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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1:1~4/13:14 그리스도의 십자가를통한 아버지의 영원한사랑말씀 나눔방 2023. 6. 25. 18:07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지금은 참 이른 시간 새벽 한 5시부터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접하게 되는데요.
이른 새벽에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기 위하여 말씀을 묵상하고 또 은혜 받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들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들을
공급해 주심에 있어서 가장지름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호세아서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이시간 교제를 나누게 될텐데요.
제가 지금까지 이 성경을 묵상하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자
하시는 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정말 그러한 생명 안에서의 참 생명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나타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완악하고 정말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진 그러한 고멜과 같은 바로 이 창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영원하신 사랑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갖고 오게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내진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내어 보일 때 인간은 새로워지고 변화가 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복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다시 돌아와서 온전치 못했던 관계가 온전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경륜의 이상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바로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지고 산 음녀 고멜과 호세아 선지자와의 결혼을 통한
은유의 이야기를 통하여 또 이 음녀 고멜과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 세 명의 아들 딸을 낳았는데 아들로 표현된 이스르엘:
(뜻: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하는 저주의 이름) 그리고 이 두 번째 바로 딸 로루하마:(뜻: 다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겠다)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과 그리고 바로 젖을 떼자마자 로암미(뜻: 내백성이 아니다)라는 아들을 생산해 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이름의 뜻을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1장, 12장, 13장, 14장부터 끝부분에 가면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풀림으로
말미암아 딸 로루하마 하나님께 이 긍휼과 자비를 받을, 자비와 베품을 받을, 루하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고, 또 로함미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절대적으로 아닌 이들을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암미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나의 백성
나는 너희의 아버지라는 이름의 새로운 칭호를 허락해 주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비록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라고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이렇게 완전히 그들을 징벌 가운데서 그들을 내친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속성인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다함이 없는, 그러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은 그 이스라엘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여서 자신의 백성, 자신의 아들들로, 삼아주시기 위하여 그 깊은 사랑, 높은 사랑, 넓은 사랑인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신 영원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이 소선지서 말씀인 특별히 호세아 선지서 말씀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은 그 아브라함과 후손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도
야곱의 열두아들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그 무궁하고 끝이없으며 다함이없는
영원한 사랑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 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높은 자인 왕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과 어우러지는 조화가 되고 일치가 되는 신부 아내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육적이고도 천연적이며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한 삶의 크고 작은 문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정말 이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볼 수 없는 뛰어나고 놀랍고
신비한 사랑을 맛봄으로 말미암아 그가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부가 되는 일들을 통하여
이 신부로서의 온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시고 뛰어나신 사랑 앞에 변함을 받은 그 후손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군대인 바로 선민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아내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로 삼은 이 선민 이스라엘이 그 이름에 합당한 품성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과 어울리지 못하는 조화가
되지 못하는, 부합되지 못하는, 일치가 되지 못하는 그러한 품성들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 시대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집요하게 쫓아가는 사랑을 통하여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호세아 선지자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사랑과 그 다함이 없는 사랑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정말
그렇게 나타날래야 나타날 수 없는 음란과 변절된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완악하고 사악한 부정한
삶을 사는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은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바로 선민 이스라엘 곧 우리 교회들, 성도들은 그분의 아내가 된 자들입니다.
여러분 아내의 최고의 아름다운 미덕은 무엇일까요?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첫 남편이신
신랑과 연을 맺은 신부로서 택정함을 받은 자라면 신부로서 순결을 보존하고 정결을 지키는 그런 삶을 통하여
남편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결코 없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내로서 가져야 될 최고의 미덕인 순결과 정절인 것입니다.
순결과 정절만이 신부와 아내 된 자들의 가장 큰 미덕인 것입니다.
아내가 아무리 자식들을 많이 낳고, 그리고 자식들을 잘 양육하고, 아주 맛있는 반찬을 만들고, 살림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남편을 위해서 헌신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99가지를 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 신랑 남편의 뜻을 저버린 신부로서의 정절과 순결을 유지하지 못하고 보존하지 못한다 라면 그것은 합당한 아내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아니한 자가 되어서 그 남편의 집을 관리하고 남편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99점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순결하지 못하고,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진 고멜과 같은 창기의 품성을 갖는다 라면 그는적당하지 못한, 합당하지 못한 아내로서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합당한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99가지는 비록 좀 어설프더라도 좀 미진하고, 좀 부족하고, 뭔가 결함이 있고
결격사항이 있다 할지라도 바로 최고의 미덕인 정절과 순결을 보존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신랑,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신부와의 온전한 결합과 연합된 삶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결과 정절을 유지하고 보존하지
않는다면 비록 그 어떤 다른 수많은 것들을 완전하고 온전하게 행한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신 남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당시의 선민 이스라엘은 창기 고멜과 같이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완악하고 사악한 자로 부정한 자로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정절을 보존하지 못한 첫 남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에 거짓 남편이요, 헛된 아무런 유익과 만족을 줄 수 없는 그러한 공허하고 헛된 신들인 우상을 쫓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이스라엘에 완악한 부정을 저지르는 고멜과 같은 자의 그런 상태와 그러한 음란과 변절의
마음을 가진 위치에 있다 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나아가서 유다 백성들까지도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직접적으로 배척을 하고
거부하고 반대하고 싫어 하신 바 되어서 십자가의 죄인으로 몰아 죽여 버리는 있어서는 아니 될 정말 아버지의 영원하고도
온전한 그 사랑을 가지고 선한 목자로서 그 사랑을 전달해 주고자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을 노골적으로 정면으로 거부하고 또 이 750년 전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한 이 예언의 말씀에 이어서 이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러한 일들을 하고 또 이 남왕국 유다는 이러한 북이스라엘 왕국 백성들과 같은 삶을 뒤따라가는 삶을 내 보임으로 말미암아 기원전 606년 예수님이 오시기 바로 600년 전에 이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땅이 짓밟혀지고, 성물들이 빼앗겨지고, 성전이 허물어지고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는 이런 일들 급기야 이런 일들의 삶의 연속된 어떤 부정한 삶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1900년 가까이 바로 유랑민족으로서 떠돌아다니는 나라 없는, 왕도 없는 희생 제물도 드릴 수 없는, 성전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는 아주 정말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마태복음 21장 43절에서 바로 자신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반대하고, 거절하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려고 왔는데 너희가 이렇게 싫어하고 배척하고 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게 되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인 이방 민족들의 교회들을 통해서 바로 교회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을 통해서 왕 같은 제사장들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옮겨지게 될 것이다라는 얘기를 주님께서 안타깝고도 정말 매우 가슴 아픈 호소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시 118:22 이하 〕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원래는 이 선민 이스라엘 곧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차지하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누리면서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절하고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리시고 대신에 복음이 전파된 이방 민족들의
교회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왕국이 옮겨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는 참 은혜이고, 하나님께서는 큰 지혜이고 유대인들에게는
큰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되는 이런 일들을 봄으로 말미암아 참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이 하나의 오차도 없이 하나의 착오도 없이 잘못됨이 없이 결함이 없이 이렇게 경륜의 목적들과 경륜의 이상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사도바울 선생님이 얘기를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여러분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추구하라 더욱더 영적인 은사들을 너희가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추구하라.
39절에서도 예언하기를 열망하라.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인데 예언은 미래에 대한 얘기이죠 미래에 대한 무슨 얘기일까요?
우리 개인의 어떤 운명에 대한 어떤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얘기가 예언일까요? 네! 당신은 목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크게 앞으로 주님을 위해서 큰 기둥 같은 일꾼이 되어서 주님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라는 이런 게 예언이 아니라 예언은
이 사도 바울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특별히 예언을 말하라 특별히 신언을 하라 특별히 이렇게 말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언이 뭡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이 예언하라는 이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이 고린도전서 14장 1절의 말씀은
바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라고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주님을 위하여 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말하고 주님을 말해내는 것 곧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하고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말해내는 것 즉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말함으로 공급받게 하는 이것이 바로 예언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언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예언은 우리 자신들 개인을 위한일이며 그 말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일이지만
사도바울 선생님이 얘기하는 예언하기를 힘쓰라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바로 하나님의 권리와 유익을 위한 말이 바로 예언에 대한 얘기이며 신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2장9절에서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므로
말미암아 바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이 뭔가요?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해 주는 자들
백성들을 돕는 자들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예언이란 말은 이 신언한다라는 말은
이 시대에 거듭난 모든 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바로 이 그리스도를 말해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하여 이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서 그리스도를 안에 모시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예언하기를 힘쓰라 라는 얘기의 전체적인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인데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준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해주는 그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그 비밀들을 그리스도를
진리로 전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 안에서의 살아계신 아버지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을
내보임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선민 이스라엘이 고멜과 같은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지고 패역한 짓을 한 그들이지만
이러한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을 끝까지 집요하게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그들에게
이 사랑을 부어 나타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북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돌아와서 고침 받는다라는 이 사실을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호세아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14장 4절에 내가 그들의 변절을 고쳐주며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리니, 여기서 나온 14장 4절의 말씀인 내가 그들의 타락을 치유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마음껏 사랑하리니 이는 내 분노가 그로부터 돌이켜졌으며, 하나님의 분노가 사라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자신의 백성들로 삼으시고, 또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이 놀라운 일들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껏 사랑한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잘못되고 정말 무지하여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릇 살게된 삶을 통하여 신부로서 아내로서 부적합한 그러한 성품을 가졌지만 끝내는 이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사랑을 내보임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의 놀라운 힘으로, 그 뛰어나신 사랑의 효력을 발휘함으로 말미암아 선민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된 것처럼 바로 이 교회들, 성도들, 오늘날의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생명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랑을 우리에게 내보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십자가에 감춰진 영원한 사랑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보고 또 체험하고,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우리가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 라는 이것이 바로 예언에 대한 얘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4:1 〔방언과 예언〕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을 보면 예언은 개인의 유익을 위한 일이 아니요 이건 그리스도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예언하라
신언하라 말씀을 선포하라라는 얘기는 바로 주님을 위하여 말하고 주님을 위하여 말해내는 것 바로 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을 보여주고 전해주고 운반해 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을 그들이 소유받고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고 왜냐하면 거짓 남편인 우상들이 아니라 첫 남편이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참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집을 나간 탕자가 왜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을까요? 배가 고파서 였을까요? 아니면 집에 돌아가면 먹을 것이 많아서 그랬을까요?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전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그러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그런 사랑을 내보임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굴복하여져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저께 이 아프리카의 벨벳 거미에 대한 얘기를 어떤 분 댁을 방문하여 이 벨벳 거미에 대한 말씀으로 교제의 시간을
가졌는데요 그때 제가 얘기한 것이 요한복음 6장 53절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근데 만약에 살을 먹고 피를 마시게 되면 너희에게 생명이 있다.
여러분 살과 피가 분리가 될 때 죽음이 오는 것이죠.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그 생명을 부여받는 자들을
살리시겠다라는 얘기를 제가 아프리카의 벨벳 거미의 비유를 통해서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놀라우시고도 뛰어나신
이 세상에서는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사랑에 대한 얘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염낭거미라고 여러분들도 아시죠? 우리나라 말로는 염낭거미라고 그러면 더 잘 알 수가 있는데 저는 염낭거미보다는 아프리카에 사는 바로 벨벳 거미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별히 그 만물들과 미물들 가운데서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간접적으로 전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특정된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 벨벳 거미는 뭡니까? 자기 몸 안에서 태어날 한 80개에서 한 100개 되는 알을 이렇게 품게 되어서 바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이 나뭇잎을 삼면으로 이렇게 똘똘똘똘 말아가지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그런 이파리죠 그 이파리를 이렇게 감싸가지고 그 안에서 일정 기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배 속에 있는 알들이 부화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죠 그리고 바깥에 나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부화가 되면 새끼들이 바깥의 온도를
적응하지 못하고 다 죽어질 수밖에 없고 또 바깥에 있는 외부의 공격자들에 의하여 이 새끼들이 다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아주 꽁꽁 이 나뭇잎을 삼면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 자기 자신이 갇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마지막에 새끼들이 부화할 때가 되면 마지막 그 힘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자신의 속에 가지고 있는
생명을 새끼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하여 나머지 속에 있는 이렇게 이 바깥으로 유출되어진 최소한의 이파리를 먹어
침으로 분비를 시킨 다음에 입속에 있는 것을 부하의 시간대에 맞춰서 들여보내면 그것을 통하여 새끼들이 생명을
보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이 어미가 그 갑갑함과 그 어둠과 깜깜한 가운데 있는 그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끼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더 우선하고 귀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그냥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때 새끼들은 어미의 그 살을 파먹고, 어미가 자신의 입을 통해서 부여해 준
그 분비액을 통해서 먹고 마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하게 되어서 이 백개의 알들이 다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게 되기까지 이 거미의 이 80개에서 100개의 이 새끼 거미 알들이 그 새끼 어미의 배 속에서 부화가 된 다음에
먹을 양식을 바로 어미의 살을 먹게 됨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하고, 어미가 마지막 체액을 통해서 마지막 이파리를 먹는
그것을 통해서 체액이 분비되어진 그것을 통해서 먹고, 생명의 양식인 어미의 살과 생명의 음료인 그 어미의 입에서 씹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것을 통해서 새끼들이 온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면서 나올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어미 자신이 새끼의 생명을 관심 두지 않았더라면 자기 생명을 얼마든지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80에서 100마리 되는 그 새끼들을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산출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저 100마리의 새끼 거미를 살리게 하는 그 염랑거미, 벨벳 거미의 그러한 삶의 모습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해주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 뭘까요? 자기 자신의 생명 속에 있는 생명을 가지고 저들에게 요한복음 19장 34절 말씀인데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로마 군병에 의해서 창에 찔림 받으므로
말미암아 피와 물을 흘리신 그 일로 말미암아 교회들, 성도들을 산출시켜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을
가지고 나는 죽고 너희는 살아라라는 이런 뜻입니다.
내 심장을 가지고 너희의 죽어가는 심장을 대치하자 바꾸자라는 이러한 뜻을 가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 그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그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을 먹고 마실 때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너희가 내 피를 마시면 영생이 있다라는 요한복음 6장 53절
말씀은 신성한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들을 소유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께서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들을 살리고자 하는 바로 그 생명과 생명이 대치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은 죽고
그리고 불의하고 부정한 고멜과 같은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져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속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우리가 대치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바꿔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고 그분은 죽는 이러한 것이 바로 사도바울 선생님이 얘기한 고린도 전서 14장 1절에 너희가 바로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하시죠
이런 영원 안에서의 그런 영원한 사랑과 변함없는 사랑을 함축한 생명 안에 사랑을 전하라는 것이 예언하기를 힘쓰라는
얘기인 것이지 이것을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의 운명에 대한 마치 점쟁이에게 물어봐서 당신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어떻게
어떻게 될 것이야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 예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갖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을 통하여 모든 자들을
돌이키게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고멜과 같은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끝내는 돌아오게 된다라는 이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
예언을 하기를 힘써라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사랑을 추구하라라는 얘기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라. 그리고 나서 영적인 은사들을 너희가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 그리스도를 말해내는 것을 할 수 있기 위해서
갈망하라. 예 그렇습니다. 오늘날 그러니까 이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선포되어지는 이 말씀들은 이적과 표적과 기사들을
나타내는 은사들은 낮추고 이러한 바로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염낭거미와 같이 자신은 내어주고 원하는 택한 자들을 살리기 원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십자가를 말해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의
아버지의 그 영원한 사랑 변함이 없는 사랑 다함이 없는 사랑 이것을 바로 높이는 일에 우리가 앞장을 서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 안에서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말해내는 것이 바로 너희는 사랑을 추구하라. 그리고 특별히 신언을
하도록 예언을 하도록 너희가 힘써라. 사랑을 먼저 얘기하고 있죠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 안에서의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여서 그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신선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신 십자가를 우리가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내용으로 이렇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공급되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여기서 먼저 얘기하고 그다음에 은사도 너희가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사모하도록 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 안에서의 신성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전함에 있어서 먼저 사랑을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하여 신성한 이 생명 안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바로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는 가장 뛰어난 길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는 일을 바로 영적으로 체험하고 영적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일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 되고 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해서 말하고 주님을 말해 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바로 이 생명 안에 있는 사랑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생명이 있는 자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은사들을 통하여 이 일이 원활하게 발휘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라는 뜻에서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영원 하신 사랑 여러분들 가만히 보세요.
짐승들이 배가 고프면 자기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자기 종족에
자기 종류의 종족대로 만들어진 그것들까지도 먹을 수 있어요. 하이에나 같은 거 보세요.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이 없으면 다른 짐승에 의해서 죽어진 그 짐승의 사체를 뜯어먹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원후 주후 70년대 로마 황태자 티토스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이 포위됐을 때 먹을 것이 없었죠.
긴 세월 동안 포위가 되니까 그동안에 저장하고 비축하였던 양식들이 다 고갈됨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여러분
갓 태어난 그 어린아이들을 여러분 가마솥에 끓여서 먹었다라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임신한 사람들의 죽은 사체의 배를 갈라서 그것을 먹었다라는 이런 것을 역사 기록가인 요세푸스
역사서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요 사람도 배가 고프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 좋을 때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만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이타주의적이 아닌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목숨은 살고 저의 목숨은 해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는 없는 뛰어나고도, 놀랍고도, 신비한 사랑, 영원한 사랑,
정말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사랑인 이러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 자기의 생명을 내주고 요한복음 6장 53절에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여러분 살과 피가 나뉘어진다는 것은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줌으로 말미암 그 사랑을 알고, 느끼고,
체험하고 와~ 이런 신비한 이런 놀라운 이런 가슴 아픈 사랑을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거야 하면서 이것을 깨닫고 그것을 인식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섬기는 삶을 살 때 그것이
바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받아 먹어라라는 이것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삶의 이기적이고 교활하고 간사하고 거짓말 잘하고
팥죽 한 그릇을 통하여 에서 형의 그 장자권을 빼앗고 또 에서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여서 아버지 이삭의 영적인 축복을 가로채는 그러한 아주 간교하고 거짓말 잘하는 욕심쟁이이고 이기적인 그 육적이고도 천연적인 관념을 가진 그를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하여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에게 야곱이라는 그 자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바로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부여해주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야곱의 일생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의 천사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삶의 일거수 일투족 벧엘에서 외로움과 슬픔과 정말 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여 주시고 그리고 하란 땅에서 긴 세월 동안 4명의 아내들을 얻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그 삶 곁에
함께 임마누엘 하시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육적이고도 천연적인 자인 야곱을 하나님은 바꿀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랑으로도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사랑 또는 어머니가 철 없는 어린아이를 교정하고 교화하고 품어주는
그런 사랑이라 할지라도 절대 바꾸게 하거나 새롭게 하거나 그 변화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이신 가장 큰
하늘의 사랑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끊임없이 따라 다녀서 야곱이라는 자를 이스라엘로 변화시킵니다.
바로 거듭나지 못한 그를 거듭난 이름인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그 왕자라는 하늘에 속한 자의 특별한 믿음의 조상에
걸맞는 존귀한 이름을 그에게 부여해 주십니다. 왜 그가 바뀌어졌을까요? 왜 그가 굴복하는 삶을 살게 됐을까요?
끊임없이 그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아내를 얻기 위하여 정말 아내의 그 아비인 라반이라는 삼촌을 섬기고 왜 섬겼어요?
자기가 얻고 싶어 하는 라헬이라는 두 번째 아내 자기의 육적이고도 천연적인 관점을 따라서 취하고자 한 그 아내를 얻기
위하여 바로 라헬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양치기 일들을 그 십수년을 하며 사람을 섬겼던 것입니다.
자기 것을 채우기 위하여 자기 만족을 위하여 사람을 섬기고 또 아내를 얻기 위하여 정말 양을 쳤고
호세아서 1장 12절 말씀 입니다 . 12:12 야곱이 시리아 지방으로 도망하며 이스라엘이 한 아내를 얻기 위해 섬기고
한 아내를 얻기 위해 양을 지켰느니라.
그런데 이게 창세기 29장 20절 말씀입니다. 30절에 또 기록하고 있죠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섬겼으나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29: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날들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녀에게로 들어가겠나이다, 하매29:30 야곱이 라헬에게도 들어가니라. 그가 또한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또 다른 칠 년을 여전히 그와 함께하며 섬기니라.
그런데 그가 장년의 나이가 돼서 하나님의 미리 아신바에 따라 정해진 스케줄과 안배에 따라 바로 젖과꿀이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끄십니다.
야곱을 이끌었는데 아직도 육적이고도 천연적인 그러한 성품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는 아내로서 신부로서
그런 합당한 자격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정절을 유지하고 순결을 보존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순결하고 깨끗해야 됩니다.
그래서 바로 이 첫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신랑 되신 그분만을 쫓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는 아직도 육적이고도 땅에 속한 그 탐욕과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그 의와 거룩의 성품과는 너무나 판이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적합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바로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자가 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천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줄 수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바로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그에게 보여주고 체험하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를 결국은
굴복시키는 일을 하게 된 것이 얍복 강가에서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2장 24절부터 3절 까지 말씀이죠
32:24 야곱이 홀로 남았는데 어떤 남자가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하다가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에 손을 대매 야곱의 넓적다리의우묵한 곳이 그와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를 가게 하라, 하매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내가 당신을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32:27 그가 야곱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하매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니 이는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32:29 야곱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원하오니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소서, 하매 그가 이르되,어찌하여 네가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그가 거기서 야곱을 축복하므로
32:30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하나님을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그의 위로 해가 솟았고 그는 넓적다리로 인해 절뚝거리며 걸었더라.
32:32 그가 오그라든 힘줄에 붙은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에 손을 대었으므로 그런 까닭에이스라엘 자손이 이 날까지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에 있는 오그라든 힘줄을 먹지 아니하느니라.
이 야곱에게 여호와의 천사로 나타난 그분은 바로 다름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이 천사와 곧 여호와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힘을 겨루어서 막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말할 수 없는 그 싸움을 통하여 야곱이 깨닫게 된 것이 생명 안에서의 아버지의 그 아들에게만 전해줄 수 있는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끝까지 다함이 없는 바로 이 사랑인 쉽게 말하자면 먼 훗날에 다가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아버지의 사랑을 그에게 씨름을 통해서 알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없는 가장 신비하고도
뛰어난 놀라운 사랑을 그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이 야곱이 아버지 집에 있을 때부터 길을 나가서 밷엘에 있을 때 부터 하란 땅에 있을 때도 일거수 일투족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야곱의 삶과 여정을 함께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 야곱의 삶을 함께 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고 그를 참 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그가 깨닫고 앎으로 말미암아
지금 사탄과 하나가 된 에서가 야곱을 죽이러 오기 위하여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말을 타고 완전 무장하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 여호와의 천사이신 그리스도와의 이 힘겨운 씨름을 통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자신의 삶에 관여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인 그리스도를 그때 씨름을 통해서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문제는 그런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자기를 죽이러 오는 에서와 400명의 군대의 그 죽음의 칼을 모면하기 위하여
고뇌 가운데 있었을 때 갑자기 그때 여호와의 천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이미 준비되고 예비된 여호와 하나님이신 거에요. 미리 그곳에 계셨던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의 때에, 위기의 때에, 죽음의 때에도 미리 함께하셔서 미리 예비하시고, 준비하셔서, 이미 얍복강가에
게셨던 여호와의 천사인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돕기 위하여 왜죠? 신성한 땅인
가나안 땅에는 신성하고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천연적이고도 육적인 품성을 가지고서 못들어 가는 땅입니다.
신부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가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땅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혹독하게 다루셔서
벗겨줌으로 말미암아 바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아버지의 그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 땅에서의 온전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아 누리는 삶을 갖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를 환도뼈를 침으로 말미암아
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아버지의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부여해 주고자 했던 것이며 맛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장애자가 되고 환도뼈를 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께서 때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제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살 수 있는 자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그에게 이렇게 환도뼈를 치는 일을 통하여 아버지의 야곱을 향한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은 그를 그렇게 장애자, 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합당한 신부로서의 자격이 있는자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어우러지는 품성, 어우러지는 인성, 어우러지는 인격의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젖과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서 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정말 증거가 되고 표현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 안에서의 아버지의 그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가섰다라는 얘기를 호세야서 12장 12절에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불구자, 장애자가 되게 하시면서까지 야곱의 생명을 그 신부로서 합당한 자격을 가진자 그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합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전해주는 다정다감한 사랑으로 바꿀 수가 없어요. 또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그런 긍휼과 자비와 자애의 사랑으로서는 그걸 바꿀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랑을 가지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게
할 수 있습니까? 굴복하게 하는 사랑 그 굴복하게 하는 사랑은 세상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생명을 내줘서 생명으로
대치되어 주는 염낭거미처럼 자신의 살을 파먹게 하고 자신의 피를 마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뱃속에 있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 말미암아 그 새끼 100마리를 살리고자 하는 염낭거미와 같은 벨벳 거미와 같은 그러한 살신성인도
아닙니다.
그 놀라운 뛰어난 사랑을 알게 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을 완전히 씨름을 통하여 굴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맛봤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전해주는 그 사랑이 아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 바로 집나간 탕자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생명 안에서의 영원하고도 변함없고도 다함이 없고도 바로 끝내는 굴복시킬
수밖에 없는 그 신비하고도 놀랍고 탁월한 사랑을 보여 나타내 줌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그 놀랍고 뛰어나고 탁월한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낌과 동시에 바로 그 놀라운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아는 순간에 이 여호와의 천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네가 나를 이겼다. 이스라엘이라 하라 이런 이름을 주는 놀라운 일 여러분은 이 생명 안에서의 이런 사랑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저는 이러한 이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자신은 내어주고 그 생명 속에 있는 그 하나님께서만
가지고 계신 그 생명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전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려주셨다라는 이것을 주님의
내 피를 받아마셔라 내 살을 받아 먹어라 그것을 제가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제가 그분 앞에 굴복하여져서 정말 이 세상과
죄와 마귀의 문제가 어느 정도 이렇게 해결 되어진 것을 여러분에게 간증을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 그래서 제 아무리 극악하고 사악되고 간음함으로
변절된 마음을 가진 고멜과 같은 창기의 얼굴을 하고 창기의 몸짓으로 거짓 남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그러한 선민 이스라엘
곧 북 이스라엘 왕국이 그러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따라가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사랑이신 십자가의 사랑을 내 보임으로 그토록 부정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여서 자신의 아들들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는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11장 1절에 그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고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노라.
11:2 내 종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이 저들을 떠나가서 바알들에게 희생물을 드리고 새긴 형상들에게 분향하였느니라.
11:3 내가 또한 에브라임의 팔을 잡고 그들에게 길 가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고친 줄을 알지 못하였느니라.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띠로 그들을 이끌었나니 곧 그들에게 내가 턱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았으며 또내가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두었노라.
11:5 그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아시리아 사람이 그의 왕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라.
11:6 그들의 계략으로 인해 칼이 그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의 가지들을 소멸시키고 그들을 삼키리라.
11:7 내 백성이 몸을 구부리고 나를 떠나서 뒤로 물러갔으므로 내 종들이 그들을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로 불렀을지라도아무도 전혀 그분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는도다.
11: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주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넘겨주겠느냐?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만들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매 내가 뜻을 돌이키는 것이 한꺼번에 불같이 타오르는도다.
11:9 내가 내 맹렬한 분노를 집행하지 아니하며 돌아와서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하나님이요,사람이 아니니라. 나는 네 한가운데 있는 거룩한 자니 내가 그 도시로 들어가지 아니하리라.
11:10 그들이 주를 따라 걸으리니 그가 사자같이 소리를 내리라. 그가 소리를 내면 그 자손들이 떨면서서쪽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11:11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새같이 떨며 아시리아 땅에서 나와 비둘기같이 떨리니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두리라. 주가 말하노라.
11: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의 집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싸되 유다는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며 성도들과 함께 신실하도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였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었도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애굽에서 불러냈죠? 여러분 바로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것은 선민 이스라엘을
택정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이미 아내 될 자들로 택정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내로서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세상과 하나가 된 이 애굽에서부터 그들을 끄집어낼 때, 건져낼 때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연합되어져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주 아주 아이였을 때, 그들을 일정한 시간을 통하여 자라게 하고
성장하게 한 다음에 그들을 바로 시내산에서 정혼한 아내에게 가장 귀한 십계명이라는 선물을 주어서 은밀하고도
내밀한 밀월적인 사랑을 나눈 것이 40년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그들을 끄집어낼 때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까지도 그들과 함께 동행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40년 동안의 여정을 함께하셨죠.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는 바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일을 이루어주셨죠. 이 모든 일이 여호와의 아내인 선민 이스라엘을
사랑하고자 했던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부여해 주는 것이 이 죄악된 본성을 가진 그런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지고 부정한 자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서 돌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랑은 유일하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전해주는 사랑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장 22절과 23절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는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헤롯의 죽음의 칼을 피하여서 바로 베들레헴의 생명의 떡집에서 태어나신 그분이
애굽에 잠시 피난 갔다가 다시 이스라엘과 연합하기 위해서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 호세아서 11장 애굽에서 내가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말씀 입니다.
왜 불러냈습니까? 이스라엘과 연합해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격이 멀리 떨어져서 하나가 되지 못하여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눠줄 수도, 보여줄 수도, 나타내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통해서 먼저는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고 있는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들을 불러내신 다음에 바로 젖과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 뒤에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 선민 이스라엘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출생과 더불어 이집트로 잠시 피난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하나되고 연합되어지는 임마누엘이라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질 수 있는 그 사랑을 가진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아버지 하나님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아버지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라는 것이 애굽에서
그의 아들을 불러내었다라는 이런 뜻인 것입니다. 사생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양자도 아닙니다.
참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 독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에 피난 가셨던 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불러
유대 땅에 돌아와서 그들과 함께 동족이 되고 그들의 형제가 되게 하기 위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왜 그런 삶을 살게 하셨냐면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 아버지의 변치 아니하는 그 사랑, 다함이 없는 사랑을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의 과정이 필요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11장 1절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연합하셨다는 것입니다.
11: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고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노라.
그분이 바로 이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진 후에 인성을 가지고
이 두 종류의 본성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과 바로 연합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들이 하나가 되고
연합되어져서 결국은 부활을 통하여 맏아들이 되시고 그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자들을 맏아들의 그 뒤를 따라 형제들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수많은 아들들을 산출시키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수많은 아들들을 산출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연합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내셨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2장 13절~15절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2:12 그들이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떠나 다른 길로 자기들 나라에 가니라.
2:13 그들이 떠난 뒤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이르되, 헤롯이 어린아이를 찾아 그를 죽이려 하니일어나 어린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하여 내가 네게 말을 전해 줄 때까지 거기 있으라, 하매
2:14 그가 일어나 밤에 어린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
2:15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함이더라.이르시되, 이집트에서 내가 내 아들을 불러내었노라, 하셨더라.
하나님의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주고 아들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사랑만이
이 세상 그 완악하고 패역하고 부정하며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진 자들을 바꾸게 할 수 있고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지
아내를 향한 남편의 다정다감한 사랑으로도 이스라엘을 바꿀 수가 없고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도 아닙니다.
음란하고 변절된 마음을 가지고 부정하게 되어서 신부로서의 적합한 상품을 가지지 못한 그들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주고
영화스러운 품성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그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굴복시키게
할 수 있는 얍복강가에서 야곱에게 보여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사랑이며 또한 그 사랑만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벨벳 거미와 우렁이와 같은 생명 안에서의 자기의 모든 것을 새끼를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자신의 새끼 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을
생명을 소유하게 하여 영생을 주기 위한 아들을 향한 사랑인 생명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 있는 사랑을 보여주고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들을 지금 이렇게 펼쳐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말씀 중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해 주신 우렁이의 사랑에 대한 어떤 분의 티스토리 글을 보면서
지금 이 호세아서의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대한 말씀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올려드립니다.
우렁이는 알이 깨어나면 자신의 살을 먹여 새끼를 기릅니다.
새끼는 어미 우렁이의 살을 파먹고 자라나고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때쯤이면 어미 우렁이는 살이 모두 없어져
껍질만 남아 물 위에 둥둥 뜨게 됩니다.
그렇게 떠오른 껍질만 남은 우렁이는 흐르는 물살에 아무 말없이 떠내려갑니다.
늘 주기만 했던 자신의 사랑을 한 번도 탓하지 아니한 채… 그렇습니다.
사랑은 어쩌면 받아서 내가 살찌는 그런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당신의 삶에 영양분이 되어 주는, 그렇게 끊임없이 주고 있음에도
늘 더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눈물겨움
그런 사랑이야말로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야 한 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그에게 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
끊임없이 주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깡그리 잊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가진 사랑의 최상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까지가 발췌한 내용의 글입니다하나님은 우리들을 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남편으로 등장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어머니로서 등장된 것이 구약의 대선지서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으로서 우리를 대하시고 또 때로는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우리를 돌봄과 가르침을 주시고 양육을 하시는 분으로 나타 나십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베풀어주는
그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아들로 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갈망이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신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계셨던 삼일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하여 이제 그 사랑을 우리들에게 생명 주시는 영이신 하나님의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셔서
우리를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수가 있게 하시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지만 가장 중요한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참 아들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전해주는 영원하고도 다함이 없는 사랑인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 벨벳 거미와 같은 그러한 요한복음 6장 53절에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피를 내준다는 겁니다. 피와 살이 분리가 되면 죽음이에요.
그 죽음으로 너희는 살고 나는 죽고 나는 죽고 너희는 살고 이것이 바로 피와 물을 흘려서 너희들에게 생명과 음료가 되고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먹고 마시는 이 일을 통해서 너희는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받아 먹어라.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그 영원 안의 영원한 사랑임을 이렇게 내포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바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 되게 된다라는 것이 호세아서1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깊은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11: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고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노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11장 4절에서 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띠로 그들을 이끌었나니 곧 그들에게 내가 턱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았으며
또 내가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두었노라. 예 이것이 바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내보였다라는 것입니다
음식과 멍에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줄은 무엇이고 사랑의 끈은 무엇입니까?
1. 한태 2. 봇줄 3. 군둣구멍 4. 뱃대끈 5. 멍에 6. 굴레 7 부리망
※(멍에는 소 목덜미 위에 얹는 거꾸로 된 V자형 굵은 나무토막으로, 이 멍에에 의지해 수레를 끌거나 쟁기를 맨다. 멍에는 또 소나 말 머리에 얼기설기 옭아 놓은 끈 굴레에 의지한다. 이 굴레 역시 그 앞에 얽어 맬 빌미 있어서, 소의 코청 뚫어 꿰는 둥그런 코뚜레나, 말의 혀 위를 가로질러 양 어금니 밖으로 빼 낸 재갈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재갈(코뚜레), 굴레, 멍에 순으로 구속의 고리와 끈은 이어진다.굴레는 재갈이나 코뚜레에 이어지는 한편, 목덜미에 얹힌 멍에와 묶인다. 게다가 사람이 손에 잡고 채서 다루려 마련한 줄 고삐까지 굴레에 달린다. 그러니 세 곳으로 연결된 굴레는 평생 벗을 수 없다. 재갈과 코뚜레 그리고 굴레는 벗을 수 없으나, 멍에는 수레와 쟁기 떼어낼 때 함께 벗겨 놓는다)※
사람의 줄이면 사람의 줄로 우리를 이끌면 되고 사랑의 끈이면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이끌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깊은 사랑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생명을 가진 하나님이 원하는 성품의 소유자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부로서의 어울리는 영을 가진 자들 조화와 일치와 부합되고 적합한 영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어우러지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지읍시다 하신 하나님의 종류대로 만들어진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과 어우러지기 위해서
이 에덴동산의 중앙 가운데 생명나무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나무에 참여하여서 어우러지는 영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갈망을 우리가 해결해 주고 그분이 원하는 뜻을 우리가 이루어드려야 되는데 첫 사람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다시는 되돌아간 삶 롯의 부인처럼 또는 이 광야에서 아이고~ 과거에 그 이집트에서 살았던
삶이 훨씬 지금의 삶보다는 좋았는데라고 첫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자꾸 세상과 하나된 그 애굽에서 살았던
지난날의 과거의 흔적들을 추구하고 관심을 갖고 갈망하는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신성한 사랑으로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 하나님의 그 살을 먹게 하고 피를 음료로 공급해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완전하고도 온전하게 굴복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이 일들을 이루시기 위하여 신성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신성한 수준인 사랑의 끈을 신성한 수준이 아닌 인성의 수준에서 사랑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끈으로 너희를 이끌었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수준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접촉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육체의 줄을 가지고 사닥다리를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나시고 방문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줄이 되셔서 선민 이스라엘 그리고 남왕국 유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은혜의 시대, 비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교회들에게 첫 걸음마부터 가르쳐주시고 때로는 그분의 팔로 안아주시는 이것이 어머니 사랑으로 걸음을
가르치시는 자상하고도 정말 이 긍휼과 자비로 이렇게 돌보시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신 것인데 실제는 어렸을 때부터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보다듬고 팔로 안아주시고자신의 젖을 통하여 생명의 음료를 먹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이러한 모든 것은 아버지의 그 영원한 사랑인 생명 안에서의 사랑, 곧 생명에 속한 사랑의 한 방면으로 표현되어진 것이 남편이
보여준 사랑이요, 그리고 어머니가 보여주는 사랑으로 표현되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양육하는
그런 사랑도 아닌 아버지만이 가지고 있는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은 신성하심으로
우리와는 너무나 간격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수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아니하면,
아무리 그분이 신성하고도 놀랍고도 뛰어난 그 신성한 수준에서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여도
우리들은 그분의 그 높고 깊으며 넓은 사랑을 전혀 접촉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수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신성한 수준에서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너무 낮은 차원에 속한
죄악된 본성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분의 그 신성한 사랑을 접촉할 수가 없고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신성한 사랑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기 위하여 성육신 하셨던 것입니다.
예!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몸을 가지고 사람의 수준으로 우리에게 방문하시고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아버지께서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생명에 속한 사랑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그 생명을 내어줌으로
그 생명으로 대체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똑같은 자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자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로
만들어지게 하기 위해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오시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
그분이 이스라엘을 사람의 줄로 곧 사랑의 끈으로 너희를 이끌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
사랑의 끈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성을 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한 사람의 줄로 오시지 아니하면 아무리 좋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신성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높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그것을 공급받을 수 없고 접촉할 수도 없기 때문에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선민 이스라엘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 그리고 남왕국 유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의 끈으로 이끄시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깊은 복음을 여러분들에게 얘기를 합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사랑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우리가 맛보게 되면 십자가에서 나타나진 여호와 하나님의
그 아버지의 생명에 속한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기만 하면 체험하기만 하면 우리는 절대 다른 것을 눈을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 남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뭡니까 여러분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 나타난
사랑을 따르고 영적 선물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너희는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라.
이러한 말씀들 그리스도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생명에 속한 사랑이신
십자가를 통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해 준 아버지가 아들을 느끼는 탕자가 바깥에서
그 아버지의 사랑을, 그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바로 생명에 속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돌아오게 됐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은사는 낮추고 이러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을 전해주는 성육신 하심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 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야하기 때문에 고린도 전서 14장 1절에 먼저 너희는 사랑을 추구하라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명 안에서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을 맛보지 아니하면 우리가 예언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고 생명 안에서의
그 놀랍고도 뛰어난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을 주는 것을 처음부터 이집트에서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바로왕의 노예와 종살이를 하고 있는 그들의 무거운 짐을 멍에를 11장 4절에서 바로 그들에게
그 턱의 멍에를 벗기는자 같았다. 이게 뭡니까 여러분 왜? 그들에게 멍에를 벗겨 줍니까?
자기들의 아내가 될 바로 정혼한 아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정혼한 아내와 신랑의 관계로 보이지만 실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고 싶어 하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 나타나진 하나의 표현이 남편이 신부를 대하는 남편의 사랑으로 보여진 것뿐이지 실제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부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 신성한 사랑을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전달해 주기를 위해서 왔는데
그분을 거역하고 배척하여 싫어한 바 되어서 죽이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림으로
기원 후 주후 70년에 로마의 황태자인 티토스 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땅을 빼앗겨버리고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까지도
무너지고 불타버리는 그런 일을 경험하게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절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르켜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멍에는 바로 이집트의 세상과 하나가 된 바로 왕의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400년 동안 본의 아니게 종살이와 노예살이를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신부로 택정함을 받은 아내 될 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해주는 그 생명에 속한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가 있는 자들입니다.
염낭거미를 통해서 자기의 살과 피를 내주어서 그 새끼들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 염랑 거미의 수많은 아들들,
하나님의 수많은 아들들을 배출시키고 산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선제적으로 바로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그리고 광야에서 만나를 허락해 주시고, 반석을 깨치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생명의 바로 음료를 공급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는 참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단과 하나가 된 이 이집트 왕은 바로 이 사단의 어떤 체현으로서
나타난 그 거짓 아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먹을 것을 주고 나일강을 통해서 음료를 주지만 실제적으로는
종으로 노예로 삼기 위한 거짓의 아비로서 그래서 성경에 여러분 사탄을 뭐라고 얘기합니까?
거짓의 아비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종과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쇠사슬로 강한 멍예를 씌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참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참 아들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그 턱에 멍에를 벗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이렇게 멍에를 벗겨주고 광야로 이끌어서 그곳에서 정말 새벽 이슬과 함께 떨어지는
그러한 사랑의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이신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전달해 주고자 하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생명에 속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그 만나와 생수를 터트려 이 생명수 강들이 나오게 한 것은
사실은 그분의 살과 피를 내주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만나와 반석에서 터트려 나온 물을 통해서 바로 생명에 속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인 아버지가 아들을
만들기 위해서 아들을 삼기 위해서 아들로 조성하기 위해서 바로 우리는 그분의 아들들이 되고 그분은 우리 아들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는 이 일을 바로 이집트에서 멍에를 벗겨주고 그리고 이 광야 40년 동안에 살면서 이렇게 턱으로부터
감싸진 멍에를 바로 종과 노예를 상징하고 있는 멍에를 벗겨주는 일을 통하여서 또 만나를 먹이는 일,
생수의 강을 마시게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시고 바로는 사탄과 하나가 된 거짓 아비로서
우리들을 종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 이러한 무궁한 사랑, 이런 영원한 사랑, 이런 변함이 없는 사랑 굴복시킬 수 있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생명에 속한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서 결국은 궁극적으로 보여주지만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여러 유형의 방면으로
지금 이 아버지의 그 생명에 속한 사랑을 하나하나 베풀어주고 권면하고 징계하고 징벌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악했다라고 성경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해서 그들은 불과 유황불로 영원한 멸망 가운데 처해져서
흔적조차도 없이 되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그 음란과 변절한 마음을 가지고
부정하게 되어 첫 남편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남편인 우상들을 쫓아 사는 그런 패역한 짓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북왕국 이스라엘, 곧 에브라임을 절대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런 못된 짓을 했는데도 버리면 되는,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왜 버리지 않았을까요?
아버지의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세상 우주 가운데 사탄과 사탄과 하나가 된 자들,
또 이 하늘의 영역들 안에 있는 선한 천사들, 우주 만물과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생명에 속한 사랑 끝이 없는
다함이 없는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랑인 생명 안에서의 사랑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세상 가운데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권면하고, 때리고, 징계는 하실지라도,
남왕국 유다도 마찬가지로 포로가 되어 잡혀가게 할지라도, 70년 뒤에 다시 돌아오게 하고, 또 주후 70년 로마
티토 장군에 의하여 그 땅을 빼앗기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리고 무너지는 일을 감행했을지라도,
그러한 일들을 보여 나타나게 했을지라도, 크신 진노의 마음인 하나님의 버리는 사건이 있을지라도
1900년이 지난 뒤에 1948년 고토의 땅으로 돌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변함없이 그들에게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가지신, 정말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사랑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우리가 세상 역사 가운데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바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상하게, 때로는 다정다감하게 보임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통해서는 바로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고, 또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보이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서 애굽 땅에서부터 멍에를 벗겨주고 광야에서 양식인 만나와 그리고 반석에서 터쳐나온 그 생수의 물들을 마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셔서 함께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선민 이스라엘에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선민 이스라엘의 돈독한 관계를 통해서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ㄱ이 아버지가 되고 그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 곧 백성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 드려야 되는데
이러한 사실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인 하나님을 힘써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라는 이 지식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요
목적이신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경륜의 중심이요, 이상의 뜻인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들이
패역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남편이 되시고 어머니가 되시지만 실제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사랑의 영원한 생명에 속한 사랑, 그러한 자신의 생명을 내주어서 저들의 생명을
있게 하여서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그들 안에 들어가서 서로 생명 안에서 거하게 하시려는 이 놀라운 일들 이것이 바로 너희는
사랑을 가지라 사랑을 가지라 계속 그 얘기를 하죠. 생명을 추구하라 생명을 추구하라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 곧 생명에 속한 사랑을 알 때 너희가 은사들을 통하여 바로 이 그리스도를 말해 냄으로 주님을
위하여 말해 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공급해 줄 때 저들 또한 바로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생명의 속한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는 여러분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소유할 때 하나님의 생명도 점점 더 증가가 되어 하나님이 태산 같은 그러한 돌이
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으로서 우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이렇게 크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소유받아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될 때 주님의 생명은 끊임없이 한이 없이 영원하고도 변함없이
무궁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자들에게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가진 자로 이렇게 나타나고
표현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합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호세아서 13장 14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 입니다.
13:14 내가 그들을 무덤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으로부터 구속하리니, 오 사망아, 내가 네 재앙이 되리라.
오 무덤아, 내가 네 파멸이 되리라. 뜻을 돌이키는 것이 내 눈을 떠나 숨으리로다.
여러분 여기에 보면 사망에게 너 음부의 권세가 있느냐 ?내가 너의 음부의 권세의 당사자가 될 것이다.
니가 사망의 권세가 있느냐? 내가 사망의 권세가 있는 너의 재앙이 내가 사람들 대신 인류 대신
내가 너의 재앙의 제물이 될 것이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음부야 내가 네 멸망이 되리라.
죽음과 음부의 권세를 친히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그 영원한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바로 돌이키는 것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리라.
음부의 권세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친히 담당하시고 바로 사망의 그러한 멸망들과 재앙들을 친히 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랑을 보여주는 일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스올아 너의 멸망이 어디 있느냐 후회가 내 눈에서 없다 절대 하나님은 이 사랑을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 속의 이 사랑인 나는 나의 생명 대신에 나의 생명은 사라지고 죽고 그리고 이 죽음을 통해서 바로 산출되신 그 사랑을 너희가 가짐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살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심으로 너희는 영생을 얻어라.
이러한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무궁한 사랑을 펼치신 그 선민 이스라엘을 향해서 오늘날 교회들과
성도들을 향해서 펼친 이 사랑을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가지신 생명에 속한 사랑을 가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서는
이 사랑 그 자체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랑 때문에 의와 사랑이 양 두 개의 철로를 따라
쭉 가고 있는데 이 상위법에 있는 이 사랑 때문에 의가 어느 순간에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할 때 의가 사랑 안에
감싸진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사랑은 이렇게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변함이 없고 신비하며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이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베푸는 것은 뭐죠? 남왕국유대에게 배우라고 그리고 지금 오늘날 이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들
성도들에게 배우라고 너희가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내 살과 내 피 그 살과 피가 쪼개짐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해서 내가 너희를 살리고 나는 죽고 이것이 피와살을 먹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이렇게 우리들에게 놀랍고 변함없으며 영원한 사랑을 이렇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지금 이렇게 나타나고 그 사랑을 부여해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그들에게 이러한 방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변함 없는 그분의 사랑 이스라엘을 향하여 끊임없이 애굽에서부터 함께하셨던 정혼자로서 하나님의 그 신부로서
바로 신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끈질기게 그들에게 이 남편으로서 어머니로서 나타나셔서
그러나 실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해주는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여호와의 아내로서
이스라엘이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바로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 아들을 향한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영원무궁한 바로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이렇게 나타내 보여주고 체험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그때 당시에는 북왕국 이스라엘 이지만 오늘날의 교회들 성도들에게 바로 영적 이스라엘이 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리가 불리움을 당하고 우리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들의 이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것을 이루기 위한 일 때문에 바로 아버지의 생명 안에 속한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이라는
바로 갈라디아서 4장 6절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4:1 이제 내가 말하노니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아이일 때에는 전혀 종과 다르지 아니하고
4:2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가정교사들과 감독하는 자들 밑에 있느니라.
4:3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종노릇 하였느니라.
4:4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4:5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반면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잘못이나 부정이나 어두움이나
불의를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을 지금 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의한 그들을 음란과 간음과
변절을 하고 부정하게 된 그들을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징벌의 몽둥이로
때리시는 것입니다.
징벌의 몽둥이로 때릴때 바로 이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불의한 자들을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하여 징벌을 받게 하셨지만,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끼는 그 사랑을 가지고 계신
영원한 사랑의 속성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끊임없이 선민 이스라엘을 따라다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굴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야곱을 얍복강가에서
굴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어서 그를 승리케 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항상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깨닫는 순간에 그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야곱을 굴복시키게 하는 승리하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야곱아~ 네가 나와 씨름 하여서 네가 이겼다. 왜? 영원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 속의 사랑을 그가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아~ 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며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영원무궁한 사랑이구나! 그분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내가 영원히 그분의 사랑은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는 함께하는 아버지의 사랑이구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야곱을 굴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을 내가 알았습니다라고 참 순복하게 될 때, 야곱을 통하여 승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승리한 하나님께서 그 영원한 사랑을 알게 한 야곱을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 생명을 내주어서라도 너를 살리고
싶어 하는 것이 내 마음이기 때문에 애서가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와도 너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것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그를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체 되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 방문하시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어 연합되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유다 사람들의 동족이 되어서
피와 살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바로 신성을 지니신, 신성면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바로 인성을 가지고 그 동족 가운데 사람의 몸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과 성육신하신 것을
통해서 합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이 사랑을 깨닫고 아는 바로 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유기적으로 하나로 생명을 주시는 사랑과 연결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속의 사랑을,
바로 이게 생명에 속한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결된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그 아들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상태와 위치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바로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독자로서 세상에 오시고, 또 부활을 통하여 맏아들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수많은 아들들을 산출시키게 할 수 있으셨던 것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 곧 생명에 속한 사랑을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셨기 때문에 영원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육신 하셔서 이 영원 밖에 제한된
시간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신성만을 소유하셨던 그분이 마리아의 몸의 잉태되어 짐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게 된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을 나타내고 표현하고 증가함에 있어서
유일한 분이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가지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셔서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피와 살을 가진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하나님
신성을 지니신 자신께서 인성과 연결시키셨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입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인간 본성을 지니시고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성과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세상에 성육신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생명 속의 생명에 속한 생명의 속한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대속하는 죽음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그 대속한 죽음은 뭐죠? 생명에 속한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 그 생명을 받은 자들은 살리시겠다 라는 살과 피를 분리시키고 이렇게 쪼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생명 안에서의 사랑을 공급해 줌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대속하는 죽음 생명 주시는 영이 되기 위하여
대속하는 죽음을 당하신 후에 부활 안으로 들어가셔서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성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나심으로 말미암아 왜 거룩해지고 영화로워진 인성을 가진 분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 인성이 높아짐으로 거룩해지고
바로 이게 영화로워지고 의와 거룩한 인성을 가졌다라는 것이 부활을 통하여 증명됨으로 말미암아 그 인성이 신성과 어우러지는 영, 조화가 되는 일치가 되는 영, 부합되는 영이 됨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져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이제
소유하신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모두 소유하신 하나님의 맏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부활 안에서 부활로 인하여 우리들의 구주로, 구세주로,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태어난, 거듭나게 된 새로운 출생을 가지게 된 베드로전서 1장 3절 말씀이죠.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
거듭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부활을 통하여 이러한 생명 안에서의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 우리들에게 이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주셨다는 이 놀라운
생명의 대한 복음을 깨닫고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시켜주셔서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구성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몸, 그분의 지체가 되게 한 것이 바로 바로 호세아서 11장 1절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이 끄시는 사람의 줄들이 되기 위해서 사랑의 끈을 가진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을 가지고 생명에 속한 사랑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살과 피를 우리에게 쪼개서 나누어줘서
우리는 살고 그분은 죽음을 택하시는 이러한 정말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놀랍고도 정말 뛰어나고 신비한 이 사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랑의 줄들인 곧 사랑의 끈들로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서 육체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생활을 하시고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과 승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인성 안에서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모두 통과하신 이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사람으로 사시고, 사람으로 죽으시고, 사람으로 부활하시고, 사람으로 승천하신 이 모든 단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는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인 생명에 속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신비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게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 그리스도께서 인성 안에서 통과하셨지 신성을 가지고 통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 그리스도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 안에서 인성을 통하여, 인성으로 말미암아 인성으로 인하여 통과하신 이 모든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승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사랑은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영원무궁한
이 생명 속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변화시켜주고 새롭게 하고, 이것만이 우리를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이 생명 안에서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 우리들에게 생명을 부여해 주고자 하는 마치 염낭거미와도 같은 자기는 죽고 새끼는 살리고자 하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굴복시키는 그 희한하고 그 신비한 사랑 때문에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는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사랑
굴복시키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야곱처럼 이 굴복시킬 수 있는 놀라운 생명 안에서의 그 사랑 생명에 속한 사랑을 맛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맛보게 될 때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내가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무릎을 꿇고 그분 앞에
완전히 자기 자신을 내놨을 때 네가 나를 이겼다라고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왜? 그 신비한 사랑을 그 생명 안에서의
사랑 그 생명 속의 사랑을 그 염낭거미의 사랑과도 같은 나는 죽고 너는 살리겠다는 그런 깊은 사랑을 아는 자들은
주님을 안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있는 자들 하나님의 그 영원하고도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고 영원무궁한 그 사랑이 효력이 있는 것은
우리를 굴복시키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랑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변함이 없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여호와를 알라 힘써알라.
6:6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
그럴 때 우리가 이러한 일들이 이렇게 벌어진다는 것을 조성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고 2편 말씀을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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