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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기 26장 성소제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전편)
    말씀 나눔방 2023. 9. 6. 16:41

    말씀 : 박찬덕 선교사

     

    말씀주제: 성소제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방식과 성경속에 나타난 숫자의 비밀 (전편)

     

    오늘은 성소제도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대해서 말씀교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 감에 있어 연약하고 부족해서 실수하고 잠시 넘어지고 실패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긍휼한 마음으로 이해하시고 생각하여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참으로 너그러우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과 같지 않고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한없이 넓으신 분이십니다. 물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와 그 기다림과 오래 참으심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사울 왕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 그의 왕위를 폐위하는 결정을 하였을지라도,

    사울 왕이 23년의 긴 세월 동안 회개하여 자숙하는 기간을 가졌더라면 혹 왕의 자리에서는 그가 물러났을지라도 그와 그의 가족들의 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만 세상 욕심으로 인하여 그것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참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하기도 하면서 착잡하기도 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 영원한 시간을 살수 있는 그 23년의 기간 동안에 사울 왕은 제대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해서 결국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이 사울의 삶을 거울삼아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으나 그 끝은 저주로 마감한 사울과 같은 자도 있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서 순종한 삶을 보낸 많은 선진자들의 믿음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은혜 가운데 선택하셨습니다.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신 다음에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 하란 땅을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많은 섭리와 간섭이 아브라함의 여정 가운데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똑같이 우리의 삶에도 개입하고 간섭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서 하나님의 섭리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있을 뿐, 오히려 우리에게 아브라함 보다도 더 많은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생각들과 좋은 계획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그만 자의적인 뜻을 좇아 임의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아 그 왕의 자리에서 폐위될 것이라는 통보를 제사장으로부터 들은 것처럼 아브라함 에게도 똑같은 시험의 기간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똑같이 시험의 기간들이 있었으나 알지 못하고 지나간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씨를 주신다고 하셨지만, 오랜 세월 25년이 되기까지 언약의 씨 이삭을 주지를 않으셨습니다.

     

    1년을 기다리고 5년을 기다리고 10년을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에게 후손을 주어서 그 후손을 통해서 왕들이 나오고 또 그 후손을 하늘의 뭇별들처럼 많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도무지 징조가 안보이는 겁니다.

     

    엘리야가 북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일곱 번째에 이르러 손바닥 만한 회색 구름이 보였는데 그전까지는 동전 만한 것이라도 보여야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여섯 번째 까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려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기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넘어지는 행동을 보입니다.

     

    애굽에서 바로 왕이 준 여종 하갈을 통해서 후사를 이으라는 자신의 아내 사라의 권고를 듣고 후사를 얻기 위해서 그를 취해 이스마엘을 낳은 일은 그동안 애타고 다급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의한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종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내 사라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준행하지 않고, 인간적인생각과 타협한 편법으로 언약의 후사를 이으려 했던 아브라함의 그 행동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13년 동안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자숙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말씀이 창세기 16장부터 17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6장에는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취하여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라함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고 할례언약을 맺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준행하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13년 동안의 자숙기간을 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수했고 실패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시켜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애굽의 왕자라는 신분과 권세를 이용해서 동족을 구원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구원 방법이었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얘기하는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면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다가 실수하고 헤매고 방황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유리하고 방랑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의 방식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에는 공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수학공식처럼 공식이 있습니다.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고 과정과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인간적인 생각과 뜻을 좇아서 일을 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좇아서 행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3)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했지만 자신의 뜻으로 행한 그들은 결국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교회 가운데 거의가 추풍낙엽처럼 구원을 받지 못하고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라가라” 라고 통보를 받고 하나님의 의해 내쳐질 것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성소제도를 준 것입니다.

     

    구약의 성소제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그렇게 행하면 되겠지’라는 자신의 임의적인 방식으로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미디안 광야 40년이라는 자숙기간, 연단기간을 주십니다.

     

    여러분!

     

    그는 자숙기간이 주어졌을 때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은혜를 갈구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도 또한 광야 생활을 일정기간 했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1: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하면서 계속 불신과 불평의 삶을 사는 그들을,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한 그들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리 방랑하게 만듭니다.

     

    그 기간은 자신에게 있는 잘못된 원망과 불평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갈렙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민수기 14장 34절 말씀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들어가 살게 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쫓아 섬기게 되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모두 멸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패역한 죄로 멸절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남유다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한 눈으로 보아주셔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 끌려간 자들이 그곳에서 자숙기간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또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다니엘을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존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배려로 그들이 그곳에서 70년 동안 은혜의 집행유예 시간을 갖습니다.

     

    겉으로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징벌의 집행유예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있는 은혜의 시간들입니다.

     

    그곳에서 70년동안 자숙기간을 보내면서 그냥 시간만 보냈습니까? 아닙니다.

     

    바벨론 왕이 두라평지에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사람들에게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목숨을 바쳐 계명을 지킨 믿음을 하나님 앞에 보임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주어진 70년의 자숙기간이 온전히 지켜졌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에 대해서 예레미야 25장 11절~12절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식 대로 믿으면 구원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어렵고 난해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알고 나면, 그 어려운 것이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놀라운 일이 되는데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서 그 일을 도모하시고 행하셔서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한, 구원의 단계에 대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청사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각자의 맡은 바 직무를 온전히 함으로써 우리에게 온전한 주님의 생명을, 주님의 구원을, 영생을 허락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시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구원하시는 지를 알지 못하면 굉장히 어려움 당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3절,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제가 며칠 전에 바벨탑 얘기를 했습니다.

    홍수를 두려워하여 바벨탑을 높게 쌓은 인간들은 무지개를 주신 하나님의 그 온전한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노아 홍수 후에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신 것은 사실은 우리 인간을 안심시키고 위로 하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 자신이 그 무지개를 볼 때 그 약속을 기억하려는 징표였습니다.

     

    무지개의 원어의 뜻은 ‘활’(קֶשֶׁת qesheth)입니다.

    ‘활’은 전쟁에서 대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사용하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무지개가 뜨는 것을 볼 때, 홍수를 통한 인간의 멸망을 보고 마음 아파하시면서 괴로워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치명적인 공격용 활과 같은 방법, 홍수로는 인간을 다시는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자신에게 한 영원한 다짐인 것입니다.

     

    홍수 이후 인간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홍수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해보고자 자신들이 탑을 쌓고 성을 높이 건축을 합니다.

     

    그때 깜짝 놀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도모하는 일을 가까이 보기 위해서 친히 내려오시는 장면이 있듯이,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3절에서 세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 지를 이 복음의 청사진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얻는 복음에는 그 단계와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택함입니다.

    누가 우리를 택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그리고 ‘거룩’입니다.

    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까?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정확하게 분별해서 질서 있게 얘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이 진리가 되어서 세상에 성육신 하심으로 그 진리를 보여주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진리가 무엇인지, 참 생명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일을 하셨고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고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할 때, 항상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나 더 확실하게 올바른 우리의 고백은 진리 되시는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성령님이 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지만,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영혼에 능력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전기의 힘으로 밝은 빛을 만들고 또 열을 발생시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이 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세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데, 세상에 살고 있고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나마 보여줄 수 있는 복음의 청사진으로 복음의 단계, 복음의 질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에 대한 말씀 고린도전서 6장 1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씻는 일과 거룩하게 함과 의롭게 하시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하고 계십니다.

     

    이 씻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려면 성소제도를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모든 죄악을 씻는 일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곧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일은 성소 뜰을 지나 회막 문을 들어가면, 성소가 나타나는데 왼쪽에는 일곱 금 촛대가 있고, 오른쪽에는 열두 개의 떡을 진설하는 떡상이 있고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 앞에 분향단이 놓여 있어 향을 피웁니다. 이곳 성소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씻는 일, 곧 성소 뜰 번제단에서 대속제물 짐승을 잡아 자신의 죄를 씻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속죄에만 멈춰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구원의 방식은 수학공식처럼 아직 거쳐야할 단계와 과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소 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번제단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번제단을 포함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안에도 세가지가 있고 지성소 안에도 세가지가 있습니다.

     

    셋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룸에 있어 우리를 먼저 씻기고 거룩하게 하고 의롭게 하여 주셔서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흠과 점이 없이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설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계명 앞에 온전히 설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명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덮는 뚜껑을 만들어 덮었는데 그곳이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뜻으로 시은좌(施恩座)라고 불렸으며, 또 죄를 속죄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속죄소(贖罪所)라고도 불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정말 살수가 없습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법궤와 더불어 우리를 은혜 가운데 보호해 주시는 시은좌(施恩座)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은좌를 두 그룹천사가 날개로 덮고 있고 얼굴은 시은좌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오묘하고 신비하고 놀랍고 그 지혜와 지식을 도무지 알 길이 없어서 두 그룹 천사가 경이로움과 두려운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천사는 인간을 구원하는 도(道)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4절~5절에 따르면 그 지성소에는 법궤와 시은좌와 금 향로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구원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야 된다고 반복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대로 하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7:21~23)

     

    이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헌금도 하고 기도도 하고 또 예수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했는데 주님은 왜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라고 묻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제시해준 방식대로 구원의 도를 이루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문제를 중심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 말씀을 개역개정 성경과 한글 KJV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개역개정)

     

    “그러나 너희는 그 분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한글 KJV)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의 청사진을 보여준 지혜와 지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지도가 만들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구원의 과정을 나열하였는데, 이것은 성소제도가 말하고 있는 구원 과정과는 반대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지성소를 먼저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되십니다. 이는 지성소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성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이것은 성소 뜰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신 일, 마치 애굽에서 탈출시켜 홍해를 건너게 하셔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는 것처럼, 구원의 과정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에 따른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수많은 숫자들이 나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 열둘이라는 숫자, 이십사 장로에 대한 얘기, 열두 진주대문, 엘리야가 일곱 번 기도했을 때 손바닥 만한 구름이 나타난 얘기가 있고,

    이외에도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못한 벧엘 땅의 부모들의 영향으로 어린아이들이 엘리사에게 “대머리야 올라가라, 대머리야 올라가라”라고 승천에 대해 조롱했을 때, 엘리사의 저주로 암곰 두 마리가 나와서 그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이는 사건에도 숫자 42가 나옵니다. (왕하 2:23~24)

     

    또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온 집안을 멸망시키라는 선지자 엘리사의 명령을 받은 예후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의 형제 42명을 죽인 사건에서도 숫자 42가 나옵니다. (왕하 10:14)

     

    예수님께서 사흘째 되던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여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요 2:1)

     

    그런데, 성경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가나의 혼인 잔치가 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완전케 한다는 의미로 숫자 셋을 사용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의 대한 이야기, 복음에 대한 이야기, 성소제도에 있어서 셋이라는 숫자를 예의주시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3+4입니다.

    숫자 4는 인간에 대한 숫자이고 숫자 3은 하나님의 대한 숫자입니다. 진리가 하나로 완전히 한그릇에 담겨있는 것처럼 연합되어진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세 단계를 거쳐서 진리와 말씀과 복음을 완전케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고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셈과 함과 야벳 3명입니다. 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의 친구 역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명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의인을 언급할 때도 노아와 욥과 다니엘이 있을 지라도 그들, 의인들만 구원을 받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4:14)

     

    여러분!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제일 먼저 성령님께 이끌리셔서 의도적으로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하시는데, 이 때도 세가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토요일 되기 조금 전인 금요일날 해지기 전에 돌아가셔서 시간 상으로는 삼일, 72시간이 안되지만, 날짜로 계산하여 일요일 3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기에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숫자 3은 하나님의 진리의 숫자이며 인간의 숫자 4는 진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는 고통과 시련의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온전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로 나타난 고통과 시련을 반드시 거쳐야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에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통의 숫자 4는 인간이 살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득을 얻고 또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발견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숫자 4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험과 시련의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바다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예수님이 신적인 능력을 지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을 깨닫고서 정말 구원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이 무엇인지를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나 그 모든 것을 하늘에 다 두고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 분이 바다 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모든 이적들은 하나님 앞에 보이셨던 충실한 믿음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 믿음은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런 이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죄를 이길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생활을 40년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숫자 3과 인간의 숫자 4가 연합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고통과 시련을 더할 때 숫자 7이 나오지만, 이 숫자 3에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하게 이루는 일에 있어서 넷을 곱하면 12라는 숫자가 됩니다.

     

    먼저는 더했지만 이제는 곱해서 열둘이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였고 또 예수님의 제자도 열두 사도였으며 새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열두 진주 대문도 숫자 열둘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받음에 있어서 계속 시련 당하고 고통 당하고 많은 문제 속에서 아파하고 가슴을 찢는 일이 생기고 얻어맞고 또 터지고 하는 일이 네 번 꼭 네 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이 정결해지고 성화되고 진리를 아는 일에 있어서 불순물이 생기지 않고 온전한 연단 된 믿음, 곧 풀무불이나 용광로에 들어가서 깨끗해지는 순수한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숫자 12는 완성의 숫자이며 숫자 7은 완전을 의미합니다. 서로 다릅니다. 열둘은 완성된 것으로 더 확실한 것입니다.

     

    계시록 7장 1절에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에서 부는 바람을 붙잡아 그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전쟁과 기근과 여러 가지 천재지변, 기후변화, 온역, 난리 등 수많은 일들, 인간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기이한 현상들을 바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 바람을 지금 네 명의 천사가 대표가 되어서 붙잡고 있습니다.

     

    주께서 천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바람을 꼭 붙잡고 있어라” 지금 그 바람을 놓게 되면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마지막이 가까워지기에 조금 더 지체되도록 “사방 바람을 붙잡아라 붙잡아라” 라고 간곡하게 얘기하고 있고 천사들은 지금 그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주의 백성들이 시련과 연단과 시험들을 통해서 완전케 되어야 하는데,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해지는 자들이 생길 때까지, 완성될 때까지 사방 바람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해진 자들의 숫자, 12ⅹ12ⅹ1,000 = 144,000 명이 채워져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참여해 하나님의 잃어버린 그 명예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사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여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주어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순종한 자와 같지 않고 오직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만드는 꿈을 이루셔야 하는데, 하나님의 꿈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만들어 인치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얼마나 애타시겠습니까?

     

    얼마나 노심초사하시고 얼마나 우리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이 숫자가 정확히 십사만 사천 명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떤 상징성이 있어서 그 이상의 숫자가 될지는 주님께서만 아시는 일입니다만, 여러분들이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꾸 스스로를 격하시켜서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디셉사람 엘리야를 보십시요. 또 시골에서 태어난 침례 요한을 보십시요. 목동생활을 했던 다윗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휼륭하게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원래부터 예정해서미리 택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럼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은 사울은 그렇게 버림받도록 예정되었을까요?

     

    가룟 유다는 그렇게 버림받도록 예정되었나요? 에서는 그렇게 버림받도록 예정되었나요?

     

    아닙니다. 결과가 그렇게 되다 보니, ‘내가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전적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차라리 재앙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구원을 얻었을 지도 모르는데 귀가 막히고 눈이 닫혀 졌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사만 사천 명 중 한 명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짓밟히고 실추되고 훼손되고 정말 하찮게 여겨지는 일들이 이 세상 가운데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시고 두려운 영광의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삶과 말씀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세상에 올바로 알려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소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진행되는 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제의 말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 다음 교제시간에 하나님의 성소제도에 관한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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