄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사망 권세를 무효화시킨 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안에서 그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당연히 승리를 거두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부활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부활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지라도 그분은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이 결코 부활이신 하나님을 관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어서 누구나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기에 주님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여 부활의 삶을 뒤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육신하셔서 33년 반 동안의 삶을 사시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활이십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죽어야 하는 사망의 운명 속에서 갇혀 있는 우리가 어떻게 부활이신 하나님을 처음부터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들은 부활이신 하나님과 함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부활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부활이시다는 것을, 부활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 인류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인자로서 인생의 수많은 과정들을 우리와 똑같이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생 속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운 일들과 슬픈 일들과 기쁜 일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 다가오는 고난들, 질병의 문제들, 가족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일 등 수많은 일들을 왜 예수님께서 경험하셔야 했을까요?

     

    그분은 부활 자체이시고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성육신 하셔서 당하신 일들은 그분께서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경험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성육신하셔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의 삶을 사신 것은 자신이 부활이시고 부활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활이신 것은 좀 이해가 되지만 부활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부활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셨습니다. 부활이 생명 앞에 나옵니다.

     

    부활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육신 되신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 자신이 부활이십니다. 그 부활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성경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번 읽어 보셔서 부활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나의 힘이오”라는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여러분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부활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성육신이 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분이라는 것 보다는 성육신이 되신 분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자로서 인생의 삶들의 모든 체험들과 경험들과 고통들을 체험하시고 친히 죽음 안으로 들어가셔서 모든 인간들과 똑같은 체험을 하셨지만 그분은 부활이십니다. 

     

    부활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부활이십니다. 부활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부활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많은 사람들은 그냥 사망의 문을 열고 죽음을 뚫고 나온 것이라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덤 속에 계셨지만 무덤이 결코 그분을 얽어매어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이 무덤 밖으로 나오신 것이라고 부활을 이해하는데 예수님은 부활 그 자체이십니다. 

     

    부활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부활은 그분이 무덤 밖으로 나오셨다는 그 결과만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베들레헴(떡집)에서 갓난아이로 태어나 성육신 되시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분의 그러한 삶의 과정 모두가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 삶 가운데 있는 여러 고통들과 인생의 무거운 짐들로 인한 압박들과 수많은 고난들과 어려움들이 있을지라도, 또 사망의 환경에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그것들이 그분을 결코 이기거나 붙잡아 둘 수가 없었던 것은 그분 자체가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부활이시고 부활 그 자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다 보니까 당장 이해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은 이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 예수님을 붙잡아 두거나 얽어매고 쇠사슬로 묶어 둘 수 없었던 것은 부활 그 자체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보여 주신 것을 더 확실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성육신 되시고 33년 반 동안의 삶을 통과하신 일들을 성경에 기록하셔서 부활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사망의 문을 열고 무덤 밖으로 나오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죽음을 무력화시키셨고 무효화시키셨고 굴복시키셨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준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 반석에 대한 사건은 그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생수를 네가 받아 마셔야 된다”라고 하셨고 또 “물과 피를 네가 받아먹어야 하나님 나라 왕국을 볼 수 있다”라고 얘기하신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부활이신 하나님을 마시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하여 사망, 어둠, 모든 나쁜 것들, 부정한 것들,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는 것들을 다 굴복시키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부활이시며 부활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니까요. 

     

    지금 당장 이해가 안 되면 일단 접어 두시고 여러분이 계속 곱씹으시면서 부활이 하나님 자신이시다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은혜의 빛을 비춰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분은 부활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부활의 의미와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부활과는 하늘과 땅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저는 보통 알고 있는 부활의 의미보다 10단계, 100단계 보다 더 높은, 마치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것 같은 그런 차원의 의미로 부활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부활, 부활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생명수는 부활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끊임없이 영원히 도도히 흐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누구든지 하나님과 반대되는 어둡고 부정한 모든 것들을 굴복시키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활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생명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탄이 뿌려 놓은 악한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물을 마시는 것은 악한 모든 것들을 이기게 하는 것이기에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발생된 인생의 무거운 짐들과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하는 문제들과 절망적인 환경 등 모두를 이기게 하고 굴복시키게 하며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죽음보다 더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 생수에 대한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생수를 마실 때, 우리는 부활이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이신 부활을 마시는 자가 되어서 우리도 부활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속성을 입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그 어떠하심, 그분의 인격을 소유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주의 이름을 계속적으로 불러야 합니다.

     

    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말씀이 육신에 오신 분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이 부활이시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하나님 자신이시다”라는 이것을 믿는 자, 이 이름을 부르는 자, 어떤 이름이라고요? 부활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믿는 자가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뒤처져 있고 얼마나 무기력하고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반석이 이러한 부활에 대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지팡이로 매 맞음을 당하여 쪼개진 반석에서 계속적으로 흘러나오는 그 물,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의 창에 찔려 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리스도의 피와 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 생명수의 강을 이룬 그 물,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에 의해서 그 옆구리를 찔려 흘러나온 피와 물이 흘러나온 그 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물,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생명수의 강을 이룬 그 물은 서로 다른 물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동일한 생명수 곧 하나님 자신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물은 하나님 자신이며 부활의 물입니다. 

     

    그런데 모두 동일한 물인데, 

    구약성경 출애굽기 17장 6절에서는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왔고, 요한복음 19장 34절에서는 주님께서 로마 병정에 찔림 받은 그 옆구리에서 그 피와 물이 나왔으며, 계시록 22장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왔는데, 왜 각각 서로 다른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흐르는 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쪼개진 반석에서 나온 물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육체에서 나온 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물인가? 아니면 생명나무에서부터 발원된 그 물인가? 

     

    계시록 22장 1절, 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시록 22:1~2, 개역개정)

     

    생명수의 근원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라고 계시록 22장 1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수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나온다고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처음과 마지막까지 동반하였던 그 반석이 매 맞아 쪼개져서 생수를 내기 전, 영원 전부터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그 생수는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요? 

    그리스도의 죽음 후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 전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영원 전부터 흐르는 생명수, 신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힘인 그 생명수는 그리스도의 죽음 후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 전도 아니고 반석 있기 전도 아니고 반석 있은 후도 아닌 영원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전부터 있었던 그 생명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에서는 반석이 먼저 등장을 했고 두 번째, 신약 성경에서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로마 병정의 창에 찔려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이며, 세 번째는 계시록에 22장 1절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 이룬 생명수의 강이 그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반석에서 나온 물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 모두 하나님의 보좌가 그 생수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에는 반석이 나오고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피와 물이 나왔지만, 세 번째 계시록에서는 그것들의 근원이 하나님의 보좌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수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반석이 매 맞기 전에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도 생명수는 이미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생명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알려주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생명수의 근원이 하나님의 보좌라는 것을 계시록은 계속 강조하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은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에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신 사건으로 그 생수가 흐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오시기 전, 곧 인자로서 성육신 되시기 전에도 그 생수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제가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못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성육신 되셔서 33년 반 동안의 인자로서 사신 삶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생명수의 흐름을 우리 인간에게 연결해주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단계, 과정인 것입니다. 

     

    좀 더 온전한 결말을 이루기 위한 진전된 결말의 마지막 단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끊임없이 흘러나가고 있다는 것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서 흘러나온 물이 네 개의 강줄기를 통해서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열두 물 샘과 칠십 종려나무를 통해서, 이외에도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베들레헴에서 처녀 마리아에서 태어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계속 흘러나와 끊임없이 흐르는 그 생수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 생수는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나셨을 때도, 33년 반 동안의 삶을 사셨을 때도, 골고다 십자가 언덕에서 로마 군병의 창에 그 옆구리를 찔려 피와 물이 흐르는 그때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한 후에도 부활 안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고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 그 생수의 흐름이 멈춰져 있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단 한 번도 그 생수의 흐름이 멈춰져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감추어 있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생명수의 흐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고 부활 안에서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안으로 계속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흐르고 있는 생수로 인해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것을 얻기 위해서 갈급하게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급해하질 않고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자체는 부활에 대해서, 생명수에 대해서 계속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 만나 얘기, 오병이어의 얘기뿐만 아니라 물에 대해서도 계속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물, 물, 물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아말렉 족속과 전쟁이 발생한 것도 물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을 마시면 영혼이 살기 때문에 나 자신의 육체를 상징하고 있는 아말렉이 내 육신을 통해서 그 물을 마시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수의 흐름에 대해서 실로암 물, 생수에 대한 얘기 등으로 계속 설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생각나실 겁니다. 

    마라의 쓴물 얘기, 홍해 바다, 노아의 홍수 등,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수,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오고 계셨지만 우리 눈으로 보게 되고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되신 사건입니다.

     

    그 계속적인 흐름 안에서 2천 년 전에 오셔서 인생의 삶을 경험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인성을 가진 인간들이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만드신 사건이 바로 삼 일 만에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시므로 우리들도 부활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부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 안에 들어가신 그분, 곧 부활의 영이신 주의 영, 성령님 그분이 바로 우리가 마시는 생수이십니다. 

     

    그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아들 예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있고 아들 하나님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내 안에 영을 거주하게 하는 일, 내 안에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서 그분과 함께 거주하며 하나가 되는 삶이 생수를 먹고 마시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먹고 마실 수 있죠? 하나님을 먹는다니까 좀 이상합니까? 구원의 영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마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그분이 성육신하셔서 인생을 사시고 죽음을 당하신 그 모든 것들을 믿고 따르고 접촉하는 일들이 그분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주의 영을 모시는 것은 생수를 마시는 일이랑 똑같습니다. 그 생수를 마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성육신과 인생의 삶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계속하는 것, 

    이러한 일들 속에서 주님과의 교제와 복음 전파하는 일, 기도를 하는 이런 일들이 계속되므로 우리는 생명수를 계속 마시는 것입니다. 

     

    이 생수가 예수님 자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하나님 그 자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이 직접적으로 내 안에 거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을지라도 어떻게 그것을 마시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과 말씀 교제를 하고 있는데 저는 지금 생명수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느낍니다. 저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지금 여러분들이 이 문서로 이것을 편집해서 만든 일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여러분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이 일이 정말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저의 죽고 사는 문제가 여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질이 허락이 되면 모여서 이 일을 함께 하면서 생수를 많이 마실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에 의해서, 주님이 요구하신 조건에 의해서, 합당한 방법대로 그 생수를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그분을 마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속성을, 그분의 본질을, 그분의 모양과 형상을, 그분의 인격을, 그분의 어떠하심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연합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생명수를 마시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명수를 마시지 않으면 결코 주님 안에서의 연합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그런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의 영,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으로부터 그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부활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부활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인식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요? 

    생명 앞에 부활이 먼저 언급된 것은 그분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분은 처음부터 부활 그 자체이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죽음도 그분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부활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죽을 수 없는 그분이 죽음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운명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부활이 어떻게 증명될 수가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세밀하시고 자세하시고 참 은혜가 많으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부활이신 하나님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 같은 자로 만들기 위해서, 거룩한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성육신 되시고 33년 반동안의 삶과 십자가 죽으심을 몸소 겪으시는 수고를 모두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을 마시는 일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일은 없습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께서 내주하셨을 때에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났었습니다. 온갖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의 영에 사로잡혀 제가 알지 못하는 방언이 제 입에서 쏟아져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외형적인 은사들 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활의 영을 내 안에 받아들여 마심으로 말미암아 거주하게 하고 내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이 되고 그래야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부를 찾는 얘기입니다. 전체가 그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자신의 손으로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성령님께 큰 은사를 받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행하는 그런 일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짜입니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생수,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하나님과 내가 연합되고 하나가 되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들 중에 모든 것이신 그 생명수가 내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대단한 기적과 표적과 기사가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영이 내 안에 내주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인생과 골고다 십자가에서의 죽음, 또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 부활 안에 있는 모든 것까지 다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전반적인 생애, 처음과 나중 그리고 지금까지 또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속되는 것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물이 생명수입니다.

     

    그 물이나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물이나 구원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역사나 똑같은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 때는 그런 모양으로, 신약 시대 때는 이런 모양으로, 계시록에는 생명수의 강으로 분명히 나타납니다.

     

    계시록 22장 2절에 생명수 강의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되어 있지만 생명나무는 한 그루입니다. 한 그루의 가지가 펼쳐서 저쪽 편까지 넘어간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는 한 분이십니다.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시록 22:2, 개역개정)

     

    부활의 영이 내재하셔 우리가 공급받는 이 생수는 성육신을 통한 그분의 모든 삶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의 33년 반 동안의 인생의 삶과 골고다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과 고통과 경험을 가지신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가 있고 생명이 되고 하나님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바로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 물을 마셔야만 인간이 살기 때문에, 애굽의 나일강 물이 아닌 죽음의 바다 홍해를 지나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온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생명수를 공급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은 이해가 되십니까?

     

    이 물을 마셔야만 살기 때문에 다른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광야에 물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 사막 건조한 땅,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반석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40년 동안 그들이 어떻게 먹고 마셨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와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 아니면 그들이 어떻게 먹고 마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만 먹고 예수 그리스도 만을 마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세상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며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쯤은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타협을 합니다. 

    하지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받아 마시지 않으면 내가 주는 생수를 마시지 아니하면 나는 너희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얘기하신 겁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주는 생명의 떡, 그리스도가 주는 생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존재하게 할 수 없고 살아가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을 통해서만, 생명의 떡이신 인자의 살을 통해서만 죄와 사탄과 내 육신의 정욕을 상징하는 아멜렉을 내가 극복할 수 있고 사탄의 가장 강력한 권세인 죽음까지도 초월하고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반석을 통해서 생수를 공급해 주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다양한 것들이 먹고 싶어서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수 없었던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그 생수만이 참생명인 것을 그들로 알게 하려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시고 생명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염원, 하나님의 갈망,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의 애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많은 오해와 많은 손가락질과 많은 불평, 많은 원망을 받으면서까지도 하나님께서 그리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부여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수는 부활 안에 있습니다. 

    그 생수 자체가 부활입니다. 부활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반석에서 흐르는 물로 상징되는 영, 곧 삼일 만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부활의 영, 그 주의 영이 부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근원이십니다. 생수의 근원이 어디라고요?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로부터 나옵니다. 

     

    생수의 근원이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생수의 통로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인생과 삶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통로가 되셨습니다. 

     

    통로이신 아들 그리스도! 과정이신 아들 그리스도! 체험자이신 아들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생수가 흘러서 우리 안에 침투하여 적셔지고 내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통로가 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우리 안에 흘러 들어와 적셔져서 우리에게 분배해 주시는 그 부활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실지어다”라는 얘기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수를 염두에 두고 축복을 선포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부활 안에서 주의 영을 통해서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을 통해서 계속 생수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생수를 마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그 물은 예수의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체험한 물입니다. 

     

    왜 가치가 있습니까? 

    반석에서 나온 물도 가치가 있고, 엘림의 물도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이 물은 성육신하셔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을 사시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그 고초와 고난과 “내가 목마르다” 할 정도의 그 갈급함, 우리에게 생수를 부여해 주기 위한 간절함으로 그 죽음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생명의 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수가 생명의 물이라는 뜻입니다. 신선한 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수는 그 속에 생명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 앞에 나오는 부활, 부활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생수는 부활을 말하고 그 물은 부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물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물이 부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 생수, 생명의 물, 부활을 소유한 이 물을 마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지게 됨으로써 원래의 육체적인 것, 천연적인 상태에서 하늘에 속한 자로, 이기는 자로, 승리하는 자로, 영적인 자로, 신령한 자로 변화되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수를 마시는 일이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내재되어 있는 이 생명수는 어두운 세상과 모든 죄와 악한 영에 속한 사람과 나 자신의 육신 곧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나를 이기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생수를 마시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까? 세상에 예수님처럼 어려움을 당한 자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수 자체, 부활 자체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고 극복하고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두운 모든 것, 부정적인 모든 것, 모든 죄, 사탄과 싸움에서 이기셨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이기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참혹한 십자가 고통과 죽음도 모두 이기셨습니다.

     

    사탄에 속한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또 우리가 그것들을 초월하고 이기게 한 것은 우리에게 생수를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수 2부를 마치고 3부에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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