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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함의 저주
    말씀 나눔방 2023. 8. 15. 08:31

    Skynews Mission

    말씀 : 박찬덕 선교사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불응한 함에 대한 저주

     

    하늘소리 선교회를 사랑해 주시고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있는 청소년 학교와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우리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 그리고 우리 봉사자님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주님의 은혜와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권위가 가득 차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오늘의 교제 말씀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창세기 9장 20~29절, 노아가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을 저주하는 내용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 찬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면서 구원의 방주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노아와 그 가족 여덟 명은 물의 침례를 받아 구원을 받고 땅에 물이 완전히 마른 뒤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노아와 그 가족이 부활의 삶을 예표 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포도농사를 시작하여 만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 가나안의 아비 함이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리니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매고 뒷걸음질 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고 그들은 얼굴을 돌이켜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함에게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저주합니다.

     

    반면에 노아의 수치를 가려주고 그 하체를 보지 않은 셈과 야벳에 대해서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축복합니다.

     

    저는 이 얘기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스스로 벌거벗는 일을 했음에도 함을 저주하여 그 아들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 쉽게 납득되질 않았습니다. 노아가 함에게 엄청난 저주를 내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린 매우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노아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 자에게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저주하고 자신의 수치를 덮고 가리운 자들에게는 축복하는 일들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감정적인 행동으로 보이며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바로 깨닫고 난 후에는, 가나안에 대해서 이 정도 저주를 한 것이 오히려 참 다행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반역한 사탄의 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 이 같은 저주와 축복이 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축복과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에게 내린 축복과 저주 이야기를 통해서 축복과 저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리 위해서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까지 예수님의 그 마지막 생애의 모습에서 무엇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피땀을 흘리는 기도를 하시고,

     

    무엇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최후의 말씀을 하신 후에 돌아가셨는지를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되면,

     

    영적인 진리의 빛이 우리 영혼에 비침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고 엄위하시고 지존무상하신 그분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 질 수 있게 됩니다.

     

    노아는 죄로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를 통해서 생명을 구원한 인류 전체의 어른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할 자로서 선택한 영적 지도자였기에 노아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만물과 사람들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할 지도자를 택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주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들을 통치를 하게 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가 어디에 적용되어 나타나는지를 모른다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어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크나큰 문제들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 질서와 권위를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 창세기 9장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천사, 사탄과 악한 영들, 모든 만물과 인류,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가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을 진행하시는 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노아가 자신의 아들들의 행위에 대하여 저주와 축복을 내리지 않았으면, 홍수 후 새로운 세상에서 노아를 통해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크게 훼손되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진행하는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지도자이며 만물의 대표자인 노아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을 대신한 지도자의 권위가 실추되면 그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 또한 크게 훼손되기에,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두에게 나타내어 노아의 권위를 세우고 모두를 하나님의 통치 질서 아래 순복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발가벗어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할지라도 그를 인류의 대표자로, 만물의 머리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물 위에 노아가 있고 노아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이 세우신 대리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발가벗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일로 양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또 많은 고민과 번민을 했을 것이며 다시는 그러한 일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의 작정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그러한 일에 얼마든지 참소하고 정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노아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신성한 통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대로 노아가 술 취해 발가벗은 그 일만을 보고 노아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는 것이기에,

     

    노아는 그 셈과 함과 야벳에 대해서 수치를 덮어준 자에게는 축복을 하고 수치를 드러낸 함에게는 저주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과 만물 앞에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보여주어 인간을 고소하는 사탄의 입을 다물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과 인류 앞에서 노아를 그들의 머리가 되게 하셨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발가벗은 부끄러운 모습만 보고 노아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노아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의 질서와 이 세상 인류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세워 하나님의 권위를 주셨는데, 노아가 비록 부주의하여 술 취하여서 벌거벗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할지라도 그 추태를 보인 노아에 대해서 함처럼 그 수치를 드러내고 손가락질하고 마음으로 업신여기는 것은 그 노아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또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만물과 인류의 윗권세로 세웠는데 그 아랫 권세에 속한 자들이 그 통치에 반하여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칙에서 그릇되는 일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대표자와 인도자로 세우셨다면, 그가 혹시 어떤 좋지 않은 일로 그릇된 행동을 보였다 할지라도 노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을 말한다는 것은 그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안과 만족과 안식이 유지되는 일, 하늘나라의 통치가 원활하게 이루어 질 없고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크게 훼손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절대 용납하시지를 않습니다.

     

    지도자로 세움 받은 사람에게 어떠한 좋지 못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통치 질서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겁니다.

    노아가 잘못한 문제는 노아를 세우고 권위를 주신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얘기는 다윗의 얘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 쫓겨 피해 다닐 때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또 그의 물병과 칼만 가지고 나와 그의 생명은 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세운 왕이었기에 감히 그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를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반역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잘못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문제이지 다윗 자신은 관여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먼저 구원받은 자, 먼저 세움 받은 자, 먼저 있게 한 자에게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나 국가나 사회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군대나 학교, 회사를 보면 상하 질서가 있습니다. 가정에도 동생과 형, 엄마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과 각 사회단체에 상하간 질서를 두므로 하나님의 신성한 통치에 순복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질서 또한 우리는 존중하고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에 상충되지 않는 한 그 통치에 순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함은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운 만물의 대표자 노아를 무시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 체계를 무시한 행위가 됩니다.

     

    노아가 비록 잘못을 하고 실수를 했을지라도 그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류의 대표자이며 만물의 머리로 삼은 노아에 대하여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이기에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14장 12절부터 15절에 사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는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넘보다가 쫓겨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사탄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통치 질서에 순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처럼 사탄과 그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순종하지 않고 대적하다가 쫓겨났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통치 질서체계를 흔드는 일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신성한 통치 원칙에 따라서 권위를 세워준 윗권세에게 온전한 순종과 순복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노아가 하나님이 세운 대표자가 아니었다면 함의 행위가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는 일과는 상관없을 수 있었지만,

    노아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홍수심판으로 인한 죽음속에서 구원의 방주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을 보존 받고 땅에 첫발을 디딘 부활의 삶을 사는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인류는 홍수로 다 멸망당하였으나 단지 노아의 가족 8명만 살아 남았습니다.

    일주일 주기가 끝나고 새로 시작하는 주의 첫 번째 날이 8일째 날이기에 숫자 8은 부활의 삶을 나타내는데, 이런 의미에서 노아의 가족 8명은 죽음에서 벗어나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홍수 전 세상에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부활의 새 세상을 이끌어갈 대표자로 노아를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통치자로서의 권위가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비록 인간적으로 수치를 드러내고 잘못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통치 체계를 흔들면 안 되는데 함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고 통치 질서를 위반하는 일로 큰 저주를 받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노아의 첫 번째 아들 셈과 세 번째 아들 야벳은 아마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뒷걸음질을 쳐가면서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옷으로 그의 하체를 가려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도 엄격한 질서가 있는 것은 노아의 가정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교회의 모형이며 교회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인류를 대표하는 권위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를 우습게 여기고 비방하고 아비의 수치를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한 함은 용서받지 못할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통치 질서에 관한 얘기는 민수기 12장 1절에도 나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에 대하여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의 잘못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모세를 세우신 자는 권세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모세를 세웠고 모세 아래 아론과 미리암을 두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미리암은 이런 문제로 인하여 어떤 관여를 하면 안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신명기 12장 10절에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의 저주를 내렸습니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미리암의 목숨을 보존시켜달라고 함으로써 진영 밖에서 칠일 동안 격리되었다가 돌아오는 옵니다.

     

    하나님이 그들 위에 세운 지도자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의 행동과 새로운 세상의 대표자인 노아의 수치를 드러냄으로 저주를 받은 함의 얘기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다가 징계를 받은 동일한 맥락의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큰 저주를 받고 죽임을 당할 뻔한 일이 발생한 것은 노아와 모세를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인간들의 지도자로 세워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를 주신 하나님의 질서를 그들이 무너뜨리는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 관계에서 통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대해서 신명기 27장 16절에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것으로 어찌 해서 저주를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그 부모를 통해서 부여해 주기 때문에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육체의 생명을 공급한 자로서의 권위가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계명 가운데서도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계명부터 열번째 계명은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할 계명들인데, 맨 먼저 나오는 다섯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고, 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와 대표성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형과 동생이 싸우는 문제가 발생할 때, 간혹 동생이 형 또는 누나에게 덤벼드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면 여러분들은 동생을 엄중히 혼을 내서 하나님의 질서에 순복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다만,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딪히지 않고 상충되지 않은 경우일 때입니다.

     

    남편과 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28절에서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라고 말하고 있어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도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적용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 가정에는 위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형과 누나와 동생이 있어서 질서 가운데 어른의 권위에 순복하고 공경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배웁니다.

     

    이와 같이 한 가정 속에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세워서 유지되도록 하셨는데 부모를 경홀히 여기거나 비방하거나 싸움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질서와 권위를 무너뜨리는 큰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방관하거나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한 가정의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방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함이 아비의 수치를 드러낸 일에 동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의 질서가 흔들리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 동생이 형에게 덤벼들거나 아들이 부모에게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경우에는 엄히 다스려 징계를 통해서 통치 질서에 순복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가정에서 무너지는 소식이 많이 들려옵니다. 어떤 문제로 가족끼리 칼부림을 하고 부모를 때리고 하나님의 법 아래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본 원칙인 권위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반역을 하는 일에 버금갈 정도로 여겨서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의 수치를 드러낸 함과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의 행동이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반하는 일이기에 그걸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걸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반역한 사탄과 그를 추종한 악한 영들까지도 용납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통치 질서와 권위에 도전하고 반역하는 자들을 절대 가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전쟁이 하늘의 권위에 반역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를 절대 좌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엄위한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서 함을 그 정도로 저주한 것은 아주 약하게 저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반역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탐욕 때문인데, 다윗도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여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 죄를 범합니다.

     

    십계명 중 열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의 통치에 관한 질서와 권위를 세우시고 탐심을 경계하여 계명으로 명시했음에도 다윗은 탐욕으로 인하여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는 일로 인해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을 당하여 쫓기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사무엘하 15장 10절에 말씀에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이 스스로 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을 부음을 받은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그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하 18장 14절, 15절에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이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여러분!

    다윗이 가장 사랑하는 압살롬이 자기가 가장 아끼고 자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주는 그의 긴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매달리게 됨으로써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위반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이 부여한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멸시하고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합니까?

     

    다윗은 자기의 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어떻게 멸시합니까? 아무리 못난 아버지일지라도 아버지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의 머리입니다. 자신의 아버지이기에 그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도 그러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경홀히 여기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원리가 질서이고 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 위에 인간을 두시고 인간 위에 대표자를 세우십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는 최고의 권위자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질서 아래에 순복하면서 살 때 우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안과 행복을 소유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이러한 하늘의 통치 원칙들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고 죽음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3절 말씀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합니다.

     

    왜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부모에게 잘했기 때문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세운 통치 질서에 순응하여 선하게 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국가나 사회 단체에서도 법이나 규칙을 만들어 질서를 세우고 그 구성원들은 그 법과 규칙들을 지켜 그 질서 안에서 행동합니다.

    이처럼 가정에도 하나님께서 권위자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형과 누나를 위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순전한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인정하여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순응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하늘의 법에 따라서 장수하는 축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이 하늘의 축복을 우리 맘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의 법에 따라 하늘의 복들을 우리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회 조직에도 질서를 세우고 지위에 맞는 권한과 권위를 주어서 한 조직이 원활하게 지휘되고 통제될 수 있도록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회사에 최고 권위를 가진 대표자를 세우고 그 밑에 고위 관리자와 중간 관리자를 두고 또 그 밑에 일반 직원을 두어서 정해진 회사의 규칙에 따라서 회사가 질서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사회 조직의 생활을 통해서 인간은 윗권세에 순복하여 일하므로 경험을 쌓고 실력을 갖추게 되어 보다 높은 지위로 계속 상승하여 대표자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위가 얼마나 엄위하고 엄정한 것이며 이에 순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노아의 사건의 통해서 깨달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와 같은 잘못,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나 선지자, 사사들이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게 행한 잘못들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보고 반면교사로 삼아서 우리는 그러한 일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늘의 기본 원칙들에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고자 하는 생명과 신의 본성을 입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수치를 드러내는 행위는 셈과 함과 야벳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만약에 노아가 수치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들의 상반된 행동이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의 흠과 수치를 드러내는 일들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기본 통치 원칙들, 특히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일한 시험 앞에서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고 함은 노아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서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어 진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순종하는지 여부에 따라서 저주와 축복이 나뉘는데 이 시험은 어떤 의미에서는 셈과 야벳에게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너무나 좋은 너무나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합니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질서대로 사는 자들,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너무나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 사탄과의 최후의 싸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의 과의 전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그래서 노아가 육신의 정욕을 위한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하여 부주의하고 술 취해서 수치를 드러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우셨다는 것을 명심하여 하나님이 세운 권위를 흔드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에 의해서 노아의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수치를 덮어준 자들에게 큰 축복을 주고 그 수치를 드러내는 이에게는 저주를 주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 천하에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께서 세운 자들을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그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사도바울의 로마서 5장 20절 말씀처럼, 죄보다도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은 마치 사탄이 아무리 실족케 하려고 밀을 까불듯이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받을 자에게는 내려가고 그렇지 못할 자에게는 저주가 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함은 어떤 면에서는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황금과 같은 기회가 주어졌으나 에서와 똑같이 그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아비의 실수에 대해서 그것을 덮어줌으로써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그가 놓쳐버렸던 것입니다.

     

    함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통치와 권위를 위임받은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축복을 놓쳐버린 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통치를 알고 아버지를 공경했기 때문에 그들은 창세기 9장 23절에 아비의 하체에 옷을 덮고 그들의 얼굴을 돌이키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함으로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수치를 조금이라도 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아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선하게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통치 질서에 순종한 것으로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축복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인간들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 가정에서의 아버지와 아들, 형과 누나와 동생의 관계에서 그리고 직장과 군대에서도 이런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셈과 야벳처럼 자신들의 윗권세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바라보고 그에 순복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드러내는 행동이 큰 저주로 이어졌다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모님이나 다른 어떤 상대방의 흠이나 수치를 모르는 것이 축복일 수 있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얘기를 안 함으로 죄를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상대방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함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일이나 어떠 사람에 대한 또는 어떤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 눈과 귀를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 명의 아들들 중에서 둘째 아들 함은 저주받았고 나머지 두 아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주가 축복보다 먼저 왔다는 것입니다. 축복보다 우선한 것이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은 함은 아프리카에 등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조상이 되었고 함의 아들 구스가 이디오피아인의 그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셈의 아들들은 히브리 민족, 유대인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아들 야벳은 미국인을 포함한 유럽인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노아를 통해서 그들에게 전해진 축복은 창세기 9장 27절에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라고 되어 있어서 얼핏 보면 야벳을 셈보다 더 창대케 하셨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데, 뒤

    이어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이 예언은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져서 유럽인들은 문화와 예술과 과학이 굉장히 발달하여 번영하였고 또 경제적으로도 크게 발전하여 물질이 풍요로운 반면에 함의 후손들은 아프리카 등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불순종한 일로 인하여 노아의 예언대로 그 후손들의 미래가 완전히 다르게 결정되어 야벳의 후손들에게는 축복의 예언 성취를 되었고 함의 후손들에게는 저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는 하나님 자신보다도 더 큰 축복은 있을 수 없기에 셈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2절에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에게 “구원은 유대인들에게 남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바로 하나님 자신,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세상에 나오신 것도 셈의 후손인 유대인의 혈통을 통해서 이루어 졌고, 이스라엘 땅이 유대인 제자들에 의해서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셈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는 것은 야벳의 후손인 유럽인들이 문화와 문명이 발달하고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어 강대한 나라들이 되었지만 그들에게는 교회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장막, 유대인들의 장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럽에 복음을 전하므로 유럽 땅에 복음이 크게 확산되어 유럽이 기독교의 중심지로 성장되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는 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셈과 야벳처럼 하나님의 통치 질서와 그 권위에 온전히 순복하여 하늘의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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