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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4~18/ 창세전에 하나님께 선택된자들인 흙을 주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치료하심말씀 나눔방 2024. 3. 24. 19:25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이어서 마가복음 4장 3절과 26절을 토대로 하여 여러분들과 교제의 말씀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씨뿌리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2천년전에 3년 반 동안의 이 땅에 봉사 사역을 하실 때
어떻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 복음을 전파하신 그 중심적인 사상과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을 우리는
이 마가복음을 통해서 인식하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면에서 교제를 나눕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1장부터 16장까지의 3년 반 동안의 봉사 사역을 통한 주님의 사역의 배경을 보면 이 마가복음 1장 9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 오셔서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세상의 가장 중심인 유대 나라에서도 특별히 그 갈릴리라는 지역에서 주님께서 그 옛 경륜에 속한 옛것들인
이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의 중심인 유대 지역은 헬라 문화가 들어오고 많은 외부의 공격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여러 문화들이
섞어진 아주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문화가 고착되어진 그런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옛 경륜 안에 있는 옛 것들인 모든 어떤 유대 종교와 그리고 유대 문화에 속한 것들을 완전히 끝내시기
위하여 마가복음 1장 9절 말씀을 통해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셔서 요단강에서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종결시키시고 끝내셨다 라는 것을 확증해 주기 위해서 마가복음 서두에 이 말씀을 다루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그 자신이 3년 반 동안의 봉사 사역을 통해서 바로 주님 자신이신 왕국의 씨, 하늘의 유전자이신
그 생명의 씨이신 성육신 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 자신을 바로 창세전에 이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던
바로 선택받은 자들, 하나님에 의하여 택함 받은 자들인 믿는 자들 안으로 주님 자신이신 생명의 씨를 그들 안으로 뿌리신
것이 바로 마가복음 4장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늘의 유전자인 생명의 씨이신 주님자신이 믿는 자들 안으로 뿌림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이 씨가 자라고 성장하고
변화와 변형을 가져서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인 왕국으로 발전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왕국 가운데 처음 부분이 합당한 오늘날의 교회 생활이고, 이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천년 왕국에서 이어지는 삶을 갖게 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바로 이 천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복음을 통하여 바로 그 복음 자체이신 주님 자신이신 성육신 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천부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복음을 선포하시는 일인
하나님의 왕국을 조성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역의 모습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 안에 넣어진
자들인 바로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족하게 되고 누림을 소유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만족과 누림을 위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될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주님께서는 마가복음의 봉사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던 오늘날의 믿는 자들 안으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안으로 생명의 씨인
주님 자신을 넣어 주입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으로 발전하기 위한 이 생명의 씨이신 주님 자신 왕국의 씨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으로 뿌려진 그러한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같은 산출자가 나오게 되는데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서 갈망하고 있는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땅으로 나타나고 있는 곧 흙인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셔서 창조하셨다 라는 우리는 바로 이 생명의 씨가 우리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는 우리 안에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조성되어져서 성장되어지고 변화되고 변형되어져서 새 사람으로 산출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씨가 뿌려진 흙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하게 묵상을 통하여 상고하여서 이해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로 성육신 되신 그리스도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으로 자라게 하는 우리의 마음으로 상징되고 있는 흙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자세하게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창세전에 어떤 면에서는 영원전에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입니다.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혹 4절에 「사랑 안에서」를 빼고 5절에 「사랑으로 예정하사」할 수 있음〕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넣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전에 선택되어진 우리를
부르시고 찾기 위해서 마가복음 1장 16, 17, 18절에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
그물을 깁고 있는 그들을 부르시고, 먼저는 그물을 던지고 있는 베드로와 베드로 형제 안드레를 부르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의 유전자의 생명의 씨이신 주님 자신의 그 씨가 뿌려지는 대상인 그 흙은 그렇게 좋지가 못했습니다.
온전치 못했고 건전치 못했고 건강치 못했고 오히려 첫 사람 아담에 의하여 실족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어서
육체가 훼손되어지는 육체를 점령하고 있는 사단으로 인하여 사람이 타락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혼이 손상이 되고
심지어는 영까지 점령당하게 되고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그런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 주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자라게 하는 바로 천국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이 사람의 마음인 흙이
그렇게 별로 좋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으로 인하여 그들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처럼 아주 그냥 높은 열병에 걸린 자의 모습처럼
되었고, 오염되고 부정한 그러한 병든 자의 모습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지가 멀쩡하지만 움직일 수 없고 걸어다닐 수 없는
중풍병자와 같은 모습이었고, 한쪽 손이 오그라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해서 그 손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그러한
건강치 못한 병들고 온전치 못한 자들의 모습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패하고 오염되고 부정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문둥병자의 모습과 같이 됨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쓸모없는 자들이 되었고, 심지어는 개개인의 그 흙으로 상징되어진 이 베드로와 같은 자의 모습이 귀가 막혀져서
듣지 못하고 입이 어눌하여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눈이 감긴 소경이 되어서 영적으로 마치 죽어 있는 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바로 이와 같은 병든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가 12 제자를 대표하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가복음 1장 16절 말씀을 통해서 최초로 주 예수님에 의하여 부름 받아서 하나님의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던 자가 바로 베드로 곧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 모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창세전에 넣어졌던 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다를 거니시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신의 주머니 안에 넣어진 이 베드로를 찾아 그에게
생명의 씨를 넣어주어서 자신과 같은 자로 재산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역을 하신 것이 마가복음 1장 16절과
17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대표자, 모든 믿는 자들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영원 전에 선택되어진 이 베드로는
온전치 못하고 좀 쇠하고 낡고 병들고 건강치 못한 그러한 영적으로 죽어 있는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 곧 믿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늘의 유전자를 지닌 생명의 씨가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라고 성장하고 변화되고 변형되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소산물로서 좋은 열매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그러한
경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우리라는 그 존재 안에 살아계시게 하기 위한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주님을 우리 안에
소유하기 위해서 자라야 할 성장하여야 할 흙으로 운명 지어져서 창조되어진 자들이 바로 이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래서 이 흙인 베드로는 우리의 대표자이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 베드로라는 흙은 그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어서 병들고 오염되고
부패가 되고, 심지어는 손과 발과 입과 눈과 머리와 코가 멀쩡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들을
발휘 할 수 없는 중풍병자와 같은 그러한 병자의 모습이었고, 심지어는 한쪽 손이 오그라져서 움직일 수 없는 손은 있는데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쓸모없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베드로와 같은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 선생님에 의하여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이 베드로라는 이 흙은 타락하여 병들고 부패하고 건강치 못하고
심지어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심지어 듣지도 못하고 심지어 눈 먼 소경이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또 귀신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서 점령당하여 잡혀 있는 자의 모습이 베드로란 이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 13명의 사람 가운데 열두해를 혈루병 걸린 여인과 12살 먹은 소녀의 이야기는 한 사람으로 병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13명의 사람을 통한 12가지의 사례를 통하여 이 베드로랑 이렇게 나쁘고 정말 도무지 소생시킬 수 없는 가능성이
없는 그런 영적 상태가 아주 최악의 상태 가운데 있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고르시고 자신의 주머니 가운데
고이 간직하셔서 돌보시고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길가가 된 이 흙을 기경시키시고, 돌밭인 이 베드로의 흙을 돌들을 제거해
주시고,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는 그 심령의 마음 밭에 그러한 잡초들과 가라지들을 뽑아내줌으로 말미암아 그 베드로를
3년 반 동안에 옥토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 매일매일 가시는 곳마다 그 흙을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한 이 베드로라는 흙을 가지고 다니면서 계속적으로 생명의 씨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 복음을 선포할 때 생명의 씨를 뿌리고 계셨고, 진리를 가르치셨을 때 복음의 씨를 생명의 씨를 뿌리고 계셨고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바로 그리고 병자들을 고치고 문둥병자를 치유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베드로라는 흙에 그러한 기경을 하시고 큰 돌과 작은 돌을 다 이렇게 옮겨서 제거해 주시고, 이 잡초들과 가라지들과 가시들과 엉겅퀴들을 뽑아내 줌으로 말미암아 점점점점 옥토로 조성시켜서 그 안에 예수님 자신의 생명의 씨 살아있는 한 인격체이신 예수님이 바로 살아계시기 위한 일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한 대상은 베드로라는 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을 베드로라는 존재 안에 자라게 하여서 주님께서 하나 되어 함께 거할 수 있는 옥토의
땅이 되게 할 수 있는 임마누엘 땅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이 흙을 마가복음 1장 16절 17절
18, 19, 20절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찾아서 그들을
자신의 주머니에 간직하여서 생명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3년 반 동안의 긴 말할 수 없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주님의 그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고, 왜냐하면 창세전에 바로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자가 베드로와 같은 자, 야고보와 같은 자, 요한과 같은 자 곧 12 제자들 곧 우리들의 대표자인
베드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베드로와 같은 아주 못되고 건강치 못한 아주 나쁜 상태에 있는 흙인 우리들을 모으기 시작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이기 때문에 믿는 자들인 그들을 흙으로 불러모아 찾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를 거니신 것이지, 그분이 한가해서 갈릴리 바다의 경치를 구경하러 그곳에 잠시 마음의 힐링을 하기
위해서 가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4절과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말씀하시기를
15절에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14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다〔마 4:12-17; 눅 4: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창세전에 선택되어지고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이 4명의 최초의 제자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것을 우리가 마가복음 1장 16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찾아서 자신의 이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한 그들, 왜냐하면 갈릴리 바다에서 그들을 찾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고리라는 뜻과 원이라는 뜻의 감옥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사로잡힌바 되어서 사단의 왕국 가운데 그물을 던지면서 자신의 삶의 아이와 행복을 위해서 살았던 그들을
족집게 처럼 뽑아내셔서 자신의 품속에 넣어주셔서 그들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셔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때부터
생명의 씨를 계속하여 먼저는 이 4명의 제자 그 후에는 8명의 제자들 곧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주님의 왕국의 씨이신
자신을 뿌림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대표자인 특별히 베드로에게 왜냐하면 마가복음은 베드로에 의하여 마가요한을 통해서 기록한
바로 노예로 오신 하나님의 구주를 증명하는 책이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 자신이신 주 예수님이 살아있는 인격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라게 하여 임마누엘 곧 예수님의 인격을 가진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행하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 16절부터 20절까지 주님께서 이 4명의 최초의 제자들을 만나셔서 부르시고, 그리고 그들을 사단에게 다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4명의 제자들을 돌보시고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들을 찾으시고 모으시고 그리고 돌보시고 이끄셔서 베드로와 같은 자 곧 살아있는
주님의 인격을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이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바로 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이 베드로와 안드레 그들에게 나를 따르라. 너희가 너희 자신들을 위해서 이 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어부가 아니라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자인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선택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선택되어진
베드로 곧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두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특별히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우리를 부르셔서 생명의 씨
곧 예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넣으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시고 계신 장면을 우리가 마가복음 1장 16 ~ 20절의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가 부름을 받았고 그리고 이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을 때 교회를
수선하고 교회를 고치고 합당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사역자로 또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역의 종류가 이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 각기 다른 종류의 사역의 일을 행할 것임을 바로 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깁고 있는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부름에 따르는 장면을 우리가 20절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시 그들을 부르니 그들이 배 안에 있는 아버지인 세베대와 일꾼들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뭡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의 봉사 사역을 통한 삶의 모습처럼
그분이 행한 어떤 일들과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을 바로 예수님을 따른다 라고 그렇게 오해 아닌 오해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보편적인 생각들을 하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행하신 일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일, 그대로 쫓아하는 일
그것을 우리가 행하는 일을 주님을 따르는 일이라고 그렇게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우리가 섬기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워하고 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
이 공생애를 통해서 이 봉사 사역을 행하신 그런 선한 행동들, 온화하고 자비를 베풀고 친절하신 그 행동을 은연중에 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온화하고 선을 베풀고 친절하고 자비하고 긍휼을 베푸는 자의 삶을 마치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마음속에 이렇게 담아두고 행동을 하는 그러한 대부분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자비하셨습니다.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친절하셨습니다.
정말 화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런 행동들을 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과 같이 되기 위한
모방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적으로 이러한 모방하는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갈망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이러한 천연적인 관념의 뜻에 따른 이런 보편적인 우리의
이해 방식에서 떠나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입니까?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처럼
주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장 16절부터 20절까지 4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사단에게 사로잡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왕국 안에서 죽을 운명에 처해진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을 주님께서 친히 갈릴리 바다를 거니시다가 그들을 찾아서 부르셔서
자신의 주머니에 고이 간직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사단의 왕국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힌 바 되어서 사단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의 품에
고이간직 하시고 계속적으로 돌보시고 계속적으로 이끄시는 그러한 삶을 3년 반 동안이나 계속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4명의 제자들, 그리고 그 후에 8명의 제자들을 모두 부르셨을 때 하늘의 유전자를 가진 그 생명의 씨이신 예수님
자신을 그 안으로 뿌리기 위하여 그 타락하여 부패적이고 병들고 오염되고 온전치 못하고 건강치 못한 그 흙들에게 생명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먼저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장 16절부터의 말씀입니다.
1:16 〔제자 넷을 부르시다〔마 4:18-22; 눅 5:1-11〕〕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그래서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뿌리기 위한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그분의 주머니 안으로 넣어주기 위해서 길가도 아닌 돌짝밭도 아닌 가시나무와
엉덩퀴가있는 이런 잡초들이 있는 땅도 아닌 옥토로 기경이 되어서 생명의 씨이신 예수님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정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이 생명의 씨로서 창세전에 바로 영원전에 선택되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이들을 자신 안에 넣고 다니시면서 그들을 조성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과 같은
재산출자 곧 새 사람을 세상에 산출하기 위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주머니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그러한 행동을 하기보다는 주님을 따른다 라는
진정한 정의는 주님 자신을 바로 우리 안으로 뿌리기 위한 그 하나님의 목적과 갈망을 위하여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의
주머니 안으로 넣으져서 주 예수님과 똑같은 자로 산출되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단으로 인하여 기인된 그 죄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어 타락한 이 흙인 바로 이 4명의 제자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나는 8명의 제자들, 그리고 그 후에 또 나타나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온전치 못하고 건전치 못하고 건강치 못하고 오히려 병들고 귀가 막히게 되고 입이
어눌하여 말을 하지 못하고, 그리고 눈이 감겨져서 보지 못하는 심지어는 이러한 중풍병자의 모습이고 뜨거운 열병에 걸린
자의 모습이고, 오염되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서 정말 육의 정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고, 그리고 병이
들므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러한 쓸모없는 우리들 심지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렇게 문둥병자의 모습을 가진
자가 되어서 전적으로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인 그 흙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 이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믿는 자들 안으로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을 뿌리기 위하여 갈릴리 바다에서 흙을 먼저 찾으시고 그들을 손에 잡고
모아서 자신의 안주머니에 깊이 넣으셔서 왜냐하면 사단에게 뺏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다시 그 주머니에서 나오게 되면 이 사단의 영역인 갈릴리에 다시 되돌아갈 일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고기를 잡는 어부가 다시 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깊숙히 주님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셔서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가시는 곳마다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끄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이 4명은 다른 8명의 제자들보다 먼저 부름받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4명이 제자들 가운데 또 대표자가 베드로입니다.베드로는 12 제자들의 대표자이고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이 대표자인 베드로가 주님 자신의 주머니 안에 넣어지는 것이 바로 베드로처럼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따른다 라는 것은 바로 이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어져서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자
주머니 안에 넣어지는 그러한 넣어짐을 통하여 3년 반 동안이라는 기간을 통해서 그가 주님과 같은 자로 조성될 수 있었던
것처럼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주머니 안에 넣어져서 자라고 성장하고 변화되고 변형되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산물
그 열매를 맺는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그러한 예수님과 같은 또 하나의 사람이 산출되게 하기 위해서 주머니 안으로
넣어지는 삶이 주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흙은 이때 당시에 이 베드로라는 이 흙,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이 베드로라는 사람은
아주 가련하고 불쌍하고 온전치 못하고 오염되고 병들고 부패하고 말라버리고 심지어는 정말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이러한 불쌍하고 아주 가련한 처지와 상황 가운데 있었던 것이 인류의 모습인 베드로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고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들고 오염되고 부패한 흙, 아무 쓸모없고 오히려 짐만 되는 이런 흙을 왜 주님께서 고이 자신의 깊은 품속 주머니
안에 깊이 간직하셔서 넣고 다니시면서 가시는 곳마다 그 흙을 내동댕이 치지 않고 가지고 다니시면서 일일이 챙기시고 생명의 씨를 뿌리는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고치는 사역들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왜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의 생명의 씨를 뿌리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들은 이 베드로로 나타난 우리들은 사실은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전에 선택되어져서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넣어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은 곧 우리들은 우리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때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하셔서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 곧 주님 자신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을 결코 내동댕이 치거나 던져버려서 없애버리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를 위해서 살고, 아버지를 위해서 모든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서 오신 노예로 오신 구주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창세전에 영원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짐으로 말미암아 예정하신 자들을
이 예정은 우리가 얘기하는 그런 예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런 예정하신 자들을 결코 던져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나타난 주인이신 아버지께서만 그것에 대한 선택권이 있었고, 노예로 오신
주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자임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 가룟유다를 던져버릴 수가 없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주인이시며 아버지이신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기만 할 뿐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에 가룟유다 조차도 던져버리지 않고 품에 안고 데리고 다니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2 제자들 그 가운데 대표자인 이 베드로란 이 흙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세전에 이미 점 찍은바 되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어 짐으로 말미암아 예정되었던 자가 베드로 곧 성도들인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타락하고 쓸모없고 병들고 정말 건전치 못하고 오염되고 말라버리고 쇠하고 낡아버린 이 흙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셨을까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베드로 선생님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시간의 관점에서
이 3년 반이라는 시간은 어마어마한 시간인 것입니다.
창조 사역보다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 개인적으로 한번 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이 흙을 치유하여 좋은 흙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씨가 넣어져서 자신이 그 안에 살아계신 인격으로
이 제자들 존재 안에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과 같은 자로 조성하기 위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베드로라는 흙을 창세전에 이 하나님께 선택된 베드로라는 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곳마다
빠짐없이 어디를 가든지 높은 산이며 바다며 광야며 바다위 어디든지 귀신을 쫓아내는 곳이나 병든 자를 고친 장소며
바로 이것은 베드로가 처한 영적인 상태이며 모습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그러한 사역의 어떤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설정된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계속 치유하시고 치료하고 계셨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보면 이 베드로라는 흙은 가련하고 불쌍하고 건전치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아주 그런 나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는 그 나쁜 처지에 있는 베드로라는 흙을 온전한 흙으로 건강한 흙인 옥토로 이렇게 조성하여서 생명의
씨가 뿌려져서 그 생명의 씨가 온전히 자라고 성장하고 변화되고 변형되어서 열매를 맺을 수있도록 주님께서 고군분투하시고
애쓰시는 모습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볼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흙이 어떻게 치료받았습니까? 주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진리를 가르치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하늘의 생명의
유전자의 씨가 바로 그들에게 생명의 씨로 뿌려졌던 것입니다.
진리를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깜깜해진 그 베드로라는 흙 안에 생명의 빛을 비춰주었던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사로잡힌 그 베드로라는 흙을 하나님의 왕국의 영역 안에 들어설 수 있도록 조성시킨
것이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병든 자를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흙인 그 타락하고 병들고 마치 영적으로 죽은 자인 베드로의
그러한 심령을 소생시킨 것이 바로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병든 자를 소생하여
살리신 그 베드로 같은 흙을 성화시키는 작업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케 하는 그것입니다.
소생시키는 장면이 계속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거기에 개체적으로 고장나고 손상된 기관인 듣지 못하고 벙어리 되고 보지 못하는 그런 소경과 같은 모습을 지닌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결국 마지막 그 작업 흙이 완전히 치료되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말할 수 없는 3년 반 동안의 긴 여러 단계와 과정의 기간을 거치신 다음에 그 흙이 온전하고도 완전한 치료받는 합당하게 하기 위한 길을 제시해주고 보여주고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심을 당하고 부활의 과정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하도록 베드로라는 한 사람, 곧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끄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눈먼 소경인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바로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와 같은 눈이 감겨져서 세상에 헛된 것을 구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오른편, 왼편에
우리를 앉혀주십시요 라는 이렇게 잘못된 간구를 할 때 그들의 눈을 뜨게 함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땅에 속한 것들을 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는 그 예수님을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삶의 길로 그들을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예수님을 쫓아 움직이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52절에 그가 즉시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라는 이 눈먼 소경인 바디메오라는 거지를
고쳐주신 것은 다름 아닌 12 제자를 고쳐주신 것이고,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을 눈을 뜨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베드로라는
이 사람의 감겨진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서 주님을 온전히 따르게 하여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끌고 계신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그 베드로라는 흙이 곧 사람이 치료받게 하는 것은
육신적인 몸에서 발생하는 치료법을 갖게 하기 위해서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라는 것을 통해서 육신적인 몸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병든 것들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흙으로 지음받은
창조받은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통해서 사람의 몸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치료법을 갖게 하기 위한 이런 원칙을 정하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이 나게 되면 만약에 흙으로 조성되어 창조되지 않았다면 병이나면 결코 회복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흙으로 조성되어져서 창조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람이 병이 났죠. 또 이 병이 남으로 말미암아 손상된
간이나 콩팥 이런 것이 상할 수도 있죠. 또 몸에 날카로운 못이나 어떤 돌에 부딪혀서 피부가 찢어질 수가 있죠.
이 피부에 상처가 났을 때 이것이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치료를 통하여 새 살이 돋아나서 회복이 되는 것처럼 우리 몸 안에는
이 죽음과 부활의 원칙을 통하여 옛것은 죽어가고 새로운 무엇이 소생하는 원칙이 있는 것이 바로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7절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라는 그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흙으로 창조되지 아니했다면 옛것이 죽어나가고 끝날 것입니다.새로운 것이 도무지 발생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흙이 됨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서 회복될 수 있는 그러한 회복의 원칙을 흙을 통해서 정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옛것은 죽어나고 고장 나고 병들고 손상된 그 부분은 죽어가고 새로운 그 어떤 것이 솟아나는 원칙이 있게 하기
위해서 바로 이런 기본적인 하나님의 안배에 따른 기본적인 생명의 원칙을 통하여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질병이 치료될 수
있도록 죽음과 부활의 원칙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처럼 우리의 몸 안에도 똑같이 죽음과 부활의 원칙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원칙을 통하여 주 예수님께서 하늘의 유전자인 영원하고도 신성한 생명의 씨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바로
그 생명의 씨를 우리들 안으로 넣어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옥토가 되어야 되어야 되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 왕국의 씨이신
생명의 씨이신 자신을 뿌릴 흙을 치료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이 마가복음의 성경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흙은 하나님께서 이 창세전에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정하시고 점 찍으셔서 주님께서는 이제 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님 안으로 넣어진 이 자를 어떻게 옥토가 되게 하기 위해서 치료하고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정말 생명의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사역을 하시는 것이 3년 반 동안의 봉사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까 얘기한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고 정말 매우 온화하셨다 라는 그러한 삶의 외형적인 모습을 모방하고 따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정 따른다 라는 그것의 의미는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넣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모습이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이 마가복음 1장 16절, 17절 말씀을 통해서 나를 따라오십시오라고 베드로에게 마가복음 1장 17절에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18절에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 그것이 베드로와 같은 삶이 주님을 따르는
것인데 주님의 주머니 안으로 고이 간직 되어진 그 생명의 씨를 심기 위한 흙이 되게 하기 위해서 넣어지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것업니다.
1:16 〔제자 넷을 부르시다〔마 4:18-22; 눅 5:1-11〕〕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흙을 치유하시는 것을, 그러한 3년 반 동안의 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긴 시간을 통해서 참된 의사로서 진찰을 하시고 수술을 통해서 더러운 것을 끄집어내 주신 다음에
인간의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 상태가 얼마나 악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13가지의 사례를 통하여그 더러움을 보여주신
다음에 하나하나씩 심지어 눈이 감겨져 있을 때 눈을 뜨게 하시고 귀가 막혀진 베드로를 향해서 귀가 열리게 하여주시고
에바다. 또 입이 어눌했을 때 입을 열리게 해주시는 그런 일일이 개별적이고도 특수하고도 특별한 방법으로 치료하여
주셔서 이 베드로라는 흙을 결국은 십자가로 이끌어 죽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장 9절에 나오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셔서 요단강에서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셔서
모든 것들을 끝내셨다는 (장사) 침례 받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주님께서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이 베드로라는 흙을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서 그 베드로라는
흙을 십자가로 이끌어 죽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이죠.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라는 이 베드로라는 흙을 십자가로 이끌어 죽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죽게 된
이 베드로를 침례를 통해서 이 옛것들인 모든 것들을 장사 지냄으로 말미암아 끝내주시는 소극적인 작업을 십자가를 통해서
하시고 그다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베드로라는 흙을 부활 안으로 이끌어 생명으로 이끌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적극적으로 치료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베드로라는 흙을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하고 그것을 통과하여서 이 흙을 완전히 치유하기 위한
갈망을 가지시고, 이 베드로를 3년 반 동안에 계속 잡아끌고 이끄시고 돌보시고 다루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대표자인 베드로는 물론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는 모두가 죽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9절에 침례자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마치 피의 바다인 홍해 바다를 건넜을 때 사탄의 세력인 애굽의 왕과 그 애굽의 군대들 모두가 그들을 바로 이 히브리
민족들이 그들을 이끌고 옵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는 그 못된 세력을 이끌어오게 된 주 원인이 히브리 민족인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그 못된 죽음의 것들을 다 이끌고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의 세력들을 피의 홍해 바다에 수장시킴으로 말미암아 장사시킵니다.
사라져 버리게 하고 끝내주시고 종결시키십니다. 그래서 죽음 안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옛것들이 끝내주는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3일 만에 하나님의 경륜과 안배에 따라 부활하심을 통하여
부활 안에서 우리가 생명 안에서 부활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죽음을 당하고, 주님의 부활 안에서 우리가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그리스도로 오신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죽음 안에서 죽었고, 그리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생명으로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방식으로 베드로라는 흙이 완전히 치유가 돼서 사도행전 1장 2장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똑같은 재 산출된 자로 조성되어져서 새 사람으로 계시록에 나오는 새 사람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구원받은 자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6절부터 20절의 말씀을 통해서 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왜 찾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바로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그리스도 안으로 넘어진 바 된 우리를
찾으시고 그리고 부르셔서 그리고 품에 넣으셔서 그때부터 그분이 바로 간직하시고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그 흙이 따라 다니는 그것이 따르는 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바로 주님의 그 주머니 안으로 넣어지는 행위처럼 주머니 안에 넣어져서 그분과 함께 하나 되어
움직이는 삶이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지, 그분의 친절과 선이나 자비나 긍휼을 이렇게 답습하고 모방하여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것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따르기 시작했던 이 12명의 제자들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다스림을 받고 다루심을 받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 그중에서도 베드로라는 자를 통하여 주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사건과 어떤 환경과 어떤 모든 일들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과 함께 하나 되어 움직이는 그들을 품에 넣으시고 돌보시고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병들고 이미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병들고 쇠하고 낡고 온전치 못하고 건강치 못한 그러한 병든 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름으로 인하여 점점점점 시간의 과정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조금씩 치료가 되어져서 나중에는 가장
중요한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따르는지도 알지 못하는 그 눈먼 바디메오와 같은 소경된 베드로라는 자와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눈을 뜨게 함으로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 마가복음 10장 52절 말씀입니다.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베드로가 눈먼 거지 바디메와 같은 소경인 채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때로는 터무니 없는 실수를 하면서 심지어는 주님 앞에 사단의 도구가 되어서 사단의 모습으로 주님이 가시는 길을 막으면서 주님 그리하지
마소서 아니! 주님께서 죽다니요 그런 일은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되죠 라고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그런
실수 까지도 하는 것은 그가 눈이 감겨짐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커다란 실수를 하고 참패하는 사단에 의하여 계속 실족하는 삶을
살았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변화 선상에서 초막 셋을 짓자고 주님께 요청하는 장면이나 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나 또는 주님 죽지 마시옵소서
라고 하는 이런 커다란 실수를 많이 한 이유는 바로 눈먼 소경인 채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눈먼 거지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이 가시는 그 길 십자가의 죽음과
이 부활의 이끌림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주님이 가시는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 마가복음 10장 52절에 그가 즉시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베드로라는 흙 곧 12 제자들 곧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특별히 베드로라는 흙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을 모델로 자신을 모형으로 제시하셔서 3년 반 가까이 베드로와 그리고 베드로 안에 있는 다른 제자들
까지도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고 주님이 친히 행하시고 사람들을 만나는 이러한 모든 장면을 목격하고 지켜보게 하셨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을 통하여 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과 무리들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한 모든 자들을 십자가로 이끌고 가시는 장면을 우리가 마가복음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자들을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부활 안에 들어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치료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모든 자들, 베드로를 포함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들, 가룟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무리들,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이 모든 자들을 이끄시고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믿는 자들
모두를 십자가로 이끌고 가신 것이 바로 베드로에 대한 얘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베드로가 이끄심을 당한 후에 온전히 치료가 되어서 사도행전 1장 2절에 놀라운
사역을 행하며 그리스도와 똑같이 하나 되어 움직이는 삶을 사는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바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한 흙인 그 베드로와 같은 자들이 모두 치료되었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일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안에서 치료가 받아진 것을 우리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의 이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라는 이 한 사람을 통해서 치료가 무엇인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고침, 참된 고침은 참된 치료는 주님을 참되게 따르는 일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발생한 치료를 가리키는 표징으로써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 진정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바로 온전한 치료를 받습니다.
마치 우리의 육신적인 몸에서 발생하는 치료법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을 통해서 120명의 문도가 기도하는 가운데 이 충만하고도 친밀하게 이렇게 임재하시는
주님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를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을 통해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 처음에 갈릴리 바다에서 부름받아 주님의 주머니 안에 넣어졌던
이들은 이때는 사도행전 2장서부터 나타난 사역의 모습을 보면 전처럼 타락하여서 병들거나 오염되거나 부패하거나
쇠하거나 낡거나 건전치 못하고 건강치 못한 흙이 아니라 옥토가 된 흙으로서 생명의 씨이신 주 예수님이 그 안에 살아계신
인격체로 그들의 존재 안에 살아계신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베드로라는 사람은 더 이상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뜨거운 열병에 걸린자의 모습도 아니고 중풍병자의 모습처럼
움직이지 못한 자들도 아니고 또 한쪽 손이 오그라들어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한 자도 아니고 눈 멀어서 보지 못하거나
귀 먹어서 듣지 못하거나 또 입이 어눌하여 말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치유된
자로서의 주 예수님과 똑같이 산출된 또 하나의 재산출 된 자인 새 사람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을 이 세상에 산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하나님 안에 예수님 육체 안에 드러나지 않고 감추고 계셨던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신성한 생명을 해방시키셔서 부활을 통하여 이 해방된 신성한 생명을 믿는 자들 안으로 주입시켜서
넣어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발아를 시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4장 말씀을 통해서 네 가지 문제인 주님의 사역의 배경과 그리고 씨이신 자신을 뿌리시는 분이심과
세 번째 주님과 하나님이 선택한 흙인 제자들과 그리고 네 번째 마지막 그 베드로라는 사람의 흙의 온전한 치료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베드로라는 이 한 사람이 치료된 것과 하나님의 이 선택된 백성들인 우리들의 대표자인
베드로를 통하여 베드로가 회복됨으로 말미암아 좋은 흙이 되어서 사도행전 1장 2장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 되어 주님 자신의
영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좋은 밭이 된 임마누엘 땅이 된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4장 8절에 이와 같은 3년 반 동안의 봉사 사역과 주머니에 그 베드로라는 흙을 고이 간직하여 돌보시고
이끄심으로 급기야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베드로라는 흙을 치료해 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가
마가복음 4장 8절말씀인 것입니다.
4: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20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곧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얼마는 30배, 얼마는 60배, 얼마는 100배의 열매를 내는 자들이 바로 베드로라는 흙이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된 자, 변형된 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씨뿌림의 완성은 다름 아닌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완전히 치유가 되어서 씨뿌림의 완성이 끝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 예수님은 이 베드로라는 흙을 온전히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여 흙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어졌던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자신이신
성육신되신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분이 찢어지고 쪼개지고 반석이 깨어짐을 통하여 그분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어졌던 것입니다.그런데 해방되어지면 뭐예요?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이 생명을 이끄는 생명 주시는 영을
이 세상에 산출케 하기 위해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신성한 해방되어진 이 신성한 생명이 이 베드로라는 흙 안으로
넣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이것이 새로운 출생 바로 거듭난다 라는 것입니다.
거듭남 이 새로운 출생은 바로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주님 자신인 이 생명이 베드로라는 그 존재 안으로 넣어진 것이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그럼 그 부활이 있기 전에 죽음이 있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처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알의 밀알이 죽어야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어져서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해방되었고, 부활을 통해서
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이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바로 보혜사 성령님으로 베드로 심령 안으로 베드로
존재 안으로 넣어질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생명의 씨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주 예수님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뿌리는
주님의 씨뿌림의 완성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 3년 반 동안 긴 봉사 사역을 통해서 베드로라는 이 한 사람 흙을 조성하시고 이 자라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시고 변화 시켜주시고 변형되게 하였을지라도 주님의 그 죽음과 부활이 없었다면 주님의 씨뿌림의 완성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지막 이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을 곧 신성한 생명을 제자들 안으로 뿌리는 주님의 씨뿌림의 마지막 종결 마지막
완성이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1장을 통해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믿는 자들에게 씨를 뿌리기
위한 일이 이 마가복음 1장부터 16장까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1장에서 시작된 주님 자신이신 생명의 씨 뿌림은
16장에서 완성되어진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마지막 말씀에서 또 하나의 그러한 예수님과 같은 자의 모습을 사는 자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각자 전파하니 주님도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하나 되어 이제 움직이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되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주님도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또 그들에게 따르는 표적을 통하여 그 말씀을
확정해 주셨다라는 얘기를 하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부터 16장에 걸친 이 봉사 사역을 통해서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여러 형태의 상황과 환경들과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설정된 일들을 통하여 제자들 안으로 주 예수님인 생명의 씨를 뿌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씨뿌린 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고, 그래서 3절에서 씨뿌린 자가 뿌리러
나가서 26절에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것 같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이 생명의 씨 뿌림은 완성되어진 것입니다.이것이 완성되고 종결되어지고
끝나게 될 때가 있어야 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고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이 이 생명의 씨 뿌리는 일이 완성되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완성되어진 2천년전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속 지금 뿌리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사실과 연관이 없다면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씨를 뿌리고 계셔야 되는데 2천년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셨을 때 이 뿌림은 완성되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셔서
이 그리스도 안에 넣어진 믿는 자들 안으로 이 씨뿌림이 완성되어졌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과 무리들,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각기 헤아릴 수 없고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종류의 흙들이 주님의 이런 놀라운 봉사 사역을 통하여 좋은 옥토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이신
생명의 씨가 심어져 그리스도와 같은 열매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경작하기 시작한 것이
마가복음 4장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라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전에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는 타락된 흙들인 이 제자들이 주 예수님께서 좋은 흙으로
만들어 나가는 조성되어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면,사도행전을 통해서 이 건강치 못하고 온전치 못하고 병든 흙이 온전한
좋은 옥토의 흙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옥토에 흙에서 자라난 주님 자신이신 생명의 씨가 정말 온전히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베드로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을 좋은 흙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그들을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사역 기간 내내
다니는 곳마다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들을 돌보시고 이끌어주시고, 심지어는 그 이 베드로라는 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그 베드로 안에 수많은 가라지들과 잡초가 있기 때문에 그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그분께서
3년 반 동안에 매일매일 수고하시고 밤낮으로 애쓰시는 장면을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11절, 12절, 13절 말씀을 통해서 이 외식하는 베드로를 향해 사도 바울선생님이 책망하는
장면인데요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2: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2: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3절에 보면 심지어 바나바 까지도 등장을 합니다. 이러한 외식하는 것에 대한 것이
20절까지 쭉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 선생님께서 20절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왜 율법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느냐? 구약의 율법과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로 이미 전체적이고도
우주적으로 대치가 되었어서 이미 종결되어졌다.
근데 왜 자꾸 그 옛것들만으로 그런 옛날의 전통과 행위를 따라 살려고 하느냐 라고 그 베드로 안에 있는 잡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여러분 주님께서 이 베드로라는 흙을 주님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끌어서
새 생명을 가진 새 사람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잡초가 이 가라지가 돋아났을까요?
그것은 옛 종교인 유대 종교와 옛 유대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옛 종교 옛 문화 이러한 옛 것에 속한 것들은
모두 침례를 통해서 장사됨으로 말미암아 끝내주셨던 것입니다. 종결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잡초는 이 가라지는 사도행전 10장 14절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0: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0:16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이러한 베드로가 환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이것은 이 베드로 안에서 이 잡초와 가라지가 자라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하늘에 속한 이상인 즉 이 생명의 씨이신 주님 자신을 이방 열국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 안으로 뿌리는 것에 관한
이상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베드로라는 이 복음 전파자 또 하나의 예수님으로 재 산출된 새 사람이 된 이 베드로를
통하여 왕국의 씨를 유대 사람이 아닌 이방 열국 가운데 있는 이방 사람들의 흙 안으로 생명의 씨이신 주님 자신을 뿌리고자
갈망하시고 의도하셨는데 베드로는 이 이상에 순종하기를 거절한 것은 베드로가 아직도 옛 것 안에 이미 주님께서 침례
받음으로 말미암아 장사되어 모든 것을 종결시키고 끝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문화와 옛 종교의 영향 아래 있게
되어서 그 전통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거절을 통해서 베드로 안에서 요한복음 12장 24절에 참 밀 대신에 잡초들인 이 가라지가 자라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옛 경륜안에 속한 모든 것들, 옛 종교에 속한 것들, 옛 문화에 속한 것들, 곧 잡초들인 가라지가 베드로 안에서
그 흙에서 자라고 있어서 주님께서 이것을 책망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도행전 21장 18절부터 예루살렘 장로들의 조언이 있는데 이 조언은 좋은 조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바로 무리와 함께
야고보에게 들어갔는데 야고보 말이 먼저 나오죠 그다음에 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도바울 선생님이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밝히 알리므로 이 사도 바울 선생님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21:17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하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21: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1: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1: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것을 고하니라
21:27 〔바울이 잡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21: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21: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21: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21: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지금 여기는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이 교회의 수석 장로가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였던 것입니다.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율법에 열심인 자들이 수 천 명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물론 사도 바울 선생님까지 28절에 그다음 날 바울이 바울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믿음으로 충만하고
경건하고 베드로와 같은 자와 사도바울 선생님이 이 옛것들, 옛 종교에 속한 것들로 대표되고 있는 야고보의 영향 아래 있어서
그 야고보를 두려워했다 라는 이 사실을 통하여 이 베드로에게도 사도바울 선생님에게도 많은 잡초들인 가라지들이 그들 안에
심심치 않게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은연 중에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이 잡초들은 그리스도를 대치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죽음을 당하셔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대치하셨는데 그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의 대치가 되시는 그분이 아닌 대치자이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들을 집어넣는 것이 바로 잡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잡초들은 특별한 그 사람들이 거하는 땅의 중심지역인 유대 지역에서 발생되어진 유대 문화와 유대 종교들,
그리고 각종 어떤 나라들을 통해서 현자들의 어떤 가르침들을 통해서 윤리와 도덕, 헬라 문화와 헬라 철학들을 통한
어떤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자들의 삶, 하늘에 속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런 것들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적이고 전체적인 대치자이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대치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일에 방해물이 되고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대한 이상이 그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옛 경륜안에 속한
옛것들 전통들, 옛 문화와 어떤 유대의 종교적인 영향과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우주적인 대치자이신 주님을 모시는 일을
온전케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것들로 인하여 주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지는 일이 제한을 받는 이 일이 오늘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강림의 사건을 지연시키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이신예수님이 자신의 왕국 백성
곧 천국 백성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영역입니다.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들어가는 영역,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통치하는 영역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좀 더 깊은 이상을 소유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께서
이 영역 안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자신의 그 어떤 다스림과 통치적인
행정을 통하여 다스림을 받고 바로 왕국의 통치자가 되시며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의 권위를 행사하는
물질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가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가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거 맞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다스림 받는 거 맞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사는 거 맞습니다.그런데 이것보다도 더욱더 깊은
이 왕국에 대한 의미는 바로 이 왕국이 실제적인 어떤 물질적인 영역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인격인 하나님 자신이신
주 예수님의 인격 안으로 들어가는 삶이라는 이것이 전제로 하지 않으면 나머지 것이 비교적 희석이 되고 뭔가 미비함이나
부족함이나 결함이 있게 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 살아있는 이 인격은 , 30년의 생애와 3년반 동안의 공생애를 포함하여 모든 생애를 거쳐서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킨 성육신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실제적인 나타남이기 때문에 이 주 예수님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으로 소유하는 일, 이 살아있는 한 인격을
우리 안에 우리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게 하는 이 일들을 위해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체현으로서 이 왕국이 되기 위하여 생명의 씨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도 농부이신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자이신 주님 자신이시고, 씨 자체도 하늘의 유전자의 씨를 가지신
주님 자신이신 성육신되신 그리스도이시고, 이 씨를 뿌리는 자도 씨자체도 예수님 자신이므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님 자신이고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왕국이고 하나님의 왕국이 이 생명의 씨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왕국의 생명의 씨이신 하늘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의 씨이신 주님 자신을 하나님이죠.하나님 자신이신
주님 자신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진
믿는 자들 안으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인 믿는자들 안으로 뿌리려고 오신 것이 주 예수님이라 것입니다.
이 주 예수님이 뿌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라는 존재 안에 한 인격이 되셔서 살아계신 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주 예수님께서는 왕국의 씨이신 자신을 하나님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넣어진 자들인 믿는 자들 곧 이들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찾아서 이들에게
생명의 씨를 뿌려서 이 생명의 씨를 과정의 기간들을 걸쳐서 자라고 성장하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변형되게 하여서
바로 주님께서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이 임마누엘 땅인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분의 왕국을 심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바로 이 하늘의 유전자인 이 천국의 씨 곧 왕국의 씨이신 자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뿌리지 않고 생명의 씨를 뿌려 나가는
일들이 바로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이 말씀을 드리고 오늘의 교제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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