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 49:2, 출 33장, 요 21장/하나님의 손 그늘과 예수님의 반석틈안에 있는 베드로의 경험말씀 나눔방 2023. 6. 17. 09:10
말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말씀 : 이사야 49:2, 출애굽기 33장 18절~23절, 요한복음 21장
말씀주제 : 하나님의 손 그늘과 반석 틈 안에 있는 베드로의 경험
오늘은 하나님의 손에 대한 말씀으로 여러분과 말씀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음 받아야 합니다.
어제 왼손잡이 에훗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는데, 그 말씀은 여러분들이 더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여 훈련된 사람으로 만드실 때는 하나님의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좀 더 깊은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연약한 것만 먹으면 장성한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좀 단단한 것을 여러분에게 먹이기 위해서 조금 영적으로 깊은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여러분!
토기장이가 어떤 원하는 물건을 만들 때 그의 생각과 계획한 바에 따라 그 물건을 만들 듯이,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지을 때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 진리의 보화로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계획을 가지고 최상의 디자인으로 또 최고의 아름다운 섭리 가운데 우리를 빚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무엇으로 우리 빚고 계신다고요? 네. 말씀입니다.
에스겔 10장 8~12절 그룹들과 네 바퀴에 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그 모양은 넷이 꼭 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사방으로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나아가되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가며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이 네 그룹들(cherubim, 에스겔1장에서는 네 생물로 표현)의 형상은 네 날개를 가졌고 그 밑에 손이 있고 또 온 목과 등과 손과 날개에 눈이 가득했고 사면에 얼굴이 있는데 앞에는 사람의 얼굴,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 왼쪽에는 소의 얼굴, 뒤에는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룹 곁에는 있는 네 바퀴가 있는데 그 둘레에 눈이 가득했고 네 바퀴 안에는 각각 또 하나의 바퀴가 있고 그룹의 영이 그 바퀴 안에 있었으며, 그룹 위 창공에는 보좌가 있어 그 영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그 그룹(생물)들과 바퀴가 따라 가는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겔 1:5~28, 겔 10장)
이처럼 그룹(생물)과 바퀴가 복잡해 보이지만 영이 가고자 하는 데로 서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일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계획과 원하는 방향으로 한치의 오차가 없이 이 세상과 온 우주와 천상 세계를 운행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도 그 하나님의 눈과 손이 우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분의 계획 속에 우리를 두시고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만들어 나가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우리를 말씀으로 만들어 가실까요?
그것은 앞으로 있을 붉은 용과의 전쟁 때문입니다. 사탄과의 투쟁 때문입니다.
마귀의 거대한 세력들, 악인들과 악한 영들이 우리에게 역사할 때 그들과 싸워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끊임없이 빚어 만드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읽지 않으면 우리를 빚어가는 토기장이의 손이신 성령님의 역사가 멈추게 됩니다.
아무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뜻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의협력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에 인간의 전적인 협력이 있어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지으시고 그 선하신 계획 안에 우리를 두시고 성장시켜서 세상속에 있는 거대한 죄의 세력, 곧 이 세상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워 이기는 자로 만드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17절까지 보겠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을 많이 읽을지라도 지금은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읽고 묵상하고 되새김질을 하다 보면 성령님의 도움으로 점점 더 깨닫는 부분이 많아져서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근력이 생기면 여러분들의 삶 속에 그 말씀들은 큰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시편 17장8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여기서 주의 날개라는 말은 하나님의 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가르거나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릴 때 그리고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어 생수를 흘러나오게 할 때도, 하나님의 손을 상징하는 모세의 지팡이를 내밀어 하나님의 큰 권능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큰 위험에서 우리 생명을 건지시고 또 우릴 보호하실 때에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생활을 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한낮에 작렬하는 뙤약볕 아래서는 구름기둥으로 우산이 되셔서 더위를 피하게 하시고 또 밤에는 불기둥으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손, 주의 날개, 주의 그늘, 하나님의 손 그늘이라는 말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 그늘로 덮혀진 자들을 무엇이라고 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우리를 감싸주시면, 덮어주시면, 숨겨주시면, 보호해 주시면, 안아 주시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아무나 덮어주십니까?
이와 관련된 성경 말씀을 약 100개 넘게 찾았지만, 그 중에서 이사야서 51장 16절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손 그늘로 여러분들을 덮으셨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손 그늘 아래 숨김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있으시다면 언제 어떤 때에 무엇으로 숨기심과 감싸주심을 받았습니까?
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다. 내 자녀다. 내 것이다’라는 의미로 덮으신 하나님의 손 그늘은 권능의 오른손으로 자신의 백성을 감싸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자신의 자녀를 또는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자신의 자녀를 오른손으로 안으십니다.
오른손은 권능, 능력을 상징합니다. 왼손으로는 자신의 백성을 위협하는 개를 물리쳐 위험에서 벗어나는데 사용하시고 오른손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품에 안아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데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손 그늘이라는 말씀이 이사야서 49장 2절에도 있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여러분들!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읽고 듣는 이 말씀을 깨달아 우리 안에 진리가 되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권능으로 나타나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들고 또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 그늘에 숨겨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여러분 손 그늘은 무엇을 생각나게 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손 그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말씀 출애굽기 33장 18절~23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어라’ 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참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말씀을 잘 씹어 먹고 또 잘 소화를 시켜 그 말씀이 양분이 되어 내 영혼의 살과 피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성령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만들 때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칼자루와 칼날 그리고 앞에 뾰족한 부분 중 어느 부분이 가장 중요 할까요?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찌르는 용도라면 칼의 앞 부분, 뾰족한 부분일 것입니다. 칼날이 조금 무디더라도 앞부분이 뾰족하면 쉽게 꿰뚫고 들어가 사람의 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가 있기에 칼 끝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검의 양날이 조금 무딜지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양날이 아주 예리하더라도 그 끝 부분이 무디다면 그 칼은 꿰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워 양날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칼을 만듦에 있어서 끝부분을 만드는 공정이 가장 많은 시간이걸리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망치로 두둘겨야 하고 또 연단 해야 하고 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카로운 칼 같이 나에게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하고 또 음식을 먹고 씹어 소화시키듯이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하는 많은 나의 수고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성령님에 의해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귀한 보화를 찾는 자처럼 진리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갈급한 마음으로 말씀을 10번, 100번 때론 그 이상을 읽고 묵상을 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그 말씀 속에서 한 두 개의 보화를 발견할까 말까 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예리한 끝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22~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 그늘로 모세를 숨기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왜 숨기셨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모세가 죽게 되니까 그를 반석 틈에 숨기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셨습니다. 모세가 반석 틈에 들어 갔다는 의미가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 19:34)
제가 이런 질문을 하면 여러분들은 아마 거의가 다 모르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그날 저녁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지만 이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요 20:24)
주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도마는 자신이 없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마 속이 많이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놀러 간 것도 아니고 급하게 주님과 관계되는 일을 바깥에서 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주님이 나타나 너무나 속이 상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어서 주님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모여 있었을 때 그 자리에 왜 도마가 없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는 성경에는 없는 단지 저의 생각입니다.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이 남겨놓으신 유품이나 또는 예수님을 못 박았던 대못 등,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물건들을 간직하고자 그것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찾으러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어쨌든 도마는 많이 속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보고 그곳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요 20:25)
이 사건 후에 예수님께서 도마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는 대낮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았기에 방안은 깜깜했습니다.
까만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 햇빛을 차단하면 방은 캄캄합니다. 그런데 까만 커튼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면 그 구멍으로 햇빛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
대못에 찔린 상처가 클까요? 창으로 찔린 옆구리의 상처가 클까요?
로마 군병이 갖고 있던 창의 크기나 굵기가 대못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첫번째 나타난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은 금요일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후 첫날, 일요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40일이 되는 날 500여 명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도마와 그 제자들에게 나타난 시점은 십자가에 못박힌 후 15일에서 20일쯤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힌 못은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그 체중을 지탱할 수 있어야 했기에 작은 못이 아니라 아주 굵고 큰 대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예수님의 손과 발에 구멍 난 못자국은 아물어 졌을까요? 정상적이라면 상처가 어느 정도는 아물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자국은 어땠을까요?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고 또 그 창을 뺄 때 상처가 더 크게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상처가 난지 2주 정도 흘렀다면 정상적이라면 손과 발에 난 구멍은 어느 정도 아물어져서 사라지고 못 자국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나의 손을 보고 너의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도마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손 구멍에 넣어보라고 하지 않고 단지 손만을 보라고 하신 것으로 볼 때 그 손에 난 구멍은 이미 아물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자국난 그 옆구리에는 “네 손을 내밀어 넣어 보라”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한 말씀 요한복음 20장 24절~27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하나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주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또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대어 보고, 나의 손으로 주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않겠노라."고 하더라. 팔 일 후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었는데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더라. 문이 잠겼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하시고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나의 손을 보고 너의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니
이 말씀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손에 난 구멍은 이미 아물었기 때문에 보라고 하셨지만, 옆구리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고 구멍 난 채 그 틈이 벌어져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난 틈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앞에서 보았던 출애굽기 34장 33장 말씀에 그냥 반석이라고 하지 않고 반석 틈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반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신 곳은 갈라진 반석 틈에 그를 두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찢어져 난 옆구리의 구멍이 바로 모세를 숨겼던 반석 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석 틈에서 물과 피가 나왔던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 커튼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그 의미를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상처 난 손과 발에서 나오는 능력이 더 클까요? 아니면 상처 난 옆구리에서 나오는 능력이 더 클까요?
옆구리에서 나오는 능력이 더 큽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멍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손과 발에서 난 피와 옆구리에서 흘린 보혈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동일한 보혈입니다.
그런데 로마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로부터 그 심장을 향해서 창으로 찔렀다는 것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듯이 또 올리브가 으깨어져 마지막 한 방울 기름까지 쥐어짜내듯,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서 마지막 한 방울의 보혈까지도 남김없이 짜내어 주시는 더 크신 긍휼과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에서 나온 보혈과 옆구리에서 나온 보혈은 우리의 죄를 정결하는 놀라운 역사는 똑같이 있지만, 예수님의 옆구리 반석 틈에서 쏟아져 나온 그 능력은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권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지만 권능의 그 정도와 크기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호렙산 반석에서 생수를 내는 이야기도 같은 의미입니다.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호렙산 반석을 지팡이로 내리쳤을 때,
그 반석이 쪼개져 갈라진 틈에서 강물 같은 그 생명수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창에 찔려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영광을 나타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많이 묵상하여 여러분 것으로 만드시면 놀라운 권능,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관한 하박국서 3장 4절 말씀을 한글 개역개정과 한글 KJV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개역개정)
“그의 광채는 빛과 같고 그는 그의 손에서 나오는 뿔들을 가졌는데, 거기에 그의 권능이 감추어져 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글 KJV)
개역개정 성경과는 달리 한글 KJV 성경에는 그의 손에서 나오는 뿔들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막의 기구들 중 희생제물을 드리는 번제단과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 상단 사면 모서리에는 각각 뿔이 있는데 그 뿔은 하나님의 권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아가 스스로 왕이 되려다가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임명하자 그는 두려워서 제단 뿔을 붙잡습니다. (왕상 1:50)
제단 뿔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초월적 은혜를 상징하며 특히, 제단 뿔을 잡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은총과 보호를 갈망하는 행위로 죄 없는 자가 잡을 때는 그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출 21:14, 출처 라이프 성경 사전).
창에 찔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그 물과 피에 관한 말씀, 요한일서 5장 6~8절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하며 증언하시는 이가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사야서 49장 2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첫 번째는 좌우에 날선 날카로운 검 얘기를 하고 두 번째는 갈고 닦은 화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하나님의 손이 뜻하신 계획에 따라 우리를 좌우에 날이 서고 그 끝이 아주 예리한 칼과 같이 만드셔서 거대한 죄의 세력, 마귀를 물리치고 오히려 죄를 다스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던 출애굽기 33장 22절 말씀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었다가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택하셔서 지켜보시고 우리를 친히 자르고 때리고 다듬으셔서 아주 예리한 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손 그늘에 그 칼을 숨기신다는 것입니다.
반석 틈은 하나님의 손 그늘을 의미하는데, 그 날카로운 진리의 말씀을 가진 자들, 곧 하늘 이슬을 머금고 마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반석 틈, 하나님의 손 그늘로 숨기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큰 권능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반석 틈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덮이고 그 손 그늘에 숨김을 받은 하나님의 준비된 자들, 하나님이 품에 안으신 자들, 날카롭고 예리한 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 손 그늘에 그를 숨기시기 전까지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는 엉뚱한 실수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룬다고 자기가 앞에 서서 자기의 계획이 옳은 줄 알고 그와 같이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혈기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행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계획과 뜻에 따라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약점을 아시고 요한복음 21장 19절과 22절 말씀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도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대하면 너무나 마음이 슬프고 아픕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베드로에게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 앞서서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 그 일들은 예수님의 뜻과는 맞지 않아 잘못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큰 무리가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왔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립니다. (요 18:10, 마 26:52, 막 14:47, 눅 22:50)
베드로의 이 행동은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오른쪽 귀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구별된 귀를 의미합니다. 그 귀로하늘의 음성을 듣고 생명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한 영혼을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26:52)
무력을 사용해서는 인간의 닫힌 마음과 닫힌 귀를 결코 열리게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칼을 도로 꽂으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잡으려던 말고의 귀를 친철하게 도로 붙혀주시어 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영혼을 구원받게 하려는 예수님의 자비의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그가 한 행동이 한 영혼을 죽이는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단호한 말씀으로 베드로를 무겁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행동을 한 이유는 그가 아직 예수님의 손 그늘에 숨김 받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83년 11월 11일 새벽에 저에게도 성령님께서 강하게 임재 하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갑자기 임한 성령님으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고 또 제 입술을 통해서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나왔습니다. 내 육체와 영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하늘의 소리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한 두 시간 동안 있었는데, 성령님께서 그때 저에게 요한복음을 읽으라고 친히 지시하셨습니다.
그때 요한복음을 읽는 중에 저에게 이 요한복음 21장 말씀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실수와 허물 많고 늘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예수님의 반석의 틈 안에 있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덮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손 그늘에 숨김을 받아 본 경험이 없었고 예수님의 품에 안겨보는 큰 은혜를 맛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앞서기를 좋아하고 또 무슨 일이든 나서길 좋아하다가 실수해서 주님께 경책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또 베드로는 자기가 죽을지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고 말씀하실 만큼 자신을 과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는 어디에서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숨김을 받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세번째 나타나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반복해서 물어보십니다.
이 사건이 바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던 부끄러움과 수치를 주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으로 덮어 숨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깨닫고 여러분들과의 교제가 시작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여 제가 자원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베드로가 반석 틈에서 하나님의 손에 숨김을 받는 경험이 있은 후 곧 오순절 성령님의 역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는 그 순간부터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을 전파했을 때, 듣는 이들의 마음이 찔려 3천 명의 사람이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2:41)
그 뒤에도 전파한 말씀으로 5천 명의 남자가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행 4:4)
여러분!
반석 틈에서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워 위로를 받고 주님의 품에 안기어 그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려본 경험이 없이는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말씀만 가지고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그분의 위대하심과 그 영광을 알 수 없습니다.
육체로 오셔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반석 틈 안에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로 베드로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백 번, 천 번, 만 번 읽어도 그것이 진리가 되지 않으면 내가 잘라지고 다듬어지고 깎아지고 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석 원석이 가치 있는 보석되기 위해서는 가공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금강석, 다이아몬드입니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치가 있는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원석을 틀에 고정시키고 회전하는 톱으로 오랜 시간을 자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른 원석을 아름다운 광택을 내고 일반적인 다이아몬드 형태를 갖추도록 58면을 깎는 연마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다이아몬드 가루와 올리브 기름을 섞어 연마판 위에 바른 뒤 그 연마판을 빠른 속도로 회전시키고 지지대에 고정한 원석을 회전판에 마찰시켜 6시간에서 7시간을 연마하면 아름다운 광택이 나고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가치 있는 보석이 된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잘라야 잘라지고 또 다이아몬드로 문질러야 연마가 되어서 아름다운 빛이 납니다.
이처럼 진리가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말씀이 진리가 되게 합니다. 말씀이 말씀을 깎고 연마되는 일이 계속될 때 그것이 진리가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이 땅에서 선포하신 그 말씀이 내 심령 속에 왕으로 임재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그 말씀이 진리가 될 때 임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보화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46절에 보화와 진주 얘기가 나오는데, 값진 보화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보화와 진주는 너무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의 거대한 세력, 강력한 힘을 가진 죄를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에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 38년 동안 오래 했다고 해서 죄를 이기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반석의 틈에 있어본 경험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진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 단계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물론 오른편이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을 상징하고 있고 그 택한 자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는 자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요.
그 때의 상황을 보면, 제자들은 밤새 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낙심과 절망 가운데 지쳐서 모든 것에 손을 놓고 있었는데 그 때가 날이 샐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 바닷가에서 누군가 잡은 고기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줄 모르고 한 마리도 못잡았다고 대답합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만 기적이 아니라 한 마리도 못잡은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하나님의 목적하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늘 고통과 시련과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도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악한 영들을 허용도 하시고 때로는 친히 그 시험을 감당하도록 풍랑을 주신 것처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현상들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한 것은 오른편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므로 그 맞은 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능력과 인간의 협력(순종)이 결합이 되는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제자들이 능력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을 보고 듣고 관계를 맺어서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는 삶을 살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베드로를 지금 만들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 달궈진 쇠를 망치로 수없이 때려야 단단해지고 원하는 형태로 다듬어 온전한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때리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게 하시고 또 반석 틈에 베드로를 두셔서 손 그늘로 그를 덮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손 그늘은 언약궤를 덮는 덮개, 곧 시은좌(施恩座, 속죄소)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곳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래쪽에서 심장을 향해서 푹 찔렀을 때 심장 속에 뭉쳐 있었던 예수님의 피와 물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으로 숨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짊어진 그 중압감과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구원이 십자가에 달린 자기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해서, 예수님을 향해서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며 비웃으며 욕을 하고, 예수님 스스로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놀리는 그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그들을 보고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른편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자신이 구원자임을 알아보고 구원 얻는데,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백성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구원을 놓쳐버리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비통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해서 죽어야 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보고 그 너무나 비통한 마음으로 인해서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귀한 일을 한다고 1조원의 돈을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큰 가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가치를 모르고 말을 해도 믿지 않는 그 백성들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음이 그처럼 안타깝고 비통하여 그 마음을 견디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에 찔렸을 때, 그 심장이 파열되면서 흘리신 그 물과 피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더 할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간음한 막달라 마리아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돌로 맞아 죽을 위기에 있을 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양심이 찔려 모두가 떠나고 마리아 혼자 남게 되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할 수 없는 불쌍함과 동정심을 가진 슬픈 눈으로 ‘다시는 절대 죄짓지 말라’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그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에게 가졌던 그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예수님의 심장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심장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치유 받아야 할 자들, 귀신들린 자들, 문둥병자들, 소경된 자들, 모든 자들에게 ‘내가 죽고 너희는 살아라’고 예수님의 생명인 심장을 내어줘서 우리의 심장을 바꾸어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반석 그 틈 사이, 곧 예수님의 찢어진 옆구리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심장에 담겨서 그곳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는데,
그 물과 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자들, 십자가에 달려서 그 심장이 그 찔림 받아 죽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을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거대한 세력 그리고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로 만드시길 원하시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 그늘에 덮히는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베드로를 미혹할 줄을 아시고, 사랑과 긍휼과 자비한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나서 반석의 틈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육체로 오셔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등을 돌려 도망쳤던 그를 예수님께서 보듬어 주시고 감싸주시는 사랑에 베드로는 육체를 입고 오신 인자(人子)이신 예수님을 그제서야 하나님으로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신성을 봤을 때, 그 영광을 봤을 때 놀라운 능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능력을 가지게 된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성전문에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고,
또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돌렸던 것입니다. (행 3:6~8)
베드로는 허물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왜 세 번을 물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을 들춰내서 그의 흔적을 지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가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했던 그 사건을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비록 예수님의 수제자였었지만 그때부터 다른 제자들은 그를 수제자로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도망간 것은 모두가 도망 갔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말할 수가 있어? 이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야.”
그들은 수제자로서 베드로를 더 이상 인정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절대 용납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님께 그렇게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저주하는 말로 예수님을 부인한 행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임을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 앞에서 수제자인 베드로의 위상과 권위를 회복시켜주야 할 필요를 아셨던 것입니다. (요 21:2)
그래야 배드로가 다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깎고 다듬어 예리한 칼로 만들어서 능력을 주어 3천 명, 5천 명을 돌이키게 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하고 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죽음의 길을 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게 감춰진 죄들은 은밀하게 주님께서 보듬어 주시고, 공개적으로 드러난 죄는 공개적으로 어루어 만져주십니다.
이때 갈릴리 해변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베드로를 포함, 총 7명이 있었습니다.
일곱 명의 숫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채워졌다는 얘기입니다. 베드로의 원래 직분이 온전히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여 마음속에 큰 고통이 있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베드로는 아마 “당연하죠. 예수님, 저를 몰라서 묻는 말씀입니까?” 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으로 베드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전에는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내세우고 자기의 계획과 행동이 전부 옳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기도 자기 자신을 못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이것이 굴복입니다.
내 뜻으로, 내 판단으로, 내 생각으로, 내 계획으로, 내 의지로가 아니라 이제 주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드리는 삶이 순복하는 삶이며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사람의 심령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두 번째,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세 번째 질문에서는 가장 낮은 차원의 사랑을 묻습니다.
이는 친구로서 부탁을 하거나 배가 고파서 떡 한덩이 달라 하면 줄 수 있는 그런 사이, 내가 돈이 없을 때 돈 1만 원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밥 한끼 사달라 하면 사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는 지를 물어본 것입니다.
이렇게 낮은 차원의 사랑의 관계인지를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못 믿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을 믿고 살았었는데, 그런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베드로 한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마 28:10)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단 한 번도 베드로를 잊어보거나 그를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안 베드로는 그때 하나님을 본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손으로 베드로를 덮고 그 그늘 아래 베드로를 숨긴 장면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내가 예수님을 버렸는데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의도적으로 내 목숨을 구하고자 내가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모른다 하지 않고 계속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시고 나를 인도하고 때가 돼서 지금 또 떡과 조반을 마련해 놓고 나를 구원 하실려고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내가 뭐길래, 내가 뭐길래 나를 이렇게 돌보십니까?”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리한 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때 끝부분이 예리하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 말씀은 굉장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서 제가 너무 잘 압니다. 얼마나 많이 이 말씀을 놓고 묵상을 했는지 모릅니다.
바로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손으로 그가 덮히는 큰 은혜를 경험했을 때 그때 예리한 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백번, 천 번 읽어서 진리가 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이 실제로 그분의 손으로 나를 덮어주고 그 손 그늘 아래에 나를 숨겨주실 때 내가 읽은 말씀이 진리가 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나를 단 한 번도 처음부터 영원까지 나를 결코 버리신 적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 했겠습니까?
그때 산과 같은 거대한 바위 위에 조약돌 같은 베드로가 우뚝 서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한 번 변하고 두 번 변하고 세 번 변하고 쉽게 변했던 자인데 이제 예수님이 보니까 결코 변하지 않는 믿음 가운데 있다는 의미로 반석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떤 것이 반석 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반석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산산히 부서져서 반석 틈 안, 예수님 품 안에 푹 들어가서 이제는 예수님 보다 앞서 나가는 삶을 멈춘 것입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항상 주님보다 앞서서 먼저 행동하고 또 칼을 뽑아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도 전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버린 등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을 앞서 도모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이런 기질을 마귀가 악용해서 공격할 시점을 찾고 넘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게 너무나 염려스러워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랬던 베드로에 대해서 요한복음 21장 19절에서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성령님이 처음 임재 했을 때, 이 말씀으로 저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무서워서 한 시간가량을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그제서야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전 같으면 “따르라”고 말하기 전에 베드로는 벌써 저 앞에 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제발 좀 천천히 가거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베드로가 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제 “너는 내 뒤를 따라와서 내가 인도하는 삶, 내가 너를 예리한 칼로 만들어준 진리의 삶,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앞서가면 마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반석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시고 아껴주시고 품에 안아 주시며 그 손으로 우리를 덮어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뒤를 우리가 따라갈 때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결코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귀를 마주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이 다 막아 주십니다.
여러분들!
오늘 교제 나눈 이 말씀을 시간 날 때마다 많이 묵상하셔서 좌우에 날선 날카로운 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지셔서 마지막날에 이기는 사람, 큰 용사, 14만 4천 명과 같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베드로 같은 사람입니다.
이사야서 49장 2절 말씀과 같이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손 그늘에 숨기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뒤 따르는 삶을 살면 마귀의 공격을 예수님이 막아주기 때문에 공격을 받아도 치명상은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앞서 가면 원수에게 공격을 당하여 정복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베드로는 남에게 상관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도 요한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또 오해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또한 번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 그를 살린다 할지라도 그건 너하고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너는 너의 일만 하고 남의 일에 신경 쓰지말라고 얘기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마지막 남아 있던 버려야할 부분까지 또 깨뜨려버립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가져야 됩니다.
반석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심장을 보고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를 만져 보고 또 나를 위해 주님의 심장으로 내 심장을 바꾸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살리기 위하여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오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 베드로는 신성을 입으신 예수님을 인하여 권능을 힘입고 성령님에 의한 큰 용사가 되어서 3천 명과 5천 명을 돌이켜 주님을 영접하게 하였고 그 후에도 주님의 길을 따라 죽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반석 틈에 들어가서 그 손 그늘로 덮힘을 받는 은혜를 경험해서 좌우에 날선 날카로운 칼 같은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용사가 되시길 기원하면서 오늘의 교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나눔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곱의 환란의 기도와 144000 (0) 2023.06.27 호세아:11:1~4/13:14 그리스도의 십자가를통한 아버지의 영원한사랑 (0) 2023.06.25 출애굽기 17장 2부 / 매 맞아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이야기 (1) 2023.06.17 출애굽기 17장 1부/매맞아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이야기 (0) 2023.06.17 출애굽기 27장/ 성막4부/ 복음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거룩과 의에 대하여 (0)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