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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 1:2,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자권인 두배의 축복
    말씀 나눔방 2023. 11. 6. 06:50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 말씀 : 마태복음 1장 2절~3절

     

    말씀 주제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자권(두 배 몫의 땅, 제사장 직분, 왕의 직분)을 지켜내어 유업으로 누려야 함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말씀 중 마태복음 1장 1절과 2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계보에 관해서는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계보에 이어서 마태복음 1장 2절 하반절 말씀,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에 대해서 여러분과 교제를 나누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은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통하여 열두 명의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2절에,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취한 여종 하갈을 통해서 첫째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고, 본 부인 사라를 통해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얻었지만 이스마엘은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통해서 쌍둥이 아들, 첫째 에서와 둘째 야곱을 얻었지만 둘째 야곱만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팔십육 세에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의 나이 백 세에 사라를 통해서는 이삭을 낳았고 이후 이방 여인 그두라를 통해서는 여섯 명의 아들들을 낳아 모두 여덟 명의 아들들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여덟 명의 아들들 가운데서 오직 이삭만 약속된 씨로 여겨졌다고 로마서 9장 7절, 8절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7 또 아브라함의 씨라 하여 다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이삭에게서 난 자만이 너의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이는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라.

    (로마서 9:6,7 한글 KJV)

     

    이삭은 아내 리브가로부터 쌍둥이 형제를 낳았는데 그중 첫째 ‘에서’ 대신에 둘째 ‘야곱’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로마서 9장 10절부터 13절까지 말씀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리브카도 한 사람, 곧 우리 조상 이삭에 의하여 잉태하였는데 11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부르심에 있게 하시려고) 12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고 하셨으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9:10~13 한글KJV)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을 따라오셨는데, 창세기 22장 18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곧 그의 씨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 약속을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고 계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음성에 복종하였음이라." 하더라. (창세기 22:18 한글 KJV)

     

    그런데 마태복음 1장 2절 하반절에 “야곱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어 유다는 물론 그의 열한 명의 형제들까지 언급되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자식들 중에서는 이삭을 제외한 일곱 명의 이복형제들은 기록되지 않았고 또 이삭이 낳은 자식들 중 야곱의 형 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유다는 물론 나머지 열한 명의 형제들까지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낳은 열두 명의 자식들 모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것을 1장 2절, “야곱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를 통해서 나타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장자권의 의미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 아들 곧 장자는 바로 르우벤이었습니다. 이 계보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말씀의 주제,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장자권이 가지는 아주 중요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르우벤이 열두 명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 아들 장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자권은 당연히 그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유다가 장자로 언급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장자권을 놓고 다투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먼저는 야곱과 에서가 장자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고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로부터 낳은 쌍둥이 아들들이 어미 배속에서 나올 때 먼저는 세라의 손이 나와 산파가 그의 손에 홍색실을 매었지만 그를 제치고 베레스가 먼저 나와서 그가 장자가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장자권에 대한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구약에서는 그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다투는 것을 보면 장자권에 담겨있는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장자에게 주어지는 장자권에는 세 가지를 상속받는 특별한 권리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기업 중에서 두 배의 몫을 상속받는 권리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자신이 속한 가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 직분을 소유하는 권리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가 속한 족속들을 통치하는 왕의 직분을 소유하는 권리입니다.

     

    16 그가 소유한 것을 그의 아들들에게 그가 상속해 줄 때 미움받는 여인의 아들 앞에서 사랑받는 여인의 아들을 장자로 세우지 말지니, 그가 참으로 장자이니라. 17 그는 오직 그가 소유한 모든 것에서 그에게 두 분깃을 주어 미움받는 여인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할지니라. 이는 그가 그의 힘의 시작이요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라. (신명기 21:16,17 한글 KJV)

     

    그래서 르우벤은 야곱이 낳은 열두 명의 아들들 가운데 장자권을 소유한 첫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두 배 몫의 땅을 소유하는 권리와 하나님과 자신의 족속을 중재하는 제사장 직분과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자신의 족속을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가질 권리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르우벤은 이처럼 특별한 장자권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육적인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하여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힌 일로 인하여 르우벤이 당연히 소유해야 할 장자권이 다른 형제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창세기 49:3,4 한글KJV)

     

    장자로서의 권리가 있었던 르우벤이 그 권리를 잃어버린 것은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안에 속한 성도들에게 큰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힌 일로 말미암아 장자로서 갖는 너무나 소중한 권리 곧 두 배 몫의 땅과 제사장의 직분과 왕의 직분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자의 첫 번째 권리: 두 배 몫의 땅

     

    장자권 중 두 배 몫의 땅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높이 올라가야만 접할 수 있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은 풍성한 소산물들을 산출하여 그 땅을 소유한 자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함으로써 그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는 곳입니다. 이는 좋은 땅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아 그리스도를 풍요롭게 누린다는 것입니다.

     

    두 배의 몫의 땅, 바로 그리스도를 기업으로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하고 신비하고도 오묘하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풍성하게 소유한다는 그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 장자에게 돌아가는 첫 번째 권리인 두 배 몫의 땅은 요셉에게로 넘어가 그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땅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맏아들 르우벤의 아들들이라. (그가 맏아들이었으나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그의 장자권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더라. 그러므로 그 계보가 장자권을 따라 계수될 것이 아니니 2 이는 유다가 그의 형제들보다 뛰어났으며 그에게서 최고 치리자가 나왔으나 장자권은 요셉에게 있었음이더라.) (역대상 5:1,2 개역개정)

     

    그러면 아비의 침소를 더럽힌 르우벤의 장자권이 다른 열한 아들들 중에서 왜 요셉에게로 넘어갔을까요?

     

    그것은 요셉의 순결함, 자신의 육체를 순결하게 보존하고 아버지 야곱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총애를 독차지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은 자였습니다. 야곱의 마음속에 가장 큰 보물인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마음과 부합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요셉이 이집트에서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렸을 때 자신의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힌 르우벤과는 달리 자신이 섬기는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 유혹을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그의 육체의 순결을 보전했기 때문에(창 39:7~23), 장자권 중 두 배 몫의 땅이 요셉에게로 넘어갔던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과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고 그의 마음속에 가장 귀한 보물로 여긴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야곱의 마음에 가장 합한 아들이 되어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 모두를 극심한 가뭄으로부터 구원하였기 때문에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의 것으로 취하여 요셉에게 두 배의 몫이 돌아가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이제 내가 이집트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이집트 땅에서 네게 태어난 너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이라. 22 내가 너에게 네 형제들보다 한 분깃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로 또 활로 아모리인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하더라. (창세기 48:22 한글 KJV)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프라임이 그들의 유업을 그같이 얻었더라. (여호수아 16:4, 한글 KJV)

     

    르우벤이 첫째 아들의 몫인 장자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자격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낳은 두 아들에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좋은 땅의 두 몫이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배 몫의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을 누리게 하는 것, 다른 이들이 맛볼 수 없는 귀한 것들을 맛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장자의 두 번째 권리: 제사장 직분

     

    장자권의 첫 번째 권리는 두 배 몫의 땅이며, 두 번째 권리는 바로 제사장 직분입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장자권의 첫 번째 권리인 두 배 몫의 땅은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돌아갔고 제사장 몫은 바로 레위에게 돌아갔습니다.

     

    신명기 33장 8절부터 10절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레위 족속에 관하여 축복한 내용인데,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8 레위에 관하여 그가 말하였으니, 주의 툼밈과 주의 우림이 주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있게 하소서.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주께서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나이다. 9 그가 자기 아비와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도다." 하며 그가 자기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친자식들을 알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주의 말씀을 준수하고 주의 언약을 지켰음이니이다. 10 그들이 야곱에게 주의 명령들을, 이스라엘에게 주의 율법을 가르칠 것이요, 그들이 주 앞에 향을 피우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이다. (신명기 33:8~10 한글KJV)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는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인 하몰의 아들 세겜에 의하여 겁탈당한 것을 보복하고자 그들 족속 모두를 할례를 받게 한 뒤에 그들이 거동하지 못할 때에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과 함께 칼로 그들을 잔혹하게 도륙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그들을 향한 큰 진노의 심판을 염두에 두었을 만큼 그들은 악한 행위를 한 자들이었습니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 간이요 잔인한 도구가 그들의 거처 안에 있도다. 6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비밀에 들어오지 말며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내 명예야, 너는 그들과 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완고함으로 벽을 파 내려 갔도다. 7 그들의 분노가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것이 혹독하며, 그들의 진노가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것이 잔인함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가운데서 나누며 이스라엘 가운데서 흩으리라. (창세기 49:5~7 한글KJV)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옴을 보고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요구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이 자신들을 구원한 신이라 하며 제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진멸하고자 마음먹을 만큼 맹렬히 진노하셨으나 모세의 간절한 중재로 그 화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지 않았지만,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대신하여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나오라 하였을 때 레위 족속이 나왔고, 그들에게 “각각 칼을 차고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하니 그들이 여호와의 공의롭고 거룩한 분노에 합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자기의 부모와 형제들과 자기 자녀들을 잊어버리고 그들을 칼로 쳐서 그날에 삼천 명을 죽이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되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32:1~30)

    [레위 족속이 우상숭배한 이스라엘 백성을 죽임]

    레위는 야곱의 딸 디나를 겁탈한 세겜 족속을 시므온과 함께 칼로 잔인하게 살육하는 악을 저질렀지만 이번엔 그의 후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분노를 대변하여 자기와 부모와 형제들과 자기 자녀들, 자신의 동족들을 죽인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의로 여겨져서 레위와 그 후손들이 장자권 중 제사장 직분의 몫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똑같이 사람을 죽였지만 다나를 겁탈한 일로 세겜 족속을 진멸한 일은 하나님 앞에 악한 일로 여겨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우상숭배한 죄를 범한 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분노를 대변하여 자신의 부모 형제 삼천 명을 죽인 일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할 때 도덕법과 하나님의 법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는 도덕법보다 더 상위법인 하나님의 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위로 여김 받게 되면 우리는 칭찬과 보상을 받게 되지만 불의한 행위로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의 큰 진노의 심판에 따른 저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우리가 통찰력 있고 분별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자권의 첫 번째 권리는 두 배 몫의 땅이고 두 번째 권리는 제사장 직분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권리, 두 배 몫의 땅은 부정한 육체의 삶을 살았던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어버렸고 순결한 삶을 산 요셉에게 그 권리가 주어져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좋은 땅의 두 몫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의로운 갈망을 좇아서 자기 부모와 형제들과 자기 자녀들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로 큰 죄를 범한 그들을 칼로 쳤던 레위 지파의 후손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맥락으로 예수님께서도 누가 내 부모며 누가 내 형제라고 말씀하셨고, 죽은 자는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얘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은 그들의 관심을 무엇보다 하나님께 우선하여 두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0:37,38 한글 KJV)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시니라. (마태복음 12:50 한글KJV)

     

    장자의 세 번째 권리: 왕의 직분

     

    장자권 중 왕의 직분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네 번째 아들인 유다 지파가 왕의 직분을 받았는데,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을 축복할 때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몫인 왕의 직분을 유다가 받을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실로가 올 때까지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의 모임이 있을지어다. (창세기 49:10 한글 KJV)

     

    유다가 왕의 직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배 몫의 땅에 대한 상속권은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정욕을 좇아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힘으로 잃어버렸고 반면에 육체의 순결한 삶을 산 요셉에게 돌아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부모와 형제들과 자녀들일지라도 하나님께 범죄한 그들을 칼로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제사장 직분의 몫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다른 어떤 형제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독차지하여 다른 형제들은 입어보지 못했던 채색 옷을 입는 특혜를 누렸고 또 다른 형제들은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 생활을 해야 했지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막에 함께 거하여 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고 또 요셉이 다른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고한 일과 자신의 꿈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더라는 꿈을 형제들에게 말한 일로 다른 열 명의 형제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보냄을 받아 세겜 땅에 있던 형제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그의 형제들에게 갔을 때, 도단 땅에서 요셉이 오는 것을 발견한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고자 모의를 하고 죽음의 구덩이에 요셉을 던져 넣어 요셉이 죽게 되었을 때, 유다는 ‘그는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혈육이니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라고 그의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의 생명을 구원해 낸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37:1~28)

     

    [요셉이 웅덩이에서 던져지다]

    이처럼 유다는 자기 형제 요셉이 죽음의 웅덩이에 빠져 고통 속에 있을 때 자기 형제들을 설득하여서 그를 죽음의 웅덩이에서 건져냈는데, 그 고통당하고 있는 자신의 형제를 구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유다의 삶의 모습으로 인하여 왕의 직분이 유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43장과 44장에서 유다가 행한 의로운 행동에 관해 요약하면,

    열 명의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종이 되었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주신 꿈 내용 곧 온 세상에 칠 년 풍년 뒤에 칠 년 흉년이 있을 거라는 계시를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해 낸 일로 인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꿈 내용처럼 칠 년 풍년이 있은 뒤에 온 세상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서 가나안 땅에 있던 야곱과 그 가족들도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은 자신들의 아들들을 애굽에 보내어 먹을 양식을 사 오라고 보내면서도 막내아들 베냐민은 함께 보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야곱이 지극히 사랑했던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여긴 뒤에는 막내 베냐민을 그 대신하여 사랑하였기 때문에 혹 베냐민이 해를 입을까 하여 애굽에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42:1~4)

     

    요셉은 애굽 땅에 양식을 구하러 온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열 명의 형들을 만났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열 명의 형들을 애굽을 정탐하러 온 정탐꾼으로 몰아서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자신에게 데려오는 것으로 그들의 결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면서 인질로 시므온을 잡아 가두고 나머지는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간 그들은 야곱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고 양식이 다시 떨어지자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해 올 것을 요구하면서도 베냐민은 함께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만일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백발로 슬픔과 더불어 음부로 내려갈 것이다고 말하면서 베냐민을 보내려 하지 않자 유다가 나서서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이 담보가 될 것이니 만일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자신이 영원한 질책을 지겠다 야곱을 설득해서 베냐민을 데리고 야곱의 9명의 자식들은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다시 가게 됩니다. (창세기 42:5~43:15)

     

    야곱이 그처럼 놓지 않으려 했던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간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닌 요셉이 보물로 자리 잡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빼앗아 가셨고 그 빈자리에 베냐민이 그의 마음에 보물로 자리 잡자 베냐민마저 빼앗아 가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육에 속한 야곱을 완성된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자식들을 통해서, 가뭄과 기근을 통해 야곱을 극심히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냐민과 그의 아홉 명의 형들은 애굽에 가서 요셉을 만나 정탐자의 혐의를 벗고 요셉의 집에 초대되어 음식을 대접받은 뒤에 자루에 양식을 싣고 열한 명의 형제들이 되돌아오던 길에 요셉이 꾸민 계략에 따라 베냐민의 양식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이 발견되어 그들은 다시 요셉 앞으로 끌려왔고, 요셉은 그 은잔이 나온 베냐민을 자신의 종으로 삼겠다고 했을 때, 유다가 나서서 요셉에게 말하기를, 만일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자신의 아버지 야곱에 닥칠 악을 볼까 한다며 제발 자신을 종으로 삼고 베냐민을 자신의 아버지께 돌아가게 해달라고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위해서 간절히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요셉의 생명을 구하는데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를 죽음에서 건져내었고,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갈 때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여 베냐민을 반드시 아버지 야곱에게 다시 데려오겠다고 아버지 야곱을 설득해서 베냐민 데리고 양식을 구하러 요셉에게 갔으며, 요셉의 시험으로 베냐민이 종이 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하며 아버지와 동생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모습이 바로 왕의 직분이 유다에게 돌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장자권의 세 가지 권리 중 첫째 땅을 두 배로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맏아들 르우벤이 아닌 요셉에게, 두 번째 제사장 직분은 레위 지파 후손에게, 그리고 세 번째 왕의 직분은 네 번째 아들이었던 유다 지파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르우벤은 육체의 정욕을 좇아 행한 악한 행위로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혀 부친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로 장자권을 잃어버렸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여인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침으로써 주인의 권위를 지켜주고 자신의 육체의 순결을 보존하였고 자신에게 발생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이루어진 것을 깨닫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가 애굽에 팔아버린 형제들의 악한 행위에 보복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생명을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두 배 몫의 땅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 후손들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 서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자기의 부모와 형제와 자녀들까지도 칼로 침으로써 하나님께서 갈망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을 행하였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한 자가 되어 제사장 직분의 몫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죽을 위기에 처한 형제 요셉의 생명을 살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베냐민이 종이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염려하여 동생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려 했던 그의 헌신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왕의 직분이 유다에게 돌아간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혈통 안에 있는 우리는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 곧 그리스도에 대한 두 배의 몫,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가진 장자들의 교회라고 히브리서 12장 23절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히브리서 12:23 한글KJV)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 요셉이 가졌던 두 배 몫의 땅 곧 그리스도에 대한 두 배의 몫, 레위 지파가 가졌던 제사장 직분과 유다가 가졌던 왕의 직분을 장자들의 교회인 우리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고, 또 두 배의 몫으로 그분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중보 하는 제사장 직분을 가졌고 그리고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장자권을 소유할 수 있었던 야곱의 첫째 아들 르우벤은 어떻게 됐습니까?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천륜을 어기는 행위를 하여 아비의 침소를 더럽힘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세 가지 권리, 두 배 몫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다른 형제 요셉과 레위와 유다에게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당연히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를 부여받을 자격을 가졌으나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려는 하늘의 복, 그 장자권을 잃어버린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그에게 속한 친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2:9 한글KJV)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구원은 받았으나 곧 혼인 잔치에는 초청은 받았지만 예복을 준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아내로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여 결혼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자권을 얻을 자격이 있었지만 르우벤처럼 그 장자권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처럼 주시고자 하는 갈망, 에베소서 1장 3절 말씀의 하늘의 영역 안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적인 축복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한 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에베소서 1:3, 개역개정)

     

    마태복음 1장 2절 말씀은 “야곱이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로서 장자권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르우벤이 아비 야곱의 침소를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르우벤은 그리스도의 계보 곧 구원의 계보에서 제외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유다를 포함한 그의 형제들 모두가 구원의 계보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구원을 받았지만 첫째 아들로서 당연한 권리였던 그 장자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여해 주시고자 하는 두 배 몫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부여해 주시려는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 곧 두 배 몫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특별한 여분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르우벤과 같이 구원은 받았지만 르우벤처럼 장자의 자격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의 잘못된 정욕을 탐하는 문제로 아비의 침소를 더럽히고 자신을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그 특별한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를 허무하게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우리는 르우벤처럼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것에 간절한 소망을 두고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저 부여된 장자의 자격에 합당한 삶을 우리가 살고 마음을 다하여 그 장자권을 반드시 지켜 내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배 몫의 땅인 그리스도와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소유할 자격을 가진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장자권을 구약에만 적용되는 제도로 알고 있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과 더불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려는 특별한 복인 그 장자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장자권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에도 장자권에 대해 소망을 두지도 않고 르우벤처럼 그릇된 행실을 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두 배의 몫의 땅인 그리스도와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도 잃어버린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첫 번째인 두 배의 몫의 땅은 장자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곱절이나 많이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한 하늘의 복을 곱절로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자의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로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왕의 직분을 가진 자로서 다스리는 자들이 되어야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장자권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들일지라도 기도하는 직분과 다스리는 직분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삶이나 행동으로 말미암아 르우벤처럼 그 장자권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르우벤처럼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는 들어가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지만, 장자의 자격에 맞게 행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처럼 우리에게 부여해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 곧 두 배 몫의 땅인 그리스도, 신비하고도 탁월하면서도 놀라우신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그 특별한 권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또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제사 직분과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인 장자권의 가치를 깨닫고 야곱처럼 그 장자권에 소망을 두고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는 그의 동생 디나가 세겜에게 겁탈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디나와의 결혼 조건으로 세겜 족속의 모든 남자들을 할례 받게 한 뒤에 그들이 거동하기 힘들 때 그들을 칼로 잔혹하게 도륙하여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자였지만, 레위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한 죄를 범한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갈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편에 서서 똑같이 칼을 가지고서 우상숭배에 참여하였던 자신들의 부모와 자식들과 형제들 삼천 명을 죽이는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 안에 들어간 자가 되어 그 장자권의 두 번째 요소인 제사장의 몫을 받았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는 레위 족속과 같이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 요셉의 생명을 죽이려는 형제들을 설득해서 요셉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고  자신의 아버지 야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의 마음의 슬픔과 고통을 깊이 헤아려서 종이 될 위기에 처한 베냐민 대신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여 동생 베냐민의 생명과 베냐민을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의 생명을 구하려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왕의 직분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로서 그 직분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레위의 후손들과 같이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고 그분의 갈망에 반대되는 것이 우리의 부모들과 형제들과 자녀들일지라도 잊어버리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관심을 갖고 힘쓰는 자 곧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가족들보다 하나님의 갈망이 우리들의 가장 우선한 목표가 될 때 곧 하나님의 갈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목표가 우리 안에 가득 차 있고 그 목표대로 삶을 산다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며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제사장 직분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왕들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계시록 5장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 위에서 통치하리이다."라고 하니라. (계시록 5:10, 한글 KJV)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바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땅의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수 있는 왕의 직분을 가진 자가 되었지만 르우벤처럼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되면 왕의 직분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위해서 하나님의 갈망에만 관심을 갖고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과 분별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유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 된 교회 안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 때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공동 왕들이 될 것이라고 계시록 20장 4~6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그들이 그 위에 앉았는데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더라. 또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들도 보았는데, 그들은 그 짐승에게나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를 그들의 이마 위에나 손에도 받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통치하더라. 5 그러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 나머지는 천 년이 끝날 때까지 다시 살지 못하리라. 이것이 첫 번째 부활이라. 6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통치하리라. (계시록 20:4~6 한글KJV)

     

    장자권에 대한 얘기가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이삭이 아내 리브가에서 낳은 쌍둥이 형제 중 장남이었던 에서가 그 장자권을 소홀히 하여 동생 야곱에게 죽 한 그릇에 팔아 그가 축복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다고 히브리서 12장 16, 1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6 음행하는 자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 상속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없도록 하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후 그가 축복을 유업으로 받으려고 했을 때 거절당하였으며, 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2:16,17 한글 KJV)

     

    이 말씀은 장자들에게만 부여해 주시는 두 배 몫의 땅이신 그리스도와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라고 우리에게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육체에 속한 자였습니다. 하늘의 놀라운 축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장자권을 아주 값없이 생각해 한낱 자신의 배고픔 때문에 그 장자권을 동생에게 값싸게 팔아버렸고 그것을 나중에 크게 후회했지만 결코 되돌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자권을 소유할 수 있는 신분과 자격을 가진 자가 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장자권을 유지하고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어 하늘의 신령한 복을 유업으로 상속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값싸게 동생 야곱에게 넘긴 에서나 자신의 정욕을 좇아 아비의 침상에 올라서 음행 한 르우벤의 행실을 본받아서는 결코 안되고, 자신의 주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안주인의 집요한 유혹에도 자신의 정절을 끝까지 지켜 거룩함을 유지한 요셉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운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자신의 부모와 형제와 자녀들일지라도 인정에 이끌리지 않고 칼로 쳐서 의를 이룬 레위의 후손처럼 그리고 자신의 형제와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유다처럼 하늘의 신령한 복을 유업으로 받는 장자권을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에서가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죽 한 그릇에 그 귀한 장자권을 망령되게 팔아버림으로써 잃어버리게 된 일이나 르우벤이 자신의 그 육체의 정욕으로 인해 아비의 침소를 더럽힘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주어졌던 장자권을 지켜내지 못하고 빼앗겨버린 일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유업으로 상속하는 그 장자권 곧 두 배 몫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간절히 갈망하며 지켜내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레위는 오직 하나님의 관심과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세상 속에 속한 사람들과 완전히 분별시킴으로써 제사장 직분을 얻었고 유다는 죽음의 고통 속에 있었던 자신의 형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시기와 분노에 찬 다른 형제들을 설득해서 그의 생명을 구해내었고 애굽에서 종이 될 위기에 처한 베냐민의 생명과 그로 인해 슬퍼할 자신의 아버지의 생명을 헤아려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안위를 돌보려 했던 유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세상과 자신의 동족을 통치하는 왕의 직분, 강한 사자의 지파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흠과 점도 없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자신의 동족들을 인도하는 선한 목자로서 생명의 양식과 생명의 음료로 그들의 생명을 기르시고 돌보셨고  레위와 같이 하나님과 백성을 이어주는 중재자, 사닥다리가 되셔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위치에서 이 세상에서 분별된 삶을 사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신령한 복, 두 배 몫의 땅과 제자장 직분과 왕의 직분의 실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특별히 그 장자에게만 부여해 주는 두 배의 몫의 땅인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누리는 여분의 몫을 얻기 위하여 우리들은 르우벤처럼 이 땅에 속한 육체의 정욕을 위한 삶이 아니라 요셉처럼 순결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레위처럼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관심만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한 자가 되어서 우리 자신을 세상 사람들과 자기의 부모나 자기의 형제, 자매나 자신의 자녀들로부터 분별된 삶을 살아야 하고  유다처럼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대함에 있어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생명처럼 돌보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장자권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인 두 배 몫의 땅이신 그리스도와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은혜를 깨닫고 그 가치를 안 야곱처럼 그것을 상속받기를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야곱은 자신의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올 만큼 그 본성이 남의 것을 빼앗는 자로서 자신의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간교한 속임수로 탈취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장자권에 대한 갈망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귀하게 보셔서 에서가 야곱의 형이었지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주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주가 말하노니, 에서는 야곱의 형제가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 1:2,3 한글 KJV)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장자권들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여분의 몫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에 대해 우리는 야곱처럼 갈망해야 하며 그것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하여 야곱이 다루어지고 조성되어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주님에 의하여 다루어지고 조성됨으로써 장자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출 때, 우리는 장자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신령한 복 곧 두 배 몫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합법적으로 상속을 받을 수가 있으며 그때, 특별한 그리스도 곧 두 배의 몫의 땅이신 특별하고도 귀하고도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는 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있고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년왕국에 이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래하는 새 예루살렘에서도 땅을 유업으로 상속받아 우리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장자권의 세 가지 요소, 두 배 몫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지킨 자들은 이 땅에서 장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유업으로 누리며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로서 그리고 세상 민족들을 다스리는 왕들로서 우리는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이 계시록 20장에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통치하리라. (계시록 20:6 한글 KJV)

     

    유다가 형제의 고통과 아버지의 아픔을 헤아려 그들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한 것은 하늘의 아버지와 이 땅에 속한 자신의 동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해결해 주신 왕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장자권 중 왕의 직분을 소유했기 때문에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보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10 한글KJV)

     

    그래서 히브리서 7장 14절에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 성도들 모두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의 삶이 바로 교회와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된 성도들이 바로 이들의 혈통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라디아서 3:7 한글KJV)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를 포함한 이 네 세대의 신앙인의 삶 속에는 생명으로 성숙된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고, 자신의 몸을 번제물로 바치기까지 이삭의 순종이 있었고 하나님의 극심한 다루심을 통하여 육에 속한 자였던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인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삶이 있었고 형제와 아버지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유다의 희생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이들이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든 것처럼 우리도 이들과 같은 삶을 살 때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계보 안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시록 21:27 한글 KJV)

     

    그것이 마태복음 1장 2절에 야곱은 유다와 누구를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라고 말하고 있어 유다 혼자가 아니라 나머지 열한 명의 형제들 포함한 열두 형제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혈 통 안에 있는 구원받은 자들, 하늘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본 부인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고 여종 두 명을 통해서 일곱 명의 아들들을 생산했지만 그중에서 오직 이삭 만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갔고 이삭에게는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며 생명에 갈망이 없었던 에서는 제외하고 오직 야곱 만이 계보에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경우에는 네 명의 부인을 통해서 낳은 열두 명의 아들들 모두가 한 명도 제외됨이 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유다와 그의 열한 형제들,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로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들이 되었고 계시록을 보면 이들의 이름이 새 예루살렘 성의 성벽 사면의 열두 개의 문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모두가 구원받은 자들로서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크고 높은 성벽도 있으며, 열두 대문이 있고 그 문에는 열두 천사와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더라. (계시록 21:12 한글KJV)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백성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가 되는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태복음 1장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39권은 모두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또는 간접적이든 다 그리스도에 관한 비유요, 상징이며 예표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계보와 연계하여 볼 때 구약 성경의 인물들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보는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을 이은 이스라엘 민족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씨인 것을 교훈하고 있기에 이 계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깊이 묵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이니라. (갈라디아서 3:29 한글KJV)

     

    1장 1절부터 17절까지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보는 사람들의 이름으로만 열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알지 못한 채 쉽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인데, 이 계보가 바로 구약 성경 삼십구 권에 나와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을 축약하여서 나타낸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열네 대의 열조, 위대한 신앙인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이어서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고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열네 대의 왕의 계보가 나오고 또 그들의 죄악으로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다가 회복되어 돌아온 사람들 곧 왕의 혈통을 지녔지만 평범한 신분으로 전락한 열네 대의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자들, 왕이 된 자들, 포로가 된 자들, 회복된 자들, 평범한 신분으로 전락한 자들은 물론 심지어 다섯 명의 여인들 중에 네 명의 여인은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과거의 어두운 흔적이 있는 부정한 여인들이 기록된 것을 보면 우리가 장자권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선택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속한다는 것과 하나님께 선택되지 못하여 그 계보 안에 들지 못한 것에는 하나님의 신비한 원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받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속한 자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보면 위대한 자, 높은 자, 왕들, 낮은 자, 선한 자, 평민들, 포로 된 자들, 어두운 흔적이 있는 부정한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경륜 안에 속한 원칙에 그들이 부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에 부합한 영적인 삶을 산 자들은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포함될 수 있지만 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 삶을 산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삭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아들들과 또 이삭의 아들 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절하여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혈통 안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3절은 이러한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에는 야곱이 낳은 유다와 그 형제들 곧 열두 명의 아들들이 다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하는 복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3절에서는 유다가 자신의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얘기를 통해서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원칙에 부합되어서 그리스도의 계보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다말 안에 우리가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말과 같은 사람들이 에서처럼 하나님께 거절당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말은 어떤 삶을 산 여인일까요?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와의 근친상간으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여인입니다. (창세기 38:6~27)

     

    다말의 이름은 ‘종려나무’라는 뜻입니다. 승리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이것은 승리한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 입성]

     

    그 무리가 앞서 가고 뒤따르며 소리 질러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더라. (마태복음 21:9, 한글 KJV)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 12:13 한글 KJV)

     

    그러면 다말이 어째서 승리한 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로 나타난 것일까요?

     

    다말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시아버지 유다와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근친상간을 통해서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이들의 혈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우리들의 윤리나 도덕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행위이고 수치와 조롱거리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힐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치스럽고 지탄받을 만한 행위를 한 그녀가 어떻게 종려나무, 승리하는 자를 상징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선택되어서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당당히 그 이름이 포함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말 같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계대결혼법에 따라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했을 때 며느리 다말에게 씨를 받게 하여야 했지만 첫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을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었으나 모두 죽었기 때문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마저 잃을까 하여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기를 꺼려했던 것이며 다말은 씨를 받기 위해서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가져 잉태하여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던 것입니다.

     

    다말의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는 그녀의 그러한 행위가 옳았다는 것을 유다의 입술을 통해서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나타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8:26)

     

    시아버지 유다가 셀라를 남편으로 주지 않자 다말은 씨를 받기 위해서 창기로 변장하고 얼굴을 가린 채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베레스와 세라를 잉태한 그의 행위가 비록 비윤리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유다 자신보다도 생명의 씨를 받으려는 다말이 오히려 의로웠다고 인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윤리적인 방법인 근친상간을 통하여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속여서 씨를 받은 일의 책임이 다말에게 있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녀에게 씨를 받게 하지 않은 유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큰 수치입니다. 그래서 다말은 두 남편이 죽어서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맺혀 있었고 생명의 씨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어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씨를 주지 않으려는 시아버지 유다에게 창녀로 변장하여 다가가 그의 씨를 받아 낸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육적인 정욕 때문이 아니라 장자를 산출하고자 한 그의 선한 갈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생명의 씨를 받으려 한 것은 유다의 장자였던 엘의 아내로서 갖는 당연한 권리였고 적법한 요구였습니다. 그녀는 장자의 아내로서 장자의 씨를 받아서 그 장자권을 그의 아들에게 유지시키려는 간절한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장자의 권리 곧 두 배 몫의 땅과 제사 직분과 왕의 직분을 상속받게 하려는 그녀의 선한 갈망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유다보다도 그녀를 더 의롭다고 여기셨던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아들들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말은 유다의 장자 엘의 아내로서 유다 가문의 대를 이을 장자가 될 아이를 생산하고자 한 간절하고 특별한 갈망이 다말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면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를 다른 여인과 혼인하게 하여서 다른 여인이 낳은 아들이 유다의 가문의 대를 잇는 장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 가문의 장자가 갖는 그 장자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시아버지 유다에게 접근해서 씨를 받아 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말의 씨에 대한 갈망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갈망이었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갈망이었으며 본질적으로는 참 생명의 씨, 하나님의 장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한 여인으로서의 책임, 생명의 씨를 얻어 유다 지파의 장자를 출생하고자 한 간절한 소망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외형적으로 나타난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 관점으로만 다말을 보게 된다면 정말 이처럼 부도덕하고 수치스럽고 지탄받아 마땅한 여인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생명의 씨에 대한 선한 갈망을 아시고 그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등록하심으로써 그녀가 하나님께 선택된 승리한 자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장자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두 배의 몫의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말하는데 특별히 두 배의 몫의 땅은 그리스도에 대한 두 배의 누림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배 몫의 땅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을까요?

    그 좋은 땅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는 장소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내려주심으로 그 땅에 곡식과 과일 등 풍성한 소산물들이 산출되게 하여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동물들, 모든 생명체들이 그 생명의 양식을 풍요롭게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만 있는 특별한 은혜로서 다른 땅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배의 몫의 땅은 장자들만이 상속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을 말하며 장자가 아닌 자들은 일반적인 그리스도만을 누릴 수 있어 차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 두 배의 몫의 땅은 바로 에베소서 1장 3절 말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두 배 몫을 받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는 복되시도다. (에베소서 1:3, 한글 KJV)

     

    두 배 몫의 땅 외에도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 모두가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시대 이후부터 장자권이 대두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영적인 복을 상속받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특별한 복을 기업으로 받는다면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보면,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더니”라고 말하고 있어 하나님의 장자권을 소유할 수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자들로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우리가 장자권 안으로 이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하늘들 안에 있는 영적인 복들을 소유하는 상속자가 되셨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장자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영적인 복들을 누릴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장자권을 소유는 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갈망인데 우리가 그릇된 행실을 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받았지만 르우벤처럼 빼앗기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장자권을 소유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삼일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되어 움직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분깃, 우리의 유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삼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 안에 부어짐을 통하여 최종 완성된 그 생명 주시는 영, 우리를 발화시키고 촉진시키고 우리를 후원해 주시는 그 영에 의하여 장자권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영적인 특별한 복을 우리가 소유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말이 바로 장자권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소유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좋은 땅이요, 우리의 제사장 직분이요, 우리의 왕의 직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맏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소유한 것들을 우리에게 유업이 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상속받기를 갈망하며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말이 왜 그처럼 장자를 생산하기를 갈망했습니까?

     

    만약에 다말이 유다의 죽은 장자 엘의 아내로서 씨를 받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게 된다면 유다의 장자 엘의 대가 끊김은 물론 장자권 안에 있는 하늘과 땅에서 가장 큰 복을 상속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걸어서라도 씨를 받아서 장자를 생산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맏아들인 엘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엘이 아내 다말을 통해서 아이를 갖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악하게 보셔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에 대한 갈망을 가진 자들이 아니면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 대신 둘째인 오난을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지만 엘은 계대결혼법에 따라 자신이 다말에게 씨를 주면 자신의 아들이 아닌 죽은 형 엘의 기업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다말이 잉태하지 못하도록 바닥에 설정하였는데 이 행위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에 그의 목숨도 거두어 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보에 들어가고자 하는 특별한 갈망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보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계보에 유다의 맏아들인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의 이름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 다말을 통해서 장자권을 물려받을 아들을 생산하도록 다말에게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했을 때 다말에게 씨를 받도록 해야 했지만 유다는 그 아들마저 생명을 또 잃어버리게 될까 봐 의도적으로 다말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은 어쩔 수 없이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씨를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두 남편을 잃은 상황이라면, 보통 자식을 얻는 복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운명으로 생각하여 자식을 갖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장자에 대한 갈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비난과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을 무릅쓰고서 자신의 시아버지를 속여서 그의 씨를 받아내어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장자 베레스를 생산해 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비난받을 만한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장자권을 얻을 생명의 씨를 갈망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보시고 그녀에게 쌍둥이 두 아들 곧 베레스와 세라를 주셨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그녀의 이름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얻는 일입니다. 하늘과 땅 가운데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는 데 있어서 다말처럼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다말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시아버지로부터 씨를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일, 그 장자권을 취하는 일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힘써서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할 때 부모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큰 마찰이 예상되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예를 들자면 제가 한국에서 교도소와 유치장을 돌아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생계에 보탬이 되라고 건물 하나를 물려주셨지만 제가 선교 일에 사용하고자 그것을 어머니 몰래 팔았고, 어머니께서 그 건물에 대해 물으시면 잘 관리하고 있다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였는데 이러한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과 땅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뤄야 하고, 그 일에 있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조롱받는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또 비록 사람들 보기에는 옳지 못해 보이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종교적인 어떤 규례들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얻기 위하여 진행해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매우 기쁘게 보고 주님의 계보 안에 우리를 포함시킨다는 것을 저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에 위대한 결단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저주저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나타나지 않아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을 때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종교적인 굴레에 여러분들이 얽매이지 마십시오. 어떤 종교적인 규례와 규칙들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종교적인 관념과 종교적인 규례들과 규칙에 사로잡혀서 교회를 생각하고 주위의 성도와 목회자들을 생각하고 소문이 두려워서 아무 일도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것으로부터는 자유함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장자권을 소유하지 못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말은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해서 씨를 얻을 생각으로 창녀로 변장하여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접근해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근친상간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장자권을 획득했습니까?

     

    룻기 4장 12절은 다말의 이름이 종려나무, 승리한 자라는 뜻을 가진 신성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죽은 말론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말론의 기업을 무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말론의 아내였던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삼은 일에 증인이 되었던 백성들과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말은 하나님께 선택받아 그의 이름이 신성하고 거룩한 주님의 계보에 속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말이 만약에 자신의 수치와 남들의 눈과 손가락질을 두려워했더라면 시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을 통한 부적절한 방법으로 씨를 받는 일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정한 근친상간을 통해서 시아버지로부터 씨를 받아 장자를 생산해 냈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말을 의롭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람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보기에는 옳지 못한 방법이며 악한 방법입니다. 아주 부정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기에는 그리스도를 갈망하여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해서 행한 부정한 방법, 옳지 못한 방법일지라도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일이기 때문에, 장자권을 소유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로운 길이요, 바른 길이라는 것을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사라를 낳고”라는 말씀으로 나타내고 있어 다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이름 종려나무와 같이 승리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참 놀라운 얘기인 것입니다.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씨를 받아서 쌍둥이를 출산할 때 산파가 먼저 손을 내민 자의 손에 붉은 실로 표시를 했는데, 그 손이 다시 들어가고 그 뒤에 있던 베레스가 먼저 나와서 그가 큰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8:27~30)

    세라가 비록 베레스에게는 뒤쳐졌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장자권에 대한 갈망으로 먼저 나오려고 몸부림쳤던 그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장자인 베레스와 더불어 그의 이름 또한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되게 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장자권을 얻는 것에 대한 우리들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산파의 눈에는 처음에는 베레스는 보이지 않고 세라만 보여 그의 손에 붉은 실로 표시하였는데 나중에 베레스가 세라보다 먼저 나와서 장자권을 상속받는 맏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세라를 택했지만 하나님은 세라가 아닌 베레스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라가 아닌 베레스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세라보다 베레스가 먼저 나오게 하심으로써 장자권은 사람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말은 교회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말의 두 아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장자권을 아무리 얻으려고 애쓸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는 문제이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갈망을 가져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이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 5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미리 정하셨으니 (에베소서 1:4,5 한글 KJV)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모든 자들을 구원의 품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다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고 주님의 품에 들어온 자들은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자신이 세상이 아닌 바로 주님의 품 안에 있다는 것과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말은 “누구든지 오라”라는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말처럼 그러한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품 안에 들어가기를,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기를 갈망해서 누구든지 오라”라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선포를 좇아서 주님의 품에 안김으로 말미암아 베레스를 산출함으로써 다윗왕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말이 낳은 베레스를 통해서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창세 전에 선택된 자가 주님 품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말처럼 장자권을 얻도록 정말 애쓰고 수고하고 목숨을 걸고 우리 할 일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갈망하여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씨를 받고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일에 힘을 써서 씨를 받아 베레스라는 자가 출생됨으로 말미암아 뒤를 돌아봤을 때 다말이 창세 전에 선택된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다말처럼 생명의 씨를 얻기 위하여, 장자권을 소유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계보에 포함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받아 선택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힘써 일하고 전심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에 삶의 결과물로 나타난 베레스를 통해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자권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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