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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 왕국의 불의함과 하나님 왕국의 의로움을 나타냄 / 마태복음 27장말씀 나눔방 2024. 2. 15. 20:50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 말씀 : 마태복음 27장
말씀 주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 왕국의 불의함과 하나님 왕국의 의로움을 나타냄
오늘은 마태복음 27장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총독과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심판에서 정죄를 당해 그 형벌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또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인류의 죄를 짊어져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의 따라 사형을 선고받고 하나님께 냉혹하게 버려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내용에 대해서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의 줄거리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예수님을 붙잡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었고(1절~2절),
이어서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주님께서 정죄됨을 뉘우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받은 은 삼십을 도로 갖다주고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되고 그들은 그 돈으로 나그네의 묘지를 삼기 위해 토기장이의 밭은 샀고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3절~10절)
이후 빌라도 총독의 재판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줄 의도로 명절에 죄수를 풀어주는 전례에 따라 죄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 누구를 풀어줄지를 유대인들에게 물었으나 그들은 모두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무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본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자신의 손을 씻으며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자신은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며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줍니다. (11절~26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희롱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다가 구레네 시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워가게 합니다. (27절~32절)
골고다 언덕에 이르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였고 지나가는 자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모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스스로를 구원하라’라고 주님을 조롱하고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함께 못 박혔던 강도들도 주님을 욕합니다. (33절~44절)
3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서 특별히 6시(낮 12시)부터 9시(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소리를 지르셨고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45절~50절)
이어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나 주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51절~53절)
이러한 현상들을 본 백부장과 함께한 자들은 두려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 있던 여자들에 관한 언급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의 새 무덤에 안치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54절~61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몰래 가져가 그분의 말씀대로 삼일 만에 살아났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릴 것을 염려하여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무덤의 문을 인봉하고 경비병을 세워서 그 무덤을 지키게 합니다. (62절~66절)
이렇듯 마태복음 27장의 외형적 줄거리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주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아 정죄가 되어 불의한 이방 군인들에게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또 세상 죄를 담당한 죄인이 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도 유죄를 선고받아 버림받아 죽는 이야기기 때문에 그분의 왕국(천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26장 31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짓눌림을 당하시면서 베드로 등 3명의 제자들에게 “왜 나와 함께 1시간만이라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라고 말씀하셨고 또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귀를 칼로 쳐서 잘라버리는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왕국의 백성이 될 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이기는 자가 되어서 그에 맞는 합당한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면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행한다고 할지라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천연적인 생명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가지고서는 주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밤에 잡히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버릴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자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주님을 붙잡자,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주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실 때 무리 속에 섞여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 베드로는 그가 주님의 제자라는 여종의 말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뒤에야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이 말씀의 표면적인 내용 또한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버리고 부인하는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책의 저자 마태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관점에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 곧 도래하는 천국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27장 말씀을 왕국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에 대한 심판과 정죄 그리고 로마 군인들의 조롱,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이후 나타난 놀라운 현상들 그리고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도래할 그리스도의 왕국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왕국에 관한 직접적인 표현은 전혀 없지만 의(義)와 불의(不義)를 비교하여 드러냄으로써 주님의 왕국에 대해 암시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6장 말씀 또한 왕국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천연적인 육적 생명을 가지고 사는 베드로의 삶과 부활 생명의 영을 쫓아 사는 그리스도와의 삶의 길을 대조하여서 이 세상과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기는 자의 모습과 이 세상과 죄와 마귀와 싸워 참패한 자,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님의 왕국의 의(義)와 세상의 불의(不義)에 대해서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세상과 죄와 마귀를 이긴 주님이시지만 패배한 자인 조연 베드로를 보다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부활 생명의 영을 쫓는 자의 삶과 천연적인 출생으로 얻은 천연적인 생명을 쫓아 사는 자의 삶의 결과가 얼마나 다른 지를 대조하여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생명의 영을 쫓지 않고 자신의 천연적인 생명을 쫓아 행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강조한 십자가의 좁은 길을 절대 통과할 수 없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갈 수 없고 주님의 왕국 백성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의 영적 의미는 26장과 아주 다른 영적 의미를 나타냅니다.
26장에서는, 주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 주님의 왕국을 위하는 일, 주님의 왕국 안에 들어가는 일에 있어 성공의 열쇠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계시하고 있고 아울러 성도를 대표하는 베드로가 가진 천연적인 생명을 통해서는 그 일들을 결코 성공할 수 없고 반드시 참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27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인류 전체의 불의함을 대조시켜 보여줌으로써 주님의 왕국에 관해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27장 처음에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19절에는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주님에 관해 꾼 꿈을 전해주며 “당신과 저 의로운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게 하소서. 내가 오늘 꿈에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것으로 고통을 받았나이다.”라고 권고하고 있어 주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신 것을 나타내고 있고,
24절 말씀에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심문하였으나 정죄당할 만한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였지만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해 달라는 유대인들을 설득할 수 없고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자신의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의로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맡으라”라고 말함으로써 재판을 담당한 빌라도 또한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우신 분으로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을 증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정죄받아 죄인의 모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불의한 자들에 의하여 고소를 당해 불의한 재판으로 정죄를 당하셔서 억울하게 십자가 죽음을 당한 것이지 어떤 죄나 어떤 결함이나 부족함으로 인해 정죄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 달라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어서 주님께서 심판을 받아 정죄되어 십자가에 죽으시는 내용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는 정죄받을 만한 조그만 흠과 죄도 없는 홀로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자들은 모두가 불의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Pontius Pilate )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AD 14∼37) 치하에서 속국이었던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를 다스렸고 유대인들의 고소로 시작된 재판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민중의 압박과 소요가 일어나 자신이 정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불의한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예수님을 정죄하고 사형 선고를 내려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불의한 재판의 장본인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년)에 따라면 빌라도는 로마 제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 때 유배를 당하여 자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놓아주려고 힘쓰다 결국 정치적인 부담 때문에 불의한 판결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장본인이지만(눅 23:22, 요 19:12), 그보다 더욱더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신들의 왕을 고소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은 로마 황제를 반역한 죄를 지은 것이며, 자신들의 왕은 오직 가이사뿐이라고 한 목소리로 빌라도를 압박해서 빌라도가 불의한 판결을 하도록 한 그들은 더욱더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을 성경은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2)
그런데, 마태복음 27장 1절과 2절에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는 얘기가 나오다가,
3절부터 10절까지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가 뉘우쳐 그 돈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과 대제사장들은 그 은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아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19:1~13, 32:6~9, 스가랴 11:12,13)
예수님께서 고소를 당하여 불의한 판결을 받으시는 긴박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재판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 곧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내용이 갑자기 삽입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판 배신자 가룟 유다의 말로가 처참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죄인으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주님을 판 당사자를 통하여 증거하고 또 그분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가룟 유다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행위가 불의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 27장에 삽입되어 있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야기는 가룟 유다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깨닫고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자신과 대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다는 것을 밝힘과 아울러 죄인으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실상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당사자들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른 것을 보게 되면 성경을 기록한 마태에게 영적인 감동을 주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고자 주신 영적인 의미를 자칫 잘못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님을 가룟 유다가 팔아넘겨서 이 세상의 심판에서 정죄를 받아 주님은 불의한 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지만 그분은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라는 것이며 가룟 유다는 자신이 그분에게 행한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깨닫고서 자기가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은 은전 삼십을 성전 안에 던지고 나와서 괴로워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는 얘기를 통해서 가룟 유다의 불의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전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지만 후에 주님께서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라고 고백하여 의로우신 예수님을 불의한 자신이 팔아넘겨서 너무나 큰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님은 의인이시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당하신 것을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가 의로우신 예수님이 죄인으로 정죄당하여 죽는 일을 돌이키려 하였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은 자신들과 상관없으니 그 죄는 그 자신이 당하라고 하며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가룟 유다는 성소에 은 삼십을 던져 놓고 자책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의로우신 예수님을 죽일 공모를 했을 때 자신들을 스스로 찾아온 가룟 유다에게 돈을 주어 예수님을 잡아 고소하고 또 민중을 선동해 재판을 담당했던 빌라도 총독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였고, 자신의 죄를 깨달은 가룟 유다가 자신들을 찾아와 돌려준 은전 삼십은 피 값이라 하여 성전고에 두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게 한 일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의(義)를 내세우고 경건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불의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세상의 불의함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 속에서 행해진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왜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님께서 의인이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은 도래하는 천국 곧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분의 왕국에 관한 얘기는 문자적으로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그 왕국은 의(義)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세워진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義)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왕국 곧 천국은 의(義)를 바탕으로 설립된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의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도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라고 하고 있어 천국은 의(義)의 기초 위에 세워진 의(義)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5장 20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주님의 왕국은 의(義)를 토대로 하여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래하는 왕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왕국은 의(義)를 바탕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27장에서 의(義)를 그 영적인 주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국 백성이 되어 왕국을 세우고 왕국을 돕는 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의로운신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협착한 길, 좁은 길, 외진 길을 따르며 의(義) 안에서 생각하고 의(義) 안에서 말을 하고 의(義)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7장은 의로운 왕국의 왕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불의한 세상에 속한 모든 자들은 모두 불의한 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한 유대의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책 의결 기구로서 유대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그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고 공회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70명으로 구성되어 모든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하는 기구였습니다.
하지만 정치 문제와 관련된 사형권은 로마 당국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의로우신 주님을 처형하기 위해서는 유대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재판을 의뢰해야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자신들의 법에 따라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결정하였지만 그들은 주님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에게 의로우신 예수님을 고소하였던 것이며 재판을 담당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고 매질하는 형벌로 사건을 종결하여 주님을 놓아주려 하였지만 처음부터 사형을 염두에 두고 고소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 것을 빌미 삼아 ‘자신들의 왕은 로마 황제뿐인데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것은 로마 황제에게 반역한 죄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하며 유대 민중을 선동하여 정치적 문제로 압박하여 결국 불의한 판결을 이끌어 냄으로써 결국 자신들의 종교 재판과 세상 왕국의 정치 재판에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정죄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들의 뜻을 성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요한복음 18:31 개역개정)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9:12 개역개정)
그래서 마태복음 27장은 재판 사건을 통해서 의(義)와 불의(不義)에 대해서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재판의 목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공의(公義)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과 세상 왕국을 상징하는 로마제국의 재판은 불의하며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그 무엇으로도 타협되거나 흔들릴 수 없고 죽음도 그 의(義)를 변하게 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유익 그리고 신변의 위험 앞에서 언제든지 거짓과 불법과 타협하여 불의(不義)를 의(義)로, 의(義)를 불의(不義)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왕국은 영원한 의(義)를 기초로 세워진 왕국이지만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 왕국은 불의(不義)를 기초로 세워졌다는 것을 유대와 로마제국의 불의한 재판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왕국의 불의한 재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누명을 씌워 죄인이라고 판결함으로써 십자가에 죽게 하였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진 죄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함으로써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공의로운 심판을 하셨고 아울러 의로우신 분의 죽음을 통해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義)를 성취한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 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로운 홀이니이다. (시편 45:6 한글 KJV)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편 89:14 한글 KJV)
유대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예수님이 의로우신지 아니면 불의한지를 가리는 것에 그 목적을 두어야 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음모를 꾸미고 돈으로 가룟 유다를 매수해서 불법적으로 일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소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과 고소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으셨던 것은 그들은 사형에 대한 합법적인 심판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 26장 11절에 세상 왕국의 합법적인 재판관인 빌라도 총독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을 때는 주님께서 대답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주권에 따라서 로마제국에게 세상의 통치권을 부여했고 유대 땅에 대한 통치권 또한 그들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세상의 통치권자로부터 임명을 받은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라고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 산헤드린 공회는 독립적인 통치권이 없었던 단체로서 사형을 위해 심판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고소와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안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에게 세상의 통치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유대 땅의 통치자로 임명받은 빌라도 총독은 하나님의 의(義)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재판에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 것이며 큰 자뿐 아니라 작은 자의 말도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지니 재판은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 송사가 너희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것을 들으리라." 하였고 (신명기 1:17, 한글 KJV)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은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의의 실현을 목표로 법체계를 잘 정비한 국가였지만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할 책임이 있던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의한 자들의 정치적인 압박에 따른 불의한 요구에 굴복하여 불의와 타협하여 잘못된 판결을 내림으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불의한 일에 동참하였는데,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했던 세상 왕국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 모두가 불의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왕국은 모두 불의하지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롭다는 것입니다.
세상 왕국을 대표하는 로마제국과 하나님을 섬기고 그 법을 목숨처럼 지킨다는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외형적으로는 불의(不義)를 배척하고 의(義)를 추구한다고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실상 불의(不義)에 속한 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대표하는 세상 왕국의 재판에 홀로 의로운 분으로서 당당하게 서 계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공정한 재판을 통하여 의로운 판결을 하도록 세상 왕국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재판장이었기에 그 법정신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반역죄로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불의한 자들과 공범자가 되어서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고 형벌을 집행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형 선고와 형벌은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 모든 나라에 속한 모든 자들은 불의하지만 오직 천국의 주인이시요, 왕이신 그리스도만 홀로 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안위와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불의한 재판으로 의인에게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였지만,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 이 세상의 불의(不義)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셨고 그렇게 세상 죄를 짊어짐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이 된 예수님은 그 의로운 심판으로 선고된 형벌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불의한 재판으로 예수님을 죽게 하였지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져 불의한 죄인이 된 예수님께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분에게 십자가 형벌로 쏟아 내셨는데, 바로 이것이야 말로 진실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이었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짊어진 죄인이 되어서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일은 의로우신 주님에게 세상의 모든 죄를 지우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불의한 세상 죄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의(義)를 성취한 일이야 말로 세상에는 없는 지혜롭고 의로운 재판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의(義)에 대한 관념과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관념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에 우리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묵상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무슨 말을 했습니까?
26장의 이야기 속에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베드로는 조연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조연인 베드로를 중심으로 전개시킴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서 실패하지 않고 이기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부인할 거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죽었으면 죽었지 결코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라는 여종의 말에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뼈아픈 실패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백성이 되는 일에 있어서 그리고 그 왕국을 위해서 일을 하는 자로서 실패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천연적으로 소유한 육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절대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생명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길 수 있는 생명은 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는 영이 되신 주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부여해 주신 그 부활 생명이신 주의 영을 좇아 사는 것만이 베드로처럼 실패하지 않고 주님처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으로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8 한글 KJV)
신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 가장 높은 생명을 가지고 그 생명을 좇아 살 때 이길 수 있지만 태어날 때 가지게 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절대 죄와 세상과 사탄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없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며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또한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26장은 교훈한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 27장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로우시다는 것과 예수님을 제외한 온 땅에 속한 세상 모든 자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대조하여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7장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 의해서 고소를 당하셔서 불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난을 당하셨으며 세상 죄를 짊어진 죄인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따라서 버림을 당하여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의 효력으로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 지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27장의 이야기 속에는 천국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의로우신 예수님에 대한 고소와 세상의 불의한 재판을 통해서 불의한 세상 왕국과 주님께서 주인이신 의로운 천국을 대조함으로써 천국은 의(義)의 기초 위에 세워지지만 세상 왕국은 불의(不義)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27장 말씀을 통해서 명확히 밝혀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왕국은 불의(不義)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세상 왕국이 비록 겉으로는 의(義)를 표방하고 있을지라도 실상 세상은 그 의(義)를 결코 이룰 수 없는 불의(不義)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만 의(義)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가지신 그 의(義) 위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왕국에는 의(義)가 없고 그리스도의 왕국 곧 천국에만 의(義)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의(義)로 가득 찬 나라이기 때문에 의롭지 못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러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의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10 한글 KJV)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0, 한글 KJV)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마태복음 6:33, 한글 KJV)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셨지만 불의한 세상 왕국 안에서 불의한 자들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 억울하게 십자가에 죽는 형벌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 속한 정부와 불의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누명을 씌워서 예수님 개인 죄에 대해서 십자가 형벌을 선고했지만 의로우신 하나님은 재판을 통해서 예수께서 짊어지신 세상의 불의한 모든 자들의 죄에 대하여 합법적이고 공의롭게 심판하셔서 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셨던 것이며 주님이 받으신 십자가 형벌은 사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당해야 할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의한 자들의 불의한 심판에 따른 십자가 죽음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따른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두 방면의 심판이 나타나 있는데, 하나는 세상 왕국의 한 개인에 대한 불의한 심판이며 다른 하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세상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세상 왕국이 의로우신 분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한 불의한 심판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에게 세상 죄를 지워서 그분을 십자가 형벌로 심판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 자들에 대한 구속을 가져왔습니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 3:17, 18 개역개정)
이것은 굉장히 깊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불의한 세상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시다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땅에 속한 세상 정부가 임명한 총독으로서 정의를 추구하는 법 정신에 따라 합법적이고 공정한 재판으로 합당한 판결을 내릴 의무가 있었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적법한 것임에도 불의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타협함으로써 죄가 없으신 분을 정죄하여 십자가 형벌을 선고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에 속한 세상 정부가 겉으로 아무리 의를 추구한다고 표방할지라도 그것의 근본이 불의(不義)를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세상 왕국은 결코 의로울 수 없어 존립의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런 죄나 흠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불의한 세상 정부의 잘못된 심판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계속 밝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조차도 스스로 그 입술을 통해서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파는 죄를 범하였다고 하며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은 은전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우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절~5절)
세상 정부의 재판을 주관했던 빌라도 총독 또한 그분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해 달라는 강력한 요구와 민란을 두려워하여 결국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함으로써 빌라도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유죄 선고를 하는 것은 그분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압박을 이길 수 없어서 그들의 뜻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유죄를 선고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정당하지 못한 불의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불의한 세상 정부와 불의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재판을 통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정죄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는 형벌을 받으신 것은 분명 불의한 일이었지만, 그러한 불의한 일들 속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그 의로우신 예수님께 지우고 그분을 심판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데 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나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게 하려는 뜻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義)는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한 사람의 무죄함을 밝혀 정의를 실현하는 세상의 법정신을 초월한 것으로서 의로운 분에게 세상의 모든 죄를 지워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함으로써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의 죄를 그분의 피로 속죄하고 그들을 값없이 의롭게 만들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의(義)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왕국의 불의함을 드러낸 사건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의(義)를 나타낸 사건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은 바로 누가 의롭고 누가 불의한지를 다루는 내용으로 세상 왕국도 겉으로는 의(義)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의 실체는 불의(不義)라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불의한 세상 왕국은 존립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멸망되어야 함을 보여준 것이며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한 의(義)를 드러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의(義)를 기초로 세워져 영원할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왕국이 불의한 재판으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근본적인 이유는 불의한 세상 왕국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義)가 밝히 드러남으로써 세상 왕국의 불의(不義)한 실체가 폭로되어 그들의 존립기반이 완전히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오히려 그들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그들의 불의(不義)에 대한 심판으로 돌아왔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그분이 흘린 피로 죄 사함을 받는 구원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불의(不義)에 대한 심판과 의(義)로 말미암는 구원이 동시에 두 방면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기묘한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이 세상 왕국은 불의(不義)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홀로 의로우시다는 것을 하나님 앞과 만유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 앞에서 증명해 낸 사건으로 이 세상의 왕국은 불의(不義)한 왕국이지만 온전한 의인이신 예수님에 의해 세워지는 천국은 완전히 의로운 왕국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롭지 못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들은 결코 의(義)의 기초 위에 세워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의롭게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분 안에 소유하신 생명으로 사탄과 죄와 세상과 싸워 승리하셨던 것처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 주는 영이 되신 주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낸 의(義)를 통하여 이 땅에 있는 세상의 모든 정부들, 통치자들 그리고 세상에 속한 모든 자들의 불의함을 폭로하고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義)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연구하며 그 율법 대로 살려고 했던 자들이었고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경배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겉으로는 의롭고 경건한 모습을 하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내면은 불의로 가득 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의함을 책망하였던 것이며 또 그들 앞에서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며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분의 의로운 삶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아임을 알렸음에도 그들은 끝까지 그분을 믿지 않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불의한 종교 재판을 통해서 예수님의 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음에도 신성모독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겉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義)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은 세상의 불의(不義)와 짝한 자들로서 자신들의 종교적인 지위와 기득권을 사랑한 것일 뿐 실상은 하나님의 의(義)를 미워하는 자들인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세상 왕국을 대표하는 로마 정부의 총독인 빌라도 또한 로마 법의 정신에 따라서 공정한 재판을 주관할 의무가 있는 재판의 책임자로서 심리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시기로 고소한 것을 알았음에도 사실대로 선고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지위의 안위를 위해서 불의와 타협하여 잘못된 판결을 한 것은 세상의 왕국 또한 자신들의 법에 의(義)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또한 결코 의(義)를 이룰 수 없는 불의(不義)한 존재인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명절이 되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에 따라서 빌라도 총독이 민란을 일으켜 살인하여 체포된 바라바(Barabbas, 아버지의 아들)와 예수님 중에 누구를 풀어줄지를 물었을 때 (17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무리들을 선동하여 바라바는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해 달라고 요구하므로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줍니다. (20~26절)
[채찍에 맞으시는 예수님]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53장 5절과 8절 말씀에서 예언한 내용이 성취된 것입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이사야 53:5,8 개역개정)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과 그 의로운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게 하소서. 내가 오늘 꿈에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것으로 고통을 받았나이다."라고 전했는데, 그 꿈은 하나님께서 빌라도 아내에게 계시해 주어 빌라도가 전해 듣도록 한 것이었지만 불의한 세상 정부는 의로운 예수님을 대적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1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것을 꾀하는가? 2 땅의 왕들이 나서고 치리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주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시편 2:1~2, 한글 KJV)
이 세상 정부를 대표하는 빌라도와 천국을 대표하는 의로운 예수님 사이의 큰 싸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는 의(義)의 기초 위에 세워진 왕국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조금도 물러서지도 않고 또 의(義)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과 죽음이 다가오는 가운데서도 그 의(義)의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의(義)로 인하여 다가오는 그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왕국에 속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풀어줄 의도로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자 명절에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누구를 풀어줄지를 물었고 종교지도자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한 목소리로 바라바는 살려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해 달라고 요구하고 무리가 더욱 소리 질러 예수님을 처형해 달라고 소리를 높이자 빌라도는 무리를 설득할 수 없고 오히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이것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자신의 총독직에 해가 될까 염려하여 옳은 판결을 내리려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의로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불의한 판결을 내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얻게 된 천연적인 생명은 자신이 아무리 의로운 생각을 품었다고 할지라도 그 생각을 의로운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불의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그 당시 베드로의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자신 속에 있었던 의로운 마음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의(不義)와 연합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인간이 아무리 그 마음 속에 의(義)를 추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가진 천연적인 생명은 그 본질이 결코 의(義)를 이룰 수 없는 불의(不義)하다는 것이며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생명의 영을 소유한 의로운 존재로서 그 의(義)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의(義)를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마태복음 27장의 핵심 주제는 이 세상 모든 왕국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그들의 법과 재판을 통해서 의(義)를 표방한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도 의로운 자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분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불의한 존재이지만 인간 대부분은 베드로처럼 스스로 그 의(義)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 죄악으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려는 계획을 알렸을 때, 아브라함은 죄인과 의인을 함께 멸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 오십 명을 위하여 용서하지 않으시겠냐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탄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오십 명으로 시작한 의인의 수를 줄여서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열 명까지 찾으면 어떡하시겠냐고 계속 탄원하였고 하나님은 그 의인으로 인해 용서하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탄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달리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의인 한 사람으로 인해 이 세상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 탄원하지 않고 의인 열 명에서 멈췄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탄원하는 아브라함]
결국 이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만이 의인이기에 하나님은 그 의인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10, 한글 KJV)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의(義)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들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義)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죄인들의 구주로 오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스로 의(義)를 이루려 했던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뼈아픈 실패를 통해서 자신이 불의(不義)한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참 구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 정부와 불의한 유대인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던 의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반면에 민란을 일으켜서 사람을 죽인 죄를 지은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라바를 유월절 명절에 사면하여 풀어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죄로 인해 불의한 자가 된 아들 곧 바라바인 우리가 바로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유월절 희생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바라바와 같이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야 할 불의한 우리를 그분의 피로 의롭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십자가에 담겨 있는 영적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로마서 5:9, 개역개정)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26, 개역개정)
사실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형벌은 유대인의 율법에 근거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처할 만한 죄인을 죽이는 방법은 돌로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한 죄명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였기 때문에 법에 따라서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법에 맞는 형벌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어 종교재판을 통해 죽이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반역하였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엮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총독에게 재판을 의뢰해 로마법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에 따라 주 예수님께서 형벌을 당하지 않고 당시 세상을 대표하는 로마 법에 따라 처형을 당하신 것은 그분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아무런 죄가 없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운 법에 따라서는 처형을 당하지 않고 불의한 세상의 법에 따라 부당한 처형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레위기 24:16 개역개정)
로마법에 따른 십자가 형벌은 정치범이나 아주 흉악한 죄를 지은 자에게 내리는 법정 최고형이었는데, 십자가 형은 단시간에 죽지 않아 그 어떤 형벌보다 죽을 때까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가장 극대화한 지독한 형벌이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주의 십자가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표 한 구약성경은 신명기 21장 22, 23절 말씀과 신명기 21장 8,9절이고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2,23 개역개정)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 21:8, 9 개역개정)
특히,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개역개정)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요한복음 3장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마태복음에서 네 차례에 걸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틀 전에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최후의 당부하신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정한 사형 방법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고 그 당시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방법은 로마 제국이 흉악범들과 정치범들을 처형하기 위해서 채택한 형벌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28절과 12장 32절에 자신이 땅에서 들려야 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인자를 들어올리는 그때에야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나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들을 말하노라. (요한복음 8:28, 한글 KJV)
또 내가 땅에서 들리우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오리라."고 하시니라. (요한복음 12:32 한글 KJV)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법정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그분의 죄가 밝혀져서 그 죄에 대한 합당한 처분의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가 없었음에도 불의한 자들의 거짓 누명과 정치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불의와 타협한 세상 정부의 법정이 의로운 분에게 유죄를 선고하였기 때문이며,
이렇게 죄인이 된 예수님께서는 로마 병정의 채찍에 맞으셨고 또 그들은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희롱하며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내쳤던 것입니다. (27장 26절 ~ 30절)
여러분! 예수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세기 3장 18절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땅은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에게 속임을 당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임한 저주는 땅이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었는데 주님께서 쓰신 그 가시 면류관은 죄로 인해 우리에게 임할 수밖에 없었던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에게 임한 엉겅퀴와 가시나무의 저주를 가져가셨던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
여러분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것들은 우리를 찔러서 상처를 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아담이 죄를 범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저주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말씀한 것이 앞에서 보았던 갈라디아서 3장 13절,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저주가 없어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왕이라 하여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왕의 홀을 대신해 갈대를 들게 하고 희롱한 뒤에 자주색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피로 얼룩진 옷을 도로 입혀서 처형의 장소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갈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보이셨는지 이사야서 53장 7절과 8절 말씀에서 예언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에 “그가 억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어 예수님께서 자신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데도 입을 열어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저항하지 않으시고 어린양처럼 그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천국의 기초인 하나님의 의(義)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53장 8절에 “그가 감옥과 재판에서 끌려갔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선포하리요? 이는 그가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음이요, 그가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형벌을 받았음이라.”라고 얘기하고 있어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매 맞아야 될 유대인들, 그리고 모든 인류들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셨지만 그 당시 예수님의 세대 중에서 그것을 깨달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너무나 슬픈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들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를 주는 가시, 그 가시에 있는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의 상징인 가시 면류관을 자신의 머리에 친히 쓰시고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이라고 베드로전서 3장 18절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하여 살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한글 KJV)
의인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불의한 두 범죄자들 사이에 주님을 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언한 말씀, 앞에서 본 이사야서 53장 7절과 8절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문당하시고 매 맞음을 당하셔서 너무나 지치고 힘든 몸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실 때 너무나 힘에 겨워서 그 십자가를 제대로 끌고 가지 못하자 로마병정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대신 지고 가게 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지워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십자가 길, 그 협착하고 외진 그 길을 따라오라는 주님의 교훈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구레네 시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셔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언덕, 골고다(Golgotha)는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 한 것으로 마가복음 15장 22절에서 ‘해골’을 의미한다고 하고 있고 또 이 골고다는 라틴어로는 해골의 뜻인 ‘칼바리아’(Calvaria)이며 영어로는 갈보리(Calvary)로 칭하고 있습니다.
골고다 또는 갈보리는 해골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멀리서 그 언덕을 보게 되면 마치 사람의 해골처럼 보여서 아마도 그렇게 부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그 골고다 언덕,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로마 군병에 의하여 옆구리를 찔림 받아 피와 물을 흘려 그 피와 물이 골고다 언덕을 적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멸절시킨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어떤 자가 마취 효과가 있어 십자가 고통을 감해주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고통을 모두 받으시기 위해서 거부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27장 34절)
쓸개 탄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쓸개나 몰약은 감각을 무디게 하는 마취 성분이 있는 것으로 그것은 혼합한 포도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취 성분이 있는 혼합한 포도주를 거부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경륜 속에서 건네주신 그 죽음의 잔, 피의 잔을 조금도 남김없이 마시고자 하는 구세주의 온전한 순종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35절에서 저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장면은 시편 22편 18절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18, 개역개정)
이 시편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로마 정치의 어두운 면모를 폭로한 것입니다. 이 세상 정부를 대표하는 로마의 사악하고 흉악함이 어떠한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37절 말씀에 예수님의 머리 위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라는 죄명을 붙였습니다.
왜 왕 얘기를 언급합니까?
왜냐하면 마태복음이 왕국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의인이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세상 정부로부터 심판을 받아 불의한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바로 도래할 왕국의 주인으로서 유대인의 왕이신 것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 빌라도 총독을 통해서 그분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라는 죄패가 붙여진 것은 사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붙인 죄패]
그리고 38절에 불의한 강도 둘 사이에서 의로우신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심으로 불의한 자들의 죄의 짐을 지신 것은 이사야서 53장 9절 말씀을 성취한 장면인 것입니다.
그때에 두 명의 강도들이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편에, 또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마태복음 27:38, 한글 KJV)
그가 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의 무덤을 마련하였으며 그의 죽음을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그의 입에는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 (이사야 53:9, 한글 KJV)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고 그의 입에 어떤 속임수가 없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죽어서는 부자의 무덤에 있게 되었다’라는 이사야서 말씀은 마태복음 27장 57절부터 나오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바위를 파서 만든 새 무덤에 주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안치하는 장면으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27장 39절과 40절 말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짓는 자여, 너 자신을 구원하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가셔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실 때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에게 명하여 빵이 되게 하라”라고 말한 것과 같이 똑같은 유혹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봐라” 또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 보아라”라고 하였고, 사명을 마지막 완수하는 십자가에까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조롱함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격을 소유한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어 인류를 구원하는 사람의 아들 곧 그리스도로 죽어야 하는 사명을 어떻게든 좌절시키려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복하여 집요하게 시험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요동함 없이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행하심으로써 마귀의 시험을 돌파하고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말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오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일 수는 있지만 우리 인류를 구원할 인자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실 수는 있지만 죄 가운데서 인류를 대속하는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의 자격을 가진 분이실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속주가 되실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셔서 그 무고한 죽음의 대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셨다면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스스로 나타내 보인 것이기에 우리 인간을 대표한 자로서 인간을 위한 구주로서의 자격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셨을 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반복해서 시험함으로써 어떻게든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가와서 주님을 실족시켜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려고 한 사탄의 집요하고 완악한 흉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 불의한 세상 모든 자들을 대표하는 이들까지도 의로우신 주님을 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중에 오른편 강도는 이후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불의한 자가 의로우신 주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통치자를 상징하는 빌라도도 불의했고 주님을 조롱하는 유대 백성들과 유대 종교자들도 불의했고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도 불의했고 주님과 함께 못 박혔던 오른쪽과 왼편의 강도들 또한 불의한 자로서 예수님을 대적하였고 로마 제국의 군병들도 모두 불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어서 달려 죽으신 주님 외에는 모두가 세상 정부에 속한 불의한 자인 것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그들이 의로우신 예수님 앞에 행한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에게 행한 모든 것들, 몹쓸 행위들은 불의한 세상 나라에 속한 자로서 모두가 불의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7장 45절, “제 육시에서 제 구시까지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더니” 이 말씀을 기점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는 세상 죄를 짊어진 대속제물로서 의로우신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정(밤 12시)을 하루의 시작점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로마의 시간 계산법(현대 시간)에 따르면 유대시간 제 육시는 현대 시간 낮 열두 시(정오)에 해당합니다. 유대의 하루는 어두워질 때(저녁 6시) 시작해서 다음날 어두워질 때(저녁 6시)까지 이기에 현대의 시간보다 6시간이 빠르므로 유대인의 시간에서 6시를 더하면 지금 현대의 시간을 산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덮인 시간(6시부터 9시까지)을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 시간으로 환산하면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에 덮인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환산된 현대 시간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가복음 15장 25절에 3시(현대 시간, 오전 9시)에 달렸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어 주님께서 현대시간으로 오전 9시에 달리셔서 오후 3시까지 총 6시간 동안을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당하다 죽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삼시가 되니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 박더라. (마가복음 15:25 한글 KJV)
앞서 본 말씀에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오전에 십자가에서 달리신 3시간(9시부터 12시)이 지난 두 번째 그룹에 속한 시간대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전에 9시부터 낮 12시까지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세상 사람들의 불의한 심판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지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예수님께 의로운 방법으로 개입하셔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불의한 자로 취급하여 죽게 하신다는 성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전 9시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고난을 당하시다가 운명하셨습니다.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오전 3시간 동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정죄를 당하셔서 죄 있는 자로 취급당하여 핍박과 조롱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3시간 동안의 십자가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핍박받으신 것이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의 그 시간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은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것, 소극적인 것, 아담 안에 속한 인류의 모든 죄를 제거하는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대속 제물로서 주님께서 의로우신 하나님께 친히 징계를 당하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우리 인류를 위해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대속제물로서 희생시킨 시간이 바로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다는 것을 이사야서 50장 10절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였기에, 주께서 그를 고난에 두셨도다. 주께서 그의 혼을 속죄제물로 만드실 때, 그가 자신의 씨를 보리니 그가 자신의 날들을 늘릴 것이요, 주의 기쁨이 그의 손에서 번창하리라. (이사야 53:10 한글 KJV)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기를 스스로 자원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자원해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속죄 제물과 속건 제물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레위기 4장과 레위기 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우리의 죄를 위해 주님을 대속물 곧 속죄제물과 속건제물로 희생시키셔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때 어둠이 온 땅에 임했다고 마태복음 27장 45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온 땅을 덮였다는 것은 우리의 죄들, 아담 안에 속한 그 어두운 것들, 소극적인 것들, 냄새나는 것들, 누룩처럼 부정한 것들, 속된 것들, 이 모든 것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 위에 덮어졌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들이 처리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로 다 모아졌다는 것이 어둠이 온 땅에 덮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의한 모든 죄인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어둠 가운데 내던지셨고 율법의 엄정한 지팡이로 주님을 때리심으로 주님의 영이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50절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치시고 그분의 영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내어주신 그분의 영 안에는 참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은 이걸 혼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혼이 아닙니다. 혼은 생명이 적셔진 바 된 것이고, 실제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은 영입니다. 우리 영 안에 하나님의 그 신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 가장 높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내어 주심으로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내주하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45절 말씀에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그때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져 죄인이 된 구세주를 심판하므로 의로우신 구세주이지만 인간을 위해서 죄인이 된 그분을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46절 말씀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주님께서 오후 3시쯤 해가 어두워질 무렵에 돌아가신 것은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12장 6절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라는 말씀처럼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돌아가신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오후 3시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 크게 소리 지르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의로우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불의한 모든 자들의 죄들, 소극적인 것들, 부정적인 모두 것들을 자신 안에 취하여 담아두심으로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불의한 자로 취급하여 내동댕이쳐서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로운 율법의 막대기로 죄인 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때려서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의로우신 그 예수님이 불의한 죄인들을 대신하셨다고 베드로전서 3장 18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하여 살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 18절, 한글 KJV)
그리고 불의한 우리들의 죄들을 담당하셨다는 말씀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24 한글 KJV)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꼭 이 성경을 읽으시고 묵상하시길 권면합니다.
의로우신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불의한 죄인인 우리들을 대신하신 것이고 불의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이사야서 53장 6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 (이사야서 53:6 한글 KJV)
그래서 우리를 위해 의로우신 예수님이 불의한 죄들을 짊어져 죄인이 되시고 죄 자체가 되셨다는 것이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후서 5:21 한글 KJV)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마태복음 27장은 완전한 의(義)이신 예수님과 세상 나라 가운데 속해 있는 모든 불의(不義)를 대조하여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에게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오전 9시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시기까지 6시간 동안 달리셨는데,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의 3시간 동안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의한 처분을 받아 온갖 불의한 행동과 불의한 말로써 핍박과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에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셨는데, 먼저는 그리스도께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게 하셨고 죄인들만 대신하면 죄가 없어지지 않으니까 우리를 위해서 죄까지도 담당하셔서 죄 자체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어둠이 3시간 동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뿐만 아니라 온 땅을 뒤덮었다고 마태복음 27장 45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육시에서 제 구시까지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더니(마태복음 27:45 한글 KJV)
여러분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성경에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고 말합니까?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에만 어둠이 임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히 성경은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세상 모든 죄들을 담당하시고 모든 죄인들을 친히 대신하시고 죄 자체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들을 담당하셨다는 것이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는 얘기입니다.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임함]
이 어둠이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덮였다는 이 말씀은 얼마나 중요한 얘기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시고 죄 자체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대속물로서 고난 받으시는 때가 바로 낮 12시부터 오후 3시간 동안의 시간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바로 불의한 인간이 행한 모든 죄들과 불의한 죄인들과 불의한 죄 자체를 모두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46절에서 의로우신 주님은 오후 3시경 어둠 가운데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는데 사람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고 계실 때인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 동안에는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우신 주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불의한 자들에 의하여 의로우신 예수님이 핍박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불의한 처분을 받고 계셨을 때 오전 3시간 동안의 고난 속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불의한 사람들에 의해서 불법적인 처분을 받고 계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서 그분의 임재 안에 있는 돌봄과 은혜가 함께 했지만 낮 12시가 되었을 때부터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을 대신하고, 죄들을 담당하시고, 죄 자체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자가 되셨기 때문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는 불법적인 세상 사람들의 불법적인 처분으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있었지만,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을 대신해서 세상의 모든 죄들을 자신 안에 품어 죄인이 되시고 또 죄 자체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서 깜깜한 어둠이 주님께 임했기 때문에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고 있다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생명의 떡)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3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사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십자가에 달렸던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도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와 함께 하는 누림이 있었는데 세상 죄를 짊어진 죄인이 됨으로써 그 누림이 완전히 끝나고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견디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바깥은 영하 5도로 매우 춥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깥에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가 갑자기 옷을 벗어버리게 되면 그 추위 때문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 되어 함께 하며 함께 누리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 단절된때를 견디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한 번도 단절된 순간이 없었는데 그 순간에는 주님께서 죄인이 되심으로써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너무나 사랑하는 하나님과 단절되는 상황이 닥쳤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너무나 두렵고 놀라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너무나 슬프고 두렵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그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천국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상황 곧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아 하나님과의 임재가 단절이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죄를 전혀 알지 못하고 그 죄를 티끌만큼도 용납할 수 없는 완전한 의를 가지신 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므로 죄인이 되셨고 또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의 완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였던 분으로서 결코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었던 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죄인이 되어서 자신의 생명보다 더 신뢰하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냉혹히 버림받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어서 냉혹히 버림을 받아 매를 맞는 그 상황에서도 그분은 자신을 버리고 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분께서 그처럼 미워하는 죄를 짊어지셔서 불의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셨고 결코 분리될 수 없었던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불의한 자인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베드로전서 3장 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하여 살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 3장 18절, 한글 KJV)
그리고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는 말씀이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 한글 KJV)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죄 자체가 되셨다는 말씀이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한글 KJV)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 버림을 받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전체 말씀은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그분 위에 두셨던 때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사야서 53장 6절 말씀을 3편에 걸쳐서 교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 (이사야 53장 6절, 한글 KJV)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에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 제단 위에 올려지셨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불의한 죄들을 대신 짊어져 죄인이 된 예수그리스도를 그분의 의로운 법에 따라서 심판하시고 그 형벌로 그분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에 불의한 죄인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우리를 위해 죄 자체가 되셨다고 하였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죄인들을 대신하셨다’라고 베드로전서 2장 24절과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에서 계속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어서 십자가 제단 위에 올려 놓인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로운 법에 따라 심판하시고 죄에 대한 형벌로 사형을 선고하시고 그 형벌을 집행하여 돌아가시게 한 것이 바로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에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대속제물로 십자가 제단에서 희생된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대속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오후 3시간 동안에 불의한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시므로 자신은 죄 자체가 되셔서 불의한 죄인을 대신하셨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의로운 법에 따라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전적으로 의(義)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마태복음 27장 말씀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義)은 의를 기초로 해서 세워진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46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주님의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해면을 가져다가 식초에 적셔서 갈대에 꿰어 주께 마시라고 주었지만 주님을 조롱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는지 보자’라며 ‘가만히 두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후 주님은 숨을 거두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신 것을 아시고 ‘목마르다’하셨고 그들이 식초를 해면에 적셔 우슬초에 매어 주님에 입에 대어주었고 주님께서는 그 식초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며 고개를 떨구고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30절)
마태복음 27장 50절에 ‘예수님께서 다시 큰 음성으로 소리 지르신 후 숨을 거두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러 성경에서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숨을 거두시더라’라고 ‘숨’으로 표현하고 또 어떤 성경에서는 ‘영혼’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숨’이 아니라 생명을 포함한 숨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영’이 떠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혼이 떠났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 안에는 참 생명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 안에만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 가장 높은 생명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과 마가복음 15장 37절, 누가복음 23장 46절에서도 ‘숨을 거두셨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자체가 되시고 죄인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영을 버리심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신 후 숨을 거두시니 (마가복음 15:37, 한글 KJV)
그때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하시고,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숨을 거두시니라. (누가복음 23:46, 한글 KJV)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영을 버리셨다’, ’영을 떠나게 하셨다’라는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말씀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실상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셨고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후의 마태복음의 말씀, 51절부터 56절까지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발생된 죽음의 효능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0절에서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외치시고 숨을 거둠으로써 그분의 영,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고 아울러 생명 주시는 영이 육체에서 해방되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써 펼쳐진 죄들로 인해서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관계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완전히 해소가 되었다는 의미로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던 것입니다.
[찢어진 성소 휘장]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에게는 예수의 피로 인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이 있나니 20 이는 그가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해서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우리를 위해 바치셨음이라. (히브리서 10:19,20 한글 KJV)
찢어진 휘장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조그만 흠도 없는 완전히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죄를 담당하셔서 죄인을 대신하시고 죄 자체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휘장으로 상징된 죄가 된 주님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단절시켰던 큰 장벽이 어떻게 완전히 폐하여 사라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죄가 되신 그리스도의 육신 곧 휘장으로 상징된 그분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의로우신 주님의 영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그 일을 행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인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심으로 죄 자체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형벌로 그 죄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켰던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의로우신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아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져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인간을 하나님 자신이 임재하고 있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오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무리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을지라도 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죄인 스스로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결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에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길이 열렸다는 증표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휘장은 창세기 3장 24절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이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도록 그 길을 닫아 그룹들로 그 문을 지키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사이가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려 주님을 믿어 의롭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은 휘장이 찢어지고 아울러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놀라웠으면 세상이 깜짝 놀라 진동하고 바위가 갈라지는 것으로 그분의 위대한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정도의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터졌다는 것은 사탄의 나라의 기초가 완전히 흔들려 훼파된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사탄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사탄의 왕국의 가장 중요한 곳, 그곳이 흔들림으로써 사탄의 나라의 근간이 훼파된 것입니다.
그러면 바위가 갈라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커다란 암석 덩어리인 바위가 갈라졌다는 것은 사탄의 왕국에 속한 크고 견고한 난공불락의 요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 만난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었던 것처럼 사탄의 왕국을 지키는 견고한 성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리고 성 붕괴]
바위가 터진 것은 사탄의 왕국에 속한 요새들이 여리고 성처럼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라면 땅이 흔들린 것은 사탄의 왕국의 기초가 되는 근간들이 흔들려 훼파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의로우신 주님이 불의한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심으로써 나타나게 된 효능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땅이 진동한 것은 사탄의 기초가 되는 그 근간이 훼파되었다는 것이며 바위가 쪼개진 것은 사탄의 왕국을 지키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러한 놀라운 효력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의로우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충족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52절에는 더 놀라운 얘기가 나옵니다.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고 이어서 53절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이 열렸다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 그것은 죄와 사망이 완전히 무력화됐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정복되어 무효화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덤이 열린 것이 보통 일입니까?
주님께서 죄로 인하여 발생된 사탄을 완전히 정복하여 그 손에 쥐고 있던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빼앗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는 것이 무덤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는 것은 뭡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이 크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53절에는 일어난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2장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로 수확된 밀 한 줄기로 볼 수 있으며, 아울러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은 주님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여 수확된 밀 한 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잠자던 자들 중 부활의 첫 열매이셨고 성도들은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수확된 열매들 곧 밀 한 단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예표 한 것이 레위기 23장 10절과 11절에 나오는 초실절 규례인데 바로 유월절 이틀 후 곧 안식일 다음날에 수확의 첫 열매들의 단을 가져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흔들어 드려야 했습니다.
[수확의 첫 열매들의 단]
10 "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거기서 수확을 거두면, 너희는 수확의 첫 열매들의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올지니라. 11 그러면 그가 주 앞에서 그 단을 너희를 위하여 받아들여지도록 흔들지니 안식일 후 다음 날에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지니라. (레위기 23장 10,11절 한글 KJV)
성경은 주님과 함께 부활한 자들이 몇 명이라고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얘기는 밀 한 줄기가 아닌 밀 한 단으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주님의 부활과 함께 일으켜진 성도들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10명인지 아니면 20명인지 또는 50명인지 모르지만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으켜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온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생명 주시는 영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그들의 영 안에 들어감으로써 죽어 있던 성도들이 살아나 그들의 몸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내 보였는데 그 후에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셋째 하늘에 들어갔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주님 외에는 그곳에 들어간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초실절 규례가 예표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때 첫 열매이신 주님과 함께 ‘수확된 열매들의 단’인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생명주는 영을 받아 살아난 자들로서 그때 얼마나 큰 생명 주는 영의 역사가 있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나타난 특별한 표적과 이적들을 본 로마 백부장과 파수꾼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자칫 우린 백부장만 고백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은 분명 백부장과 함께 주님을 지키던 사람들 또한 동일한 고백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55절과 57절에는 예수님을 따라와 섬겼던 여인들 중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모친 마리아, 세베대의 자녀들의 어머니 살로메(예수님의 이모)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님의 죽음과 그 죽음으로 인해서 나타난 이적들을 목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7절부터 60절까지는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자기의 새 무덤에 안치한 얘기가 나옵니다.
불의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정부는 의로우신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여 악한 자들과 함께 두어서 예수님의 불의함을 나타내려 하였지만 이사야서 53장 9절에서 예언하기를 그분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부자와 함께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악인들의 무덤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자로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그분이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파 놓은 새 무덤에 안치됨으로써 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이것은 그분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신 것을 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62절부터 66절까지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저 미혹하던 자가 살아있을 때 말하기를 ‘삼 일 후에 내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였다”라고 말하며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체를 훔쳐가고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면 처음보다 더 악화될 것이니 무덤을 굳게 지키라고 요청하였고 빌라도는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할 수 있는 데까지 굳게 지키라."라고 하여 그들은 경비병을 세우고 돌문을 봉인하여 주님의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게 합니다.
하지만 부활을 불신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무덤의 돌문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워 지키게 한 행위는 오히려 주님의 부활이 거짓이 아닌 명백한 사실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주님의 무덤의 문을 봉인하지 않고 경비병을 두지 않았다면 그들의 의심처럼 주님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가져갔다고 확신하게 되어서 부활의 진위에 대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그들은 부활을 결코 믿지 않았기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덤을 지키고 돌문에 봉인을 한 행위 또한 부활이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려는 하나님의 깊은 안배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교제를 나눈 마태복음 27장 말씀의 핵심 주제는 의(義)와 불의(不義)에 대한 얘기입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불의한 세상의 왕국의 통치자에게 심판을 받아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그리스도에게 세상 죄를 지게 하여 죄 자체가 되게 하시고 죄인들을 대신하게 하시고 죄인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로우신 법에 따라 심판하여 사형 선고하시고 십자가 형벌을 받아 죽게 하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자들의 죄를 씻어 의롭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신 놀라운 지혜이며 또한 하나님의 의(義)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오늘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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