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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1~3/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예수님말씀 나눔방 2023. 6. 12. 05:36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을 보여 나타내는 실제적인 체현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체현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마차의 이 굴러가게 하는 둥근원으로 형성되고 있는 바퀴와 같고 영 하나님은 그 바퀴 안에 여러 수십 개의 살로 구성되어서 함께 하나가 되어 함께 움직이고 함께 행하게 하시고
함께 굴러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마차 자체를 앞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는 자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삼일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어 함께 움직이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는데 우리 또한 그 움직이시는 바퀴의 축과 살이 되므로 그 마차
그 자체를 움직이게 함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가게 하는 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살 때 만이 우리 또한 앞으로 전진하고 나아가고 움직이는 그런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
라는 것을 지난번 교제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의 욕심 탐욕 이런 모든 것들 우리가 그런 것들을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추구하고자 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의 모든 소욕들을 잠시 정지시키고 우리의 모든 활동들을 잠시 멈추고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마차를 움직이게 하게 하기 위해서 바퀴의 축이 되고 또 영 하나님이 살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함께 움직여져서 가고자 하는 그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온전한 기능과 온전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만유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의 인격으로 우리의 활동으로 이렇게 받아들이고 대신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활동을 우리의 대치로 받아들이게 되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그 만유의 주가 가지고 계신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힘이 되어서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런 티끌과 먼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이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 아담의 후손 중에 에노스라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를 처음으로 드렸던 기록이 성경에 나오죠 그 에노스는 먼지와 티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의 뜻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그 어떤 것도 아닌 존재자라는 것을 알고 그분만을 의존함으로 말미암아 그 티끌이 그 먼지가 하나의 다른 변화된 그것으로 변화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바로 그 힘을 얻고자 하나님을 이렇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경외하고 예배드리는 그런 에노스란 자의 삶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 40장 15절에 기록한 말씀처럼 우리는 마치 큰 통에 그 조그마한 물 한 방울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저울에 아주 적은 먼지 하나가 올려져 있는 그런 존재자들입니다.
“보라, 민족들은 물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먼지같이 여겨지느니라.
보라, 그분께서는 매우 작은 것을 드시듯 섬들을 드시나니”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 어떤 것도 아닌 그러한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그러한 마치 바닷가 수많은 모래중에 모래 한알 이라고나 할까요
먼지 하나 물 한 방울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이사야 40장 7절 8절 말씀을 통해서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니 이는 주의 영이 그것 위에 불기 때문이라. 백성은 참으로 풀이로다.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하라.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 어떤 것도 아닌 티끌과 물 한 방울 조그마한 물 한
방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우리들은 그 변치 아니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임마누엘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당하고 관계를 맺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우리의 소유로 우리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들의 대치물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필요를 이사야서 선지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자가 아니라 영원하면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그 영원하신
존재자와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그리스도의 그 인격이 우리의 인격이 되고 그리스도의 그 움직임이
우리의 움직임이 되어서 대치물이 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물 한 방울과 같은 우리라는 존재 저울 위에 올려져 있는 그 세미한 먼지 같은 존재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자들인 우리가 완전히 다른 변화된 자로서 조성이 된다 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깨닫는 것이 주님을 앙망하는 자들의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큰 통 바다 그 지중해 같은 대서양과 같은 큰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물 한 방울 물 같고 그 큰 저울의 적은 먼지 하나 티끌 같은 존재가 우리들이라는 것을 이사서야에서 40장 15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 안에 영원히 계시는 변치 아니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유일한 단 한 분 그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이 되셔서 세상 가운데 성육신하셔서 세상 가운데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주 안에서 영원히 계시고 영원히 거하시고 유일하신 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성육신하셔서 육체가 되셔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임마누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 체현되신 분이십니다.
마른풀과 시들어가는 그 제한적인 꽃과 같은 인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인 우리는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그 영원하신 분 우주 안에 영원히 계시는 분 그분과 관계를 맺고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관계를 맺고 그분과 하나 되는 삶 대치 물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와 함께 대치가 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새로운 출생을 갖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대서양과 같은 바다 가운데서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에 세미한 먼지 같은 존재로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수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의 제한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그 옛 창조 안에 있는 우리 제한적이고 죽을 수밖에 없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바로 영원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시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신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당하게 되면 새 창조 안에
거하게 되어서 그 그리스도가 소유하신 생명 주시는 영에 의하여 새 창조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알아야만 되는 것이 구원의 길로 가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 제한적이고도 시들 수밖에 없는 꽃과 같은 인생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때 우리라는 존재 안에 바로 영원하신 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우리에게 계속 그렇게 생명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우리는 이 영원하신 하나님 이 우주 안에 영원히 계시고 영원히 거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기다리는 삶이란 앙망하는 삶이라고 이사야서40장31절은 얘기하고 있죠 “오직 주를 우러러 바라는 자들은 자기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로다.”
이렇게 독수리 같이 날개 치는 삶을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풀이 시들 수밖에 없으나
힘을 회복하면 그 시드는 것이 멈추고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고 열매 맺는 것이 계속
원을 그리듯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가운데 이 일이 반복되어져서 우리의 제한적이고도
시한적인 인생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주신 영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그러한 존재자들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출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 앙망하는 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어떤 야망들 탐욕들 우리의 소욕들 우리가 이 그 육체의 삶을 위해서 활동하던 모든 것들을 멈추고 다메섹 도상에서 마치 사울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영광의 광채이신 주의 영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소유자로 변화가 된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로 가던 길을 하던 일을 마음 먹었던 일들을 중지시키고 멈추고 바로 그리스도께서 바퀴의 축이 되시고 영 하나님께서 그 바퀴의 축 안에 설치되어 있는 그 수많은 살로 하나로 연결되어져서 마차를 앞으로 이끌게 하여서 하나님의 경륜에 영원한 목적과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세 분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활동하시고 역사하시고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받아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그리스도의 움직임을 우리의 움직임으로 우리의 활동으로 우리가 대치시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셨던 그 생명과 그 힘을 소유받아 바로 신의 아들들로서 적합한 그러한 삶의 소유자들 바꿔진 자들 변화된 자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리스도를 앙망할 때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간 것 같이 새로워지는 놀라운 힘 달려도 피곤치 않고 걸어도 기진하지 아니하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 능력이 바로 예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 안에서 이 일이 이렇게 산출되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그 생명 능력이
우리에게 이렇게 전가되고 적셔진 바 되어서 주님께서 가지셨던 그 하나님의 생명 능력이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공급되어질 수 있는 그 주의 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면 하늘로 솟구치는 그런 삶을 독수리처럼 날개쳐 오르는 삶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삶이 뭡니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물 한 방울과 같은 대서양의 조그마한 물 한 방울과 같은 저울위에 올려져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그 먼지 하나와 같은 우리 존재자들이
놀라운 생명의 변화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한적이고 시한적인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우주 안에 영원히 계시고 영원히 거하시는 그 유일한 생명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부여해 주시는 그 주의 영의 공급을 따라서 생명 주시는 영의 그 놀라운 그 부어 주심에 따라서 우리가 땅에 속한 우리의 삶이 하늘에 속한 자의 놀라운 삶의 변화된 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이 땅에서도 변화를 가질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팔이 되어서 우편에 앉아 계신 그분과 똑같은 삶을 장차 우리가 소유하게 된다 라는 의미에서 놀라운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더 이상 나로서 살지 않고 나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게 하게 하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앙망한다 라는 놀라운 영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
예 이 그리스도를 앙망한다 라는 것 내가 나로서 더 이상 살지 않고 가던 길을 멈추고 나의 생명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의 인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나의 움직임이 아닌 그리스도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화가 되고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의 인격으로 그리스도의 움직임이 나의 움직임으로 됨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 선생님과 같은
놀라운 삶의 변화를 가진 자로서 독수리 날개 같이 하늘로 높이 날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땅에 속한 자가 어떻게 하늘로 솟구치기 위하여 독수리
처럼 날개짓을 하고 날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자는 하늘로 솟구치기 위하여 독수리처럼 날 개로 솟아오르는 삶의 변화를 가지고 온다 라는 것이 이사야서 40장 31절 말씀인 것입니다.
“오직 주를 우러러 바라는 자들은 자기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서 40장 8절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 수 밖에 없는 그런 제한적인 존재자들인
우리가 주의 생명과 주의 힘을 소유 받음으로 말미암아 회복한 상태에서 이제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그 신선한 생명의 능력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땅에
내려오신 땅에 방문하셔서 육체가 되셔서 우리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신 임마누엘
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를 접촉하고 만나고 기다리고 앙망하여서 바꿔치기 해야 됩니다.
대치가 되어야 됩니다. 대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100% 결합이 됨으로 말미암아 연합되는 것이 바로 대치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앙망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가지신 그 모든 것 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생명과 그러한 인격과 그러한 움직임과 그런 인생의 삶의 활동들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모두 전환이 되고 이렇게 대치가 되어야 우리는 그제서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 창조 안에 있는 우리가 바로 둘째 아담으로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창조 안에 속한 자가 될 때 그 영이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씻어지고 변화되어져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열두 사도들과 최초의 초대교회로 구성된 다락방의 120문도 처럼 사도바울 선생님처럼 주님을 위한 종으로서 사역자로서 봉사자로서 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사야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바로 여호와의 종에 대한 그리스도를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서 고레스와 같은 자들 이스라엘과 같은 자 선민이스라엘 그리고 하나님의 대언자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로 그들이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바로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선민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그러한
열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뽑으셔서 임명하셔서 주님의 징벌의 몽둥이로 이렇게 도구로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일으켜진 자가 고레스인 것입니다.
그가 열국을 정복하며 왕들을 치리하고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그들을 파멸시킴으로 말미암아 선민 이스라엘은 보호함을 받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과 경륜의 이상을 단절시키고자 하는 그 강대국은 고레스라는 왕에 의해서 내쳐짐을 당하게 되는 일들은 마치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그 어둠의 세력들을 그러한 방법으로 파멸시킨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위로의 말씀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앙망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이 된다 라면 그분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왕국을 도모하는 일을 관심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
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뜻을 받들어 사는 자들이 결코 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정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 수밖에 없는 그런 유한한 존재인 이 옛 창조 영역
안에 속한 우리들이 그 불쌍한 존재자로 낙인 찍혀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그 일로 말미암아 그런 운명의 정해진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존재자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임마누엘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주셔서 그 길이 바꿔질 수 있는 완전한 다른 영역 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구세주 구원자 바로 구속주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신 그분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이사야서 말씀이라든지 또 성경에 드러나는 모습을 봤을때 드러나지 아니하는
그러한 어떤 외형적인 용모를 가지고 계신 분임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42장 1~3 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2:1 내가 떠받쳐 주는 나의 종, 내 혼이 기뻐하는 자 곧 나의 선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었은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리라.
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것을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고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공의를 베풀어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
자! 이제 그분의 그 여호와의 종으로 나타나셔서 사역하실 수 있는 그 임마누엘 그리스도의삶에 생애의 모습 인간적인 생활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서:42:3 절 말씀과 같이 그는 외치지 아니하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것을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하는 이런 갈대 얘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한다는 얘기 외치지도 들리게도 아니한다는 얘기를 바로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 마태복음 12장 19절에서도 똑같이 인용 하고 있는데요.
“그는 다투지 아니하며 외치지 아니하리니 아무도 거리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12장17절에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평강의 왕이시고 참다운 왕입니다.
옛 창조 안에 속하여서 그 유한적이고도 제한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자들인
우리 인생들을 참 왕이 오셔서 자신에게 속한 자들 새 창조 영역 안에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달라진 완전히 변화된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을 살게 할 수 있도록 그러한 그 과정을 하나의 예로 보여주기 위하여 안식일 날에 병자를 고치는 이러한 과정 중에 바로 이 마태복음 12장 19절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인용을 하고 계신데요.
이 이야기는 땅 위에서 그분이 30년과 3년 반 동안의 공적인 생애를 공적인 활동을
하셔서 도합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특별히 30년 이후에 그 삶은 우리에게
크나큰 많은 참 놀라운 영적인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보십시오 하나님은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신성 안에서 조금도 모자람도 부족함도 결여됨도 미비함도 없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뭐 더 보탤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분의 인성은 증명이 되지 않았어요. 완전한 인성 온전한 인성 다시 말하자면
완전한 인간 온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것을 완전한 인간이심을 온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인성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인간이셨고 그리고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인성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것을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증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신성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하고 온전하셨지만 그분의 인성은 무언과 통과를 하셔야
됩니다. 무언가 완전하고 온전하다는 것은 이 세상과 우주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까지도우리에게까지도 그것을 보여주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 땅 위에서의 사역을 통해서 여러분 안식일 날에 병자를 고치는
가운데 지금 안식일 날에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회복을 시켜주십니다. 여러분 왜 안식일날 이런 일들을 하셨죠?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계명도 그분에 의하여 창시하신 그 주체가 주인이 법을 만드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안식일날 병자를 고친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지
아니하며 라는 마태복 12장 19절의 말씀을 이사야서 42장 2절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 하십니다. 주님은 특별히 온전하고도 완전하신 신성과는 달리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그 인성을 지니시고 인성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 말씀을 하였던 것입니다.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신 사람이 되신 바로 그 예수님은 다른 자들과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툼이나 분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뭐예요. 왜 사람들이 왜 다투게 되고 왜 분쟁을 하게 될까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견해들과 다른 것이 나타날 때
상충되어질 때 부딪힐 때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 하신 그리스도 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이 인정받게 되게 하기 위해서 선전하려고 하지 않으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자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상충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바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본성 인성을 취하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자아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는 강력한 주장을 하셨지만
자기 자신의 주장이나 자기 자신의 어떤 영광을 구하는 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 그
일을 위해서는 사람들과 상충되거나 부딪히거나 분쟁하거나 다투지 않으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뭡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그분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은 하였을지라도 자기 자신 여러분 우리들은 우리라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어지면 마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같은 그러한 어떤 마음이 들므로
말미암아 놀라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그것이 큰 문제 그것이 아가서에 나오는 작은 여우들입니다.
바로 나 자신 그게 없어지면 나라는 특이한 기질들 이상한 기질들 나를 형성하고 나를
구성하고 그 수십 년간 배워온 학문과 살아온 환경들과 또는 보고 듣고 경험하여던 것들로 인하여 고착되어진 그런 것들을 버리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버리게 되면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이 분쟁으로 다툼으로 상충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금이 가고 깨어지기도 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이름이나 자기 자신의 명성 여러분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그 취 하신 인간의 본성인 인성 속에 고착되어지고 형성되어지고 만들어진 구성되어지고 조성되어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오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시고 하나님만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나타내셨다 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감추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나타내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라는 것입니다. 예 우리가 그분은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였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땅 위에 33년 반 동안에 이
인간적인 생활 인생의 생애를 살고 계셨을 때 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결코 자기 자신을 절대 드러내고자 자기 자신의 이름이 드높아 지고자 나타내고자 위대하고자 전혀 의도적으로 인위적으로 살지 않으셨다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감추기 위하여 그것을 이렇게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그만큼 높게 드러나면 확연히 드러나면 그 안에 계신
육체 안에 감춰져 계신 하나님 아버지 그 세 분 하나님의 그 활동들이 그 생명들이 그분의 인격들이 그분의 움직임들이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감추시고 아주 적은
모습으로 나타내시고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세 분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영 하나님이 세 분 하나님 삼일 하나님의 그 생명과 그 인격들과 그리고 그분들께서 이렇게
살아계신 그분들의 움직임과 활동만을 이렇게 주시하면서 사셨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드러내고 싶으신 마음도 없으셨을 테고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서 위대하게 해서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할 그런 마음의 조그마한 어떤 한 점의 의도도
없으셨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을 살았다 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본받고 그 삶의 길을 뒤따라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작게 두시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크게 드러내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버지 나라의 이름과 아버지 나라의 그 영광과 아버지의 의와 거룩한 빛과 사랑
그것만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자신은 작게 두시고 바로 그 안에 계신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크게 두심으로 말미암아 그 외형적인 삶의 생활들을 통해서 그 모습을 볼때
은연 중에 영적 통찰력이 있는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하는 행적이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알고 그분을 쫓아가는 삶을 살게 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이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께서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그분의 음성을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씀이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사야서 42장 2절 그는 외치지 아니하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것을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였다는 얘기는 그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로 우리가 받아 들일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자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육체의 형체를 가지고 오신 똑같은 사람이십니다.
그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는 예수님의 자아가 있어요.
그런데 그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남들에게 선전함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역사하고
활동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과 인격들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고 선전함으로 말미암아 인정받게 될 때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활동들을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 영 하나님 아들 하나님의 그 생명과 그 인격들과 그런 움직임들을 드러낼 수가
없고 감춰지기 때문에 그 일을 제어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삶이 얼마나 놀라운 삶입니까? 자기 자신은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작게 하시고 없이 하시고 속에 계신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경륜의 이상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삼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신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보십시요.
얼마나 대단하십니까?
그래서 예수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분 자신은 작게 두시고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두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은
사라지게 하시고 그 예수님의 활동들과 삶의 모습들 그 생애들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애쓰신 그분의 그런 이 땅 위에서의 사역의 모습이 그는 외치지 아니 하며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아니하고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였다.
예 인정받으려 하지 아니하는 삶 그러나 지금 세상에 많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믿는
그들의 삶은 어떨까요?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마치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을
쌓고 구축하고 건축하고 조성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이름을 내 보이고자 TV, 라디오,
또는 요즘 유튜브 이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취하고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품성이 그렇게 겸손하시고
겸비하시고 감춰진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드러내는 삶은 전혀 없으셨어요.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일이 오히려 그
예수님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오해가 되어서 마치 예수님 자신을 선전하려고 하고 드러내려고 하고 위대한 자임을 이렇게 표현하려는 그분의 잘못된 눈으로 보는 그들에 의해서
잘못 판단을 받은 것뿐이지 실제 예수님은 자신은 철저히 감추시고 사셨고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곧 그분의 생명과 그분의 인격들과 그분의 움직임들만을 위해서 사신 분이
바로 이사야서 42장2절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19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사야 42장 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공의를 베풀어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 라는 이 말씀이 참으로 이게 이게
놀라운 얘기인데요. 예수님께서 생애를 사시면서 특별히 3년 반 동안의 공적인 공생애의 삶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서 만나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분 자신은 그분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자 하거나 알리려 하거나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주님 그 안에 계시는 그 하나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사셨다는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주님의 일에 앞장서서 사는 모든 사역자들 봉사자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정말
이것은 하나의 본이 되어서 철저히 그의 삶의 길을 따르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삶의 품성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와 같은 품성을 소유하고 그러한 품성을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살기를 아주 원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 말씀을 그냥 읽을 때 왜 이런 말씀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가라는
것을 잘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한 갈대와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라는 이
얘기를 선지자 이사야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데요.
이 상한 갈대 얘기를 왜 하셨냐면요 제가 한 40년전에 시골에서 살았는데요
우리 동네 마을 어귀에 시냇가가 있었는데 그 시냇가 주위에는 이 버드나무가 많았습니다.
그 수양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대인들도 그때 당시에 2천년 당시의 얘기인데 지금 이 이사야 선지자의 상한 갈 대
얘기는 지금부터 2700년 전 얘기고 주님께서 오시기 전 700년 전 사건입니다.
그때 당시는 지금처럼 이런 여러 가지 다양한 악기가 있었겠습니까?
예 그때 당시에 길을 가던 또는 어떤 그러한 놀이삼아 할 장난감들이 풍성하지 않았던
그런 옛날 시대였기 때문에 길을 가던 중에 무료하거나 심심하면 바로 갈대를 꺾어가지고 피리를 만들어서 입에 불어서 소리를 내면서 그 무료함을 달래고자 했던 그런 일에 이 갈대가 쓰였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피리를 만들어야 될 그 갈대가 상하거나 구멍이 났거나 꺾어진 뭔가 흠이 있고 점이 있게 되면 그 갈대를 자기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는 그런 뜻에서 꺾어
버립니다. 그리고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또 크게 자란 갈대를 보고 자기와
똑같이 그 갈대를 피리로 만들기 위해서 찾아왔다가 헛수고 할까 봐 그런 의미에서
꺾어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종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의 품성 그 인성의 아주 거룩하고 또 영화로운 품성을 이 심지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사람들은 피리를 만들고자 했을 때 피리로서 그 용도에 적합한 것이 아닌 부적합한 것임을 알 때 실망하여서 꺾어버리고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심지는 “마”로 실을 만들어서 꼬아서 기름과 함께 연결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불을 밝히게 되는데
그런데 이 기름이 떨어진 상태에서 혹 제때 기름이 공급받아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
심지가 타버리게 되면 그으름이 나오죠 시커먼 연기와 함께 등잔의 불을 환히 밝게 하는
것이 심지인데 심지가 기름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심지가 굳어져서 태워져서 검은
연기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가 이 검은 연기를 내게 되면 눈이 매워지기 때문에 심지를 보통 사람들이 꺼버리죠
당연히 꺼버립니다. 왜냐하면 코가 메케해지고 눈도 따끔거리고 아주 사람을 괴롭게 하죠
그런데 주님께는 왜 이 상한 갈대 피리로 만들어서 피리로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의 속한 자들은 주님의 소리를 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갈대로 만들어진 피리가
제 소리를 내야 그것이 용도가 적합함으로 말미암아 활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갈대를 잘라내어서 피리를 만듦으로 말미암아 음악 소리를 내야 되는데
음악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한 갈대 여러분 주님의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자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에 속한 백성들 가운데 주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사람들 여러분 그 심지는 등불의 기름에 의해서 빛을 비추어서 그 용도가 활용되어져야 됩니다.
횟불이라면 그 주위를 환하게 해야 되고 등불이 라면 그 집 안에 속해 있는 그 사물들을
볼 수 있는 빛을 비칠 수 있게 해야만 그 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인데 주님에 연관된 사람들 주님과 관계된 사람 주님에 속한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인간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연기나는 심지와 같이 빛을 비취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얘기는 이 깊은 의미가 있는데요. 이사야서 42장3절 말씀을 하고 있는데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공의를 베풀어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한 갈대를 왜 꺾지 않을까요?
더 이상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 상한 갈대가 한번 상해진 것이 회복이 되나요?
복원이 되어서 정상적인 갈대로 바뀌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심지가 기름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심지가 굳게 되고 좀 더 원활하게 기름에 적셔짐을 당하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심지로서는 더 이상 심지로서의 빛을 낼수 없고 오히려 검은 연기로 인하여 코를 상하게 하고 눈을 해롭게 하는 그 심지를 왜 끄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한 품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죠?
인간적인 본성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신 그분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 거리에서 소리를
발하지 않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인정받고자
하는 드러내고자 하는 일을 절대 감추시고 안 하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만을 위해서 이루고자 하였던 마음이 절실하였던 그래서 여호와의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인 것입니다.
예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종이십니다. 왜 종이십니까?
그러한 마음 가짐 그런 품성 그런 인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아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한다고 해서 그것이 제 용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불소시기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아니 검은 연기가 나와서 코가 맵고 눈만 아프게 하는 그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오히려 꺼뜨려버리고 상한 갈대 또한 꺽어 버리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불필요하고 헛된 수고를
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꺾지 아니하시고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는 말을 통해서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더 할 나위 없이 완전하고 온전하여서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떤 인성의 소유자냐?
왜 그분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수 있는 죄가 없는 분이심을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우리에게 보여줄 수가 있느냐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하는 마음 이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은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긍휼은요 좁은 의미에서 주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분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라는 얘기는
바로 인성을 취하시고 인성을 가지시고 오신 임마누엘 그리스도는 사람 가운데 육체가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신 그분은 긍휼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이 긍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겠죠.
하나님의 긍휼은 그 여호와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분의 긍휼로 충만하고
정말 풍성하게 가득 차 있다라는 것입니다.여러분 요즘에 신문지상에 보면 그냥 아무 죄도 연고도 없는 사람을 뒤에서 흉기로 찌르고 아무 관계도 없는 비싼 차들을 막 돌로 던져서 깨뜨려 버리고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임에도 아무런 이유 없이 해를 가하고
상함을 주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하게 되는 이런 일이 지금 오늘날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그런데 긍휼이 많으신 동정심과 불쌍함을 가지신 그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때릴 수 있을까요? 지나가는 개가 있을 때 긍휼이 많으신 이분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 가지고 먹으려고
했던 음식을 꺼내서 그 배고파하고 기진한 개에게 또는 사람들에게 아마 그 양식을 제공해 주어서 원기를 회복해 줄 뿐만 아니라 물가에 가서 물도 먹이고 그거를 보살피기 위해서
사관에 가서 또 어떤 사람에게 가서 돈을 주면서 이 강도 만난 사람인 이사람을 좀 돌봐주십시오 하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긍휼이 많으신 품성을 강도를 만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우리가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예 그분은 동정심과 긍휼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적합한 자가 되어서 인류를 구원하는 옛사람에 속한 옛 창조 안에 있었던 자들을 새 창조 안에 긍휼과 그 불쌍함과 동정심 전체가 모여 있는 그 사랑을 가지고 인류를 대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구세주가 된 것이지 그분이 그냥 구세주가 구원의 주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심심풀이 무료한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갈대를 이렇게 꺾어서 갈대를 깎아서 종종 피리를 만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를 꺽어서 피리를 만들면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그때 당시에 사람들은 그 상한 갈대를 자기 마음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그 쓸모가 없는 더 이상 유용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꺾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상한갈대를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또 눈여겨보게 되면 또 자기와 같은
그런 우를 범할까봐 헛걸음치게 할까 봐 꺾어버리기도 한 것이죠.
그리고 또한 불을 켜기 위해 "마"를 가지고 심지를 만들어서 그 등잔에 감람나무 기름을
이렇게 적셔지게 한 다음에 밝히 빛을 내게 하기 위해서 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져서 심지가 타게 되면 그을음이 나고 연기가 나와서 눈과 코를 이렇게 해를 주고 상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당연히 심지 왜냐하면 그냥 빛의 모양만 가진 채 그을음만 나기때문에 자기 자신의 눈과 코를 해롭게 하고 상하게 하는 그것들 때문에 고통스럽고 곤욕스럽기 때문에 꺼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는 그러한 영적인 의미는 여러분 주님 안에 속해 있는
자들 중에서 이렇게 제 소리를 내지 못한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해서 창조되어진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리를 내야 되는데 하나님의 소리 곧 음악 소리를 낼 수가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자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쓸모없는 자기 역할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자들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들이 되는데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소리를 내지 않는 자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빛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선민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이렇게 소리를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빛을 비춰야 됩니다. 세상에 이방에 빛을 비춰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해야 됩니다. 드러내야 됩니다. 그런데 빚을 낼 수 없는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이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고 빛을 낼 수 없는 가까스로 타는 그 심지 그 검은 그을음만 나는 그 심지를 끈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임마누엘 되신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긍휼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아니하였다면 모든 상한 갈대는 다 꺾임을 당했을 것이고 모든 빛을 낼 수 없는 연기 나는 심지는 다 꺼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로서 종결이 되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주님께서 이러한 동정심과 불쌍함을 지닌 그 긍휼함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들을 끄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우리들을 꺾지 않으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살려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상한갈대나 꺼져가는 심지나
다시 회복이 되지 않는데 제 기능을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렇수 없는 것이 옛 창조 안에 속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옛 창조 안에 속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그분의 형상과 그분의 모양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의 형상과 그분의 모양을 따라 그러니까 우리 인간만은 세상에 만물들의 생명이 있는 생명체 식물들과 달리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하나님의 종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류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세상 가운데 있는 만물들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땅을 만들어서 식물들 곡물들 소출들을 나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적을
이루게 한 그 일념 때문에 그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일 때문에
땅에 사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땅을 만드시고 하늘을 펼쳐주시고 우주를 하늘을 창조
하셨던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사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어진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호흡을 주셨습니다. 그 호흡은 인류 모두에게 주셨지만 땅위에 사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임을 아시고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땅 위에 사는 모든 자들에게 구별됨이 없이 구분됨이 없이 모두 생명의 호흡을 주셔서 살게 하셨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호흡을 주신 것처럼 이 옛 창조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호흡 바람 영이 바람이죠? 호흡이죠?
여러분 초대교회의 다락방에서 역사하셨던 그 영이 호흡과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땅에 살고 있는 주님과 관계된 이 옛 창조 안에 있던 자들에게는 바람 호흡
이 바람, 이 호흡, 물과 공기 양식들을 주셔서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셨지만 그분
안에 속한 자들이 옛 창조 안에 속해 있었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그분에 의하여 부활의 영을 통하여 이렇게 거듭난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삼기 위해서 또 하나의 바람 호흡을 불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생명 주시는 영 바람을 호흡을 이 땅에 사는 모든 옛 창조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호흡을 주신 것처럼 바로 하나님과 관련돼서 택한 자들에게 호흡 바람을 주어서 생명 주신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자신에 속한 자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약속은 지키려고 서로 간에 두 편 사이에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협정을 맺는 것이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이쪽과 저쪽에 협정되어진 이 계약들이 이쪽과 저쪽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모두가 사인을 해서 서명한 것이 바로 계약된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약을 통해서 언약을 맺기를 원하셨는데 그 계약을 통해서 언약을
맡기를 원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협정되어진 그 서명한 계약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옛 언약의 말씀 신약 성경을 새 언약의 말씀이라고 그렇게 우리가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가 바로 서명한 하나님의
계약인데 바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인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협정을 맺기 위해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셔서 사인을 하게 했는데 서명을 하게 해서 계약을 맺은
것이 언약인데 신약 성경은 새로운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언약이 십자가에 못 박혀 그분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이 유언이 돼버렸습니다. 여러분 살았을때 녹음기로 녹음을 해 두면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것이 유언이 되는 것입니다.. 유언은 절대 변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계약이 그리스를 통해서 언약이 되고 언약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성약 절대 누구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결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 약속이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런 죽음의 약속 피의 약속 성약이 된 것입니다. 예 완전히 피로 서명된 협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나타나진 서명한 그 싸인이 그리스도라는
육체를 통해서 오신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것인 계약된 언약이라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피를 통해서 기록되고 서명된 그 약속은
바로 유언의 말씀과 같은 특별한 결코 변할 수 없고 누구도 바꿔놓을 수 없는 성약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새 언약의 말씀으로 전했지만 죽으시고
난 뒤에 그분이 이루신 일은 피로 서명된 협정인 성약인 것입니다.
거룩한 피로 맺어진 언약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세우신 피를 통해서
서명된 참 성약은 언약 중에서도 가장 귀한 성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만들어진 협정인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언약이 성약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면 이 언약은 성약 유언의 말이 될 수가 없어요. 죽어야만 유언의 말이 됩니다. 유언이 되는 것은 죽어야 됩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이 더욱더 다져지고 고착화되고 콘트리트 처럼 영원히 그 무엇도 파기시킬 수
없는 하나님도 폐기할 수 없어요. 하나님도 폐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세우신 언약이 성약이 된 이것입니다.
그럼 그 부활은 뭐냐? 부활을 통해서 이 그리스도에 결코 하나님도 바꿔 놓을 수 없는
하나님도 결코 변개할 수 없는 이 성약을 친히 집행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부활 안에서
이루신 생명 주시는 영에 의해서 만들어진 취해진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 안에서는 이 성약이 친히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생명 주신 영이 우리의
영 안에 들어와서 이 일을 집행하고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준 것이에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는 이 계약이 언약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한 그
계약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명한 언약이 되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결코 바꿀 수 없는
하나님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성약이 된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십니다.
성약이 돼서 결코 하나님도 바꿔놓을 수 없는 그런 고귀한 약속이 되면 또 뭐해요?
우리에게 친히 분배가 되어서 나눠줘서 공급받아져서 우리 안에서 친히 집행되고
그 약속이 지켜지고 그 약속이 우리 것이 되고 우리가 그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말씀들이 우리의 것이 되어서 우리 속에 받아들여서 그 요소들이 우리의 안에 들어
옴으로 말미암은 우리를 강화시키지 않으면 그 성약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성약이 된 그 언약 그 자체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들은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언약을 갖게 됩니다. 그 언약이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의 그 서명을 통하여 그 언약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유언의 말이 성약이 되고 그 성약 그 자체가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으면 우리가 결코 변화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계약이 되실 뿐 아니라 언약이 되어 주시고 언약이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 피로 친히 서명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해서
유언의 약속인 성약을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 부활을 통하여 성약이 되셔서 그 그리스도 안에 모든 약속의 모든
말씀이 다 내재되어 있고 다 포함되어 있고 다 그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만유에 실제하는 것입니다.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의 말씀 하늘들 영역 안에 있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적인
축복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피로 서명한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전달시켜준 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 부활~ 부활~ 부활은 이런 놀라운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로부터 시작한 이 그리스도의 이 언약들이 계약에서 벗어나서 언약이
되고 또 죽음을 통하여 거룩한 피로 맺어진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정말 확고한 약속
성약이 되고 그 성약이 부활을 통하여 실제 우리에게 내재되어서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만유의 실제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적셔지게 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우리의 힘이 되신다는 그 약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주님의 약속은 하늘 영역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영적인 축복들 가운데
다른 거 다 제합시다 그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과 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힘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그게 본성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예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본성 생명과 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약을 통해서 구해주신 가장 큰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요 그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힘이신 거죠 그래서 이사야:40:31 오직 주를 우러러 바라는 자들은 자기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로다. 라는 말씀을 하신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확정되어진 공적인 피로 서명하고 피로 싸인한 그 협정의 약속을 우리에게 성취하셔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그 죽음을 통하여 피를 통하여 싸인 하고 서명한 그 성약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그 힘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가는 삶 달려도 피곤치 않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는 그런 변화된
삶을 허락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약을 맡는 바로 중간 다리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협정 계약을 맡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 그분이 필요한 겁니다. 그분이 없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그 동떨어진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서로 계약을 맺을 수가 없어요. 그 계약은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는 인간 편에서 그래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니시고 사람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간 이 두 편 사이에 이 양쪽의 모든 것을 취하시고 소유하심으로 말미암아 흡족하게 하나님 보기에도 만족하고 인간 보기에도 흡족할 정도로의 계약서인 이 서명한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성으로 오셔서 품성을 가지시고 사신 생애인 것입니다.
예 그래서 상한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까? 왜 가까스로 타는 심지를 끄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아무 필요도 없고 아무런 유용한 가치도 없는데 이것 때문에 계약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그 피로 서명한 그 계약을 통해서 우리 안에 우리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시고 영원한 힘이 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면 상한 갈대가 꺼져가는 심지가 옛 창조 안에 속해 있던 그것들이 새 창조 안에 협정을 맺어서 우리를 성약되게 하신 그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통해서 성약이 되게 하시고 그 부활을 통하여 그 성약이 우리 것이 되게 하신 집행하고
우리 속에 넣어주셔서 침투시켜주셔서 부어주셔서 적셔주셔서 친히 신성의 요소가 우리의 것이 인성의 요소가 우리 것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땅에 속한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자로 바꿔치기가 됨으로 대치가 됨으로 말미암아 상한 갈 대가 제 소리를 발휘하고 꺼져가는 심지가 제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일 때문에 그 가치 때문에 잠시 후에 700년 후에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이 700년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알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가까스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성약 때문에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여러분 이사야서 42장 2절 말씀 3절 말씀을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로서 꺾여짐 받아야 되고 가까스로 타는 이 검은 연기만을 그으름 만을
내는 심지인 우리는 꺼져짐을 당해야 되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약이 되시기 위하여 그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그 단절되어진 것을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계약을 맺으시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협정을 맺으시기 위하여 생애를 사시고 또 이 서명한 그 계약서를 피로 그 언약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그 약속을 언약이라는 것을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죽음을 통하여 피를 통하여 피로 서명함으로 말미암아 유언의 말 성약이 되게 하고 성약이 된 것을 바로 십자가의 부활의 영이신 그분에 의하여 우리 속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아도 이제는 옛 창조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이 새 창조 안에 있는 삶의 소유자가 되어서 완전히 변화된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교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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