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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3/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에 대한 말씀과 참다운 금식에 대한 말씀말씀 나눔방 2023. 6. 11. 16:52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말씀주제 : 이사야:6:3/ 하나님의 거룩은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며
하나님의 의는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이사야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내용을
우리 성도들에게 전달해 줌에 있어서 가장 적나라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 구약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고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이번에 아가서와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 느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감에 있어서 더욱더 깊이 알아가고 그분을 알아가는 어떤 영적인 의미를 체험함에 있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제가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그 어떠하심이라 고 할까요. 하나님의 그 어떤 속성의 전부라고 할까요. 아! 너무나 모르고 있구나! 너무나 부족하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처럼 너무나 알면 알수록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그분의 어떤 그 생명의 달콤하심과
그분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거룩하심 그분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정말 아! 놀라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너무나 모르고 있구나라는 이런 생각이 많이 들고 있다 라는 것이 느껴 졌습니다.
정말 주님에 대한 이 알아감은 평생이 아닌 영원을 향한 삶 속에서 아마도 끝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더욱더 듭니다. 이사야서의 주제는 그렇습니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700년 후에 나타나실 실체가 되실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시고 성육신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또 40일 후에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의 어떤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이사야서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만이 아니라 여호와 라는 이름 안에는 항상 아버지, 아들, 영의 이름이 항상 이렇게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 아들 하나님의 구원 영 하나님의 구원 바로 이렇게 여호와의 구원이 우리에게 완전히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인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사야서 말씀의 주제 라고 여러분에게 설명드렸습니다.
이것의 어떤 중심적인 사상은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분께서 가장 먼저
하신것은 선민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정하셔서 그를 불러 주시고 그 선민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주시고 분별하여 주신 가운데 특별히 보존된 이스라엘 선민 민족들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따라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바로 그 혈통을 통해서 그 통로 이스라엘이라는 그 어떤 육적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기 위한 성육신 되신 하나님을 이렇게 취하고자 이사야서가 중심적으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구세주 사람의 구원자 메시아가 되시기 위하여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성 안으로 들어오셔서 곧 영원 안에 계셨던 그분이 영원 밖에 제한적인 시간을 취하게 된 인성안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 이신데 이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만물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선한 하나님의 선한 뜻 아래 창조되었다가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그 죄로 비롯되어서 온 우주가 타락되었죠. 타락된 온 우주를 원래 상태보다도 더 견고하고 더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여 영원토록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도래할 새 예루살렘 성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기름 부운 받은 자로서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66장의 이 말씀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경륜을 따라 정하신 모든 것들을 다루시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 안에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다루고 있다 라는 얘기죠 그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하신 첫 시작이 바로 성육신인 것입니다.
성육신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취하여진 그 영을 통하여 그 생수의 강들을 소유받아 적셔진 바 된 성도들을 통하여 마지막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한 일을 하신 그 시작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의 끝도 새 하늘과 새 땅인 바로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본격적인 움직임을 갖고 오게 하는 것이
성육신인데 성육신 하시기 전에 움직임의 태동 안에 있는 그 기틀을 준비하고자 구약 성경이 기록되어 졌고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셔서 실제적인 움직이심을 가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출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움직이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것으로 시작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신약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33년 반 동안의 생애를 사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끝맺는 것이 계시록의 성경 마지막 말씀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고 그분의 출생으로 시작되어져서 그리고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통하여 성도 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혼이라는 내적 존재 안에 하나님께서 동산이 되셔서 그 동산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잘 가꾸고 잘 조성하고 잘 이렇게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처럼 바로 하나님의 텃밭인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완결되어지는 새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일에 함께 협력하여 도모하게 된다 라는 것이 신약 성경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서 66장은 구약 39권과 27권을 더한 66권의 전체적인 성경 말씀 가운데 특별히 이사야서 구약 66장 말씀은 신약의 27권을 대표하고 있다 라고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희가 잠시 전에 교제를 나눈 것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선민 이스라엘과
선민 이스라엘 곁에 조성되어진 열국과 이방 민족들을 특별히 구별하셔서 그들을 취급하시고 그들을 대하신다 라는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부어주시고
특별히 어긋나는 삶을 사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 징계의 손을 통해서 열국과 열방 민족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이런 작업을 한다라는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이방 민족들에게는 여호와의 심판이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이렇게 부어주셔서 잘못했을 때는 징계를 그리고 열국에 대해서는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에 의해서 의의 심판이 내려진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열국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이 이방 민족들 열방의 민족들을 통해서 하시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여러분이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선하신 속성이기 때문에 그 사단과 사단에 속한 악한 무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고 때로는 훈련시키고 때로는 징계를 내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거룩한 존재자들로 보존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그 악한 무리들을
동원시켜서 활용하고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지혜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잣대에 의해서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이 징계의 막대기로 때리실 때 왜 불의한 열국 불의한 이방 민족들을 통해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혹독하게 그렇게 취급하시고 혹독하게 다루시고 때리셨을까요? 그것은 그 열국 이방 민족들이 사단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열국에 대한 이방 민족들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이 사단과 열국이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열국에 대한 여호와의 주권적인 다스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열국 불의한 이방 민족들까지도 여호와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의하여 그들이 제한을 받고 그리고 통치함을 받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좀 말을 한다면 여호와의 사랑의 표현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은택을 베푼다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시는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택을 베풀고 어긋날 때는 사단과 하나가 된 그 열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그 어긋난 행위 사악한 행동을 했을 때 때리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아울러 소수의 남은 자들을 남겨두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애와 자비로운 처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먼저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표현의 행동은 이스라엘 에게는 사랑의 은택을 베푸시고 그다음에 또 이 열방의 민족들을 이렇게 의의 잣대로 그들을 심판하신다 라는 것을 동시에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이것이 놀라운 그분의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은택을 때로는 그 자애로우신 아버지 때로는 엄위하신 아버지로서 때로는 돌보시고 양육하시고 품어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때로는 자상한 남편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선민 이스라엘의 필요를 충족시키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존재하죠. 하늘들 영역 안에 있는 하늘 아버지의 영적인 그
모든 축복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 다 있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필요를 그들에게 선민 이스라엘에게 채워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인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의 목적을 이루고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선민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남편의 사랑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바로 긍휼이 내재된 사랑의 은택을 베푸시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약에 잘못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서 품어주시는 어머니가 아닙니다.
품어주시는 어머니는 철이 없을 때 돌봐줄 수 있는 품이 어머니의 품인 것입니다.
자상한 남편은 그 마음과 뜻과 행동이 같이 하나 되어 서로 사랑의 연인의 감정의
교감을 가질 때 남편으로서 사랑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 선민 이스라엘이 아들로서 자식으로서 그릇되고 사악한 행위를 했을 때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로 여호와하나님이신 그분이 엄위하신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자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소연 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서 1장 2절 말씀부터 4절까지 말씀인 것입니다.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 계시라.
1:2 오 하늘들이여, 들으라. 오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들을 먹이고 키웠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1:3 소도 자기 주인을 알며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며 내 백성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1:4 아, 죄 많은 민족이요, 불법을 짊어진 백성이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요, 부패시키는 자식들이로다. 그들이 주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분노를 일으키며 뒤로 갔도다.
바로 이사야가 사역하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다윗에 의하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나누어지기 전에 원래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였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이 타락하고 그리고 정말 이방 민족들의 그 첩들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섬기던 이방 신들 우상들을 섬기고 패역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두 개로 쪼개지게 되고 나뉘어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1장 1절 말씀을 통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 계시라라고 유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쪼개진 북쪽의 이스라엘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얘기가 아닌 유다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다가 하나님의 계획 곧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북 이스라엘보다도 남쪽 유다가 훨씬 많은 더 큰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가 아닌 유다의 실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너무나 비통해하시고 너무나 슬퍼하는 가운데 이사야에게 하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이사야에게 오셔서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친히 대언하시게 한 것입니다.오죽 답답했으면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나타나신 사랑의 표현을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바로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 가운데 그들과의 온전한 관계 또는 온전치 못한 관계에 있을때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양육하는 어머니로 때로는 좋은 관계 어떤 합법적인 관계 위치에 있는 남편의 관계로서
이렇게 세 부류로 삼중 방식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 가지 방식으로 그때마다 여러 사랑의 방면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을 돌보셨던 하나님께서 어긋난 사악함을 통하여 이방 민족들을 의지하고 기대하고 하나님을 떠나 다른 나라들 열방의 강대한 나라들을 의존하고 의지한 그들에게 아버지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늘과 땅을 불러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소연을 대신 하게 하시고 듣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머니처럼 양육하고 기르시고 했는데 그 이스라엘이
거역하였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1장 2절 말씀이죠. 이것이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 계시라고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이렇게 칭하여서 얘기를 한번 해봅시다.
유다와 예루살렘 곧 이스라엘에게 양육하신 어머니로서 돌보신 어머니로 품어주신 어머니로 그렇게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반복하여 양육하고 사랑으로 키우셨는데 그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이 거역하고 사악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저번 교제에서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이런 사랑으로 어머니로서 양육하고 어머니로서 품어주시고 아버지의 훈육으로 길러주셨는데 오히려 그들은 그 선택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주인 자기 아버지 자기 남편 자기의 어머니인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사악한 행위들을 통하여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그 징계는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
가운데 때리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들인 열방 열국을 때리는 일과 선민 이스라엘을 때리는 일은 확연히 다릅니다.
이방 민족과 열국을 때린 일은 공의의 심판에 의해서 의의 심판으로 때리는 일이라면
이 선민 이스라엘은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으로 사랑의 막대기로 때린다 라는 것이 큰 차이인 것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하나는 선민 이스라엘과 같은 교회들 성도들이 존재하고 하나는 이방인들 열국을 상징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모두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 이스라엘이나 그 이방 민족들이나 모두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어진 바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특별히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특별한 하나님의 이 영원한 경륜을 이루기 위한 특별한 존재자들로 부르셔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택함 받은 백성인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별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들이나 선민 이스라엘은 외견상으로는 똑같아 보이지만 열국은 외형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어떤 면에서 보면 마치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그런 유형 가운데 속해 있는 자들이라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택하고 하나님이 분별시킨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국이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구약 성경을 통하여 마치 버림받은 자들인 것처럼 때로는 아무 흔적도 남김이 없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의 막대기로 큰 징계를 내리신다 하더라도 항상 소수의 남은자들을 항상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열국은 하나님께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버림받은 그러한 자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 열국을 절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 열국을 함부로 대하시고 혹독하게 정말 공의의 심판의 잣대로 때리셔서 그들을 의의 심판을 당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가운데서도 열국 이방 민족들을 버리시지 아니하신 이유는 신약 성경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에는 그분께 택함 받은 많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신약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교회의 대부분의 중심에사람들이 이방 민족들이 택함 받은 것처럼 사도바울 선생님에 의하여 이방 민족들이 택하여서 교회들이 주축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구약 성경 안에서도 여러분 룻기를 보세요. 룻이라는 여인 그리고 여리고 성안에 라합이라는 기생을 통하여 여러분 그런 자들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시는 통로가 이방 족속의 여인들 가운데 다윗의 부인 바세바를 보십시오.
그런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경륜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열국을 버리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적 가운데는 열국이 교회를 이루는 조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조성되고 구성되어지기 때문에 택함 받은 많은 사람이 오히려 선민 이스라엘보다는 외형적인 숫자로 봐서는 바로 이 열국 가운데 이방 민족들
가운데 택함 받은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절대 버리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이 그 구약 성경에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이루고
성취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먼저 취급되어져야 될 존재자들이 선민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더욱더 관심 두고 그들을 집중 보호하고 예의주시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그래서 대부분의 택함 받은 자들이 이방 족속들로부터 나온다라고 신약 성경은 사도바울 선생님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성경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택함 받은 자 대부분 교회를 구성할 대부분들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나온다 라고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마치 선민 이스라엘은 보호하시고 열국은 보호하시지 않은 것처럼 버리신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분의 계획 속에는 계속해서 그 열국을 혹독하게 치리하시고 혹독하게 다루시는 것이 아닌가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 이루어진 그 시점 이후부터는 오히려 택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이방 민족들을 더욱더 관심을 두고 사도 바울 선생님을 통하여 또 베드로 선생님을 통하여 이방 민족들을 구원하는 일에 심혈을 아주 많은 집중을 요하시고 그렇게 예수님의 영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처음에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주님의 긍휼이 내재되어있는 사랑을 집중적으로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남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집중적으로 보호하시고 다스리시고 치리하시고 통치하시고 품어주셨주셨만 때가 되면 그 이방 민족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택하여 바로 믿는 자들 거듭난 자들이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세우는 일을 처음에 120문도는 물론 갈릴리 사람을 주축
으로 해서 그렇게 믿는 자들로 교회가 이렇게 형성이 되었지만 그 후에는 확장이 되고 증가가 되고 증대가 되어서 확산되어지는 일들은 바로 택함 받은 이방인들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셔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면에서는 구약 성경에서는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신약 성경에는 이방인들을 택하여 믿는 자들이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중요한 그리스도의 몸을 조성하도록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이고 아주 정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택함 받은 자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과 그리고 열국에 그 이방인들을 함께 하나님께서 그 신약 성경을 통하여 거두시고 또 재림의 때에 하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더욱더 이렇게 예의주시하고 관심 가지시고 그들을 구원시키는 일을 먼저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하나님의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이 그대로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방인들보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더 많은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다룸을 받습니다. 그러나 열국은 다른 방식으로 다룸을 받습니다.
그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온전히 세워지고 주님 앞에 믿는 자들이 되어서하나님이 택하여 믿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통하여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인 그리스도께서 먼저 오시는 일이 선제적으로 그 일이 마련되어져야 했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우리가 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더욱더 깊이 사랑하시는 존재자들로 그리고 열국은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랑에서 떠나 버림받은 자들처럼 보여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그렇게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 가운데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으로서 특별히 다루신 것은 그 사랑 안에서 그들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이방 민족들까지 쫓아와 세워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선민 이스라엘은 바로 열방 민족들과 달리 혹독하게 다루시는 심판이 아닌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막대기 징계로서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다루셨습니다. 예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을 교정한 것처럼 때리고 올바르게 개선시키고 교정시키고
교화시켜서 정말 그 징계로 인하여 그 아버지의 자녀들을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전편 교제에서 우리가 얘기한 것처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세 가지 방식으로 이사야서 1장 2절 3절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마치 자녀들을 이렇게 교정하고 때리고 개선하고 훈계하고 권면하여서 그를 올바른 자녀가 되게 하는 것처럼 또는
이사야서 66장 13절 말씀처럼 어머니의 위로를 받는 자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터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양육하는 어머니로서 돌보고 끊임없이 그를 품어주시고 끊임없이 그를 이렇게 양식을 매겨주시는 어머니로서 때로는 자상한 남편으로서 의지할 수 있는 남편으로서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이렇게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심판의 문제가 아닌 징계의 문제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다루시고 열국 이방 민족들에게는 의의 심판의 잣대인 공의의 심판의 문제로 이 열방의 국가들을 이렇게 다루셨다 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열방 민족들 이방 민족들을 다루신 것은 심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먼저 선민 이스라엘이 세워지지 아니하면 그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의 목적을 이루는 일이 성취되지 않고서는 이방 민족들인 그런 열국의 족속들까지도 이렇게 모든 일이 헛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먼저 선민 이스라엘을 그렇게
아버지와 같은 사랑 어머니와 같은 사랑 남편과 같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대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공정성의 형평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먼저 그렇게 선민 이스라엘이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이방 족속들까지도 모두 구원시킬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어 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묘하신 지혜 가운데서 그러한 일을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열국에 대한 이방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이 열국을 다루시는 심판의 문제 그래서 혹독하게 보이고 그렇게 아주 가혹하게 보일 정도로 하였지만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징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도 그와 버금갈 정도로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여러 가지 방면에서 오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 깊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적과 계획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어떠하심이 선민 이스라엘이 어떠하심에 따라 다르게 다른 형태로 나타나진다 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수많은 오해들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하나님으로서 긍휼이 내재되어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징계하시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공의의 잣대를
가지고 열국을 이렇게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징계가 아닌 심판의 문제가 대두 되어졌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한 존재자들로 불러서 구별시켜주신
것은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일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에 따라 그들은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으로 징계하시고 열국은 그분의 의에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분별력 없이 그분을 바라보게 되면 많은 오해가 있게 된다 라는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립니다.
열국을 의의 심판으로 취급하시고 또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따라 사랑의
징계로 취급하는 것이 그분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그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그분이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공평하고 그분은 거룩하고 그분은 의롭기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렇게 거룩함에 따라 사랑으로 징계하시고 열국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의롭기 때문에
그분의 의에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 그분의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의로우심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근거하였고 어떠하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죠.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그 두 가지 그 어떠하심에 근거하여 우리가 형편이 어떠하심에 따라 형태가 어떠한 것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그분은 우리를 사랑 가운데 또는 의 가운데 심판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사랑 가운데 거룩함을 따라 징계하실지라도 그 징계에 막대기가 너무나 혹독하다는 것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하신 하나님을 보세요 소수의 남은 자들만을 남겨주셔서 그들을 불러세우시는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에 따라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막대기로 징계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선민 이스라엘이 특별히 해야 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하나님은 인간들을 대하시는 두 가지 방면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방면으로 안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의 방면으로 이렇게 취급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거룩이고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들 이방 민족들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의로운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것처럼 자신의 그 선민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이 그 똑같은 성품을 소유하여서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열국은 하나님에 대한 요구인 의를 근거로 바로 열국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의로운 자들이 되기를 이렇게 간절히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심판하신 그 주님은 그분의 거룩함으로 인하여 사랑 안에서 이스라엘을 그 사랑의 막대기로 징계하실 것이고 또 열국은 그분의 의를 근거로 하여 바로 심판하시기 때문에 열국은 의롭게 되기를 원하시고 믿는 자들은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있다라는 것이 이 성경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사악한 존재가 되어서 이사야서 1장 1절 2절 3절 4절 말씀을 기록하게 되었는냐면 죄가 가득하고 허물이 가득한 나라와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소연하게 됐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렸다라는 얘기죠 쉽게 말하자면 거룩해지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 거룩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고 거룩함이 아닌 오히려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우상을 받아들이고 우상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악한 존재자들로 됨으로 말미암아 이사야서 1장 10절 말씀에서는 소돔과 고모라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소돔의 치리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 말씀은 아버지가 마치 자녀들을 다스리고 교정하고 개선함으로 말미암아 교화시켜서 올바른 길로 가도록 양육하는 어머니를 통해서 남편 되신 그 하나님을 통해서 그렇게 사랑으로 권면하고 그렇게 의존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은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되었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싫어하였는지를 하소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지를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읍 전체가 창기가 되었다라고 이사야서 1장 21절에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있습니다. “ 신실하던 도시가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는가! 공의가 거기에 충만하고 의가 거기에 거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 이 신실하던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 성읍인 것입니다. 판단의 공의가 거기에 충분하고 의가 거기에 거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로구나
예 공평도 없고 의도 없고 살인자들로만 가득했다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공의와 공정과 정의는 사라지고 이스라엘이 모든 면에서 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루살렘 성읍이 창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 예루살렘 성읍은 하나님의
도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 자체가 창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 나라 전체가 썩어지고
부패되고 냄새가 나게 되어지고 말할 수 없이 썩어 문들어졌다 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 그들의 행위 그들의 눈 그래서 여기에 예루살렘은 넘어지고 유다는 엎드려졌다 라고 이사야서 3장 8절 9절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8 예루살렘이 파멸당하고 유다가 몰락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혀와 그들의 행위가 주를 대적하며 그분의 영광의 눈을 자극하기 때문이니라. 9 그들의 안색이 드러나 그들을 대적하여 증언하며 그들이 소돔과 같이 자기 죄를 밝히 드러내고 숨기지 아니하니 그들의 혼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재앙으로 보답하였도다.
예루살렘이 파멸 당하고 유다가 몰락하였으니 8절에 이 말씀이 너무 슬픈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만하여지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선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통하여 표현되는 공평을 기대하셨으나 오히려 포악을 보게 되었고 바로 참포도나무의 열매를 산출하기를 생산하기를 심히 기대하였지만서도 오히려 포도원은 들포도를 산출하고 생산함으로 말미암아 그 포도원의 주인을 실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의로움을 기대하셨는데 불의한 자들이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정말 공평과 정의로움과
모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자들로 조성되기를 바랬는데 이사야 5장 4절에 보면은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해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었으랴?
그 안에서 내가 행하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포도원이 포도 내기를 내가 바랐거늘
그것이 들포도를 냄은 어찌된 일이냐? ” 하나님께서 그 포도를 보시고 매우 실망하시는
그러한 내용을 우리가 이렇게 볼 수가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구약 성경에 나타나지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을 통하여 비록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택정함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아버지로 이렇게 교정을 받고 어머니로서 양육함을 받고 남편으로서 이렇게 정말 그러한 온전한 취급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악한 창기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 교회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을 드러내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 대신에 포악함을 의로움 대신에 불의함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매일의 생활 속에서 어둠과 부정함과 이 오염되고 냄새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숨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적인 존재인 영이라는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이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동산이 훼파가 되고 망가지고 훼손이 되고 파괴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느낄 수가 있고 인식할 수가 있고 들여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깨어서 주님의 교제 안에서 기도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조성해 놓은 주님이 원하시는 길대로 뜻대로 가꿔 나가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6장 3절에 보면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 이사야서 6장의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영광 안에 계신 주님에 대한 이상을 이사야 선지자는 6장에서 보았습니다. 이사야 6장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또한 내가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왕자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 예 하나님의 관심은 3절 말씀을 통해서 거룩인 것입니다.
2절에 천사들이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으면서 그분의 거룩함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면서계속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창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위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선민 이스라엘에게도 그러한 거룩함을 소유받은 존재자들로 그들이 조성되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거듭난 영에 의해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 영이라는 존재 안에 우리의
거듭난 영이 새롭게 새로운 존재자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새로운 출생을 하였다는 얘기죠
예수님의 영과 하나가 되어서 한 영이 된 우리들 동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그 동산을 아름답게 가꿔야 할 우리가 거룩하지 않으면 가꿔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6장 1절 2절 3절 말씀을 통해서 이사야가 이 놀라운 이상을 보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죄악되며 얼마나 부정한 입술을 가졌고 얼마나 패역한 자임을 그 부정한 입술을 가진 그 선민 이스라엘 백성 중에 살고 있다 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5절입니다.
이사야:6:5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므로 망하게 되었나니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 하였더라.
그래서 여기에 보면은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오늘날에 이 거듭난 영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영에 의하여 새롭게 되어서 거듭난 영을 통하여서 새롭게 되고 또 거룩해질 수 있도록 변화가 되고 또 구속하시는 그분의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의 몸을 본받게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육신 안에 속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의해서 거룩하게 된 존재자들이라 할지라도 거듭난 영을 소유받은 자라
할지라도 옛 창조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우리 속에 죄악된 본성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거듭난 영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새로운 출생을 하였다라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해야 되는데 계속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반복하게 되거든요. 그 얘기는 우리 속에 죄악된 본성을 비록 거듭났다 할지라도 거듭난 영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새 창조의 영역 안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육신 안에 있고 여전히 옛 창조 안에 있고 여전히 우리 속에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부정하고 냄새나고 오염되고 불의한 일을 할 수 있는 이 땅 위에 살고 있다라는 먼지보다도 못한 티끌보다도 못한 에노스라는 그 하나님의 속한 그런 에노스라는 뜻을 가진 먼지 티끌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째서 거듭났고 새 창조의 영역 안에 있고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됐고 새 사람이 되었는데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우리를 더욱더 온전하고도 완전한 구원받은 자로 그런 존재자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오묘하신 섭리인 것입니다.
우리를 거듭났다고 그래서 단번에 모든 일을 다 종결시키시고 완전히 죄악된 본성이 없는 육신 안에 사는 삶이 없는 옛 창조의 영역 안에 속한 삶을 삶고 있는 자가 아닌 그런 완벽한 거룩한 존재자로 만든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발전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부정한 죄악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들을 날마다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들 우리의 허물들 우리의 결함들 우리의 실패들 우리의 실수들
우리의 약점들 우리의 실족 당할 수밖에 없는 것들 우리의 아킬레스건들 우리의 단점들
우리의 허물들 늘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찡그리면서 아파하는 그런 것들을 늘 하나님 아버지께 그리스도께 고백해서 나타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백하고 자백할 때 주님에 의하여 온전한 빛비췸을 받으면 우리의 상황이 어떠한 존재자의 상황인지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확연히 드러나게 돼서 나 자신의
모습이 보여져서 그 작은 여우들을 붙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포도원 안에 우리의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이라는 내적 존재 안에 들어와서 포도나무에 있는 우리의 동산을 해치고 망가뜨리고 훼손시키고 파괴시키고자 하는 그 작은 여우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황이 온전히 깨달아져야 되고 보여져야 되고 나타나신 바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들을 우리의 허물들을 자백할 때 이러한 상황들이 깨닫게 되고 바로 우리가 얼마나 죄악된 존재자임을 알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 주시는 예수님의 그 영을 통하여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를 놀랍게 조성시켜 주시는 그 생명 주시는 영에 의해서 비록 우리의 영이 거듭났을지라도 옛 창조 안에서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죄악되다 라는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죄들을 자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심히 왜 내가 거듭났는데 왜 내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서 새로운 사람으로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옛 피조물에서 새 피조물로 이렇게 거듭난 새로운 출생을 가진 바 되었는데 왜 나는 아직도 죄를 짓고 죄를 범하고 죄를 끊임없이 나타내고 있는가 라는 이런 의문으로 얼마나 고민을 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티끌로 만들어진 하나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분의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으면 그분은 우리를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를 선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물두멍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손과 발을
먼지로 티끌로 만들어진 우리의 존재들을 늘 매일매일 그 하나님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할 때마다 씻고 또 씻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그제서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너무나 잘 아시고 사랑하는 자녀인 사랑하는 선민인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언자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애정어린 권고와 하소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주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징계와 징계받은 백성에 대한 그 여호와의 애정어린 권고와 약속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선민 이스라엘을 택정하여 부르셔서 분별시켜주신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를 다루시고 우리를 치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교정하시는 아버지로 양육하시는 어머니로 자상한 남편으로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다루시고 혹독하게 치리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더 큰 그분의 심판하심 보다도 하나님에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요구인 의로워지는 것을 통하여 심판하시는 그것보다도 더 엄중하게 때로는 나타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아버지로 어머니로 남편으로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징계하시고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지팡이로 우리를 간섭하실 때 우리는 그 사랑에 마주하고 걸맞는 반응하는 상태의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엄중한 징계의 때림을 모면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그분의 통치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다루심에 있어서 너무나 엄격하시고 세심하시고 참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함과 의로움인데 그분의 거룩함과 의로움 그것이 신성한 통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성한 통치를 가지고 오는 것이 거룩함과 공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시고 엄격하게 다루시고 아주 세심하고도 세밀하게 참되시게 다루셔서 우리를 규제하고 다스리고 그리고 우리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은 원칙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원칙과 법칙이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선민 이스라엘에게 대하시는 이 징계의 때리심은 사실은 긍정적인 동기를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리 우리가 사악한 짓을 하고 어긋난 일을 하고 죄악된 일을 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심한 징계이실 뿐 우리를 심판하거나 결코 징벌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선민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이루시기 위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자들로서 분별되어진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심판하거나
징벌하시는 대신에 징계만을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 징계를 하신다는 그 속에는 때림이 있다는 얘기죠 그것이 우리가 혹독하게 보이고
아주 매몰차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혹독한 때림 속에는 그분의 긍휼이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손길이 어려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오해를 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 교회들에게는 하나님이 때리심을 통하여 똑같은 때리심이지만 그 때리심이 우리를 심판하거나 징벌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내려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훈계하시고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양육하시고 남편처럼 정말 그분만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 선택된 민족 백성이듯이 성도들 교회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자녀들을 징계 하시는
것은 큰 때림의 징계일지라도 우리를 심판이나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큰 때림을 통하여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때림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같은 징계하는 사랑이 여러분 때로는 때리시는 아버지가 있는 반면에 품어주시는 어머니 양육하시고 돌보시고 아껴주시고 품어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이 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아버지 아들 영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내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어느 정도 불식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민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녀들 사랑하는 선민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징계하실까요? 사랑의 막대기로 왜 그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때리실까요?
변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선민 백성들의 변절 때문에 이 선민 이스라엘의 땅이 황무하게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황무하게 되고 성읍들이 불타게 되며 그들의 토지가 이방인에게
완전히 정복당하여서 토지도 뺏기고 땅도 뺏기고 성도 뺏기고 나라도 뺏기고 그들의
몸도 뺏겨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고 70년 동안에 바벨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정말 자기의 주인을 섬겨야 될 그들이 이방 왕을 섬기는 자들로 이렇게 변질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바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변절이란 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고 우리의 남편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으로서 자신만을 섬기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합법적인 위치에서 주권적인 위치에서 그렇게 명할 권리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와 남편이 아닌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거짓 아버지 거짓 어머니 거짓 남편에게서 돌이켜 그 이방 왕들이 이방 백성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긴다 라는 것이 바로 변절이라는 것입니다.
변절이라는 것은 하나님 대신해서 다른 것을 섬기는 것 다른 것을 쫓는 것 다른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 다른 것을 더욱더 사랑하는 것 다른 것을 더욱더 관심 두는 것 다른 것을 더욱더 눈에 들어오게 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변절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돌이나 나무에 대고 복을 빌고 그런 우상들 말구요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보다도 더 귀하게 여겨지는 그런 것들이 여러분 마음속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올바른 금식을 해야 됩니다.
금식이 뭡니까? 여러분 참다운 금식 예전에 구약 성경에서 나타났던 금식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금식의 깊은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 들으면 놀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먹고자 하는 것 다른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금식을 아는 자들의 표상입니다.
온전한 금식이란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쫓는 것은 금식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 다른 것을 먹고 다른 것을 마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먹고 그리스도만을 마시고자 하는 것이 참다운 금식이라는 것 여러분 영원히 기억하세요. 여러분 오늘 금식하셨습니까? 만약 그리스도만을 먹고 그리스만을 마시고 그리스만을 취하고 그리스도만을 쫓고 그리스도만을 관심 두었다면 여러분들은 참으로 금식다운 금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얘기하고자 하고 있는 영적인 본질적인 의미의 금식인 것입니다.
밥만 안 먹으면 그게 금식인가요? 하루 이틀 3일 어떤 사람은 일주일 얼마 전에 어떤
기독교인 목사가 외국에 사는 사람인데 40일 금식 하여서 그만 죽고 말았다라는 기사를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게 금식이 아니에요 그 곡기를 끊는것 대신에 그리스도만을 먹기를 원하여서
그리스도만을 쫓는 삶이 참다운 금식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더라면 그가 그런 헛된 잘못된 금식의 행위를 했을까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리고 입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말을 하며 다른 것들을 듣길 원하고 다른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에 담아두고 바로 그러한 모든 것이
변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눈 속에 우리들의 귀 속에 우리들의 입속에 우리들의 배 속에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본다면 여러분 그게 변절인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보기를 탐한다면 그것이 여러분 변절이지 다른 게 변절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은 나는 변절할 리가 없습니다.
나는 우상을 둔 적도 없다고 말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변절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귀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고요? 여러분들의 입은 무엇을 먹기를 원하고
있나요? 여러분들의 배에는 무엇이 채워지길 원하고 있습니까?
선민 이스라엘은 이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바로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들의 성한 곳이 없었어요. 그것이 1장 5절 말씀입니다.
1:5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하였으며 1:6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그 안에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멍든 것과 곪은 종기뿐이거늘 그것들을 꿰매고 싸매고 향유를
발라 아픔을 달래지 못하였도다. 이것이 변절에 대한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을 이방인에게 삼켜지게 하시고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성읍들을 불에 타게 하셔서 황폐케 하여 주시고 땅이 황무하게 되어져서 이방 족속들을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왜냐하면 변절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이렇게 나타나게 되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바로 자신의 선민 이스라엘이 사단과 사단을 쫓는 악한 무리들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버린 그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큰 막대기에서
징계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로 열국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대적자들 하나님의 큰 원수가 두 가지 종류가 있죠.
대적자들이 있고 원수들이 있습니다. 대적자 들은 하나님 나라의 안에 있는 자들이고
원수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이 이러한 바로 사악한 행동들을 통하여 그 선민이스라엘의 변절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히 고통스러워하고 정말 마음 아파하시면서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함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로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대적자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원수들 사단과 마치 악한 무리들과 같은 그런 반역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거역한 그러한 선민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녀들을 심히 혹독한 막대기로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숨을 쉬고 사실 수가 없으셨던 상황에 처하게 됐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일단 살고 봐야 되잖아요. 여러분 이렇게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하죠?
하나님 자신을 어떤 면에서 편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때리심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통하여 그들의 변절되어져서 찌꺼기가 되고 불순물이 되고 혼합되어진 것을 모두 제하여 버리셨다 라고 1장 2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25 내가 또 내 손을 네게로 돌려 네 찌꺼기를 정결하게 제거하며 네 주석을 다 치워 버리고 1:26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조언자들을 처음 시작하던 때와 같이 회복하리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도시 신실한 도시, 라 불리리라. 1:27 시온은 공의로 구속을 받으며 시온의 회심하는 자들은 의로 구속을 받으리라.
예 그러한 우상들 그런 변절로 인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섬긴 그것이 찌꺼기 불순물 부정하게 된 거 혼잡물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포도인 선민 이스라엘의 그 땅 울타리를 완전히 열방에 의해서 열국의 이방 민족들에 의하여 강대국에 의하여 걷어 먹힘을 당할 수 있도록 그 담을 완전히 헐어서 짓밟히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셔야 하나님께서 그나마 소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하여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의 원대한 목적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며 시간 관계상 여기서 교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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