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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반석되신 예수그리스도 (옆구리에서 물과피를 쏟으신) 하말씀 나눔방 2023. 8. 14. 20:37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 말씀 : 출애굽기 16~17장, 고린도 전서 10:2~4
말씀 주제 :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교회를 낳으신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하)
오늘은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교회를 낳으신 반석이신 예수그리스에 대한 후편 말씀을 이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고 생명수를 주시는 반석이심을 나타내는 말씀, 고린도 전서 10장 2절부터 4절까지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모세에게 침례를 받았고 또 모두 같은 영적 음식을 먹었으며 모두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랐던 그 영적 반석에서 나온 것을 마셨으며, 그 반석은 그리스도셨느니라.” (한글KJV)
<영적인 성장 단계를 의미하는 만나와 생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경험하게 한 후에,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생수의 체험을 가지도록 그들을 호렙산 반석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 만나가 더 참 만나가 되도록 곧 내 속에 들어온 말씀의 영양분을 온전히 흡수하여 내가 더욱 성숙되고 성장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더 깊고 풍성한 말씀,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생명수를 마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것처럼,
은혜로 만나를 받아먹었을 지라도 더 깊고 풍성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온전한 신앙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은 연약한 신앙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강건한 자, 온전한 신앙인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 진리인 생명수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성장 단계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만나를 먼저 주시고 그 다음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그들에게 공급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생체적으로 볼 때, 배고픈 것보다는 갈증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단순히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우리 몸의 약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기에 물을 마시지 못하면 보통 삼 일을 견디기가 어렵지만, 음식은 먹지 못해도 이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갈증은 배고픔 보다 빈번하게 발생되고 이를 해소하지 못했을 때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기에 이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수를 마시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음식을 먹을 때 함께 생수를 마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요즘에는 건강을 위해서 식후 20~30분 지난 다음에 물을 마시도록 권하지만, 그 음식을 만드는 모든 일에 물이 필요하듯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항상 우리에게 반드시 공급되어져야 할 생명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밤에도 낮에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생수를 마실 수 있도록,
반석이신 예수님의 생명의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죄 없이 정결한 삶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이 생수를 마시는 일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는 것이며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반드시 마셔야 할 필수적인 일입니다.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이 모세의 지팡이로 매 맞음 당해서 강물처럼 쏟아져 나온 그 생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받아 마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피와 살’인 말씀을 먹고 온전하게 소화시켜서 그것이 우리 영혼에 실질적인 영양분이 되고 참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우리 영혼을 건드려서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내 영혼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지 않으면, 생명수인 이 말씀을 전혀 깨달을 수가 없어 우리에게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성령님은 우리 처음과 나중 그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어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의 빛이 우리 영혼에 비춰져 생명이 될 수 있도록 그 말씀이 완전히 소화되고 우리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해 튼튼한 뼈와 피와 살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반드시 임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 곧 신의 성품을 소유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생수는 이처럼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 하는 생명 양식 만나>
출애굽기 16장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이것이 무엇이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서로 물어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만나를 세상에서 한번도 보거나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에는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만나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16장 23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라’고 합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서는 이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여러분!
아침에 이슬이 마른 후에 나타나는 이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늘고 또 깟씨와 같고 진주와 같은 모양이었고 그 맛은 기름 섞인 과자 맛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만나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 삶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자신이 멧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지는 듯한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맷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진다는 것은 완전히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만나를 불에 굽기도 하고 가마에 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선포하신 만나, 진리의 말씀은 자신이 으깨지고 갈라지고 찢어지고 구워지고 삶아짐으로써 만들어진 우리를 위한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양식이 되셔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으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진리의 양식을 우리가 정말 소홀이 대하고 헛되이 여겨서 결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루신 일은 말할 수 없이 가치가 있으며 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나타낸 일들은 나에게 진리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만나처럼 갈아지고 찧어져서 완전히 가루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6장 9절에 어린 아이가 가져온 음식, 그 아이 엄마가 아이를 위해서 특별히 먹기 좋은 크기로 친절하게 조각조각 내어 싸 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그것을 또 나누어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셨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잘 소화하여 영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갈아지고 빻아지고 부서지셨고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 감람나무 열매가 으깨지듯이 주님은 이렇게 조각조각 으깨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
또,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때림으로 그 반석이 쪼개져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도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고 있으며,
매맞아 쪼개진 그 반석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으깨지고 부서지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사건, 만나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지만, 반석이 쪼개지는 사건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보다 더 분명히 다가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 말씀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분명히 이 말씀에서는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는 말씀에 따라 반석을 치는 것이 옳습니다. 모세는 이때 반석을 처음 친 것이었습니다. 반석을 치는 행위는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 한 번 죽으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한 지 38년되는 해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가 두번째로 반석을 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20장 8절,11절 말씀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불순종에 화가 난 모세는 그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여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고 죽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사건입니다.
단 한 번의 죽음으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또 죽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일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행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몰라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요.
출애굽기 17장 6절에 등장하는 호렙산 반석은 얼마나 큰 반석이었을까요.
아마 어마 어마하게 거대한 반석이었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반석을 모세가 자신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힘차게 내리 쳤습니다.
그 반석을 왜 칩니까? 왜 때립니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셔서 그 곳에 있는 목마른 영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안에 있는 생명수를 주시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로 크게 매맞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예표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마가복음 9장과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이 변화산에 제자 3명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고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홍해를 가르는 이적 그리고 여러가지 놀라운 일들을 이 지팡이를 통해서 행했습니다. 지팡이는 율법을 집행하는 힘, 권능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집행하는 권능을 상징하는 이 모세의 지팡이가 그 율법을 근거로 갖는 엄청난 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버립니다.
한 나라에 속한 국민을 안정적이고 질서 있게 다스리기 위해서 법이 존재합니다. 이 법은 모든 국민에게 엄청난 권위를 갖고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어느 누가 그 법을 어겼을 때는 그 법을 근거로 재판장은 죄의 경중에 따라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립니다. 죄가 가벼우면 벌금형을 내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징역형, 죄가 아주 무거우면 사형을 명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법이 갖는 엄청난 권위와 막강한 힘 앞에서 그것을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형벌의 근거가 되기에 인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권위와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서도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율법의 권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벌의 근거가 되는 이 율법의 권능과 엄위함 앞에서 죄인들은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똑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가 그 권능의 지팡이로 반석을 때렸다는 것은 죄를 범한 우리를 대신하여 권능의 율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쳐서 깨뜨려 갈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에 그 몸이 매질 당해 찢어지고 갈라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율법 앞에서 우리 인간 모두가 매 맞아 깨어져 죽어야 하는데,
나를 사랑하여서 대신 율법의 지팡이로 심히 매질을 당하여 반석이 깨어지고 터지고 갈라진 그 모습을 이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빌라도의 사형 판결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과 모함으로 고소를 당하셔서 죽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그 권능의 힘인 율법에 의해서 매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 율법의 지팡이로 죽음과 사망을 당한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감격과 은혜를 주고 우리 마음을 이렇게 찔러 아프게 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몸을 율법에 팔아 넘기시고 그 대가로 우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몸으로 값을 치르고 대신 우리를 사셨습니까?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에 사로잡혀 죄의 포로가 된 우리는 율법의 권능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누구도 예외가 없는 권위가 있고 엄정함이 있습니다. 그 율법의 정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으로 죄의 포로가 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내어주어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죽음을 당함으로 율법에 사로잡힌 우리를, 흉악한 결박에 놓여 죽음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마귀에게 정죄 당하고 참소 당하여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몸을 값으로 지불하고 대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린 이 사실을 평생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에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것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
누가복음 23장 4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가 제 6시경이었는데 어두움이 온 땅을 제 구시까지 덮더라.”
여러분! 이 말씀에 커다란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기에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유대시간 6시는 우리나라의 정오 12시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유대인의 시간에 6시를 더하면 우리나라의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오 12시에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9시까지 임합니다. 우리나라 시간은 15시, 오후 3시입니다.
예수님은 그럼 몇 시에 십자가에 달렸을까요?
지금부터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된 유대 시간을 우리나라 시간으로 바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이 돼 있는데,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여러 가지 심문과 고초를 당하신 후에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제 12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덮었더라”
예수님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정오 12시쯤 되었을 때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전 9시부터 정오 12시까지 오전 3시간 동안의 얘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는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어난 사건,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십자가에 고난에 대해서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4절, 마태복음 27장 45절, 마가복음 15장 33절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6시간 중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써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상징하고 있는 모세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으셔서 고통 당하시고 죽어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선선하고 햇볕이 들어도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하루 중에서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때문에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무 그늘에서 쉴 정도로 그 태양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햇볕이 가장 뜨거워 힘든 시간,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골고다 그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권능으로 정죄 당해 매맞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권능, 그 앞에서 누구도 견딜 수 없어 처절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강력한 율법의 힘을 마귀가 교묘히 이용하여 우리를 고소하는 강력한 무기로 삼아서 그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여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신 율법으로 매 맞음을 당하여 결국 돌아가시는 모습을 성경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맞아 그 몸이 쪼개지시는 장면을 누가복음 23장 45절에는 성소의 휘장의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찢어져 우리를 낳은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여러분! 매 맞아 찢어지고 갈라지는 예수그리스도가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8절에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렇게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며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낳으시기 위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너무나도 강력한 율법의 힘에 의해서 모세로부터 매 맞음으로 고통 당하며 죽으신 것입니다.
시편 95편 1절에도 이 반석을 구원의 반석이라고 노래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율법의 권능을 가진 모세가 내리치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서 우리가 받아야할 징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 완전히 깨어지고 대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옆구리로 우리를 낳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외치자고 시편은 노래하고 있고 사무엘하 22장 47절에도 이 구원의 반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끊임없이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거대한 반석을 한 번 내리치니 그 거대한 반석이 쪼개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힘입니다.
누구도 그 율법에 사로잡히면 그 흉악한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자신이 쪼개짐 당함으로 그 흉악한 쇠사슬을 끊고 멍에를 꺾으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흉악한 쇠사슬에 결박당하고 멍에를 메셔서 깨어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 깨어짐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반석에 대해서 ‘나의 방패요, 피난처요, 요새요, 산성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32장 2절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여러분!
또 큰 바위 그늘 되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렬하는 태양, 그 12시부터 3시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서 견디어서 살 자가 없기 때문에, 그늘이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생명수가 되어 주시고 큰 바위 덩어리가 되어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족하며 휴식하며 안식하며 영원한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메마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미리 창세전부터 준비하여 기다리고 계셨던 이 바위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의 몸을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여 쪼개짐으로 쏟아져 나온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수, 이것은 보통 물과 다릅니다.
그 물은 영원한 생명수, 영원한 것입니다.
그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12시부터 3시까지 매맞아 고통 당하며 죽는 일,
그 작렬한 태양에서 그 모세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감당하신 그 분의 은혜 그리고 그 분을 그렇게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7장 37절, 38절 말씀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 생수가 성령을 가르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곁에 계셨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은 우리 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육체를 가진 우리를 성전 삼아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머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반석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물은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물과 같이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마른 광야에서 정말 심한 갈증을 느꼈을 때 매맞아 쪼개진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그들이 마시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목마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 곁에 반석으로 서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장막에서 살고 메마른 광야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하늘 만나와 그리고 그들의 갈증을 해결해 줄 생수가 항상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를 위해 매맞음을 당한 반석,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성전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섭섭하게 하거나 노엽게 하는 일들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마른 광야의 삶을 살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마름으로 인한 곤고한 삶을 너무나 잘 알고 필요할 때마다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주신 분이셨습니다.
때문에 성육신 하셔서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는 구속을 의미한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몸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물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물은 예수님의 그 쪼개진 몸을 통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물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성령님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6절에서 물과 피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우리는 이 신령한 음료들을 마시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작하면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10장 3절, 4절은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녔다고 나옵니다.
조금 전에 읽은 신명기 3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 그들을 계속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을 먼저 살피셔서 그들을 알맞은 곳에 머물게 하고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생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세밀한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고난 속에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구원계획을 이룸에 있어서 예수님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계셨을까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자가 되셔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 계획을 이루시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이는 낮에는 작렬하는 떼약볕 아래에서, 밤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창세부터 언제나 변함없이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반석의 모습에서 자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대하며 기다리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들이 마신 신령한 물이 그들을 따라다녔던 반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 긴 40년 동안의 메마른 땅, 광야 여행 속에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줄곧 낮이나 밤이나 추위에나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도자와 필요자가 되어서 그들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시부터 3시까지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그 죽으심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 성령님>
앞서 민수기 20장 11절에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 치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가 처음 반석을 친 곳은 호렙산이었고 두번째 반석을 친 곳은 가데스 바네아(거룩한 샘물)입니다.
처음 반석을 친 뒤로 38년 뒤에 두번째로 또 반석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38년이라는 광야의 긴 시간 속에서 반석 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한시도 떨어 지지 않고 그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낮이나 밤이나 더위나 추위 속에서 그렇게 수고하시고 정성을 다해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였고 가나안 땅에 열 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도 갈렙과 여호수와를 제외한 나머지 열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행위들을 광야 삶 내내 나타내었습니다.
모세가 내리 친 두 개의 반석이 있는 장소는 엘림(종려나무들)과 시내 광야 사이에 있는 신 광야(습지)를 기준으로 볼 때,
가데스 바네아가 신 광야 북쪽에 있고, 호렙산 반석은 신 광야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두 장소에서 모두 다툼이 있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라고 칭합니다.
이렇게 남쪽에 있는 호렙산에서 모세로부터 처음 매 맞음 당한 반석이 38년 뒤, 북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서도 또 나타나서 모세로부터 두번째 매 맞음을 당하는데,
이것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38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들의 잘못이 있음에도 계속 그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2000년 전에 계셨는데,
지금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이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했던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가 내일은 떠나서 안 계시고, 오늘 임재 했다가 내일 떠나시는 그런 성령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성령님을 잘못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역시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전까지 만해도 이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어떤 잘못을 하면 성령님께서 나를 떠나는 걸로 알고 정말 간절히 주님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역심을 품고 반역하지 않는 이상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부정함과 정결치 못한 일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일들이 얼굴에 수건이 덮여 있는 것처럼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면 우리는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소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부터 38년 뒤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기간까지 그들의 심령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고쳐지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요한복음 5장 5절에서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병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나 기간은 아무 의미 없이 임의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두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의 광야 삶 속에 나타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음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렙산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38년 동안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여 생명수를 공급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생명수가 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요청을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반석, 예수그리스도>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이 반석은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를 낳은 반석이십니다. 이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낳으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낳습니까? 아버지가 낳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아버지가 맞는 겁니다.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세 분 하나님 중에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만족을 주고, 힘을 주고, 피난처가 되시고, 또 소생시키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기 위해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 매 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내 동댕이 쳐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때,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으시는 예수님을 가까이할 수가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냥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하늘도 깜깜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하신 그분은 12시부터 3시까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내쳐짐을 당하고 로마 군병의 창에 의해서 그 옆구리가 찢어지고 갈라짐으로써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사랑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이처럼 하시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반석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까지 우리에게 생명수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그러한 고초를 당하신 겁니까?
여러분!
주님의 기이한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집을 만들기 위한 존귀한 건축 재료로 만드시기 위한 것 때문입니다.
건축 재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을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십자가의 잔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모든 것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로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되었던 것이며 제단 위에 자신을 올려 놓으신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동산은 자신이 제물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서 놓여 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불, 진노의 불이 율법을 어긴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한 예수님에게 쏟아진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그 제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삭처럼 제물로 놓여 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제물로서 불태워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수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속성들, 권능과 권위과 엄위하심 등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케 하기 위하여 고초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갈라지신 것입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때림을 당하시므로 그렇게 예수님의 몸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옆구리에서 생명수가 흘러내린 것입니다.
이 세 분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루신 사역의 결과가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우리 안에 계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성령님을 늘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부터 6절에서 모세의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을 당한 반석인 예수 그리스도가 쪼개지고 갈라지는 장면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신데, 성령과 함께 있는 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 우리를 또한 그분의 안식처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 그 율법의 힘에 의해서 처절하게 12시부터 3시까지 그분은 그 뜨거운 떼약볕 아래서 고초를 당하시고 매를 맞고 그대로 쪼개지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그 번제물 되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고 영원히 돌아가심으로 그 제물이 인류 전체를 모든 율법으로부터 또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다 편히 쉬게 하리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최종 결과인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으로 우리가 충족될 때 우리의 인생의 삶의 갈증은 해소되고 우리의 존재는 생명과 하나님 본성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오늘 율법의 권능으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의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더욱 더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시기 소원하는 몸부림이 여러분 삶가운데 있어 성령님과 모두 동행하는 삶을 모두 사시길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교회를 낳으신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하)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우리가 주님의 ‘피와 살’인 말씀을 먹고 온전하게 소화시켜서 그것이 우리 영혼에 실질적인 영양분이 되고 참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우리 영혼을 건드려서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내 영혼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지 않으면, 생명수인 이 말씀을 전혀 깨달을 수가 없어 우리에게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성령님은 우리 처음과 나중 그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어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의 빛이 우리 영혼에 비춰져 생명이 될 수 있도록 그 말씀이 완전히 소화되고 우리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해 튼튼한 뼈와 피와 살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반드시 임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 곧 신의 성품을 소유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생수는 이처럼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 하는 생명 양식 만나>
출애굽기 16장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이것이 무엇이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서로 물어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만나를 세상에서 한번도 보거나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에는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만나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16장 23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라’고 합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서는 이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여러분!
아침에 이슬이 마른 후에 나타나는 이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늘고 또 깟씨와 같고 진주와 같은 모양이었고 그 맛은 기름 섞인 과자 맛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만나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 삶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자신이 멧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지는 듯한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맷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진다는 것은 완전히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만나를 불에 굽기도 하고 가마에 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선포하신 만나, 진리의 말씀은 자신이 으깨지고 갈라지고 찢어지고 구워지고 삶아짐으로써 만들어진 우리를 위한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양식이 되셔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으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진리의 양식을 우리가 정말 소홀이 대하고 헛되이 여겨서 결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루신 일은 말할 수 없이 가치가 있으며 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나타낸 일들은 나에게 진리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만나처럼 갈아지고 찧어져서 완전히 가루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6장 9절에 어린 아이가 가져온 음식, 그 아이 엄마가 아이를 위해서 특별히 먹기 좋은 크기로 친절하게 조각조각 내어 싸 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그것을 또 나누어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셨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잘 소화하여 영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갈아지고 빻아지고 부서지셨고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 감람나무 열매가 으깨지듯이 주님은 이렇게 조각조각 으깨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
또,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때림으로 그 반석이 쪼개져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도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고 있으며,
매맞아 쪼개진 그 반석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으깨지고 부서지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사건, 만나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지만, 반석이 쪼개지는 사건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보다 더 분명히 다가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 말씀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분명히 이 말씀에서는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는 말씀에 따라 반석을 치는 것이 옳습니다. 모세는 이때 반석을 처음 친 것이었습니다. 반석을 치는 행위는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 한 번 죽으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한 지 38년되는 해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가 두번째로 반석을 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20장 8절,11절 말씀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불순종에 화가 난 모세는 그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여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고 죽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사건입니다.
단 한 번의 죽음으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또 죽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일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행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몰라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요.
출애굽기 17장 6절에 등장하는 호렙산 반석은 얼마나 큰 반석이었을까요.
아마 어마 어마하게 거대한 반석이었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반석을 모세가 자신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힘차게 내리 쳤습니다.
그 반석을 왜 칩니까? 왜 때립니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셔서 그 곳에 있는 목마른 영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안에 있는 생명수를 주시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로 크게 매맞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예표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마가복음 9장과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이 변화산에 제자 3명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고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홍해를 가르는 이적 그리고 여러가지 놀라운 일들을 이 지팡이를 통해서 행했습니다. 지팡이는 율법을 집행하는 힘, 권능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집행하는 권능을 상징하는 이 모세의 지팡이가 그 율법을 근거로 갖는 엄청난 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버립니다.
한 나라에 속한 국민을 안정적이고 질서 있게 다스리기 위해서 법이 존재합니다. 이 법은 모든 국민에게 엄청난 권위를 갖고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어느 누가 그 법을 어겼을 때는 그 법을 근거로 재판장은 죄의 경중에 따라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립니다. 죄가 가벼우면 벌금형을 내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징역형, 죄가 아주 무거우면 사형을 명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법이 갖는 엄청난 권위와 막강한 힘 앞에서 그것을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형벌의 근거가 되기에 인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권위와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서도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율법의 권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벌의 근거가 되는 이 율법의 권능과 엄위함 앞에서 죄인들은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똑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가 그 권능의 지팡이로 반석을 때렸다는 것은 죄를 범한 우리를 대신하여 권능의 율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쳐서 깨뜨려 갈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에 그 몸이 매질 당해 찢어지고 갈라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율법 앞에서 우리 인간 모두가 매 맞아 깨어져 죽어야 하는데,
나를 사랑하여서 대신 율법의 지팡이로 심히 매질을 당하여 반석이 깨어지고 터지고 갈라진 그 모습을 이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빌라도의 사형 판결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과 모함으로 고소를 당하셔서 죽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그 권능의 힘인 율법에 의해서 매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 율법의 지팡이로 죽음과 사망을 당한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감격과 은혜를 주고 우리 마음을 이렇게 찔러 아프게 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몸을 율법에 팔아 넘기시고 그 대가로 우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몸으로 값을 치르고 대신 우리를 사셨습니까?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에 사로잡혀 죄의 포로가 된 우리는 율법의 권능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누구도 예외가 없는 권위가 있고 엄정함이 있습니다. 그 율법의 정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으로 죄의 포로가 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내어주어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죽음을 당함으로 율법에 사로잡힌 우리를, 흉악한 결박에 놓여 죽음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마귀에게 정죄 당하고 참소 당하여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몸을 값으로 지불하고 대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린 이 사실을 평생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에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것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
누가복음 23장 4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가 제 6시경이었는데 어두움이 온 땅을 제 구시까지 덮더라.”
여러분! 이 말씀에 커다란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기에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유대시간 6시는 우리나라의 정오 12시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유대인의 시간에 6시를 더하면 우리나라의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오 12시에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9시까지 임합니다. 우리나라 시간은 15시, 오후 3시입니다.
예수님은 그럼 몇 시에 십자가에 달렸을까요?
지금부터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된 유대 시간을 우리나라 시간으로 바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이 돼 있는데,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여러 가지 심문과 고초를 당하신 후에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제 12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덮었더라”
예수님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정오 12시쯤 되었을 때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전 9시부터 정오 12시까지 오전 3시간 동안의 얘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는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어난 사건,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십자가에 고난에 대해서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4절, 마태복음 27장 45절, 마가복음 15장 33절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6시간 중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써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상징하고 있는 모세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으셔서 고통 당하시고 죽어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선선하고 햇볕이 들어도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하루 중에서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때문에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무 그늘에서 쉴 정도로 그 태양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햇볕이 가장 뜨거워 힘든 시간,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골고다 그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권능으로 정죄 당해 매맞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권능, 그 앞에서 누구도 견딜 수 없어 처절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강력한 율법의 힘을 마귀가 교묘히 이용하여 우리를 고소하는 강력한 무기로 삼아서 그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여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신 율법으로 매 맞음을 당하여 결국 돌아가시는 모습을 성경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맞아 그 몸이 쪼개지시는 장면을 누가복음 23장 45절에는 성소의 휘장의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찢어져 우리를 낳은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여러분! 매 맞아 찢어지고 갈라지는 예수그리스도가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8절에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렇게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며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낳으시기 위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너무나도 강력한 율법의 힘에 의해서 모세로부터 매 맞음으로 고통 당하며 죽으신 것입니다.
시편 95편 1절에도 이 반석을 구원의 반석이라고 노래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율법의 권능을 가진 모세가 내리치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서 우리가 받아야할 징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 완전히 깨어지고 대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옆구리로 우리를 낳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외치자고 시편은 노래하고 있고 사무엘하 22장 47절에도 이 구원의 반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끊임없이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거대한 반석을 한 번 내리치니 그 거대한 반석이 쪼개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힘입니다.
누구도 그 율법에 사로잡히면 그 흉악한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자신이 쪼개짐 당함으로 그 흉악한 쇠사슬을 끊고 멍에를 꺾으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흉악한 쇠사슬에 결박당하고 멍에를 메셔서 깨어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 깨어짐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반석에 대해서 ‘나의 방패요, 피난처요, 요새요, 산성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32장 2절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여러분!
또 큰 바위 그늘 되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렬하는 태양, 그 12시부터 3시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서 견디어서 살 자가 없기 때문에, 그늘이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생명수가 되어 주시고 큰 바위 덩어리가 되어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족하며 휴식하며 안식하며 영원한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메마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미리 창세전부터 준비하여 기다리고 계셨던 이 바위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의 몸을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여 쪼개짐으로 쏟아져 나온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수, 이것은 보통 물과 다릅니다.
그 물은 영원한 생명수, 영원한 것입니다.
그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12시부터 3시까지 매맞아 고통 당하며 죽는 일,
그 작렬한 태양에서 그 모세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감당하신 그 분의 은혜 그리고 그 분을 그렇게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7장 37절, 38절 말씀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 생수가 성령을 가르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곁에 계셨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은 우리 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육체를 가진 우리를 성전 삼아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머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반석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물은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물과 같이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마른 광야에서 정말 심한 갈증을 느꼈을 때 매맞아 쪼개진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그들이 마시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목마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 곁에 반석으로 서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장막에서 살고 메마른 광야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하늘 만나와 그리고 그들의 갈증을 해결해 줄 생수가 항상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를 위해 매맞음을 당한 반석,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성전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섭섭하게 하거나 노엽게 하는 일들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마른 광야의 삶을 살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마름으로 인한 곤고한 삶을 너무나 잘 알고 필요할 때마다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주신 분이셨습니다.
때문에 성육신 하셔서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는 구속을 의미한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몸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물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물은 예수님의 그 쪼개진 몸을 통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물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성령님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6절에서 물과 피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우리는 이 신령한 음료들을 마시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작하면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10장 3절, 4절은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녔다고 나옵니다.
조금 전에 읽은 신명기 3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 그들을 계속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을 먼저 살피셔서 그들을 알맞은 곳에 머물게 하고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생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세밀한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고난 속에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구원계획을 이룸에 있어서 예수님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계셨을까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자가 되셔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 계획을 이루시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이는 낮에는 작렬하는 떼약볕 아래에서, 밤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창세부터 언제나 변함없이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반석의 모습에서 자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대하며 기다리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들이 마신 신령한 물이 그들을 따라다녔던 반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 긴 40년 동안의 메마른 땅, 광야 여행 속에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줄곧 낮이나 밤이나 추위에나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도자와 필요자가 되어서 그들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시부터 3시까지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그 죽으심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 성령님>
앞서 민수기 20장 11절에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 치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가 처음 반석을 친 곳은 호렙산이었고 두번째 반석을 친 곳은 가데스 바네아(거룩한 샘물)입니다.
처음 반석을 친 뒤로 38년 뒤에 두번째로 또 반석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38년이라는 광야의 긴 시간 속에서 반석 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한시도 떨어 지지 않고 그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낮이나 밤이나 더위나 추위 속에서 그렇게 수고하시고 정성을 다해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였고 가나안 땅에 열 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도 갈렙과 여호수와를 제외한 나머지 열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행위들을 광야 삶 내내 나타내었습니다.
모세가 내리 친 두 개의 반석이 있는 장소는 엘림(종려나무들)과 시내 광야 사이에 있는 신 광야(습지)를 기준으로 볼 때,
가데스 바네아가 신 광야 북쪽에 있고, 호렙산 반석은 신 광야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두 장소에서 모두 다툼이 있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라고 칭합니다.
이렇게 남쪽에 있는 호렙산에서 모세로부터 처음 매 맞음 당한 반석이 38년 뒤, 북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서도 또 나타나서 모세로부터 두번째 매 맞음을 당하는데,
이것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38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들의 잘못이 있음에도 계속 그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2000년 전에 계셨는데,
지금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이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했던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가 내일은 떠나서 안 계시고, 오늘 임재 했다가 내일 떠나시는 그런 성령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성령님을 잘못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역시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전까지 만해도 이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어떤 잘못을 하면 성령님께서 나를 떠나는 걸로 알고 정말 간절히 주님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역심을 품고 반역하지 않는 이상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부정함과 정결치 못한 일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일들이 얼굴에 수건이 덮여 있는 것처럼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면 우리는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소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부터 38년 뒤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기간까지 그들의 심령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고쳐지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요한복음 5장 5절에서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병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나 기간은 아무 의미 없이 임의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두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의 광야 삶 속에 나타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음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렙산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38년 동안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여 생명수를 공급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생명수가 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요청을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반석, 예수그리스도>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이 반석은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를 낳은 반석이십니다. 이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낳으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낳습니까? 아버지가 낳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아버지가 맞는 겁니다.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세 분 하나님 중에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만족을 주고, 힘을 주고, 피난처가 되시고, 또 소생시키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기 위해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 매 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내 동댕이 쳐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때,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으시는 예수님을 가까이할 수가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냥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하늘도 깜깜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하신 그분은 12시부터 3시까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내쳐짐을 당하고 로마 군병의 창에 의해서 그 옆구리가 찢어지고 갈라짐으로써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사랑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이처럼 하시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반석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까지 우리에게 생명수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그러한 고초를 당하신 겁니까?
여러분!
주님의 기이한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집을 만들기 위한 존귀한 건축 재료로 만드시기 위한 것 때문입니다.
건축 재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을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십자가의 잔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모든 것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로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되었던 것이며 제단 위에 자신을 올려 놓으신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동산은 자신이 제물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서 놓여 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불, 진노의 불이 율법을 어긴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한 예수님에게 쏟아진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그 제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삭처럼 제물로 놓여 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제물로서 불태워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수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속성들, 권능과 권위과 엄위하심 등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케 하기 위하여 고초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갈라지신 것입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때림을 당하시므로 그렇게 예수님의 몸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옆구리에서 생명수가 흘러내린 것입니다.
이 세 분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루신 사역의 결과가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우리 안에 계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성령님을 늘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부터 6절에서 모세의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을 당한 반석인 예수 그리스도가 쪼개지고 갈라지는 장면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신데, 성령과 함께 있는 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 우리를 또한 그분의 안식처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 그 율법의 힘에 의해서 처절하게 12시부터 3시까지 그분은 그 뜨거운 떼약볕 아래서 고초를 당하시고 매를 맞고 그대로 쪼개지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그 번제물 되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고 영원히 돌아가심으로 그 제물이 인류 전체를 모든 율법으로부터 또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다 편히 쉬게 하리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최종 결과인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으로 우리가 충족될 때 우리의 인생의 삶의 갈증은 해소되고 우리의 존재는 생명과 하나님 본성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오늘 율법의 권능으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의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더욱 더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시기 소원하는 몸부림이 여러분 삶가운데 있어 성령님과 모두 동행하는 삶을 모두 사시길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교회를 낳으신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하)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우리가 주님의 ‘피와 살’인 말씀을 먹고 온전하게 소화시켜서 그것이 우리 영혼에 실질적인 영양분이 되고 참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우리 영혼을 건드려서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내 영혼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지 않으면, 생명수인 이 말씀을 전혀 깨달을 수가 없어 우리에게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성령님은 우리 처음과 나중 그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어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의 빛이 우리 영혼에 비춰져 생명이 될 수 있도록 그 말씀이 완전히 소화되고 우리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해 튼튼한 뼈와 피와 살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반드시 임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 곧 신의 성품을 소유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생수는 이처럼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 하는 생명 양식 만나>
출애굽기 16장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이것이 무엇이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서로 물어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만나를 세상에서 한번도 보거나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에는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만나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16장 23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라’고 합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서는 이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여러분!
아침에 이슬이 마른 후에 나타나는 이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늘고 또 깟씨와 같고 진주와 같은 모양이었고 그 맛은 기름 섞인 과자 맛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만나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 삶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자신이 멧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지는 듯한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맷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진다는 것은 완전히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만나를 불에 굽기도 하고 가마에 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선포하신 만나, 진리의 말씀은 자신이 으깨지고 갈라지고 찢어지고 구워지고 삶아짐으로써 만들어진 우리를 위한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양식이 되셔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으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진리의 양식을 우리가 정말 소홀이 대하고 헛되이 여겨서 결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루신 일은 말할 수 없이 가치가 있으며 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나타낸 일들은 나에게 진리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만나처럼 갈아지고 찧어져서 완전히 가루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6장 9절에 어린 아이가 가져온 음식, 그 아이 엄마가 아이를 위해서 특별히 먹기 좋은 크기로 친절하게 조각조각 내어 싸 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그것을 또 나누어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셨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잘 소화하여 영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갈아지고 빻아지고 부서지셨고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 감람나무 열매가 으깨지듯이 주님은 이렇게 조각조각 으깨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
또,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때림으로 그 반석이 쪼개져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도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고 있으며,
매맞아 쪼개진 그 반석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으깨지고 부서지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사건, 만나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지만, 반석이 쪼개지는 사건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보다 더 분명히 다가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 말씀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분명히 이 말씀에서는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는 말씀에 따라 반석을 치는 것이 옳습니다. 모세는 이때 반석을 처음 친 것이었습니다. 반석을 치는 행위는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 한 번 죽으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한 지 38년되는 해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가 두번째로 반석을 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20장 8절,11절 말씀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불순종에 화가 난 모세는 그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여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고 죽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사건입니다.
단 한 번의 죽음으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또 죽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일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행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몰라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요.
출애굽기 17장 6절에 등장하는 호렙산 반석은 얼마나 큰 반석이었을까요.
아마 어마 어마하게 거대한 반석이었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반석을 모세가 자신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힘차게 내리 쳤습니다.
그 반석을 왜 칩니까? 왜 때립니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셔서 그 곳에 있는 목마른 영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안에 있는 생명수를 주시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로 크게 매맞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예표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마가복음 9장과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이 변화산에 제자 3명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고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홍해를 가르는 이적 그리고 여러가지 놀라운 일들을 이 지팡이를 통해서 행했습니다. 지팡이는 율법을 집행하는 힘, 권능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집행하는 권능을 상징하는 이 모세의 지팡이가 그 율법을 근거로 갖는 엄청난 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버립니다.
한 나라에 속한 국민을 안정적이고 질서 있게 다스리기 위해서 법이 존재합니다. 이 법은 모든 국민에게 엄청난 권위를 갖고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어느 누가 그 법을 어겼을 때는 그 법을 근거로 재판장은 죄의 경중에 따라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립니다. 죄가 가벼우면 벌금형을 내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징역형, 죄가 아주 무거우면 사형을 명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법이 갖는 엄청난 권위와 막강한 힘 앞에서 그것을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형벌의 근거가 되기에 인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권위와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서도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율법의 권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벌의 근거가 되는 이 율법의 권능과 엄위함 앞에서 죄인들은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똑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가 그 권능의 지팡이로 반석을 때렸다는 것은 죄를 범한 우리를 대신하여 권능의 율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쳐서 깨뜨려 갈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에 그 몸이 매질 당해 찢어지고 갈라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율법 앞에서 우리 인간 모두가 매 맞아 깨어져 죽어야 하는데,
나를 사랑하여서 대신 율법의 지팡이로 심히 매질을 당하여 반석이 깨어지고 터지고 갈라진 그 모습을 이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빌라도의 사형 판결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과 모함으로 고소를 당하셔서 죽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그 권능의 힘인 율법에 의해서 매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 율법의 지팡이로 죽음과 사망을 당한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감격과 은혜를 주고 우리 마음을 이렇게 찔러 아프게 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몸을 율법에 팔아 넘기시고 그 대가로 우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몸으로 값을 치르고 대신 우리를 사셨습니까?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에 사로잡혀 죄의 포로가 된 우리는 율법의 권능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누구도 예외가 없는 권위가 있고 엄정함이 있습니다. 그 율법의 정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으로 죄의 포로가 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내어주어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죽음을 당함으로 율법에 사로잡힌 우리를, 흉악한 결박에 놓여 죽음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마귀에게 정죄 당하고 참소 당하여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몸을 값으로 지불하고 대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린 이 사실을 평생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에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것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
누가복음 23장 4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가 제 6시경이었는데 어두움이 온 땅을 제 구시까지 덮더라.”
여러분! 이 말씀에 커다란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기에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유대시간 6시는 우리나라의 정오 12시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유대인의 시간에 6시를 더하면 우리나라의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오 12시에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9시까지 임합니다. 우리나라 시간은 15시, 오후 3시입니다.
예수님은 그럼 몇 시에 십자가에 달렸을까요?
지금부터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된 유대 시간을 우리나라 시간으로 바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이 돼 있는데,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여러 가지 심문과 고초를 당하신 후에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제 12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덮었더라”
예수님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정오 12시쯤 되었을 때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전 9시부터 정오 12시까지 오전 3시간 동안의 얘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는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어난 사건,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십자가에 고난에 대해서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4절, 마태복음 27장 45절, 마가복음 15장 33절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6시간 중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써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상징하고 있는 모세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으셔서 고통 당하시고 죽어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선선하고 햇볕이 들어도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하루 중에서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때문에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무 그늘에서 쉴 정도로 그 태양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햇볕이 가장 뜨거워 힘든 시간,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골고다 그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권능으로 정죄 당해 매맞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권능, 그 앞에서 누구도 견딜 수 없어 처절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강력한 율법의 힘을 마귀가 교묘히 이용하여 우리를 고소하는 강력한 무기로 삼아서 그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여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신 율법으로 매 맞음을 당하여 결국 돌아가시는 모습을 성경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맞아 그 몸이 쪼개지시는 장면을 누가복음 23장 45절에는 성소의 휘장의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찢어져 우리를 낳은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여러분! 매 맞아 찢어지고 갈라지는 예수그리스도가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8절에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렇게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며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낳으시기 위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너무나도 강력한 율법의 힘에 의해서 모세로부터 매 맞음으로 고통 당하며 죽으신 것입니다.
시편 95편 1절에도 이 반석을 구원의 반석이라고 노래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율법의 권능을 가진 모세가 내리치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서 우리가 받아야할 징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 완전히 깨어지고 대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옆구리로 우리를 낳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외치자고 시편은 노래하고 있고 사무엘하 22장 47절에도 이 구원의 반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끊임없이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거대한 반석을 한 번 내리치니 그 거대한 반석이 쪼개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힘입니다.
누구도 그 율법에 사로잡히면 그 흉악한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자신이 쪼개짐 당함으로 그 흉악한 쇠사슬을 끊고 멍에를 꺾으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흉악한 쇠사슬에 결박당하고 멍에를 메셔서 깨어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 깨어짐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반석에 대해서 ‘나의 방패요, 피난처요, 요새요, 산성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32장 2절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여러분!
또 큰 바위 그늘 되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렬하는 태양, 그 12시부터 3시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서 견디어서 살 자가 없기 때문에, 그늘이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생명수가 되어 주시고 큰 바위 덩어리가 되어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족하며 휴식하며 안식하며 영원한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메마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미리 창세전부터 준비하여 기다리고 계셨던 이 바위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의 몸을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여 쪼개짐으로 쏟아져 나온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수, 이것은 보통 물과 다릅니다.
그 물은 영원한 생명수, 영원한 것입니다.
그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12시부터 3시까지 매맞아 고통 당하며 죽는 일,
그 작렬한 태양에서 그 모세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감당하신 그 분의 은혜 그리고 그 분을 그렇게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7장 37절, 38절 말씀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 생수가 성령을 가르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곁에 계셨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은 우리 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육체를 가진 우리를 성전 삼아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머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반석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물은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물과 같이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마른 광야에서 정말 심한 갈증을 느꼈을 때 매맞아 쪼개진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그들이 마시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목마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 곁에 반석으로 서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장막에서 살고 메마른 광야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하늘 만나와 그리고 그들의 갈증을 해결해 줄 생수가 항상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를 위해 매맞음을 당한 반석,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성전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섭섭하게 하거나 노엽게 하는 일들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마른 광야의 삶을 살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마름으로 인한 곤고한 삶을 너무나 잘 알고 필요할 때마다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주신 분이셨습니다.
때문에 성육신 하셔서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는 구속을 의미한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몸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물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물은 예수님의 그 쪼개진 몸을 통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물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성령님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6절에서 물과 피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우리는 이 신령한 음료들을 마시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작하면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10장 3절, 4절은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녔다고 나옵니다.
조금 전에 읽은 신명기 3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 그들을 계속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을 먼저 살피셔서 그들을 알맞은 곳에 머물게 하고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생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세밀한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고난 속에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구원계획을 이룸에 있어서 예수님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계셨을까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자가 되셔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 계획을 이루시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이는 낮에는 작렬하는 떼약볕 아래에서, 밤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창세부터 언제나 변함없이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반석의 모습에서 자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대하며 기다리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들이 마신 신령한 물이 그들을 따라다녔던 반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 긴 40년 동안의 메마른 땅, 광야 여행 속에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줄곧 낮이나 밤이나 추위에나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도자와 필요자가 되어서 그들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시부터 3시까지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그 죽으심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 성령님>
앞서 민수기 20장 11절에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 치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가 처음 반석을 친 곳은 호렙산이었고 두번째 반석을 친 곳은 가데스 바네아(거룩한 샘물)입니다.
처음 반석을 친 뒤로 38년 뒤에 두번째로 또 반석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38년이라는 광야의 긴 시간 속에서 반석 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한시도 떨어 지지 않고 그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낮이나 밤이나 더위나 추위 속에서 그렇게 수고하시고 정성을 다해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였고 가나안 땅에 열 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도 갈렙과 여호수와를 제외한 나머지 열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행위들을 광야 삶 내내 나타내었습니다.
모세가 내리 친 두 개의 반석이 있는 장소는 엘림(종려나무들)과 시내 광야 사이에 있는 신 광야(습지)를 기준으로 볼 때,
가데스 바네아가 신 광야 북쪽에 있고, 호렙산 반석은 신 광야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두 장소에서 모두 다툼이 있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라고 칭합니다.
이렇게 남쪽에 있는 호렙산에서 모세로부터 처음 매 맞음 당한 반석이 38년 뒤, 북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서도 또 나타나서 모세로부터 두번째 매 맞음을 당하는데,
이것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38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들의 잘못이 있음에도 계속 그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2000년 전에 계셨는데,
지금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이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했던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가 내일은 떠나서 안 계시고, 오늘 임재 했다가 내일 떠나시는 그런 성령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성령님을 잘못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역시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전까지 만해도 이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어떤 잘못을 하면 성령님께서 나를 떠나는 걸로 알고 정말 간절히 주님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역심을 품고 반역하지 않는 이상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부정함과 정결치 못한 일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일들이 얼굴에 수건이 덮여 있는 것처럼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면 우리는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소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부터 38년 뒤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기간까지 그들의 심령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고쳐지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요한복음 5장 5절에서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병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나 기간은 아무 의미 없이 임의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두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의 광야 삶 속에 나타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음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렙산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38년 동안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여 생명수를 공급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생명수가 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요청을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반석, 예수그리스도>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이 반석은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를 낳은 반석이십니다. 이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낳으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낳습니까? 아버지가 낳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아버지가 맞는 겁니다.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세 분 하나님 중에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만족을 주고, 힘을 주고, 피난처가 되시고, 또 소생시키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기 위해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 매 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내 동댕이 쳐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때,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으시는 예수님을 가까이할 수가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냥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하늘도 깜깜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하신 그분은 12시부터 3시까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내쳐짐을 당하고 로마 군병의 창에 의해서 그 옆구리가 찢어지고 갈라짐으로써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사랑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이처럼 하시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반석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까지 우리에게 생명수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그러한 고초를 당하신 겁니까?
여러분!
주님의 기이한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집을 만들기 위한 존귀한 건축 재료로 만드시기 위한 것 때문입니다.
건축 재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을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십자가의 잔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모든 것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로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되었던 것이며 제단 위에 자신을 올려 놓으신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동산은 자신이 제물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서 놓여 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불, 진노의 불이 율법을 어긴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한 예수님에게 쏟아진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그 제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삭처럼 제물로 놓여 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제물로서 불태워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수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속성들, 권능과 권위과 엄위하심 등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케 하기 위하여 고초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갈라지신 것입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때림을 당하시므로 그렇게 예수님의 몸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옆구리에서 생명수가 흘러내린 것입니다.
이 세 분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루신 사역의 결과가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우리 안에 계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성령님을 늘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부터 6절에서 모세의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을 당한 반석인 예수 그리스도가 쪼개지고 갈라지는 장면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신데, 성령과 함께 있는 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 우리를 또한 그분의 안식처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 그 율법의 힘에 의해서 처절하게 12시부터 3시까지 그분은 그 뜨거운 떼약볕 아래서 고초를 당하시고 매를 맞고 그대로 쪼개지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그 번제물 되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고 영원히 돌아가심으로 그 제물이 인류 전체를 모든 율법으로부터 또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다 편히 쉬게 하리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최종 결과인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으로 우리가 충족될 때 우리의 인생의 삶의 갈증은 해소되고 우리의 존재는 생명과 하나님 본성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오늘 율법의 권능으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의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더욱 더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시기 소원하는 몸부림이 여러분 삶가운데 있어 성령님과 모두 동행하는 삶을 모두 사시길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교회를 낳으신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하)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출애굽기 16장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이것이 무엇이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서로 물어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만나를 세상에서 한번도 보거나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에는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만나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16장 23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으라’고 합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서는 이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여러분!
아침에 이슬이 마른 후에 나타나는 이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늘고 또 깟씨와 같고 진주와 같은 모양이었고 그 맛은 기름 섞인 과자 맛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만나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 삶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자신이 멧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지는 듯한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맷돌에 갈려지고 절구에 찧어진다는 것은 완전히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만나를 불에 굽기도 하고 가마에 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선포하신 만나, 진리의 말씀은 자신이 으깨지고 갈라지고 찢어지고 구워지고 삶아짐으로써 만들어진 우리를 위한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양식이 되셔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으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진리의 양식을 우리가 정말 소홀이 대하고 헛되이 여겨서 결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루신 일은 말할 수 없이 가치가 있으며 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나타낸 일들은 나에게 진리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만나처럼 갈아지고 찧어져서 완전히 가루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6장 9절에 어린 아이가 가져온 음식, 그 아이 엄마가 아이를 위해서 특별히 먹기 좋은 크기로 친절하게 조각조각 내어 싸 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그것을 또 나누어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셨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잘 소화하여 영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갈아지고 빻아지고 부서지셨고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 감람나무 열매가 으깨지듯이 주님은 이렇게 조각조각 으깨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
또,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때림으로 그 반석이 쪼개져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도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고 있으며,
매맞아 쪼개진 그 반석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으깨지고 부서지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사건, 만나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지만, 반석이 쪼개지는 사건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보다 더 분명히 다가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 말씀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분명히 이 말씀에서는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는 말씀에 따라 반석을 치는 것이 옳습니다. 모세는 이때 반석을 처음 친 것이었습니다. 반석을 치는 행위는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 한 번 죽으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한 지 38년되는 해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가 두번째로 반석을 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20장 8절,11절 말씀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불순종에 화가 난 모세는 그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여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고 죽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사건입니다.
단 한 번의 죽음으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또 죽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일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행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몰라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요.
출애굽기 17장 6절에 등장하는 호렙산 반석은 얼마나 큰 반석이었을까요.
아마 어마 어마하게 거대한 반석이었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반석을 모세가 자신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힘차게 내리 쳤습니다.
그 반석을 왜 칩니까? 왜 때립니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셔서 그 곳에 있는 목마른 영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안에 있는 생명수를 주시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로 크게 매맞음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예표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마가복음 9장과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이 변화산에 제자 3명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고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홍해를 가르는 이적 그리고 여러가지 놀라운 일들을 이 지팡이를 통해서 행했습니다. 지팡이는 율법을 집행하는 힘, 권능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집행하는 권능을 상징하는 이 모세의 지팡이가 그 율법을 근거로 갖는 엄청난 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버립니다.
한 나라에 속한 국민을 안정적이고 질서 있게 다스리기 위해서 법이 존재합니다. 이 법은 모든 국민에게 엄청난 권위를 갖고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어느 누가 그 법을 어겼을 때는 그 법을 근거로 재판장은 죄의 경중에 따라 그에 맞는 형벌을 내립니다. 죄가 가벼우면 벌금형을 내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징역형, 죄가 아주 무거우면 사형을 명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법이 갖는 엄청난 권위와 막강한 힘 앞에서 그것을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형벌의 근거가 되기에 인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권위와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서도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율법의 권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벌의 근거가 되는 이 율법의 권능과 엄위함 앞에서 죄인들은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똑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가 그 권능의 지팡이로 반석을 때렸다는 것은 죄를 범한 우리를 대신하여 권능의 율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쳐서 깨뜨려 갈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에 그 몸이 매질 당해 찢어지고 갈라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율법 앞에서 우리 인간 모두가 매 맞아 깨어져 죽어야 하는데,
나를 사랑하여서 대신 율법의 지팡이로 심히 매질을 당하여 반석이 깨어지고 터지고 갈라진 그 모습을 이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빌라도의 사형 판결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과 모함으로 고소를 당하셔서 죽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그 권능의 힘인 율법에 의해서 매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 율법의 지팡이로 죽음과 사망을 당한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감격과 은혜를 주고 우리 마음을 이렇게 찔러 아프게 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몸을 율법에 팔아 넘기시고 그 대가로 우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몸으로 값을 치르고 대신 우리를 사셨습니까?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에 사로잡혀 죄의 포로가 된 우리는 율법의 권능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누구도 거스릴 수 없고 누구도 예외가 없는 권위가 있고 엄정함이 있습니다. 그 율법의 정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으로 죄의 포로가 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내어주어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죽음을 당함으로 율법에 사로잡힌 우리를, 흉악한 결박에 놓여 죽음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마귀에게 정죄 당하고 참소 당하여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몸을 값으로 지불하고 대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린 이 사실을 평생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에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것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
누가복음 23장 4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가 제 6시경이었는데 어두움이 온 땅을 제 구시까지 덮더라.”
여러분! 이 말씀에 커다란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기에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유대시간 6시는 우리나라의 정오 12시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유대인의 시간에 6시를 더하면 우리나라의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오 12시에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 어둠이 9시까지 임합니다. 우리나라 시간은 15시, 오후 3시입니다.
예수님은 그럼 몇 시에 십자가에 달렸을까요?
지금부터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된 유대 시간을 우리나라 시간으로 바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이 돼 있는데,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여러 가지 심문과 고초를 당하신 후에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제 12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덮었더라”
예수님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정오 12시쯤 되었을 때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전 9시부터 정오 12시까지 오전 3시간 동안의 얘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는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어난 사건,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십자가에 고난에 대해서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4절, 마태복음 27장 45절, 마가복음 15장 33절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6시간 중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써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상징하고 있는 모세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맞으셔서 고통 당하시고 죽어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선선하고 햇볕이 들어도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하루 중에서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때문에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무 그늘에서 쉴 정도로 그 태양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햇볕이 가장 뜨거워 힘든 시간,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골고다 그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권능으로 정죄 당해 매맞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권능, 그 앞에서 누구도 견딜 수 없어 처절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그 강력한 율법의 힘을 마귀가 교묘히 이용하여 우리를 고소하는 강력한 무기로 삼아서 그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여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신 율법으로 매 맞음을 당하여 결국 돌아가시는 모습을 성경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맞아 그 몸이 쪼개지시는 장면을 누가복음 23장 45절에는 성소의 휘장의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아 찢어져 우리를 낳은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여러분! 매 맞아 찢어지고 갈라지는 예수그리스도가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8절에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렇게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며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낳으시기 위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너무나도 강력한 율법의 힘에 의해서 모세로부터 매 맞음으로 고통 당하며 죽으신 것입니다.
시편 95편 1절에도 이 반석을 구원의 반석이라고 노래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율법의 권능을 가진 모세가 내리치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서 우리가 받아야할 징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 완전히 깨어지고 대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옆구리로 우리를 낳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외치자고 시편은 노래하고 있고 사무엘하 22장 47절에도 이 구원의 반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끊임없이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거대한 반석을 한 번 내리치니 그 거대한 반석이 쪼개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힘입니다.
누구도 그 율법에 사로잡히면 그 흉악한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자신이 쪼개짐 당함으로 그 흉악한 쇠사슬을 끊고 멍에를 꺾으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흉악한 쇠사슬에 결박당하고 멍에를 메셔서 깨어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 깨어짐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반석에 대해서 ‘나의 방패요, 피난처요, 요새요, 산성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32장 2절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여러분!
또 큰 바위 그늘 되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렬하는 태양, 그 12시부터 3시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서 견디어서 살 자가 없기 때문에, 그늘이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생명수가 되어 주시고 큰 바위 덩어리가 되어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족하며 휴식하며 안식하며 영원한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메마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미리 창세전부터 준비하여 기다리고 계셨던 이 바위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의 몸을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여 쪼개짐으로 쏟아져 나온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수, 이것은 보통 물과 다릅니다.
그 물은 영원한 생명수, 영원한 것입니다.
그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12시부터 3시까지 매맞아 고통 당하며 죽는 일,
그 작렬한 태양에서 그 모세의 지팡이로 매맞음 당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감당하신 그 분의 은혜 그리고 그 분을 그렇게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7장 37절, 38절 말씀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 생수가 성령을 가르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곁에 계셨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은 우리 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육체를 가진 우리를 성전 삼아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 머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반석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물은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물과 같이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마른 광야에서 정말 심한 갈증을 느꼈을 때 매맞아 쪼개진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그들이 마시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목마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 곁에 반석으로 서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장막에서 살고 메마른 광야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하늘 만나와 그리고 그들의 갈증을 해결해 줄 생수가 항상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를 위해 매맞음을 당한 반석,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성전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섭섭하게 하거나 노엽게 하는 일들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마른 광야의 삶을 살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마름으로 인한 곤고한 삶을 너무나 잘 알고 필요할 때마다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주신 분이셨습니다.
때문에 성육신 하셔서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는 구속을 의미한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몸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물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물은 예수님의 그 쪼개진 몸을 통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물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성령님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6절에서 물과 피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우리는 이 신령한 음료들을 마시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작하면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10장 3절, 4절은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녔다고 나옵니다.
조금 전에 읽은 신명기 3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반석,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 그들을 계속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을 먼저 살피셔서 그들을 알맞은 곳에 머물게 하고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생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세밀한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고난 속에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구원계획을 이룸에 있어서 예수님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계셨을까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자가 되셔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 계획을 이루시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이는 낮에는 작렬하는 떼약볕 아래에서, 밤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창세부터 언제나 변함없이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반석의 모습에서 자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대하며 기다리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들이 마신 신령한 물이 그들을 따라다녔던 반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그 긴 40년 동안의 메마른 땅, 광야 여행 속에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줄곧 낮이나 밤이나 추위에나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도자와 필요자가 되어서 그들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시부터 3시까지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그 죽으심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 성령님>
앞서 민수기 20장 11절에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 치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가 처음 반석을 친 곳은 호렙산이었고 두번째 반석을 친 곳은 가데스 바네아(거룩한 샘물)입니다.
처음 반석을 친 뒤로 38년 뒤에 두번째로 또 반석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38년이라는 광야의 긴 시간 속에서 반석 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한시도 떨어 지지 않고 그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낮이나 밤이나 더위나 추위 속에서 그렇게 수고하시고 정성을 다해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였고 가나안 땅에 열 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도 갈렙과 여호수와를 제외한 나머지 열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행위들을 광야 삶 내내 나타내었습니다.
모세가 내리 친 두 개의 반석이 있는 장소는 엘림(종려나무들)과 시내 광야 사이에 있는 신 광야(습지)를 기준으로 볼 때,
가데스 바네아가 신 광야 북쪽에 있고, 호렙산 반석은 신 광야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두 장소에서 모두 다툼이 있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라고 칭합니다.
이렇게 남쪽에 있는 호렙산에서 모세로부터 처음 매 맞음 당한 반석이 38년 뒤, 북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서도 또 나타나서 모세로부터 두번째 매 맞음을 당하는데,
이것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38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들의 잘못이 있음에도 계속 그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2000년 전에 계셨는데,
지금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이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했던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가 내일은 떠나서 안 계시고, 오늘 임재 했다가 내일 떠나시는 그런 성령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성령님을 잘못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역시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전까지 만해도 이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어떤 잘못을 하면 성령님께서 나를 떠나는 걸로 알고 정말 간절히 주님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역심을 품고 반역하지 않는 이상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부정함과 정결치 못한 일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일들이 얼굴에 수건이 덮여 있는 것처럼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면 우리는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소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부터 38년 뒤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기간까지 그들의 심령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고쳐지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요한복음 5장 5절에서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병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나 기간은 아무 의미 없이 임의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두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의 광야 삶 속에 나타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음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렙산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38년 동안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여 생명수를 공급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생명수가 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요청을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반석, 예수그리스도>
신명기 32장 18절에서 이 반석은 우리를 낳은 반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를 낳은 반석이십니다. 이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낳으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낳습니까? 아버지가 낳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아버지가 맞는 겁니다.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세 분 하나님 중에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만족을 주고, 힘을 주고, 피난처가 되시고, 또 소생시키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기 위해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 매 맞음을 당한 것입니다. 내 동댕이 쳐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때,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으시는 예수님을 가까이할 수가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냥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하늘도 깜깜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하신 그분은 12시부터 3시까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내쳐짐을 당하고 로마 군병의 창에 의해서 그 옆구리가 찢어지고 갈라짐으로써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사랑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이처럼 하시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반석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까지 우리에게 생명수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그러한 고초를 당하신 겁니까?
여러분!
주님의 기이한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집을 만들기 위한 존귀한 건축 재료로 만드시기 위한 것 때문입니다.
건축 재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을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십자가의 잔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모든 것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로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되었던 것이며 제단 위에 자신을 올려 놓으신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동산은 자신이 제물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서 놓여 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불, 진노의 불이 율법을 어긴 모든 인간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그 죄를 담당한 예수님에게 쏟아진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그 제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삭처럼 제물로 놓여 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제물로서 불태워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수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속성들, 권능과 권위과 엄위하심 등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케 하기 위하여 고초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갈라지신 것입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때림을 당하시므로 그렇게 예수님의 몸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옆구리에서 생명수가 흘러내린 것입니다.
이 세 분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루신 사역의 결과가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우리 안에 계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성령님을 늘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절부터 6절에서 모세의 율법의 지팡이로 매맞음을 당한 반석인 예수 그리스도가 쪼개지고 갈라지는 장면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낳으신 반석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신데, 성령과 함께 있는 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 우리를 또한 그분의 안식처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 그 율법의 힘에 의해서 처절하게 12시부터 3시까지 그분은 그 뜨거운 떼약볕 아래서 고초를 당하시고 매를 맞고 그대로 쪼개지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그 번제물 되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고 영원히 돌아가심으로 그 제물이 인류 전체를 모든 율법으로부터 또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다 편히 쉬게 하리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최종 결과인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으로 우리가 충족될 때 우리의 인생의 삶의 갈증은 해소되고 우리의 존재는 생명과 하나님 본성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오늘 율법의 권능으로 매맞음 당한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의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더욱 더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시기 소원하는 몸부림이 여러분 삶가운데 있어 성령님과 모두 동행하는 삶을 모두 사시길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므로 교회를 낳으신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하)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말씀 나눔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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