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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6장 / 갈릴리 바다가 아닌 높은 산에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신 이유말씀 나눔방 2023. 8. 26. 17:19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 말씀 : 요한복음 5장, 6장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식에 대한 말씀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표적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표적의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이 어떤 방법과 어떤 과정들과 어떤 단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통해서 생명의 기능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그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특성 중에 사랑과 생명이 있는데, 이것들의 영적인 기능들을 인간의 말로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도 상징적인 이야기 곧 표적들과 이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평범한 말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뜻을 전달하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어떤 비유나 표적을 통해서 깊은 영적인 말씀을 보고 듣고 만져보게 하여 그 영적인 뜻을 올바로 전달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영적인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표적들인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5장에는 유대인의 명절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羊門) 곁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온전히 치유 받아 소생하는 생생한 표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에는 다섯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장정만 오천명을 먹이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들까지 그 숫자를 추산 하면, 그 표적을 경험한 이들은 대략 1만 명 내지 1만 5천 명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요한복음 5장에서는 38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일어설 수 없어 걷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하는 표적을 보여주고 뒤이어 6장에서는 배고픈 군중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표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부터 15절까지 등장하는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무리들의 육체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적으로 해결해준 일로 땅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영혼들에게 하늘의 양식과 하늘의 생명수를 공급하시는 실체임을 드러내는 하늘의 일이기도 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사닥다리 되시는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것으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는 표적을 통해서 그가 자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늘의 것을 먹이고 마시우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병자의 삶이 그때 당시에 유대인들의 영적인 모습이었고 그리고 아담 때부터 6천 년의 기나긴 시간이 지난 마지막 시대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상태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베데스다 연못 곁에서 병들어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살아 있으나 사람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태,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병들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해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은 병든 자를 보여주고 있고 6장에는 배고픈 무리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하나로 연결해서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5장 말씀은 거룩한 예루살렘 성 안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6장의 오병이어 사건은 어떤 산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5장에는 연못이 있었다면 6장 1절에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고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한 표적을 본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산에서는 그 밑의 평지와 그리고 그 너머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5장에 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연못 물에 대한 얘기입니다. 모든 것은 물 때문에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아말렉과의 전쟁이 나오는데 이것도 물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르비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치고 있었으나 물이 없어 불평하여 모세와 다투었고 하나님은 호렙산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 그들로 마시게 합니다.
이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의 후미를 쳐서 연약한 자들을 쳐죽이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는 호렙산 반석에서 나오는 생명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이들이 행한 일은 하늘에 역심을 품고 쫓겨났던 사탄과 똑같은 생각과 정신으로 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물과 바다에 대한 얘기를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이 연못에 관련된 말씀이라면 6장은 디베랴 바다와 관련이 있는 말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 있는 산에 오르셨고 그 산에서는 디베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펼쳐진 것은 5장 연못과 6장 바다가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두 표적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5장에는 연못, 6장에는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가 나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일은 종교적인 어떤 문제로 인하여 발생된 질병을 치료하는 사건이라면,
디베랴 바다는 우리가 먹고 사는 일 곧 자신의 생계의 유지와 삶의 만족을 위한 일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동안 병든 사람이 병들어 약했기에 그 사람에게는 치료와 소생이 필요했고,
그 다음 6장에, 오병이어 사건에 나오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말씀을 듣고 있다가 배고프게 되어 먹을 양식이 필요한 상황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연못은 신성한 곳이고 유대 종교와 관련성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비종교적이지만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예루살렘 성전 양문 곁에 있는데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며 그곳에 행각 다섯이 있었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은혜로운 집, 자비의 집이란 의미가 있는 반면에, 바다는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어 인간의 생계와 관련된 곳입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있던 병자가 필요한 것은 그를 치료를 해줄 수 있는 사람 또는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면, 오병이어 사건은 배고픈 무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 사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어 배고픔을 해결해주므로 만족과 위로와 격려를 주는 사건이라는 것을 베데스다 연못 사건과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데스다 연못은 예루살렘 성전 양문 곁에 있던 곳으로 이곳은 아주 경건하고 신성하며 종교적인 곳인 반면에, 바다는 종교적이지 않고 세상적이며 인간 사회와 밀접히 관계된 장소입니다.
연못가에 병들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오래된 병을 고쳐줄 의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함으로 죄인을 치료하기 위해서 오신 치료자가 의인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시며 그 죄인들이 그토록 필요로 한 사람이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6장에서는 배고파 있는 무리들에게 생명의 떡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배고픈 무리들에게는 생명의 양식, 바다에서 나오는 고기와 생명의 떡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떡과 고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식 그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 마귀로 인하여 세상은 타락되었습니다.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타락된 세상 그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사탄은 하나님께 역심을 품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고 또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 했다가 이 세상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또 이 원수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엄위한 법을 훼손시키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거짓말로 속였던 것입니다.
사탄은 하늘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법이 엄위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천사들을 꾀어 자신을 따르게 하므로 쫓겨났듯이,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 곧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명령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될까 염려해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니 그것을 먹을지라도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교묘한 거짓말로 인간을 속여서 인간이 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가볍게 생각하도록 하여 그것을 지키지 않게 만듦으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법의 엄중함을 훼손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훼손시키는 원수 마귀의 고도의 전략이고 기만책입니다.
지금도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법과 계명과 명령을 소홀히 여기도록 얼마나 교묘한 방법들로 속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바다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가 생계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사탄에 의해서 완전히 더럽혀진 세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하신 땅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는 바다물을 경계로 하여서 인류를 사로잡아 두고 있고 또 인류를 흉악한 결박 아래 있게 하고 죄의 멍에를 메게 하여 인류가 탈출할 수 없도록 자신을 따르는 어둠의 악한 영들로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인류가 사탄에 속박되어 있는 상황을 바다를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12:17)
타락한 세상을 상징하는 바다는 인류가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나는 고기를 잡아먹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에, 그 바다와 완전히 단절하여 사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영적으로 계속 배고프고 만족과 위로와 평안을 가질 수가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의 표적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생활은 사탄 원수 마귀에 의해서 더럽혀졌고 부패한 채 부정하고 냄새나는 죄 속에 살고 있어서 영적으로 목마르고 배고프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래 살게 하셨던 에덴 동산에는 생명나무에서부터 발원된 강에서 생명수가 흘러서 인간들이 언제든지 먹고 마실 수 있어 배부르고 참 만족과 참 평안과 안식을 가질 수 있었지만,
죄를 범하여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에덴동산 바깥 땅,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타락한 세상에 살게 되어 평안과 만족이 없고 굶주림뿐이라는 것입니다.
눈 앞에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는 거친 바람과 풍랑과 파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를 주고 또 그 속에서의 험한 삶은 마음속에 많은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배를 몰아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일이 험한 바다 속에서 하는 일이기에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지만 고기를 잡아야 살 수 있는 인간들의 환경과 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 6장 1절 말씀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입니다.
그리고 6장 3절에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앉으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높은 곳에 서 계시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산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는 곳, 생명이 있는 곳, 하나님의 법이 있는 곳을 예표하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초월적인 하늘의 것을 잡아당기고 하늘의 것을 부여받는 곳이 높은 산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받은 것처럼(출24:12), 산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는 장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두 돌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7장 1절, 2절에 제자 3명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께서도 높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변형되어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입으신 옷도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은 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장소로 나타나는데, 계시록 21장 10절에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성령께 인도되어 높은 산으로 올라가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여러분!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 표적을 보면서,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장소로 영적으로 타락하여 세속적인 것을 탐하는 인간들의 영혼을 잡아 빠뜨려 넣은 헤어나올 수 없는 구덩이와 같은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바다와 맞닿아 있는 육지는 바다와 경계선에 모래 땅이 있고 그 다음 흙으로 이루어진 평지가 있고 그 다음 높은 산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계별로 바다 → 모래 → 평지 → 산에 이르는 영적인 성장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를 이 말씀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12장 17절에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이 말씀을 이런 의미로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사탄 마귀에 속한 악한 세력과 하나님 편에 속한 소수의 남은 자들, 거듭난 자들, 하나님의 참 진리를 가진 자들, 십사만 사천 명 같은 인침을 받은 자들과의 싸움이 있는데, 전쟁을 위해서 서로가 대치한 장소가 바로 바다 모래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높은 산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거기는 도피성이 있고 피난처로서 안전한 곳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고 자기의 보좌가 있는 자기의 영역 안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며,
반면 높은 산에 계시는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다로 끌림 당하는 인간들, 마귀의 흉악한 결박에 속박되어 있는 그들을 잡아 산으로 이끄시는 싸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 그리스도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은 마귀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평지에 있는 자들을 마귀의 영역인 바다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싸우다 보니 그 경계선인 바다 모래에 대치하여 서있는 모습을 성경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은 하나님이 계시는 안전한 곳으로 생명을 보장받은 곳이라면 바다는 사탄에 의해서 완전히 더럽혀지고 타락된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이것에 대한 얘기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산은 우리의 주권자, 우리의 머리, 우리의 대표자, 우리의 권위자가 되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으로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께 속해 있어야 우리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양식들을 먹고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며 두 손을 들고 살고 있어야만 우리가 삶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산으로 이끄셔서 우리에게 맛있는 양식을 먹이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 3절에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멀리 내려다보면 뭐가 보이겠습니까? 디베랴 바다, 갈릴리 바다가 보입니다.
[디베랴 바다, 갈릴리 바다]
요한복음 6장 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건너편에 가야 평지도 보이고 모래도 보이고 바다도 보이고 거기의 바람과 파도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모인 오천 명의 장정, 이 숫자는 어떤 표적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장정과 여자, 어린이와 노인 모든 숫자를 추산하면 일만 명 내지 일만 오천 명 정도로 생각되는데 주님께서는 이 무리들을 바닷가에서 먹이지 않으시고 그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셨다는 것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높은 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어서 조각조각 쪼개지고 잘라져서 그들로 먹고 마시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항상 높은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높이 계시는 그 분으로 인해 우리가 만족할 수 있고 안식과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과 똑같은 삶을 지향해야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마시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산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높은 산에서 주시고자 하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시고 위로를 받고 힘을 받고 신앙에 있어서 견고해져야 합니다.
타락한 바다와 땅 위에서 가장 높은 곳이 산입니다.
가장 낮은 바다는 사탄이 지배하며 어둠의 권세와 힘으로 사람들을 자기의 영역으로 끌어당겨 죄 아래 살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낮은 곳에 우리가 내려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다에서도, 그 바닷가 모래에서도, 평지에서도 예수님의 양식을 먹고 마시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입니까?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장 낮은 장소인 바다를 벗어나 모래 땅을 지나 평지를 지나 높은 곳에 가서 그리스도의 양식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바다를 갓 벗어난 그 모래 땅이나 평지에서는 언제든지 생명의 양식을 우리가 마귀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씨뿌리는 비유를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길 가에 뿌려진 씨앗,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가시떨기 위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서 생명을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 본문과 같은 면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 그리고 사탄의 권세가 행사되는 곳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 위로 우뚝 서 있는 거룩한 곳, 하나님이 특별히 지정하신 그 곳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께 하늘 양식을 받아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평안이 있고 또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언제나 풍요롭게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사탄의 미혹에 이끌림 당하거나 실족하여 넘어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교제를 마치고 이후에 요한복음 6장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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