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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11/ 왕이신 아기예수께 동방박사들이 드린 보물 3가지말씀 나눔방 2023. 8. 23. 20:49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마태복음 1장에 이어서 2장 말씀을 여러분들과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구주로서 세상에 오신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혈통에 따른
그리스도의 42대 족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분별된 두 개의 족보를 가지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라 하는 신성한
칭호와 그리고 그 예수님의 이름 안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삼일 하나님의 영이신 바로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임마누엘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1장에서 이 42명의 이름들을 통한 족보와 계보를 통해서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이라는 이름과 그리고 임마누엘 되신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위하여 특별히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되어졌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2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로 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셔서 동방 박사들이
찾아오시는 그분의 그 출생과 더불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2장 말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시고, 유년기 어린 시절을 바로 이 나사렛에서
사심으로 말미암아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우시고, 그렇게 되는 과정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누가복음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년기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데요.
누가 복음은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며, 이 구주이시라는
곧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특별히 누가 복음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대한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어린 시절이나 유년기에 대한 그러한 말씀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인 유년기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바로 이 마가복음에는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종으로서 또는 노예로서 계시되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종이나 노예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린 시절이나 유년기에 대한 이 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었고 그리고
요한복음 역시 상고의 때부터 태고의 때부터 영원 안에 계신 바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안에 계신
바로 이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태고적부터 계시고 바로 이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계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유년기에 대한 기록을 담을 어떤 그러한 이유나 문제가 없기 때문에 다루지 않고
반면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바로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리고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기록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고 기록되고 있다라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적합한 절차를 거치시고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합당한 사람으로 오셨다 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누가 복음인 것입니다.
예 바로 합당한 사람으로 오신 그분은 육신의 모양과 육체의 모양을 지니신 분이심을 또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인자 사람의 아들 인성을 가지신 합당한 사람임을
증거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 누가복음 2장 21절부터 52절까지 매우 긴 이 기록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합당한 방법으로 합당하게 실질적으로 피와 살을 가지신
매우 정상적인 사람이었음을 실제적으로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유년기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항목들을 열거하여서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바로 이 예수님께서 유대의 율법에 따라 바로 누가복음 2장 21절에 기록된 대로
부활 생명을 주시는 여덟 번째 아들이 되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았고 여러분 그 둘째 주 첫날인 여덟 번째 날에 예수님이라 이름 하는 이름이 이렇게 나타나게
되었다 라는 특별한 이러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낳자마자 이 가브리엘 천사에 의하여 그 이름을 예수님이라 하라 라고 얘기했지만
첫째 날이 아닌 여덟 번째 날 곧 바로 둘째 주의 첫날인 우리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그 주의 날
여덟 번째 날 바로 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예수님이라 칭하는 그 구약의 말씀의 관습에 따라
이름이 지어진 것을 통해서 바로 부활 생명을 주시는 여덟 번째 맏아들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 후에 태어난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바로 부활 생명을 친히 부여해 주시는 그런 여덟 번째 날에
부활의 날에 여덟 번째 아들들이 된 우리를 모두 주님께서 이렇게 담당하고 우리와 함께 하나 되는 삶을
보여주신 것을 성경 누가복음 2장 21절에 율법에 따라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았고 그 첫째 날이 아닌
여덟째 날에 예수님이라 칭하는 이름이 지어졌다 라고 누가복음 2장 21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여러분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마리아와 요셉에게 미리 이 천사가 들려준 이름이 바로 8일 날에 할례를 행할 때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간과하고 무심히 읽고 지나가게
되면 아무것도 모르게 되지만 이러한 것을 우리가 유심히 예의 주시하여 읽어 보면 아! 예수님 이름이 이렇게
여덟 번째 날에 지어졌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봄으로 말미암아 부활 생명을 주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그것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누가복음 2장 22절 ~ 24절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누가복음 2장 24절에
2:24 그리고 [주]의 율법에서 말하여진 것에 따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희생 헌물을
드렸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부모를 통하여 산비둘기와 어린 두 마리의 반구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아주 어린 산비둘기 한 쌍과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희생 제물로 들였다는 것은 그 당시에 바로 이 마리아와 요셉의 삶의 모습이 극심하게 매우 가난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동방 박사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받아서 그 큰 어떤 재물로 사용할 수 있는 그것들을 통해서 이집트로
잠시 자리를 옮기는 과정과 또 예수님이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일정한 삶을 통해서 그 동방박사에게 부여받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마 그 생활에 필요한 그러한 재물들로 사용되어진 것이라고 엿보여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시간들이 지나면서 왕가의 혈통을 가진 왕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난하게
되었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때 당시에 이러한 하나님의 안배와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이러한 적은 재물이지만 산비둘기 한 쌍과 어린 집 비둘기 두 마리를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부모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매년 유월절 날이 되면은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다라고
누가복음 2장 41절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1년에 세 차례
유월절, 오순절날, 장막절날 세 차례의 절기들에 참여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에 따라 바로 예수님께서도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12살이었을 때 절기에 올라간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만
41절을 통해서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여서 매년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다 라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장 40절에
2:40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게 되었고, 지혜로 가득 채워졌으며, [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52절에서도 2:52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키가 자랐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더욱 더 호의를 입으셨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예수님께서 특별히 영 안에서 강하게 됐고 또 신체적으로도 이 성장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특별히 사랑스럽게 보이셨다 나타내셨다 라는 말씀을 누가복음 2장 40절과 52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지금 마태복음 2장 말씀을 이렇게 교제를 나누고 있는데요.
어린 예수님이 이 마태복음 2장 1절 말씀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이 마태복음은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왕이신 구주로서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어린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 백성들의 왕이심을 어떻게 우리가 보아야 되는가
어떻게 그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시는 그러한 처음 발자취의 흔적을 어떻게 하나님의
안배에 따른 저자 마태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으로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런 어린 시절 탄생하셨을 그 전후로 보여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2장 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루었고 특별히 1장과 2장을 통해서는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출생과 두 개의 족보를 통해서 오신 그분은 예수님이라는 이름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취하셔서 그 예수님이라는 이름과 임마누엘 이름을 우리에게 이렇게 넣어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소유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갈망이요 목적이라는 것을 이렇게 보여줬다면
2장을 통해서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왕이신데 그 예수님이 어떻게 그 출생 전후로 하여
어떻게 발견되어져서 우리들에게 그 모습이 나타내지고 보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인 것을 입증한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왕이신데
그 왕으로서의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 이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서 계시가 드러나서 우리가 그분을 왕이신 그리스도로서 바로 믿고 그분을
따르고 영접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특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출생 전후에서 나타나신 그러한 행적들을 통해서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마태복음 1장 16절 말씀을 통해서는 바로 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우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는데
그 다윗의 후손으로서 특별한 두 개의 족보를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이렇게 선물해 주시기 위하여 정말 신성한 칭호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마태복음 1장 25절에서 그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
그리고 23절에서는 그 이름을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 부르라 라고 했지만 2장에서는
그 왕이신 그 출생하신 그리스도께서 출생 전후를 통해서 어떻게 그 왕이 오시고, 어떻게 예언되고,
그 왕이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왕이신 그리스도로서 바로 어린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왕으로서 나타내지고 보여지고, 계시되고 있는가를 보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2장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 세상에 오신 것을 계시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출생 그리스도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출생하신 예수님이 출생 당시에 그 율법이라는 곁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이 몽학 선생이
되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도해 주기까지의 사명과 위엄을 가진 그 율법이라는 곁길을 통하여
유대교라고 부르는 그 종교를 통하여 예수님이 바로 이 그리스도를 안내하는 율법이라는 유대교의 종교를
통해서 바로 이 구약 성경 39권에 의하여 형성되고 조직되고 구성된 바로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나타내시고,
이끌어오시기 위한 그러한 구약 성경에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다 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마태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의 기록을 보면 모두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되어진
바로 유대교가 신봉하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이 바로 이 성경 속에 있는 예언의 말씀들이
모두 율법이라는 곁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안내하기 위한 구약성경 39권을 가지고 있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교인들이 신봉하고 신뢰하는 그 하나님의 율법이 있고, 모세의 그런 10계명이 담겨 있는
그러한 유대 종교 안에 있는 바로 이 구약 성경 39권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고 그 말씀대로 청종하며 사는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신다 라는 것을 이렇게 성경 말씀에 미가서 5장 2절 말씀에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또 민수기 24장에 기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4:17 내가 그를 볼 터이나 지금 보지 아니하며 내가 그를
바라볼 터이나 가까이서 보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오며 이스라엘에게서 한 홀(笏)이 일어나서
모압의 구석구석을 치고 셋의 모든 자녀들을 멸하리로다.
24:19 통치권을 가진 자가 야곱에게서 나와 도시에 남아 있는 자를 멸하리로다, 하더라.
이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정말 왕의 지휘봉을 가지고 야곱에서 나와서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 탁월하시고 우월하신 으뜸되시는 왕으로서 나타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갈망을 가진 자들이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 굉장히 의아하고 의문이 되고 의욕을 가지게 되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약 성경 누가복음이나 또는 이 사복음서를 통해서 특별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통해서
이 종교적인 사람들은 바로 율법 안에 있었던 그런 구약 성경 39권들을 믿는 자들, 유대인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야곱에게서 나오고 왕의 지휘봉이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서 나오신다 라는 그 말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서 기다리고 고대하고 갈망했던 자들이 없었다 라는 것이 아주
특이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반대로 그 유대인들 율법 아래 있었던 자들은 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이 왕의 지휘봉이신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신다 라는 이 사실이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바벨론의 동방 지역에 있는 이방인들 동방의 박사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찾기 위하여왔다 라는 장면이
마태복음 2장 1절부터 2:1 이제 헤롯 왕 시대에 예수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매, 보라,
동쪽으로부터 지혜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2 이르되,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쪽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장면이 12절까지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3 헤롯 왕이 이 일들에 대하여 듣고 그와 또 그와 함께한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더라.
2:4 그가 모든 수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함께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겠느냐고
그들에게 다그쳐 물으매 2: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유대의 베들레헴이니이다. 대언자를 통해 이렇게
기록하신바, 2:6 유다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네가 유다의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리라, 하셨나이다, 하매 2:7 이에 헤롯이 은밀히
지혜자들을 불러 그 별이 나타난 때를 부지런히 그들에게 묻고 2: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어린아이를 부지런히 찾아보고 찾거든 또 내게 말을 전해 주어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하니라.
2:9 그들이 왕의 말을 듣고 떠나가는데, 보라, 동쪽에서 그들이 보았던 그 별이 그들보다 앞서 가다가 마침내
그 어린아이가 있던 곳에 멈추어 서니라. 2:10 그들이 그 별을 보고 심히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2:11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 어린아이가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이에게 경배하고
자기들의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그에게 선물로 드리니라.
2:12 그들이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떠나 다른 길로 자기들 나라에 가니라.
여러분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 유대인들이 아닌 동방에서 곧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사는 동방 박사들에 의하여
이 만왕의 왕으로 오신 왕이신 그리스도를 이렇게 이 고대하고 관심을 갖고 갈망하는 가운데 그분을 찾으러
왔다 라는 것이 참으로 특이하고도 참 이상한 오늘날에 두 번째 주님께서 오실 때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주듯 이러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박사들에게 안내하기 위한 빛나는 특별한 샛별 하나를 이렇게 보여주셔서,
그 샛별을 통해서 바로 이 동방 박사들이 그런 소수의 무리들로 구성되어진 이 동방박사들이
마태복음 2장 2절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께서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그분의 샛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라는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별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님의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땅에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는 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이 샛별이 그 거룩한 땅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동방 박사들 이 바벨론 지역에 있는 그들에게 안내하기 위한 특별한 이 빛나는
샛별을 주셨다 라는 것은 바로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초림 때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진
것처럼 재림의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일들이 재현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계시를 통해서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땅이 아닌 이방 땅에 거룩한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성이 아닌 이방 사람들의
지역에서 이 안내하기 위한 빛나는 샛별이 존재하여서 그들을 바로 인도했다 라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과 거룩한 종교가 아닌, 유대교로부터 바로 성전과 거룩한 땅이 아닌 바로 그 유대인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인 거룩한 백성들도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아닌, 멀리 떨어진 아주 이역 만리나 떨어진
그러한 동방 지역에서부터 이 하나님이신 이 그리스도께로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안내하기 위하여 특별히
빛나는 이러한 별들을 주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신기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특별한 신비한 계시의 말씀이라고 이렇게 엿보아지는 것입니다.
이 빛나는 별은 모든 거룩한 것들로부터 완전히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그 이방 땅에 있는 바벨론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동방 박사들 몇 명의 이방 사람들에게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이 유대인의 왕에 관한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오히려 성경 39권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보다는 이방 그 천문학자들일 수 있고,
또는 이방의 어떤 현자들, 바로 이 발람 선지자의 후손들인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동방 박사들인 이방 현인들은 아마도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을 예의주시하면서 이 말씀에 따라 굉장히 큰 공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이 샛별에 대한 연구를 천문학자이면서 현자들이면서 이 관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바로 이 왕의 지휘봉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신다 라는 이러한 일들을 바로 이 신명기와 민수기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들이 이러한 관심과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하여 준비하고 예비한 자들임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명기 23장 4절 말씀을 들여다봐야 됩니다.
신명기 23장 4절에 바로 이 발람이라는 자에 대해서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발람이라는 자는 여러분이
잘 알지 못하지만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를 메소포타미아 이 동방 지역 이 동방 박사들이 사는 지역이
이 브돌에서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이곳이 발람의 고향이에요.
23:4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그들이 빵과 물을 가지고 길에서 너희를 맞이하지 아니하고
메소포타미아의 브돌에서 브올의 아들 발람을 사서 너를 치고 저주하게 하려 하였느니라.
그리고 민수기 2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브올의 아들 발람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람이므로 말미암아 동방 박사들이 사는 그 동방
지역 바로 이 바벨론 나라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사는 발람과 같은 지역의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발람이라는 선지자의 후손들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여튼 브올의 아들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의 동방 지역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 동방 지역에 살았던
발람이 민수기31장 8절에 보면 아주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31:7 그들이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 족속과 싸움을 벌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31:8 그 죽은 자들 중에서 남은 자들 외에 미디안의 왕들을 죽였으니 곧 에비와 레겜과 수르와 훌과
레바 즉 미디안의 다섯 왕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도 칼로 죽였더라.
그래서 이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이 동방박사들은 이 발람지역의 출신이었던 자신들의 조상이 이었던
이 발람이 선민 이스라엘을 저주 한 후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저주받은 처참한 죽음 당하게 되고 그리고
민수기 24장 24절에 깃딤의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괴롭게 하며 에벨을 괴롭게 하리니
그도 영원히 멸망하리로다, 하니라.
이 앗수르를 괴롭게 하는 일이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벨을 괴롭히겠으나 에벨이 뭐죠? 에벨은 샘의 증손자가 바로 에벨인 것입니다.
에벨의 때에 베델이라는 자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이 나뉘었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에벨은 강 건너편이라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강 건너편이라는 것은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브올이
태어났던 지역이고 그리고 동방 박사들이 살았던 지역임으로 말미암아 에벨을 괴롭히겠으나 이게 뭐예요
물론 앗수르도 괴롭히고 에벨을 괴롭히겠다 라는 이러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런 에벨 자신들의 지역에 있는 강 건너편에 사는 동방 지역의 모든 자들을 왕으로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괴롭힘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24절 끝에 그 또한 멸망에 이르리라. 멸망에 대한 이 무시무시하고 두렵고 공포스러운 말씀을
듣고 이 동방박사들인 현자들,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했던 것입니다.
무슨 연구를 했습니까? 이 오신다라는 그분이 누구냐라고 했을 때 바로 구약 성경 민수기 24장 17절의
말씀을 이들이 예의주시하면서 이 말씀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가 그분을 보나 당장의 일이 아니며 당장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알았습니다.
내가 그분을 바라보나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그거는 가까운 일이 아닌데 언젠가 장차 이분이 나타나실 것을 알았습니다.
누구를요? 에벨 강 건너편에 있는 자신들의 민족들, 자신들의 백성들을 모두 멸망에 이르게 한다 라는
이 민수기 24장 24절 말씀을 그들이 알고 이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오히려 구약 성경 39권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보다도 자신들의 민족을 멸망시키겠다 라는 이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연구한 바로
그장면의 주 내용이 민수기 24장 17절에 있는 것입니다.
별 하나가 이게 샛별에 대한 얘기입니다.
별 하나가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는 장면이 나오죠 별 하나가 야곱에게서 나오고 왕의 지휘봉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 그분은 여기서 쭉 이제 나옵니다.
24:17 내가 그를 볼 터이나 지금 보지 아니하며 내가 그를 바라볼 터이나 가까이서 보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오며 이스라엘에게서 한 홀(笏)이 일어나서 모압의 구석구석을 치고 셋의 모든 자녀들을
멸하리로다. 24:18 또 에돔은 소유물이 되며 세일도 그의 원수들의 소유물이 되고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하리로다. 24:19 통치권을 가진 자가 야곱에게서 나와 도시에 남아 있는 자를 멸하리로다, 하더라.
24:20 또 그가 아말렉을 바라보며 비유를 지어 이르되, 아말렉은 민족들 중에서 첫째였으나 그의 마지막 끝은
이러하리니 곧 그가 영원토록 멸망하리로다. 24:21 또 그가 겐 족속을 바라보며 비유를 지어 이르되, 네 거처가
견고하며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24: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겐 족속이 소멸되리니 마침내 앗수르가 너를 포로로 잡아가리로다, 하고 24:23 또 그가 비유를 지어 이르되, 슬프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시는 때에 누가 살리요! 24:24 깃딤의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괴롭게 하며 에벨을 괴롭게 하리니 그도 영원히 멸망하리로다, 하니라. 라는 무시무시한 이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별 하나가 야곱에서 나오게 되면, 그 왕의 지휘봉이신 이스라엘 왕을 통하여 바로 자신들을 멸망시키겠다는 이 왕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임할 진노의 심판과 진노의 멸망을 모면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그리스도의 오심 초림하시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장면이 마태복음 2장 1절의 말씀입니다.
2:1 이제 헤롯 왕 시대에 예수님께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매, 보라,
동쪽으로부터 지혜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2 이르되,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쪽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예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향이었던 발람의 후손들인 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그분의 별이 떠오르는 별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이 별에 대한 얘기가 바로 이 동방 박사들을 이끌어오게 한 바로 안내하기 위한 빛나는 샛별이 바로
그래서 이 구약 성경 39권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 거룩한 땅에 살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오히려 발람 선지자의 고향의 한 지역에서 그의 후손으로서 삶을 산 이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이 별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모면받기 위하여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뵀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민이요, 거룩한 땅에 존재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유대인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발람의 후손들인 메소포타미아
동방의 현인들, 동방의 천문학자들, 동방 박사들에 의해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이 빛나는 별로 상징되고 있는 바로 그리스도께로 안내하기 위한 빛나는 샛별이 바로 유대 땅이 아닌 이방 땅에 있는 몇몇 이방인들에게,
소수의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분들이 바로 이 별 하나가 야곱에서 나와서 왕이신 그리스도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 왕의 지휘봉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멸망시킬 것이라는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들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해서 현자들이며 천문학자이며 박사들인 이들이 바로 이 별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아주 유난히 확연히 분별되어진 그 빛나는 새벽별을 통해서 유대인의 왕이 오실 것이라는 이 민수기 24장 17절 말씀을 이렇게 자신들의 진노의 심판의 손길을 이렇게 모면하기 위해 이방 동방 박사들을 마음에 감동시켜서
그들을 샛별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안내하기 위한 빛나는 별을 제공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빛나는 별을 따라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의미를 모르면 왜 갑작스럽게 동방박사가 이렇게 등장이 되는지 우리가 의아해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랜 역사의 시간들을 통해서 이 발람을 통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히
여기심을 보고, 그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이역만리나 되는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었던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들인 이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이게 그리 멀지 아니하는 거리임으로 말미암아 그때 당시에 교통수단이 없었던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2~3시간이면 넉넉히 갈수 있는 거리임에도 그곳으로 가서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한
그분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 라는 것은 그때 당시에 신앙의 상태와 모습이 왕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이방 민족들 가운데 이방 사람들에게 이렇게 축복의 수혜가
넘어감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 교인들이 오히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동방박사들인 천문학자들, 이 현인들, 이 소수의 이 동방 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갖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예 동쪽에 메소포타미아 바벨론의 먼 그 이역만리의 동방으로 와서 바로 그 별이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아주 빛나는 유독히 탁월하고 우월하며 아주 유독 큰 별이 이렇게 이 세상에 자신들 위에 바벨론의
그 동방 지역에 나타난 것을 보고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그 별 샛별임을 알고 그 별을 따라서 인도함 받아
바로 이렇게 길을 떠나게 됐던 것입니다.
예 유대인들은 유대의 종교인 율법을 통하여서 유대인들을 하나로 이렇게 끌어모으는 구약 성경 39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은 가지고 있었는데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이 샛별 그 이상의 별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39권의 구약 성경도 가지고 있어야 되지만 바로
이 그리스도께 안내하기 위한 직접적인 그 안내를 위한 빛나는 별인 이 갈망을 따른 이 샛별도 가지고 있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성경도 가지고 있고 하늘에 있는 그 빛나는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해 주고
유대인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별들도 소유하는 것이 여러분 아주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이 빛나는 별, 그리스도께 우리를 안내해 주는 빛나는 별을 가지지 않고 성경만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은 지금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한 사람도 베들레헴에 방문하여서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계시하고 있는 성경도 가지고 있어야 되지만, 이방인들처럼 성경은 가지고 있지 못 하더라도 바로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이상의 별, 그 빛나는 새벽별을 가지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성경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되고, 그리고 이상의 별,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그 이상을 가진 별에 관해서는 이방인들과 같은 동방 박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을 때 우리가 그분을 만나볼 수 있는 첩경인 별과
그리고 성경인 것입니다. 예 이상을 향한, 갈망을 향한 안내를 위한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해 주는 별과
그리고 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바로 두 번째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우리가 영접하고 그분을 위해서 이렇게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늘의 별의 이상을, 바로 이 갈망을 따른, 이상을 가지게 한 그런 하늘의 별의 이상을 따라
왔지만, 자신들의 개인적인 어떤 생각과 자신들의 어떤 타고난 역량이나 지혜, 천연적인 관념을 가지고 별을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바로 그 동방박사들이 별의 이상을 봄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유대인의 왕, 바로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왕의 지휘봉을 가지신 왕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알았지만,
바로 유대인의 왕이 곧 이렇게 나타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별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그리스도께서 계신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신 베들레헴으로 가야 되는데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그냥 보편적인 마음의 생각들로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서 아마도 거룩한 땅 안에
중심지역인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탄생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유대 나라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길을 간 것이 1절, 2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뭐라고 써 있죠 예수님께서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후 보아라 박사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러분 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갔었어야죠. 왜냐하면 그 샛별이 이 왕이신 그리스도께 안내하기 위한 빛나는 별인 이 샛별은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 자신들의 천연적인 관념을 완전히 벗어내고 올바른 노선을 따라 베들레헴에 갔었어야 되는데 자신들의 어떤 개인적인 지혜나 영리함이나 그런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큰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 땅에 있는 두 살짜리 밑에 수많은 아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들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른 바로 자신들의 어떤 지혜나 영리함을 통해서 나온 그 결정은
별빛으로 빛나는 새벽별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진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그 별의 인도함을 따라서 한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 부분에서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서 자신들의 지혜에 의하여 바로 이 참된 노선이요
올바른 노선인 베들레헴이 아닌 그 잘못된 노선인 그곳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틀린 곳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
마태복음 2장 1절 하반절에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잘못된 곳이었어요. 그것은 거룩한 성전이고 거룩한 땅이고 거룩한 종교인들이 있는 곳이지만
바로 거룩한 종교가 있고, 거룩한 백성들이 있고, 거룩한 제사장들이 있고,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지만
그곳이 아닌 생명의 떡집이라 하는 이름도 없는 그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바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 땅의 중심인 바로 유대인들이 사는 수도가 바로 예루살렘이고 성전이
위치한 곳이 예루살렘이지만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비밀스럽고도 은밀하고도 내밀스럽게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아주 쉽게 그분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그분을 만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서 이런 일을
도모했다는 것입니다.
갈망이 없는 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유대 땅 가운데 살고 있는 유대인들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예수님께 경배하고자 찾아온 사람이 없었다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박사들이 자신들의 어떤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만약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직접적으로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이 탄생하신 예수님을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바로 경배하고 돌아갔더라면 이 베들레헴의 그 두 살짜리 밑에 아이들이나 또 예수님이
죽임당할 뻔한 이 심각한 큰 일들을 야기시키는 일을 그들이 하지 않았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 잘못된 길로 자신들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잘못된 길로 인도되어지는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바로 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두 살짜리의 그 어린아이들 수많은 아이들이
죽음을 정말 순교 아닌 순교를 당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것이 마태복음 2장 16절부터 18절까지의 특별히 16절 말씀인데요
이에 헤롯이 자기가 지혜자들에게 우롱 당한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 자기가 지혜자들에게
부지런히 물은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것의 온 지경 내에 있던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이니라.
이것을 17절에 2:17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으니 일렀으되,
2:18 라마에서 거기서 애통하고 슬피 울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것은 라헬이 자기 아이들로
인하여 슬피 우는 것이라. 그들이 없으므로 그녀가 위로 받기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였느니라.
헤롯이 박사들에게 우롱당한 것을 알고 매우 분노하여 사람을 보내서 그때로부터 아마 전후로 더 많이
아마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넓게 시간을 확대하여서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온 지역에 있는 혹시
그 옆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으니까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에 있는 모든 성 안에 있는 남자들을 두 살부터
그 아래를 다 죽였다는 얘기입니다. 베들레헴 뿐만이 아닙니다.
얼핏 성경을 읽어보면 베들레헴에 있는 아이들이 죽었나? 아닙니다.
그 주변에 온 지역에 그러니까 그 지역의 사방, 그 발걸음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지역에 있는 아이들을
다 죽임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몰살당했을까요? 여러분 이곳은 바로 이 동방박사들이 잘못된
자신들의 천연적인 관념에 의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받아 가는 일 때문에 올바른 길, 올바른 노선 안에 있는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이 아닌 그곳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엄청난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귀한
생명들을 잃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적인 안배가 없었더라면 이 동방 박사들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하여
예수님까지도 크게 잘못되어진 일을 경험했을 수도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이 전적으로 보호받으실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샛별 그 이상을 통한 갈망을 통하여 가지게 된
그 별이라는 이상과 함께 성경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은 가지고 있었지만 별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 동방 박사들처럼 발람의 후손들인 그들이 그 오시는 그 야곱에게서 별이 하나가 나오는데
그분이 왕의 지휘봉을 가지는 왕이신 그리스도가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자신들 그 강 건너편에 있는 바벨론이라는 동방 지역에 있는 모든 자들을 멸망 시키신다 라는
민수기 24장에 있는 말씀들을 보고서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별, 이 이상의 별을
가지고 그를 따라 옴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누리지 못했던 주님을 경배 할 수 있는 일을 그들은 경배함으로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이신 이 구약성경 39권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성경은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그분을 영접하고자 하는 그러한 이상의 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한 사람도 베들레헴에 찾아오는 자들이 없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유대인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샛별을 가지는 자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샛별과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고 천연적인 관념을 버리기 위하여 미혹되고
잘못된 노선을 따라 살지 않고 올바른 노선에 들어가기 위해서 라도 성경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혹되고 우리가 잘못 인도받지 않기 위해서, 곧 그릇된 길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있어야 우리를 올바른 노선으로 인도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동방 박사들이 이러한 샛별에 대한 이상과 올바른 노선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고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샛별이 있는 상태에서 미가서 5장 2절과 같은 너 유대 땅 베들레헴이 결코 적지 않다 라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라면 잘못된 노선인 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올바른 노선의 길인 베들레헴으로 갈 수가 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통한 이 노선에 따른 문제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와 같이 유대인들처럼 성경이 있는데 이상인 별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그러한 불쌍한 자들이 될 수 있고 또 한편 이상의 별을 가지고 인도받았으나 그 마지막 결정적인
상황에서 올바른 노선을 갖게 하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미혹되고 잘못된 노선을
가지 않기 위해서 올바른 노선으로 반드시 가기 위해서는 성경과 바로 빛나는 이 별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천연적인 관념을 따라 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예루살렘에 갔지만
바로 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헤롯 왕에 의하여 바로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태어나겠느냐 라고 2장 4절을 통해서 말했을 때 그들이 말하기를 미가서 5장 2절인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신언자인 미가가 그렇게 우리에게 기록하였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이 성경을 통하여 그들의 잘못된 노선, 잘못된 길인 바로 이 예루살렘에 가던 발걸음을 새벽별이 아주 빛나게 나타나줘서 올바른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이 아닌 빛나는 그 새벽별을 통해서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았다 라고 여기서 2장 5절에 그들이 말하기를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이 두 가지 이상의 빛나는 새벽별과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결합이 됐을 때 우리는
잘못된 노선이 아닌 올바른 노선인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고, 영접할 수가 있고, 경배해 드릴 수가 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이상에 따른 이 새벽별과 함께 성경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바로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으로
곧바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천연적인 자신들의 관념을 다 내려놓고 그런 천연적인 자신들의 관념을
너무 앞세우지 않고 그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잘못 인도되지 아니했더라면 그 인도하는 별이며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그 샛별은 반드시 분명하게 확실히 예수님이 계신 베들레헴으로 인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연적인 자신들의 관념과 성경이 없었던 그 이유로 미혹되어서 잘못 인도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릇되어서 예루살렘을 가게 되어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한 이상에 따른 갈망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별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연적인 관념을 버리고 성경에 따른 베들레헴에서 나타날것입니다 라고 신언자
미가를 통하여 그렇게 기록 하였습니다 라고 했을때 바로 9절에서 빛나는 별이 또다시 크게 나타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 때 그들이 천연적인 관념을 버리고 미가서 5장2절의 성경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을 알았을때
그 베들레헴이라는 지역이 얼마나 넓겠습니까 그런데 전에 떠올랐던 별을 보았을때 그 큰 세력들이 앞서서
인도하여 가다가 정확히 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섰다 라고 얘기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새벽별과 같은
빛나는 이상은 항상 성경과 함께 할 때 빛을 발 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그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 모든 종교적인 사람, 유대인들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동방 박사들과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동방 박사들이 이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 하나가
야곱에게서 나오는데 그 왕의 지휘봉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동방 박사들과 함께
동행하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자가 없었다는 사실 이 사실은 뭡니까? 바로 초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린
자들이 없었던 그 당시에 종교적인 어떤 영적인 형편과 상태와 그들의 위치에 대해서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때 당시에 동방 박사들의 얘기를 듣고 미가서 5장 2절에 이렇게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왕의 홀을 가지고 별하나가 야곱에게서 나오고 왕의 지휘봉을 가진 자가 태어나신다고 얘기를 했네요
라고 하면 그 동방박사들과 함께 얼마 되지 아니하는 거리이기 때문에 갔을 것입니다.
동행을 하고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그런 자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 베들레헴에서 과연 그분이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나시는
일이 과연 있겠는가 라는 그런 궁금증과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마음도 없는 채 그들과 함께 가지 않은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바로 지금 오늘날 성경은 가지고 있고 말로는
믿음 안에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분을 향한 갈망인 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 이상의 별, 그리스도께
안내하기 위한 그 빛나는 별인 갈망을 혹시 가지고 있지 않은지,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그 별 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그 별을 우리가 소유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지를 지금 우리의 모습과 상태를 되돌아 보게
되는 말씀같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택한 백성으로서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출생하실
것이라는 얘기를 동방 박사들에게는 해줄 수 있었는데 그 얘기를 해준 그 말을 사실 자신들이 신뢰하지 않고
아무도 그 신뢰에 따른 행동으로 그들과 함께 동행하지않았다 라는 사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만왕의 왕이시며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절대 갈망하지 않았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안에 있는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그 자체이신
실제이며 인격이신 그 메시아의 사실과 인격은 전혀 갈망하지 않고, 고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위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로는 종교적이고 영적이라 하지만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 안에 있고, 성경의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그리스도를 관심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경배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이러한 넌센스적인 일들이 우리 삶 가운데 펼쳐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우리들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오실 이때에 이러한 성경의 지식은 있지만 종교적이고도 영적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성경만을 주의할 뿐 실제적인 그 성경 속에 있는 그리스도는 내가 가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 최종 완성되고 완결되어진 생명 주시는 영이시요 발아시키는
영이요, 분발시키는 영이시요 우리를 밀어주시고 후원해 주시는 영이시요 우리 삼일 하나님의 영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내 안에 나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 께서 살아계시기 위한 이 일 하나가 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며 상태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점점점점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주입되게 하기 위한 이끌어오기 위한 들어오시기 위한
이 작업이 점점점점점점 이렇게 가까이 오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부활 안에서 삼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짐으로 이제 주님이 우리 영 안에 임마누엘 땅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것에 대해서 관심하고 있는 자들이 거의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실제적이면서도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관심 갖고 집중하고
갈망했더라면 예루살렘으로부터 2~3시간이면 갈 수 있었던 베들레헴에 당연히 때를 지어서 무리를 지어서
감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경배 드리는 일을 그들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그 어느 한 사람도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바로 사신 그리스도이시며 실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 39권에 대한 성경 지식은 박식하여서 성경을 아주 달달 외우고 있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종교적이다 영적이다 하나님과 만났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빛나는 새벽별인 이상을 갖는 것은 바로 성경 지식과 함께 어우러지고 결합됨으로 말미암아 이상을
가짐으로 성경의 지식이 내 것이 되었을 때 올바른 삶의 길과 생명의 노선을 따라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갖는 것과 성경의 지식을 갖는 것은 각각의 다른 일이지만, 이 두 가지의 각각 다른 일들이 합쳐져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한 갈망의 마음을 갖고 그 이상을 갖고 성경 속에 있는 말씀대로 집중을 한다면 우리는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으로 가는 올바른 노선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사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소유할수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하는 빛난 그 별을 이 갈망에 따른 이상을 보기를 원하고 성경을
묵상하여 알게 된 것을 이상을 통해서는 보게 되고 성경을 통해서는 앎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소유하는 이러한 실제적인 축복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것은 바로 성경에 대한 지식도 가져야 되고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 하고
안내하기 위한 빛나는 별인 산 이상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 그 산 이상인 그 빛나는 새벽별이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산 이상과 성경 안에 있는 자들 성경을 통해서는 알고 이상을 통해서는 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 산 별을 통해서 우리를 안내하고 인도해 주고 바로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이 산별을 이 동방 박사들이 베들레헴 성으로 이렇게 친히 이끌림 당하고 인도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출생하신 하나님이신 아기 예수님이 있는 그 집으로 인도받았을 때 그 장소에서 별은 멈추었다 라고 마태복음 2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예 바로 정확하게 동방박사들을 인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혹이나 어떤 의문이나 어떤 의심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당연히 멈추어선 그 별을 통해서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고 있는 별이 멈춰진 그곳에 아기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직접 인도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러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 주고 안내해 주며 그리고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고 있는 그 빛나는 별의 이상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지고 있는 이상을 통해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볼 때 우리는 정확하게 잘못된 노선이 아니라 올바른 노선 가운데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별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안내해주고 동방 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빛나는 새벽별을 통해서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발견한 그분께 경배하는 일들이 있었고 보배합을 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라고 얘기를 하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이 경배했다 라는 표현을 왜 11졀에 언급을 해 놓았을까요? 이 소수의 동방박사 한 10여명 내외가 됐을까요?
이들이 이렇게 주님께 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경배하는 장면이 있었던 반면에 유대인들 중에 그 어떤 사람도 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왕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하고자 하는 이 빛나는 바로 이 길을 안내하고 인도해 주는 빛나는 별,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이 갈망에 따른 이 새벽별 같은 이상의 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갈망하지 않은 자들에게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요 바로 아기 예수님을 경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동방 박사들 외에 그 어떤 사람들도 경배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수의 동방 박사들은 바로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 하였는데 그 경배하신 아기 예수님은 비록 아주 어린
아기 예수님 이시지만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인성을
가지고 오신 두 종류의 본성을 가지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 그 동방박사들이 경배한 그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래서 마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놀라우신 좋은 자 영원하신 아버지 화평의 왕 만왕의 왕 평화의 왕이신
그 아기 예수님께 경배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에게 드렸던 것이
마태복음 2장 11절에 보물함을 열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라고 얘기했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 세 가지 보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에 대한 의미는 바로 이 성경에서의 금은 계시록 21장 22절에 나오죠
예 정금으로 조성되어지고 건축되어진 바로 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바로 이 정금은 창세기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정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기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이 33년 반 동안의 생애와 공생애를 사신 아기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아기 예수님으로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셔서 강보에 쌓여진 채 계셨지만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신성 그 자체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향은 향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아주 좋은 냄새를 드리는 바로
부활을 상징하는 부활의 향기를 예표하고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유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부활 하신 것은 다만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후에 이틀 동안의 깜깜함과
어두움 가운데 임한 후에 그 무덤 가운데 들어갔던 후에 이틀 동안의 황폐함을 지난 뒤에 3일째 되는 날,
곧 둘째 주의 첫날인 여덟 번째 날 그 주일날 막달라 마리아 앞에 새벽 미명에 나타나셨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마리아와 마르다, 특별히 마르다에게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11장 바로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다음에 3일 만에 부활했을 때 부활이다 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그죽으시기 전에 그분 자체는 부활이셨다는 얘기입니다. 부활이시고 생명이신 것이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깨닫지 않으면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도 이미 그분은 부활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 이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서 하신 33년 반
동안의 모든 생애가 부활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8일날 할례를 예수님이 받은 이유가 부활의 생애를
사시는 주님을 나타내고자 구약의 성경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바로 예수님이 이 할례를 베풀고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칭호를 받게 됐던 것이 8일째 된 날이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 52절에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라는 이 말씀은 그 지헤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논쟁을 하였던 유대인들이 아주 경탄하고
큰 은혜 가운데 있는 그 누가복음 2장 40절, 47절, 52절 말씀을 통해서 아주 비범하고 우월하고 탁월한 하여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이 예수님이 어린 시절 유년기 때에 이러한 은혜 가운데 살았다 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삶을 통하여 유향 곧 부활의 향기인 부활의 달콤한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했을 때만 부활의 달콤함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서 삶을 살고 그리고 부활하여 승천하기까지 모든 부활의 향기에 대한
달콤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사망이나 죽음은 결코 부활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를 취하거나 잡거나 소유하거나
심지어 부활의 생애를 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만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이었다 라는 것을 요한복음 11장 25 통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르다에게 이 주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은 바로 그대의 오빠가 다시 살아날 거 야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부활을 마지막 날에
언젠가 때가 되면 그때 다시 살릴 것이라는 부활 할 것이라는 주님의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주님께서는 이미 죽음을 당하기 전에 그분은 부활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당장에 지금 살리실 수 있고 그리고 살리시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오해를 했죠. 현재 부활의 말씀을 한 것은 마지막 날에 때가 이르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그래서 우리가 마르다와 같은 이러한 잘못된 해석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어떤 근본주의적인 어떤 가르침 어떤 인간적인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서 주님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람들에게 믿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엄청난 해를 주고 엄청난 손실과 손상을 입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당하기 전에 이미 부활이셨어요. 제가 이 얘기를 두 편에 걸쳐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당하기 전에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전에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죽은 자를 부활시켰던 것이 일시적이나마 살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나사로를 살리시고 바로 이 죽음을 당한 그 과부의 독자도 살리신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 영원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자신
자체가 바로 그분의 인격이고 참이요 실체이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주님의 그 현재의 부활 생명을 누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삶의 차이를 가지고 오는 그러한 잘못된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지금의
현재의 부활 생명을 내가 소유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게 죽음을 당하시고 두 번째 주 첫날인 여덟 번째 날에 그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두 번째 주의 첫날이죠. 그날이 여덟 번째 바로 주의 날, 부활의 날, 그 부활의 날을 통하여 여덟 번째
아들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들은 부활의 생애 안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현재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 그러한 자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예 참 이게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님께서 죽기 전에 부활 생명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 속해 있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 오늘 우리들의 부활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다라는 것이 바로 이 유향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바로 유향은 부활의 향기 아주 달콤한 향기를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죠.
예 그분의 전 생애가 죽고 나서 부활하신 후에도 마찬가지 처럼 이 모든 것을 집약하여서 하나로 담기 위해서
둘째 주 첫날인 여덟째 날 부활의 날에 바로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주의 날에 주일날이죠 이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매우 부활의 향기를 달콤한 향기가 되게 하도록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활 생명을 소유하게
해 주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몰약은 뭡니까? 사람이 죽고 난후 장사 지낸 자에게 시신이 부패되는 일을 방지하고자
냄새 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죽음의 향기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몰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망의 향기가 없지만 사람들이 보통 죽으면 사람들에게 아무리 거기에 좋은 파우다라든지
또는 향수라든지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을 골고루 바른다 할지라도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는 사망의 냄새,
사망의 향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죽음의 그 향기 자체가 있었다 라는 것이 몰약을 주님께 경배할 때 본문을 통해서 드렸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를 통해서 아기 예수님에게 이 보물함을 열고 세 가지 예물을 드린 것은 성령님의 감동 아래
바로 아기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리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 분은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의 온 생애가 유향의 향기로 충만한 부활의 생애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주 달콤하게 했고, 하나님을 아주 기쁘게 했고, 그분의 십자가를 통한 죽음의 생애까지도 죽음의 향기가 충만한 생애가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생애의 삶을 사실 것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셨을 때 해마다 유월절에 참여하는 그러한 삶을 사셨는데 바로
누가복음 2장 42절과 43절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셨을 때 마리아는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삶과
생애를 사실 동방박사를 통해서 그러한 보물들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러한 삶을
사실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 마리아와 요셉은 에수님을 계속 찾으러 다녔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큰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명절 후에도 집에 돌아가는 그 일행들과 같이 동행해서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따로
그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음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죠.
2:41 〔소년 시절의 예수〕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2:42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그분은 벌써 신성한 본성을 지니시고 유향의 향기로운 삶을 통해서 부활의 생애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죽음의 향기가 충만한 생애가 될 것임을 알고 인식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특별히 마리아가 예수님을 이렇게 책망하여서 얘기하는 장면을 우리가 누가 복음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의 일에 관계해야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까라고 아버지 일에 이렇게 정금을
소유받은 신성한 본성을 지니시고, 바로 이 향기로 충만한 부활의 생애의 삶을 살고 그리고 죽음의 향기가
충만한 생애가 되는 이분은 아버지의 일에 관계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권익을 위하여 전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아버지의 권익을 위해서 죽음을 당할 것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서 내가 아버지 일에 관계해야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까라고 말씀하신 후에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명절이 끝난 다음에도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권익에
자신이 바로 아버지를 위해서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분의 의도가 궁극적으로는 죽임을 당하는 몰약의 삶을
살기 위해서 죽임 당함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의 생애 가운데서도 부활의 달콤한, 충만한 부활의 33년 반 동안의 삶 전체 속에서도 죽음의 향기가 충만한 생애인 바로 죽임을 당한 가운데서도 몰약의 향기, 부활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고, 부활의 향기 속에서도 유향의 향기뿐만 아니라 몰약의 죽음의 냄새, 달콤한 향기를 동시에 가지고
사신 분이 바로 누가복음 2장 49 절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될 줄을 아버지의 권익을 위해서 나는 사는 자로 내가 지금 이 성전에 있는 것입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부활의 향기와 죽음의 향기에 대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에
대한 얘기가 간접적으로 이렇게 암시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동방박사가 보배함을 열어서 이 세 가지 보물들을 통해서 부활의 생명을
사시고 십자가 죽음 아래 계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께서는 부활의 생명과 더불어
십자가 죽음 아래 항상 사시는 삶을 사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보물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부활의 생명을 사시기 위하여 33년 반 동안에
온 생애가 부활의 생명을 사셨고, 그리고 모든 삶 전체가 십자가 죽음 아래 계시는 삶을 사셨는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나타나셨을 뿐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분이 바로 이 사는 삶 가운데
죽임 당함이 있었고, 죽임 당함 속에는 바로 달콤한 몰약의 향기, 부활의 생애의 삶의 향기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임당한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고, 그리고 부활의 향기 속에서도
그분의 몰약의 달콤한 죽음의 향기를 우리가 동시에 누릴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그분은 부활의 생명을 사시는 삶 가운데 사셨고, 십자가 죽음 아래 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실 때까지 33년 반을 기다리시지 않고, 바로 그분은 이렇게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신 바 된 것뿐이지, 전 생애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부활의 삶을 사시고,
부활의 삶 가운데서 바로 몰약의 달콤한 향기인 죽음의 삶을 사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부활의 향기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달콤한 몰약을 가지고 사신 33년 반 동안의 생애였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들이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통해서, 5:2 〔베들레헴에서 다스릴 자가 나오리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갈릴리 지역에 나사렛이라는 이러한 천한 환경 아래 속해 있는 비천한 고을인 나사렛에서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았던 그 장소에 바로 별의 인도함을 통해서, 그 안내하고 인도하고,
유대인의 왕을 가리키는 그 빛나는 새벽별의 이상을 통하여 바로 왕이신 그 아기 예수님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그분께 온전한 경배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 가지 귀한 것들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과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삶과 죽음을 통한 몰약의 달콤한 향기를 가지고 늘 살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삶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 동방 박사들에 의하여 받쳐진 이 세 가지의 보물을 통하여 예수님의 그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드러내고 있는 정금을 통해서, 주님의 그 인성의 귀하심과 그리고 부활의 생명의 향기와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달콤한 향기를 모두 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들을
이렇게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주 성령님의 감동에 의하여 주님의 생애 속에서 나타난 주님의 본성과
그분의 부활의 삶의 생애와 죽음의 생애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되어지는 이러한 특별하고 신성한 성령님의
감동에 의하여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이 귀중한 보배를 통하여 아마도 이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으로 도피하는
생활을 하고, 여행을 하고, 애굽서부터 나와서 다시 이 헤롯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베들레헴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거주하기 위해서 긴 여행을 할 때,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 그때 당시에 가장 값진 것들인 이 세 가지 보배들을 통하여 아마 생활비와 아기 예수님의 양육을 함에
있어 도움이 되었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며
오늘의 교제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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