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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2:15/히브리서:12:2/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부활 승천 안으로말씀 나눔방 2023. 6. 12. 06:46
말 씀: 박 찬 덕 선교사
아가서: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들 곧 포도나무를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붙잡으라.
우리의 포도나무에 연한 포도들이 있느니라.
히브리서:12:2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전편에서 십자가와 하나 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관적인 체험인 십자가 안으로 친히 들어갈 필요가 있다라는 말씀을 교제를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나무 아래에 정말 무릎을 꿇고 그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
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와 그 피의 효력을 통한 우리의 죄의 문제를 구속해 주는그러한
일에 대한 감사와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가 된 그분의 고통과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보며 말할 수 없는 이 슬픔 가운데 그분의 달콤한 사랑을 우리가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다라는 것은 바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들이 죄의
문제 구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죄 문제가 제거되는 전체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 아래 전체적인 객관적인 어떤 우리에게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
십자가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체험 주관적인 체험을 갖자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강하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십자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가 하나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십자가를 통하여 바로 우리가 처음서부터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한 것처럼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인간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체적인 성경의 내용이 솔로몬의 시의 고백인 아가서 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인성을 지닌 우리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부활을 통하여 부활안에서 그분의 인성이 신성안으로 이끌림을 당하셔서 고상한 상태로 높여짐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지는 일이 바로 십자가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만 됩니다.
십자가가 우리와 하나가 될 때 바로 그것이 나의 옛사람 나의 자아를 파쇄시키는 시작점
이며 그리고 그 십자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십자가와 나 자신이 하나가 됨으로 말미
암아 그 하나가 되는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거듭난 자들 믿는 자들에게는 나의 속사람인 새 사람이 있고 혼 안에 옛
사람이 있는데 이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늘 갈등 안에서 늘 문제 안에서 분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당하고 갈등을 느끼고 매우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아에서 이 "나"라는 존재가 파쇄되고 새 사람 안에서 새로운 내가 산출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하나됨을 통하여 나의 옛사람이 파쇄가 되어서 제거가 되어서 질적으로 단단해지고 양적으로 커진 나 자아 라는 그러한 어둠의 그림자가 해결받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출 받는 것입니다.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정말 매시간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친히 본받아야 됩니다.
그분의 죽음이 나의 것이 되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나"라는 이 혼적인 자아에서 이 옛사람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내 안에 계신 내 존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으로 말미암아
나란 새사람 그리스도께서 새 피조물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그 속 사람이 날로 날로
새롭게 강건해질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안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시고 잡아당기셔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자신의 품으로 자신 안으로 오라고 이렇게 간절하게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십자가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게 하는 십자가 안으로 주님의 품 안으로 마주
하여서 그 산을 넘고 언덕을 넘어 그 수많은 장애물과 그 어려움들을 뛰어넘고 초월하고 극복하여서 주님과 마주하게 하기 위한 십자가의 내밀한 그 사랑이 내재되어 있는 주님과의 온전한 연인의 사랑의 교감을 가질 수 있는 그 십자가 안으로 곧 개인적인 체험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큰 희생을 치를 것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서 2장 15절에 말씀인데요 14절에서는 바위틈과 낭떨어지 은밀한 곳인 십자가와 하나 되기 위해서 곧 십자가 안으로 내 안으로 들어와서 그 달콤한 사랑의 목소리를 우리에게로부터 듣고 우리로부터 들은 그 사랑의 달콤한 그 눈을 통해서 그분을 보신
우리를 또 기뻐하시는 그 그리스도 솔로몬 왕으로 예표하고 있고 솔로몬 왕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비둘기 눈을 가진 우리의 눈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리스도와 내가 십자가 안에서 하나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을 그래서 부르시고 이끄시고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은 자신 안에서 사랑스러운 교감을 서로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맛볼 수 없는 내밀한 그것을 오직 둘만 성도들 교회들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은 객관적인 체험이라면 그 십자가 아래에 있는 우리를 이끄셔서
높이 달린 십자가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은 주관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하나가 되게 할 때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인 그리스도의 그 달콤한 사랑을 맛보고 도취되어서 적셔짐을 받아서 우리가 승천의 삶을 하늘로 이끔을 당하는 그런 참 놀라운 능력의 삶을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대가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도 그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그 높고 울퉁불퉁한 기암괴석 가운데에 있는
그 십자가 올라가기도 버겁고 숨겨져 있기 때문에 찾기도 힘들고 얼마나 그 십자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주님의 크신 그 사랑과 생명을 찾고 체험하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난관이
있지만 그런데 주님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활의 생명 능력인 사슴, 노루, 가젤로 우리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7절 말씀입니다. 아가서: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노루와 사슴으로 우리를 만드시는 부활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데 그 부활의 능력이 무엇 입니까? 우리를 변화시키고 조성시켜주시고 힘이 되어 주시는 생명 주시는 영을 산출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이신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분으로 인하여 그 높이 우리가 감히 손으로 만져
볼 수 없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부활 능력을 체험하신 부활의 능력이 되셔서 그 어둡고 깜깜한 것을 이기고 수많은 장애물과 수많은 난관들과 말할 수 없는 장애물들을 먼저 극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본이 되시고 길이 되어 주셨던 그분께서 자신의 부활 능력을 친히 우리에게 부활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바로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은밀한 사랑의 교감을 나누자라고 얘기했을 때 그분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이 일을 이룬 후에 십자가 아래에 있는 우리를 다시 한 번 더 높은 차원으로 마치 욥을 심하게 다루시고 혹독하게 벗기심으로 말미암아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하는 더 높은 차원으로 욥을 이끄셨던 것입니다. 욥안에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있게 하시기 위해서 욥을 다루시고 그렇게 심하게 혹독하게 벗기셨던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 아래 머물면서 고개를 떨구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우리를 또 한 번 다시 왜 손을 이끌어 부르시고 왜 이끌으셔서 왜
우리를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삶을 십자가 안에 들어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되는 삶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십자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사랑과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감사하고 경외하고 있는 우리를 다시 한 번 또 이끄셔서 높은 차원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부르실 때에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문제냐면 큰 희생과 댓가와 고통을 치루어야 될
일들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서 2장 15절 말씀입니다.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우리의 사랑을 그 연인의 사랑을 깊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자아를 벗겨내는 일 옛사람을 제거하는 일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해방되어야 그분과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십자가 속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내밀한 은밀한 그 달콤한 사랑을 맛볼 수가 있는데 거기에 여우들이 나타나서 바로 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처녀 사이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방해하고 훼방하고 하는 큰 방해꾼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찾기 위해서도 여러분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장애물들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바로 부활의 능력이죠.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그 십자가를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달콤한 사랑을 맛보게 하여서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삶을 통해 우리의 옛 사람이 완전히 파쇄가 되고
새 사람이 온전히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내 존재 안에 우리 존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고 행하실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나되는 삶을 살게 해야 되는데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하나 되는 삶을 살게
함에 있어서 이 여우들이 방해를 하고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솔로몬 왕은 자기가 그 사랑하는 자 솔로몬이 뜻도 사랑하는 자 술람미의 뜻도 사랑하는 자 신약 성경에서는 마리아가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 이런 사랑하는 자를 더욱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 있는 깊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 달콤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자인 그 술람미 처녀를 위해서 바로 자신의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큰 장애물이 여우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여우들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우들이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것도 또 작은 여우들이에요. 그 작은 여우들이 얼마나 이리저리 다니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방해하고 공격하고 훼손하고 큰 어려움과 장애물을 놓아 둠으로 말미암아 이 작은 여우들을 잡기까지 우리의 자아는 계속 우리 안에서 함께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작은 여우들이 뭘까요? 부활의 능력을 훼손시키게 하는 그 작은 여우들이 뭘까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그 사랑의 교감을 단절시키고자 하는 큰 장애물 그러한 문제들을 일으키는 어려움을 갖게 하는 그 작은 여우들이 뭘까요?
이 솔로몬왕은 자신의 사랑의 연인인 술람미 처녀에게 우리들의 사랑을 그르치게 하고
망치게 하고 가깝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온전하고 달콤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게 하는 작은 여우들을잡으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하여 우리라는 것은 바로 솔로몬왕과 술람미 처녀죠 바로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 곧 성도들로 형성된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인 우리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가 여우들을 잡는데 그 여우가 포도나무를
망치는 포도원이 아닙니다. 실제 그 포도원의 중심 주제는 포도나무의 열매인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손상시키면 포도나무의 열매 생명과 사랑을 우리가 소유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 나무를 망치는 곧 그리스도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가 되시는 우리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그런 나무를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붙잡으라고 우리에게 간절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우들 누가복음 13장 32 말씀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러분 저 여우에게 가서 라고 여기도 여우 얘기가 나오죠? 예 여우에게 가서 말하십시요
여기에서 이 여우는 사실은 다른 자를 얘기 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우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때의 이 여우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은근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작은 여우들 우리 사랑의 연인이자 우리를 사랑하신 자이신 솔로몬 왕이신 참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이 교회들에게 성도들에게 바로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온전치 못하게 하는 바로 부활의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는 그 부활을 망치고자 하는 왜
이 술람미 처녀에게 왜 여우들을 잡으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친히 솔로몬 왕이 나를 위하여 나의 여우를 잡으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너와 나의 사랑을 방해하는 여우들을 왜 술람미 처녀에게 잡으라고 얘기를 했을까요? 이 술람미 처녀에게 문제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술람미 처녀가
가진 어떤 옛사람으로부터 나온 그러한 천연적인 사고방식에서 지금까지 고착화 되어진 그러한 이상한 특이한 성질들 그 자신만의 특이한 기질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제가 이런 삶을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들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이 가진 어떤 특이한 기질 그런 어떤 것이 있습니다.
사실 못돼먹었단 얘기죠 예 바로 그 자신만의 어떤 고집들 자신만의 어떤 습관들 다른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나만이 알고 있는 그러한 어떤 이상한 삐뚤어진 그러나 그것이 고착화되어져서 늘 그러한 순간에 툭툭 튀어져 나오는 그러한 나 자신의 실체가 작은 여우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아라는 것이죠.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그 행위들을 표출시키는 그런 행동들 이상한 행동들 당신에게는
이상한 그런 행동이 있어, 당신에게는 그 이상한 습관이 있어, 특이한 남들이 갖지 못한
이상한 고집이 있어라는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사이를 가로막는 그 사랑의 교감을 망치게 하는 가로막게 하는 가깝게 하지 못하는 큰 벽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는 누구든지 그러한 자신만의 그 첫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되어져서 거룩한 본성 안에서 그 거룩한 본성이 타락한 인성으로 조성되어서 고착화된 아주 단단해진 콘크리트처럼 누구도 깨어 부술수 없는 우리 부모도 안 돼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선생님도 나를 그렇게 권면해도 그걸 깨부시기 싫어요.
왜냐하면 만약에 그 기질이, 그 고집이, 그 정신이 어떤 습관이 나만이 어떤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 그런 것들이 사라져버리면 나라는 정체성이 없어질 것 같거든요, 나라는 존재가
제거되는 것 같거든요, 근데 그 “나‘라는 존재가 새 사람과 함께 붙어 있기 때문에 협력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옛 사람이 파쇄되지 않고서는,
제거되지 않고서는, 온전한 새 사람이 조성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담는 영이라는 이 그릇 안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셔서 역사하시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나의 자아들이 불순물들이 사람의 피조물로 인하여 형성된
옛 사람들이 다파쇄되어야 됩니다.
잘라지고 쪼개지고 때로는 불태워지고 때로는 두들겨 맞음을 통해서 벗겨지고 다루어
져서 그것이 없어져야 됩니다. 여러분 새 사람이 되고자 그 길을 가고자 할 때 크게 가로막고 있는 나 자신의 어떤 특별한 그런 고집 특별한 그런 어떤 습관들 기질들 그런 것들이 새 사람이 되게 하는데 큰 방해물이 됩니다.
근데 이런 것들을 가만히 살펴서 그것을 가만히 없애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단단함이 그 견고함이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견고해졌다
라는 것을 알 뿐이므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이러한 일이 주님께 벌어져서는 안 되죠라고 얘기했을 때 사단아
나의 뒤로 물러가라 함으로 말미암아 그 베드로 앞에 사단이 아닌 사단의 어떤 사상이나
사단의 어떤 인격이나 사단의 정신을 받아들여서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나온 베드로의
자아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만을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아가 그 옛 사람이 그
순간에 파쇄되어서 없어져서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아를 통해서 말한 그러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영역에서 말한 그것이 허물어지고 벗겨지게 하시는 것이 바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함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눈에는 그리스도만이 보이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을 통하여 나중에는 크게 그것을 깨닫게 되어서 두 번 다시 그러한 잘못된 우를 범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삶이 그렇게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이죠. 예 그렇습니다. 포도 나무를 망치는 이 작은 여우들은 우리의 이상한 그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부모 밑에서 자라온 환경과 나의 생활 습관과 그리고 어떤 세상 지식과 학문을 통해서 다져진 그러한 습관들과 고집들과 특이함 어떤 그런 기질들 고집들 이런 것들이 바로 작은 여우들인 내 옛사람을 이루고 있는 자아라는 것입니다.
혼 속에 그것이 있어요. 혼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인 기관을 접촉
하는 기관인데 이러한 자기의 자아가 이렇게 고착화되어서 기질로 고집으로 이상한 습관으로 이상한 행동으로 뭉쳐져서 견고해지고 이렇게 형체로 이루어지게 되면은 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새 사람과 온전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서 바로 주의 생명의 양식을 통해서 분배받는 일을 통해서 그 영의 것에 순복하는 삶을 혼이 삶으로 말미암아 영과 혼이 하나가 되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그러한 기능의 역할을 하여야 되는데 육체 속에 감춰져 있는 죄를 통하여 그 사단이 역사하고 있죠 죄 자체가 사단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그 죄라는 것을 통해서 좌정하여진 거짓 신랑 거짓 남편이 그 육체의 뜻을 따라서 자꾸 치우쳐 손을 잡게 되고 협력하게 되어서 베드로와 같은 그런 주님 이러한 일이 주님께 있어서는 아니 되죠라고 자기는 옳다라고 생각했는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옳다 그르다
이건 자기 자신의 관념입니다.
신성한 생명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그 영역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열매의 그 관념을 가지고 신성한 삶의 길을 표출하는 말과 행위와 정신과 생각과 의지를 내보여야 되는데 베드로의 자아는 사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사단이 자리 잡고 있어서 사단 속에서 사단적인
자아에서 나온 베드로의 고백이기 때문에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사실은 숨겨진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사단적인 인성 사단적인 정신 그 이기적인 자신의 유익만을 탐하고자 하는 자신이 하나님 대신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일을 그릇되게 하려는
그런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베드로의 천연적인 관념과 옛사람 자아를 통해서 사단적인
그러한 인성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취한 여종 하갈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아브라함의 삶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의 영역에 13년 동안 있었다니까요. 바로 그때 그 순간으로 말미암아 순간 이 합법적인 위치에 있는 그 사라를 통해서 씨를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적인 위치 불법적인 아내의 위치에 있었던 여종 하갈 바로 율법을 상징하고 있죠 율법과 하나되어 협력함으로 말미암아 그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그 이스마엘을 산출함으로 말미암아 천연적인 자아와 자기가 손을 잡았던 것입니다.
곧 옛 사람과 손을 잡은 율법 안에 있는 관념 속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 죄를 드러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정죄하여서 주님께로 이끌어주는 역할만 할 뿐이죠. 예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그 고백은 완전히 사탄의 인성 속에서 사탄의 정신을 가지고 사탄의 뜻에 의한
도구가 되어서 사단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의 전형적인 작은 여우들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계속 그 자아라는 옛사람이
계속 커지고 견고하게 되어서 이게
분간을 하기 위해서는 이 옛사람인 자아가 완전히 파쇄되는 과정들의 삶을 통해서 점점
주님께서 함께 움직이시고 있는 하나가 된 그분의 뜻을 따라서 우리가 사는 사도바울
선생님의 생애와 같은 바로 그 옛 사람 혼 안에 있는 자아에서 나온 삶이
아닌 완전한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바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움직이는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 선생님 예 그래서 이 바나바와 사도
바울 선생님이 한 차례 충돌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15:36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르되, 우리가 전에 주의 말씀을 선포한
모든 도시로 다시 가서 우리 형제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지 알아보자, 하니 15:37 바나바는 마가라는 이름의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결심하였으나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자기들과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니라. 15:39 그들 사이에 다툼이 격렬하여 그들이 서로 갈라져 떠나니 이처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키프러스로 가고
15:40 형제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매 그는 실라를 택한 뒤에 떠나서
15:41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교회들을 굳건하게 하니라.
바나바가 조카 마가 요한을 전도 여행에 함께 데리고 가면은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
주님의 일에 크게 쓰임 받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우리를 또 도울 수도 있고, 이렇게 말했을때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강하게 안 된다 절대 저를 데리고 갈 수가 없다.
전에 저 마가 요한이라는 자가 우리를 떠나 이렇게 임의로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길을 간 자는 또 그러한 일을 벌릴 수 있기 때문에 안 된다 라고 옛사람에 속한 그러한 고백이 아니라 완전히 예수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새 사람으로서 그분께서 움직이시는 가운데 그분의 뜻을 쫓아 그 마가 요한을 내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데리고 가자 라고 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예수님의 영 안에 있던 자가 어떻게 한 사람은 데리고 가자 한 사람은 안
된다 왜 그런 두 가지 일이 주님 안에 있는 영적인 사람들이 왜 이런 일들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바나바 안에는 작은 여우들을 통해서 고착화된 천연적인 관념의 방식에
따라 천연적인 자신의 생각을 펼침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의 영역에서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사도바울 선생님은 생명나무의 열매 영역 안에 있는 빛의 계시함을 받고
주님의 영께서 움직이는 뜻을 따라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리 가라 하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라 하면 저리로 가고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바로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러한 면에서 작은 여우들을 아가서
2장 15절에 우리를 위하여 여우들 작은 여우들 바로 포도나무를 망치는 작은 여우들 잡는 자 였던 것입니다. 그분의 움직이심을 활성케 하고 역동케 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작은 여우들을 잡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 작은 여우들을 잡는 일에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로 이 포도원은 교회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교회 생활을 한다 라는 것 교회를 통하여 바로 이 말씀의 교제를 통해서 성도들끼리 믿는 자들끼리 서로 교류하고 말씀을 나누고 간증하고 증거하고 그래서
아~ 내 속에 작은 여우들이 있구나 저 사람이 얘기한 것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이 작은
여우들 이런 고집 이런 기질들 이러한 이상한 습관들 이런 특이한 것들이 저 사람은
없는데 나는 있네 하는 것을 통해서 서로가 이 작은 여우들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간의 교제가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남을 가지세요. 교제를 하세요. 말씀을 통해서 교제를 나눌 때 작은 여우들이
붙잡힌 바 되고 교제를 통해서 작은 여우들이 어디 있다 라는 것을 보게 되어서 말씀으로 이 작은 여우들을 쇠사슬로 옭가메어 나의 자아를 파쇄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파쇄시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 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만이 말씀 안으로 들어가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될 때만이 우리가 옛 사람 나 자아를 파쇄시킬 수 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 때로는 이러한 자기의 어떤 특별한 기질들과 습관들 성질들 못된 이상한 꼬부라진
것들이 있어요. 이상한 남이 나를 툭 치면은 아주 급격하게 반응을합니다.
천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툭 치면 이유도 불문하고 왜 때려 때린 것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지금 이 사람이 보지 못하고 있는 방향에서 위험한 차 또는 위험한 물건이
날아들어옴으로 말미암 달려들어오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뒤에서 툭 쳤는데 이 사람의 반응을 왜 때려 천연적인 방식에서 나왔다 라는
것입니다.
툭 때렸을 때 아이고 이게 뭐야! 이게 갑자기 피해야 될 일이 있는가 보다 하고 피하는 것은 바로 속사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의 영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자의 삶입니다.
똑같은 때림이 왜 때려 또 나를 죽음의 위협에서 피하게 해주셨네 감사합니다.
똑같은 때림이 그 순간에 그런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일정한 시간이 되어서야
그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제서야 감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저를 때려주심 감사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이며 이것이 속 사람에 의한 새 사람에 의한 예수님의 영과 함께
하시는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혼적인 자아의 문제를 통해서 이 옛사람의 이 고백들을 통해서 말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마치 옳은 것처럼 보여요 마치 그가 아주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나타나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외형적인 고백들 안에는 이러한 특이한 기질들 고집들 성질머리 삐뚤어진 아주 낚싯바늘처럼 남에게 손상을 주고 아픔과 고통을 동반해 주는 어떤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일을 그르치게 하는 자들 그러나 매우 좋게 보여요 옳게 보여요 그런데 그 옳게 보이는 일들이 실제적으로는 지식의 열매를 맺게 하여서 사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보편적인 삶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그런 미덕의 삶을 살아야지 특별하게 유별난 삶을 사는 것은 그렇게 꼭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상한 자신만의 고집들과 꼬부러진 궤휼된 것들 낚시바늘 같은 습관들
어떤 그런 이상한 기질들 특이한 어떤 성깔머리들 이러한 것은 우리를 새 사람이 되는
길을 감에 있어서 제한적인 것이 되는 장애물이 되고 어려움이 되고 방해물이 된다 라는
것이에요.
이러한 옛 창조안에 속한 옛사람의 품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굉장히 어렵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 특이한 어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착화된 콘크리트처럼 딴딴해진
누구의 말도 결코 듣지 않고 허물어뜨릴 수 없는 그러한 견고한 어떤 기질들은 사실은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어렵게 하는 그러한 산들이 되고 장애물들이 되는 언덕들이 되게 합니다.
그것을 부활의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 노루나 숫사슴이 되게 하시는 그 능력이 되게 하시는 그분의 힘을 입어 이것을 제거시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옳은 것 같으나 영적이지 아니한 자아의 삶 옛사람이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나타내는 옛사람들의 행위들 그 행위들 속에는 말들도 포함돼 있죠, 그 행위들은 옳은 것 같은데 영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옳은 것 같으나 영적이지가 않아요.
옛사람 혼안에 살고 있는 그 자아를 통한 옛사람의 삶은 옳은 것 같아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바로 그 관념 영역 안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옳은 것 같은데 실제는 영적이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적곧 생명의 삶 새 사람 바로 주님의 영의 뜻을 쫓아 함께 움직이는 사람은 틀린 것 같은데 영적곧 생명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옳은 것 같은데 영적이지 아니한 자아를 통해서 표출되어진 옛사람의
삶의 모습들은 세상 사람들 보기에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옳아요 옳은 것 같은 게 아니라 옳아요 그러니까 그 일을 하겠죠 그런데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은 틀린 것 같아요 틀려 보여요 그런데 예수님의
영의 뜻을 쫓아 영적인 생명의 길을 가는 자의 삶인 것이에요 그게 달라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와 생명나무의 열매가 그 차이인 것입니다.
옳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런데 이 영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의 뜻을 쫓아 새 사람이 된 그 삶은 아닌 것 같은데 옳아요.
보세요 혼적인 자아를 통해서 표출된 옛사람의 삶을 사는 자들의 모습은 옳은 것 같은데
영적이지가 않아요 그런데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예수님의 영과 함께 뜻을 쫓아 그 삶을 살고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은 틀린 것 같은데 아닌 것 같은데 옳아요가 아니라 아닌 것 같은데 영적입니다. 옳다 그르다는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 나무 열매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옳다가 아니라 아닌 것 같은데 영적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에 비추어 봤을 때 하나님 보기에 선하다 옳다 의롭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념에 봤을 때 부합된다는 것이 적합하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특이 해질 때 꼬부라진 이 궤휼된 마음을 가질 때 이상한 성깔들 이상한 고집들 툭 치면 왜 때려 라고 반응하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영적이지 못하고 자꾸 옳은 것을 찾게 하는 선과악을 알게하는 지식 나무 열매의 영역 안에 머무르게 해서 그 열매를 따먹고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특이한 이런 성깔들 기질들 고집들 문제들 고착화된 이런 나만이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 속에 깊이 똘똘 뭉쳐진 그러한 것들이 수십 개가 있어요.
수십 마리 작은 여우들 여우가 한 마리가 아닙니다. 한 마리였으면 얼마나 좋아요
한 마리만 때려 잡으면 되죠 그런데 이것이 때로는 10마리 나 같은 경우에는 한 20~30마리 있는 것 같아요. 더 많을지도 모르죠. 예 작은 여우들을 붙잡아라 이걸 죽일 수가 없어요.
붙잡아서 주님의 뜻을 쫓아 사는 삶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붙잡는 일만 파쇄시키는 일만
할수 있습니다. 완전히 제거시키는 일은 온전히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구속함을 이루는
날에 이 문제가 해결 될 테죠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남들보다 유별나고 특별하고자 할 때 높아지고자 할 때 탁월해지고자 할 때 이런 특이함은 우리를 영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적인 삶을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이 특이함이 우리를 십자가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왜? 나를 자꾸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실수한 것이 바로 그러한 면에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관심 두지 않았으면 작은 여우들을 붙잡았으면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을 테죠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이러한 특이한 고착화된 이상한 그런 뭉쳐진 그런 작은 여우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작은 여우들을 통해서 교묘하게 사단이 들어와서 바로 베드로의 그러한 자아 속에 거짓된 가면을 쓰고 이렇게 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자아라는 똘똘 뭉쳐진 자기만의 그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똘똘 뭉쳐진 여리고 난공불락의 성과 같은 것을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그 성
그 자아라는 옛사람이라는 그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사단의 자아가 그 사람의 자아와 하나가 되어서 행위를 하게 하고 말들을 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감정을 갖게 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 특이함에서 이런 특이한 작은 여우들에서 구출해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아 나의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의 눈이 주님만을 관심하며 그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을 통해서 그 자아들로 형성된 그 옛사람에 의해서 고백된 것들이 무너지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 때문에 여러 가지 난관과 어려움과 극복해야 될 장애물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이 자아의 문제에서 구출되어지는 것입니다. 붙잡으라 여러분 붙잡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잡아달라 죽여달라가 아니에요. 죽였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냥 십자가에 늘 이렇게 매달아야 되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붙잡은 그 작은 여우들이 또 설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틈에 줄을 끊고 막 천방지축으로 포도원에 포도나무로 막 다니면서 굴을 파고
올라가서 그냥 나무를 부러뜨리고 그 열매가 나오는 직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이런
과정에서 얼마나 방해하고 얼마나 훼손시키고 얼마나 망가뜨리고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사랑의 온전한 관계를 연인의 사랑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함께 그리스도 십자가 안으로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하게
하기 위해서 16절에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며 나는 그분의 것이라. 그분은 백합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는도다.” 라고 바로 이 술람미 처녀에게 솔로몬 왕이 바로 자신이 술람미 여인에게 속했고 슬람미 여인이 바로 솔로몬 왕에게 속했음을 알게 하지만 실제로 주관적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솔로몬왕과 술람미 처녀 곧
성도들이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의 이 말씀은 백합화들 가운데서 양떼를 먹인다라는 얘기를 통해서
자신이 온전히 그리스도와 성도인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았음을 이 백합화들
가운데서 먹이고 있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신실하게 따르는 자 백합화가 뭐예요?
자신의 생명을 바라보는 자들 자신의 생명의 양식을 먹기를 추구하는 자들을 주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그리스도께서 친히 돌보시는 성도들이 백합화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수하고 신실하게 따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백합화 향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또 꽃이 오래 갑니다 그 생명이 아주 오래 가서 물에 담가놓으면 아마 꽃들 가운데 가장 오래 그 생명이 유지되고 보존되어서 그 싱싱함 그 자체가 가장 많이 이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백합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십자가 나무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나무 아래 있을 때는 객관적인 이런 주님의 사랑의 체험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 높이 끌어당기셔서 자신의 품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십자가와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하나가 되어서 바로 너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이 그거죠. 내가 너에게 속했고 술람미 처녀인 네가 나에게 속했다 라는 것을 알지만 그는 실제적으로 개인적인 어떤 체험 가운데 그 솔로몬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고 있는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고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16절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안에 새 창조로서 이렇게 주님의 이끌림을 당하여서 더 깊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안으로 이끄셔서 구원을 받게 하셔서 자아를 파쇄시키십니다. 이 자아를 파쇄시킴으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 있는 부활을 통하여 거듭나는 그 일을
바로 변화시키는 영 생명 주시는 영에 의하여 생명을 부여받고 분배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 곧 새 창조로서 승천 안에 살도록 우리를 또 한 번 부르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어디서 부르셨죠? 십자가 아래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게 함으로 이끄셨습니다.
사랑을 맛보게 하셨고 그 십자가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더 한층 이끌어서 자신의 품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또 이끄십니다. 그런데 그 이끄셨던 그분께서 내밀한 연인의 사랑을 맛보게 한
그에게 이제는 승천 안에 살도록 다시 부르시는 말씀이 바로 아가서 3장 6절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입니다.
술람미 처녀가 걱정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죠 그 가운데서 이 솔로몬 왕이 참견하는 그런
많은 여자들에게 그렇게 참견하지 말라고 이가 내 픔에 들어와서 나와 온전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바로 승천 안에 살도록 부르심 받은 자다라는 것을 통해서 그들에게
참견하지 말라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로서 온전히 주님의
그 부활하신 40일 후에 승천하신 그 승천을 통하여 이끄신 삶 안에서 삶을 살도록
또 한 번 우리를 계속적으로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새 창조물이 된 아가서 3장 6절 7절 8절 이런 말씀들이죠.
3: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3:6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3:7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3: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3:9 솔로몬왕이 레바논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3:10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3:11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그래서 이 솔로몬 왕의 연인이 된 술람미 처녀가 솔로몬 왕의 실제이신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완전히 연결됨으로 말미암아 새 창조물로서의 그 술람미 처녀인 성도들이 아름다운
사랑의 연인으로 참 변함없고 실족 당하지 않고 잘못되지 아니하는 순수한 연인으로 아름
다움을 나타내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4장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솔로몬 왕이 사랑하는 자인 바로 술람미 처녀 그도 사랑하는 자 여성형이죠. 술람미라는 뜻도 솔로몬의 어원에서 이렇게 나누어진 바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왜 똑같이 사랑하는 자 사랑하는 자일까요.
완전한 평강을 온전히 결합된 사랑을 통한 평강을 나누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Shalom과 같은 어원을 두는, '평화'라는 의미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살렘' 또한 같은 어원이다.≫
≪ 술람미는 솔로몬 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שְׁלֹמֹה)과 술람미 (שׁוּלַמִּית)는 히브리어로 똑같은 단어의 남성형과 여성형 입니다. 즉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존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아람어로 "주님," 또는 존귀하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 존엄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마르(Mar)'에 근거했다고 보았습니다.
현대어로 "귀부인"이란 뜻으로 해석되어 이탈리아어로는 "마돈나(Madonna, 나의 귀부인)"이고, 프랑스어로는 같은 뜻으로 노트르 담(Notre Dame)"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대 언어학에 따르면 마리아의 이름은 세 가지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첫째는 "만족하다. 풍만하다 혹은 뚱뚱하다"는 에집트어 "마라(Mara)"와 관련시켜서,
즉 근동 여성미를 보는 관점에 따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다.
두 번째 해석은 에집트어로 "사랑스럽다. 귀엽다"는 뜻이 있는 "마리(Mari)"와 마리아를
결부시킨 것이다.
세 번째는 마리아를 팔레스티나 원주민들의 말과 결부시킨 해석인데, 1929년 우가랏에서 발견된 한 석판의 "므림(Mrym)"이란 글자의 뜻과 연결된 것이다. 마리아는 동사 RWM에서 나왔고, 자의적인 뜻은 "가장 높다, 존귀하다"이다. 그러므로 성모 마리아는 "존귀하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 "존엄하신 분"이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솔로몬왕이 이름 모를 그 숲속 산골 시골처녀 술람미에게 찾아오시기 위해서
그 동네에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시골 처녀가 사는 그 땅에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골 처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 구애하기 위해서 그 동등된 입장에서 사람의 낮은 인성을 입고 그 아내 될 사람 신부 될 사람 혼인 잔치집에 왕후가 될 사람인 그에게 가서 사랑의 달콤한 맛을 맛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도취하게 해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 속에 들어오게 하신 다음에 또 한 번 부활의 풍성한 것에 대해서 이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아가서 2장 8절 9절을 통해서 가젤 노루와 사슴으로 말미암아 산을 달리고 언덕들을 뛰어넘는 그러한 부활 능력이 예수님께서 깜깜함과 어두움을 통과하는 그런 죽음을 통해서 산을 달리고 언덕들을 뛰어넘는 그런 놀라운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통하여 자신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높이 울퉁불퉁한 기암괴석 속에 감춰져 있고 숨겨져 있는 은밀한 그 십자가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서 내밀하고 더욱더 깊은 사랑의 달콤한
맛으로 적셔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2장12절부터 쭉 보면은 땅에 대한 얘기, 꽃에 대한 얘기, 새들 얘기가 나오고 멧비둘기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멧비둘기는 산비둘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꽃이 나오고, 새들의 노래 그다음에 무화과 나무가 나오고 푸른 무화가 연한 포도가
달린 포도나무 좋은 향기 그리스도의 부활에 넘치는 풍성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10 나의 사랑하는 이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 2:11 보라,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고 사라졌도다. 2:12 땅에는 꽃들이 나타나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이르러 멧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를 내며 연한 포도가 달린 포도나무는 좋은 향기를 풍기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 2:14 오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네 목소리가 달콤하며 네 얼굴이 아름답도다.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들 곧 포도나무를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붙잡으라. 우리의 포도나무에 연한 포도들이 있느니라. 2:16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며 나는 그분의 것이라. 그분은 백합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시는도다. 2:17 나의 사랑하는 이여, 날이 새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까지는 돌이키시며 또 당신은 베데르 산들 위의 노루와도 같고 젊은 사슴과도 같이 되시옵소서.
너희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죠? 주관적인 체험인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주님께서 강하게 우리를 이끄실 때 십자가 안으로 곧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리스도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자는 “자아” 곧 옛사람에게서 해방되고 구출되어져서 이제는 그 속사람인 새 사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뜻을 쫓아 함께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넘치는 풍성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예요. 수많은 식물들 얘기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예 꽃 얘기가 나오고 새들의 노래가 나오고, 산 비둘기 얘기가 나오고, 무화가 나무가 나오고 ,이 포도나무의 향기 이런
것이 이렇게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 수많은 식물들과 산비둘기의 노래 소리 봄의 여러 가지 종류의 향기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생활 곧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아래에
무릎 꿇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사랑의 달콤함을 맛보고 도취되어 있는
우리를 끌어올려서 정신 차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안으로 자신의 품으로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와 하나가 되게 하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삶 십자가와 하나가 되는 삶 그 구원의 삶은 바로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그것을 찾아서 가는 일을 주님께서 도움으로 말미암아 그 일을
이루고 그리고 십자가 안에 들어간 삶을 사는 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되는데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넘치는
풍성함으로 우리를 살게 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아가서 2장 13절에 반복되어지는 이 말씀을 통해서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쳐 물러가니
계속 11절에 얼마나 강조하면 보라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고 사라졌도다
이게 무슨 의미 일까요? 주님과의 그 십자가 안에서 내밀한 은밀한 깊은 사랑은
우리를 안식 가운데 추위를 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겨울은 바로 그런 것을 얘기하죠.
그리고 거기에 또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시련과 고난이 있었습니까?
겨울도 지나가고 비도 그쳤다. 시련도 지나가고 우리의 그 갈망하고자 한 그런 삶의
과정들이 모두 끝났다. 이제는 부활의 때가 오고 있다. 봄의 때가 그 풍성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넘치는 풍성의 때가 오고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꽃 얘기가 나오고 이 노래 소리가 나오고 산비둘기의 소리 익은 무화가 향기 그리스도의
넘치는 풍성을 가리키고 예표하고 있는 이 말씀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을 개인적인 이 주관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부활의
생명 능력을 통하여 그 부활의 생명 능력은 부활 안에서 생명이 내재되어 있고 사랑이
내재되어 있는 생명 부활의 영 우리를 조성하시고 변화시키시는 그 예수님의 영 안에는
이러한 넘치는 풍성한 것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안식 가운데 누림 가운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풍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을 돋구게 되는 것입니다.
힘을 받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이 말씀들을 통해서 바로 이 13절 말씀이 계속 반복되어지고 있죠 예 그분께서는 이 반복되는 2장 10절과13절 말씀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이 원문 성경인 킹 제임스 큰글자 성경을 보면 이렇게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아가서 2장 10절 말씀과 13절 말씀이 이렇게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연인이 옛 사람 옛 자아로 형성되어 고착되어진 그 자아 옛사람을벗어나기 위해서 작은 여우들을 붙잡고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 그 은밀한 사랑 안에서 교제를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번 이렇게 반복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생명의 능력인 여러 부활의 풍성한 것들을 통하여 십자가 안에
들어가는 삶을 통해서 왜 그분이 우리를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는지 왜 더 깊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으로도 족한데 왜 더욱더 이끌어서 높은 차원의 자신의 품 안으로
십자가와 하나가 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은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통하여 부활의
풍성함을 소유받으라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로서 새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40일 만에 승천하시는 일을 통하여 승천 안에
우리를 함께 이끄셔서 살도록 부르신 것이 바로 3장 4장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창조물이 된 우리가 새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영의 뜻을 쫓아 함께 움직이고 함께 움직임을 통하여 함께 사는 삶의 안식을 누리고 있게 하고자 승천 안에 살도록 또 한 번 우리를 강하게 이 끄셔서 이제는 십자가에 의지하지 말고 승천에 의지하도록 우리를 불러 일으켜서 이끄셔서 이렇게 승천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천 안에 살도록 우리를 또 한 번 부르신 것은 영과 혼을 완전히 분별하는
사람만이 이것이 가능하다 라는 얘기입니다. 그말씀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
영과 혼과 몸의 골수 이 성령님의 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요.
여기서도 영과 혼과 육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 평강(平康)의 하나님이 친(親)히 너희로 온전(穩全)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靈)과 혼(魂)과 몸이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 강림(降臨)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保全)되기를 원(願)하노라.”
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을 원문 성경에 가장 가까운 킹 제임스 성경
말씀으로 다시 한번 읽어 보면 내용이 가장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
어떤 성경은 이것을 영혼과 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영과 혼과 몸 세 가지의 조성된
구성체로 영과 혼과 육체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원한다. 예
어떤 성경은 영과 혼을 이렇게 같이 한 묶음으로 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영과 혼은
완전하고도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로서 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 안에는 하나님께서만 통로로 사용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영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우리의 내적 존재인 영인 것입니다. 혼은 정신적인 것들 정신적인 어떤 기능들을 접촉할 수 있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들을 통해서 역사를 합니다. 그래서 차원이 달라요.
이 육체는 오감을 통해서 다섯 가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인간의 오감을 통해서 땅에 속한 물질적인 것들을 이렇게 접촉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과 혼을 분별하는 완전한 분별하는 의식이 없이는 우리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새 사람이 된 우리들은 주의 영의 뜻을 쫓아 함께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승천 안에 살도록 부르심 받는 단계에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영과 혼이 분별하는 옛사람과 새 사람이 완전히 나뉘어져 있는 두 가지 것이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승천은 땅에 속한 분이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을 당하셨던 그분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40일 후에 완전한 이 세상에서의 기간을 채우신 다음에 완전하고도 온전한 하늘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승천이 있는 거예요.
승천은 하늘에 있는 것이죠. 예 그렇습니다. 승천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을 모시고 그분의 뜻을 쫓는 새 사람으로서 살고 있지만 육체는 땅에 아직 발을 딛고 땅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믿는 이들이 거듭난 자들 영접함으로 새로운 출생을 가진 자들은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거듭난 영을 통하여 주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 주신 영에 의하여 우리 거듭난 영은 새 사람의 영이죠. 원래 세상 사람들은 새 사람의 영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있을 수가 없죠. 거듭나는 영은 부활하신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유케
하는 것이 거듭난 영입니다. 새 사람의 영입니다. 산영인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모든 자들은 그런 면에서 죽어 있는 자들이죠.
우리는 산영이 된 자들이에요. 이 산영을 가진 이 거듭난 영은 하늘에 지금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베냐민의 오른편의 아들이 되셔서 우편에 앉아 계신 그분은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이신 것입니다.
그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이신 그 영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 그 세 분 하나님 바로 삼위 일체 되시는 삼일
하나님이 그 육체가 되시는 구주의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거듭난 영이 하늘에
있는 인자로서 지금 우편에 앉아 계신 바로 권위와 존귀함의 위치에 앉아 있는 그
영이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영이 우리의 거듭난 영과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과
세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과 우리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승천은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 마치 뭐라고 얘기를 하면 여러분이 이해하기 좋으실까요?
어떤 생명의 물이 근원이 되는 산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나와 통로를 통해서 어떤 수로의
관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물을 마실 수 있는 식수가 제공되는 과정이 있는 것처럼
어디선가는 그 물의 근원지가 있어서 우리가 지금 물을 마시지만 이 물이 수도관을 통해서 연결되어진 그 물의 근원지인 그것과 이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어 우리의 부엌에서 화장실에서 물을 사용할 수 있듯이 전기 또한 그런 원리로 우리가 집에서 텔레비전도 보고 여러 가지 전기를 통한 모든 일을 할수 있고 여러 유용한 일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는 이 두 영을 통해서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과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연결되어진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과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을 통해서 연결되어진 것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우리의 거듭난 영이 연결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사람으로서 옛사람이 파쇄되고 새 영 산영이 주의 영 안에 있을 때에는 옛사람이 파쇄되고 주님의 영 안에 있을 때는 하늘에 계신 인자로서 우편에 앉아 계신
승천하신 인자 그리스도와 연결되지만 우리가 그 영 안에 산영이 되지 못하고 옛사람에
의하여 오히려 사로잡힌 바 되어서 이러한 자아를 통해서 형성되어진 고착화되어진 자아를 통해서 표출되는 그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바로 영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혼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못했다 라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승천 안에 사는 것은 우리가 영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이신 인자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승천 안에서 사는 삶은 영 안에서
사는 삶 옛사람이 파쇄되고 예수님의 영의 뜻을 따라 함께 움직이면서 사는 사람들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바로 승천하신 하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인자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져서 사는 삶 그런 분이 바로 사도바울 선생님인 것입니다.
원조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 이신 것이죠.
바로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셔서 그분과 함께 하나가 되어
움직이시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배해 주시고
소유케 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주님 안에 계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 인간 안에
들어와서 살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요?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늘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영원하게 기억하고
교제하며 이렇게 말씀을 나누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혼의 옛 사람이 아닌 영의 속 사람 안에서 살기 위해서 구별하고
분별하고 나누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혼 안에서 자아를 통해서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말을 하고 사랑한다 라면 그것은 땅에 있는 것이지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것은 승천 안에 속한 영에 속한 사람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인자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 땅 안에 혼 안에 속한
삶은 첫 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땅에 속한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인 고로 그러한
자들은 아무리 하늘에 속한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삶의 행위를 할지라도, 그런
말들을 할지라도, 그러한 선행을 베풀지라도,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들을 쏟아내는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 나무의 열매 영역 안에서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그릇되고 잘못된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승천 안에서 사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이 거듭난 영이 하늘들 영역 안에 있는 우편에 앉아 계신 승천하신 인자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육체 안에 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적이고 내적 존재인 영 안에 그 생명을 주시는 영에 의해서 거듭난 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거듭난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 하늘에 속해 있는 것이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혼적인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그릇된
삶을 사는 자들을 조심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 안에 속한 자가 되어서 영의 승천 안에 사는 삶을 통하여 바로 거듭난
영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승천하신 인자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져서 산영이 되어서
새 사람의 영으로 사는 사람 새 사람의 영이에요. 옛사람의 혼이 아닙니다.
혼은 옛 사람을 담고 있지만 이 거듭남으로 영접함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그 거듭난 영을 통하여 산영 새 사람의 영을 갖게 돼 있습니다. 새 창조물이 된 것이죠.
새 사람 산영 예수님의 영의 뜻을 쫓아 함께 움직이는 사람은 승천 안에 있는 삶 하늘에
속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땅에 비록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우리 육체 안에 비밀스럽게 내밀한 곳에 존재하고 있는 이 거듭난 영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요?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난 영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라고
에베소서 2장 6절은 이러한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우리들은 지금 이 거듭난 영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결됐기 때문에 두 영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서 승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2장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다 라고 어째서 과거형으로 썼습니까?
거듭난 영 때문에 거듭난 영이 하늘 우편으로 승천하셔서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신 인자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결되어져서 두 영이 거듭난 영과 육체가 되신 구주의 영 곧 인자가
되신 그 영과 구주의 영 예수님의 영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땅에 있지만 바로 우리들을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라는 것을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대속해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 사랑에 도취되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분이 자신의 품으로 높은 곳으로 이끄실 때 이끌림 받아서
그분의 부활의 능력에 힘을 입어서 이끌림당하여서 더 깊은 그리스도의 깊은 십자가의
사랑을 맛본 다음에 승천 안에서의 삶을 살도록 우리가 이 작은 여우들을 계속 잡으면서
부활 안에 있는 새 산영이 된 새 창조로서 새 사람이 된 그 예수님의 영의 뜻을 쫓아 사는 자로서 계속적으로 내 자아를 통해서 형성된 그 옛사람의 불순물들과 옛사람을 통해서
산출되어지는 나의 생각, 나의 방식 나의 천연적인 그런 모든 것들을 바로 붙잡아 묶어
둠으로 말미암아 승천 안에 살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승천 안에서 살아야 모든 행위들이 하늘에 속한 삶의 행위들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했든 간에 그래서 우리가 비록 세상에 앉아 있지만 거듭난 영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는 자가 되었다 라고 위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위치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지만 그곳에 앉아 있을지라도
승천 안에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작은 여우들을 잡는 일을 멈춰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십자가로 부르신 후에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 사랑을 안
술람미 처녀 곧 성도들에게 더욱더 자신의 품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더욱 더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이렇게 잡아 끄신 다음에 더 나아가 그곳에서 깊은 사랑을
체험한 우리에게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새 피조물로서 새 창조의 영역 안에
있는 산영이 된 새 사람으로서 승천 안에서 살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위치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지만 위치적으로 그곳에 우리의 거듭난
영이 그분께서 함께 앉아 있으심으로 말미암아 돕는다 라는 것을 함께 하나로 연결되었다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이는 그런 위치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진 우리가 그분의 영과 우리의 영이 하나가 되어서 거듭난 영과 그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진 이 두 영은 하나가 됐다 라는 면에서 승천안에서 살 수 있는 새 창조물로서 그러한 존재자로 만들
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에베소서 2장 6절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의 교제의 말씀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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