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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1:1/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여 그분을 사는것임
    말씀 나눔방 2024. 3. 16. 17:00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이번 시간은 마가복음과 이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 대한 것과

    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한 삶의 실행의 문제를 다룬 야고보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대한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21절 말씀을 보면 율법이 그리스도로 대치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가 마가복음에 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상고하노라면 그 마가복음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이 내용들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위하는 전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봉사 사역의 삶의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아닌 바로 옛 경륜을 폐하시고 바로 이 신약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대한 내용과 주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곧 주님을 쫓고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님을 섬기길 원하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 안으로 주님 자신을 역사하여서 그리스도와 같은 자들 곧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바로 주님 자신의 표현을 위한 몸을 그들을 통해서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나타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세 분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들의

    영이라는 그릇 안에 바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그들의 영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그들의 생명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주님 자신을 하나님의 그 택한 백성들 안으로 주입시켜주고 인지시켜주고 넣어주는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주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여 그분으로 살고 그분에 의하여 말하고 그분을 통하여

    움직이고 그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나타낸 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르고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을 따라 사는 자가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사역을 하셨던

    노예로 오신 구주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노예로 오신 구주의 봉사 사역은 3년 반 동안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약 경륜만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약 경륜만을 위하는 삶을 사신 분이 그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이 탁월하면서도 우월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보였다라면, 반면에

    야고보서는 바로 주 예수님의 생활과는 비교적 약간은 동떨어진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약의 말씀을

    전제로 실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합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합당히 처신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라고

    야고보서 1장 5절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이 주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예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인 야고보는 흩어져 살고 있는 12 지파에게 문안합니다.

    주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던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아니라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과 유다의 육신의 형제가 바로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야고보는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없었으면 굉장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라고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야고보라고  마태복음 13장 55절에 기록돼 있는 것처럼 야고보서를 기록한 저자인 야고보는

    바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과 유다의 육신의 형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야고보는 아마 키가 작았던지 나이가 어렸던지, 근데 제 생각에는 아마 나이가 어리고 비교적 키가 적었기 때문에

    작은 야고보라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야고보는 주님께서 이 33년 반 동안의 이 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선택하신 12사도 중에 하나는 아니었습니다.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야고보는 12 사도는 아니었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가 되었다라고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라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주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아주 탁월하면서도 주님과 함께 삶을 전반적으로 살았던 이 야고보라는 사람이 얼마나 영적으로 탁월한 자이며 우월한 자라는 것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암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17절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인도하는 대표적인 장로가 되었습니다. 장로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특별히 장로로서 피택이 되어서 활동했다라는 것을 통해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가 되었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회의 3명의 기둥으로 여겨진 자가 바로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9절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또 기둥같이 여겨지는 야고보와 게바라고 나오는데 게바는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요한 순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세 개의 기둥 중에 가장 첫 번째로 야고보를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에 베드로나 사도바울 선생님이 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를 얼마나 특별하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는지를 우리가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야고보서를 통해서 어떤 실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비교적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 야고보서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오늘날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침례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저자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유다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에 의해서

    기록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하고 이 말씀을 읽으면 야고보가 예수님과 함께 산 그 33년 반

    동안의 전체적인 삶을 통해서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들여다보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 되어 움직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의 완전함을 강조함에 있어서 교리가 아닌 실행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 2장 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큰 기둥이라고 그랬죠.

    야고보와 그리고 게바와 요한이라고 사도바울 선생님이 이렇게 순서적으로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에게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나

    자신을 분리하였다.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릇되이 행하여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사도 베드로

    선생님을 이렇게 책망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이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바로 이 야고보의 영향을 받은 어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달자로 온 어떤 자들이 왔을 때 바로 그 야고보의 영향에 대한 일예로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베드로가 잠시

    위선적이고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갈라디아서 2장 12절 말씀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 선생님까지도 야고보의 어느 정도 영향 아래 있었다 라는 것을 통해서

    야고보에 대한 어떤 큰 평판과 지대한 영향이 그 당시에 있었음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남쪽에 있는 것이고 안디옥교회는 북쪽에 있었던 것이죠.

    그당시에 신앙의 큰 중심지가 예루살렘 교회였었는데 그 교회가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안디옥에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이 안디옥과 이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이 바로 커다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종교의 두 중심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교회가 당시에 있었다 라는 것을 사도행전 8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 당시에 바로 이 남쪽에 예루살렘 교회가 있었고 안디옥은 북쪽에 있었는데 이들 도시가 바로 신앙의 큰 두 중심지로

    바로 이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리고 안디옥에도 역시 교회가 있었다 라는 것을 사도행전 13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안디옥에 있던 교회에 어떤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으니 안디옥에도 역시 교회가 있었고 남쪽에 있었던 예루살렘에도

    역시 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근데 이 사도행전을 전체적으로 가만히 묵상해 보면  남쪽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는 옛 종교

    안에 있는 유대적인 외형의 모습이 있었고,북쪽에 있었던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바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들의

    외형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암시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사람들 중심으로, 안디옥은 이방 세계에 있었던 이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성되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유대적인 외형을 갖췄고,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이방인의 외형을 갖추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인간적인 우리들의 관점을 통해서는 이것이 보편적으로 그럴 수 있지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은

    바로 유대적인 외형을 갖추고 북쪽에 있는 이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이방인의 외형을

    갖추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 10장 32절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라고 이렇게 세 범주의 사람들이 있죠.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 그리고 북쪽에 위치한 이방 세계에 사는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나 그렇습니다.

     

    유대인과 그리고 이방인 보편적으로 헬라인이라고 칭하고 있는 이 이방인과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인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 새 범주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서 떨어진 어떤 것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서 떨어진 어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으로부터 그리고 이방인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곧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예수님을 쫓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불러내어서 교회가 되게 하셨는데 이 교회는 유대적 이어서도 안되고 이방적이지도 말아야 한다 라는

    얘기를 사도 바울 선생님이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교회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적인 어떤 외형이 있거나 또는 안디옥교회를 통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방적인 어떤 외형을 갖춘 교회라면 주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그 교회의 특성과 특색이

    훼손되어지고 조금은 본질이 어그러지거나 그 특색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라고 사도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너무 유대적이어서도 안 되고 너무 이방적인 외형을 갖춘 교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성을 잃어버리거나 특색을 잃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베드로와 바울과 야고보가 당시에 교회의 세 기둥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로 채택된 야고보에 의하여

    안디옥에 전달자들로 간 그 어떤 자들에 의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 갈라디아서 2장 12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좋았어요.

    정말 주님께서 원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옴으로 말미암아

    외식적인 행동을하는 이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할례자들에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나 자신을 분리하였다라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장로로  있는 그 야고보에 의해서 인도받고 있는 그 교회가 이방 세계에 있는

    북쪽에 있는 안디옥 교회와 그 교회들에게 심히 큰 영향력을 직, 간접적으로 행사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야고보서를 기록한 이 야고보의  의도는 이방 세계에 있는 교회들이 너무 구약의 성경 말씀이나

    모세의 율법을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생각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조금은 염려한 가운데 어쩌면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교회에 야고보에 의해서 보내진 그 형제들을 통해서 어쩌면은 바로 그 북쪽에 있는 안디옥 교회에 있는

    바로 이방인의 외형의 모습이 있던 그들이 너무 자유분방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 때문에 그들의 상황을 보다 깊이

    관찰하고 예의주시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우리가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로 이 예루살렘 교회에 장로로 있는 야고보에게서 어떤 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이르기 전에

    사도 베드로 선생님은 12절에 바로 어떤 형제와 그 형제들과 함께 자유스럽게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었던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몸의 한 부분으로서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라는 장로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어떤 자들이 왔을 때 위선적이고도 형식적인

    이러한 외식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 갈라디아서 2장 12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에게서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는데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에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나 자신을 분리하였다 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교회인 야고보란 장로에 의해서

    어떤 형제들이 이 안디옥교회로 왔는데, 베드로는 그 야고보에 의하여 보냄을 받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마치 외식하는 데 앞장을

    섬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행세를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때까지도 아마도 어떤 면에서 이방인들과 어느 정도는 분리하여서 나타내지는 신앙생활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유대인 행세를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저 개처럼 여기는 이방 사람들과는 달리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알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그 모든 온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부활을

    약간 희석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대해서 바울 선생님은 크게 경책하고 꾸짖는 장면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12절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인 행세를 한 사도 베드로를 향하여 바울은 외식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옛날로 왜 돌아가려고 하느냐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함으로 바라바도 저희의 외식에

    어느 정도 유혹되었다 라고 갈라디아서 2장 13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니! 그들이 유대인 행세를 한 것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들과 달리 동떨어져서 이렇게

    식사를 한 모양이 뭐 크게 잘못된 것이냐 라고 의혹을 가질지 모릅니다.

    이런 것이 사람의 보는 관점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아는 자들에게는 베드로가 말할

    수 없이 큰 실수를 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나서 침륜에 빠지게 하는 뒤로 물러나 자신을 이방인 신자들과

    분리시킨 그 사도 베드로의 행위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크게 손상시킴으로 말미암아 누룩과 같이 섞어짐으로 말미암아

    혼합과 관련된 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 선생님의 엄청난 실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그 믿는 자들을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역사하여서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는 영을

    그들에게 부어주셔서 주입시켜서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만들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표현을 위한 몸을 가질 수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합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노예로 오신 구주의 봉사 사역의

    주제와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서 엄청난 실수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여 그분을 사는 일을

    훼손시키고 어떤 면에서는 많이 손상시킴으로 말미암아 의식들을 실행하는 그 문제를 통하여 잘못된 어떤 삶을 나타내

    보이므로 사도바울 선생님이  크게 외식하는 것에 대하여 꾸짖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때다 싶어서 크게 꾸짖는 것이지만 그 외에는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전혀 잘못한 것이 아마 없을

    것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어떤 가르침을 행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어떤 공자나 맹자, 노자, 부처의 말씀을 따라 선을 행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그들의 영 안의 생명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주입시킴으로 말미암아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택한 백성들 안에 집어넣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의 표현을 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주님 자신의 생명을 소유할 때 자동적으로 이 생명을 살 수가 있는데 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 행세를 한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바로 이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형제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을

    의식하여 외식함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그 택한 백성들 안으로 생명을 넣어주는 문제가 약간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의하여 살고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러한 먹고 마시는 어떤 그런 것들로 인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은 유대적인 어떤 율법을 지키는 문제도 아니고 유대적인 율법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지금도 존재하고 지금도 존속되어져서 패하여졌으나 그 위에 우월한 법으로 바로 나타난 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종교 안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은 유대적인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가르침을 통한 어떤 인간의 교리나 인간의 철학에 따라 어떤 교훈에 따라 선을 행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만을 생명으로 취하여 바로 하나님만을 사는 문제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러한 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하나님만을 생명으로 취하여 그분으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아주 중요한 내용이고 주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어떤 지도자들은  아직도 이 교리와 실행을

    가지고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실수한 것처럼 그러한 교리와 실행들을 가지고 싸우고 있지만,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초점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갈망하시고 목표하시고 의도하시는 것은 자신이 택한 백성들인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믿는 자들을 바로 주님 자신을 그들 자신들의 생명으로 취하여 그분을 살 수 있도록, 그분으로

    인하여 살고, 그분으로 인하여 움직이고, 그분으로 인하여 일하시고 그분으로 인하여 말씀하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성령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주제인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하여 살고 움직이신 분이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의하여 살고 움직이시고 일하셔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사단을 묶고 그 사단의 왕국을 늑탈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 성령님에 의하여 이러한 일들을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먼저 취하여 성령님 안에서 그분을 살 수 있도록 바로 이 믿는 자들 안으로 바로 생명으로 취하여 산

    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역사하시게 살아 나타나 표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경륜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갈망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유대인과 함께 음식을 먹었느냐,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들과 함께 이렇게 먹는 일에 참여했느냐 안 했느냐

    그런 것들은 도무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논쟁할 필요가 전혀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율법을 지키는 그러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식들을 준수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그런 높은 가르침을 선포하는 그러한 성직자들에 의하여 윤리적인 방법으로 나타나는 그 가르침들을 통하여

    선을 행하는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해서 우리의 생명으로 주입하여서 우리의 생명으로 소유하여서 그분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주제인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절 11절부터 21절까지를 가만히 읽어보면 율법이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한다라는 장면에 대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2:11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2: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2: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런데 북쪽에 있었던 안디옥 교회의 분위기가 남쪽 예루살렘 교회에게서 온 야고보 장로에 의하여 보냄을 받은 어떤 자들이

    온 후에 갑자기 그것이 큰 기류를 타고 바뀌어진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오기 전까지는 베드로와 그 북쪽에 있었던 안디옥교회에 있는 모든 주님의 성도들은 아주 독특한

    범주의 분위기인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누리는 분위기 안에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에 의하여 보냄 받은 어떤 사람들이 보내짐을 받아 이 북쪽에 있는 안디옥교회에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 야고보의 영향으로 인하여 이 독특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누리는 하나가 되어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그런 영적인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어서 영적인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흐려놓기 위한 이런 분리 이런 외식적인 행위가 갑자기 무엇인가를 통해서 들어온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유대인 행세를 했죠. 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로 있는 야고보가 두려워서 외식하는 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야고보를 우리가 아주 낮은 수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도바울 선생님은 야고보를 순서적으로 가장 먼저 앞세워서 기록할 정도로 야고보는 큰 교회에

    그 당시 교회의 세 기둥 중에 야고보와 그리고 게바와 사도요한을 이렇게 순서적으로 기록해 놓고

    자신을 배제했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대 기둥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도 바울 선생님까지 포함한 4대 기둥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죠.

     

    그래서 이 베드로에게 이 갈라디아서 2장 14절 말씀을 통해서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걷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보고 그들 모두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르되 당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방식대로 살고 유대인들처럼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을 강요해서 유대인들처럼 살게 하느냐 하였노라 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였노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냐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된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사도 베드로 선생님의 그런

    의식적인 어떤 그러한 유대인 행세를 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외식이 바로 이 사도 베드로와 그와 함께한 자들을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갈라디아서 2장 11절부터 21절까지 나타난 사도 바울이 공개적으로 베드로 선생님을 크게 책망하는 것을

    통해서 사도바울 선생님의 책망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한 종류의 생활만을 살아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걸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종류의 생활을 산 것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계시 받고 암시를 받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오직 한 종류의 삶 한 종류의 생활을 하고 살아야 되는데 곧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한 번 두 번 세 번 크게 강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바로 이 예루살렘 야고보에 의하여 보냄을 받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외식하는 데 앞장섬으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 이것은 아니다 라고 사도바울 선생님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 한 종류의 생활, 한 종류의 삶

    곧 그리스도를 사는 것 이것이 중요하지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바로 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러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그러나 내가 아니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라고

     

    그리스도를 사하는 것이 중요하지.이방인과 함께 먹느냐

    먹지 않느냐 이것이 절대 중요한 것이 아니다.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바로 다름 아니라

    우리이고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져서 부활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다.나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에 관한 문제이지 이방인과 함께 무엇을 먹었느냐, 무엇을 뭐 먹지 않았느냐

    함께 먹었느냐 함께 먹지 않았느냐 이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마라.이것은 논쟁 자체가 아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느냐 살지 않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사느냐

    살지 않느냐 이것이 문제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을 갈라디아 3장 2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3:1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에게 호소하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래서 이 야고보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유다의 형제이며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로 인정받게 되고 야고보서를

    기록했는데요. 우리가 이 야고보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야고보가 매우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경건한 사람을 나타내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30년 동안의 공생애와 봉사 사역을 3년 반 동안에 하시기 전에

    매우 경건한 삶을 사셨다는 것을 가장 근접거리에서 30년 동안이나 가장 가까이 함께 동거하면서 삶을 지켜보았던 야고보

    선생님이 이 경건한 사람으로 나타난 바 된 것을 통해서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매우 경건한 삶을 사셨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매우 강조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라는 어떤 측량의 척도에 따라 바로 야고보서를 통해서  들여다본다면

    야고보를 통해서 나타난 삶을 통하여 뭔가 미비하고 무언가 부족한 점을 보게 되지만 마가복음은 완전하고 온전합니다.

     

    야고보서가 없었다면 마가복음을 통해서 온전하고 완전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성령님 안에서 하나 되어 움직이는

    그러한 성령님 안에서 살고, 성령님 안에서 움직이시고, 성령님 안에서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성령님 안에서 하나

    되어 움직이면서 산 마가복음의 말씀 을 통해서 신약 성경의 경륜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하게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야고보서를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을 사신 신성한 생명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야고보는 구약의 어떤 신언자들과 이 예언자들, 구약의 인물들을 통해서 언급하고 구약의 실행의 말씀, 교훈의 말씀들,

    구약의 교훈의 실행들의 말씀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비교적 많은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야고보 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기록된 것처럼 신약의 신성한 생명에 관한 신약 경륜 안에서 이루어진 그 용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구약의 용어와 그 구약의 교훈들로 나타난 실행들로 되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자꾸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오게 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모습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비교적 야고보의 서신이 물론 땅에 속한 일들은 아니지만 비교적 마가복음이 없었더라면 야고보의 서신은 매우 우월하고

    탁월한 복음이었을 것입니다.그런데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계시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이 서신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측정할 때 비교적 비교의 대상에서 낮은 부분에 나타나짐으로 말미암아 마가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복음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 곧 주님을 쫓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게

    하여서 바로 우리의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살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께서 바로 우리 생명으로 우리 안으로 역사하는 것을 이렇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대한 주제와 내용이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과 이렇게 측량하여서 비교해 볼 때 모든 말씀이 어떤 것이 우월하고 어떤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만

    이 마가복음이 차지한 위치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으로 살 수 있도록 주님이 살아계시게 하여서 우리의 생명으로 그분 자신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 안에서 우리 안으로

    역사하여 주님 자신을 나타내게 하기 위한 마가복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우월한 복음서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위치가 조금은 불확실했기 때문에 기원 후 397년에 종교회의를 통해서 구약 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이

    채택이 되었는데요. 최종적이고도 공식적으로 신약의 일부로 이 야고보서가 인정은 되었지만 한없는 논쟁에 시달렸던 것이

    또 한편 야고보서였던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관련하여서 구약 성경의 용어와 실행들로 나타나져 있기 때문에 완전히 검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마가복음처럼 완전히 희지도 않는 어떤 불분명한 색깔인 회색의 색깔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야고보서가

    이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채택되기까지는 아주 말할 수 없는 큰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이 야고보서는 구약과 신약의 어느 정도 구약과 어느 정도 신약의 혼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깝게 본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구약과 신약의 혼합이라는 것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서에는 신약의 색채를 띠고 있는 장면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1장 18절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에 첫 열매의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빛들의 아버지께서 우리로 그 창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낳으셨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얼마나 신약의 색채를 띠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야고보서에 기록된 이 숨겨진 말씀과 또 율법에 대한 또 실행들에 관한 자유의

    율법과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님에 관하여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1장 21절에도 성령님에 관하여서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희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라고 숨겨진 말씀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25절 말씀에서도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린 자가 아니오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 라고 바로 자유의 율법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와 같이 숨겨진 말씀이 21절 말씀을 통해서 접붙혀진 말씀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을

    받으라는 말씀도 있고 또 4장 5절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 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쉬게 하기까지

    그 영은 바로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시죠. 성령님에 관하여 말씀하신 부분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 성경의 용어들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속한 것들이지만 이러한 것들이 부분적으로 강한 구약의 냄새와

    어느 정도의 짙은 구약의 색채를 지닌 서신 안에서 보여짐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마가복음처럼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르며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위하여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조금은 미진하다 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마가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따르고 그 신약 경륜을

    위한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노예로오신 구주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이상 안에 살 수 있도록 하게 한 바로 이 요인이 된 것이 바로 야고보서와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마가복음에 계시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곧 노예로 오신 구주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신세계였던 것입니다. 완전히 순결한 세계요 청결한 세계요 정말 흠과 점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계시된 주님의 생활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의 신약 경륜을 따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만을

    위하여 산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마가복음에 계시된 바로 노예로 오신 구주의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바로 이 마가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바로 실제이고 그리고 마가복음에 제시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오신 구주의로서의 전적인 온전한 삶을 사신 그분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본질이고, 그리고 마가복음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모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을 통해서 모형을 보고 마가복음을 통해서 본질을 보고

    마가복음을 통해서 실제이신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실체를 들여다봄으로 말미암아 그 하늘에 속한 이상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이상을 따라 사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보다 더 의롭고 의로움에서 멈추지 않고 보다 더 의롭고 거룩함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더 거룩하고 영적인 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더 우월한 영적인 자로 승화되어 승리에 찬 생활을 오늘만

    승리에 찬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이기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오신

    그러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살고 경륜에 따라 행하고 경륜에 따라 움직이며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영으로 살고 영 안에서 행하고 영에 의하여 움직이고 영을 통하여 말씀하신 한 단계 한 단계 역사하셨던 분을 통하여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온전하고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포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자들이 된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모든 교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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