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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세아 11:4, 14:1,4/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에 속한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이스라엘이 변화됨
    말씀 나눔방 2023. 9. 8. 16:27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호세아서 1부 말씀에 이어서 2부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 11장 4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호세아 14장 1절과 4절 말씀입니다.

     

    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4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 속에 살고 있던 선민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연약하고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아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린 이스라엘이 장성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내가 되고 또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아들들이 될 것이라는 소망 속에서 때론 어머니와 같이 품어 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는 자애로운 사랑으로, 때론 남편의 애틋하고 다정다감한 사랑으로, 때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기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어린 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 남편과 같은 사랑,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의 근원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지극한 사랑, 생명을 다한 사랑을 쏟으시고 또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셔서 그들을 불러낸 하나님이 그들의 참 아버지이며 참 하나님인 것을 깨우쳐 줌으로써, 그들이 좇았던 죄악된 세상의 정신을 버리고 영원한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서 친밀한 교통을 이루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인하여 온 세상 만민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창세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목적이라고 1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3~6)

     

    호세아서 11장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었다”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내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만 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과 땅, 온 우주 만물들과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에게도 알리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선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정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시고 어떻게 보호하시고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그 생명 안에서의 영원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하늘들의 영적 존재들과 온 우주와 온 세상 만물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곧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며 그들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시는 분임을 명확하게 알게 하여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3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48:1~4, 개역개정)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 우주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먼저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로 삼기 위해서 애굽에서 그들의 손을 잡고 나온 때부터 마지막까지 그들을 떠나지 않고 임마누엘 하시면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던 그 영원하고도 변치 않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셨고 또 온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께서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해서 죄악된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함께 거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공급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연합을 이루려 하셨던 것이며,

     

    신성을 가진 하나님과 인성을 가진 사람의 연합은 하나님이신 분이 육체가 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안에서 먼저 이루어졌고 또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영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으로 우리와 연합을 이루어 우리들도 그분과 같은 영광과 존귀를 얻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7 개역개정)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품으신 뜻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헛된 것들을 의지하고 기뻐하며 자신들의 생명을 그 허무한 것들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이 세상에 분명히 나타내어 그분 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아버지이신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서 영원한 신뢰와 사랑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로 만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일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선민 이스라엘을 그분의 강한 손으로 이끌어 내셔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또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함께 거하며 그들에게 매일 만나와 생수를 먹이시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 곧 하나님과 어우러져 일치되고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룩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여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들을 좇아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경배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생아나 양자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진정한 참 아들로 만드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을 알지 못해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하나님이며 참 아버지인 것을 인식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가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잘게 조각내어 오병이어 음식을 친절하게 마련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의 영안에 생명의 양식들을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조각내어 매일매일 친절하게 공급해 줌으로써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 자들 곧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며 이를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해서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이끌어 가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아버지이신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과 연합하셨다는 것을 호세아서 11장 1절에서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를 통해 성취되었는데,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셨을 때 이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기에 그를 피해 애굽에 일정 기간 동안 머물러 계셨고 헤롯 왕이 죽자 하나님께서 어린 예수를 불러내어 동족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3~15)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이 연합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던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연합된 자들을 그분의 생명으로 인하여 그분과 한 형제가 되게 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수많은 아들들이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산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9, 개역개정)

     

    그렇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영원하고 신성한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애틋하고 다정다감한 사랑이나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따듯하고 자애로운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를 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죄악된 생명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죽을 생명을 대체해 주시는 아버지의 생명을 다한 사랑, 그 희생적인 사랑을 맛볼 때 그 놀라운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고멜과 같이 음란한 우리가 스스로 굴복하게 되고 변화되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 갖는 애틋하고 다정다감한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의 따듯하고 자애로운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사랑을 포함한 사랑의 근본은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 줄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러한 영원하고도 무한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부터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서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들이 이루기까지 곧 그들의 삶의 시작과 마지막까지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쏟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생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우리의 생명을 그분의 생명으로 대체하여 주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받아 마셔라”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개역개정)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4 개역개정)

     

    이처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취하여서 선민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줘서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들 안에 하나님과 똑같은 생명을 갖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똑같이 입은 아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한 우리를 이처럼 생각하시어 자신의 생명의 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입게 하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려는 그 사랑은 정말 말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놀랍고 이 세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신성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그 사랑은 죽어야 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대신 죽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값없이 줌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려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창세 전에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었으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인 그리스도가 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온 세상에 나타내어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또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여 천하 만민들도 그들과 같은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영원무궁한 사랑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서 주전 750~720년경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선민 이스라엘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A.D 27년경 늦가을에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A.D 31년경 봄에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보고 또 약 750년경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신 것으로 본다면,

    그때로부터 약 780년이 흐른 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의 실체가 비로소 우리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게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기 위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생명의 속한 사랑으로 대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내 곁을 떠나 외로움 속에 홀로 남겨져 있을지라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은 은밀한 모습으로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변함없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지키시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으로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이스라엘로 만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는 이스라엘을 택하여 보여주셨는데 그들이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그들과 항상 함께 하셨고 그들이 걸음마를 뗄 때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 발걸음을 가르쳐 주었고 또 따듯한 사랑으로 품어주고 매일 생명 양식 만나를 먹이고 생수를 마시우는 일들 곧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으로 그들을 기르시고 성장시키신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변함이 없는 사랑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너희는 사랑을 추구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은사를 간절히 구하되 특별히 예언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라.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 (한글 KJV)

     

    “특별히 예언하라”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그 사랑을 전하라는 의미라는 것을 1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서 택한 이스라엘은 연약하고 또 결함과 부족함이 많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때론 그들을 품어 주고 입혀주고 먹여주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들을 보살폈고 때론 그들 가운데 임마누엘 하셔서 다정다감한 남편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이 모든 사랑의 근원은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지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 곧 생명의 속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 남편과 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대했지만, 이스라엘은 본 남편인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변절하여 그분을 버리고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거짓 남편을 따라가서 고멜과 같이 창기 짓을 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패역한 짓을 한 죄인이 되어버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또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는 관계로 전락했기 때문에 이전에 정상적인 관계에서 베풀었던 어머니와 같은 사랑, 남편과 같은 사랑은 그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며, 죄인이 되어 원수가 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죄인들을 돌이키게 하는 더 위대하고 특별한 사랑이 필요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함 있고 부족한 아이를 품에 안고 생명의 젖으로 먹여서 그들을 자라게 하는 어머니의 자상하고 따듯한 사랑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다정다감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 이스라엘을 대하셨지만, 그 사랑으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변화시켜 새롭게 할 수 없었고 그리스도와 똑같은 형상과 모양을 가진 자들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그 죄악된 본성 곧 끝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의 욕망을 좇으려는 본성으로 인하여 차돌같이 딱딱해진 우리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서 전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참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신비로운 사랑, 말할 수 없이 뛰어난 사랑,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 곧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그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지는 생명에 속한 사랑만이 부패하여 죄인이 된 우리들의 딱딱한 마음을 깨뜨려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어린아이와 같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품 안에 있을 때에는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또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선물 곧 십계명을 결혼 언약의 증표로 주고 40년 동안 척박하고 곤고한 땅에서 이스라엘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으로 또한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남편이신 하나님과 어리고 연약한 신부인 이스라엘과의 40년 동안의 여정은 민수기 33장에 기록된 것처럼 마흔두 곳의 장소 곧 라암셋을 출발하여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가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동고동락했던 것입니다.

     

    태양신의 아들, 사탄의 아들로 태어난 선민 이스라엘이 그 어둠의 권세 아래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들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이끌어 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마라를 거쳐 시내 반도의 맨 아래 있는 시내산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내려가는 삶의 여정을 갖게 하셨고, 그곳에서 십계명을 받고 또 성막을 건설하여 그들의 장막 가운데 둠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한 이후부터 가나안 땅 바로 맞은편인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올라가는 삶의 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생활 40년 동안 모두 마흔두 곳의 장소를 옮겨 다니는 삶의 여정, 곧 그들에게 닥치는 수많은 어려움들과 고난 속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주셨고 또 지극한 사랑으로 대하시므로써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광야의 여정 마흔두 곳 중 마지막 장소가 모압 땅인데, 그 뜻이 ‘아버지의 소생’ 곧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건조하고 척박한 광야에서의 마흔두 곳을 지나면서 태양신의 아들들로서 죄의 정신에 물들어 있어서 자신들의 생명을 헛된 우상들과 이 세상 것들에 의탁하였던 옛 성품들이 제거되어 거룩해짐으로써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사랑하여 경배하는 하나님의 참 아들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마흔두 곳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들을 신성하고 거룩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리스도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쳤던 광야 마흔두 곳은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마흔두 세대와 동일하며 이는 이스라엘의 광야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7)

     

    <출애굽 경로>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까지 이스라엘의 노정>

    - 민수기 33장

    1) 라암셋[레(애굽의 태양신 Re)를 낳았다] → 2) 숙곳(작은 집) → 3) 에담 (성벽)→ 4) 믹돌(요새) → 5) 마라(쓴 것) → 6) 엘림(종려나무들) → 7) 홍해 가(갈대 바다) → 8) 신 광야(습지, 늪) → 9) 돕가(공작석) → 10) 알루스(거친 땅) → 11) 르비딤(휴식처) 12) 시내 광야(가시나무숲) → 13)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 → 14) 하세롯(둘레, 마을) 15) 릿마(로뎀나무) → 16) 림몬 베레스(석류나무가 있는 언덕) → 17) 립나(흰빛, 희다) → 18) 릿사(파산, 황폐한 무덤) 19) → 그헬라다(모임, 집회) → 20) 세벨산(아름다움) → 21) 하라다(떠는, 두려워하는) → 22) 막헬롯(집회) → 23) 다핫(밑바닥) → 24) 데라(체류하다, 지체하다) → 25) 밋가(단 샘) → 26) 하스모나(열매가 풍성함, 부유함) → 27) 모세롯(사슬, 징계) → 28) 브네야아간(꼬불꼬불한, 구부러진) → 29) 홀하깃갓(깃갓의 웅덩이) → 30) 욧바다(강이 많다) → 31) 아브로나(통로, 이주) → 32) 에시온게벨(사람의 등뼈, 거인의 등) 33) 가데스(거룩한 샘) → 34) 호르산(산악지대) → 35) 살모나(그늘짐, 어두움) → 36) 부논(해가지다, 광산 구덩이) → 37) 오봇(가죽 부대들) → 38) 이예아바림(폐허) 39) 디본 갓(씻음) → 40) 알몬 디블라다임(두 무화과 과자의 이정표) → 41) 아바림산(강 건너 저편 지역) → 42) 모압 평지 (아버지의 소생) → 가나안 땅 길갈 도착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참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고 스스로 굴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 우리 대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그 살을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그 피를 우리의 생명의 음료로 공급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살리는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맛본 자들이 자신들의 패역함을 깨닫고 스스로 굴복하여서 진실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남편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아버지이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호세아서가 말하고 있는 핵심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러한 무한한 사랑의 결과로 이스라엘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호세아 14장 3절과 8절 말씀입니다.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8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전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자기들에게 복을 주고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으로 알아 자기들의 손으로 우상들을 만들고 그것들에게 자신들의 마음과 몸을 바치면서 그것들을 자신들의 남편이라 하며 또 자신들의 신이라 고백하였던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생명 안에서의 그 참 사랑을 맛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주는 깨우침 곧 무엇이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어서 “더 이상 거짓된 것들을 우리의 신, 우리의 남편이라 부르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남편이며 참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참된 사랑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전에 이스라엘이 창기 고멜과 같이 그 마음이 변절하여 창기 짓을 함으로써 부정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였지만 그처럼 패역한 짓을 한 그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주어서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영원하신 생명 안에서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므로 말미암아 그 무엇으로도 변하게 할 수 없었던 그들이 그 신비로운 사랑에 놀라서 스스로 굴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다시는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새롭게 된다는 것이 호세아서 14장 1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4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호세아 14:4~7 개역개정)

     

    그렇습니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따듯한 사랑으로도 안되었고 남편이 아내에게 갖는 애틋한 사랑으로도 안되었고 분노하여 때렸어도 패역한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만이 차돌 같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셨기에 더 이상 우리를 위해서 주실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사랑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지지만 여전히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그 무엇으로도 그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 없기에 결국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 3:16,18 개역개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 본질 상 언제나 동일하시지만 우리 인간이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나타내셨을지라도 지극히 성결한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를 가진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과의 영적인 간격과 그 수준의 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신성한 사랑을 베푸셨을지라도 그것의 의미와 그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호세아 11:3 개역개정)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성을 통한 사랑의 표현 방식 곧 신성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닌 그들이 직접 보고 만지는 접촉을 통하여 그 신성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성을 통한 사랑의 표현 방식 곧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나타내셨던 것이며,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분은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고 영광의 광채로서 육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호세아서 11장 4절, 내가 사람의 줄들 곧 사랑의 줄들로 그들을 이끌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호세아 11:4, 개역개정)

     

     

    그렇습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긍휼하게 여겨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푸는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을 다한 사랑으로 그들의 목에 지워져 있던 죄의 멍에를 벗겨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아들들임에도 죄의 노예로서 가졌던 성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거친 광야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생명을 다한 사랑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조성하여 만들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어린 이스라엘을 장성한 아들로 만들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호세아서 11장 3절에서는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패역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러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그들이 알게 되면 스스로 굴복하여 하나님 아버지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들이 걸음마를 할 때부터 손을 잡아주어 가르쳐 주고 또 가슴에 품어서 엄마가 아이에게 생명의 젖을 공급해 주는 것처럼 그들과 동행하면서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어 그들을 먹이셨고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마시게 하였고 또 광야의 뙤약볕에 그들이 상할까 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살을 에는 듯한 밤의 추위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며 아버지의 생명을 다한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시며 기르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여서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할 줄 아는 장성한 아들들이 되는 것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우리가 하나님을 자세히 알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고 매일 같이 조금씩 조금씩 그분의 사랑을 성실하게 베풀고 그분에 대해 가르치심으로 우리를 기르시는 것이며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성장시켰는지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굴복하여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순종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참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 그리고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도 알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기에 그것들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나타낼 그리스도를 오심을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사랑을 베푸심으로써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신 그분을 예표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들,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날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로 만드시기 위해서 만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나타낼 분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먼저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사랑을 예표하셨고 마침내 때가 되어서 그분께서 이 세상에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우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땅에 사는 부정한 존재인 우리가 하늘에 계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맛보게 됨으로써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또 우리의 참 아버지 되심을 깨닫고 스스로 굴복하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육체가 된 부정한 사람으로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하고 영원하고 놀라운 생명에 안에서의 사랑을 이해하고 깨달아 그 참 맛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신성한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줄들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인자로서 33년 반 동안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통과하신 그 사람의 줄에 있는 각 마디들 곧 성육신, 33년 반 동안의 삶,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의 다섯 마디가 있는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끌어 가심으로써 우리가 점점 하늘을 향해서 올라가는 삶을 살게 되고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신성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부어 주시길 너무나 원하셨지만 우리 인간이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신성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을 접촉하여 맛볼 수도 없고 깨달아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에 속한 우리 인간이 하늘에 속한 그 신성한 사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그 신성한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셨다는 것을 호세아서 11장 4절을 통해서 사람의 줄들, 곧 사랑의 끈들로 이스라엘을 이끄셨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사랑을 추구하라.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예언은 바로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치 아니하는 생명에 속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푸는 그 사랑을 우리가 접촉하고 맛볼 때만 우리가 스스로 굴복하여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그 사랑을 맛보고 알게 된 자로서 남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바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과 같이 창기 짓을 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자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이끄신 사랑 곧 생명에 속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다고 선포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깨닫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남들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 바로 예언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언자입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왕 같은 제사장들, 성전을 돌보는 자들 만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고 백성들을 돌볼 수가 있는 것처럼 은혜의 시대에 있는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므로 말미암아 어두운데 거하는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말씀에 사랑을 추구하라고 하면서 영적인 은사를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하라고 했습니다.

     

    창세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경륜은 그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는 패역한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와 많은 성도들이 무엇보다 열망해야 될 은사는 신기하고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은사가 아니라 호세아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선포하는 예언의 은사를 무엇보다 열망하여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온 세상에 예언함으로써 어둠에 거하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무엇보다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예언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사랑을 먼저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신성한 사랑을 내가 먼저 맛보고 깨달아 그 사랑에 스스로 굴복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먼저 되어야 남들에게도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 곧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였을 때에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그들의 목에 지워진 멍에를 벗겨주는 사랑을 친히 보여주셨고 또 광야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와 모세의 지팡이로 매 맞아 깨어진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주는 사랑을 보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쪼개진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생수는 그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너무나 크나큰 희생으로 얻어진 생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심판의 지팡이로 매 맞음을 당해 쪼개져야 했으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매를 맞고 쪼개지심으로써 그분의 옆구리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수가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는 그냥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을 조각조각 찢어 나눠 주었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의 육체를 조각조각 찢어서 우리에게 생명 양식으로 나눠 주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미로 요한복음 6장 54절 말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생수 곧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주어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로 먹고 마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삼일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는 그 삼일 하나님을 우리로 누리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맛보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마셨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먹었다는 것을 말하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었던 사랑이었으며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사랑,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생명에 안에서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1부에서 교제를 나눴던 벨벳 거미와 염낭 거미의 예처럼, 그 어미 거미들이 알을 낳은 뒤에도 계속 먹이 활동을 하였다면 그 어미 거미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먹이활동을 멈추고 오직 자신의 알들을 돌보는 데만 전념하다가 부화한 새끼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 자신의 몸마저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주어 새끼들이 그 어미의 체액을 빨아먹게 하므로 자신은 죽고 자신의 새끼들은 살리는 어미 거미의 숭고한 희생적인 사랑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렇게 어미 거미 한 마리가 죽는 대신에 수많은 새끼 거미들이 사는 것처럼 또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수많은 열매가 산출되는 것처럼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신 방법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탁월한 능력으로 순식간에 이루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있었던 경륜에 따라서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 일이 진행되어 왔던 것이며 때가 되었을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낮아져 인간이 되시고 또 영생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죽으시는 엄청난 희생의 값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어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생을 가져서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위대한 사랑이며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만 소유하고 계시는 하늘에 속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미물과 같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 주신 그 사랑을 알 때 죄인인 우리가 가슴을 치고 울며 스스로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에 속한 사랑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결코 변하지 않고 결코 멈춤이 없고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 이 사랑의 능력이 우리 스스로를 두 손들게 하고 스스로 굴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굴복시키는 방법은 세상의 권세자들처럼 무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였음에도 자신의 생명마저 버리는 진실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얻어서 우리 스스로 굴복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위대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온 세상과 온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바로 왕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의 목에 지워졌던 멍에를 꺾으시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광야로 인도하셔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반석을 쪼개서 낸 생수를 주셨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하나님께서 어린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생명을 쪼개서 나누어 주는 생명에 속한 사랑으로 그들을 기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혹시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진리이시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진리의 길, 의로운 길로만 행하시며 이 길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는 분입니다. 만일 진리의 길과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 의롭지 못하고 진리가 아닌 길로 행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이고 의로운 길이기에 그 길로만 행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불의와 거짓된 것과 부정한 것과는 조금도 타협할 수 없고 진리를 지키고 의를 보존하는데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클지라도 조그만 편법도 용납하지 않고 오직 옳은 길로만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죽어 있는 우리들을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의 생명에 속한 신성한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가진 자가 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과 음료를 마셔 그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의 요소들 곧 하나님의 본질들이 우리 영 안에 온전히 흡수됨으로써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어우러져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영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창세전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었던 일, 하나님께서 그처럼 고대하시고 바라셨던 일 곧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일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기시고 광야로 이끌어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먹이셨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매일 같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줌으로써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생명의 만나를 먹고살았듯이 생명의 만나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에 속한 그 사랑을 소유 받아 아버지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그냥 쉽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 만나는 생명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 곧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대가로 얻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생명 자체,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서 모두에게 나눠준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 굶주린 것을 보시고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을 갈기갈기 찢어 나누어 주어서 모두를 배부르게 한 것은 광야에서 생명의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주신 것과 같은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을 생명의 양식으로 갈기갈기 찢어서 우리에게 나눠 주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 14:19, 막 6:41, 눅 9:16, 요 6:11)

    메마른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친히 지켜 주시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선한 목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마른 양들을 쉴만한 물가 곧 생명수의 강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9장 34절,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심으로 생명의 음료인 피와 물을 쏟으셨던 것입니다.

     

    호렙산 반석이 쪼개서 생명수를 쏟아 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쪼개져 피와 물 곧 생명의 음료를 쏟아 내시므로 우리가 그 음료를 마시고 영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소유하게 하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걸음마조차 떼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셔서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아는 장성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영생을 소유하게 했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아들들, 천국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문제들과 어려움들과 아픔과 눈물이 있는 우리의 복잡한 삶 속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사랑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그 마음이 변절하여 창기 고멜처럼 본 남편인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거짓된 신들과 그 우상들을 자신의 남편으로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로 섬기므로 말미암아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왜 찢어졌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참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아버지의 생명의 속한 사랑을 그들에게 나눠주어서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깨닫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세상의 헛된 것을 좇으며 죽음의 길로 향하는 그들을 볼 때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찢어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가서 패역한 창녀 짓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무궁하고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창녀 고멜과 같은 상태라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고 돌이키라고 권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돌이키기는커녕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헛된 우상들 곧 거짓 남편이요 거짓 하나님인 그것들을 좇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통해서 반석의 생수를 통해서, 그리고 멍에를 벗겨주는 일을 통하여 생명을 다한 사랑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탄의 수종자인 애굽의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있을 때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는 꿈을 가지고 바로 왕을 징계해서 그들을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었고 또 유월절 어린 양이 흘린 피로 그들이 사는 집의 문설주에 발라서 죽음을 면하게 했고 그 어린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을 그들에게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긋난 길을 갔을 때 하나님은 그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셨다고 호세아서 13장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13장 14절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내가 그들을 음부의 권세로부터 속량하며 내가 그들을 사망으로부터 구속하리니 오 사망아! 오 내가 네 제물이 될 것이오! 음부야 내가 네 멸망이 되리라!

     

    “차라리 죽음과 음부야 내가 네가 요구하는 멸망이 되고 네가 요구하는 죽음을 내가 당할 터이니 내 아들들을 건드리지 말아라.”

     

    “죽음과 음부 네가 저들에게 요구하는 멸망을 내가 대신 당하고 네가 요구하는 사망을 내가 대신 당하여서 내가 저들에게는 나의 생명, 생명에 속한 사랑을 주어서 저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겠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대신 멸망당하고 내가 대신 죽는 것을 나는 절대 후회치 않겠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대한 갈망을 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생명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부여해 주고 그들로 깨닫게 해주므로 말미암아 그들을 새로운 자들로, 회복되는 자들로, 거듭나는 자들로, 변화된 자들로, 불의 한 자들을 의로운 자들로 만들고 어둠 가운데 있던 그들을 빛의 세계 속으로, 죄와 사망의 영역 안에 있는 그들을 생명과 성령님의 법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맛본 자들에 관하여 호세아서 3장 5절 말씀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마지막 날들에는 경애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와 그분의 선하심을 향하여 그들이 나올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 영원하고도 무궁하며 변치 아니하고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을 맛보기만 하면, 이들이 마지막 날에는 경애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남편임을 고백하며 그분의 영원한 자비와 사랑에 감동되어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굴복하여 변치 않는 마음으로 경외하고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아들들, 곧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일컫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십자가를 통한 그 사랑만이, 그 생명에 속한 사랑만이 이 세상의 모든 죄악된 본성을 가진 우리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복하는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탄과 하나가 된 그들까지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만물과 모든 사람들을 관장하시는 만유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그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을 인간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들에게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만물들과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굴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화평을 이루고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라. (골로새서 1:20 한글 KJV)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 자신의 생명을 내주어서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이 놀라운 사랑은 굴복시키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자신들을 굴복시키는 사랑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을 정복하는 사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신 분임에도 그 마음이 변질되고 부패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도, 아버지로도 그리고 남편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헛되고 거짓된 존재인 우상들을 자신들의 남편, 자신들의 아버지, 자들의 신이라고 따르고 좇고, 섬기고 경배함으로 말미암아 창녀 고멜과 같이 그 마음이 더럽혀져 창기 짓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오히려 활활 불타올라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고서라도 우리를 되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사랑은 이스라엘이 기뻐하여 남편으로, 아버지로 그리고 신으로 섬겼던 그것들에게서는 찾아보려 해도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아버지의 생명을 다한 참된 사랑이었고 또 그 사랑은 이 세상과 온 우주 어느 곳, 어느 누구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하고도 놀랍고도 지극히 뛰어난 것으로서 온 우주와 온 세상의 모든 존재, 곧 사탄과 죄와 마귀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정복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얍복 강가,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야곱의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은 죄악이 뿌리박혀 있는 야곱의 천연적인 본성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그가 맛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죄와 하나가 된 천연적인 생명만을 움켜쥐고서 어떻게든 그것을 지켜내려고 온 힘과 마음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 야곱에게 새로운 생명,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려 하였지만 야곱은 그 하늘에 속한 그 신성한 사랑,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초월한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 신성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곳을 야곱에게 유업으로 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 온전한 믿음이 없었던 아담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에덴동산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야곱 또한 가나안 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여호와의 천사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치열한 씨름을 통하여 그를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었던 육에 속한 사람, 죄에 속한 천연적인 사람 야곱마저 정복할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었고 야곱 스스로 두 손들고 항복하여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께 엎드려 굴복하게 만드는 사랑이었습니다.

     

    야곱에게 부여해 주신 하나님의 참 사랑, 생명에 속한 그 사랑, 정말 변함없고 영원한 그 사랑을 가지고 육에 속한 자였던 야곱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주기 위하여 그와 평생을 함께하신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신성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야곱이 비로소 “나는 굴복합니다”라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육적인 생명의 욕구를 좇던 모든 탐욕과 부정한 것들을 그리고 자신이 그처럼 지키려 했고 신뢰했던 자신의 육적인 생명과 그 힘마저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여호와의 천사로 나타난 그리스도와의 씨름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정복하는 사랑, 아버지의 그 영원한 사랑, 생명의 속한 그 사랑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굴복하여 육에 속한 자 옛 야곱에게 속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으며 하나님의 것으로만 살겠다고 고백하였을 때,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무릎 꿇게 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의 생명을 다한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굴복했을지라도 한편으로는 육에 속한 부정한 자로서 아무런 자격이 없던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그 신성한 생명을 그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탈취하여 지극히 존귀한 하나님을 자신 안에 소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라는 새 이름 이스라엘을 부여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탈취하여 소유한 자 그래서 세상과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새 이름 이스라엘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땅에 절대 입성할 수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없이는 사탄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가나안 땅, 세상과 죄와 마귀로 구성되어 있는 그곳,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 사탄과 하나가 된 가나안 일곱 족속, 그 강력한 거인들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죄와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의 속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돌아온 탕자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스스로 무릎 꿇게 하여서 참 아들로 만든 그 사랑을 우리가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계속 반복하고 강조하고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 때 그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았던 육에 속한 자였던 야곱이 변화되어서 세상과 죄와 마귀를 이기는 자인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처럼 그 사랑을 우리가 진실로 알게 될 때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목말라하며 간절히 그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 나를 이스라엘로 만든 그 사랑, 나를 위해 하나님이 죽으신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에 빚진 자들로서 남들에게도 그 사랑을 그대로 전하여 그들도 그 사랑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전하라는 뜻으로 “너희는 특별히 예언을 하기를 힘쓰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예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사랑을 말하라는 의미인 것이지 무당이 점을 쳐 말하듯이 한 개인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과 길흉화복을 말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두움 속에 있었던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 자들로서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에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그에게 속한 친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2:9, 한글 KJV)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통하여 나타난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그 사랑, 자신의 생명을 내어줘서 패역한 우리를 살리려는 그 사랑을 호세아 선지자가 창기와 같은 이스라엘에게 전해서 그들을 살리고자 했던 것처럼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사랑을 말해 주어 그 사랑을 깨닫고 맛을 본 자들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대가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까?”라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놀라 스스로 굴복하여서 하나님을 진실로 자신의 아버지라 고백함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과 믿음으로 연결되어서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참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경험할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구원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시려는 것 중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이며 시작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들은 고작 우리의 제한된 생각의 수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느니라."한 것이라. (고린도전서 2:9, 한글 KJV)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그 사랑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은 이 땅에는 우리의 참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아버지이시고 그분 만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마저 희생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맛본 자들은 스스로 굴복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진실로 아버지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아침 이슬과 같다 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이스라엘은 백합화같이 피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호세아서 14장 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거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니라. (호세아서 14:5 개역개정)

     

    제가 아침 이슬에 대하여 세 편의 교제를 나눴는데 새벽에 내리는 아침 이슬은 모든 생명을 산출시키는 통로의 시작점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베풀었고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십자가를 통하여 공급해 주시는 이슬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생명의 아침 이슬을 받아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므로 아름다운 백합화같이 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합화는 얼마나 향기가 좋고 아름다운지 모르며 또 그 아름다움을 오래 유지하는 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본 자들은 그 영원하고 변함없고 신비한 사랑을 맛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이 하늘에서 이슬처럼 내려서 이스라엘이 풍성한 생명을 가지므로 아름다운 백합과 같이 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 하늘 이슬과 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그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의 이슬을 머금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순결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늘 이슬을 머금은 사람들은 레바논 백향목과 같이 뿌리가 박힐 거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향목은 레바논 산지의 높은 곳에서 강한 추위 속에서만 발아되는 특이한 나무로 수령이 300년은 되어야 목재로서의 진가가 발휘된다고 하며 높이가 40미터까지 자라며 목질이 곱고 매우 단단해서 옆으로 길게 뻗은 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나무에서 풍기는 좋은 향은 살균과 항충 효과가 있어 벌레가 먹지 않고 그것의 송진은 방부재 역할을 하여 부패하지 않아 최고급 목재로 알려져 있어서 솔로몬 왕도 왕궁과 성전을 지을 때 이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여진 인성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백향목 나무가 높이 자라는 만큼 땅속에 박힌 뿌리는 깊고 넓게 뻗어 나가서 기틀을 잡기 때문에 강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힌다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으로 나타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견고하게 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품성을 가진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자라리로다. (시편 92:12, 한글 KJV)

    주의 나무들은 수액으로 가득 찼고, 레바논의 백향목도 그가 심으신 것이라. (시편 104:16, 한글 KJV)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내가 그것을 심으리니 그 나무가 가지들을 내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그 아래 각 날개의 모든 새가 거할 것이며, 그 가지들의 그늘 속에 그들이 거하리라. (에스겔 17:23, 한글 KJV)

     

    또 호세아서 14장 6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의 이슬에 적셔진 자는 그의 가지가 퍼지고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올리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다고 했습니다.

     

    감람나무는 풍성한 푸른 이파리가 있고 또 수없이 많은 좋은 올리브 열매를 맺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올리브 나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의 이슬로 흠뻑 적셔지게 되면 그것이 성도들과 교회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고 사랑하게 만들어 그들의 나타나는 모습들이 마치 순결한 백합화와 같이 그 품성이 향기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며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땅에 뿌리를 깊게 박아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굳건하게 서있으면서 지극히 높여진 그리스도의 인성의 형상을 소유한 자로서 의와 거룩함으로 옷 입고 고고한 모습으로 생명의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게 되며 또 감람나무의 푸른 잎처럼 신실한 가운데 수많은 열매들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극히 높은 인성 안에 있는 품성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품어낼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14장 7절에는 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들은 돌아올 것이며, 그들이 곡식같이 되살아나고 포도나무같이 자라리니,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한글 KJV)

     

    그들이 곡식같이 되살아난다(개역개정; 그들이 곡식같이 풍성할 것이며)는 것은 사람들의 양식되는 곡식들이 땅에 떨어져서 파릇파릇한 생명의 싹을 틔워 되살아나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온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되살아 나서 그 생명의 열매들이 풍요롭고 충만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같이 자라고(개역개정; 포나무무 꽃이 핀다)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즐거운 잔치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가 필수적으로 항상 제공되고 또 구약에서 하나님께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번제와 소제에 곁들여서 포도주를 드리는 전제(奠祭)를 드려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40 한 어린 양에 고운 밀가루 십분의 일 에바와 찧은 기름 사분의 일 힌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더할지며 41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 (출애굽기 29:40,41, 개역개정)

     

    포도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포도나무에 꽃이 펴야 하고 그 꽃이 수분(受粉)이 되면 그것은 작은 포도 알갱이가 되고 그 알갱이들이 자라서 풍성한 포도 열매가 되어서 향기로운 포도주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포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레바논 산지의 고원지대의 환경에서 생산되는 포도로서 맛과 향기가 매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에 속한 신성한 사랑을 받고 자라난 자들은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요소들을 그 영에 흡수하여 신성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최적의 환경에서 자라난 레바논 포도처럼 지극히 탁월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내므로 하나님께 만족과 기쁨을 드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레바논 포도]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 2:15, 개역개정)

     

    이처럼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생명에 속한 신성한 사랑은 죄인으로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 인간을 레바논 포도처럼 지극히 향기로운 자들로 열매 맺게 하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 탕자도 그처럼 허랑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잃어버려 거지가 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는 탕자의 허물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탕자의 생명을 염려하였고 아버지 자신의 생명을 내어줘서라도 둘째 아들 탕자를 다시 얻고자 한 그 사랑을 탕자가 깨닫고 스스로 굴복 되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옴으로써 그 생명에 속한 사랑의 끈들로 아버지와 아들 탕자가 하나 되어서 영원한 사랑과 신뢰 속에서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본 자들은 결코 한쪽이 새까맣게 타서 먹을 수 없는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지 않으며 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비둘기와 같지 않고 그리고 쏜 화살이 원수들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속이는 활이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호세아 7:8 개역개정)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호세아 7:11 개역개정)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호세아 7:16 개역개정)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본 자들은 누구든지 곧 이스라엘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들은 새롭게 되어서 백합화처럼,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푸른 감람나무처럼, 포도나무처럼 꽃 피고 자라서 아름답고 좋은 향기를 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명만큼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사랑이 아름답고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한 생명을 완전히 굴복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이며, 오직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사랑, 죽어야 하는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 자신을 생명을 희생하는 생명을 초월한 그 사랑만이 그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던 돌처럼 단단해 깨지지 않던 아들의 마음을 깨뜨리고 굴복시키므로 그 아들은 아버지를 무한히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어서 결국 아버지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참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은 자, 그리스도의 형상과 똑같은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줘서 얻은 살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과 생명의 음료로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나에게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주셔서 죽음에서 건져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음란한 고멜과 같이 창기 짓을 하여 부정하게 된 자라도 변화되어 완전히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옛 창조 영역 안에 있던 우리가 어떻게 새 창조 영역 안에 살 수 있고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던 우리가 성령님의 생명의 법 아래로 옮겨질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영원한 사랑을 맛보기만 하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는 그 무엇으로 안되며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결코 스스로 변화되고 새롭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가 직접 부딪쳐 보고 싸워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문제 때문에 40년 동안을 방황을 했고 이 문제 때문에 저의 영과 혼과 육체가 완전히 죽은 자가 되어서 일어날 기력도 없었습니다. 그냥 누워있어도 입술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습니까?”라고 죽음 직전을 넘어서 죽음 가운데 제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입도 움직일 수 없는 그 상태에서 내 입술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쏟아져 나온 한 마디 말은 바로 “예수님,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였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기력이 없어서 제가 목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눈물도 안 나왔습니다. 목소리도 안 나왔습니다.

    죽음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저의 마지막 호소가 “예수님 나 좀 살려주세요”라는 이 말 한마디를 하기까지 제가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을 돌고 도는 인생을 살았는데 그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희생하여 우리를 살리는 사랑, 그 사랑이 아버지를 떠난 탕자를 돌이키게 하였고, 야곱을 굴복시켜 이스라엘로 변화시켰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 핍박했던 사울을 예수님의 종 바울로 만들었으며, 요한의 아들 시몬을 베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맛볼 때, 육적인 본능을 좇아 살던 자가 변화되어 주님을 좇아 옛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새 생명을 취하여 주의 영을 좇아 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주는 사랑,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은 죄에 빠져 죽어가는 한 생명을 보고 너무나 안타깝고 슬퍼서 가슴 치며 발을 구르며 울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사랑은 죄로 죽어 가는 아들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랑, 자신이 아들 대신 피 흘려 죽어서 자신의 생명으로 그 아들의 생명을 대체해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는 사랑은 죄와 한 몸이 된 타락한 생명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어서 그 생명을 절대 굴복시킬 수 없고 절대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쫓아가서 창기 짓을 하는 음란한 고멜을 돈을 주고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와서 그를 용서하여 좋은 말로 타이르고 남편으로서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지만 음란한 마음을 가져 부패해진 그녀가 오직 남편 호세아 만을 의지하고 한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의 속성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릴 때나 그가 장성한 아들이 되었을 때나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을 때나 고멜처럼 창기가 되었을 때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은 변함없고 동일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상황에 맞게 여러 방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나타났고 또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을 때에는 남편의 사랑으로 나타났고 또 고멜처럼 다른 남편을 떠나서 사망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을 나타내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은 그 무엇으로도 돌이키지 않는 우리의 악함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함이 하나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당신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라고 칭하는 진실한 사랑은 창세기 2장 24절 말씀과 같이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는 사랑, 남편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와의 위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연약한 아이를 품에 안고 지극 정성으로 양육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드는 어머니의 그 사랑 또한 너무나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이 온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기초가 바로 선 상태에서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울타리를 벗어난 아담과 하와에게는 더 이상 어머니와 같은 사랑, 남편과 아내와 같은 사랑으로는 우리와 교제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의 기초가 무너져 남편을 남편이라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를 불신하여 어떻게든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는 죄악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한 남편과 같은 사랑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사랑은 이스라엘과 우리들의 죄악된 마음을 절대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너진 기초를 다시 회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해 오신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 아버지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 죽어가는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피 흘리는 사랑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믿음과 사랑의 기초를 회복시킬 수 있고, 그 기초 위에서 아내의 자격이 없던 우리가 아내의 자격을 갖추고 아들의 자격이 없던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남편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우리가 영원하고 너무 신비롭고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신성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일을 해낼 수 없었지만 오직 아버지 만이 아들에게 갖는 사랑, 자신의 생명을 희생에 해서 아들에게 주는 사랑, 그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그 사랑,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그 살을 떼어주고 자신의 피를 흘려 주시므로 죽어야 하는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그 사랑, 벨벳 거미와 염낭 거미처럼 자신을 몸을 새끼들의 먹이로 줘서 새끼들은 살리고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랑,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비하고 놀랍고 뛰어난 그 사랑만이 부패한 죄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들의 입술로 “하나님은 나의 참 아버지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그 마음은 죄의 사슬에 꽁꽁 묶여 있어서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 무너진 기초를 다시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무너진 기초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 죄인을 찾아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나타내시므로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돌이켜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그 믿음과 사랑의 기초를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기초가 무너진 상태에서 여전히 남편이 아내에게 가지는 다정다감한 사랑으로 그를 돌이키게 하려 한다면, 오히려 상태를 더 악화시켜서 그를 더 망쳐버릴 수 있고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를 더 삐뚤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베풀어주는 생명에 속한 사랑, 아버지의 생명의 피 흘림을 통해서 아버지는 죽고 그 생명을 아들에게 부여해 주므로 말미암아 아들을 살리는 그 십자가의 사랑은 그 아들이 가지는 근원적인 죄의 문제, 그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아버지의 희생으로 해결해 주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아들을 잘못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남편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은 신뢰가 깨져버린 아내와 아이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고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오직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준 그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맛보게 되면 그 아들이 아무리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타락의 길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깨달은 자로서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만이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죄악된 마음, 그 마음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흑암을 뚫을 수 있고 뚫어진 틈으로 우리의 죄악된 마음에 생명의 빛이 비치므로 우리가 비로소 아버지의 생명으로 나를 살리신 그 위대한 사랑에 굴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와 고멜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완악하고 부정하고 간음을 하고 변질된 마음을 가지고 거짓 남편들을 찾아다니는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랑을 그 마음에 비춰 주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보게 됨으로써 죄악된 본성 속에서 헛된 것들을 좇던 그들이 변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진 그 생명에 속한 사랑은 이러한 위대한 능력이 있으며 그 사랑만이 죄로 인해 감겼던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진리를 보게 할 수 있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너무나 초월적이고 너무나 고상하고, 너무나 깊고 너무나 높고 너무나 넓은 것으로 이 세상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맛본 자들은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절대 뒤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우상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라 할지라도 참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여 발걸음을 돌린 사람일지라도 탕자처럼 그 기이한 사랑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서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그러한 놀랍고 신비한 사랑만이 우리를 살릴 수가 있고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품상으로 거룩하게 할 수 있고 우리를 의롭게 하여 우리 삶 속에서 의를 행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하거나 거룩함을 입고자 하는 그런 모든 수고와 모든 행위들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개역개정)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그 삼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우리가 맛보기만 하면 그 누구일지라도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영화로운 삶을 사는 자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고도 다함이 없는 생명에 속한 사랑을 우리가 소유 받게 되면 본성과 생명과 형상과 영광 면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지신 그 생명에 속한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과 형상을 열매 맺게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 면에서, 본성 면에서 형상 면에서, 영광 면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자 곧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자로 우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렇게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을 호세아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1장 2절을 보겠습니다.

     

    호세아를 통한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 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얻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는 그 땅이 주로부터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 (호세아 1:2, 한글 KJV)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음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에게 음녀 고멜을 아내로 받아들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결혼한 아내와 같은데 이들이 본 남편을 버리고 거짓된 남편인 우상을 좇아서 섬기는 행위가 음녀 고멜이 남편 호세아 선지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쫓아가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며 창기 짓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습니까? 아내였지만 창기가 된 이스라엘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아내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까?

     

    이렇게 수치스럽고 자격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내인 선민 이스라엘, 그 마음이 변절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를 좇아가서 창기 짓을 하던 그들이 본 남편이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더러운 자신들을 비싼 값을 치르고 다시 아내로 맞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생명에 속한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의 자격 없음과 죄 때문에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던 사랑, 영원하고 변함없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맛보게 됨으로써 그들의 부패하고 음란한 마음이 변화되어 오직 본 남편이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온 자들이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그들을 나의 백성, 나의 아들이라 부르며 그들을 백성으로 아들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고고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모습을 호세아서 14장 5절~7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의 이슬로 날마다 적셔지므로 그들이 백합화같이 피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히며 그의 가지가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며, 또 그들은 곡식같이 풍성하고 포도나무같이 꽃이 피고 그 향기가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장 8절에서는 기가 막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전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북 이스라엘이 헛된 우상들을 쫓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남편인 첫 번째 남편을 버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남편들, 우상들을 쫓으며 그들과 간음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 아버지의 생명을 희생해서 그들의 죽을 생명을 대체해 주는 사랑을 맛본 자들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기분이 좋으셔서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열매를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이스라엘의 죄에 분노하여 “내가 다시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 용서하지 않겠다” “너희들은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고 다함이 없고 변함이 없는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사랑의 화신인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유의 신이 되실 수가 있었고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구원의 주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서 14장 8절, 하나님께서 나는 푸른 전나무와 같으니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온 자가 열매를 얻는다는 얘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에브라임,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하나로 연결됐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제자들을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셨듯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연결됐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그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봤기 때문입니다. 그 강력한 사랑의 끈이 분리되었던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시켜서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영원한 믿음과 신뢰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 사랑만이 사람을 새롭게 하고, 이 사랑만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이 사랑만이 주의 형상을 갖게 하고, 이 사랑만이 사람을 성숙시키고, 이 사랑만이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이 사랑만이 사람을 하나님과 똑같은 자,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과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보는 순간에 그들이 “우상은 더 이상 나의 하나님, 나의 신, 나의 주인, 나의 남편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에브라임이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는다는 얘기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이 생명의 속한 사랑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앎으로 말미암아 창기 짓을 일삼았던 그들이 놀랍게도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놀라운 변화를 갖게 된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만 가지는 영원하면서도 다함이 없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랑,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대신 그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푸른 전나무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는 그 푸른 전나무의 가지로서 그 나무로부터 한없이 공급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의 사랑을 맛봄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들이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 (요한복음 15:5, 한글 KJV)

     

    하나님의 생명 안에 속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로 연결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된다는 말씀이 1부에서 말씀드렸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연합을 의미하는 호세아서 11장 1절 말씀이며 또 이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는 신약성경이 갈라디아서 3장 26절, 4장 6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도다. (호세아 11:1, 한글 KJV)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26, 한글 KJV)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한글 KJV)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본 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비로소 깨달아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십니다”라고 그들의 입술로 기뻐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돌아온 자들은 푸른 전나무와 같으신 하나님과 연결되는데, 그 관계는 어우러지는 것을 넘고 또 접붙여지는 것을 넘어서 완전한 결합, 조그만 불협화음도 없이 완전히 조화되고 일치를 이루는 하나가 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 안에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은 그들을 하나로 온전하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3, 한글 KJV)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결되어서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하나 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 속한 사랑이 그 열매로 나타난 것이며 그 신비롭고 위대한 사랑을 우리가 맛봄으로써 우리도 그 사랑에 매여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에서 완악하고 패역하고 부정하고 음란한 고멜과 같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여호와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맛본 자들은 그 사랑의 능력 앞에 굴복되어서 항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두 손들고 항복한 자가 바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얍복 강가에서 여호와의 천사로 나타난 그리스도와 씨름한 야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사랑, 그 사랑을 맛보고 깨달은 자만이 거룩한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땅은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땅, 신성하고도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거룩한 품성을 소유하지 않으면 절대 발을 들일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야곱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자로서 여전히 천연적인 성품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을 향한 마지막 관문인 얍복 강가에서 사탄과 하나가 된 에서에 의해서 저지를 당했던 것입니다.

     

    “모세야, 네 발에 신발을 벗어라”라는 얘기는 육적이고 천연적인 마음은 세상에 속한 불의와 부정한 것을 소유하고 있어 하나님과 어울리는 품성의 소유자가 아니며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살기에 적합한 성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불구자, 장애인으로 만들어가면서까지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보게 하시므로 그를 완전히 굴복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고 얘기했지만 그분의 사랑으로 그를 굴복시켰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위대한 사랑을 깨닫기까지 그리고 그가 거룩한 자로 변화되기까지 야곱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연단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변함없고도 영원하고도 다함이 없고 무궁한 사랑을 깨닫고서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앞에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이긴 자’라는 새 이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해 주는 이스라엘을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소선지서 12권 중에서 특히 호세아 선지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영적인 생명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성경입니다.

     

    그중 호세아서 11장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2장 15절, 어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 왕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그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과 연합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11장 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내가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그들을 이끌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얘기를 “내가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그들을 이끌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바로 그분이 자신의 선민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으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면서 먹이시는 장면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타나심을 통하여 선민 이스라엘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표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전에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을 400년 동안 애굽 왕의 속박 아래 있게 하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 선민 이스라엘을 불러내서 40년 동안의 광야 여정을 지나게 하시고 그다음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함으로써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여 우리들을 생명의 말씀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굽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아들이 된 이스라엘, 우리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가 연합됨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이렇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심으로써 그분을 통해서 둘째 아들, 셋째 아들,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산출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성경 호세아 11장 1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내어 선민 이스라엘과 연합되게 하겠다는 것을 예표로 나타내 보이셨고 이 말씀은 마태복음 2장 15절 말씀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이스라엘과 신약시대 교회들 그리고 성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죽을 때까지 그 곳에 있었으니 이는 선지자가 주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심이라. (마태복음 2:15, 한글 KJV)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그들과 하나로 연합되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출생하셨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을 안 사탄이 그분을 제거하려 했고 그 계략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헤롯왕이 죽기까지 아기 예수를 애굽으로 피난시키셨다가 다시 불러내셨던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되게 하여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고난들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도다. (히브리서 2:10, 한글 KJV)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고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의 실체인 것을 깨닫고 영접하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에서 불러내어져서 아버지의 그 생명의 속한 사랑을 십자가에 달려서 나타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절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요즘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무한한 사랑을 가진 생명 안에서의 사랑,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신 생명에 속한 사랑을 부여해 준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이루신 구원을 부인하고 다른 어떤 대상을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미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안상홍이 교주인 하나님의 교회 또 이만희가 교주인 신천지를 통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 외에 결코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내신 생명에 속한 사랑,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 그 신비로운 사랑의 빛을 비춤 받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아들들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5절 말씀을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택함을 받아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 5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미리 정하셨으니 (에베소서 1:4,5 한글 KJV)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것에 현혹되어서도 안 되고 미혹돼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존중해야 하는 것은 분명 맞지만 인간적인 마음을 좇아 맹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목사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개인이 아니라 그분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그 생명에 속한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영원한 사랑을 맛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다른 목사님을 추종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툼과 분쟁이 생겨서 추종하는 목사님을 따라 나가서 교회가 쪼개지는 일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서로 다른 사도를 추종하는 성도들끼리 분쟁이 생기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라고 질책한 것입니다.

     

    12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 각자가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폴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다."라고 함이라. 13 그리스도께서 나뉘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처형되었더냐? 아니면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더냐? (고린도전서 1:12, 13 한글 KJV)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땅에 사는 존재인 반면에 신성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우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피부로 느껴서 알 수는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체현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우리가 맛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 이스라엘이 될 수가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형제들이 되지 않고는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간곡히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맏아들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나타나신 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의미는 영원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자,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신성한 하나님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본 유일한 분은 그 품 안에 계신 독생자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뿐이라.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한글 KJV)

     

    그리고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주신 독생자는 바로 어떤 분입니까? 영원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영원 안에 계신 하나님의 독자이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한글 KJV)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안에 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독생자, 독자이셨습니다. 독생자 곧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분 외에는 선한 천사들? 그 어떤 천사도 하나님의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영원 안에 계신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바로 삼위일체,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는 삼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만 계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영원 안에 계신 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그 아들 외에는 그 어떤 자도 결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고 다른 진리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원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그분이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셔서 맏아들이 될 수가 있었습니까? 또 맏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산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이 문제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점이 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심으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가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인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는 성육신을 하셨고 사람의 아들로 생애를 사시고 사람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람의 아들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과 부활과 승천하신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야 문제가 풀릴 수가 있습니다.

     

    영원 안에 계셨던 그분께서 영원 밖으로 나와 제한된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일이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되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영원 안에 계신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시기 위해서 제한된 시간 속으로 들어와서 마리아 몸에 잉태되어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로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셨지만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마리아 몸에 잉태된 그 순간에 인간의 본성을 지니게 됨으로써 원래 하나님으로 가지셨던 신성과 더불어 인성을 모두 가지게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완전한 인간 되어서 인성을 소유하셨고 또한 하나님으로서 본래 신성을 가지셨던 분이기에 인성과 신성 모두 지니시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로서 십자가 위에서 만유를 포함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므로 말미암아 인성을 가진 그분이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서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셨다고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낳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부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분의 의로움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인성이 거룩한 인성, 영화로운 인성을 입고 부활하게 되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의 인성이 부적합하거나 사망과 죽음을 통과하는 데 있어서 어떤 결함과 부족함이 있는 요소가 있었더라면 예수님은 절대 부활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인성이 원래 가지고 계시던 신성과 같이 높아져 인성과 신성이 온전히 하나로 연합되어서 하나님과 완전히 어우러지는 인성의 영을 가지게 되셨고 그 높여진 인성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서 맏아들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9, 한글 KJV)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씀이 로마서 1장 4절 말씀,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가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며, 제한된 육체 가운데 갇혀 있었던 그분의 인성은 죽음을 통하여 육체의 몸을 벗고 부활을 통하여 신령한 몸을 입음으로써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게 되어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의 영과 온전히 어우러지는 영, 하나가 되는 영, 조화가 되는 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서 조그만 흠과 점도 없는 완전한 의인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하지 않고 죽음 가운데 여전히 계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의미이며 그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과 조화가 되고 일치가 되고 부합될 수 있는 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조화를 이루고 죽음을 통과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성을 소유하고 계셨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하나님을 담는 영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그분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일치되고, 부합되고, 적합하고, 온전해지고, 완전케 되고,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 부활을 통해서 그분의 인성이 높여진 영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그래서 부활 이전에는 신성을 소유한 그리스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독생자, 유일한 아들이셨습니다. 부활 이전의 그리스도는 영원 안에 계신 분, 신성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속성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로서는 당연히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원 안에 계셨던 그분은 신성 안에서만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기 위해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는데,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순간에 오직 신성만을 소유하셨던 그분이 인성도 가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인성을 모두 소유한 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원래 그분의 존재는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님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심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신성의 존재 안에 인성이 함께 결합되어서 그분은 두 가지의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을 가지신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 유일한 아들이 맞지만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는 인간의 삶을 통하여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되어야 했고 그래서 그분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분은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도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로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 안에 계셨고 신성을 소유하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도 인성을 가지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얘기하고 있는 말씀이 로마서 1장 4절,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인성의 측면에서는 그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사도행전 13장 33절은 하나님께 다시 살리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들의 자녀인 우리에게 어떻게 이것을 이루셨는가를 선포하노라. 시편 둘째 편에도 기록되었듯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 하셨고 (사도행전 13:33 한글 KJV)

     

    여기서 오늘날 너를 낳았다는 얘기는 부활한 사람 예수님이 새로운 출생을 했다는 의미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것은 성육신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33년 반 동안의 삶을 사신 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분의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부활을 통한 사람 예수님의 새로운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는 공식적인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 안에 존재하신 분으로서 신성한 하나님이셨고 그 신성 안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분명하지만, 성령님에 의하여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서 인성을 지닌 사람의 자격으로서는 부활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신성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이 증명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인성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30년의 생애와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며 부활은 하나님의 의로운 법으로 그분의 전 생애를 면밀하게 검증한 결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판명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 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후 올라오실 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그분 위에 임재하셨고 하늘에서는 음성이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라고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 영 하나님 곧 삼일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온 우주에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참 아들이심이 판명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아들이라 이미 선포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단 강에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이신 것을 공개적으로 온 우주에게 소개 한 것이고 부활을 통해서는 그분의 삶과 그분이 이루신 일들을 통해서 그분이 하나님의 진실한 아들이신 것을 온 우주 앞에서 확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켜서 약속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함으로써 부활을 통하여, 부활 안에서,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로 인하여 바로 사람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 예수님의 이러한 출생은 독생자로서의 출생이 아니라 또 수많은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을 출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맏아들, 첫 태생으로서 출생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의 맏아들, 첫 태생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9, 한글 KJV)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외아들이셨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 예수님의 출생을 가져오셨고 그 부활을 통하여 온전케 된 그분의 인성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부활을 통한 사람 예수님의 출생은 그분이 인성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완전하게 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한 것으로써 그분이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일 뿐이었는데,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분은 맏아들이 되셨던 것이며 히브리서 1장 6절에 그분을 맏아들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다른 아들들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그 분께서 첫째로 나신 이를 세상으로 데려오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고 하셨으며 (히브리서 1:6 한글 KJV)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송축하리로다. 그분은 그의 풍성하신 자비하심을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으며”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은 하나님의 맏아들인 사람 예수님의 출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그분은 영원 안에서 신성을 지니신 분으로서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였던 것입니다.

     

    원래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신성만을 가지신 하나님이셨고 그 안에 인성이 없었기 때문에 인성을 취하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의 몸을 통해서 잉태되어 출생됨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더불어 인성을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신성과 인성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부활 이전에는 신성 안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인성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기 위해서 이 세상 죄와 사망과 마귀와 전혀 무관하신 의로운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을 통하여 그분의 의로움이 입증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비로소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통하여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 예수님의 출생을 가져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부활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하여서 수많은 형제들의 첫 태생, 맏아들이 되셨던 것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시기 전까지는 영원 안에서 계시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오직 신성만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지만 성육신하신 이후에는 신성 외에 인성도 가지신 존재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인성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전 우주 안에서 공개적으로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혼자만 알고 있고 하나님 혼자만 인정하고 있다면 하늘과 땅의 온 우주 안에 있는 보이는 존재들과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자로 사신 33년 반 동안의 삶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비로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침례 요한에게 요단 강에서 침례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심으로써 사탄과 그에 속한 악한 천사들 그리고 선한 천사들이나 사람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 앞에서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계속 반복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이전에는 영원 안에서 신성만을 지니신 독생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은 성육신 전의 존재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한글KJV)

     

    그러나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함께 인성을 소유하신 분으로서 33년 반 동안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그 순간에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첫 번째 아들이 되셨고 또 그분을 믿고 영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출생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주님을 만지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또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라."라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여자가 됐든 남자가 됐든지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으므로 형제님이라고 불러야 사실은 옳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는 여자분들에게 자매님으로 부르고 남자분들에게는 형제님으로 부르고 있지만 주님 안에서는 주님과 하나 된 모든 자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접붙임 됨으로써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고 또 신랑이신 주님의 신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믿고 영접한 자들, 바로 아버지의 그 생명에 속한 사랑의 실체이신 왕이신 주님을 믿고 영접한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분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게 하여 인성을 가진 자로서 살게 하셨습니다. 신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 그 신성과 더불어 그 인성이 그리스도의 존재의 일부가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인성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못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시고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선포함으로써 그분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셨고 이로써 그분의 뒤를 좇는 수많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출생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호세아서 말씀으로 돌아와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바로 호세아서 11장 4절 “내가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로 그들을 이끌었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성한 사랑입니다. 생명에 속한 사랑으로 이 세상에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하고도 놀랍고도 뛰어난 사랑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 신비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줄들로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세상 가운데,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을 세상에 내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그 줄들을 타고 올라가서 부활과 승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사랑의 줄, 사랑의 끈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줄들이 무엇입니까?

    그 줄들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 신격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됨으로써 성육신하셔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사람의 아들로서 생애를 사시고, 사람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람의 아들로서 부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성육신이 바로 사람의 줄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 멀기 때문에 신성한 사랑을 맛보려 해도 결코 맛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신비하고도 놀라운 사랑을 감히 맛볼 수 없고 접촉할 수 없고 그 사랑에 결코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신성한 사랑을 맛본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육체를 입으시고 성육신하셔서 사람의 줄, 사랑의 끈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성육신하시기 전의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만 존재하셨지만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후에는 또 다른 존재인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의 아들, 예수라 칭함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그리스도는 영원 안에 계시는 분으로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 아들 하나님이셨습니다.

     

    근데 그 아들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 신성 안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셔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예수님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라 부르는 그 이름 안에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우리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이라 불리는 그 이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은 바로 사람의 줄들인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사닥다리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사닥다리의 끝이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은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였고 그 위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이 누워있는 땅을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야곱의 꿈에 보였던 그 사닥다리,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하나님의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던 그 사닥다리가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의 줄들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 신성을 소유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나타나신 예수님이 바로 사람의 줄들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그 사람의 줄들은 다섯 마디가 있는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 바로 첫 번째 마디였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이 첫 번째 마디였다면 30년과 3년 반 동안의 생애, 총 33년 반 동안의 긴 생애를 사셨는데 이 땅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장막을 치고 사신 그분의 인생 33년 반 동안의 삶이 바로 두 번째 마디인 사랑의 줄 곧 사랑의 끈이라는 것입니다.

     

    왜 사랑의 끈이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을 인간은 결코 취할 수도 없고 맛볼 수도 고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분의 사랑의 끈을 통하여 사람과 하나님이 연결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벧엘에서 야곱이 꾼 꿈의 이야기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의 33년 반 동안의 생애가 바로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의 두 번째 마디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사람의 줄들의 첫 번째 마디였다면 두 번째 마디는 바로 33년 반 동안의 인생의 삶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우리 가운데 함께 사셨다는 것이 두 번째 바로 사람의 줄들의 마디인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마디는 무엇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마디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마디는 죽으신 뒤 삼일 후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부활이 바로 사람의 줄들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마디이지만 그 간격이 짧은 것은 죽음과 부활이 삼일 동안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줄들, 그 긴 줄이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이 땅까지 내려오게 하기 위해서 만세 전에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 2000여 년 전 드디어 그분이 성육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줄들의 첫 번째 마디였습니다. 그리고 33년 반 동안에 생애를 사신 것이 두 번째 마디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신 것이 세 번째 마디, 부활하신 것이 네 번째 마디인데 이 일은 삼일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기에 세번째와 네번째 마디의 간격은 아주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활 뒤에 사람의 줄들의 다섯 번째 마디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줄들, 곧 성육신, 33년 반 동안의 삶,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을 통해서 높으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낮은 땅에 있는 우리 인간을 연결해 주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성육신하신 분,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 안에서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잉태되어 인성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라 불리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올라가게 하는 사람의 줄들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 그 생명에 속한 사랑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여 우리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끌어당기는 생명 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줄들 곧 사람 성육신하신 사람의 아들, 그 인자로 오신 성육신하신 그분께서 사람의 줄들의 첫째 마디, 두 번째 마디, 세 번째 마디, 네 번째 마디를 통해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가는 생명 줄이 되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줄들의 첫 번째 마디는 긴 줄이겠죠?

    그 생명의 줄을 이 땅에 내려주기 위해서 곧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인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고 준비하셨고 선민 이스라엘을 그렇게 훈련시키고 조성시킨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성을 통해서, 성육신하신 그 인성을 통해서, 사람의 줄들의 마지막 마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줄, 그 사랑의 끈이 모두 완성됐다는 것을 사도행전 7장 56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자신의 인성 안에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줄들의 마지막 마디, 사랑의 끈의 마지막 부분의 모습을 스데반 집사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을 보면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 온 스데반 집사가 대제사장과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이루셨지만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여서 하나님께 반역한 것처럼 그들도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담대히 선포하고 또 예수께서 영광의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을 보고 “너희가 죽인 사람의 아들 예수가 바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계신 것을 본다”라고 하며 그들이 들을 수 없었던 말, 하나님 오른쪽에 서 계신 사람의 아들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말할 때, 의로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죄인으로 몰아서 십자가에서 죽인 그 일 때문에 그 양심이 찔려서 그들의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55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주시하더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기를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니 (사도행전 7:55~56, 한글 KJV)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자신이 인성 안에서 승천하신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 하늘문을 열고 스데반에게 보여주셨고 그 입술을 통해서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라고 선포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인자가…” 그렇습니다. ‘사람의 아들’ 바로 ‘인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승천이 사람의 줄들의 마지막 마디, 사랑의 끈의 마지막 부분인 것이며, 그 사람의 줄들의 마지막 마디, 사랑의 끈들의 마지막 부분, 그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곁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시고 또 33년 반 동안의 생애 동안에 보여준 아름다운 미덕과 그분의 품성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시고 또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시고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시고 마지막으로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 64절에서 예수께서 잡히셔서 공회 앞에 끌려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사람의 아들로서 임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인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사람으로 사시고 사람으로 죽으시고, 사람으로 부활하시고, 사람으로 승천하셔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마지막 때에도 인자로서 하늘 구름을 타고 강림하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성 안에서 이루신 모든 일들 곧 33년 반 동안의 삶,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시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되신 것이 사람의 줄들의 첫 번째 마디, 그분의 33년 반 동안의 생애가 두 번째 마디, 그다음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시는 것이 세 번째 마디, 그다음 네 번째 마디는 세 번째 마디와 매우 가까워 두 마디이지만 마치 한 마디처럼 보이는 부활이고 마지막 다섯 번째 마디 승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서 행하신 이 모든 일들은 바로 인성 안에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성육신과 33년 반 동안의 삶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 모두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행하신 것이며 호세아서에서 이 모든 것을 함축하여서 사랑의 줄들 곧 사랑의 끈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의 줄들과 사랑이 끈들이 아니면 하늘에 계신 신성한 하나님과 땅에 사는 우리들과의 간격의 거리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에 죄인을 돌이킬 수 있게 하는 생명에 속한 사랑을 결코 맛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어줄 수 있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우리가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 곧 성육신하셔서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람의 줄들이 사랑의 끈들이요, 사랑의 끈들이 사람의 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곧 성육신하신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임한 것이지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너무나 간격이 멀어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가진 우리는 그 사랑을 결코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랑이기 때문에 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그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너무나 신비하고 너무나 우월하고 너무나 뛰어나고 너무나 탁월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맛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 되어서 우리에게 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끈들이 사람의 줄들입니다. 사람의 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나타낸 사랑의 끈들입니다.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끈들인 것입니다.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 그러한 죄악된 본성을 가진 여인의 배 속에서 9개월 반 동안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느끼는 그런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인 것입니다.

     

    신성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33년 반 동안 육체의 장막을 치시고 우리 가운데서 삶을 사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람의 줄들로 표현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사랑의 끈이 되신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생명이 속한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없고 영원하고 다함이 없는 그 신성한 사랑을 맛보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그 사랑에 굴복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은 우리 편에서 볼 때 우리를 굴복하게 하는 사랑이고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우리를 정복하는 사랑으로서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나타난 분이 성육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기를 힘쓰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하고, 그리스도에 의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끈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새롭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생명에 속한 사랑이 아니면 다른 그 어떤 사랑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바로 이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이때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했고 어렴풋이 느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 안에 속한 아버지의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무엇인지 네가 아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그 사랑을 알면 네가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먹여라! 네가 젊어서는 너의 허리띠를 스스로 두르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어도 늙으면 네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들이 띠를 둘러 주며 또 원치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봤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피와 살을 가진 몸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면 곧 마리아 몸에 잉태되지 않아 성육신하시지 않으셨다면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질 않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고귀한 사랑,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우리가 맛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사신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그분이 성육신하지 않으셨다면 이 땅에서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살지 못하셨을 것이고 또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부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그리고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늘로 승천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그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무궁한 사랑을 우리에게 맛보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마다 적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것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지금 그것이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3, 한글 KJV)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줘서 우리로 그 생명의 속한 사랑을 맛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변화시켜주고 새 생명을 주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우리에게 맛보게 할 사람의 줄들, 그 사랑의 끈들이 없음으로 인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잡아끌어올리는 일 곧 부활과 승천의 삶을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바로 사람의 줄들이 되시고 사랑의 끈들이 되셔서 행하신 일 곧 가장 먼저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신 성육신이 사람의 줄의 첫 번째 마디이고 그리고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사신 것이 두 번째 마디이며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세 번째 마디,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하신 것이 네 번째 마디,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승천하신 것이 다섯 번째 마디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줄과 사랑의 끈의 각 마디를 모두 통과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줄들과 사랑의 끈들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계시며 우리를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33년 반 동안의 생애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의 복잡한 단계들, 사람의 끈들과 사랑의 줄들을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 신비하고도 놀라운 사랑을 맛본 모든 자들을 모두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땅에 있는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을 내려보내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로 호세아서 11장 4절의 말씀에서 말하는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의 몸으로 행하신 것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턱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들 같았으며, 내가 그들에게 음식을 두었노라.”라고 하셨는데 턱에서 멍에를 벗긴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집트에서 포로가 되어 40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그들의 멍에를 벗겨주신 것 같이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인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우리의 멍에를 벗겨주고 광야에서 우리에게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의 몸, 자신의 살을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입니다.

     

    살과 피가 분리가 되면 죽음이 옵니다.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의 떡,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침 이슬과 함께 내리는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만나를 하늘에서 쉽게 떨어뜨려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과 맞바꿔서 그들을 살리기 위한 생명에 속한 사랑의 표현이 만나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석이 쪼개져 쏟아져 나온 생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거치신 단계들과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게 해준 사람의 줄들, 사랑의 끈들인 것입니다.

     

    호세아서 11장 4절, 한글 성경에는 사람의 줄과 사랑의 줄이라고 단수로 표현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하나의 줄 안에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이루신 다섯 가지 단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단계가 무엇입니까? 성육신, 33년만 동안의 생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 부활, 승천 인성의 다섯 단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의 생명의 끈들이 내려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집트에 살고 있던 선민 이스라엘에게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와 같이 되었고 광야에서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다는 얘기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명에 속한 사랑을 주는 것이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 안에 속한 그 사랑을 줘야만 그들이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그들에게 내어 주심으로 그들이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진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기 위해서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을 때 그들의 목에 지워져 있던 멍에를 벗기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모압 평원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마흔두 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인자하시고 영원하고,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자비와 인내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위한 생명 양식 만나가 되셨고 그들이 목마를 때는 반석을 깨뜨려 그들을 위한 생수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부 될 자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자들에게 하나님 안에만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부여해 줄 수 있는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이집트에서 멍에를 벗겨 주셨고 홍해 바다를 갈라서 건너게 하셨고 또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한없는 온유한 마음으로 인내하셨고 그들을 인자와 긍휼과 따뜻한 보살핌으로써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이며 지금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 4장 6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 우리로 그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사랑, 세상에는 볼 수 없는 신비한 사랑을 우리로 맛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고백한 자들은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세상과 마귀와 죄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들에 적합한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똑같은 자들 곧 예수님과 똑같은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자들로 만들기 위해서 하늘에 속한 양식과 생명의 음료 곧 2천 년 전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사랑을 맛보게 되면, 이 사랑을 알게 되면, 이 사랑에 들어가게 되면, 변화되지 않을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 눈 녹듯이 죄들이 물러가게 되고 불의가 떠나게 되고 어둠이 떠나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영원한 신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신 영원하고도 변함없고 다함이 없는 그 무궁한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걸음마를 뗄 때부터 우리의 손을 잡고 가르치셨고 품에 안고 어머니로서 양육하여 돌봐 주셨고 광야에서는 신랑으로서 신부인 그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끊임없이 함께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인내와 그 끈기를 가지고 우리들에게 아주 천천히, 아주 자유롭게, 은혜 가운데 우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 생명 안에 속한 사랑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해서 오병이어를 잘게 잘게 찢어서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조각조각 찢어서 우리에게 조금씩 조금씩 먹여 주심으로 우리를 기르시는 것입니다.

     

    큰 떡이면 우리가 먹을 수 없습니다. 이제 걸음마를 떼는 어린아이, 세 살, 네 살짜리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소화할 수 있도록 조각조각 찢어서 나눠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삶이 바로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먹고 마시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삼일 하나님이 계신데 이 삼일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해 주는 사랑 그것이 생명에 속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맛볼 때 우리들은 바뀐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먹이실 때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고 끈기를 가지고 천천히 우리를 먹이심으로 말미암아 장성하지 못한 어리고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을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우리를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며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10년, 때로는 20년, 때로는 30년이 걸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삶의 여정이 40년이나 걸렸습니다.

     

    40년 동안을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간음을 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지고 아내로서 고멜 같은 창녀 짓을 하여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부정하게 되었고 그러한 그들일지라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시고자 하는 그분의 갈망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장 1절 말씀을 제가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라.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을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가르치는 은사, 봉사하는 은사 등, 각각의 은사들을 통해서 바로 신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라는 의미로 예언을 말하기를 더욱 힘써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예언은 바로 신언에 대한 얘기입니다.

     

    한 개인에 대한 미래를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해내는 것,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 곧 아버지만이 가지고 계시는 생명에 속한 사랑, 아프리카 벨벳 거미, 염낭 거미와 같이 자신의 몸을 새끼들에게 먹이로 내어주어 자신은 죽고 새끼들을 살리는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 바로 너희는 예언을 말하기를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먼저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생명에 속한 사랑을 알아야 그 지식을 알아야, 교제를 통해서 배운 바 되어야, 그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알지를 못하면 예언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힌 사랑을 아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절대 죄악된 세상으로 들어가는 죄를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사랑의 실체인 주님께서 내 안에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불의하고 어둡고 부정한 모든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제거된 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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