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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7:24~30/마태:15:22~28/ 가나안 여인의 놀랍고도 위대한 믿음 1부말씀 나눔방 2024. 1. 28. 19:40
말 씀: 박 찬 덕 선교사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의 아주 중요한 말씀의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한 이방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중요성은 마태복음 15장 21절부터 28절까지와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의 중복되는
말씀을 통해서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리고 노예로 오신 구주를 증명하기 위한 방편에서 저자 마태와 사도 베드로 선생님을 통하여 기록한 이 마가복음이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마가복음은 먼저 마태복음 처럼 왕으로 오신 구주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 진리를 암시하기 위한 교리적 순서를 따라 기록한 것인 반면에 마가복음은 어떤 교리적 순서가 아닌 주님께서
3년 반 동안에 이 베드로를 비롯한 11제자와 함께 공생애를 가지면서 친히 제자들에게 보여줬던 삶의 체험들,
그 삶의 행적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마가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요한복음처럼 교리적인 순서를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간의 순서를 따라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으로 주님께서 이 생애의 발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말씀을 계시하기 위한 그 어떠한 말씀은 이 요한복음이나 이런 데서는 생명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마가복음에는 생명에 대한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전혀 이 생명에 대한 말씀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생명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또 강조하기 위해서 점진적으로
주님의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쫓아서 친히 주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이 그 주님의 수고하시고 일하시고 봉사하시며
움직이시는 행적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생명의 떡을 분배해 주시기 위한 세상에 노예로 오신 구주로서 나타나신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마가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된 모든 것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주권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장소에 대한 이야기나 또 숫자에 대한 이야기나 지명에 대한 이야기 할 것 없이 거기에는 모든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이 세상에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부여해 주시고자 하는 영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을 이렇게 창조하신 주님께서
세상 가운데 중심인 유대 땅 팔레스타인 지방의 땅을 조성하셔서 그 땅 중심 가운데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어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신성한 경륜을 드러내시고자 계시하고자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특별한
지역인 팔레스타인이라는 유대 지역과 환경을 조성하셔서 그 땅에서 주님께서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활동을 통해서
그 주님께서 행동하시고 수고하시고 노력하시고 움직이시면서 선포하신 말씀들을 통하여 깊은 하늘의 영적인 체험들을
하게 하기 위해서 배려한 책이 마가복음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님께서 이 마가복음 1장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라는 이 복음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심과 동시에 그 후부터 2장, 3장, 4장 이렇게 쭉 5장, 6장, 7장을 나가서 노예로 오신 구주의 복음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침례 요한의 사역으로부터 이렇게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노예로 오신 구주의 그 복음 사역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마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 사역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 사역을 수행하시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 길과 방법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그 3가지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시고 있고 그리고 복음 사역을 위한 여러 인류의 사건들을 보조적으로 이렇게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히 깨닫고 그 복음이시며 생명이신 왕국이신 바로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기를 원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복음에 대한 내용과 방법과 보조적인 어떤 행동들을 드러내신 주님께서는 사람의 그 외적인 상황을 완전히
처리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와 왕국의 권위를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상황을 처리하시고 대신에 바로 세상 사람들의 그러한 어떤 내적인 마음의 상태를 처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곧 예수님을 향한 세상 사람들이
그 멸시를 하고 배척을 하고 증오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배척하는 것과 그리고 침례 요한의 순교에 대한 문제를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외형적인 상황을 실제적인 주님의 그 복음을 통하여 내적인 마음의 상태를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가복음 7장 23절까지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의 비교적 길지 않은 말씀인 이 수로보니게의 여인의 삶이죠.
이 말씀이 마태복음 10장 21절과 28절과 마태복음 15장 22절에서도 기록 되어 있는데요.
마태복음에서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로와 시돈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그 가나안 여인인 수로보니게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를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이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에서 나온 이 이방 여인의 이 복음의 어떠한 주제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주님께서 이 여인이 마가복음 7장 26절 말씀을 통해서 7:26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페니키아 종족이라. 그녀가 주께
자기 딸에게서 그 마귀를 쫓아내어 달라고 간청하더라. 아니! 어떻게 이 가나안사람 이 페니키아 사람이 또 헬라인이 될 수가 있었고 수로보니게 종족이었다 라고 얘기하고 또 마태복음 15장 22절을 통해서는 한 가나안 여인이라고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철저 하게 모든 그 사람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종족이요, 또 그리고 이 페니키아 가나안 사람임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철저하고도 완전한 이방 사람임을 우리에게 강조해주고 그 이방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그 계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러니까 사도행전 21장 2절 3절 말씀을 우리가 보게 되면 페니키아로 가는 배를 만나 그 배를 타고 떠나니라.
21:3 이제 쿠프로가 보이므로 그 곳을 왼편에 두고 시리아로 항해하다가 투로에 닿으니,
이는 그 배가 그 곳에서 짐을 내리려는 것이었더라.
그가 이 페니키아 가나안 사람이라고 그랬죠.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라 한 카나안 여인이 그 지경에서 나오며 그에게 소리질러 말하기를
"오 다윗의 아들이신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심히 고통받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 수로보니게 사람 페니키아 가나안 사람 이 사람들은 사도행전 21장 2절 3절 말씀을 통해서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페니키아 원주민이라는 얘기죠. 페니키아 사람들은 바로 이 가나안 원주민들로 가나안 족속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페니키아 사람으로서 이 가나안 여인이었던 그는 시리아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또 마가복음 7장 26절에는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헬라인 왜 헬라인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 페니키아 사람
가나안 족속의 후손이었던 바로 이 페니키아 사람으로서 이 시리아 언어를 사용했고 유대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인 이었지만 또 그가 어떤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서 아마 헬라인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이런 추측을 한번 해볼 수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그녀가 가나안인이었고 이 페니키아 사람으로서 시리아 언어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인이라고 마가복음 7장 26절을 통해서 계시해 줌으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유대 사람들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방 사람임을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계시해 주고 있고 왕으로 오신 구주를
설명하는 이 마태복음이나 그 사도 베드로 선생님을 통한 마가 요한의 기록에서도 헬라인이요 또 수로보니게의 종족이라고 부가적으로 설명함으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이방 사람으로 유대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고
연관이 없는 사람임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페니키아 사람은 시리아 언어를 구사하는 가나안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 마태복음 15장 22절에서 가나안 여자라고 설명하고, 이 마가복음 7장 26 절에서는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종족이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헬라인이라는 뜻을 통해서는 이방 세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 당시에 로마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그 문화와 정치, 예술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을 통해서 문화와 문명으로 들어온 그 헬라인은 그 당시에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이방 세계를 상징하기 위해서 헬라인이라는 말을 마가복음 7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고 시리아 언어를 구사하는 가나안 여자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전형적인 이방인이었고 유대 민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 그것도 아주 전형적이고도 복합적이며 다중적인 여러 이방 세계를 등장 시킴으로 말미암아 그가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가나안 여인을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해서 그의 국적에 대해서 그의 종족에 대해서 혈통에 대해서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완전히 전형적인 두 말할 것 없이 이방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무관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방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들어와서 노예로 오신 구주로 인하여 생명의 떡을 분배받는
이런 놀라운 일이 있는지를 기록한 것이 바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인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행적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은 그러한 다중적인 이방인이었고 전형적인 이방인임으로 말미암아 유대 민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런 그 가나안 이방 여인이 이 유대 민족의 왕으로 오신 그 주님께
찾아와서 자신을 위해 그 무언가를 해주시기를 곧 그 무언가는 생명의 떡의 분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떡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이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생명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라는 이 떡 얘기를 통해서 생명의 떡을 공급해 주시는 그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배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분배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노예로 오신 구주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주님께 찾아와서 염치도 없이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간절히 주님께 원하는 그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가복음 7장 28절 마지막에 작은 개들에 대한 애완용 개에 대한 얘기를 하심과 동시에 28절에서는
그러자 그 여인이 주님 그렇습니다 라고 주님이라고 그를 부릅니다.
아니!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헬라인이라는 이방 세계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이방인이었고 또 페니키아 사람이며 시리아 언어를 구사함으로 이 여자가 전형적인 다중적인 이방인으로서 주님께 찾아와서 바로 자신의 간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하여 주님께 찾아가는 이 내용에 대해서는 심히 아주 중요한 말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가복음:7:28과 마태복음15:25을 보면은 그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7:28 그녀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러하옵니다,
주님, 그러나 식탁 밑의 개들도 자녀들이 버린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더라.
15:25 그 여인이 와서 주께 경배하며 말씀드리기를 "주여, 나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더라.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형적인 이방인이고 다중적인 이방인이었던 유대 민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알고 있었던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 28절 말씀을 통해서 여인이여 그대의 믿음이 큽니다.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향한 어떤 신뢰와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그대의 믿음이 큽니다 라고 제자들까지도 이런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고, 백부장 외에는 이런 큰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부장과 더불어 이 가나안 여인이 어찌 해서 이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런 것을 봐야 참다운 성경의 계시를 알게 되어 주님을 접촉할 수 있고 만져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기에 종교적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유대인들 아주 선민의식이 투철했고 확고부동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바로 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는 자들이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어쩔 수 없이 로마의 속박 아래 다스림 받고 있지만 이방인들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심지어는 같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혈통이 섞어진 사마리아 사람까지도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긴 것을 보면 그 외에 이방 세계를 상징하는 헬라나라
이 모든 세상 나라의 사람들을 이 유대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거부하는 마음 그리고 배척하는 마음이 그 유대 민족들에게
있어서 이건 뭐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하다못해 연약한 이 이방 가나안 여인까지도 이렇게 유대 사람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배척받고 괴롭힘 당한
자들이 이방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시어 두로와 시돈 지역에 가셨다 라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가나안 여인이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두로와 시돈지방에 이 노예로 오신 구주이신 또 마태복음에서 왕으로 오신
구주를 그들이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멀리 그곳을 떠나셔서 두로와시돈 지방까지 주님께서
발걸음을 행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곧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 땅인 것입니다.
이방 땅은 유대 민족들에 의해서 완전히 거부당한 지역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배타심이 강했던 유대 민족들에 의해서 개처럼 여김을 받은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의 노예로 오신 구주의 실상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목수라는 신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멸시받고 고향인 그 나사렛 사람들로부터도 멸시받고 배척당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이방 땅까지 발걸음을 옮기심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이방 여인인 이 가나안 여인까지도 하늘의 왕을 만날 수 있는 곧 노예로 오신 구주를 만나서 생명의 떡을 공급받고 생명의 떡을 분배받을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데, 이 가나안 여인은 전형적인 이방인이었고 다중적인 이방인을 대표하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아닌 나머지 모든 이방 열국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상징하고 있는 자가 가나안 여인이었고 가나안 여인은 다름 아닌 오늘날 우리 현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고 그리고 바로 그 가나안 여인은 나 자신인 것입니다.
그 선민을 위해서 하늘에 속한 왕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들에게 생명의 떡을 공급해 주시려 왔는데 그들이 배척하고 거부하고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어찌할 수 없이 연약한 이방 여인까지도 구주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안배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유대 민족들에게 향해진 복음이었지만 그들이 취하지 않고 그것을 소홀히 여기고 간과하여서 바로 땅바닥에 떨어뜨림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이방 여인으로 상징된 조그마한 이 애완용 개인 이방인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명의 떡으로 분배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약 경륜의 놀라운 일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요.주제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이러한 일들을 주권적으로 안배하셨다 라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정말 놀라운 얘기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이 처음서부터 주님께 이러한 과정의 단계를 거치기도 전에 두로와 시돈
지경 영역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부터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5:22 그런데, 보라, 한 카나안 여인이 그 지경에서 나오며 그에게 소리질러 말하기를
"오 다윗의 아들이신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심히 고통받나이다."라고 하더라.
여러분 이것이 그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시여라고 고백한 이 말이 얼마나 큰 믿음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죠?
예 주님이라는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뒤에 마태복음 15장 22절에 주님 하고 고백한 다음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또 한 번 재차 강조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그것은 바로 뭡니까?
주님이라는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 안에 있는 신성을 암시하고 있다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는 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왕가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성육신된 목수의 비천한 신분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그분의 그 비천한 목수의 신분을 가진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다윗 왕가의 출신을 소유한 인성을 가지고
온 바로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암시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그 인성 안에 주님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부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지고 있는 인성 안에 누구도 보지 못하고 그 신비하고도 비밀한 것을 사람들과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 여인은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인성 안에 감춰져 있는 주님이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바로 주님이라는 인성 안에 감춰져 있는 신격의 그러한 신성을 이 영광의 형체를 그가 알아보고 그것을 인식했다 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방 여인이 주님이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되신 그분이 성육신의 모습을 가지고 비천한 목수로서
일을 하셨지만 신성을 암시함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그가 인정하고 있구나 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라고 그가 칭한 것은 유대 민족들에게 있어서 천부당 만부당한일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권리는 유대 민족들, 다윗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마가복음 7장 26절에 보면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종족이요.
또 사도행전 21장 2절 3절 말씀을 통해서 페니키아 사람으로서 페니키아 사람은 뭐죠? 가나안의 원주민 가나안 사람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전적으로 이방인이었고 다중적인 그런 다윗의 혈동과는 전혀 무관한 자이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권리가 단 일프로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혈통 안에서 태어난 다윗의 왕국 안에 있는 유대 백성들만이 그렇게 다윗의 후손이요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는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처음 시점부터 주님이라고 부름으로 말미암아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가 입으로 고백하고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그가 비천한 목수의 신분을 가지고 오셨으나 그 인성 안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가 알았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주님이시요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시요라고 얘기했을 때주님께서 놀라운 마음을 가지고 그냥 가슴이 벌렁벌렁 했던 것입니다.
과연 이 고백이 참다운 고백인지를 시험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다음에 나오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대답도 대꾸도
안하시고 간구하는 기도 소리를 마치 못 들은 양 할 때 제자들이 마지못해서 시끄러우니까 예수님 제발 저 사람을 좀 내어보내시죠 라고 얘기할 그 때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냄을 받았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냄을 받았는데 주님께서 지금 어떠한 상황이 일어났습니까?
그분이 고향 나사렛에서 목수라는 비천한 신분 때문에 멸시받고 배척받고 심지어는 그 남쪽의 유대 예루살렘 도시에 살고 있었던 그 남쪽에 있는 자들이 북쪽까지 찾아오면서 예수님을 트집 잡고 고소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그들이 심한 거절과 반대와 배척하는 장면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까지 오시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족인 유대인들을 위해서 오신 그분이 동족들에 의하여 오히려 환대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멸시와 배척으로 인하여 바로 이방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가나안 여인을 대표하고 있는 이방인 모든 자들에게 그 가운데서도 갈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주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하고도 영원한 경륜 안에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성하고도 영원한 경륜의 중심이요 주제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입니다.
신약 경륜 안에서 그 이방인들 모두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은혜의 복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소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 오히려 유대민족들이 그분을 소홀히 하고 간과하고 배척하고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복이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안배와 주권적인 뜻에 따른 일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시대적인 영원한 경륜 안에서의 시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하늘의 복을 놓쳐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시대적인 영원한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는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찾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는데, 유대인들의 불신과 그들의 멸시와 반대와 거절과 조롱과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이 생명의 축복인 그 생명의 떡의 분배를 이방인들에게 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3장 46절과 로마서 11장 11절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13:46 그때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너희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알았으나 너희가 그 말씀을 외면하고 너희 스스로가 영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니, 보라, 이제는 우리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노라.
11:11 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졌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그들의 실족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로 시기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그 여인은 마태복음 15장22절에서 처음에 주님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했던 그가 바로 이 두 번째 말할 때에는 15장 25절을 통해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얘기를 빼고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두 번째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두 번의 이 신성과 인성을 암시하고 있는 이 주님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그가 지금 왜 25절에서 주님 나를 제발 도와주십시오라고 얘기를 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완전한 전형적인 이방인이었고 다중적인 이방인이라는 것을 24절에 주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냄을 받았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에 그 다윗의 왕국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면 안되는구나 라고 그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에 대한 복인 생명의 떡을이방인들은 원래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이구나 라고 해서
25절에서 주님 나를 제발 도와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은 생략 하는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왕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세상을 방문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배와 주권 속에서 설정해 놓은 그 일들 가운데서 사람들과의 만남의 사역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공급해 주시는 그 생명의 떡 그 자체가 되시고 분배해 주시는 그런자라는 것을 그 안에 있는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무리들과 가나안 여인 할 것 없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자신을 구체적으로 계시하고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왕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구주를 증명하기 위한 마태복음에서는 9장과 12장에서 이렇게 나타나는
그 상황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자신을 신랑이 되시고 의사가 되시는 마가복음에서도 새 천 조각에 대한 얘기와 새 포도주에
대한 얘기 그리고 선한 참 목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며 특별히 다윗에 대한 얘기와 또 생베조각 그리고 새 가죽부대에 대한
얘기도 나옵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로서 참된 다윗이다 라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고 아울러 이 성전을 허물라 라는 이보다 더 큰 성전이
자신임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씨가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씨가 뿌려질 때 3년 반이라는 기간이 지나 자라고 성장하고
발전의 단계를 통해서 열매를 맺은 그 소산물들을 수확하시는 주님임을 마태복음 12장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시고
요나보다 더 크시고 솔로몬보다도 더 크신 분을 이렇게 계시하셨던 그분이 바로 이 마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 같이
마가복음7장 28절에서도 떡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죠. 7:2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는 이 떡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생명의 양식이 되고 음식이 되는 떡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사도 베드로 선생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본 그 계시를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마태복음 15장 26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라고 떡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떡이신 그분께서 생명의 떡을 분배해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으로서 여러 가지 의사되시고 신랑되시고 생베조각되시고 새 포도주, 새 가죽부대, 참 목자가 되시고 참 다윗이 되시고 더 큰 성전이 되시며 수확하시는 분이 되시고 요나보다 크고 솔로몬다보도 더 크신 분으로 계시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늘에 속한 생명의 떡을 자녀들에게 공급해 줌으로 말미암아 그 자녀들이 그 생명의 떡을 분배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가지셔서 그 기회를 통해서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주님이시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봤을까요? 어떻게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인성 안에 신성을 가지고 오신 분임을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마태복음 15장 28절을 말씀을 통해서 여인이여 그대의 믿음이 참으로 큽니다 라고
예수님께서도 탄복하시고 이런 믿음을 3년 반의 공생애를 통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백부장의 믿음도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따라올 수 없는 물론 백부장의 믿음도 참 큰 믿음이지만,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가나안 여인이 가진 믿음은
그 백부장이 가진 믿음보다도 훨씬 더 폭이 넓고 깊고 높음이가있구나 라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마태복음 15장 22절과 그리고 마가복음 7장 28절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 바로 성육신된 하나님 목수라는 비천한 신분으로 오시고 그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그분을 신성하신 하나님으로 여겼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 여 년 전에 하나님의 왕국을 예표하고 있는 다윗 왕국을 위대하고 가장 큰 왕국의 통치를 베풀므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존중의 대상이었던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아들이라고 칭함으로 말미암아 왕가의 후손으로 이 가나안 여인이 바로 이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곧 노예로 오신 구주 목수라는 비천한 신분을 가진 그분을 왕가의 혈통을 가진 후손으로 왕의 혈통을 지닌 자로 그가 알았다는 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언으로 오시고자 하는 그리스도 구주에 대한 것을 인식했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여긴 것은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서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서 눈앞에 나타난 그분을 위대한 이스라엘에서
천여 년 전에 그 다윗 왕국의 첫 번째 왕이었던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왕의 후손으로 왕의 아들로 오셨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진 자입니까? 주님이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하나님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왕가의 모든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시고 성육신된 육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직업이었던 가업을 물려받아 그 목수로서 일을 했던 그 비천한 신분을 가졌던 그분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때에 이 가나안 여인만큼은 이 천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가의 혈통을 가진 바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의
말씀으로 지목하고 있는 그리스도 구주라고 믿음으로 바로 그 왕가의 후손으로 그분을 마음속에 담아놓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동안에 유일신 유대 종교를 통해서 구약 성경의 말씀을 어느 정도 눈으로 접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금씩 먹은 체험과 경험이 있었으나 이방 사람들은 한 번도 그 생명의 떡으로 오신 하늘에 속한 왕이신 그분의 생명의 떡을 분배받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경험이 없었어요. 한 번도 그 생명의 떡을 취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가나안 여인이 한 번도 취해보지 못한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뭔가 갑작스럽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음식이 주어졌을 때 먹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가 아주 잘고 세밀하게 요리해서 그 아이가 먹기에 좋은 상태로 해서 먹여 주듯이 예수님께서는 그 가나안 여인이 자신을 먹기 좋은 가장 적은 떡으로 계시를 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을 위한 배려인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성육신 되신 하나님으로 여겼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한 유대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존중을 받는 왕가의 후손으로 여김으로 말미암아
구약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구주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한 그에게 이방인들을 대표하고 있는 그 가나안 여인이 가장 먹기 좋은 적은 떡으로 계시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하늘의 왕이신 주님께서 노예로 오셔서 비천한 목수라는 신분을 가지고 바로 공생애를 시작하심과 동시에
그 일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목수의 일을 하였던 자로 인식하고 있고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조롱받고 멸시받는 지역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터에 바로 자신을 알아본 가나안 여인에게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가장 먹기 좋은 적은 떡으로 이 애완용 개의 아주 어린 개 이방인은 아주 어린 개인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생소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받아 먹을 수 있도록 아주 먹기에 좋은 작은 떡으로 계시해 주셔서 유대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 이방 백성들까지도 모든 자들을 다스리시는 바로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왕이심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 가나안 여인에게 가장 먹기에 좋은 작은 떡으로 계시해 주신 것처럼 우리의 음식이신
그분을 우리가 취함으로 말미암아 왕국의 씨인 그분이 우리라는 존재 안에 마음 밭에 뿌려져서 성장하게 하는 단계를 통해서 생명 안에서의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변화를 가져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자로 양육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음식이 먹기에 아주 좋고 잘게잘게 쪼개어진 떡으로 계시함으로 말미암아 그 잘게잘게 떨어진 생명 양식의
근본이 되시는 그분을 생명 양식으로 분배받을 때 바로 우리가 그분으로 인하여 양육되어져서 왕국에 합당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나안 여인을 만난 다음에 일정한 시간이 지났을 때 초대12 제자들은 3년 반이라는 기간이
지났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2년이라든지 3년 정도 지나서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50일째
되는 날 바로 천국이 출연하게 되면 왕국이 임재하게 되면 그 왕국 안에 들어가서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왕국에 합당한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바로 이 생명의 음식이신 구주께서는 잘게잘게 그 가나안 여인 곧 이방 백성들 모두를 상징하고
대표하고 있는 그들에게 먹기 좋은 가장 적은 떡으로 분배해 주고 있는 놀라운 그분의 자비하심과 그분의
긍휼하심과 그분의 우리를 향하신 인자하심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인성 안에 가지신 그 아름다운 미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서 이렇게 아름다운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온
그래서 소제로 표현된 것입니다. 고운 밀가루가 되기까지 탈곡기에 넣어져서 채질로 더러운 것 쭉정이 이런것들은 다 날려
보내고 또 가루가 되기위해서는 빻아지고 고운채로 수십번을 쳐내리고 해야 비로소 고운 밀가루가 되는 것 처럼 아주
깨끗하고 고운 아름다운 인성과 품성의 미덕을 가지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소제의 음식 그걸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아주 만족함을 가지고 받으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국에 합당한 백성들이 되는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라는 존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대체물이 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대치자가 됐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아벨의 제사처럼 기뻐 흠향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만족해 하시죠. 아주 기쁨으로 그것을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서 공급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잘게잘게 그분이 먹기 좋은 작은 떡으로 계시해 주신
그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왕국의 그 실제 안에서 사는 왕국 백성 곧 천국 백성이 되는 삶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26절을 통해 특별히 작은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일부러 이 가나안 여인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위대한 고백을 하여서 이의 믿음을 1차적으로 검증을 받고 예수님이 말씀은
안 하셨지만 얼마나 마음속으로 경악하고 바로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으러 오신 것이거든요.
이방 사람들을 대표하고 상징하고 있는 그 전형적인 이방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큰 믿음을 가진 자를 얻기 위해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1차적으로 주님이요 다윗의 후손이라고 고백한 그에게 또 한 번 2차적인 검증과 점검과 시험을 통해서 이가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자신의 생명의 떡을 분배받을 수 있는 소유자인지를 합법적인 자격이 있는 자인지를 확실히 들여다보기 위해서 또 한 번 시험을 하시는데 바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이방인들이 개들이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마치 외형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게 합니다.
걔들은 유대 민족들이 터부시하고 거절하고 아주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의 음식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이방인들 모두를 개들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개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왜 개들이라고 얘기했을까요? 작은 개 애완견 아주 조그만 개 아주 그냥 귀엽고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그러한 귀엽고 앙증맞은 개임에도 불구하고 개들이라고 얘기해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바로 레위기 11장 27절에 개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온갖 종류의 짐승 가운데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너에게 부정하다.굽이 갈라진 그 어떤 양이나 소 이런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은 부정하다.
그래서 바로 이 개들에 대한 얘기를 주님께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부정한 짐승이므로 말미암아 더러워서 상종치 못할
존재자들이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외형적으로 못 박으시는 장면을 우리가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27절은 그렇게 개들이라고 이방여인을 마치 유대의 동족들이 이방인들을 대하는 태도처럼 완전히 자기를 거절하고 반대하고 거부하고 심지어는 아주 멸시하며 쫓아보내려는 그런 외형적인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작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잖아요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에 마음 상하지 않고 불편해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의 입으로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다윗의 후손이라고 고백한 저분이 내가 그러한 것을 알고 주님께 찾아와 간절히 청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개처럼 취급하는구나 라고 실망하는 대신에 이방의 개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28절 말씀인 것입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이 조그만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이 떡과 애완견이라는
조그만 개에 대한 얘기를 말씀 하셨을 때 맞습니다 주님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지 않나요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이방의 개라는 것을 시인함과 동시에 이방 개 중에서도 아주 조그만 개 조그만 개들은 뭐예요? 주인의 집에서 그 주인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식탁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그 개가 주인집에서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 같은 것을 이 개가 먹는 것처럼 바로 자기 자신이 이방 조그만 개라는 것을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여인은 바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그 자신의 자녀들 잃어버린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으러 오신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는데 유대인들이 오히려 거절하고 멸시하고 반대하고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그 후에
이방인들의 몫인 상 밑에 부스러기가 되셨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큰 상위에 있는 큰 떡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 생일을 맞이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함께 생일 촛불을 끄고 나면 그 생일 당사자가 케이크를 먹기좋게 조각조각 자르잖아요. 그렇듯이 원래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유대 백성들을 위한 상위의 큰 하나의 떡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멸시받고 거부당하고 배척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의 몫인 상 밑에 부스러기가 돼버렸어요.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6절 자녀들의 떡을 가져다가 작은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얘기하고,
또 마가복음 7장 27절에서도 똑 같은 말씀을 하시죠. 그렇게 이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은연중에
그가 이 생명의 떡을 분배해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라는 것을 암시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유대인들의 몫이었던 그 상위에 있었던 그 빵 생명의 떡인 떡덩어리가 그들이 거절하고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의 몫이 되어진 상 밑에 흩어진 부스러기가 되셨다 라고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이 가나안 여인은 이스라엘의 그
거룩한 땅 안에 살고 있는 유대 사람들을 위한 이 생명의 떡이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땅 하나의 큰 식탁 위에 차려졌다는 거죠. 하나의 이 큰 식탁의 상이 뭡니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 예수님께서 발을 딛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의 거룩한 유대 땅이 하나의 하나님의 큰 잔칫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잔칫상 위에 놓여진 이 떡이 바로 구주이시며 하늘의 떡으로 오신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은 하나의 큰 떡상을 올려놓은 귀한 잔칫상이고, 그리고 하늘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스라엘 자손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몫으로 상 위로 바로 오셨던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거룩한 땅에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출생하셔서 갈릴리 지역과 그리고 유대 지역을 왕래하시면서
자신의 그 생명의 떡을 이스라엘 자손의 몫으로 주시기 위해서 왔는데, 그들이 멸시하고 거절하고 반대하고 한 번 두 번 세번, 네번, 열번 이런 일이 반복되어지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에서 상 밑으로 오히려 그리스도를 던져버림으로 그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이방인들에게 던져져서 부스러기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민족들에게 버림받아진 그 떡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버려서 땅속에 묻어둬야 됩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선용하시는 분이십니다.
땅속에 묻어두고 그것을 폐기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간과하고 소홀히하여 버려지고 내동댕이쳐진 그 떵덩러리가
그 이방 어린 개들이 먹을수 있는 부스러기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7장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라고 하실 때 이 가나안 이방 여인은 큰 빛을 얻었고 큰 소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아~ 그러면 내가 이 상 아래 떨어져 있는 이부스러기를 먹을 합당한 자격이 천번 만번 있는 자이지요.
왜냐하면 유대 백성들이 거룩한 땅에 오신 이 잔칫상의 생명의 음식이 되시는 주님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그 상 위에 거룩한 땅 유대 땅으로 올라오셨는데 그들이 상 밑으로 내던짐으로 말미암아 이방 땅에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주어진 몫이 부서진 부스러기 이기 때문에 여러분 보십시오 케익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을 때 어떻게 되죠?
그 케익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흙도 묻고 지푸라기도 묻어있죠.
그러나 그것도 개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잘 주워 먹습니다.
원래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큰 상 위에 올려진 하나의 생명의 큰 떡으로 오신 거예요.
유대 동족들만을 위한 생명의 떡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던져져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침으로 말미암아 흩어져 작은 조각 조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방
열국들을 대표하고 있는 가나안여인과 같은 이방 세계 사람들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작은 부스러기가 됐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것을 깨닫고 처음에 이 마태복음 15장 22절과 마가복음 7장 28절에서 주님과 다윗의 후손 이라고 고백했던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인식하고 고백했던 그이지만서도 이 떡에 대한 얘기와 조그마한 개에 대한 얘기와 떡 부스러기가
이방인에게 던져졌다는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이 말할 수 없는 큰 감격을 갖고 그럼 나는 그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분배받고 소유받고 공급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네요 라고 말하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7: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는
주님께서 깜짝 놀랄 정도로 이 여인의 고백은 위대한 고백이였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여인이여 당신의 믿음이 정말 큽니다.예수님조차도 감탄한 하늘의 하나님이신 그 성육신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감탄하여서 여인이여 네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의 딸이 낫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고도 대단한 믿음을 가진 여인에 대한 말씀의 대한 교제를 1부를 여기서 마치고
잠시후에 2부 말씀의 교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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