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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장2~11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도성에 입성말씀 나눔방 2023. 9. 7. 15:59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말씀주제 : 평화의 왕과 함께 평화의 도성으로 가는 나귀새끼
출애굽기 13장 13절에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이렇게 나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1장 2~11 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나귀에 대한 말씀인데요 이 나귀는 원래 사사기 10장 4절에 보면 지체 높은 자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그러한 짐승입니다.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말이 아닌 어떤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짐승인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실 때 이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겸손함과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이렇게 오셨다 라고 성경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가 그리스도의 탄생 500여 년 전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세주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실 때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그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라고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그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말 대신에 겸손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셨는데 이것은 겸손함과 평화의 상징성과 관계된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성경에서 나귀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욥기30장 7절을 보면 7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하면서 비천함에 대해서
이 사람의 비천함에 대해서 나귀로 이렇게 나타내고 있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또한 잠언서 26장 3절을 보면
"3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하면서 나귀에게는 자갈이 필요하다 라고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떤 결과물을 가져오게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열린 입을 통해서 이러한 말 저러한 말을
쏟아냄으로 말미암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많은 불의 화살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미련한 자가
나귀에게는 자갈이 필요하다 말을 참 조심해야 된다 라고 나귀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스겔 23장 20절을 보면 굉장히 정욕적인 짐승이 나귀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20그 하체는 나귀 같고 그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연애하였도다 이 나귀는 비록 말보다는 이렇게 크기가 좀
적을지라도 힘은 그의 걸맞는 정도로 힘이 매우 센 그러한 짐승입니다
하체가 나귀와 같고 그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연애하였도다 라고 하면서 매우
정욕적인 짐승임을 이렇게 드려내고 있습니다.
나귀는 이러한 면에서 이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상당히 비천하고 비루하고 미련하고 그리고 정욕적인 짐승 무지한 짐승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나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레위기11장에 기록된 말씀을 우리가 보게 되면 부정한 짐승이 나오는데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짐승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이렇게 쭉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 나귀는 정한 짐승이나 정한 새들인 소나, 양, 산새, 비둘기와는 달리 부정한 동물로서 이렇게 분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굽은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짐승으로 부정한 동물로 구별되어서 하나님의 성전 앞에
바쳐지는 그런 귀한 제사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동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성전에 귀한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서 늘
예루살렘 성 밖에 내어 쫓겨난 삶을 살아야 했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는 절대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귀는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그러한 부정한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귀는 상당히 목이 곧고 고집이 센 동물입니다.
자기가 여물이나 먹이를 먹고 있는 중에 주인이 그 나귀를 사용코자 움직이고자 이렇게 고삐를 잡아당기고 끌고자 하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나귀의 바로 본성의 특징인 것입니다.
자기가 먹는 것을 다 먹고 배부른 후에야 자기가 자기 일을 하겠다 라는 아주 인간으로 말하면 완전한 왕 고집쟁이 똥고집쟁이 그러한 별명이 붙여진 아주 목이 곧고 고집이 센 동물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나귀는 자신을 대신해서 대속해주는 제물이 없이는 희생제물이신 구속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어린 양의 그 제물이 대신 치러지지 않고서는 자신의
생명이 유지가 결코 될 수 없는 불쌍한 존재인 것입니다.
밤낮 쉼없이 일을 해야 되고 그가 크기는 비록 말보단 적지만 힘이 센 그의 짐에는 그 전쟁 물자를 지고 짐을 나르는
그런 불쌍한 아주 가련한 짐승이 바로 나귀인 것입니다.
때로는 전쟁 중이 아닐지라도 상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상인들의 짐들을 지고 먼 길 거리를 왔다 갔다
통행하는 그러한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존재가 나귀인 것입니다.
때로는 크고 작은 무거운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뜻대로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는 그런 불쌍한
존재 그러한 부정한 동물이 나귀인 것입니다.
전쟁이 있을 때는 전쟁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되고 전쟁이 없을 때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는 짐들을 지고 나르는 일들을
위해서 오직 평화의 때에만 나귀가 쉼과누림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데 이때 당시는 로마의 속국 아래 살고 있었던 유대의
나라였기 때문에 평화도 없었던 그때에 바로 평화의 왕이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와 함께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는 놀라운 그림 놀라운 장면을 우리가 보면서 가슴이 아~ 정말 벅차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평화의 도성인 그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목이 곧고 부정한 짐승이어서 희생제물이신 어린 양의 피에 구속함이 없을 시에는 반드시 목의 꺾임을 당해야 되는 그러한 불쌍한 운명 그러한 가련한 팔자를 지닌 나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나귀들을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불쌍하고 그 가련하고 아무 쓸모가 없고
힘든 그 흉악한 마귀의 결박 아래에 쇠사슬에 묶인 바 되어서 늘 매여 있는 신세가 되어야 되고 매여 있지 않으면 짐을 나르고 또는 밭고랑을 일구는 그러한 무거운 멍에 짐을 지는 그 나귀를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2절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2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이 나귀가
나귀의 수컷 새끼가 어미 나귀와 늘 함께 같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미 나귀는 나무에 묶여져 있고요 어미 곁을 떠날 수 없는 이 나귀의 숫 새끼는 어미
곁을 서성거리며 사로잡힌 바 되지는 않지만 쇠사슬로 묶인 바 되지는 않지만 흉악한 마귀의 결박 안에 놓인 건 아니지만
그곳에서 결코 그 굴레에서 그 영역에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그러한 존재가 바로 이 나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부정한 나귀 그리고 그 부정한 나귀의 새끼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맞은편 마을로 너희가 가서 그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서 그 결박한 것을 흉악한 마귀의 결박을 풀어서 죄와 세상과 마귀의 결박을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끌고 오라고 그렇게 관심을 가지시고 나귀를 바라보시고 긍휼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끈에 나무에 묶여진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나무에 묶인 그 나귀의 새끼가 어미 나귀의 곁을 떠나 그 나귀 새끼가 풀려서 자유함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묶인 나귀와 새끼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여기서 주라는 것은 일반적인 우리가 그러한 형태의 그러한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사실보다는 모든 일을 이루시고 성취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을 은연 중에 감춰놓고 있는 말씀이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인 이 나귀를 이 사람들로 상징되고 있는 이 부정한 죄인들을 나타내고 있는
이 나귀와 함께 예루살렘 도성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큰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한다 라는 면에서
주가 쓰시겠다 라는 이 주라는 말씀은 다름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특별한 죄로 부정하여져서 정말 아무 쓸모가 없고 늘 짐이나 지고 전쟁을 위해서 사용되었고 그리고
사람들의 그러한 편의를 위해서 활용되어져서 영원한 도구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를 주님께서
그 매인 결박을 풀어 놓으시게 하시고 그 풀어놓은 그 나귀의 새끼를 주님 곁에 둠으로 말미암아 함께 예루살렘 도성
평화의 도성 안으로 들어가시는 아~ 이러한 놀라운 평화의 왕이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고 정말 감동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한 짐승을 예수님께서 정한 동물이 되게 하여 주시기 위하여 바로 대속 제물 희생제물이신 대속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나귀의 등에 타고 그와 함께 하나가 되어 같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귀의 첫 새끼는 그 죄인들로 모든 죄인들을 나타내고 있는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하지 않으면 목이 꺾어져서 사망을 경험해야 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귀와 함께 하나가 되어서 영광의 성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나귀의 구속주가 되어 주시기 위하여 지금 예루살렘 도성 하나님의 집으로 함께 입성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사단의 그 흉악한 결박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주기
위하여 그 사람을 위한 그 때로는 태산 같은 짐들을 지고 가는 인생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긍휼과 자비를 느끼신 주님께서는 그 무거운 멍에 아래에서 자유함을 허락하여 주시기 위하여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오라 라고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나귀 그 첫 새끼를 불러서 함께 예루살렘 도성 하나님의 집으로
함께 가자고 초청하고 있는 초청의 말씀이 호소의 소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이것이 주님의 바로 우리를 향한 행동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말씀을 했을 때 여기에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물론 예루살렘 온성이 소동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금 시간이 얼마 안 남긴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시는 일을 온 세상 사람이 온 유대인들이 온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췸 받기 위해서 퍼포먼스를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신 겁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모든 이 열방과 온 유대 나라와 온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
빛을 비쳐짐 받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보고 듣고 마음으로 깨닫게 하기 위한
그러한 상태에서 이 일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위적으로 펼쳐 행하셨던 것입니다.
많은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베푸신 예수님께서 여태까지는 한 번도 이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
거부하고 부인하고 거절하였던 예수님께서 이제 스스로 자발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평화의 도성 하나님의 그 성을
상징하고 있는 그 성에 이 스가랴9장 9절에 말씀하고 있는 약 500년 전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의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라는 이 말씀을 이루는 예언의 말씀 곧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구원을 베푸실 만왕의 왕이라는 이러한 구약의 말씀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 모두가 그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모두가 놀라서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을 일으킨 것이 첫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또 이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 이 성경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은 이 나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정결한 동물 소나 양처럼 비둘기처럼 정결한 짐승 정결한 새가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인
그 성에서 그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 없고 또 예루살렘 성 그 자체 내에서 들어갈 수 없고 쫓겨난 그러한 부정한 나귀를
예수님께서 하나가 되어 타고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따라 정죄되어지고 더러워지고
부정해지고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그 나귀를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고 그 율법학자들인 모든 그 성경학자들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이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성이 그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아~ 구원을 이루실 만왕의 왕이신 그 예수님께서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예언을 이루실 바로 구원을 베푸실 만왕의 왕이구나 라는 그 이유와 그리고 율법에 정죄되어진 나귀를 타고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하나님의 법을 훼손시키고 파괴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까지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예루살렘 성이 소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인간은 나귀와 같은 존재입니다.
부정한 자요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기 고집이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준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주인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는 똥고집쟁이 그러한 상태가 바로 나귀인 것입니다.
부정한 팔자이기 때문에 나귀는 그러한 운명에 빠져서 짐을 실어 나르고 무거운 사람을 태워 나르고 전쟁 물자를 이렇게 지고 가고 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는 그러한 나쁜 악한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그러한 운명으로 지음 받은 자들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자들이 바로 이러한 목이 꺾임을 당해야 될 팔자인 나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속 제물이 되어 주시고 희생 제물이 되어 주신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인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의 운명과 하나가 되어지도록
자신의 운명과 바뀌어짐을 당하게 할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가 구제되고 그가 회복이 되고 그가 그 부정한 짐승이 거룩한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구속주이시고 대속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결해져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귀와 함께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귀의 등에 올라타시고 입성하게 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러 함으로 이제는 나귀의 목이 꺾일 필요가 이제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희생 제물이 있기 전까지는 출애굽기 13장 말씀에서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오 어린 양으로 대속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운명은 바뀌어지지가 않게 된 것입니다.
대속 제물이시고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팔자가 인간의 운명이 완전히 탈바꿈된 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변화가 된 것입니다.
이러함으로 어린 양이 되시고 대속 제물이 되신 대속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오신 만왕의 왕으로 오신 구원을 베푸실 왕 중의 왕이신 그분이 나귀의 등에 타셔서 함께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평화의 도성 평화의 성인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아~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완전히 부정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내동댕이 쳐지고
내팽겨 쳐지고 철저히 버림받아진 그러한 부정한 자들인 것입니다.
가시떨기나무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다면 바로 나귀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철저히 버려진 모든 사람들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나귀인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나귀의 새끼는 아~ 새끼로 태어나자마자 목이 꺾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는 운명과 팔자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라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의 평화의 도성에 바로 들어가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이 정해진 운명이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정해진 팔자가 완전히 다른 삶의 길로 가게 됐다 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루어지는 놀라운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어린 양의 대속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었더라면 우리 인간은 지금도 살 소망조차 없이 나귀 새끼로
태어나자마자 목이 꺾여서 죽어짐을 당하게 되고 또 죽어지지 않고 살아 있을지라도 무거운 짐을 지고
흉악한 마귀의 사단의 결박 아래 쇠사슬에 묶인 바 되어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매인 바 된 삶을 살아야 되고 또 매인 줄을 끊고 자유함을 얻어도 계속 밭고랑을 갈아야 되는 팔자요 짐을 지고 날라야 되는 팔자요 사람을 운반하고 태워가는 그런 가련하고
불쌍한 삶을 살아야 되는 이런 죄인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었다 라는 것이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와 함께 예루살렘 도성 평화의 도성으로 들어가자구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이 나귀 새끼들인 네가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로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자 라는 말씀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귀와 함께
우리들에게 이 생명의 메시지를 이 하늘 이슬로 표현되고 있는 그러한 생명의 메시지 신성한 생명의 소리를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질 수밖에 없는 고집이 세고 교만하고 비천하고 정욕적이고
얼마나 정욕적입니까 말도 못하죠. 예 그렇습니다.
정욕적이고 비참하고 목이 곧고 자신의 먹을 것만을 위하여 주인의 의도와는 달리 일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그러한
아주 고집쟁이 같은 이런 나귀들 불쌍한 이 삶을 살아야 되는 이 부정한 죄인들이 아~ 이 교만하고 또 이 무지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이 옹고집쟁이들 정말 어리석고 우매한 이러한 불쌍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이 보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매인 바 된 그러한 줄을
끌러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불러세워 주셔서 주님 앞에 세워주시고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 도성으로 함께 입성하시게 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아~ 놀라운 사랑은 우리를 얼마나 가슴 벅차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정한 자요 고집이 센 자요 거짓된 자요 무지한 자요 정욕적인 자요 탐욕적인 자 이 돌이킬 수 없는
이 고집장이와 같은 목이 꺾여 영원히 죽어짐을 당할 수밖에 없는 팔자와 운명을 지닌 인간들을 주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세워주셔서 하나가 되게 하여 평화의 성 예루살렘 도성을 들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2장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우리가 부정한 짐승으로 거룩한 예루살렘 도성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 항상 그곳에서부터 내쫓김을 당하여서
이 바깥에 이 예루살렘 도성이라는 그 울타리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늘 짐을 지고 다니며 무거운 멍에를
흉악한 죄의 결박을 가지고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들을 위한 삶 전쟁을 위한 삶 수고하고 일을 하는 땀을 흘리는
이런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긍휼이 보아주셔서 우리의 흉악한 마귀의 그 결박을 끊어주시고 그리고 무거운
멍에를 풀어주셔서 그 멍에 대신에 만왕의 왕이신 구원을 베푸실 참 왕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등에 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그런 일들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남을 죽이는 일들을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라 바로 평화의
메시지 생명의 메시지 신성한 생명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 영광을 표현하는 일에 나귀가 사용되는 일이
바로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평화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일하는
우리들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인 것입니다. 성화는 구속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구속이 없이는 성화가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러한 게 종으로 주께서 나귀를
쓰시겠다 하라 라고 얘기했을 때 예~ 제가 여기 있사오니 주께서 쓰시옵소서라고 자신을
내놓을 때성별하라고 이렇게 요구를 하실 때 우리는 구속된 그런 일로 말미암아 성화를 이루게
되어서 이 성령님의 큰 열매들을 마음껏 충분히 만족스럽게 맺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된 자들은 반드시 이렇게 주님께 특별히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성별이 되어져야 됩니다.
구속된 것이 절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된 것은 사실이나 거기서 머물러
있어서는 우리가 절대 안 됩니다.
구속되어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은 자들은 반드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라고 마태복 21장 3절 말씀에 의하여 누가 만일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니라 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주께서 쓰시겠다 라고 할 때 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어서 주와 함께 하나가 되게 하소서 라고
성별되어지는 분리되어지는 성화되어지는 삶이 하늘나라의 원칙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원칙은 구속된 것은 반드시 성화되어야 됩니다.
성화되어진다 라는 것은 성별되어져서 주께서 원할 때 그 원하는 뜻대로 쓰임받는 것 사용되어지는 것 도구로 그렇게
요청받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성화인 것입니다.
성화는 구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아주 매우 신성한 요구인 것입니다.
이 출애굽의 그림들은 그리고 마태복음 21장의 그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구속과 성화가 동시에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6장 2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구속이 먼저 선제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되며
그리고 성별되어져서 그 구속을 힘입어 성별되어져서 신성한 생명을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 하늘 이슬로 표현되고 있는 생명수 되시는 신성한
생명의 기운 생기를 나타내고 있는 그 신성한 생명력을 소유케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따라 성화를 이루는 삶이 뒤따라져야 된다 라는 것이 로마서 6장 22절 말씀입니다.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예 그렇습니다.
성화는 구속에 근거합니다. 구속되어진 자들은 반드시 성별되어지기를 성화되어지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요구를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께서 쓰시겠다 라고 한다면" 네 " 라고 하면서 예스라고 하면서 쓰임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삶의 연단과 훈련과 단련과 다듬어지는 깨어지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오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신성한 생명의 말씀의 능력을 진리가 되게 하시는
하늘 이슬로 표현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생명수를 통해서 그 일을 통해서 다듬어지고 깨끗하게 더럽혀진 것이 씻어지고
하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온전한 성화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과 목적을 이루는 도구들로 사람들로 존재들로 변화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모든 초 태생이 유월절 어린 양에 의하여 구속이 되어졌기 때문에
이 구속되어진 초태생을 왜 그렇게 성별하고 분별하게 해야 됐죠
그것은 고린도전서 15장 46절 말씀 45~49절말씀에 보면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왜 부정하게 됐습니까 왜 초태생 왜 차자를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여기셨나요.
그것은 아담안에 속한 모든 자들은 장자에 속한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 대신 아벨을 취하셨고 이스마엘 대신 이삭을 에서 대신 야곱을
이렇게 계속 원래 천연적인 첫 번째 아들을 취하기보다는 천연적인 그런 태생 본래적인
육의 사람이 변화되어 거듭나서 바로 하늘의 신성한 생명을 머금고 하늘 이슬을 머금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장자권으로 장자로 후계자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살기에 적합한 자로 이렇게 취하시고 그렇게 소유하시게 된 이유는 아담에 속한 자가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장자권에 대해서는 다음에 우리가 더 많은 교제를 나누기로 하겠고요 오늘은 여기
까지만 언급하겠습니다.
그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또한 성별되어서 성화를 이루어야 정결한 짐승이 되어야
소나 양처럼 하나님의 집에 희생 제물로 바쳐질 그런 정결한 짐승이 되기 위해서는 부정한 동물이며 부정한 짐승인 모든
부정한 죄인들을 표상하고 있는 이 첫 새끼 나귀를 이 아담의 후손이 되어서 목이 꺾어져서 죽음을 당해야 될 그런 팔자와
운명에 있는 우리 모두를 이 대체해 주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우리의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의
부정함과 죽음을 대체할 새로운 생명과 정결함으로 정결한 의로움을 소유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탈바꿈되어야만
되기 때문에 예수 그스도의 피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의 살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더럽고 너무나 미천하고 너무나 정욕적이고 너무나 탐욕적이고 너무나 부정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으로 함께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열납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대속 제물인 희생 제물 되시는 어린 양으로 구속되게 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펼쳐 보이셨던 이 예루살렘 평화의 도성에 입성하시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 할렐루야 우리는 이 나귀들입니다.
나귀의 첫 새끼 그것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장자와 같은 그런 죽어 없어질 목이 꺾임 당해야 될 살 소망조차 가지고
있지 아니하는 정말 폐가 망신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과 팔자 속에 버려진 죄인들이었으나 이 나귀를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셔서 우리를 관심 가져주시고 우리의 묶인 줄을 매인 우리를 나귀 새끼를 풀어서 주님 앞에 바로 세워
놓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우리를 함께 평화의 도성 속으로 들어가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해 볼 때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나고 은혜가 되며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을 할까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시옵소서 라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얘기를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 1편 말씀을 마치고 2편 3편 얘기를 계속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교제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13장13절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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