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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태복음:15:21~28/막:7:24~30/ 가나안 여인의 놀랍고도 큰 믿음 2부
    말씀 나눔방 2024. 2. 12. 19:18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잠시 전에 우리가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이 마태복음 15장 21절부터 28절까지도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두 가지 말씀은 왕으로 오신 구주를 증명하는

    마태복음과 노예로 오신 구주를 증명하는 이 마가복음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이방인들을 작은 개들이라고 마치 외형적으로 멸시하는 듯한 이 메시지를 마태복음 15장 25절과

    마가복음 7장 27절 말씀을 통해서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나안 여인은 결코 마음 상해하거나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말씀을 듣고 격려를 받고 소망 가운데 주님께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인 하나의 큰 상 위에

    올려진 큰 생명의 떡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늘에 속한 왕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는데 그 이스라엘의 유대

    백성들이 하늘의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거절하고 반대하고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의 몫으로

    그 상위에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유대 백성들로 대표되고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내 팽겨짐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방 땅으로 대표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내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주어진 몫인 부서진 부스러기가 되셨다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님 자신이 생명의 음식으로서 분배하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알고 적극적으로 노예로 오신 구주께로 큰 믿음을 가지고 다가섰을 때 예수님 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 라고 하시면서 놀라는 장면이 마태복음 15장 28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성경을 통하여 가장 놀랍고도 가장 큰 믿음을 보인 자가 누구일까요?

    보통 대부분의 성도들은 백부장의 믿음을 가장 크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실상 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이방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물론 각각의

    어떤 여러 유형의 방면에서 특별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믿음의 크기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지만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야

    말로 이 노예로 오신 구주의 마음을 참으로 흡족하게 한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마태복음 15장 22절에서 주님을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나와서 이렇게

    만났을 때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하는 주님이라는 칭호와 그리고 그분의 인성을 암시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그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정말 말할 수 없이 놀라고 기쁜 가운데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주님의 그 정체에 대해서 이  전형적인 이방인으로

    상징되고 있는 마가복음 7장 26절에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바로 가나안 족속의 후손인 페니키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늘에 속한 생명의 떡으로 오신 것을 안 이 가나안 여인을 보고 정말 놀라워 하시면서

    두 번째 시험인 마태복음 15장 24절 그리고 마가복음 7장 27절에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이방인으로 취급되고 있는

    작은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2차적인 검증의 시험을 하실 때 그 여인은 놀라운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알아봄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나타낸 그 가나안 여인에 대한커다란 믿음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를 받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가장 놀라운 큰 믿음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페니키아 가나안 여인이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을 그것도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인 하나의 커다란 이스라엘 자손만을 위한

    잔치를 베푸는 상위에 하늘에 속한 왕께서 땅에 내려오셨는데 그들의 거절과 배척으로 인하여 이방 땅으로 내동댕이쳐짐으로 말미암아 어제 1부에서 인용했다시피 케익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면 그 케익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 이방인들의 거절로 인하여 이스라엘 거룩한 땅에서 내쳐진바 된 주님께서는 이방 땅 두로와 시돈지방에 있었던 모든

    전형적인 이방인과 다중적인 이방인을 상징하고 있는 그 이방 사람들에게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먹을 수 있는 작은 떡 부스러기가 되셨다는 이것이 이 가나안 여인에 대한 말씀의 주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신성한 경륜의 주제이며 중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안배와 주권에 따라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 안에 살고 있는 유대 백성들이

    소홀히 하고 간과하고 무시하고 반대하고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이방 땅에 무참히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들

    모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음식으로 오신 바로 이 노예로 오신 구주를 생명의 음식으로 분배받을 수 있는 그러한 놀라운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보면서 하늘의 왕께서 바로 그러한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진자들을 이방 열국 가운데 흩어져 존재하는 그런 자들 또한 찾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 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열국의 이방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는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바로 이 생명의 떡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분배되어지는지를 그 경륜 안에 속한 하나님의 그 주권을 우리가 이렇게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6장35절 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인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그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 자신이 스스로 생명의 떡이다 생명의 빵이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와서 하늘에 속한 왕, 하늘에 속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친히

    내려와서 세상에 생명을 전달해 주기 위한 생명을 공급해 주고 생명을 분배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라고 친히

    자신을 요한복음 6장 33절을 통해서 계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이 세상에 유대인들의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명의 떡으로 왔지만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신성한 경륜 안에는

    그 유대민족들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유대 민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복음이 전파되어서 세상

    모든 만인들을 위한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명의 떡이 되려고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신 노예로 오신 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고자 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두 가지 같으면서도 상이한 뜻을 가지고 계시해

    주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생명에 관한 말씀이 이렇게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만 특별히 똑같은 관점에서 본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구주를 증명하는, 또 마가복음은 노예로 오신 구주를 증명하는, 또 누가복음은 아들로 오신

    구주를 증명하는 이 똑같은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공관복음서에는 요한복음처럼 생명에 대한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7장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고 이 자녀들에게 주는 생명의 떡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도 씨뿌리는 자와 그리고 생명의 씨 그 자체도 그리스도이신  생명에 대해서 미리 언급해 준 다음에

    7장에 도달했을 때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분이 말씀 하시기를 우선순위에서 먼저는 자녀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경륜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에 따른 뜻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의 동족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민족이고 선택한 민족이라는 그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그러한 울타리에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주님의 안배와 주님의 뜻, 주님의 경륜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그때 당시에

    유대인들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27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되 먼저 자녀들을 배부르게 할지니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 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합니다 라고 얘기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사실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이

     더럽고도 악한 영인 귀신 안에 사로잡힌바 됨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주님께 찾아온 그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베푸는 일을 선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먼저 그 가나안 여인에게 유대인의 몫으로 오신 생명의 떡이 셨으나 그들의 거절로 인해서 내동댕이 쳐짐으로 말미암아 그 이방 사람들에게로 부스러기가 되어 그 이방 사람들이  노예로 오신 구주의 생명의 떡을 분배 받을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에 관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배고파 허기지고 목말라 하고 공허한 자녀들을 먼저 먹이기 위해서 오셨다 라는 말씀을 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성경 말씀 통해서 우리가 암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단지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론 그 모든 기적들과 이적과 표적들을 행하고

    모든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은 사실은 주님께서 그러한 치유하시고 또 복음 전파를

    통해서 말씀을 가르칠 때에 사실은 생명의 떡을 나눠주고 공급해 주고 분배해 주고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치유할 때에도 역시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떡을 분배하고 계신 주님을 우리가 들여다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이 먼저는 유대 백성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나타난 이방인들에게 생명

    양식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오셨다 라는 것을 계시해 주기 위하여 마가복음 6장 30절부터 44절까지 오병이어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을 먼저 먹이고 계시는 것을 계시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세상에 실제적으로는 이적과 표적과 기사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고 계시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을 주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분배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먹이는 것은 사람들에게 넣어 주어서 그들이 배부름과 만족함을 갖고 오게 할 수 있는 분배하는 문제인데

    분배가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 라고 하는데요. 바로 음식을 나눠준다 이런 뜻입니다.

    분배는 뭡니까? 나눠주는 것 그래서  병을 치료할 때 생명 양식을 먹이고 있었고, 귀신을 쫓아낼 때 생명 양식을 먹이고 있었고, 왕국의 씨를 뿌리고 있었을 때도 생명의 양식을 먹이고 있었고, 천국 복음을 통하여 바로 이 진리를 가르치실 때에도 역시 생명을 분배해 주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도 실상은 생명을 분배하고 계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음식을 나눠주는 것이 최초로 성경을 통해서 예표로 보여주고 있는 자가 이집트의 바로 왕의 아주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이집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원근 각지에 있는 배고파하고 허기지고 목말라하고 정말 공허한 그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그 모든 세상 열국들에게 선한 청지기로서 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애굽에서의 국무총리로 일하였던

    이집트 왕의 종으로서 충성스럽게 일을 하여서 음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급해주고 나눠줬던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분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하늘의 생명의 떡을 세상 가운데 나눠주시는 실체이신 분입니다.

    이것의 예표가 바로  애굽에서의 선한 청지기로 일을 했던 요셉이라는 국무총리 바로의 종으로서 일을 했던

    그 자인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음식을 공급받고 그 주위에 있는 하다못해 요셉의 친족들까지도 그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요셉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음식을 그들에게 나눠줘서 그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청지기로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람, 음식을 공급해 준 분배자가 바로 애굽에서의 요셉인 선한

    청지기이었다면 주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음식을 공급하고 음식을 분배해주는 하늘에 속한 생명의 음식으로

    세상에 오셨다라는 것을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서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음식을 분배해주는 자로 오셨지만 먼저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집트에서 선한 청지기 직분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시켜준 요셉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노예로 오신 구주이신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바로 참 요셉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서는 바로 하늘에 속한 그 생명의 떡을 친히 생명의 떡 그 자체가 되셔서 음식을 공급하는

    분배자로서 또 양육하는 음식이신 자신을 이 생명의 떡이신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양육하는 자라고 성장하고 발전

    단계를 통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소산물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양육하는 음식, 생명 안에서 생명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양육하는 음식이신 자신을 분배해 주시는 노예로 오셔서 봉사하시고 일하시고 수고하시고

    움직이시는 주님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배고픈 자들에게 만족시키는 생명 공급의 떡으로서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생명의 빵으로서

    자신을 분배하시는 것이 가나안 여인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사실은 이 가나안 여자가 배고팠고 허기졌던 것입니다.

    그 허기짐으로 인해 만족함이 없고 누림이 없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 배고픈 자들을 참으로

    만족시켜주는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생명 안에서의 생명의 성장을 갖고 오게 하고, 생명의 변화를 갖고 오게 해서

    참 소산물인 열매가 될 수 있도록 그 배고픈 가나안 여인에게 생명 양식을 분배해주기 위한 것이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생명 양식을 공급해주고 분배해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생명 음식을 공급하는 분배자가 그리스도이셨고, 또 이 음식 그 자체가 그리스도이셨고, 그 음식을  쪼개서

    먹기 좋게 아주 조그마한 부스러기가 되게 하신분도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부스러기를 먹는 자가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부스러기를 취하거나 먹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신성한 이 신약 경륜 안에서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인 베들레헴이라는 떡상위인 유대 땅에 올라오셨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분을 거절하고 반대하고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상 밑으로 내던져짐을 통하여 이방 땅에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먹을 수 있는 몫인 부서진 부스러기가 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가복음 7장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그 떡 자체가 되시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실질적으로

    하늘의 생명의 떡으로서 양육하는 음식이신 자신을 분배하는 것을 우리는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과 그 대화를 통해서

    그분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계시받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고픈 자들에게 허기짐을 채워주기 위하여 만족시키기 위하여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부서진 떡조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분배하셔서 그 이방 열국들 가운데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분배해 주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천국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분배하고 계시는 장면이 가나안 여인과의 이러한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자신을 떡덩어리에서

    조각으로 또 부스러기로 하나하나 쪼개서 그들에게 먹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을 통해서나 막달라 마리아가 됐든 주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 배고픔으로 인해 사망

    가운데 처해 있는 그들을 생명의 떡을 공급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자신을 분배시켜서 그들에게 생명이 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다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 26절 말씀을 통해서 전형적인 이방인이고 그리고 헬라인이며 또 이 가나안의 후손인 페니키아

    사람이며 또  인종으로는 페니키아 사람이지만 언어로는 또 사도행전 21장 2절 3절 말씀을 통해서 시리아 언어를

    사용하는 이러한 가나안 여인의 다중적인 이방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주님께서 하늘에 속한 생명의 음식을

    받아 취할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나 어떤 근거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지만 생명의 떡을 취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의 수혜자가 된다라는 것을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딸의 귀신 들린 그 문제를 처리받기 위하여  그분에게 다가왔는데 근데 그분께서는

    바로 생명의 떡이 무엇인지를 가장 중요한 인생들에게 가장 배고파 허기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이 생명 공급의

    요소인 생명의 떡을 분배해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살 수 있는 삶의 길을 계시해 주신 것이 가나안 여인과 주님과의

    아주 놀라운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그 여인에게 계시해 줌으로 말미암아 배고파

    허기져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고 있는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먹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그 배고픈 자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 다음에는 이방 열국 가운데 있는 이방 사람들 중에 택한 백성들을 먹이기 위한 떡 그 자체가 되시고, 그리고 바로 그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유대 백성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생명 공급으로 친히 배분하고 게신 것을 볼수 있는데요 이 배분 한다는 것은 복음을 통하여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르치실 때 씨가 뿌려지는데 그 씨는 하늘의 유전자의 생명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혼자 배분하고 계셨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이 생명 공급의 요소인

    생명의 떡인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또는 이적을 펼칠 때 기적을 행하실 때 표적을 나타내실 때 생명 공급으로 사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나눠주시고 배분하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 부활의 영의 몸을 가진 그분께서 사람들 영 안에 들어와서 하나 되어 움직이는 임마누엘 땅 안에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기를 원하는 존재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들을 통하여 사역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원래는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백성들에게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생명 공급을 친히 홀로 배분하고 계셨는데,

    나중에는 12명을 통하여 그리고 또 나중에는 70명의 제자를 통하여 그리고 또 나중에는 3천 명 5천 명 그리고 수많은

    허다한 무리를 통해서 이 생명 공급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들이 지금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수행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자신을 하늘에 속한 생명의 떡 그 자체가 되셔서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의 그 생명의 떡 공급으로

    그 허기진 사람들 배고파하는 백성들에게 배분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갈망이요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갈망이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배분하기를 갈망 하신다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와 같이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분하고 운반하고 전달하고 공급해 주는 자들이 되어야 되는데 이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배분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때로는 물질이 허비될 수도 있지만 이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그 사람들 안에 생명의 떡으로 분배되어져서 그들이 생명의 떡을 먹기를 원한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갈망입니다.

    그래서 내 살을 받아 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 계속 그 말씀을 외치고 계신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통하여 생명 공급을 배분해 주는 그런 일에 대한 중요성보다는 교회를 통해서 병 고침을 받고 이적과 표적을 체험하는

    삶의 만족과행복을 가져다주는 축복만을 귀하게 여길 뿐 실질적으로 주님 자신을 떡으로 배분하여 주셔서 그들을 떡으로 먹게 하는 일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주님께서 여러 병자들을 만나면서 다리 아픈 자 ,귀머거리, 눈먼 자 벙어리,또 소경된 자, 문둥병자,

    귀신 들린  자 이러한 여러 유형의 병자들을 치유하심과 귀신을 내어쫓아 주시는 일에 대한 이적과 표적과 기사에 대한 모든 것들은 주님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그들에게 먹이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들을 어루만지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다든가 귀머거리의 귀를 열리게 한다든가 귀신을 내어쫓게 한다든가,

    앉은뱅이를 일으키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하늘의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 자신을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의 양식을 먹고 고침받음으로 말미암아 걷게 되고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말하게 되고 하는

    치유받음으로 열병이 떠나가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이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생명 양식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공급의 요소로서 떡 부스러기가 되어서

    이방인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 많은 이방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홀히하고 무시하고

    간과함으로 말미암아 내동댕이쳐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으깨어져서 그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작은

    조각덩어리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 이방 열국들 가운데 있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고 사랑하고자 하고 주님을 아는 자들이

    생명을 분배받음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의 씨를 소유받아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삶의 길을 살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단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간구하는 마음으로 찾아왔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이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펼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선제적으로는 그 여인이 그토록 원했던 기적이 아닌 친히 자신이 하늘의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을 분배하셔서 그 여인이 배고파하기 때문에 모든 죽음의 질병이 이 배고픔으로 인하여 찾아오기

    때문에 귀신의 악한 역사가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을 생명 공급의 요소가 되어서 생명 떡을 먹임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얘기를 이 마가복음 7장 24절에서 30절부터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이 대표적으로 전형적인 이방인이요 이 다중적인 이방인이고 온전하고도 완전한 이방인

    유대 민족과는 하등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방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는 그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냐면 그전에 행하셨던 그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든 행동들, 귀신을 내쫓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리게 하며 그리고 문둥병을 고치고 말을 못하는 벙어리의 입을 열어서 말을 하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치유하시는 과정 중에 사실은 주님이 그 생명의 떡이 되셔서 생명의 공급으로 분배하고 계셨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병자들 안에 생명의 떡으로 생명 공급을 배분하고 계심으로 말미암아 그 배고픈 자가 그 생명의 떡을 취하고 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기적과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먼저 기적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기적을 소유하려고도 해서도 안 되고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해서도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귀신이 쫓아내기를 갈망하는 이 여인에게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나타내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선제적으로 필요한 그가 배고파서 죽기 직전에 있는 그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 자체를 공급해줌으로 말미암아 생명 공급의 요소인 그 떡을 분배해 주어서 그 사람이 음식을 취하게 되어서 우리라는 존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그 제서야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적을 먼저 베풀고 기적을 먼저 행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 생명의 빵으로 오신

    생명 음식으로 오신 그분 자신을 분배해주기 위하여 이러한 절차의 과정을 갖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의 외적인 행동에 대한 상태가 아니라

    실질적인 마음의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다루고 접촉할 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 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이 딸에게 들린 악한 귀신을 쫓아내서 주기를 간구하기 위해 찾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귀신을 먼저 쫓아주기보다는 복음 사역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하나하나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고

    나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7장 1절에서는 24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가나안 여인에 대한 믿음이지만

    7장 1절에서부터 그 23절 가나안 여인에 대한 믿음이 나타나기 전까지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서 악한 생각들을 통하여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사악함, 속임, 방탕, 이런 것들이 있다라는 것을 먼저 10계명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 상태를

    드러냅니다.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십계명이라면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덮고 감추어버립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15: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 29:13〕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 존재인 마음의 상태를

    들추어내심으로 말미암아 수술을 받아야 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계명 안에 있는 모든 잘못된 것들, 그릇된 것들, 지난번에 말씀 드렸다시피 고르반에 대한 문제를 통하여

    부모를 공경하기는커녕 하나님까지도 모독하는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계명에 관해서도 그러하고 그다음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 이런 10개의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계명과 나중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 십계명이라는 것을 들쳐냄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 상태가

    얼마나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수술대 위에 놓여진 환자를 참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유능하고 이 우주 가운데서 가장 수술을 잘 집도하시는 주님에 의하여 바로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게 되고, 수술대

    위에서 수술을 받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생각들을 통하여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그런 요소들을 다 제거하고 처리해 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마가복음 7장 1절부터 23절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점진적인 단계를 통해 하나하나의 단계를 밟으신 후에 계속해서 한 단계를 지났으면 두 번째 단계,

    두 번째 단계를 지났으면 또 세 번째 단계 이 마가복음이 바로  어떤 교리적인 순서를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서 점진적인 책으로 하나하나 과정을 밟아서 또 하나의 과정 위에 또 하나의 과정이 나타나게 되는 이러한

    계시의 말씀들을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 안에서 환경을 통해서 발생되는 그 일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생명의 떡을 분배하는 하나님의 사역인 복음을 행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만남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그 사람 존재 안에 생명의 떡으로

    생명의 음식으로 분배해 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봉사하시고, 수고하시는 이러한 취지는 음식이신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분배하고 배분하고

    공급하고 전달해 주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하고 계시다라는 것을 마가복음은 설명하고 계시한다는 면에서 아주 놀라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것이 잘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가나안 여인에게 너는 지금 귀신 들린 딸에게서 귀신을 내어쫓게 하여서 치유받기 위해서 왔지만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너에게 허기진 배를 채워줄 수 있는 하늘의 생명의 떡이 너에게 필요하다.

    너는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다윗의 후손이라고 고백을 했지만 실제적으로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분배해주기 위하여 생명의 떡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먹고 마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 존재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 되기 위한 대치물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나의 갈망이고 아버지의 뜻이다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에게 무언으로 이러한 말씀들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너의 위치는 유대인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는 정말 다윗의 후손이라고 얘기하는 것조차도 언급할 수 없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특권으로 다윗의 후손,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데 너는 다윗의 후손 다윗의 아들 노예로 오신

    구주를 그렇게 부를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들이 간과하고 버리고 소홀히 함으로 말미암아 내쳐진 바로

    그 생명의 떡이 땅바닥에 떨어져 조각조각 남으로 말미암아 네가 그런 위치에 서게 되어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이 구원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안배 안에서 나타난 일들이다라는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암시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처럼 여기는 정말 상종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은 무관하기 때문에 자녀의 위치를 누릴 아무런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한데 내가 너에게 이렇게 찾아와서 그 자녀의 위치를 누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자녀들의 원래 몫이며 택한 백성들 그들에게 생명의 떡을 분배해 주고자 왔는데 그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이 두로와 시돈지방 영역에 있었던 가나안 여인 이방인에게 특권의 수혜가 축복의 수혜가 넘어왔다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하나님의 신약 정신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이 아버지의 주권과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이렇게 넘어가는 장면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단계 한 단계를 이렇게 7장 1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의 내적 상태를 먼저

    들추어내셔서 아주 유능한  최고의 의사이며 처방을 잘하시는 그분께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시고 처방을 내리셔서

     도려냄으로 말미암아 그 악한 생각들을 통해서 나오는 옳지 못한 모든 어둡고 깜깜한 부정적이고도 소극적인 것들을

    이렇게 들추어내서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주님의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처리되게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에게 나는 너에게 바로 이 유대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는 그러한 생명의 떡을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에 따라서 이방인들까지도 먹이기 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다라고 가르쳐 주심으로 이 우주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크신 갈망과 뜻을 우리가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노예로 오신 구주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목수의 신분으로 오셨지만 조롱받는 나사렛 출신의

    목수 그것도 신분이 왕가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목수로서 일을 했던 예수님을 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늘에 속한 생명의 떡으로서 주 예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라는 면에서 마가복음이 높이 평가되어야 되는 정말 깊은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하나하나의 이 사건들을 역사적이고도 점진적인 단계로서 펼쳐 나타내줘서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또 다른 단계를 통해서 영적인 것을 부여해주고 또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또 다른 단계에 다가서서 그 주님께서 부여해

    주고자 하는 하늘에 속한 바로 이 생명의 떡이 되신 그분께서 배분하시는 그 일들이 점진적인 이러한 단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점점점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삶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이렇게 강조시키고 인식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주 유능한 세상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의사로서 또는 이 처방을 가장 잘 내리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이 마태복음을 통해서 또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그분은 신랑이시고 참 목자이시고 그리고 참 목자일 뿐만 아니라 새 포도주가 되시고,  생베조각이 되시고, 새 가죽부대가 되시는 그분이 바로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해방을 주시길 원하신다라는 그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가복음에서는 생명에 대한 얘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7장 27절과 28절에 떡에 대한 얘기가 있죠. 27절에서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라는 떡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의 음식인 그 생명 떡 자체이신 주님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누가 감히 생각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이 주님이라고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되신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다윗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로 오신 사실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더욱더 점진적인

    단계를 통해서 심지어는 주님이시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분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분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먹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람이란 존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하기 위한 이 일 때문에 오셨다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계시하고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하시는 그분의 이 질문과 그리고 그분의 대답을 통해서 그분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 열국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까지도 모두 포함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생명의 떡을 분배시켜주시기 위해 배분시켜주시기 위해서 오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생명에 대한 얘기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밝게 드러내고 있습니다만 마가복음에서는 아주 은밀하게 행동을 통해서 인성 안에 계신 그분 안에 감춰진 바로 신성을 지니신  그분이 바로 이러한 존재자로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이렇게 점진된 하나하나의 단계를 걸어나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높은 하늘에 속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이끌어 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서 집에서 기르는 개들이라고 얘기함에도 불구하고 마음 상하지 않고 맞습니다

    나는 집에서 키우는 아주 어린 개에 불과한 자입니다. 그러나 작은 개들도 그 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먹고 남은 음식들은 취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처럼 바로 자녀들의 먹다 남은 부스러기를 먹을 권리 정도는 갖고 있습니다 라고 외형적으로는 아주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예수님의 대답에 아주 큰 소망과 격려를 받고 예수님께 더욱더 한 발자국 성큼 예수님의 그 품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이방인으로 상징되고 있는 작은 개들 너 같은 자에겐

    절대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이 믿음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고 기초가 되고

    발판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가 주님의 품안으로 한 발자국 더 내어디딜수 있는 근거가 된 요인은 상 아래 있는 아주 조그마한 집에서 키우는 개였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는 주인이 소홀히 하여서 음식을 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주인이 그 애완용 개를 관리하기 위해서 음식을 반드시 의도적으로 남김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제공하여서 생명을 유지시키고 보존시키는 것처럼 바로 애완용 개라는 것은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그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을 주님의 그러한 말씀 속에서 이 여인이 그것을 엿보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유대 민족들,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하등에 아무 상관이 없고 연관이 없는 그냥 이방인이라는 상종하지 못할 개들로 취급받는 그러한 존재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애완견들로서 하나님이 키우는 작은 개들 중에 하나였다라는 것을 자기가 인식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키우는 개이기 전에 바로 천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그 잃어버린 자녀들에게 먼저

    그 생명의 떡을 취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보냄을 받았다는데 그들이 거절하고 반대하고 그분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분이 내쳐져서 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 조각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모두는 유대민족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 열국

    가운데 있었던 이방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나안 여인이 하나님의 애완견 집에서 키우는 조그마한 개에 불과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조그마한

    애완견과 같은 그러한 이방인을 상징하고 있는 애완견, 조그마한 집에서 보살피는 개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주는 건 옳지 않다라고 얘기했을 때

    그 가나안 여인은 내가 비록 하나님의 작은 애완견일지는 몰라도 바로 집 바깥에서 사는 주인 없는 떠돌이개도 아니고

    그리고 산에서 자라는 주인 없이 마음대로 활동하고 살면서 그냥 아무거나 주워 먹고 다니는 그런 들개는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작은 애완견입니다. 나는 주인이 주는 것이 아니면 먹지 못합니다.

    만약에 주인이 주지 않으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나는 떠돌이개도 아니고 들판을 막 돌아 다니는 주인 없는 그런 들개도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키우는 애완견인

    나는 주인이 돌보지 않으면 죽어질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완견의 주인이신 주님이 책임을 져야 됩니다 라는 것을

    이 여인의 대답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 받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애완견의 주인으로서 자녀를 먹이고 있는 동안에 상 아래에서 기다리고 침을 흘리면서 음식 부스러기가

    자신에게 떨어질 때까지 그냥 이렇게 참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저의 집에서 개를 몇 마리 키우고 있는데요.

    음식을 날마다 제가 챙겨 주니까 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닙니다. 심지어는 제가 잠을 잘 때도 추운 날씨에도 주인의 상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서 그 추위를 견디며 주인이 나올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립니다.

    그것이 불쌍해서 집안으로 들어와 재우려고 해도 들어오질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훈련이 되어있기 때문이죠. 우리들은 집에서 키우는 조그마한 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개는 주인이 있습니다. 주인은 바로 천부 아버지가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주인이 집에서 키우는 조그만 개이기 때문에 바로 이 주님이 보시기에 그 애완견 개는

    기뻐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되도록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와 하나님의 그 계획 속에서 이미 사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취해질 떡이 사실은 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떡을 소홀히 하여 내버림으로 말미암아 쉽게 말하자면 배척하여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실제로는 이방인들에게 생명의 떡 부스러기 조각이 되셔서 이방인들이 그 구원의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안배 속에서 펼쳐 놓으셨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애완견이라고 지칭되어진 이 가나안 여인은 정상적으로 그 거룩한 이스라엘 땅이라는 상 위에 올라앉아서 자녀들처럼 그 상 위에 있는 생명의 떡을 합법적으로 당연하게 먹을 권리와 지위는 없지만 분명히 상 아래 주인이 먹다 남은 음식을 줄 때까지 기다려서 그 떨어진 음식 조각 부스러기를 먹을 수는 있는 상아래 있을 지위는 있습니다 라는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애완용 개로 치부되어진 이 가나안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상에 앉을 지위는 없지만 이방인으로서

    상징되어진 이 가나안 여인은 애완견으로서 상아래 있을 지위가 있기 때문에 상아래 있는 그 애완견 개는 언젠가 주인이

    던져주는 그 떡 부스러기 또는 자녀들이 먹다 남은 그 떡 부스러기를 합법적으로 먹을 수는 있습니다 라는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은 바로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고 배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라는 마가복음 7장 27절과

    28절에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작은 그 애완견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옳지 않다 라고 하셨을때 예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상아래 있는 작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는 이 떡 얘기를 통해서 생명과 관계된

    생명의 음식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이가 인식하였다는 것을 통해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구나! 어떻게 이런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래서 2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 말인즉 바로 28절의 그 여인의 대답이죠.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바로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을 때 주님께서 그 사람 가나안 여인의 처해진 문제를

    처리해 주고 해결해 주고 제거해 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은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에 있는 자녀가 아닙니다.

    나는 상에 있을 지위도 없고 자격은 없지만 상아래 있을 지위는 있는 애완용 개인 것입니다.

    상아래 있는 애완용 개는 떨어진 부스러기를 던져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상 아래로 떨어지는 그 조각 부스러기 떡을 먹을

    합법적인 지위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이 가진 주님을 향한 놀라운 믿음을 이렇게 제시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이 성경 가운데 가장 크고 놀라운 믿음을 가진 자로 칭찬을 하신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믿음을 가진 자가 이 가나안 여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놀라운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주님이 배분하시는 생명의 떡인 것을 알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실질적인 의미에서 이 가나안 여인은 이방 개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바로 상위에 있는 떡이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절로 인하여 그  상아래 있을 지위가 있는 애완견들에게 바로 먹을 수 있는

    떡 부스러기 조각이 되어서 바로 상 아래 존재하는 자들이었던 우리가 큰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그 구원에 대한 수혜자

    구원의 대한 이 생명의 떡을 배분받고 분배받음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생명으로 성장하고 생명 안에서 생명의 변화를

    가져와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열매들을 가진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여러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예의주시하면서 봐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두로와 시돈 지방의 북쪽 지역이죠.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의 바로 근처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가이라샤 빌립보 지방은 이방인의 땅이고 유대 땅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땅 이스라엘 백성들은 떡이 놓아질 수 있는 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상 위에 놓여진 떡을 그들이 취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떡을 공급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이 유대 백성들은

    세상 인류에게 가장 귀하고 가치가 있고 소중한 그 생명의 떡을 정말 무가치하게 여기고 상 아래로 던져 떨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떨어진 떡이 산산조각이 나서 이방 열국 가운데 있는 특별히 주님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그들에게

    상 아래에 있는 부스러기 떡 조각이되신 주님께서는 바로  이방 애완견들의 몫이 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이

    주님의 사람으로 천국 백성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  이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저 그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이 치료받게 되는 것이 

    이 말씀의 주제가 아니라  이 말씀의 주제와 중심은 복음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행하시기 위하여

    수고하시고 일하시고 봉사하시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자신을 외형적으로는 조롱받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

    목수의 신분이라는 비천한 신분을 가진 자이며 왕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롱받고 멸시받는 그러한 장소와

    그러한 직업을 가진 자이지만 실제적으로 그분은  성육신 되신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내적인 생명 공급으로 배분하고 계셨다라는 이것이 말씀의 주제요 말씀의 중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내적 생명 공급으로 그 가나안 여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마치 자녀들에게 줄 떡을 가져다가 작은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생명의 떡인 자신을 그 가나안 여인의 존재 안에 생명 공급으로 운반해 주고 공급해주고 전달해주고 배분하고 분배해 주고 계시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이렇게 나타났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온갖 병자들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예 문둥병자,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 중풍병자 예 이런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실 때 주님께서는 생명 공급으로

    자신을 배분하고 계셨고,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도 생명의 떡으로서 내적인 생명 공급으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병자들을 치료하셨을때, 귀신을 내어쫓았을때. 이 생명의 떡을 그들에게 분배해주고 배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침을 받고 그들이 자유함을 느낄 수가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류가 배고프고 허기짐으로 말미암아 결핍이 오고 그 결핍은 모든 죽음의 질병을 가져오고 그런 육체적인 질병과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인 문제까지도 야기시킴으로 마음에 있는 악한 생각들,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 상태의 마음 안에 있는 것들까지 모두 처리해 주시기 위하여 생명의 떡이요. 생명 공급이신 주 예수님이 그들의 존재 안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를 처리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마치 그냥 이적과 기적과 기사를 베풀어서 그러한 유형의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나타나지는 것을 매우 가치 있고 귀하게 여기는데, 사실은 하늘의 생명의 떡으로서 이 세상에 자신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음식으로서 생명 공급이 되시는 주님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제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어진 다음에 바로 이 병 고침을 받고 또 이적과 표적과 기사와 또 이 땅에 속한 그런 축복의

    수혜들을 받는 것이지, 실질적으로 생명 공급이신 그분이 가장 필요한 것이지 그 외에는 나머지 부가적이고도 차선 순위에

    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예 내적 생명 공급이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채 이적을 체험하면 뭐 합니까?

    기적을 보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표적을 본들 하늘의 생명의 떡으로서 이 세상의 음식이 되기 위하여

    내적 생명 공급이 되시는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채 우리의 눈이 떠지거나 우리의 귀가 열리거나  말 못하는 벙어리가

    고침 받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생명 공급이신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주님을 먹는 일이 가장 먼저 선제적이고도 우선적으로 이루어 져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교회들을 보면 어떤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이적과 표적과 기사 이런 것들을 강조하다 보면

    참된 생명 공급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 존재 안에 살아계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시 병 고침이나 기적들이나 그러한 것은

    삶의 어떤 행복한 것들은 소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가장 소중한 생명 공급이신 주님을 모시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없으면 그 모든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얘기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이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의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생명의 음식,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자신이 가나안 여인 앞에 의도적으로 마주하고 서서히 자신을 한 단계에서 또 높은 단계로 그 높은 단계에서 더욱 한층 우월한 단계로 계속 이끄셔서 하늘에 속한 생명의 떡을 먹게 하려는 주님의 갈망과 의도를 우리가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바로 이 귀신 들린 딸을 치료하시는 분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여인과 그 딸,

    그 가족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바로 하늘의 음식이신 생명의 떡이 되시는 분으로 그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 여인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 7장 1절부터 23절에 복음 사역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우리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확연히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속마음은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생각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 말미암아 용납되지 못하고 인정받지 않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불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로 포장되어져도 그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생각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바로 이 점진적인 관계를 통해서 주님께서 마가복음 7장 1절부터 23절에 그 복음 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 상태를 드러내시고, 악한 13가지의 이러한 소극적이고도 부정적인 것들이 산출되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다음에 실제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그런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밖에서 손을 씻고 깨끗하게 의복을 입고 단장한 차림 보다는 내적인 깨끗함, 마음을 처리해 주시는 주님에 의하여 마음을 깨끗케 함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내적 상태가 아주 선한 것 바로 이 생명의 떡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떡이 되시는 그 생명 공급을 우리가 취하고 배분받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장을 통하여 생명의 변화를 가져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로 바뀌어지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대치자가 되셔서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우리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실 때 우리가 하나 되어 임마누엘 땅이 되어서 사도 베드로 선생님 같이 사도 바울 선생님과 같은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 에서의 가나안 여인의 이 믿음을 통해서는 우리가 소유한 것이 단지 내적인 깨끗함뿐이라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가나안 여인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처럼 여러분 예를 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1절부터 23절까지 사람의 악한 생각들을 통해서 이 10계명을 범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바로 부모를

    공경치 않고 살인을 하게 되고 간음과 음행을 하게 되고 도둑질하게 되고 거짓말하게 되고 탐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의사이신 주님의 의하여 들춰내져서 처리가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소유했다 칩시다.

    깨끗함을 소유했지만 그 깨끗해진 사람의 심령은 바로 이 허기지고 배고프고 갈급하고 목말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가졌지만 여전히 심령이 채워지지 아니한 그것 때문에 공허함과 배고픔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내적인 깨끗함을 받은 자가 그 속 안에서 공허하고 허기진 것을 채우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더 높은 차원의 점진된 단계를 보여주고 계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순수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된 자, 순수하게 된 자, 악한 생각들을 정말 주님의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으로 인하여 실제적으로 처리가

    되어서 그 문제를 해결받은 자들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생명 양식을 공급해 주는 그분이 배분해 주는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가 소유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같은 대치물이 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대치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소극적인 면에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순수하게 되고 깨끗하게 처리가 되어서 문제 해결을 받았다 칠지라도 적극적인 면에서 이 배고프고 기진하고 공허하고 정말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바로 하늘에 속한 생명의 떡의 공급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진적인 단계를 통해서 이 계시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바로 우리는 깨끗하게 되어야 됩니다.순수하게 돼야 됩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들이 아닌 바로 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선한 생각들을 통해서 생명나무의 열매 그러한 것들만 나타나

    보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배고픔과 허기짐과 공허함을 채워주는 만족시켜주는 우리의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된 자는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깨끗하게 됨과 그리고 누림과 만족함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삶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로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이 간절히 필요로 하다라는 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떡이신 바로 이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나타내주는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 바로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게 하는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이렇게 계시로 보여준 것은 주님께서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을 취하게 하신 바로 이 생명 음식의 공급의

    요소이며 생명의 떡 그 자체이신 예수님 자신을 먹고 취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치자가 되시고 이 대치물이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갈망이요 천부

    아버지의 뜻이요 갈망이요 신성하고도 영원한 경륜에서 나타난 바 된 바로 경륜의 주제요 중심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전에 깨끗하게 되는 일이 선제적으로 이렇게 단계를 거쳐서 그 단계를 통과해야 된다는 것이 깨끗하게 된 자에게는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이 소유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살아계시게 될 때 우리들은 진정한 진리 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해방의 만족과 누림의 삶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모든 교제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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