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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은 산에 오르신 그리스도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그리스도
    말씀 나눔방 2023. 8. 17. 17:32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17장 1절, 9절

     

    말씀 주제 : 높은 산에 오르신 그리스도,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그리스도

     

    오늘 성경 본문 말씀, 마태복음 17장 1절과 9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전국에 계신 우리 목사님들과 해외에 활동하고 계신 우리 선교사님들 그리고 전도사님들, 봉사자님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라면서 마태복음 17장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된 사건은 공관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에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올라가셨다’는 얘기가 성경에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올라가셨다’ 그리고 9절 말씀에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서 다시 내려오시는 장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말씀, 숫자 하나하나에 그리고 단어 하나 하나에 깊은 영적인 말씀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에 오르시고 다시 내려오신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신 때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는 시점이어서 그 마음에 많은 고뇌와 고민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셨지만 또한 우리 인간과 동일한 인성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로 괴롭고 곤고한 가운데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런 자신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이 때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이라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구약 성경에 하늘로 올라간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은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구약 시대에 모든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은 모두 장차 오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될 때가 곧 다가온 다는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앞둔 그 분의 곤고한 마음을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는 아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이행해야 하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권능의 힘으로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홍해 바다를 갈라서 건너게 한 후,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 받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지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 40년 동안, 자기 동족인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그들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지만,

    애굽의 삶의 정신과 노예 근성에 사로 잡혀 있는 그들로부터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 시기와 질투 속에 돌팔매질을 당하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시며 그들의 구원자이시지만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고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고 결국은 그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모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모세가 내려왔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처럼 잘못된 신앙과 비진리에 맞서 싸웠던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준 하나님이 이방인들이 섬기고 있던 바알 신이라고 생각해 그를 섬기며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싸움에 승리하고 그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인 일로 인하여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부인 이세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서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또 비진리와 잘못된 신앙속에 빠져 있던 자기 동족들로 배척과 상함을 받고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먼저 경험했던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기 동족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그 예수님을 이해하고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 이와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영광의 그 면류관이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시여. 조금만 더 참으시고 조금만 더 인내하시고 조금만 더 힘을 내셔서 십자가로 가십시오.

    우리들도 그와 같은 삶을 경험한 자로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까?”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삶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을 대표하고 있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엘리야가 변화산에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성취하는 데 있어 조금도 그릇됨 없이 온전히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 기도했을 때,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의 빛을 받아 신성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변화산에서 변형된 예수님의 신성의 모습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지닌 신성의 모습,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하나님의 형상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17장 2절과 3절에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마태복음 17장 1절에 예수님께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실 때, 이 세 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그나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이들은 연약하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후 50일이 지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모신 이후에야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만나가 되기 위하여 생명으로 오신 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높은 산으로 갔다는 의미를 살펴보면

     

    출애굽기 24장 12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두 돌판에 적힌 율법을 받을 때도 높은 산, 시내산에서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또 계시록 21장 10절에 사도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본 것도 높은 산이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보니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이 보이니”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두 마리로 장정 오천명을 먹이심으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표적으로 보여준 오병이어의 역사도 요한복음 6장 3절에 산에서 행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이처럼 높은 산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실체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계시하여 주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사건이 있은 뒤, 마태복음 17장 9절에는 산을 내려온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려오는 삶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짧은 시간에 두 가지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땅에 내려오신 다음에는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사탄에게 사로잡힌 귀신 들린 소년을 구원해 주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예수님이 안 계실 때, 그 귀신 들린 아이를 그 부모가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악한 영의 역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동안에 제자들이 수치와 치욕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서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다고 주위에 있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책잡힐 만한 일이 아홉 제자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탄에게 사로잡혀 귀신들린 소년을 아홉 제자가 쫓아내지 못하므로 주위에 있던 수많은 군중들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조롱과 핀잔을 듣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므로 제자들로 인해 예수님의 명예가 실추되었던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신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땅에 내려와서는 영광스러운 모습대신에 예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영광스러운 신성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너무나 놀라 그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건너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고치시는 등 수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아 왔지만 신성을 가지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실체적인 모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 같이 위대한 사람들조차 영광스러운 모습의 예수님 앞에서는 한낱 종의 모습으로 부복하고 섬기는 모습을 통해서 그 제자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높으신 신분인 것을 그들이 깨닫고 깜짝 놀랐던 겁니다.

     

    이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하나님 형상 그 자체를 가지신 예수님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구원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이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리들과 가룟 유다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왕처럼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줄 세속적인 위대한 왕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높은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피흘려 처참하게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왕으로서 메시야를 바라고 있었는데, 자기들이 기대한 강력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하늘에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들의 백성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변화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너무나 놀랐고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지도자이고 자신들에게 율법을 전해준 모세와 가장 많은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한 선지자 엘리야도 존엄하신 그분 앞에 경배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고 과연 예수님이 누구인가하고 의아해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산에 올라가서는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귀신들려 벙어리 되고 귀머거리가 된 아이로부터 그 귀신을 내어 쫓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말라 하시매” (막9:25)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높은 산에서는 위엄과 권위를 가지신 신성의 모습으로 모든 만물로부터 경배를 받는 하늘의 왕, 하나님의 모습이셨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서는 자신의 다른 아홉 명의 제자들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 수많은 무리에게 둘러 싸인 채 종교지도자들과 변론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귀신 들린 그 소년, 그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무릎을 꿇어 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인성을 가지신 인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상반된 두가지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서는 위엄과 권위를 가지신 신성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산에 내려와서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발생한 두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얘긴지 모릅니다.

     

    그 높은 변화산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지고 광채가 나는 옷, 신성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엄위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반면 땅에 내려와서는,

    그 사탄에게 사로잡혀 귀신들린 한 영혼을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춰서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너무나 친절하고 다정한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두사건은 모든 만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는 하늘의 하나님이 그 존귀한 신성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인성을 입으신 초라한 예수그리스도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서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을 통해서 하늘의 보좌와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셔서 보잘 것 없는 아이 하나를 구원하심에 있어,

    스스로 자세를 낮춰 무릎을 꿇으시므로 인간을 섬기시는 겸손하고 자비로우신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가지신 하늘의 하나님이 그분의 실체이지만, 땅처럼 낮아지셔서 인간을 위해서 온갖 수모와 수치를 당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실 수 있는 분 또한 하나님의 또 다른 실체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성은 하나님처럼 거룩함과 영광과 존귀함을 가지신 것뿐만아니라 그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 인간처럼 낮아져 비천해질 수 있는 것도 신성에 속한 영역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을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두 사건을 모두 본 세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는 그리스도의 실체를 더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올라가는 삶을 통해서 신성을 입으셨습니다. 내려가는 삶을 통해서 인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두가지의 모습을 제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쫓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와 닮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닮습니까?

    마음도 닮고 믿음도 닮고 품성도 닮고 그분이 하시는 일과도 같아야 합니다.

     

    그분이 세상을 이기시고 죄의 충동과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이것들을 이겨야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똑같은 삶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똑같아야 됩니다.

    하는 행동도, 하는 말도, 하는 일도, 마음과 성품과 생각, 사고 방식,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도, 사랑하는 것도, 존중하는 것도, 경배하는 것도 똑같아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올라가는 삶을 통해서 신성을 덧입어야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신비인 것처럼,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대하고 제자들 앞에서 영광의 광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어 신성을 보이신 것도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도 신비이고, 사람의 인성을 지닌 그분이 신성을 덧입는 것도 신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높은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의 삶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을 우러러 간구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신성을 덧입고,

    내려와서는 인성의 삶, 인자 대신 그리스도의 삶과 똑같은 세상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라가는 삶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가는 삶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올라가는 삶, 세상을 떠나 기도만 하고 말씀만 보고 교회만 다니는 이런 신앙생활은 옳지 않습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면,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내가 듣고 있다면, 남들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다면,

    남들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일을 힘을 가진 내가 그들을 돌봐주고 채워주는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 부족하고 결핍되고 미비된 것을 볼 때에, 내가 만약에 물질이나 재능이나 재주나 믿음이나 사랑이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실 때, 다섯개의 보리 떡과 두 마리의 고기가조각조각 나누어지고 남은 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내가 가졌다면, 그것은 나누어져야 될 것을 내가 잠시 맡아 간직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내가 가진 힘, 재주, 건강, 재물, 시간, 달란트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그에게 주신 재물들, 시간들, 건강들을 선용하지 못하고 남용하고 오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 없이 넘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남들에게 나눠주고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할 때, 그것이 드라크마와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 그것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이윤을 남긴 자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이 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다가 그리고 다시 땅 아래로 내려와서는 땅 아래 돌볼 사람들, 아픈 자들, 연약한 자들, 귀신 들린 자들을 위해서 자신이 하늘에서 받아온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땅에 내려오셔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므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자라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자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나타내기에 앞서서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을지라도 부족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데나리온은 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인데, 지금으로 환산해서 노동자 하루 품삯을 십만 원으로 치면 이천만 원어치의 떡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 당시 상황을 보면, 돈이 없었고 돈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많은 음식을 살 수 있는 곳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이시지만,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 섬기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러한 일은 이루어지고도 남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져온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정만 오천명이라면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들 또한 많이 참석하였을 것입니다.

     

    어디든지 부녀자들이 항상 많이 참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보면 열명 중에서 여섯 명 내지 일곱명은 여자분들입니다.

     

    이렇게 어림잡아 생각해보면 예수님 앞에 온 무리의 숫자가 만 오천 명정도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또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서 몰려온 많은 무리가 짧은 시간 안에 예수님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빨리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마태복음 14장 15절에는 ‘저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 예수님께서는 큰 무리들과 하루 종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음 상한 자들을 위로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그들 가운데 이 어린 아이 한 사람만 도시락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특별히 그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취한 것은 다섯개의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바로 생명이시고 생명력을 주시는 성령님을 소개해 주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늘의 생명의 떡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어라”는 의미로 어린 아이가 가져온 다섯 개의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신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자세히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신성을 지니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서는 인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사람으로 일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천양지차의 신성과 인성의 두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신 것과 또 내려오신 것을 기록한 마태복음 17장 1절과 9절 말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렸다, 높이 달렸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 사닥다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의 꿈에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 끝에 서서 야곱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하여 교활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자기에게 넘기게 하고 또 거짓으로 에서의 행세를 해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챕니다.

     

    이 일로 에서의 보복을 피해서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야곱은 누구도 의지할 자 없는 외로운 나그네가 되어서 좌절과 낙심과 슬픔 속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노숙하고 있던 그에게 놀라운 꿈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것은 사닥다리가 땅에 서 있고 그 끝이 하늘까지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또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이 누워있는 땅을 야곱과 그 자손에 주어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계시의 꿈이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창28:12~14)

     

    야곱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꿈에 보인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때는 예수님은 성육신하시기 전 신성을 지닌 하나님입니다.

     

    이 당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려면 대략 2,0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야곱의 사닥다리 꿈은 B.C 2000년 전 경의 사건이었습니다.

     

    성육신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셨기 때문에 이 땅의 인생들이 당하는 어려운 문제와 고통, 시련들을 인간들이 하늘 아버지께 간구할 때,

     

    천사들이 그 간구 기도들을 가지고 올라오면 하나님 아버지께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아 천사에게 주고 그 천사는 그 응답을 가지고 땅에 내려와서 인간들의 삶의 문제에 응답하여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육신하시기 전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부여자, 축복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인간들의 간구를 천사들이 하늘로 가지고 올라오면,

    그들의 문제에 대한 응답을 천사에게 주어 내려 보내 이 땅에서 인간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들을 천사들을 통해서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천사들은 섬기는 일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기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 땅에 나눠 주시고 고통 당하시고 희생하시고 헌신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적인 존재자들인 이 천사들까지도 인간들을 돕고 인간들을 섬기고 인간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삽니다. 이것이 천사들이 먹는 양식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지금 제가 사닥다리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높은 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또 높은 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사셨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과 같이 되시어 동일한 감정과 의지와 지성을 가지시고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동일하게 느끼며 우리와 함께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는 한 손으로는 땅에 있는 가족들의 인생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그들을 굳게 붙잡으시고,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한 손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굳건히 붙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쪽을 굳게 붙잡아 놓지 않고 서로 연결시켜 주시는 것이 사닥다리이고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이 양쪽을 붙잡은 손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을 지라도 땅에 있는 가족의 손이나 하나님의 보좌를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으셨습니다.

     

    양쪽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 것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할 때 그 발목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서 하나님을 이기는 자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보좌와 땅에 있는 인간들의 손을 붙잡고 늘어진 예수님이 야곱의 실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가족들이 하늘의 거룩한 지적인 존재들인 우주 거민들과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과 하나가 되어 살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한손으로는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에 있는 가족들을 굳게 붙잡아 하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의 삶을 천국의 삶으로 이끌기 위하여 예수님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와서 흉악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닥다리가 되셔서, 땅에 있는 그 어린아이와 부모들과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을 하늘의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누가복음 15장 4절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그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는 목자가 바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고 있는 예수님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입어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친히 굳건히 잡으시기 위하여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나 곤고하고 고뇌에 싸여 있어 그 마음이 약해져 혹시 그 붙잡은 손을 놓아버릴까 봐 모세와 엘리야와의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 그 마음을 다시 잡아 더욱 굳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땅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하늘의 아버지 품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삶은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굳게 붙잡고 또한 땅에 있는 가족들의 삶의 문제들을 다 끌어안아 담당하시고 하늘과 하나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닥다리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높은 곳으로 세명의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시고 그리고 이 땅에 다시 내려오셔서,

    사탄에게 사로잡혀 흉악한 결박을 당한 채 멍에를 메고 쇠사슬로 묶여 있는 그 가련한 영혼들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높이 올라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견고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은 손을 놓아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서는 땅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나눠주고 돌보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인성을 지니시고 세상에 오셨지만 신성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신성을 입고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과 선한 행실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었을 때 그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기쁨과 감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올라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반드시 내려와서 연약하고 모자라고 부족한 자들, 압제 받는 나그네와 남편이 없는 과부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동일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17장 1절, 9절

     

    말씀 주제 : 높은 산에 오르신 그리스도,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그리스도

     

    오늘 성경 본문 말씀, 마태복음 17장 1절과 9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전국에 계신 우리 목사님들과 해외에 활동하고 계신 우리 선교사님들 그리고 전도사님들, 봉사자님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라면서 마태복음 17장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된 사건은 공관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에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올라가셨다’는 얘기가 성경에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올라가셨다’ 그리고 9절 말씀에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서 다시 내려오시는 장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말씀, 숫자 하나하나에 그리고 단어 하나 하나에 깊은 영적인 말씀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에 오르시고 다시 내려오신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신 때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는 시점이어서 그 마음에 많은 고뇌와 고민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셨지만 또한 우리 인간과 동일한 인성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로 괴롭고 곤고한 가운데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런 자신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이 때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이라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구약 성경에 하늘로 올라간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은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구약 시대에 모든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은 모두 장차 오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될 때가 곧 다가온 다는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앞둔 그 분의 곤고한 마음을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는 아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이행해야 하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권능의 힘으로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홍해 바다를 갈라서 건너게 한 후,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 받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지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 40년 동안, 자기 동족인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그들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지만,

    애굽의 삶의 정신과 노예 근성에 사로 잡혀 있는 그들로부터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 시기와 질투 속에 돌팔매질을 당하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시며 그들의 구원자이시지만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고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고 결국은 그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모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모세가 내려왔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처럼 잘못된 신앙과 비진리에 맞서 싸웠던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준 하나님이 이방인들이 섬기고 있던 바알 신이라고 생각해 그를 섬기며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싸움에 승리하고 그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인 일로 인하여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부인 이세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서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또 비진리와 잘못된 신앙속에 빠져 있던 자기 동족들로 배척과 상함을 받고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먼저 경험했던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기 동족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그 예수님을 이해하고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 이와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영광의 그 면류관이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시여. 조금만 더 참으시고 조금만 더 인내하시고 조금만 더 힘을 내셔서 십자가로 가십시오.

    우리들도 그와 같은 삶을 경험한 자로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까?”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삶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을 대표하고 있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엘리야가 변화산에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성취하는 데 있어 조금도 그릇됨 없이 온전히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 기도했을 때,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의 빛을 받아 신성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변화산에서 변형된 예수님의 신성의 모습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지닌 신성의 모습,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하나님의 형상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17장 2절과 3절에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마태복음 17장 1절에 예수님께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실 때, 이 세 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그나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이들은 연약하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후 50일이 지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모신 이후에야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만나가 되기 위하여 생명으로 오신 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높은 산으로 갔다는 의미를 살펴보면

     

    출애굽기 24장 12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두 돌판에 적힌 율법을 받을 때도 높은 산, 시내산에서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또 계시록 21장 10절에 사도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본 것도 높은 산이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보니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이 보이니”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두 마리로 장정 오천명을 먹이심으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표적으로 보여준 오병이어의 역사도 요한복음 6장 3절에 산에서 행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이처럼 높은 산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실체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계시하여 주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사건이 있은 뒤, 마태복음 17장 9절에는 산을 내려온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려오는 삶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짧은 시간에 두 가지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땅에 내려오신 다음에는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사탄에게 사로잡힌 귀신 들린 소년을 구원해 주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예수님이 안 계실 때, 그 귀신 들린 아이를 그 부모가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악한 영의 역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동안에 제자들이 수치와 치욕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서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다고 주위에 있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책잡힐 만한 일이 아홉 제자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탄에게 사로잡혀 귀신들린 소년을 아홉 제자가 쫓아내지 못하므로 주위에 있던 수많은 군중들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조롱과 핀잔을 듣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므로 제자들로 인해 예수님의 명예가 실추되었던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신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땅에 내려와서는 영광스러운 모습대신에 예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영광스러운 신성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너무나 놀라 그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건너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고치시는 등 수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아 왔지만 신성을 가지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실체적인 모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 같이 위대한 사람들조차 영광스러운 모습의 예수님 앞에서는 한낱 종의 모습으로 부복하고 섬기는 모습을 통해서 그 제자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높으신 신분인 것을 그들이 깨닫고 깜짝 놀랐던 겁니다.

     

    이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하나님 형상 그 자체를 가지신 예수님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구원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이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리들과 가룟 유다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왕처럼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줄 세속적인 위대한 왕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높은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피흘려 처참하게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왕으로서 메시야를 바라고 있었는데, 자기들이 기대한 강력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하늘에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들의 백성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변화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너무나 놀랐고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지도자이고 자신들에게 율법을 전해준 모세와 가장 많은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한 선지자 엘리야도 존엄하신 그분 앞에 경배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고 과연 예수님이 누구인가하고 의아해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산에 올라가서는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귀신들려 벙어리 되고 귀머거리가 된 아이로부터 그 귀신을 내어 쫓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말라 하시매” (막9:25)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높은 산에서는 위엄과 권위를 가지신 신성의 모습으로 모든 만물로부터 경배를 받는 하늘의 왕, 하나님의 모습이셨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서는 자신의 다른 아홉 명의 제자들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 수많은 무리에게 둘러 싸인 채 종교지도자들과 변론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귀신 들린 그 소년, 그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무릎을 꿇어 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인성을 가지신 인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상반된 두가지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서는 위엄과 권위를 가지신 신성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산에 내려와서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발생한 두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얘긴지 모릅니다.

     

    그 높은 변화산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지고 광채가 나는 옷, 신성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엄위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반면 땅에 내려와서는,

    그 사탄에게 사로잡혀 귀신들린 한 영혼을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춰서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너무나 친절하고 다정한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두사건은 모든 만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는 하늘의 하나님이 그 존귀한 신성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인성을 입으신 초라한 예수그리스도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서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을 통해서 하늘의 보좌와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셔서 보잘 것 없는 아이 하나를 구원하심에 있어,

    스스로 자세를 낮춰 무릎을 꿇으시므로 인간을 섬기시는 겸손하고 자비로우신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가지신 하늘의 하나님이 그분의 실체이지만, 땅처럼 낮아지셔서 인간을 위해서 온갖 수모와 수치를 당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실 수 있는 분 또한 하나님의 또 다른 실체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성은 하나님처럼 거룩함과 영광과 존귀함을 가지신 것뿐만아니라 그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 인간처럼 낮아져 비천해질 수 있는 것도 신성에 속한 영역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을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두 사건을 모두 본 세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는 그리스도의 실체를 더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올라가는 삶을 통해서 신성을 입으셨습니다. 내려가는 삶을 통해서 인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두가지의 모습을 제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쫓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와 닮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닮습니까?

    마음도 닮고 믿음도 닮고 품성도 닮고 그분이 하시는 일과도 같아야 합니다.

     

    그분이 세상을 이기시고 죄의 충동과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이것들을 이겨야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똑같은 삶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똑같아야 됩니다.

    하는 행동도, 하는 말도, 하는 일도, 마음과 성품과 생각, 사고 방식,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도, 사랑하는 것도, 존중하는 것도, 경배하는 것도 똑같아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올라가는 삶을 통해서 신성을 덧입어야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신비인 것처럼,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대하고 제자들 앞에서 영광의 광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어 신성을 보이신 것도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도 신비이고, 사람의 인성을 지닌 그분이 신성을 덧입는 것도 신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높은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의 삶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을 우러러 간구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신성을 덧입고,

    내려와서는 인성의 삶, 인자 대신 그리스도의 삶과 똑같은 세상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라가는 삶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가는 삶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올라가는 삶, 세상을 떠나 기도만 하고 말씀만 보고 교회만 다니는 이런 신앙생활은 옳지 않습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면,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내가 듣고 있다면, 남들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다면,

    남들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일을 힘을 가진 내가 그들을 돌봐주고 채워주는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 부족하고 결핍되고 미비된 것을 볼 때에, 내가 만약에 물질이나 재능이나 재주나 믿음이나 사랑이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실 때, 다섯개의 보리 떡과 두 마리의 고기가조각조각 나누어지고 남은 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내가 가졌다면, 그것은 나누어져야 될 것을 내가 잠시 맡아 간직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내가 가진 힘, 재주, 건강, 재물, 시간, 달란트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그에게 주신 재물들, 시간들, 건강들을 선용하지 못하고 남용하고 오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 없이 넘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남들에게 나눠주고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할 때, 그것이 드라크마와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 그것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이윤을 남긴 자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이 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놓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다가 그리고 다시 땅 아래로 내려와서는 땅 아래 돌볼 사람들, 아픈 자들, 연약한 자들, 귀신 들린 자들을 위해서 자신이 하늘에서 받아온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땅에 내려오셔서 친히 모범을 보이시므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자라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자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나타내기에 앞서서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을지라도 부족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데나리온은 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인데, 지금으로 환산해서 노동자 하루 품삯을 십만 원으로 치면 이천만 원어치의 떡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 당시 상황을 보면, 돈이 없었고 돈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많은 음식을 살 수 있는 곳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이시지만,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 섬기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러한 일은 이루어지고도 남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져온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정만 오천명이라면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들 또한 많이 참석하였을 것입니다.

     

    어디든지 부녀자들이 항상 많이 참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보면 열명 중에서 여섯 명 내지 일곱명은 여자분들입니다.

     

    이렇게 어림잡아 생각해보면 예수님 앞에 온 무리의 숫자가 만 오천 명정도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또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보기 위해서 몰려온 많은 무리가 짧은 시간 안에 예수님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빨리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마태복음 14장 15절에는 ‘저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 예수님께서는 큰 무리들과 하루 종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음 상한 자들을 위로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그들 가운데 이 어린 아이 한 사람만 도시락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특별히 그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취한 것은 다섯개의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바로 생명이시고 생명력을 주시는 성령님을 소개해 주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늘의 생명의 떡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어라”는 의미로 어린 아이가 가져온 다섯 개의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신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자세히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신성을 지니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서는 인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사람으로 일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천양지차의 신성과 인성의 두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신 것과 또 내려오신 것을 기록한 마태복음 17장 1절과 9절 말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렸다, 높이 달렸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 사닥다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의 꿈에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 끝에 서서 야곱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하여 교활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자기에게 넘기게 하고 또 거짓으로 에서의 행세를 해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챕니다.

     

    이 일로 에서의 보복을 피해서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야곱은 누구도 의지할 자 없는 외로운 나그네가 되어서 좌절과 낙심과 슬픔 속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노숙하고 있던 그에게 놀라운 꿈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것은 사닥다리가 땅에 서 있고 그 끝이 하늘까지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또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이 누워있는 땅을 야곱과 그 자손에 주어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계시의 꿈이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창28:12~14)

     

    야곱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꿈에 보인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때는 예수님은 성육신하시기 전 신성을 지닌 하나님입니다.

     

    이 당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려면 대략 2,0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야곱의 사닥다리 꿈은 B.C 2000년 전 경의 사건이었습니다.

     

    성육신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셨기 때문에 이 땅의 인생들이 당하는 어려운 문제와 고통, 시련들을 인간들이 하늘 아버지께 간구할 때,

     

    천사들이 그 간구 기도들을 가지고 올라오면 하나님 아버지께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아 천사에게 주고 그 천사는 그 응답을 가지고 땅에 내려와서 인간들의 삶의 문제에 응답하여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육신하시기 전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부여자, 축복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인간들의 간구를 천사들이 하늘로 가지고 올라오면,

    그들의 문제에 대한 응답을 천사에게 주어 내려 보내 이 땅에서 인간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들을 천사들을 통해서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천사들은 섬기는 일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기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 땅에 나눠 주시고 고통 당하시고 희생하시고 헌신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적인 존재자들인 이 천사들까지도 인간들을 돕고 인간들을 섬기고 인간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삽니다. 이것이 천사들이 먹는 양식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지금 제가 사닥다리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높은 산에 올라갔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또 높은 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사셨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과 같이 되시어 동일한 감정과 의지와 지성을 가지시고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동일하게 느끼며 우리와 함께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는 한 손으로는 땅에 있는 가족들의 인생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그들을 굳게 붙잡으시고,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한 손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굳건히 붙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쪽을 굳게 붙잡아 놓지 않고 서로 연결시켜 주시는 것이 사닥다리이고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이 양쪽을 붙잡은 손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을 지라도 땅에 있는 가족의 손이나 하나님의 보좌를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으셨습니다.

     

    양쪽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 것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할 때 그 발목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서 하나님을 이기는 자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보좌와 땅에 있는 인간들의 손을 붙잡고 늘어진 예수님이 야곱의 실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가족들이 하늘의 거룩한 지적인 존재들인 우주 거민들과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과 하나가 되어 살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한손으로는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에 있는 가족들을 굳게 붙잡아 하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의 삶을 천국의 삶으로 이끌기 위하여 예수님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와서 흉악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닥다리가 되셔서, 땅에 있는 그 어린아이와 부모들과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을 하늘의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누가복음 15장 4절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그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는 목자가 바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고 있는 예수님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입어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친히 굳건히 잡으시기 위하여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나 곤고하고 고뇌에 싸여 있어 그 마음이 약해져 혹시 그 붙잡은 손을 놓아버릴까 봐 모세와 엘리야와의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 그 마음을 다시 잡아 더욱 굳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땅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하늘의 아버지 품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삶은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굳게 붙잡고 또한 땅에 있는 가족들의 삶의 문제들을 다 끌어안아 담당하시고 하늘과 하나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닥다리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높은 곳으로 세명의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시고 그리고 이 땅에 다시 내려오셔서,

    사탄에게 사로잡혀 흉악한 결박을 당한 채 멍에를 메고 쇠사슬로 묶여 있는 그 가련한 영혼들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높이 올라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견고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은 손을 놓아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서는 땅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나눠주고 돌보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인성을 지니시고 세상에 오셨지만 신성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신성을 입고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과 선한 행실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었을 때 그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기쁨과 감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올라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반드시 내려와서 연약하고 모자라고 부족한 자들, 압제 받는 나그네와 남편이 없는 과부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동일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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