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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복음15장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 ( 돌아온탕자 3부)
    말씀 나눔방 2023. 6. 27. 19:55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돌아온 탕자 2부에 이어서 3부 말씀의 교제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신 한분 하나님 안에 계신 아들과 여인으로 상징된 성령님의 활동과 그리고 아버지 곧 천부의 사랑을 계시 하시면서 우리에게 3가지 비유의 말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5장 1절부터 7절 까지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세상에 내려오신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씀과 8절부터는 동전인 10개의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의 드라크마를 잃어 버렸을때 그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안 곳곳을 쓸며 찾을때까지 세심하게 찾기까지 쉬지않고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얘기가 기록되어 있고요 12절부터 32절 까지는 집을 나갔다가 다시 성령님의 역사와 활동으로 인하여 일어나서 아버지께 되돌아 오는 둘째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 하시는 천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세하게 이 성경을 읽어 보면은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하면요 아들이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이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황량한 들판 가운데로 오셨다는 것을 15장 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 99마리를 광야에 두고 잃은 양을 찾으러 다니지 않겠는냐 라고 4절에서 말씀 하고 있고

    한분 하나님 안에 우리 인간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첫 번째로 오신 그분은 이 광야에 내버려진바 되고 길을 잃은

    바된 길 잃은 양과같은 처지의 상태에 빠진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 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하고 있고요

     

    그 다음에 동전 열 개 가운데 한 개의 동전을 잃어 버렸다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찾을때 까지 찾지 않겠는냐 라는 성령님으로 상징된 이여인은 들판이 아니라 집안을 쓸었다고 얘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릅니다 그리스도는 외형적으로 우리의 삶에 죄인의 외형적인 모습을 간섭하시고 있다면 여인으로 예표된 성령님

    께서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친히 들어오셔서 활동하시는 것을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쓴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집을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천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 집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들판 곧 세상을 상징하고 있고 또 들판 가운데서 벗어난 황량한 골짜기 절벽이나 가시덤불

    또는 물에 빠질수도 있는 그러한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는 외로움과 공포와 두려움과 추위에 떨고 있는 이세상의 죄인들을

    대변하고 있는 잃어버린 어린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내려오신 예수그리스도는 광야의 삶의 들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 자아라는 내마음 이라는 집속에 들어오시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집인 교회나 선교회 우리

    성도들이 모일수 있는 그러한 교회에 계셨습니다.

     

    한분 하나님 안에 세분 성자 하나님 성령하나님 천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렇듯

    계속적이고도 지속적인 방법으로 구원의 단계를 밟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히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누가복음 10장34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29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여러분 예루살렘은 높은 고지에 있죠 영적인 어떤 비유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이 예루살렘 가나안땅 유대나라에 지형적으로 예루살렘은 높고 여리고는 낮은형편에 있고

    그다음에 요단강을 지나서 사해가 있고 여러 가지 어떤 지형적인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륜 가운데 섭리 가운데 일을

    하시고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이렇게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시고서 유대나라 지형을

    자세하게 주님의 뜻과 섭리대로 만드시고 그 안에 예수님께서 유대나라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신 것을 볼수 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곳에 있고 여리고는 낮은 지형인데 누가복음 10장30절에 보면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그리고 33절과 354절을 보면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여기에서는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여관)얘기가 나오죠

    그리고 35절에 보면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여기에서는 데나리온 돈을 주는 얘기가 나오죠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인데 두 데나리온 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충분히 쓰고도 남을 부유한 상태에서 지불해 주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두데나리온을 여관주인에게 주면서 이사람을 돌봐 주십시오 비용이 얼마가 들던지 간에

    내가 다시 돌아 올때에 다 드리겠습니다 라는  여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서 나오는 이 여관은 바로 성도들의 모임 성도들이 교제를 나누는 이런 선교회나

    교회와 같은 공동체 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강도를 만나 어떤 사단의 실족 시키게 하는 그런 일 여러분 높은 예루살렘 주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가지 않고 하향 내려가는 삶 낮은 지역인 여리고로 내려가는 삶을 살면 여러분 반드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삶을 살면 이 악한 영 사단과 그의 수하들인 타락한 악령들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은 세상 가운데 갇혀지게 되고 사로잡히게 되어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반쯤 죽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의 옷을 빼앗아 버렸다 라는

    얘기로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흉측한 일을 경험하게 된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데요

    여기서 여관은 어떤 의미입니까 왜 여관으로 데리고 갔을까요 여관은 보살핌을 받을수 있는 곳입니다.

     

    돈이 들죠 돈이 들기 때문에 오만원이든 십만원이 든 거기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여관이라는 곳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 이 죄인들이 다행스럽게도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일을 여관에다가 잠시 보관시켰다,

     

    이 여관이 바로 아버지 집이며 교회입니다. 선교회일 수도 있고요. 성도들이 모여 있는 집합체인 공동생활을 하고 진리를

    받아 먹고 마시는 일을 하기 위한 교회생활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잠시 실족하고 넘어지고 어두움에 갇히게 될 경우에는 이 교회 생활을 통한

    교제의 모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아버지 집이며 우리가 천국에 완전히 들어가서 살게 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상에는

    우리의 집이 아버지의 집인데 바로 그집이 교회 생활 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절대 분리 하거나 단절하거나 떠나서는 되지 않는다라는 얘기죠

    우리는 항상 교회 교제의 모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교회안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근데 여기서 보면은 이 여관에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는데 두데나리온을 주면서 이사람을 돌봐 주십시오

    비용이 얼마나 들던지 내가 돌아올때 다 갚겠습니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심히 어려운데요 이러한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집인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게 하였다는 것은 교회생활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고 하늘과

    땅의 주권자 이시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고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이 교회 생활 예배가 있고 교제의 모임이 있는 그곳에 이 흉측한 일을 당한 이사람을

    데려가서 돌보게 하는 부탁을 합니다.

     

    이 교회 주인에게 이사람을 두데나리온이나 주면서 부탁을 하고 내가 다시 돌아올때 얼마가 들던지 그 비용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실족하게 되고 세상가운데 처해 있다가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 사람은 비루한자 누추한자 아주 영육간에 내면적으로 외형적으로 아주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기 때문에 돌아온 그들에게 길 잃어 버린 죄인에게 먹을 양식과 생명수를 전해주는 교회나 선교회의

    활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나 선교회에 속한 성도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만신창이가 되어서 바깥에서 생활하다가 들어온 자에게

    여러분 어떤 형편에서 든지 생명의 양식과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야 겠고 성령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공급되어지고

    허락되어진 말씀이 진리되게 하시는 하늘 이슬을 마시게 하고 먹게 할려면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만신창이가된 그사람에게 일정 기간 까지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정말 포도주를 주고 또 그 사람의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진리 되시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일은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진리의 말씀과 성령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공급해 주어야 되는데 많은 희생과 헌신과 그리고 수고와 노력 이런 것들이 말도 못하게

    여러분 제공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냥 값없이 치루어지는 것은 이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그 만신창이가 되어서 되돌아온 사람을 살리고 먹이고 마시게 하는 이러한

    많은 희생과 많은 댓가가 반드시 반비례적으로 제공이 되어야 그를 살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살리기 위해서 바쳐지는 이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반드시 기억을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35절을 자세히 읽어보면요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여관주인이 생각했던것 보다 더 많은 돈을 주시면서 혹시나 돌보아 주는 과정이 10일이 걸릴수도 있고 한달 일년이 걸릴수도 있는 일이 발생 될수 있기 때문에 비용이 얼마가 더 들수 있는 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돌아올때에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신 그 말씀 속에는 우리가 그 잃어 버린 죄인들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존시키기 위해서 쏟아낸 수고와 봉사와 헌신과

    노력이나 희생 그모든 물질에 대한 손실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실 그날에 우리에게 갚아주실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쏟아낸 정성과 수고와 노력과 봉사와 애씀과 온갖 희생을 반드시 갚아

    주시겠다고 누가복음10장35절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권적으로 인식하고 기억하고 특별히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헛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우리의 하는 일들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쳐진 모든 시간과 힘과 노력들 정성들 재산상의 손실처럼

    보여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모두다 모두다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 갚아주시는 것이 성경은 항상

    30배 60배 100배 이러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접해지는 것을 보면 이 보상에 대한 것이 우리가 상상도 해볼수도 없을 만큼

    가늠해볼수조차도 없을 만큼 우리는 어느 정도 라는 것을 여러분 이해를 잘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큰 부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런 축복의 손길을 통해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만을 믿고 따라 가야 될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보면은 아들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어린양에 대한 비유 잃어버린 동전 10 드라크마중에 한 개를 잃어 버렸을때 찾을때 까지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찾는 여인으로 대변되는 성령님에 대한 비유와 집을 나간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모든 것을 누리는 이러한 누림에 대한 얘기가 한분 하나님 안에 계신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여인으로 대변되는 성령님을 통해서 아버지로 상징된 천부 아버지를 통해서 이러한 모든 구원과

    하나님을 통해서 누릴수 있는 모든 구원과 생명과 권리 회복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2부에서 반지와 신발에 관한 얘기를 해드렸는데요  다시 간략하게 말씀 드리자면요 

    이 손의 반지는 인을 상징하는 인치시는 영을 상징하고 있는 자기 자식의 기업을 물려 받을 그러한 상속자의 명분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는 표요 그리고 장자의 명분의 회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반지와 신발은 노예의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 하나님 앞에 자유인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손에서부터 악한 영으로부터 사로잡힌바 된 그를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활동으로 다시 탕자처럼

    되찾은바 되었기 때문에 원래 노예와 포로 상태 였었는데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활동으로 인해 해방되었기 때문에

    반지와 신발을 신겨 줌으로 너는 내것이다 라는 주님의 것 주님의 소유물 주님의 분깃이라는 것을 외형적으로 표출하여서

    나타낸것이 바로 반지와 신발이라는 것을 여러분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단의 포로와 사단의 노예 사망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진리를 통하여 진리 안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2)

     

    그러니까 아들되시는 예수그리스도와 여인으로 대변된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그 탕자가 아버지가 생각나고 아버지께

    가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이 생기고 돌아가게 된것은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 께서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쓰는 이 활동이 없었다 라면 그 부정하고 냄새나는 돼지를 치는 그 우리에서 사단의 영역 가운데 있는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사단의 영역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과 그 탕자가 갇혀있는 그 곳은 아주 먼 거리입니다 그러나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께 가야지 하는

    그런 결심을 하게 된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 번째로 먼저는 그 사단의 굴레나 영역으로부터 풀려난 것이 아주 조그마한 일이였지만 그 조그마한 일이 발걸음을 아주 점진적으로 아버지가 계신 아버지 집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향해서 계속 발걸음을 행하게 될 때 그 탕자는 마음이 점점더 견고해지고 강건해지고 이러한 발걸음의 시작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유지와 보전이 점차적으로 큰 강건함을 통해서 부요함을 누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집을 나가서 죄인의 세계 사단의 영역 가운데 세상가운데 삶을 살고 있다가 아버지께로 방향을 틀어서

    아버지께로 걸어가는 삶 그리고 아버지 품안에 완전히 들어오는 삶의 구원의 과정들은 먼저는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 처럼 찾는 그 일을 통해서 시작 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과 더불어 여인으로 대변된 성령님의 활동이 우리안에 우리 마음속에

    우리 자아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는 우리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계속 등불을 비추셨다는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사도행전 10장44절에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씀처럼

    성령님의 활동과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지 않으면

    역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동반되지 않은 곳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다라는 것은

    거의가 다 대부분이 가짜입니다.

    그렇게 역사 하실수가 없어요 성령님은 항상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임하십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얼마나 악한영 간교한 영 뭐 방언을 받았다. 은혜를 받았다. 빛의 비췸을 받았다 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된 기만의 일이고 속이는 일입니다.

    제가 감히 단언 컨데 100명 중에서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님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

    성령님께서 그냥 내려오시나요. 아니에요.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귀를 통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눈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보는 자들에게

    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지 그래서 활동을 하시고 그래서 역사를 하실 수가 있는 것이지 말씀이 동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의가 다 기만이고 거짓된 일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속임당하고 있어요. 여러분 참 이게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으로 좀 되돌아가서 선한 목자로 이렇게 예표 되고 있는 아들 예수님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 잃어버린

    죄인을 이 황량한 광야 가운데서 다시 되찾아서 아버지의 품에 이렇게 들어오게 하기까지는 하나가 되게 하기까지는

    가장 먼저 선제되는 일이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선한 목자가 그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신 곳이 어딥니까 들판입니다.

    광야라고 여기 써 있죠. 누가복음15장 4절에 보면 양 일백 마리를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마리를

    잃어 버리면 99마리를  광야에 두고 광야는 이 세상에 여러분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돼 있는 말씀처럼

    말씀께서 육체가 되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본성을 입으시고 이 땅에 광야 같은

    황량한 왜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하여서 실족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그 목자가 곁에서 돌봄을 하지 않으면 돌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지 마음대로 임의로 행동을 하고 생활을 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님 곁을 떠날 수가 있어요.

    이 사람이 이 양이 잃어버린 바 되어 목자 곁을 떠나면 잃어버린 바 된 그 순간에 사실 죽은 것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어디가 꼴이 있고 어디가 마실 물이 있고 어디가 위험한 사나운 늑대 곰 이러한 약탈자들이 언제 어느 때

    나타나게 될런지 또 눈앞에 나타나게 되면  무서운 모습으로 약탈하여서 자기의 먹잇감을 취하고자 하는 그 이리나 늑대

    하이에나 사자 곰 이런 것들을 이길 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 양은 목자가 곁에서 돌봐줘야만 모든 먹고 마시는 문제 생명의 유지와 생명의 보존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양은 어리석기 때문에 무지하기 때문에 목자가 자기의 삶 가운데서  자기의 생명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지 마음대로 꼴을 찾아  가다가 방황하다 보면 잃어버린바 되어서 광야 같은 들판을 넘어 광야를  넘어 황량한

    골짜기 같은데 빠지고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는 그곳에 갇히게 됨으로 말미암아 굶어서

    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죽음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들판은 이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나갔을 때 이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광야로 이 황량한 곳으로 간 것은

    바로 이 험악한 세상의 권세자인  악한 영들이 역사하는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 친히 오신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열망과 갈망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 갈망을 가지고 잠을 못 이루시는 분이 바로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 한 분 하나님 안에 가장 먼저 첫 번째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찾으시는 구원하시는 문제가 이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러분 보세요. 아들 예수님은  등불을 가지고 찾는 일이 아닙니다.

    빗자루로 집 안을 쓰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등불을 가진 여인으로 상징된 이 성령님의 활동과 성령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기초로 한

    그다음에 벌어진 일이고 그 성령님의 역사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찾아내시는 방법은 양이

    있는 곳에 양은 어디 있죠 들입니다. 들판입니다. 광야입니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그 황량한 곳에는 먹이도 없어요.

    사나운 짐승들만 우글거리고 추위가 있는 그곳에 목자가 조금이라도 돌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친히 그래서

    양을 찾기 위해서 목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러분 양을 살릴 수 있는 자는 목자뿐인데 하나님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찾아내시는 유일한 방법은

    낭떠러지에 가서 찾아보기도 하고 골짜기에 가서 찾기도 하고 그 골짜기에 내려가기까지 얼마나 힘들어요.

    가시나무와 덩쿨 엉겅퀴가 있는 그곳에 혹시나 있나 해서 찾기까지 온몸이 피투성이 되는 것입니다.

     

    들판에 또 물가에 있을 만한 그 곳에는 다 찾아보니까 목자가 지치고 지치고 지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요한복음에 여러분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요한복음 3장 14절에 제가 이 말씀을 깨닫고 얼마나 마음이 적셔지는지 모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어올려져야 됩니다.

    이 거듭나는 일을 통해서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은 신성한 본성을 지닌 신성한 생명을 우리 안에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육체 안에 있는 사단의 악한 본성을 끝내는 문제가 이 거듭나는 일입니다.

    왜 거듭나야 되느냐 사단이  사단이 자신의 그 악한 본성 가증스럽고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역심의 마음

    그런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그런 악한 본성을 이 아담의 육체 안에 주입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먹어서는 아니 될 그 선악과를 지혜의 열매를 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독소를 아담 안에 부어넣어 줌으로 말미암아

    아담을 통해서 산출되어진 모든 인류가 아담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 모든 사람들의 본성 속에 이 악한 마음 악한 본성이

    주입되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뱀에게 물렸다 라는 얘기예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거슬려서 범죄했을 때 무슨 얘기가 나오죠 민수기 21장 4절부터 얘기입니다.

    4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그때 뱀에게 물렸잖아요. 뱀에게 물린 것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고 준행하지 않고자 역심의 마음을 가졌을 때 그 순간에 뱀에게 물리게 되어서 죄의 독소가 사람 몸속에 들어오게 되어서 악한 본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그 놋뱀을 들어 그 놋뱀은 구리뱀이기 때문에 실제 이 불뱀과 달리 놋뱀은

    죄의 독소가 없죠. 그러나 실제적인 그 불뱀은 죄의 독소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죄의 독소를 가지고 있는 이 불뱀에게 물리면 사람의 몸 안에 죄의 독소가 주입되지만 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놋뱀은 형상이고 구현입니다. 보여지는 것이에요. 거기는 독이 없습니다.

     

    그 독이 없는 놋뱀 그러나 똑같은 뱀의 모습이죠. 똑같은 뱀의 모습이나 저주받은 뱀의 모습으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지만

    그 높이 달린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살리시는 것이 바로 그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그것이 예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예표를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민수기 21장 4절부터 이 9절까지 나오는 그 예표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개입을 시킨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놋뱀의 모습과 같은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계셨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달리신 그 놋뱀의 모습은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셨지만 실제적으로는 죄나 불의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여러분들 로마서 8장 3절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냐면 로마서 8장 3~4절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으신 분인데 놋뱀의 모습과 같은 죄의 육체의 모양은

    똑같이 가지고 계셨다라는 것입니다.

    이 놋뱀은 뱀의 모습을 갖고는 있었지만 청동 구리 놋으로 만들어진 뱀의 형체뿐이에요.

    뱀의 모습이에요. 뱀의 독은 전혀 없었습니다. 결코 없었어요.

     

    뱀의 독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그 뱀을 보는 자면 만약에 그 구리 청동 뱀이 만약에 죄의 뱀의 독소가 있었다면

    보는 자마다 오히려 사단과 같은 악한 본성으로 주입되어서 그의 본성을 지니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뱀의 모습은 갖고 있었지만 전혀 죄를 지니지 아니하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죄의 육체의 모양만 되셨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의 죄에 구리 놋뱀이 되어서 놋뱀의 모습과 같은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돌아가시긴 하셨지만 이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사시면서 전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는 참여해 본 적이 없으셨던

    인성을 지니시고 그러니까 그 죄와 싸우기 위해서 얼마나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기도하시고 처절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는지를 여러분 반드시 잘 알고 기억하고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 후서 5장 21절 말씀입니다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이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자처럼 모양을 가지고 의로운 자이신 그분이 불의한 자가 되어서 저주받은

    십자가 나무에서 처참하게 무참하게 피흘려 죽으신 것은 그분이 가지신 의를 불의한 우리에게 의를 소유케 하도록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우리에게 주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높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육체의 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을 히브리서 4장 15절에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 이렇기 때문에 그분이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죽으셨지만 불뱀은 죄의 독소를 우리에게 퍼뜨려서 우리에게 주입시키지만 예수님은 불의한 자가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자처럼 죄의 모양을 가지고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셔서 죽으신 그분은

    우리에게 뱀의 죄의 독소가 아니라 의의 생명을 주입시켜주세요 반대입니다.

     

    뱀의 죄의 독소 사단의 그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주입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으시고 왜냐면 우리가 육체 속에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사단이 우리의 뒷 발꿈치를 물어버렸어요.

     

    발꿈치를 물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피를 통해서 혈관을 통해서 죄의 독소 사단의 본성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몸을 가진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하늘에서 그 신성을 지니신 그분이 인성을 가지시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들려 올려지셨을 때 옛 뱀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의해서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그들이 죽음을 당했죠.

    그때 민수기 21장 4절에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으로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은 뱀에게 물려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때 놋뱀을 높이 들려 올려지신 것처럼 바로 십자가에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셨지만

    실제적으론 의인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육체를 입으시고  민수기 21장 말씀처럼 청동 뱀이 높이 들린 것처럼 십자가에

    높이 들렸을 때  좋은 하늘에 하나님의 것들과 신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입시켜 주는 일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려지셨을 때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처리가 된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이 무효화 되고 무력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사단이 우리를 죽이고자 하는 죽음과 사망이 무효화

    되고  우리를 향한 사단의 권세가 무력화 되었다는 말씀 입니다 

     

    아담 때부터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죄의 독소가 들어와서 사단의 본성을 갖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죄의 육체의 모양을 지니시고 십자가에 높이 들어올려졌을 때 사단은 곧 뱀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겁니다.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여러분 이게 요한복음 12장 31절이라는 말씀을 사람들이 거의 알지를 못해요

    31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그전에는 쫓겨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담이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뱀이 아담을 물어버렸어요.

    뒷발꿈치를 물어버렸어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했을 때 그 불뱀이

    물어버려서 죽게 된 것처럼 똑같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이 불뱀의 죄의 독소 사단의 그 악한 죄된 본성이 인간의 몸에 주입이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까지 이 문제가 처리가 안 됐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31절에 보면 이 세상에 심판을 받을 때이니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려 올려지면 이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주님의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들여 올려지시는  이 일은 많은 생명의 산출을 위한

    밀알을 산출하기 위해서 나무에 예수님께서 들려 올려진 것입니다.

     

    가 땅에서 들려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로 이끌어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인지를 미리 알리신 것입니다.

    나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어올려지셔서 피흘리고 죽으신 것은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의로우신 그분이

    죽으신 것은  아담을 통해서 산출되어진 아담까지도 포함한 모든 자들을 그분께로 그 사단의 죄된 본성으로부터

    죄의 독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피를 통해서 이끌어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높이 들려 올려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좀 깊게 좀 얘기를 하자면 그 인성에 속하여서 예수님이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죽으셨는데 여기서는 이 죽음이 여러분 지금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이렇게 듣기만 하셔도 좋습니다.

    많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생명의 씨를 산출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생명의 밀알 모든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기 위한 것은 바로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입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그리고 신성한 요소인 그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 죄의 독소를 해결하고 처리하고 신성한 생명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는

    그것과 그리고 세 번째로 아주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사단의 죄의 독소로 인하여 사망과 죽음을 이 세상에 이렇게 뿌려놓게 되었는데 이 세상의 권세자인 그 통치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사망과 죽음인데 그 사망과 죽음을 가지고 있는 사탄을 완전히

    처리하고 쫓아내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입니다.

     

    이게 여러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까 제가 이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옛 뱀 사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해결됐다 처리되었다. 완전히 무효화되었다.

     

    방금 전에 제가 얘기했던 세 번째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려지는

    순간에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죽으셨으나 그분은 원래가 의로우신 분 죄는 도무지 짓지 아니하신

    의로운 분인데 마치 불의한 자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높이 들려 올려지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관계할 것이 없는

    처리가 된 죄의 독소가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죄의 독소 뱀이 인간의 몸에

    사단의 본성이 주입이 되었는데 그것이 빠져나가게 된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여러분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진리의 말씀이요.축복의 말씀입니까

     

    원래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뱀이 사람의 몸에 들어올 수가 없죠.

    그런데 그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뱀이 인간의 몸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의지 내 자아와 내 마음을 이렇게 지배자인 것처럼 통치자인 것처럼 다스려서 그 하나님과의 접촉 기간인

    영을 완전히 혼잡스럽게 한 것입니다.주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 놓았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타락한 인간의 아담이 범죄하여 불순종하여서 먹어서는 아니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본성 사단의 본성이 주입되었는데 뱀에게 물렸기 때문에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셔서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처럼 오히려 죽음을 당하고 그렇게 저주의 나무에 달림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뱀의 본성은 처리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생명의 본성을 인간의

    그 몸과 혼과 영 속에 주입을 시켜놓은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여러분 뱀의 본성이 빠져나가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성이 들어와 주입됐다는 것은 하나님의

    잃어버렸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사건을 통해서

    높이 들려올려지는 순간에 죽으시는 순간에 이 문제가 처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신성한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높이 들어올린 것을

    너희가 믿게 되면 너희가 그것을 신뢰하게 되면 신성한 생명을 소유받아 죄의 본성은 빠져나가고 죄의 본성은 뭡니까

    사단의 본성 아까 사단의 죄된 본성이죠. 그래서 우리를 사망과 죽음으로 이끌어 그 결과물은 사망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 높이 달린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셔서 높이 달린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치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뱀에 물려서 죽어질 수밖에 없는 그들이 광야에서 그 높이 들려올려진 놋 뱀을 쳐다보면

    다 살게 된 것처럼 바로 그 육체의 모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으며 바라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얘기입니다.

     

    바라보는 자들은 신성한 생명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독소가 빠져나가고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겁니다.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네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다시 태어난다 라는 것이 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거듭나는 것은 죄의 독소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주입되었는데 죄의 독소로 사망과 죽음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는 처지 그런 정말 가련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데 십자가에 높이 달린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어서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에 신성한 생명의 힘이 유입이 되어서 이렇게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죄된 그 피가 생명의 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속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받아  받아 먹어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여러분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노라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서 깨닫지 못하여서 아직도

    사단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서 자기 자신이 진리를 통해서 완전히 해방되고 자유함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담이 그 불순종하여서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죄된 본성 이 뱀이 인간의 몸 안에 육체

    안에 주입이 되었는데 이 사단 죄된 본성이 완전히 처리가 된 것입니다. 사단의 죄된 본성이 완전히 종결된 것입니다.

    끝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외형적으로 보면 사람이 선하고 높은 고관이고 돈도 많고 가리키는 사람이고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께서는 이 니고데모를 봤을 때는

    아담에 의해서 발생되어진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하여서 그 뱀이  아담의

    발꿈치를 물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독소가 사망과 죽음을 갖고 오는 그 독소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지금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느냐면

    너가 지금 이 십자가에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높이 달린 그 뱀을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장대의 높이 달린 그 불뱀에

    물린 죽을 자들이 그 놋뱀을 봤을 때 살게 된 것처럼 너도 나를 통해서 생명의 피를 수혈받지 아니하면 너도 뱀의 본성을

    처리하지 못하고 해결 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왜 뱀이 그 육체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육체 안에

    들어가 있는 주입된 뱀의 사단의 역사  활동으로 인하여 결국은 죽음과 사망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니까 지금 니고데모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면 너도 지금 사단에 속한 자이다.

    뱀의 본성이 있다. 뱀에 의해 발꿈치에 물린 그 피를 통해서 그 뱀의 본성 사단의 악한 본성이 너에게 주입되었다면

    그 결과는 죽음과 사망인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죠.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3)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6;23)

     

    그런데 그것을 바꿔놔야 된다 거듭나야 된다 다시 만들어야 된다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셨으나 그분은 원래 불의한 자가 아니라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의로우신 자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그 의를 우리에게 공급해주기 위한 그것을 받지 아니하면 안 된다라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뱀이 주입됐다고 그랬는데 이 니고데모 곧  우리들입니다.

    니고데모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는 아담의 후손들이므로 그 뱀에 의해서 주입된 그 독 때문에 뱀의 본성이

    지금까지 다 있다라는 것입니다.이것을 처리하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어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아벨도 할 수 없고요, 노아 아브라함 야곱도 할 수 없고요, 다윗도 할 수 없고요, 이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이 사망과 죽음을 갖고 오게 되는 이 사단의 독 이 뱀의 독을 이 뱀의 본성을 처리할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구약 성경이 기록되어

    있던 것입니다.

     

    뱀의 본성 이 사단의 악한 본성 죄와 죽음을 갖고 오게 하는 이 나쁜  죽음의 독을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오직

    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높이 장대에 들려서 죽으시는 그 십자가 사건이 없는 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제 뱀의 독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수혈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니고데모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죄를 없이 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구세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인 것이다 라고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떻게 없애요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주입된 그 독은 누구도 없앨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말씀께서 육신이 되시어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이유 인자가 되신 이유 육체를 입고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오신 이유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죄의 독소 죄를 없애 주시기 위하여 29절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깨닫고 이해하시면 여러분 정말 우리는 거듭나는 거 이거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좀 더 신성한 생명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맞아들이고 영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구원의 문제가 항상 식었다가 뜨거워졌다가 미지근해졌다가 차가웠다가  좋을 때는 좀 구원받은 것 같고

    어느 때는 구원받지 못한 것 같은 이러한 헬라삐닥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것을 계속 얘기를 했는데 계속 설명을 했는데 반복적으로 했는데 이것을 이해하면 아~ 하나님이 어린 양이 되셔서  인간에게 부여된 뱀이 발꿈치를 물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죄의 독소가 사망과 죽음을 갖고 오게 한 사단의 그런

    권세 그리고 죄의 독소  사단의 본성 뱀의 본성을 없애시려고 세상 죄를 없애시려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라고

    침례 요한이 얘기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로 십자가에서 높이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셨으나 원래는 의인이셨던 그분이

    뱀의 모습이 되었지만 뱀의 독소는 없어요.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지니신 그분이 뱀의 본성 곧 사단과 사단이 가지고 있는 죄로 인하여

    발생된 사망과 죽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입니다.

     

    곧 사단의 본성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다는 얘기 곧 뱀의 본성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다는 얘기가

    십자가의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달리셨으나 실제적으로는 의인이셨던 인성 가운데 의로우심 만을 가지고 오셨던

    그분이 문제를 처리하시기 위하여 바로 십자가에서 높이 달리셔서 우리 모든 아담과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근데 이 사실을 지금도 아직까지도 세상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있죠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죄의 문제를 계속 유지하고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과 사망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사망을 생명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 것입니다.

    죄의 독소를 빼내고 생명의 피를 우리들에게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하여 흘리신 그 피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피를 통해서 죄의 독소를 빼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의로움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되어진 인성 안에 가지신 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이 얘기를 했냐면 이게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전해 주어야 될 얘기인데

    왜 이 얘기를 했냐면 성령님께서는 두 번째 우리의 구원의 길을 가게 하는 활동하고 역사하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사건 다음에 여인으로 예표된 성령님께서 등불을 켜고 활동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쓴 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빚을 비춤으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거나

    찾으시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바깥의 세계 광활한 들판 이 광야 황량한 들판 가운데 죄와 어둠과 사망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그곳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내시는 방법은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아들을 통하여 그 아들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내시는 방법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방법은 들판에서 아무리 부른다 한들 바위가 막혀 있고

    나무가 가려져 있고 멀리 떨어져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어요.

    높이 장대에 들려서 높이 올려질 때 그 눈을 통해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 저기 높이 달린 그 선한 목자가 나를 지금 찾기

    위해서 보고 있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내시는 방법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높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3장 14절 말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어올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내시는 방법 선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 100마리의 양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

    그 잃어버린 양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멀리 있는지 지금 위험한 상황에 빠졌는지 이미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선한 목자 곁을 떠난 양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우리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높이 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왜 버립니까 목숨을 버리지 않고 찾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찾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왜 너무나 깊이 나락 가운데로 어둠 가운데로 너무 사탄의 세계 사단의 영역 속으로 먼 나라에 가서 그 영역 세계 속에 빠져

    있어요. 그 탕자 이야기에 보면 먼 나라로 갔다는 것처럼 여기에 보면은 누가 복음 어린 양 비유에서  그중에서 한 마리

    잃어버렸다면 99마리를 광야에 두고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그  들판을 지나 들판에서 광야를 지나 광야에서 더욱더 험악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정말 지역이 가파른 곳에 어디인지

    모르지만 세상의 어느 골짜기 가운데 깊이 나락으로 빠졌기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한 목자다 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양이 보게 해야 살기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 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자의 일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눈물 나는 얘기입니까 우리를 찾아내시기 위한 유일한 그분의  방법 단 하나의 방법은 우리를 대신해서

    높이 죽어지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들이 잃어버린 모든 양들이 잃어버린 모든 죄인들이 그 높이 날린 장대에 높이 날린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하여 높이 장대에 들려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찾아내실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눈물 나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높이 장대에 들려서 모든 이들이 바라보게

    하여야만 우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우리를 찾아내는 길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요14:6) 하나님께서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방법은 우리를 위하여

    높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렇게 높이 장대에 들린 예수님을 바라본 자들은 그 높이 들린 장대를 통해서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그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으로 상징된 성령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동전 드라크마를 찾는 이 비유의 말씀인 성령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높이 달린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사건은 외형적인 사건이라면 성령님의 역사는 그보다 더 가까이 높이 들린 장대를 보고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점점 가까이 온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주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를 아버지의 품으로 끌어오는 활동과

    그 역사가 바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인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은전을 찾는 이여인은 세밀한 사람입니다.

    여자가 얼마나 꼼꼼합니까 설거지를 하고 방을 쓸고 뭐를 해도 꼼꼼하게 정리 정돈도 잘하고 그래서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찾을 때까지 찾는 일은 이 인간의 외면의 것은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십자가에 죽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시는 것이 나타난다면 이제는 내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빛을 비춰주어야 그가 아버지께로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급히 갈 마음 결단과 결심을 가지고 일어나게 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을

    내적인 그 존재를 비춰주게 되는 것이 이 여인의 활동입니다.

     

    이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우리의 인간의 혼이 뭘로 구성돼 있죠  생각과 감정 의지를 나타내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죠 인간의 자아죠 이러한 자아를 이 혼이 살아야 영이 살게 되고 영이 살아야 혼의 주인인 영이 오다를 청지기인

    혼에게 이러 이러한 일을 도모하라 라고 명령을 하면 혼이 그 명령을 따라서 몸인 일꾼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영이 나에게 전달했으니 너희는 이러한 일을 수행하라 준행하라

    그런데 이것이 혼을 통해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마음에 혼으로 대변되고 있는 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비춰주기 위해서 등불을 켜야

    되는 일이 나타나야 돼요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제가 어저께 계속 시편 얘기를 통해서 얘기를 해드렸죠.

    시편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혼의 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이 혼의 입구와 영의 입구에 그 관문 전달되어지고 전달받아지는

    이 역할을 우리 양심이라는 것이 그 기능을 활동하게 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이 양심이 활동을 하지 못했었지만 아담이 죄를 범하고 난 후에는

    이 양심이라는 기능이 발동되어져서 작동이 되어져서 바로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여 벌거 벗었음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이 앞 가리게 허리 가리게를 했다라는 것은 이 양심의 문제가 작동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작동되어질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것이 기능을 발휘해야 될 일들이 없었지만 죄를 범하고 난 후에는

    작동이 되어서 예를 들어 보일러를 켤 때 딱 들어오면 초록불이 들어오죠 또 내리면은 빨간 불이 들어와 꺼지는 것처럼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이 죄에 대한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이 혼과 영의 관문 입구 서로에게 서로의 다가가는 입구가

    이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은 혼과 영 사이에 전달되어지고 전달받게 하고 전달되어지게 하는 이러한 통로가 되는 유일한 문입니다

    양심이 무딘 자들 이거는 정말 여러분 굉장히 두려워해야 됩니다.

     

    이 양심에게 이 혼에게 영의 문제를 이렇게 지름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말씀을 가지고 비춰줄 때 그 양심이 반짝반짝 빛나져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 그때 그 영은 바로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그 양심을 통해서 혼의 문제와 영의 문제를 처리하고 깨끗하게 쓸고 닦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능을 온전하게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빛이 비춰질 때 그것이 그 말씀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히브리서 2부에서도 제가 얘기를 해드렸지만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효력이 있으며 양날의 날선 어떤 칼보다도 더 예리하고 날카로워져서 혼과 영과 혼과 영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절과 골수 육신이죠. 몸이죠. 이것을 찔러 쪼개고 심지어 마음의 생각과 의도도 분별해 낼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오게 하시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비췸을 통하여 우리를 찾으신다 그리고 그 빛을 비췸으로 말미암아 화들짝 놀라게 되는

    여러분 보세요. 커튼을 치고 잠을 자고 있는 그 아이가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는 그 아이를 깨우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엄마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그럼 순간적으로 햇볕이 막 비춰지겠죠. 햇볕이 비춰지는 현상을 통하여 이 인간의 혼과 영을 연결해 주는 그 양심이

    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깨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학교에 가야 되는 문제가 있는데 이거 밥도 안 먹고

    지금 시간이 12시가 됐네 하고 자기가 잘못했다 라는 것을 실수했음을 어리석었다 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인 빛의 비췸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신 것이에요

    커튼을 활짝 열고 정신 차려라 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깨우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깨우시는데 성령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제가 아까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해드렸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씀을 할 때 성령님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오셨다.  여러분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역사를 하셔요 빚을 비춥니다.

     

    그런데도 곤하게 자고 있는 자들 얼마나 피곤했으면 창문을 활짝 열어서 빛을 비추면 깜짝 놀라서 일어나야 되는데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정신을 못 차리고 아직도 자는 사람이 있어요.

    그거는 어쩔 수 없잖아요. 모든 사람에게 하여튼 빚을 비춥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역사와 활동을 하시는데 개개인의 정도와 상태와 역량에 따라서 그 빛을 비춘

    상태가 효력을 나타낼 수 있고 효력이 전혀 안 나타날 수도 있고 이것은 그 사람의 개인의 심령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진다 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십니다.

    그 등불로 등불이 없으면 어디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절대 깰 수가 없어요.

    그 등불을 비춰서 우리를 비춤으로 말미암아 쓸 때 그것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이거는 이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등불인데 이 생명의  말씀인 등불을 통하는 일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 이러한 빛을 비추는 현상은 전혀 일어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들판에서는 그 일이 발생할 수 없어요. 십자가 위에서도 이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빛을 비춰주는 성령님의 활동과 역사는 우리 영과 혼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어떤 의지를 형성하고 있는 혼에 대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신 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그 십자가의 구속 사건에서는 이 빛을 비추는 현상이 드러나지 않지만 성령님을 통해서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이 빛이 비춰지는 역사가 우리의 자아 속에 생겨나고 발생되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과 감정 우리의 의지 이것이 우리의 마음인데 이것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어져요. 마음이 달라집니다.

    선한 감정으로 이렇게 형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전에 가지지 못했던 그 의지가 굳건해지고 견고해지고 강건해지는 어떤 그러한

    현상들을 갖고 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내가 굉장히 좀 잘못한 상태에 있구나 내가 지금 잘못된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내가 지금 잘못된 행동들을 하고 있다라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게 하고 먼지 구덩이에서 계속 방치되어 있는 그 먼지 구덩이에서

    계속 방치되고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빛을 비춰주고 등불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쓸고 쓸 때 우리가 점점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둠이 빛 가운데로 드러나게 되고 먼지 구덩이에서 생명의 상태로 이렇게 변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감정이 달라지므로 우리의 마음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찾아내시는 것이 예수 아들 한분 하나님이 안에 계신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들판에서 우리를 찾으시고 광야 세상 황량한 들판 가운데서 장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내시지만 성령님의 활동은 우리의 안에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의 집이 하나님의 집과 나의 집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라면 지금 이 집은 집 안을 쓸며 여기에 보면 누가복음 15장 8절에 보면 집 안을 쓸고 그랬는데 그 집 안은 바로 다름 아닌 내 마음입니다.

    내 자아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이렇게 나타나는 그러한 혼의 존재인 이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성령님께서 활동하게 하시는 일이 왜 세상 사람들에게 그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리 말씀을

    이렇게 주입시키고 가르쳐주고 교제를 하여도 그 사람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 우리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완전히 어둠 가운데 먼지 가운데 묻혀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 묻혀져 있는 것을 어떻게 해야 되죠 등불이 켜져서 쓸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쓸어내야 됩니다.

     

    잘못된 의지 약해진 의지 잘못된 감정 그리고 우리의 그릇된 생각들을 말씀을 통해서 점점점 기울어지고 넘어지고

    실족되어진 여러분 보세요 우리의 생각이 잘못됐어요. 우리의 의지가 약해졌습니다.

    넘어져서 실족되어서 그런 겁니다. 우리의 감정이 그릇됐어요.

     

    이것을 말씀을 통해서 기울어진 것을 세우고 그릇된 것을 올바른 길로 잘못되고 그리고 뭔가

    어둠 가운데 있는 약해진 우리의 의지를 견고한 의지로 세움 받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계~속 우리가 이러한 교제를 통하여 계속 이렇게 반복하고 저렇게 반복하고 어떤 때는 제가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다섯 번 10번을 반복할 때가 있어요.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의지 여러분의 감정  우리들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우리들의 마음을 등불을 켜고

    쓸고 찾을 때까지 찾게 하기 위한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제가 계속 반복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냥 단순하게 제가 그냥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아들을 통해서는

    들에서 우리를 찾습니다. 들판 광야에서 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믿고 있으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기를 원하지만

    왜 우리의 이 마음이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거듭나는 그런 일들이 발생되지 않느냐 하면 우리의 이 마음과 생각 감정

    의지가 이 먼지와 어둠 가운데 구렁텅이에

    옷가지 속에 더러운 세상 것 세상적인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덮여졌기 때문에 빠져 있어서 덮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된 거예요.

     

    들판에 있던 양을 잃어버린 것과 이 여인이 찾는 이 동전이 빠져 있는 것이 잃어버린 바 된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 속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 이것을 되돌이켜서 변화되어서

    거듭나는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좀 더 좋은 신앙생활 좀 더 하나님과 하나된 일치된 그런 생활을 해야 되는데 왜 자꾸 우리가 멀어졌을까 라는

    이런 것은 우리가 내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그릇되고 잘못되고 어둡고 실족되어진 약하여진 의지 그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는 일이 잊지 않고서는 절대

    여러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래서 교제가 날마다 날마다 묵상하고 되새김질하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읽는 가운데

    기도하고 몸부림 치고 이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지를 말씀을 통해서 등불을 켜는 일을 통해서 쓸고 쓸고 쓸어내면서 계속 찾아내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내 마음속에서 우리를 찾아내십니다. 마음이 의지와 생각과 감정이에요.

     

    그것은 등불을 켜야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가 그것을 생각을 달리할 수 있고 감정을 변화 받을 수 있고

    의지를  견고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건 제가 체험해본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얘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비춰질 때 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완전히 그 변화되고

    생각이 바뀌어지고 감정이 변화가 되고 의지가 견고해지면 양심이 활동을 기능하게 되는 시작점이에요.

    그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두드렸을 때 그 양심이 깨어져서 마음 문을 열 때

    그것이 그때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거에요 그때 회개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됐구나 눈물 콧물 흘리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내 삶이 내 생각이 내 감정이 내 자신의 의지가 내 마음이

    정말 잘못됐구나 내 양심이 그렇게 두드렸는데 내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이 양심이 완전히 깜깜해진 무디어진 상태로

    계속 존재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아까 그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은 들판에서 바깥 세상에서 세상을 통해서 찾는 일이라면 이 여인을 통해서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을때 찾는 이 성령님의 활동과 역사는 내적인 내 속에 있는 내 자신 내 마음의 문제를 내 양심의 문제를 건드리고 간섭하고 활동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 빛의 비췸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돼야 되고 강해져야 되고 의지가 변화돼야 되고 우리의 생각이

    그리고 감정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절~대로 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이런 것을 통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4장 12절 또 한 번 제가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하나님의 말씀 누구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표현했던

    그 십자가상에서 외쳤던 말씀 그전에 생애를 통해서 교훈하셨던 진리의 말씀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효력이 있어요. 양날의 날선 그 어떤 칼보다도 더 예리하고 날카로워져서 우리의 혼을 잘라냅니다.

    우리의 생각이요 당연히 잘라내죠 우리의 감정 우리 의지 영까지도 여기에 보면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 몸까지도

    육신의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우리를 육신 우리의 몸을 변화시키고요 우리의 혼 아까 그랬죠 생각과 감정 의지를 변화시킨

    것처럼 그게 양심으로 두드려지는 것처럼 몸과 혼과 영의 문제도 이렇게 다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찔러 쪼개기까지 심지어는 마음의 생각과 의도도 분별해낼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놀라운 능력과 효력과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들판에서 잃어버린 죄인을 찾으셨던 그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를 하면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아버지가 생각나고 아버지께 갈 수 있도록 마음의 결단을 해주시는 것을 빛의 비췸으로 바로 생명의 말씀이신 등불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두드리시고 씻으시고 닦아주시고 쓸어주시는 일을 통해서 아버지 집으로 가게 하는 마음 아버지만이 내가 아버지만을 통해서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께 가야 된다라는 이 우리의 마음을 결단케 해주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이게 중요한 얘기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힌 것은 우리 요셉을 통해서 세 가지 선물을 한 것처럼 탕자에게 준 것은

    더러운 가운데서 이 사단의 세계 속에서 있다가 돌아온 자들에게 대한 칭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의의 옷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시는 예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제일 좋은 옷을 입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준 것은 승리한 자에게 통치자로서 부여해 주는 완전히 금으로 수놓아진 

    왕을 대면할수 있고 식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왕이 부여해 준  금으로 수놓아진 옷을 입고 그런 고관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어가서 식탁에 참여할 수 있고 또 잔칫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구원의 예복을 입어야

    되는 문제가 발생되어져야 됩니다.

     

    그 잔치 식탁에 함께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옷이 필요한데 그것은 이기는 문제와 완전히 주님 안에서 누리는

    삶과 은혜를 아는 사람들에게 입혀지는 것이 두 번째 옷입니다.

     

    그리고 2부에서 제가 그 얘기를 해드렸는데요.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아까 제가 처음에 서두에 인치시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인치시는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다라고 에베소서 1장 13절 말씀을 얘기 해드렸는데요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등불을 켜고 쓸며 찾기까지 찾는 이 일 그리고 지금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반지와 세마포 옷과 그리고 신발 이런 것을 선물로 주었다고 하는데

    신발과 반지를 허락하신 것은 천부로 상징되어 있는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늘의 모든 신령한 것들 은혜들

    축복들 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부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들을 돌아온 아들에게 주신다 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반지는 회개하는 죄인이 신성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상속자라는  신분을 나타내게 해주는 것이고요  신발을신는다는

    것은 더러운 세속과 세상으로부터 구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땅에서부터 더러운 냄새 나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말미암아 묻혀질 수 있는 그 땅으로부터 구별시키고 분리시키고

    성별시킨다라는 그리고  어떤 곳을 갈지라도 더러운 곳에 냄새나고 부정한 곳에 정말 배설물 더러운 그런 밟아서는 안 될 것을 밟는다 할지라도 신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견고한 삶을 살게 한 것처럼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분별시킬 뿐만 아니라 생명의 강건한 능력을 주신다 라는 것을 바로 이 옷과 반지와 신으로 이렇게 치장된 것으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2부에서 살진 송아지에 대해서 좀 얘기를 드렸는데요.

    살진 송아지 출애굽기의 그 3년 된 암송아지를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그 뒤에 할례 언약이라는 것을 주시는데 살찐 송아지를 반으로 쪼개고 한 이것은 잔치를 누리기 위한 돌아온 아들과 그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가 하나가 되어

    만남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한 상태에서 즐기기 위해서 이  살진 송아지를 잡는데요.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이 두 가지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 첫 번째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의이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주는 이 세마포옷을 주시는

    것이며  바깥에 보여지는 옷의 문제이고요 보여지지 아니하는 문제는 살진 송아지를 먹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이 바로 살진 송아지로 대변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상징하고 있는 살찐 송아지를 우리가

    먹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내 살을 먹어라 하는 것처럼 생명의 공급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음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고 견고해져서 마치 양고기를 먹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아주 강건한 모습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영양분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살과 근육이 되어서 그들이  광야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대적자들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 살찐 송아지를 먹었기 때문에 발생되어진 것입니다.

     

    생명의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먹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통해서 마음껏 충만함과 부요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마포 옷으로는 외적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일이 생겨야 되고 또 하나는

    그분의 송아지  그분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속했음을 아버지 하나님 천부에게

    우리 자신이 속했음을 그리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임을 우리가 상속자 분깃 기업을 물려받을 자

    그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송아지와 더불어  성령님의 인치시는 반지를 주었다라는 것 반지는

    바로 인치시는  표인 성령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발 세상으로부터 분별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강건한 능력을 통해서 세상에 우리가 비록 발을 딛고 다닐지라도

    절대 더럽혀지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로움과 거룩한 삶을 생애를 살 수 있는 그리고 우리의 대적자인 사단을 이기기

    위해서는 내적 인성 안에 계신 그 신성한 생명력을 가진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생명의 공급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그 살찐 송아지를 먹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이겨 나가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승리하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돌아온탕자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요.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는 과정의 일들이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아들 그리고 성령님 그리고 천부를 통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이 길들을 제시함에 있어서 이 아들 예수님과 여인으로 상징된 성령님과 그리고 천부로 상징된 아버지를

    이렇게 세 비유를 얘기하고 있는데요.

     

    아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장대에 높이 들어올려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을 이루셨다 그것은 들판에 세상에 있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그렇게 부르신 자들을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에  등불을 비추어서 쓸고 쓰는

    일을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쉬지 않고 찾는 일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변화시키셔서 빛을 비추셔서 우리를 찾으신다 이것은 우리의 속에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일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되고요

     

    그래서 그렇게 빛의 비춤을 계속 당해질 때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변함없이 미쁘신

    가운데  영원히 변함 없으신 미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시려고 모든 것을 마련해 놓고 준비해 주시고 준비해 놓으신

    천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헤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그리고 등불을 켜고 쓰는

    성령님을 통해서는 우리를 인을 치시고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서  능력이 있는 삶을 삶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과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완전히 이기는 자들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아들 예수님과 그리고 성령님과 그리고 천부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이런  구원의 과정들이 보여지고 있다 라는 것을 말씀 드리며 누가복음 15장 비유의 말씀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라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 은혜를 받으시고 더욱더 구원의 길에 다다르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면서 주님 안에서 더욱더 깊은 교제를 나눌수 있도록 저 또한 많은 묵상을 통한 생명수를 전할수 있기를 기도하며 여러분도 반복적으로 말씀을 되새김 하실 것을 다시 한번  부탁 드리며 오늘 교제의 말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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