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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기22:21~27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우리가 해야할일
    말씀 나눔방 2023. 8. 28. 18:57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말씀 : 에베소서 2장 12절, 19절

    말씀주제 : 하나님 없이 사는 가난한 자들 위해서 해야 할 일

     

    하늘소리 선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들, 봉사자님들 그리고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우리 선교사님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난 지 38년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제 믿음의 경험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들, 곧 가난한 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말씀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에베소서 2장 12절과 19절 말씀입니다.

     

    먼저 2장 12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할렐루야!

    38년 전에 제가 국내 유치장 선교를 처음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 많은 제소자들과 많은 불우한 자들과 고아들, 어린아이들, 과부들과 관계를 가졌었습니다.

     

    어제 우리 하늘소리 선교회 봉사자 한 분이 저와 통화하면서 말하기를

    “선교사님이 20년 전쯤 선교회를 운영하고 있었을 때, 어떤 분이 궁금해서 선교사님 곁에는 왜 혼자 사는 여자분들이 많이 따라다니냐고 물어봤던 것을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때는 정말 혼자 사시는 분들이 제 곁에 많이 있었다는 기억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있으신 분들은 아무래도 저와 같이 선교활동을 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제약이 있기 때문에 혼자 사시는 권사님들, 전도사님들, 집사님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고 그리고 함께 참여하여 봉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소자들의 가족 가운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어르신들, 어린아이들을 돌봐 달라는 요청을 있어서 이들을 섬기는 쉼터 나눔의 집을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쉼터 나눔의 집을 설립하고 처음에는 17명 정도로 시작했습니다.

     

    15년 전쯤 그곳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그 곳을 맡고 있던 원장님이 TV에 나오면서 돌보는 사람이 350명 정도로 크게 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굉장히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캄보디아에 청소년 무료 학교 겸 교회를 두 곳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에도 오래전에 선교센터을 두고 또 여러 시설들을 갖추어 아이들이 좋은 마음을 갖고 밝고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봉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품은 자녀들로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느꼈습니다.

     

    과거 20여년 전에도 제가 경험했던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가치인지를 알지 못했는데 38년이 지난 지금에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22장에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 나그네,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는 이러한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씀들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경험들을 하고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다음 22절부터 24절 말씀에는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25절부터 27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옷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누가 옷을 전당 잡으면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이 출애굽기가 쓰여진 모세 당시 때나 이 겉옷은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하는 생활 필수품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기후는 낮과 밤의 온도차가 매우 커서 낮에는 엄청 뜨겁고 밤에는 엄청 춥습니다. 때문에 그 옷은 외출할 때는 뜨거운 햇볕을 가려서 몸을 상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그 옷으로 이불을 삼아서 추위를 견딥니다.

     

    그런데 이렇게 없어서는 안될 이 하나뿐인 옷을 전당 잡힙니다.

    얼마나 다급한 사정이 있었으면 이 사람이 그것을 전당 잡히고 돈을 꾸었겠습니까?

     

    얼마나 궁핍하고 곤고하고 얼마나 돈이 필요하였으면 밤에는 자기의 이부자리가 되고 낮에는 뜨거운 햇볕을 가리는 차양막이 되는 그 옷을 맡겼을까요?

     

    이러한 가난한 자들의 사정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가 그 옷을 입고 추운 밤을 견딜 수 있도록 해가 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가난한 형제들에게는 이자도 받지 말라고 하셨고 혹시 이자를 받게 되면 많이 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그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고 살피시는 참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지켜야할 계명으로 이렇게 이방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말라고 얘기를 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조상, 애굽 땅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제외하고 아비 야곱과 열한명의 아들들은 원래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애굽 땅과 온 세상에 7년 동안의 풍년이 있은 뒤에 7년 동안의 대 기근이 닥칩니다. 앞선 7년동안의 풍년 때에는 아주 풍요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풍년이 지나고 7년 동안 흉년이 닥칩니다. 흉년이 닥친 후에도 한 동안은 그 동안 저장해 놓은 곡식으로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애굽에 닥쳤을 때, 요셉 나이 30세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나이와 같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손에 팔려 애굽 땅에서 노예 생활을 시작한 것은 이 흉년의 때에 가나안 땅에 있던 야곱과 그의 자손, 70명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로 그를 먼저 보내어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고 풍년 때에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을 미리 대비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에 대 기근이 닥쳐서 야곱과 그 자손 70명이 바로 왕에게 생명을 의존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그들 앞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자, 양식을 나눠 주는 자로 등장시킵니다. 이 요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풍족할 때는 누구나 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기근과 흉년이 닥쳐서 양식이 끊어지므로 굶게 되고 오랜 동안 먹지 못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대 기근의 때에 등장한 요셉은 바로 생명의 양식을 나눠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탄생하셨습니까?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생명의 떡집, 양식을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왜 예수님이 많고 많은 유대 나라의 마을 중에서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태어나신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구원자로서 하늘의 생명양식을 가지고 와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 양식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떡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어디서 자라셨습니까?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나사렛 뜻은 ‘망대, 초소’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세상에 빛을 비치는 등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왜 생명과 빛을 얘기했냐면, 이 세상은 생명이 없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이 되셔서 온 세상에 그 생명의 빛을 비춰 주신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빛을 비춰주는 것이 바로 등대의 역할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예수님이 자라신 곳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가 다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또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 에베소서 2장 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우리 과거 신분과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신앙생활을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도 똑같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밖에 있었고 언약 바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하늘에 대한 소망과 세상에 대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사는 가난한 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면 그리고 하늘에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도 역시 세상 속에서 소망이 없이 하나님 없이 방황하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린 주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받은 은혜를 에베소서 2장 19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이 변화되어 외인과 나그네가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돌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옛날 일을 기억하여 하나님처럼 자비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 없이 살 때 방황하고 속박속에 살았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 기근이 온 세상에 닥쳐서 양식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준비한 양식을 야곱과 그 후손들을 먹이셔서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셨고,

     

    그들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형성하고 400년의 긴 시간 동안 그들을 길러서 200만 명에서 250만 명의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애굽의 노예로 속박되어 고역 가운데 있는 그들을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애굽에서 빼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동일한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었고 또 하늘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집을 갈망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푼 큰 은혜의 구원을 기억하여 우리의 예전 처지와 같은 어려운 형편에 있는 나그네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고 억압하지 말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여러분!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왜 나그네를 돌보라고 그랬죠? 나그네는 집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처없이 방황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집도 없고 가족도 없다 보니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물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없습니다. 집은 가정입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나그네는 하늘의 집을 갖지 못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집이 없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그네이듯이 하늘 집, 본향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이 세상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다른 자들이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나그네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천대받고 멸시를 받으면서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나그네는 집도 가족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밥을 한 끼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손을 벌려야 됩니다.

    때문에 남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야 하고 때론 원하지도 않는 일, 청소도 해야 되고 고된 일도 해야 하는 종과 같은 처지가 되어 속박을 당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그네는 집을 찾아줘야 나그네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이 없는 자들, 바깥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들에게 하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집, 새 예루살렘성, 아름다운 보석으로 지어진 그 집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압제당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어 그들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돌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물론 집이 없는 나그네에게 이 땅에서의 실질적인 거처를 마련해주고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돌보는 것이며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제한적인 면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유치장 선교할 때, 갈 곳 없는 출소한 제소자들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들이 말씀으로 하늘 아버지와 하늘 집에 소망을 두지 못하면,

     

    그들은 다시 방황하고 옛 생활로 되돌아 가 다시 나그네가 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러한 돌보는 일은 마치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거처를 장만해 주는 것보다도

    영원한 집, 망가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집, 우리 본향집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 본향집이 자신들의 것임을 알려주고 소망을 갖게 하여 방황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가 저에게 꿈을 물어보면, 저는 항상 사회사업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가지고 또 그런 돌보는 일을 해봤지만, 제가 느낀 것이 나그네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그보다도 그들 영혼에 진짜 하늘의 집, 영원한 하늘 아버지를 찾아 주는 일입니다.

     

    <과부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출애굽기 22장 22절에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과부는 어떤 사람이 과부입니까?

    남편이 없는 사람, 남편이 없이 홀로 사는 여인이 과부입니다.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이런 사람의 삶은 어떨까요?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힘든 일도 남편이 처리해주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홀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해야 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과부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 남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우리 모두는 그의 신부, 아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필요한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남성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님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존재, 마치 세상에서 아내 같이 한 마음이 되고 연합이 되고 일치가 되는 그런 관계를 우리와 갖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 나타내신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서 신랑이 신부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이 세상에 자신과 연합되고 일치된 신부를 찾으러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과부의 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불의의 사고나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어서 홀로 된 그들만 과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때문에 이러한 과부들을 여러가지로 돕는 일들 또한 그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도와줄 수가 없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풍요로운 제물을 주고 또 시험대를 이 세상 가운데 두셔서 그들의 행위를 저울질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 내시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남편 없거나 부인이 없어 홀로된 사람들만 과부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주시는

    참 남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주님을 만났으나 탕자처럼 멀리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과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참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진정 과부를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 그들을 돌보는 것 또한 필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 그 일과 함께 반드시 말씀으로 가르쳐 알게 하는 일이 필요하며 이 일은 영적 과부들에게 자신의 참 신랑을 만나게 해주는 너무나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과부를 도와주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환경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들과 삶이 달라서 마음이 있을지라도 때론 헤어지기도 하고 소식이 단절되어서 만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매자가 되어서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어 그들이 예수님을 남편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들이 돌보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이 친히 그 과부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레루야!

    우리는 이 아버지의 집을 소개해줘야 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에게 하늘의 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늘 아버지를 믿고 하늘의 집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 가운데서 평안과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과부들에게 참 신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 과부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과부는 남편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하지만,

    한 영혼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그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성품을 가지고 계신 지를 잘 설명해 주어서

    그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하고 함께 살도록 하여서 그들이 과부의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고아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이제 고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2절에 과부와 마찬가지로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는 돌아 갈 하늘 집이 없는 자가 나그네이고, 과부는 참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가 과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고아는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없는 자가 고아입니다.

     

    고아에게 가장 비참하고 가장 장 안타까운 것이 여러분들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가 없어서 용돈을 못 받기 때문에 그가 불쌍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 됐든, 고아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침을 주는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은 잘못했을 때 부모로부터 매를 맞습니다.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 고아라는 겁니다.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유독 문제가 많고 시련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그 회초리가 나를 때리는 이유는 내가 곁길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나를 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나와 참 관계를 맺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내가 곁길로 가든, 잘못을 하든,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지든, 세속적인 곳에 내가 들어가든 때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때린다는 건 뭡니까?

    내가 곁길로 가면 죽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서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롯을 그처럼 구하고 싶어서 그를 때렸던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소돔성으로 가족과 종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브라함보다도 더 찢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간신히 빼내어 훈련시키고 연단 시켜서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짓고 같이 살기를 바라셨는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장막집을 떠나 소돔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 중재하는 자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롯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구원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를 구원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친히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롯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롯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중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돔성에 의인 열명이 있지 않아서 불로 멸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롯을 구원 하고자는 소원을 가지고 성육신 하기 전 예수님 앞에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중재의 뜻에 따라 소돔성에 있는 롯을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롯을 소돔성에서 구원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롯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어둠의 구덩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었지만 롯은 그 구원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나올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롯은 그 만큼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기능들이 훼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벙은 바벨론 지역의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소돔 땅 왕들과의 전쟁이 나게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4절에 이 전쟁은 소돔지역의 왕들이 십이년 동안 그돌라오멜 왕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돔이 위치한 사해부근은 역청이 풍부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곳이었기에 주위 강대한 왕들이 소돔왕에게 조공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왕 연합군은 패하게 되고 그돌라오멜 동맹군은 모든 재물과 양식과 롯을 포함한 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 갑니다.

     

    이 때, 이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이 군대 318명을 끌고 이들을 뒤쫓아 가서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군대 숫자 318명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벨론 땅에 있는 왕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롯은 이 전쟁 중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롯과 그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기도를 했을까요?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며 살려만 주면 정말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롯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그 롯을 구원내는 방법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이 원수들의 손을 빌려서 롯을 전쟁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하는 방법이 아니면 롯을 돌이킬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구출되었음에도 다시 소돔성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죄의 힘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게 죽을 지경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다시 죄가 가득한 소돔성으로 갑니다. 롯을 구원시킨 것은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군대 318명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엘리에셀에 대한 얘기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 연약해져 소돔성으로 돌아갔다가 결국에서는 불의 심판에 의해서 그 거주하던 성이 멸망당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면 반드시 징계를 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포로가 되게 하는 일을 통해서 롯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표현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보여야 될까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빠진 아들에게 그런 방법으로 밖에는 자신의 사랑을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롯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방법, 롯이 징계를 받고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출 받았을 때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재물도 다 필요 없고 삼촌 곁에 하나님의 장막에서 함께 거하겠다고 얘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떠나 실패한 자, 구원은 간신히 받았으나 실패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경우와 달리 고아는 아버지가 없어 그 수많은 혜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때림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때릴 회초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을 사랑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100세에 이삭을 주기까지 25년 동안 숱하게 때리시고 위로하고, 다시 때리시고 위로하는 일을 통해서 그를 성장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삭이 다섯 살이 되어 엄마의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그때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 때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지 30년이 된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 기간을 400년, 어느 때는 430년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30년 기간을 포함해서 말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자신을 때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될 때마다 때림이 있다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을 때려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로 가게 하고, 왼쪽으로 치우쳤으면 왼쪽을 때려 또 바로 가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때리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위에서 내리 누르면 됩니다. 주저앉을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사도바울을 주저앉게 하고 꺼꾸러뜨리는 것을 보십시요.

     

    우리는 정말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고아는 불쌍합니다.

    하지만 때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가 없고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 없이 살게 되면 이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또는 원수 악한 영과 사탄 앞에서 실수투성이의 모습을 우리가 보이므로 그들이 나의 실수를 가지고 발목을 붙잡아서 나를 실족시키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와 권면을 늘 받아야 합니다. 그 징계와 권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집이 없는 자들에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영원한 새 예루살렘성, 천국을 전해주어 그들이 하늘 집을 소망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 압제 받는 삶에서 그들을 탈출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늘 집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다음은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신랑 대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세상에 있는 홀로 사는 그들의 참 남편,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처럼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내가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를 책임집니다. 이것이 과부를 돌보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아입니다.

    우린 그에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아버지께서 책임지시고 때리시고 회초리를 드셔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곁길로 가다가도 올바른 길을 찾아 바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뭡니까?

    결격 사항이 있는 자들, 모자란 자들, 뭔가 부족한 자들이 가난한 자입니다.

    혹시 누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혹시 누가 남편이 없어서 과부와 또는 홀아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누가 고아로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됩니다.

     

    이 모든 일은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하늘 성소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받게 하면 세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받을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야 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 고아나 과부에게 한 번, 두 번 물질적으로 도와줘서 잠시 잠깐 기쁘게 하는 일보다,

    그들이 영원한 만족, 영원한 안식, 영원한 위로,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예수님과 영원하신 성령님을 제대로 소개해 주는 일에 더 더욱 힘써야 하며 이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이 돌보는 일이 쉬우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해보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베트남에 있을 때 어린 아이가 잘못했길래 너무나 화가 나서 한 아이를 때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10여 년이 지난 뒤에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내가 용서를 빌어서 무마시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압제 받는 나그네, 이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합니까?

    나에게 그와 같이 선하신 아버지, 좋으신 아버지, 때리시는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와 같이 좋은 하늘의 집에 머물러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나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공급해 줄 신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정말 자세히 소개해 줌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 그분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표현해야 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 하늘 집을 소개해 주고 아버지를 소개해 주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자세히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며 참으로 다정다감하시고 세상에는 정말 존재할 수 없는 분임을 소개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뜻대로 행하였구나.” “아니 내가 언제 주님의 뜻을 행했습니까?”

    “네가 내가 옷이 없을 때 옷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네가 나를 돌봐 줬고 네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렇게 주님은 그가 한 일을 기억하시지만 그는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일을 당연히 해야 할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평상적인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예언도 하고 기도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돌보기도 하고 고아도 돌보고 과부와 압제 받는 나그네도 제가 돌보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 생각하고 삯을 바라는 일꾼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생각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억이 안 나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이유와 목적대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바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나타낸 겁니다.

    그들을 돌봄으로 그들에게 관심 가짐으로 아버지와 남편 되시는 예수님과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소개해 줄 때 가난한 자들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모든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하나님 없이 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요한복음 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왜 생명과 빛을 얘기했냐면, 이 세상은 생명이 없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이 되셔서 온 세상에 그 생명의 빛을 비춰 주신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빛을 비춰주는 것이 바로 등대의 역할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예수님이 자라신 곳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가 다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또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 에베소서 2장 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우리 과거 신분과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신앙생활을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도 똑같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밖에 있었고 언약 바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하늘에 대한 소망과 세상에 대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사는 가난한 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면 그리고 하늘에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도 역시 세상 속에서 소망이 없이 하나님 없이 방황하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린 주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받은 은혜를 에베소서 2장 19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이 변화되어 외인과 나그네가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돌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옛날 일을 기억하여 하나님처럼 자비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 없이 살 때 방황하고 속박속에 살았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 기근이 온 세상에 닥쳐서 양식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준비한 양식을 야곱과 그 후손들을 먹이셔서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셨고,

     

    그들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형성하고 400년의 긴 시간 동안 그들을 길러서 200만 명에서 250만 명의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애굽의 노예로 속박되어 고역 가운데 있는 그들을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애굽에서 빼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동일한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었고 또 하늘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집을 갈망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푼 큰 은혜의 구원을 기억하여 우리의 예전 처지와 같은 어려운 형편에 있는 나그네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고 억압하지 말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여러분!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왜 나그네를 돌보라고 그랬죠? 나그네는 집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처없이 방황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집도 없고 가족도 없다 보니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물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없습니다. 집은 가정입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나그네는 하늘의 집을 갖지 못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집이 없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그네이듯이 하늘 집, 본향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이 세상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다른 자들이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나그네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천대받고 멸시를 받으면서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나그네는 집도 가족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밥을 한 끼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손을 벌려야 됩니다.

    때문에 남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야 하고 때론 원하지도 않는 일, 청소도 해야 되고 고된 일도 해야 하는 종과 같은 처지가 되어 속박을 당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그네는 집을 찾아줘야 나그네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이 없는 자들, 바깥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들에게 하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집, 새 예루살렘성, 아름다운 보석으로 지어진 그 집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압제당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어 그들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돌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물론 집이 없는 나그네에게 이 땅에서의 실질적인 거처를 마련해주고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돌보는 것이며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제한적인 면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유치장 선교할 때, 갈 곳 없는 출소한 제소자들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들이 말씀으로 하늘 아버지와 하늘 집에 소망을 두지 못하면,

     

    그들은 다시 방황하고 옛 생활로 되돌아 가 다시 나그네가 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러한 돌보는 일은 마치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거처를 장만해 주는 것보다도

    영원한 집, 망가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집, 우리 본향집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 본향집이 자신들의 것임을 알려주고 소망을 갖게 하여 방황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가 저에게 꿈을 물어보면, 저는 항상 사회사업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가지고 또 그런 돌보는 일을 해봤지만, 제가 느낀 것이 나그네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그보다도 그들 영혼에 진짜 하늘의 집, 영원한 하늘 아버지를 찾아 주는 일입니다.

     

    <과부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출애굽기 22장 22절에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과부는 어떤 사람이 과부입니까?

    남편이 없는 사람, 남편이 없이 홀로 사는 여인이 과부입니다.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이런 사람의 삶은 어떨까요?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힘든 일도 남편이 처리해주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홀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해야 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과부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 남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우리 모두는 그의 신부, 아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필요한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남성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님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존재, 마치 세상에서 아내 같이 한 마음이 되고 연합이 되고 일치가 되는 그런 관계를 우리와 갖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 나타내신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서 신랑이 신부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이 세상에 자신과 연합되고 일치된 신부를 찾으러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과부의 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불의의 사고나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어서 홀로 된 그들만 과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때문에 이러한 과부들을 여러가지로 돕는 일들 또한 그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도와줄 수가 없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풍요로운 제물을 주고 또 시험대를 이 세상 가운데 두셔서 그들의 행위를 저울질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 내시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남편 없거나 부인이 없어 홀로된 사람들만 과부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주시는

    참 남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주님을 만났으나 탕자처럼 멀리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과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참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진정 과부를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 그들을 돌보는 것 또한 필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 그 일과 함께 반드시 말씀으로 가르쳐 알게 하는 일이 필요하며 이 일은 영적 과부들에게 자신의 참 신랑을 만나게 해주는 너무나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과부를 도와주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환경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들과 삶이 달라서 마음이 있을지라도 때론 헤어지기도 하고 소식이 단절되어서 만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매자가 되어서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어 그들이 예수님을 남편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들이 돌보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이 친히 그 과부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레루야!

    우리는 이 아버지의 집을 소개해줘야 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에게 하늘의 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늘 아버지를 믿고 하늘의 집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 가운데서 평안과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과부들에게 참 신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 과부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과부는 남편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하지만,

    한 영혼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그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성품을 가지고 계신 지를 잘 설명해 주어서

    그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하고 함께 살도록 하여서 그들이 과부의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고아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이제 고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2절에 과부와 마찬가지로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는 돌아 갈 하늘 집이 없는 자가 나그네이고, 과부는 참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가 과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고아는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없는 자가 고아입니다.

     

    고아에게 가장 비참하고 가장 장 안타까운 것이 여러분들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가 없어서 용돈을 못 받기 때문에 그가 불쌍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 됐든, 고아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침을 주는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은 잘못했을 때 부모로부터 매를 맞습니다.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 고아라는 겁니다.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유독 문제가 많고 시련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그 회초리가 나를 때리는 이유는 내가 곁길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나를 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나와 참 관계를 맺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내가 곁길로 가든, 잘못을 하든,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지든, 세속적인 곳에 내가 들어가든 때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때린다는 건 뭡니까?

    내가 곁길로 가면 죽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서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롯을 그처럼 구하고 싶어서 그를 때렸던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소돔성으로 가족과 종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브라함보다도 더 찢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간신히 빼내어 훈련시키고 연단 시켜서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짓고 같이 살기를 바라셨는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장막집을 떠나 소돔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 중재하는 자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롯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구원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를 구원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친히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롯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롯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중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돔성에 의인 열명이 있지 않아서 불로 멸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롯을 구원 하고자는 소원을 가지고 성육신 하기 전 예수님 앞에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중재의 뜻에 따라 소돔성에 있는 롯을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롯을 소돔성에서 구원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롯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어둠의 구덩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었지만 롯은 그 구원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나올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롯은 그 만큼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기능들이 훼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벙은 바벨론 지역의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소돔 땅 왕들과의 전쟁이 나게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4절에 이 전쟁은 소돔지역의 왕들이 십이년 동안 그돌라오멜 왕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돔이 위치한 사해부근은 역청이 풍부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곳이었기에 주위 강대한 왕들이 소돔왕에게 조공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왕 연합군은 패하게 되고 그돌라오멜 동맹군은 모든 재물과 양식과 롯을 포함한 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 갑니다.

     

    이 때, 이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이 군대 318명을 끌고 이들을 뒤쫓아 가서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군대 숫자 318명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벨론 땅에 있는 왕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롯은 이 전쟁 중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롯과 그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기도를 했을까요?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며 살려만 주면 정말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롯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그 롯을 구원내는 방법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이 원수들의 손을 빌려서 롯을 전쟁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하는 방법이 아니면 롯을 돌이킬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구출되었음에도 다시 소돔성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죄의 힘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게 죽을 지경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다시 죄가 가득한 소돔성으로 갑니다. 롯을 구원시킨 것은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군대 318명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엘리에셀에 대한 얘기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 연약해져 소돔성으로 돌아갔다가 결국에서는 불의 심판에 의해서 그 거주하던 성이 멸망당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면 반드시 징계를 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포로가 되게 하는 일을 통해서 롯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표현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보여야 될까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빠진 아들에게 그런 방법으로 밖에는 자신의 사랑을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롯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방법, 롯이 징계를 받고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출 받았을 때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재물도 다 필요 없고 삼촌 곁에 하나님의 장막에서 함께 거하겠다고 얘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떠나 실패한 자, 구원은 간신히 받았으나 실패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경우와 달리 고아는 아버지가 없어 그 수많은 혜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때림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때릴 회초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을 사랑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100세에 이삭을 주기까지 25년 동안 숱하게 때리시고 위로하고, 다시 때리시고 위로하는 일을 통해서 그를 성장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삭이 다섯 살이 되어 엄마의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그때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 때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지 30년이 된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 기간을 400년, 어느 때는 430년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30년 기간을 포함해서 말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자신을 때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될 때마다 때림이 있다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을 때려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로 가게 하고, 왼쪽으로 치우쳤으면 왼쪽을 때려 또 바로 가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때리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위에서 내리 누르면 됩니다. 주저앉을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사도바울을 주저앉게 하고 꺼꾸러뜨리는 것을 보십시요.

     

    우리는 정말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고아는 불쌍합니다.

    하지만 때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가 없고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 없이 살게 되면 이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또는 원수 악한 영과 사탄 앞에서 실수투성이의 모습을 우리가 보이므로 그들이 나의 실수를 가지고 발목을 붙잡아서 나를 실족시키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와 권면을 늘 받아야 합니다. 그 징계와 권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집이 없는 자들에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영원한 새 예루살렘성, 천국을 전해주어 그들이 하늘 집을 소망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 압제 받는 삶에서 그들을 탈출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늘 집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다음은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신랑 대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세상에 있는 홀로 사는 그들의 참 남편,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처럼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내가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를 책임집니다. 이것이 과부를 돌보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아입니다.

    우린 그에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아버지께서 책임지시고 때리시고 회초리를 드셔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곁길로 가다가도 올바른 길을 찾아 바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뭡니까?

    결격 사항이 있는 자들, 모자란 자들, 뭔가 부족한 자들이 가난한 자입니다.

    혹시 누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혹시 누가 남편이 없어서 과부와 또는 홀아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누가 고아로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됩니다.

     

    이 모든 일은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하늘 성소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받게 하면 세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받을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야 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 고아나 과부에게 한 번, 두 번 물질적으로 도와줘서 잠시 잠깐 기쁘게 하는 일보다,

    그들이 영원한 만족, 영원한 안식, 영원한 위로,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예수님과 영원하신 성령님을 제대로 소개해 주는 일에 더 더욱 힘써야 하며 이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이 돌보는 일이 쉬우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해보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베트남에 있을 때 어린 아이가 잘못했길래 너무나 화가 나서 한 아이를 때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10여 년이 지난 뒤에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내가 용서를 빌어서 무마시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압제 받는 나그네, 이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합니까?

    나에게 그와 같이 선하신 아버지, 좋으신 아버지, 때리시는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와 같이 좋은 하늘의 집에 머물러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나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공급해 줄 신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정말 자세히 소개해 줌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 그분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표현해야 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 하늘 집을 소개해 주고 아버지를 소개해 주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자세히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며 참으로 다정다감하시고 세상에는 정말 존재할 수 없는 분임을 소개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뜻대로 행하였구나.” “아니 내가 언제 주님의 뜻을 행했습니까?”

    “네가 내가 옷이 없을 때 옷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네가 나를 돌봐 줬고 네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렇게 주님은 그가 한 일을 기억하시지만 그는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일을 당연히 해야 할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평상적인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예언도 하고 기도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돌보기도 하고 고아도 돌보고 과부와 압제 받는 나그네도 제가 돌보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 생각하고 삯을 바라는 일꾼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생각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억이 안 나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이유와 목적대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바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나타낸 겁니다.

    그들을 돌봄으로 그들에게 관심 가짐으로 아버지와 남편 되시는 예수님과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소개해 줄 때 가난한 자들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모든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하나님 없이 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요한복음 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왜 생명과 빛을 얘기했냐면, 이 세상은 생명이 없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이 되셔서 온 세상에 그 생명의 빛을 비춰 주신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빛을 비춰주는 것이 바로 등대의 역할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예수님이 자라신 곳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가 다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또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 에베소서 2장 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우리 과거 신분과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신앙생활을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도 똑같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밖에 있었고 언약 바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하늘에 대한 소망과 세상에 대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사는 가난한 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면 그리고 하늘에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도 역시 세상 속에서 소망이 없이 하나님 없이 방황하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린 주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받은 은혜를 에베소서 2장 19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이 변화되어 외인과 나그네가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돌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옛날 일을 기억하여 하나님처럼 자비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 없이 살 때 방황하고 속박속에 살았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 기근이 온 세상에 닥쳐서 양식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준비한 양식을 야곱과 그 후손들을 먹이셔서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셨고,

     

    그들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형성하고 400년의 긴 시간 동안 그들을 길러서 200만 명에서 250만 명의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애굽의 노예로 속박되어 고역 가운데 있는 그들을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애굽에서 빼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동일한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었고 또 하늘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집을 갈망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푼 큰 은혜의 구원을 기억하여 우리의 예전 처지와 같은 어려운 형편에 있는 나그네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고 억압하지 말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여러분! 나그네가 누구입니까?

    왜 나그네를 돌보라고 그랬죠? 나그네는 집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처없이 방황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집도 없고 가족도 없다 보니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물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없습니다. 집은 가정입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나그네는 하늘의 집을 갖지 못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집이 없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그네이듯이 하늘 집, 본향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이 세상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다른 자들이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나그네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천대받고 멸시를 받으면서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나그네는 집도 가족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밥을 한 끼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손을 벌려야 됩니다.

    때문에 남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야 하고 때론 원하지도 않는 일, 청소도 해야 되고 고된 일도 해야 하는 종과 같은 처지가 되어 속박을 당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그네는 집을 찾아줘야 나그네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이 없는 자들, 바깥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들에게 하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집, 새 예루살렘성, 아름다운 보석으로 지어진 그 집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압제당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어 그들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돌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물론 집이 없는 나그네에게 이 땅에서의 실질적인 거처를 마련해주고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돌보는 것이며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제한적인 면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유치장 선교할 때, 갈 곳 없는 출소한 제소자들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들이 말씀으로 하늘 아버지와 하늘 집에 소망을 두지 못하면,

     

    그들은 다시 방황하고 옛 생활로 되돌아 가 다시 나그네가 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러한 돌보는 일은 마치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거처를 장만해 주는 것보다도

    영원한 집, 망가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집, 우리 본향집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 본향집이 자신들의 것임을 알려주고 소망을 갖게 하여 방황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가 저에게 꿈을 물어보면, 저는 항상 사회사업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가지고 또 그런 돌보는 일을 해봤지만, 제가 느낀 것이 나그네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그보다도 그들 영혼에 진짜 하늘의 집, 영원한 하늘 아버지를 찾아 주는 일입니다.

     

    <과부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출애굽기 22장 22절에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과부는 어떤 사람이 과부입니까?

    남편이 없는 사람, 남편이 없이 홀로 사는 여인이 과부입니다.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이런 사람의 삶은 어떨까요?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힘든 일도 남편이 처리해주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홀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해야 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과부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 남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우리 모두는 그의 신부, 아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필요한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남성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님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존재, 마치 세상에서 아내 같이 한 마음이 되고 연합이 되고 일치가 되는 그런 관계를 우리와 갖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 나타내신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서 신랑이 신부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이 세상에 자신과 연합되고 일치된 신부를 찾으러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과부의 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불의의 사고나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어서 홀로 된 그들만 과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때문에 이러한 과부들을 여러가지로 돕는 일들 또한 그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도와줄 수가 없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풍요로운 제물을 주고 또 시험대를 이 세상 가운데 두셔서 그들의 행위를 저울질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 내시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남편 없거나 부인이 없어 홀로된 사람들만 과부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주시는

    참 남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주님을 만났으나 탕자처럼 멀리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과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참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진정 과부를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 그들을 돌보는 것 또한 필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 그 일과 함께 반드시 말씀으로 가르쳐 알게 하는 일이 필요하며 이 일은 영적 과부들에게 자신의 참 신랑을 만나게 해주는 너무나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과부를 도와주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환경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들과 삶이 달라서 마음이 있을지라도 때론 헤어지기도 하고 소식이 단절되어서 만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매자가 되어서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어 그들이 예수님을 남편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들이 돌보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이 친히 그 과부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레루야!

    우리는 이 아버지의 집을 소개해줘야 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에게 하늘의 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늘 아버지를 믿고 하늘의 집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 가운데서 평안과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과부들에게 참 신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 과부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과부는 남편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하지만,

    한 영혼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그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성품을 가지고 계신 지를 잘 설명해 주어서

    그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하고 함께 살도록 하여서 그들이 과부의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고아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이제 고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2절에 과부와 마찬가지로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는 돌아 갈 하늘 집이 없는 자가 나그네이고, 과부는 참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가 과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고아는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없는 자가 고아입니다.

     

    고아에게 가장 비참하고 가장 장 안타까운 것이 여러분들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가 없어서 용돈을 못 받기 때문에 그가 불쌍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 됐든, 고아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침을 주는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은 잘못했을 때 부모로부터 매를 맞습니다.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 고아라는 겁니다.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유독 문제가 많고 시련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그 회초리가 나를 때리는 이유는 내가 곁길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나를 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나와 참 관계를 맺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내가 곁길로 가든, 잘못을 하든,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지든, 세속적인 곳에 내가 들어가든 때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때린다는 건 뭡니까?

    내가 곁길로 가면 죽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서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롯을 그처럼 구하고 싶어서 그를 때렸던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소돔성으로 가족과 종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브라함보다도 더 찢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간신히 빼내어 훈련시키고 연단 시켜서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짓고 같이 살기를 바라셨는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장막집을 떠나 소돔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 중재하는 자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롯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구원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를 구원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친히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롯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롯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중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돔성에 의인 열명이 있지 않아서 불로 멸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롯을 구원 하고자는 소원을 가지고 성육신 하기 전 예수님 앞에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중재의 뜻에 따라 소돔성에 있는 롯을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롯을 소돔성에서 구원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롯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어둠의 구덩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었지만 롯은 그 구원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나올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롯은 그 만큼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기능들이 훼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벙은 바벨론 지역의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소돔 땅 왕들과의 전쟁이 나게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4절에 이 전쟁은 소돔지역의 왕들이 십이년 동안 그돌라오멜 왕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돔이 위치한 사해부근은 역청이 풍부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곳이었기에 주위 강대한 왕들이 소돔왕에게 조공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왕 연합군은 패하게 되고 그돌라오멜 동맹군은 모든 재물과 양식과 롯을 포함한 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 갑니다.

     

    이 때, 이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이 군대 318명을 끌고 이들을 뒤쫓아 가서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군대 숫자 318명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벨론 땅에 있는 왕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롯은 이 전쟁 중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롯과 그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기도를 했을까요?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며 살려만 주면 정말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롯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그 롯을 구원내는 방법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이 원수들의 손을 빌려서 롯을 전쟁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하는 방법이 아니면 롯을 돌이킬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구출되었음에도 다시 소돔성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죄의 힘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게 죽을 지경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다시 죄가 가득한 소돔성으로 갑니다. 롯을 구원시킨 것은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군대 318명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엘리에셀에 대한 얘기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 연약해져 소돔성으로 돌아갔다가 결국에서는 불의 심판에 의해서 그 거주하던 성이 멸망당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면 반드시 징계를 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포로가 되게 하는 일을 통해서 롯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표현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보여야 될까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빠진 아들에게 그런 방법으로 밖에는 자신의 사랑을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롯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방법, 롯이 징계를 받고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출 받았을 때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재물도 다 필요 없고 삼촌 곁에 하나님의 장막에서 함께 거하겠다고 얘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떠나 실패한 자, 구원은 간신히 받았으나 실패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경우와 달리 고아는 아버지가 없어 그 수많은 혜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때림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때릴 회초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을 사랑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100세에 이삭을 주기까지 25년 동안 숱하게 때리시고 위로하고, 다시 때리시고 위로하는 일을 통해서 그를 성장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삭이 다섯 살이 되어 엄마의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그때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 때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지 30년이 된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 기간을 400년, 어느 때는 430년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30년 기간을 포함해서 말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자신을 때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될 때마다 때림이 있다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을 때려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로 가게 하고, 왼쪽으로 치우쳤으면 왼쪽을 때려 또 바로 가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때리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위에서 내리 누르면 됩니다. 주저앉을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사도바울을 주저앉게 하고 꺼꾸러뜨리는 것을 보십시요.

     

    우리는 정말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고아는 불쌍합니다.

    하지만 때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가 없고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 없이 살게 되면 이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또는 원수 악한 영과 사탄 앞에서 실수투성이의 모습을 우리가 보이므로 그들이 나의 실수를 가지고 발목을 붙잡아서 나를 실족시키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와 권면을 늘 받아야 합니다. 그 징계와 권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집이 없는 자들에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영원한 새 예루살렘성, 천국을 전해주어 그들이 하늘 집을 소망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 압제 받는 삶에서 그들을 탈출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늘 집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다음은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신랑 대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세상에 있는 홀로 사는 그들의 참 남편,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처럼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내가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를 책임집니다. 이것이 과부를 돌보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아입니다.

    우린 그에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아버지께서 책임지시고 때리시고 회초리를 드셔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곁길로 가다가도 올바른 길을 찾아 바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뭡니까?

    결격 사항이 있는 자들, 모자란 자들, 뭔가 부족한 자들이 가난한 자입니다.

    혹시 누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혹시 누가 남편이 없어서 과부와 또는 홀아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누가 고아로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됩니다.

     

    이 모든 일은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하늘 성소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받게 하면 세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받을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야 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 고아나 과부에게 한 번, 두 번 물질적으로 도와줘서 잠시 잠깐 기쁘게 하는 일보다,

    그들이 영원한 만족, 영원한 안식, 영원한 위로,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예수님과 영원하신 성령님을 제대로 소개해 주는 일에 더 더욱 힘써야 하며 이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이 돌보는 일이 쉬우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해보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베트남에 있을 때 어린 아이가 잘못했길래 너무나 화가 나서 한 아이를 때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10여 년이 지난 뒤에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내가 용서를 빌어서 무마시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압제 받는 나그네, 이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합니까?

    나에게 그와 같이 선하신 아버지, 좋으신 아버지, 때리시는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와 같이 좋은 하늘의 집에 머물러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나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공급해 줄 신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정말 자세히 소개해 줌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 그분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표현해야 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 하늘 집을 소개해 주고 아버지를 소개해 주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자세히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며 참으로 다정다감하시고 세상에는 정말 존재할 수 없는 분임을 소개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뜻대로 행하였구나.” “아니 내가 언제 주님의 뜻을 행했습니까?”

    “네가 내가 옷이 없을 때 옷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네가 나를 돌봐 줬고 네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렇게 주님은 그가 한 일을 기억하시지만 그는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일을 당연히 해야 할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평상적인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예언도 하고 기도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돌보기도 하고 고아도 돌보고 과부와 압제 받는 나그네도 제가 돌보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 생각하고 삯을 바라는 일꾼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생각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억이 안 나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이유와 목적대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바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나타낸 겁니다.

    그들을 돌봄으로 그들에게 관심 가짐으로 아버지와 남편 되시는 예수님과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소개해 줄 때 가난한 자들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모든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하나님 없이 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처없이 방황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집도 없고 가족도 없다 보니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물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없습니다. 집은 가정입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나그네는 하늘의 집을 갖지 못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집이 없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그네이듯이 하늘 집, 본향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이 세상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다른 자들이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나그네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천대받고 멸시를 받으면서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나그네는 집도 가족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밥을 한 끼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손을 벌려야 됩니다.

    때문에 남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야 하고 때론 원하지도 않는 일, 청소도 해야 되고 고된 일도 해야 하는 종과 같은 처지가 되어 속박을 당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그네는 집을 찾아줘야 나그네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이 없는 자들, 바깥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들에게 하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집, 새 예루살렘성, 아름다운 보석으로 지어진 그 집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압제당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어 그들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돌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물론 집이 없는 나그네에게 이 땅에서의 실질적인 거처를 마련해주고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돌보는 것이며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제한적인 면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유치장 선교할 때, 갈 곳 없는 출소한 제소자들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들이 말씀으로 하늘 아버지와 하늘 집에 소망을 두지 못하면,

     

    그들은 다시 방황하고 옛 생활로 되돌아 가 다시 나그네가 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러한 돌보는 일은 마치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거처를 장만해 주는 것보다도

    영원한 집, 망가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집, 우리 본향집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 본향집이 자신들의 것임을 알려주고 소망을 갖게 하여 방황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가 저에게 꿈을 물어보면, 저는 항상 사회사업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가지고 또 그런 돌보는 일을 해봤지만, 제가 느낀 것이 나그네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그보다도 그들 영혼에 진짜 하늘의 집, 영원한 하늘 아버지를 찾아 주는 일입니다.

     

    <과부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출애굽기 22장 22절에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과부는 어떤 사람이 과부입니까?

    남편이 없는 사람, 남편이 없이 홀로 사는 여인이 과부입니다.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이런 사람의 삶은 어떨까요?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힘든 일도 남편이 처리해주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홀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해야 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과부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 남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우리 모두는 그의 신부, 아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필요한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남성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님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존재, 마치 세상에서 아내 같이 한 마음이 되고 연합이 되고 일치가 되는 그런 관계를 우리와 갖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 나타내신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서 신랑이 신부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이 세상에 자신과 연합되고 일치된 신부를 찾으러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과부의 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불의의 사고나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어서 홀로 된 그들만 과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때문에 이러한 과부들을 여러가지로 돕는 일들 또한 그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도와줄 수가 없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풍요로운 제물을 주고 또 시험대를 이 세상 가운데 두셔서 그들의 행위를 저울질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 내시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남편 없거나 부인이 없어 홀로된 사람들만 과부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주시는

    참 남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주님을 만났으나 탕자처럼 멀리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과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참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진정 과부를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 그들을 돌보는 것 또한 필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 그 일과 함께 반드시 말씀으로 가르쳐 알게 하는 일이 필요하며 이 일은 영적 과부들에게 자신의 참 신랑을 만나게 해주는 너무나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과부를 도와주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환경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들과 삶이 달라서 마음이 있을지라도 때론 헤어지기도 하고 소식이 단절되어서 만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매자가 되어서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어 그들이 예수님을 남편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들이 돌보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이 친히 그 과부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레루야!

    우리는 이 아버지의 집을 소개해줘야 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에게 하늘의 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늘 아버지를 믿고 하늘의 집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 가운데서 평안과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과부들에게 참 신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 과부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과부는 남편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하지만,

    한 영혼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그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성품을 가지고 계신 지를 잘 설명해 주어서

    그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하고 함께 살도록 하여서 그들이 과부의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고아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이제 고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2절에 과부와 마찬가지로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는 돌아 갈 하늘 집이 없는 자가 나그네이고, 과부는 참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가 과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고아는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없는 자가 고아입니다.

     

    고아에게 가장 비참하고 가장 장 안타까운 것이 여러분들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가 없어서 용돈을 못 받기 때문에 그가 불쌍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 됐든, 고아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침을 주는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은 잘못했을 때 부모로부터 매를 맞습니다.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 고아라는 겁니다.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유독 문제가 많고 시련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그 회초리가 나를 때리는 이유는 내가 곁길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나를 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나와 참 관계를 맺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내가 곁길로 가든, 잘못을 하든,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지든, 세속적인 곳에 내가 들어가든 때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때린다는 건 뭡니까?

    내가 곁길로 가면 죽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서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롯을 그처럼 구하고 싶어서 그를 때렸던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소돔성으로 가족과 종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브라함보다도 더 찢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간신히 빼내어 훈련시키고 연단 시켜서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짓고 같이 살기를 바라셨는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장막집을 떠나 소돔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 중재하는 자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롯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구원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를 구원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친히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롯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롯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중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돔성에 의인 열명이 있지 않아서 불로 멸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롯을 구원 하고자는 소원을 가지고 성육신 하기 전 예수님 앞에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중재의 뜻에 따라 소돔성에 있는 롯을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롯을 소돔성에서 구원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롯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어둠의 구덩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었지만 롯은 그 구원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나올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롯은 그 만큼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기능들이 훼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벙은 바벨론 지역의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소돔 땅 왕들과의 전쟁이 나게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4절에 이 전쟁은 소돔지역의 왕들이 십이년 동안 그돌라오멜 왕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돔이 위치한 사해부근은 역청이 풍부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곳이었기에 주위 강대한 왕들이 소돔왕에게 조공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왕 연합군은 패하게 되고 그돌라오멜 동맹군은 모든 재물과 양식과 롯을 포함한 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 갑니다.

     

    이 때, 이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이 군대 318명을 끌고 이들을 뒤쫓아 가서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군대 숫자 318명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벨론 땅에 있는 왕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롯은 이 전쟁 중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롯과 그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기도를 했을까요?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며 살려만 주면 정말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롯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그 롯을 구원내는 방법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이 원수들의 손을 빌려서 롯을 전쟁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하는 방법이 아니면 롯을 돌이킬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구출되었음에도 다시 소돔성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죄의 힘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게 죽을 지경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다시 죄가 가득한 소돔성으로 갑니다. 롯을 구원시킨 것은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군대 318명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엘리에셀에 대한 얘기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 연약해져 소돔성으로 돌아갔다가 결국에서는 불의 심판에 의해서 그 거주하던 성이 멸망당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면 반드시 징계를 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포로가 되게 하는 일을 통해서 롯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표현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보여야 될까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빠진 아들에게 그런 방법으로 밖에는 자신의 사랑을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롯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방법, 롯이 징계를 받고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출 받았을 때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재물도 다 필요 없고 삼촌 곁에 하나님의 장막에서 함께 거하겠다고 얘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떠나 실패한 자, 구원은 간신히 받았으나 실패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경우와 달리 고아는 아버지가 없어 그 수많은 혜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때림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때릴 회초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을 사랑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100세에 이삭을 주기까지 25년 동안 숱하게 때리시고 위로하고, 다시 때리시고 위로하는 일을 통해서 그를 성장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삭이 다섯 살이 되어 엄마의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그때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 때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지 30년이 된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 기간을 400년, 어느 때는 430년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30년 기간을 포함해서 말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자신을 때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될 때마다 때림이 있다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을 때려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로 가게 하고, 왼쪽으로 치우쳤으면 왼쪽을 때려 또 바로 가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때리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위에서 내리 누르면 됩니다. 주저앉을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사도바울을 주저앉게 하고 꺼꾸러뜨리는 것을 보십시요.

     

    우리는 정말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고아는 불쌍합니다.

    하지만 때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가 없고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 없이 살게 되면 이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또는 원수 악한 영과 사탄 앞에서 실수투성이의 모습을 우리가 보이므로 그들이 나의 실수를 가지고 발목을 붙잡아서 나를 실족시키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와 권면을 늘 받아야 합니다. 그 징계와 권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집이 없는 자들에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영원한 새 예루살렘성, 천국을 전해주어 그들이 하늘 집을 소망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 압제 받는 삶에서 그들을 탈출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늘 집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다음은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신랑 대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세상에 있는 홀로 사는 그들의 참 남편,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처럼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내가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를 책임집니다. 이것이 과부를 돌보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아입니다.

    우린 그에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아버지께서 책임지시고 때리시고 회초리를 드셔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곁길로 가다가도 올바른 길을 찾아 바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뭡니까?

    결격 사항이 있는 자들, 모자란 자들, 뭔가 부족한 자들이 가난한 자입니다.

    혹시 누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혹시 누가 남편이 없어서 과부와 또는 홀아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누가 고아로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됩니다.

     

    이 모든 일은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하늘 성소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받게 하면 세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받을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야 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 고아나 과부에게 한 번, 두 번 물질적으로 도와줘서 잠시 잠깐 기쁘게 하는 일보다,

    그들이 영원한 만족, 영원한 안식, 영원한 위로,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예수님과 영원하신 성령님을 제대로 소개해 주는 일에 더 더욱 힘써야 하며 이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이 돌보는 일이 쉬우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해보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베트남에 있을 때 어린 아이가 잘못했길래 너무나 화가 나서 한 아이를 때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10여 년이 지난 뒤에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내가 용서를 빌어서 무마시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압제 받는 나그네, 이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합니까?

    나에게 그와 같이 선하신 아버지, 좋으신 아버지, 때리시는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와 같이 좋은 하늘의 집에 머물러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나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공급해 줄 신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정말 자세히 소개해 줌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 그분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표현해야 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 하늘 집을 소개해 주고 아버지를 소개해 주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자세히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며 참으로 다정다감하시고 세상에는 정말 존재할 수 없는 분임을 소개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뜻대로 행하였구나.” “아니 내가 언제 주님의 뜻을 행했습니까?”

    “네가 내가 옷이 없을 때 옷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네가 나를 돌봐 줬고 네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렇게 주님은 그가 한 일을 기억하시지만 그는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일을 당연히 해야 할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평상적인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예언도 하고 기도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돌보기도 하고 고아도 돌보고 과부와 압제 받는 나그네도 제가 돌보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 생각하고 삯을 바라는 일꾼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생각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억이 안 나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이유와 목적대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바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나타낸 겁니다.

    그들을 돌봄으로 그들에게 관심 가짐으로 아버지와 남편 되시는 예수님과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소개해 줄 때 가난한 자들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모든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하나님 없이 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처없이 방황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집도 없고 가족도 없다 보니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물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없습니다. 집은 가정입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나그네는 하늘의 집을 갖지 못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집이 없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그네이듯이 하늘 집, 본향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이 세상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다른 자들이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나그네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천대받고 멸시를 받으면서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나그네는 집도 가족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밥을 한 끼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손을 벌려야 됩니다.

    때문에 남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야 하고 때론 원하지도 않는 일, 청소도 해야 되고 고된 일도 해야 하는 종과 같은 처지가 되어 속박을 당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그네는 집을 찾아줘야 나그네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이 없는 자들, 바깥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들에게 하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집, 새 예루살렘성, 아름다운 보석으로 지어진 그 집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압제당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어 그들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돌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물론 집이 없는 나그네에게 이 땅에서의 실질적인 거처를 마련해주고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돌보는 것이며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제한적인 면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유치장 선교할 때, 갈 곳 없는 출소한 제소자들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들이 말씀으로 하늘 아버지와 하늘 집에 소망을 두지 못하면,

     

    그들은 다시 방황하고 옛 생활로 되돌아 가 다시 나그네가 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러한 돌보는 일은 마치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거처를 장만해 주는 것보다도

    영원한 집, 망가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집, 우리 본향집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 본향집이 자신들의 것임을 알려주고 소망을 갖게 하여 방황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나그네를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가 저에게 꿈을 물어보면, 저는 항상 사회사업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가지고 또 그런 돌보는 일을 해봤지만, 제가 느낀 것이 나그네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그보다도 그들 영혼에 진짜 하늘의 집, 영원한 하늘 아버지를 찾아 주는 일입니다.

     

    <과부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출애굽기 22장 22절에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과부는 어떤 사람이 과부입니까?

    남편이 없는 사람, 남편이 없이 홀로 사는 여인이 과부입니다.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이런 사람의 삶은 어떨까요?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힘든 일도 남편이 처리해주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홀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해야 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과부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 남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우리 모두는 그의 신부, 아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필요한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남성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님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존재, 마치 세상에서 아내 같이 한 마음이 되고 연합이 되고 일치가 되는 그런 관계를 우리와 갖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 나타내신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서 신랑이 신부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이 세상에 자신과 연합되고 일치된 신부를 찾으러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과부의 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불의의 사고나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어서 홀로 된 그들만 과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때문에 이러한 과부들을 여러가지로 돕는 일들 또한 그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도와줄 수가 없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 풍요로운 제물을 주고 또 시험대를 이 세상 가운데 두셔서 그들의 행위를 저울질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 내시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남편 없거나 부인이 없어 홀로된 사람들만 과부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주시는

    참 남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주님을 만났으나 탕자처럼 멀리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과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참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진정 과부를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 그들을 돌보는 것 또한 필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 그 일과 함께 반드시 말씀으로 가르쳐 알게 하는 일이 필요하며 이 일은 영적 과부들에게 자신의 참 신랑을 만나게 해주는 너무나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과부를 도와주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환경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들과 삶이 달라서 마음이 있을지라도 때론 헤어지기도 하고 소식이 단절되어서 만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매자가 되어서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어 그들이 예수님을 남편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들이 돌보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이 친히 그 과부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레루야!

    우리는 이 아버지의 집을 소개해줘야 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에게 하늘의 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늘 아버지를 믿고 하늘의 집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 가운데서 평안과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과부들에게 참 신랑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 과부의 삶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과부는 남편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하지만,

    한 영혼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그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성품을 가지고 계신 지를 잘 설명해 주어서

    그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영접하고 함께 살도록 하여서 그들이 과부의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고아를 돌보라는 영적 의미>

     

    이제 고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2절에 과부와 마찬가지로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는 돌아 갈 하늘 집이 없는 자가 나그네이고, 과부는 참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가 과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고아는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없는 자가 고아입니다.

     

    고아에게 가장 비참하고 가장 장 안타까운 것이 여러분들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가 없어서 용돈을 못 받기 때문에 그가 불쌍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 됐든, 고아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올바르게 가르침을 주는 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식은 잘못했을 때 부모로부터 매를 맞습니다.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 고아라는 겁니다.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유독 문제가 많고 시련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그 회초리가 나를 때리는 이유는 내가 곁길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나를 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나와 참 관계를 맺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내가 곁길로 가든, 잘못을 하든,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지든, 세속적인 곳에 내가 들어가든 때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때린다는 건 뭡니까?

    내가 곁길로 가면 죽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서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롯을 그처럼 구하고 싶어서 그를 때렸던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소돔성으로 가족과 종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브라함보다도 더 찢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간신히 빼내어 훈련시키고 연단 시켜서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짓고 같이 살기를 바라셨는데,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장막집을 떠나 소돔성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롯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 중재하는 자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롯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구원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를 구원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친히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롯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롯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중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돔성에 의인 열명이 있지 않아서 불로 멸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롯을 구원 하고자는 소원을 가지고 성육신 하기 전 예수님 앞에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중재의 뜻에 따라 소돔성에 있는 롯을 구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롯을 소돔성에서 구원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롯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어둠의 구덩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었지만 롯은 그 구원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나올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롯은 그 만큼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기능들이 훼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벙은 바벨론 지역의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소돔 땅 왕들과의 전쟁이 나게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4절에 이 전쟁은 소돔지역의 왕들이 십이년 동안 그돌라오멜 왕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돔이 위치한 사해부근은 역청이 풍부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곳이었기에 주위 강대한 왕들이 소돔왕에게 조공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왕 연합군은 패하게 되고 그돌라오멜 동맹군은 모든 재물과 양식과 롯을 포함한 포로로 잡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 갑니다.

     

    이 때, 이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이 군대 318명을 끌고 이들을 뒤쫓아 가서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 군대 숫자 318명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롯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벨론 땅에 있는 왕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롯은 이 전쟁 중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롯과 그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기도를 했을까요? 자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며 살려만 주면 정말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롯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그 롯을 구원내는 방법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이 원수들의 손을 빌려서 롯을 전쟁 노예로 잡혀가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하는 방법이 아니면 롯을 돌이킬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구출되었음에도 다시 소돔성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죄의 힘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게 죽을 지경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롯은 다시 죄가 가득한 소돔성으로 갑니다. 롯을 구원시킨 것은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군대 318명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엘리에셀에 대한 얘기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 연약해져 소돔성으로 돌아갔다가 결국에서는 불의 심판에 의해서 그 거주하던 성이 멸망당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면 반드시 징계를 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포로가 되게 하는 일을 통해서 롯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표현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보여야 될까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빠진 아들에게 그런 방법으로 밖에는 자신의 사랑을 보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롯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방법, 롯이 징계를 받고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출 받았을 때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재물도 다 필요 없고 삼촌 곁에 하나님의 장막에서 함께 거하겠다고 얘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떠나 실패한 자, 구원은 간신히 받았으나 실패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경우와 달리 고아는 아버지가 없어 그 수많은 혜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때림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때릴 회초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을 사랑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100세에 이삭을 주기까지 25년 동안 숱하게 때리시고 위로하고, 다시 때리시고 위로하는 일을 통해서 그를 성장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삭이 다섯 살이 되어 엄마의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그때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 때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지 30년이 된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 기간을 400년, 어느 때는 430년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30년 기간을 포함해서 말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자신을 때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될 때마다 때림이 있다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오른쪽을 때려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로 가게 하고, 왼쪽으로 치우쳤으면 왼쪽을 때려 또 바로 가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때리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위에서 내리 누르면 됩니다. 주저앉을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사도바울을 주저앉게 하고 꺼꾸러뜨리는 것을 보십시요.

     

    우리는 정말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고아는 불쌍합니다.

    하지만 때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가 없고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 없이 살게 되면 이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또는 원수 악한 영과 사탄 앞에서 실수투성이의 모습을 우리가 보이므로 그들이 나의 실수를 가지고 발목을 붙잡아서 나를 실족시키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와 권면을 늘 받아야 합니다. 그 징계와 권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집이 없는 자들에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영원한 새 예루살렘성, 천국을 전해주어 그들이 하늘 집을 소망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 압제 받는 삶에서 그들을 탈출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늘 집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다음은 남편이 없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신랑 대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세상에 있는 홀로 사는 그들의 참 남편,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처럼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내가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 신부를 책임집니다. 이것이 과부를 돌보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아입니다.

    우린 그에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아버지께서 책임지시고 때리시고 회초리를 드셔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곁길로 가다가도 올바른 길을 찾아 바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중에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뭡니까?

    결격 사항이 있는 자들, 모자란 자들, 뭔가 부족한 자들이 가난한 자입니다.

    혹시 누가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혹시 누가 남편이 없어서 과부와 또는 홀아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면 됩니다.

    누가 고아로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소개해 주면 됩니다.

     

    이 모든 일은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하늘 성소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받게 하면 세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받을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야 됩니다.

     

    압제 받는 나그네, 고아나 과부에게 한 번, 두 번 물질적으로 도와줘서 잠시 잠깐 기쁘게 하는 일보다,

    그들이 영원한 만족, 영원한 안식, 영원한 위로,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예수님과 영원하신 성령님을 제대로 소개해 주는 일에 더 더욱 힘써야 하며 이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 이 돌보는 일이 쉬우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해보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베트남에 있을 때 어린 아이가 잘못했길래 너무나 화가 나서 한 아이를 때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10여 년이 지난 뒤에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내가 용서를 빌어서 무마시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과부와 고아, 압제 받는 나그네, 이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합니까?

    나에게 그와 같이 선하신 아버지, 좋으신 아버지, 때리시는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와 같이 좋은 하늘의 집에 머물러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나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공급해 줄 신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정말 자세히 소개해 줌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 그분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표현해야 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 하늘 집을 소개해 주고 아버지를 소개해 주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자세히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며 참으로 다정다감하시고 세상에는 정말 존재할 수 없는 분임을 소개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뜻대로 행하였구나.” “아니 내가 언제 주님의 뜻을 행했습니까?”

    “네가 내가 옷이 없을 때 옷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네가 나를 돌봐 줬고 네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렇게 주님은 그가 한 일을 기억하시지만 그는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일을 당연히 해야 할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평상적인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예언도 하고 기도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돌보기도 하고 고아도 돌보고 과부와 압제 받는 나그네도 제가 돌보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 생각하고 삯을 바라는 일꾼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생각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억이 안 나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 이유와 목적대로 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바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나타낸 겁니다.

    그들을 돌봄으로 그들에게 관심 가짐으로 아버지와 남편 되시는 예수님과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소개해 줄 때 가난한 자들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모든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하나님 없이 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 (skynews mission) | 작성자 인도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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