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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26:31~75/겟세마네 동산에서 짓눌림 받으시므로 기름 곧 그영을 흘려내셔서 부활생명의영을주심
    말씀 나눔방 2023. 12. 15. 02:23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어제 이어서 우리가 마태복음 26장 31절부터 마지막 절인 75절까지 아주마태복음 내용 가운데서 가장 긴 내용인데요.

    어제 우리가 마태복음 26절부터 30절까지 왕의 잔치인 주님의 상을 세우시는 장면에 대해서 교제 말씀을 나눴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쪼개지신 주님의 그 십자가의 상에서 죽으시는 것을 통하여 그 떡을 먹고 취하는 모든 자들에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을 갖게 하기 위한 일로써 떡을 가지시고 이 떡을 받아 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다 라는

    26절의 말씀을 이렇게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렇습니다. 떡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하고도 영원하며 가장 높은 생명이신 이 하늘에 속한 그 생명에 참여함을 갖게

    하기 위해서 떡을 우리에게 먹게 하여 주시고 잔을 통하여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피를 상징하고 있는 잔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 피를 상징하고 있는 이 잔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피의 교통을 갖는다 라고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잔을 통하여서는 그리스도의 피의 교통을 갖고 오게 하시고 떡을 통하여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을 갖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의 몸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이 주님께서 물질적인 몸을 가지셨던 그분이 비밀한 몸을 가지셨다고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 있죠.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영의 몸을 가지시고 취하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몸의 교통과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그 피의 교통을 가짐을 통하여 주님의 그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 왕국에 관계된 모든 바로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왕국에 대한 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이 마태복음 말씀인데요. 사실 이 마태복음 26장 26절과 29절부터 나타난 주님의 상에 관한 말씀과 이 잔에 관한 말씀들은 바로 주님의 죽으심과 매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떡을 떼는 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죽으심이 분명하게 떡을 통해서 언급되어 있고 피를 통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잔을 통하여 주님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그 떡과 바로 피를 상징하고 있는 잔을 통하여 우리가 암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고 있는 그 떡과 바로 이 잔을 통하여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에게 잠시 전에 얘기한 것처럼 떡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잔은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떡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누림을 갖고 오게 하기 위한 것이 떡이므로 말미암아 떡이

    잔보다도 먼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 예의주시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떡과 이 잔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참여함을 갖고 오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한 이 일은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누림이 되고 우리에게 구속을 성취해

    주셨구나 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해 구속을 성취하신 일이구나라고 외형적으로 이렇게 알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된 삼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서의

    구속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우리의 누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잔치를 통해서 떡을 떼게 하고 그리고 잔을 마시게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주님의 상에 올려진 그 떡과 잔을 통하여서 우리는 상 위에서 주님의 죽으심의 표징을 보게 되고

    주님의 피를  외형적으로 인식하게 되지만 실제적으로는 죽음 안에서가 아니라 부활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서

    우리의 누림을 위한 생명의 떡이신 그분을 기념하게 된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나타내는 이 떡과 이 잔은 실제적으로 삼일 후에 도래한 부활은 모두가 왕국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이 없이는 절대 하나님의 경륜의 뜻 가운데

    가장 중심인 왕국이 세워질 수 없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 여러분들과 나눌 마태복음 26장 31절부터 75절까지는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인데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 당부를 하시고 경고하시는 장면 그 바로 전에

    26절부터 30절까지 먼저 기록돼 있는 왕의 잔치인 주님의 상을 세우신 다음에 이 제자들에게 특별 당부했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인 주인공이시지만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아요

    31절부터 75절까지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33절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모든 동료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이 왔을 때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실족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결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이 베드로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36절부터 46절까지 이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다른 제자들과 격리 되어진

    그러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기도하는 주님에 대한 게세마네 동산에서의 정말 곤고하고 슬픔 가운데 짓눌리심을 당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47절에서부터  56절까지는 가룟 유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히시고 또 그  와중에  베드로가 말고라는 친구가 주님을 잡으려고 하자 성급한 마음을 가지고 바로 칼을 빼어 들고

    대제사장의 노예인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리는 베드로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57절부터 68절까지도 이 공회의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 장면에는 58절을 통해서 베드로가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따라 이 모든 장면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 베드로가 세 번 주님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과 주님께서

    미리 예언해 주신 말씀을 깨닫고 베드로가 큰 고통과 슬픔의 마음으로 밖에 나가서 슬피 우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이 실제적인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그리고 부 주인공 이지만 오히려 주인공이신 예수님보다도 더 많이

    베드로라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는 곧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는 이 베드로를 통해서 왕국으로 가는 길이

    그 협착하고 외진 길 좁은 길로 가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불가능한 것인지를 주님께서 이 베드로와의 그런 설정된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 26장 31절부터 75절까지의 말씀을 가만히 전체적으로 보면 왕국을 세우시기 위한 주님의 고난과 함께

    연계되어 있는 베드로와의 관계  통해서 표현되고 증거되는 교훈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짓눌림을 당하시고 유대 종교 관원들에게 체포를 당하시고

    47절부터 56절 말씀입니다. 26:47 〔잡히시다〔막 14:43-50; 눅 22:47-53; 요 18:3-12〕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26: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26: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26: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리고 57절부터 68절까지는 공회에서 재판받으시고

    26: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26: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26: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26: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26: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26: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26:68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당하시는 69절부터 75절까지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6:69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하다〔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18, 25-27〕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여기에서 부주인공인 베드로지만 실제적인 주인공보다도 더 확연히 나타난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교훈의 말씀은 뭐냐하면 천연적인 생명으로는 절대로 우리가 왕국 백성 천국의 백성들이 절대적으로 될 수가 없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우리가 왕국 백성 주님이 갈망하시는 왕국 백성이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라는 이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자로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으로 사신 그분이 순전한 사람으로서 바로 이 부활 안에서

    부활의 생명의 영을 지니시고 바로 자신이 이 세상과 죄와 마귀를 이기신 주님의 뜻을 따라 부활의 영을 쫓아 사는 사람만이

    왕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천연적인 생각으로는 성급한 마음, 조급한 마음 나서기를 좋아하고 어떤 면에서는 담대함을 넘어서

    무모하기까지 한 이 베드로와 같은 천연적인 출생의 생명으로는 누구도  열두 제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모두가 주님께서 지시하시고 그 길을 가게 하신 그 좁고 협착한  십자가의 길을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좁고 외지고  협착한 길을  멀찌감치 앞서서 걸어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서 걸어 가고 계신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야 되는데 천연적인 생명으로는 절대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천연적인 출생을 통하여 우리가 그 생명을 가진 상태에서는 주님의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지신  영원한 생명, 신성한 생명, 가장 높은 하늘에 속한 생명을 가지고 바로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을 통해서 따라갈 때만 십자가의 좁은 길을 통해서 우리가 왕국 백성이 될 수 있다 라는 이것을

    계시해 주기 위하여 이렇게 긴 26장의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에 대한 얘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마태복음 26장은 천국 복음 왕국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에 대한 얘기는 한 두세 줄 정도

    기록하여서 우리에게 어떤 생명의 교훈의 말씀을 전해주면 되는데 이 전체가 지금 베드로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베드로는 교회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로 대표되고 있는 다름아닌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천연적인 생명안에 있는 베드로는 절대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길

    곧 왕국 백성이 될 수 없고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시는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을 우리에게

    소유케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 안으로 들어가실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문제 부정적이며 소극적이고도 깜깜함과 어두운 문제가 모두가 해결되었고,

    삼일 후에 도래한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 주시는 영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셔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으로 바로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수가 있고 우리가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된 것이며 주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할 수 있다 라는 이런 놀라운 일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결과물로 산출시켜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이 공관복음서에서도 똑같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하는 이러한 교훈을 통하여 바로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외길은  천연적인 출생과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우리는 절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고 왕국 백성이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와의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협착한 길 십자가의 그 좁은 외길을 따라오도록 우리에게

    손짓하면서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리스도께서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자 사람의 아들로서  태어나시고 사람으로 사시고 사람으로

    여러 가지 시험과 검증을 받으시고 또 유대 관원들에게 체포 되어서 공회에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 당하시고 또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을 당하시는 이러한 모든 일이 인자 사람으로서 승리하셨는데

    왜 베드로는 그런 와중에서 실패를 하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 마태가 26장 31절부터 75절까지 장문의 이 생명의 말씀 가운데서 어떻게 이러한 전적으로

    조연인  베드로를 마치 주인공인 것 처럼 이렇게 많은 상황들을 통해서 베드로를 나타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승리

    속에 바로 베드로가 완전하고도 온전한 패배를 당한 것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리고 베드로의

    패배를 통해서 승리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가심으로 말미암아 왕국 백성을 다스리는 주가 되실 수가 있으셨고

    그리고 패배한 베드로는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통과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왕국 백성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데 이 불가능한 일들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생명 주시는 영 곧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 되시는

    바로 그 영을 쫓아 사는 삶을 살 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성공과 베드로의 완전한 패배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을 대조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왕국의 백성들을 이끌어오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통과하여서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을 그 좁은 십자가의 길로 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완전히 필수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바로 그 승리를 쟁취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그 승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쟁취가 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는 대신

    베드로는 어떠한 면에서 패배를 하고 어떤 면에서 참패를 하고 완전히 실족하게 되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성경을 통해서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국 백성들을 자신의 품으로 이끌어오기 위해서 곧 십자가의 그 좁은 외길을 통해서 자신이 가신 그 길을

    바로 이 천국 백성의 일원들이 된 그런 자들에게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승리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오는 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대표하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모두를 상징하고 있는 베드로는

    바로 이 천연적인 출생과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그러한 타락한 인간 존재 속에서 근본적으로 첫 아담 안에 속해 있는 자들의

    삶은 절대적으로 왕국 백성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산출시켜주신 부활 생명의 영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그 부활 생명의 영을 쫓아 삶을 살 때만이 실패하고 참패를 당한 베드로가

    성공하는 삶을 산 것처럼 이 베드로가 그 부활의 영을 쫓아 삶을 살았다는 것이

    사도행전 2장 3장에 걸쳐서 보면 베드로가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타내고 있는 장면을 볼수가 있습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2:43 〔믿는 사람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혹 이적〕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3:1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치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3:11 〔베드로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하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주님의 능력의 영을 통해서 바로 능력의 영 승천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그러한 바람의 영, 그 호흡과 같은 생명 주시는 영을

    소유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하는 이것이 부활 안에서 사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열두제자들을 대표하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는 자가 베드로이기 때문에

    바로 베드로가 실패하고 참패한 것은 우리들이 참패하고 패배한 것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한 그것은 완전히 따를 수도 없고 왕국 백성이 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존재 불가능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자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이 세우고자 하는 이 왕국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우리가 따라 들어가야

    되는데 바로 그러한 따라들어가는 삶은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승리를 하시는 주님과 같은 삶의 길을 따를 때

    우리가 바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제사장이 묻습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여 우리에게 말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제사장에게 말하기를 대제사장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라고 사람의 아들이란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실제적으로 이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에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의 본성을 가진 두 가지 종류의 신성과 본성을 가지고 오셨지만 실제적으로 33년 반 동안의 삶을 사신

    것은 사람으로서 사람의 위치에 계셔서 인생을 사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인 왕국 곧 도래하는 천국이 세워질 수 있도록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치는 잠시 접어 두시고 성육신하신 인자 사람의 아들로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사람의 성정을

    가진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모양이 되시고 사람으로서 육체를 지니시고 세상의 죄와 마귀와 세상을 마주하여서 싸워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성공한 사람이 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뭐죠?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통과하는 사람의 모습이 성공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의 사람으로서 그 사단과 악한 영들의 공격과 그 수하들로 나타난 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말할 수 없는 핍박과 반대와 박해와 배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히 견뎌내셔서 사람으로서 승리하신 사람으로서 온전히

    서 계셔서 왕국 백성을 이 이끌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 처음에 그 갈릴리 바다를 거니시고 계셨을 때 그물을 깁고 있는 요한의 형제와

    그리고 그 물을 바닷에 던져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와 그 형제 이 네명을 부르심을 통해서 그때부터 베드로는

    열두 제자들 중에 가장 많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베드로를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르셔서 열두 제자를 대표하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는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영적인 의미를 전해주려고 특별한 방법으로 베드로만을

    훈련시키시고 베드로만을 집중하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시면서 훈련과 연단을 하시고 교정을 하시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들여다볼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마태복음 4장 갈릴리 바다에서부터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따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5장에서는 주님께서 천국의 새 헌법의 공포를 높은 산에서 선포하실 때도 최초로 들은 자였고, 왕국에 관한 모든 비밀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상들, 인자에 대한 바로 사람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십자가의 좁은 외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셨는지 이러한 것들을 변화산을 통해서

    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모든 것들을 주님께로부터 친히 듣고 또 특별한 훈련과 교정을 받고 때로는 경책을 통하여서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훈련받은 자였던 것입니다.

     

    바로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끄집어내서 너와 나의 인두세를 내라 라는 이런 것들까지도 교정을 받으시고

    뭐 말할 수 없이 베드로는 주님에 의하여 교정되어지고 또 교화되어지고 또 조성되어지고, 심지어는 주님께서

    그 이 베드로를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자가 되게 할 수 있도록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훈련받음으로 말미암아

    통과되어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바로 이 주님의 왕국 백성이 되는 일에 지도자적인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훈련을 시키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다루시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처음부터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고 가장 먼저 부름받은 정도가 아니라 가장 많이 주님 앞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주님 앞에 특별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장 강한 자로 나타난 제자들 가운데 수석 제자로서 믿음이 있노라고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주님의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가는 길에 이 베드로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과연 어떠할까요?  베드로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참패하였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두 말할 필요도 없죠. 우리는 베드로의 발꿈치도 못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얘기는 무엇일까요?  지금 이 31절부터 75절까지 베드로에 대한 얘기를 통하여 그가 처음 초창기에

    예수님을   갈릴리 바다에서 만났을 때 주님께로부터  특별한 방법으로 훈련받지 않은 기간이 짧았을 때 이러한 실패하고

    참패하는 일들을 나타내 보였더라면, 우리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 모레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는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기간이 끝나는 마지막 시점에서

    바로 주님과 함께하고 있는 베드로가 이  26장 69절부터 75절에서 세 번을 부인하는 일은 우리를 얼마나 경악하게 하고

     참담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실패하였다면 과연 누가 승리하고 누가 성공하고 누가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누가 주님의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왕국 백성이 될 수 있는가?

    베드로가 실패하고 패배했다면 이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라는 이런 생각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서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베드로가 담대하다 못해  무모한 말을 하는지

    주님 모든 자들이 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 때문에 이렇게 다 버리고 부인하고 패배하고 실족하는 일일지라도

    나는 절대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이렇게 담대하게 아주 확실하게 자기 신뢰를 가지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믿는 그런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임을 목숨을 버릴지라도

    나는 목숨이 끊어진다 할지라도 주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거나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들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 마태복음 26장 69절부터 75절까지 보면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는얘기를 한 것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통곡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수 있는데요.  이것은 그 사람의 천연적인 어떤 생명을 가지고서는 주님께서 가신 협착하고 좁은 외길을

    절대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좁고 협착한 길을 갈 수도 없고 그리고 왕국 백성이 될 수도 없다

    라는 것을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같은 자가 그렇게 실패하고 참패함으로 말미암아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라면 누가 왕국 백성이 되고

    누가 주님께서 가신 그 협착한 그길 주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통과할 수가 있는가라는 얘기를

    이  26장  31절부터 7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서 너희가 오늘 밤에 다 나로 인하여 실족할 것이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라고 얘기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셨고 제자들은 바로 선한 목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흩어질 양들이었던 것입니다.

    스가랴:13:7 〔목자를 치라는 명령〕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이때까지만 해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 계신 부활 생명의 영이시며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아직 찾아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당시의 제자는 흩어질 양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아 속에서 이제 자신을 향해서 자신을 신뢰하는 가운데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노라고 각오하고

    다짐하고 그렇게 담대하게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 가신 그 좁은 외길

    천국 백성이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되었죠.

     

    그렇지만 바로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신 신성한 영이시요, 가장 높은 영이신 생명 주시는 영을 쫓아 사는

    그분을 소유하게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그렇게 성공하는 자 이기는 자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자,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유다에 의해 팔려가는 밤에 베드로가 특별히 제자들을 대표하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대표하고있는 베드로를 통해서 네가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베드로와 같은 그러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은 패배하고 참패한 베드로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승리하셨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

    게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모습인 것입니다.개세마네 동산이란 무슨 뜻이죠? 게세마네는 기름틀이라는 뜻을 가진

    장소 입니다.  여러분  기름틀이 뭐죠? 그 감람나무 열매인 올리브 열매를 따가지고 이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고 있는데요.

    그 기름을 짜내기 위해서는 기름틀에 넣어져서 무거운 돌에 의해서 으깨져야 됩니다.

    으깨지고 눌려지는 기름 짜는 곳 기름틀이 바로 게세마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게세마네 동산에서의 이러한 승리하는 장면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그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바로 그곳에서 경고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이 영적 의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게세마네 동산에 기름 짜는 곳에

    데려가셔서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서 이 눌림을 받으시는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름 짜는 곳에서 눌려짐과 으깨어짐을 통해서 기름은 하나님의 영, 바로 주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기름으로써 흘러나가기 위해서는 으깨져야 되고 쪼개져야 되고 눌려지고 파쇄가

    되어야 됩니다 ,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8절에 예수님이 로마 군병의 옆구리의 창에 찔림바 되어서 피와 물을 흘리신

    것이 바로 영의 해방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 주시는 영을 흘러 바깥으로 산출시키기 위해서  그 영을 흘러 내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무거운 것에 의하여 말할 수 없는 기름 짜는 곳인 그곳에서 눌려지고 으깨어지고 쪼개져야 기름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름은 바로 생명 주시는 영이신 것입니다.

     

    그 생명 주시는 영이 있어야 베드로처럼 패배하지 않고  참패하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왕국 백성이 되는것도 불가능하고  주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가는것도 불가능한 거고 모든 것이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게세마네 기름 짜는 곳에 가셔서 자신의 영을 흘려냄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눌림을 통해서 으깨짐을 통해서 짓눌려짐을 통해서 기름을 흘려냄으로 말미암아 생명 주시는 영이 그들에게

    찾아왔을 때 부활 안에서 부활을 통하여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 생명의 영이 오셔야만 생명 주시는 영 그리스도의 영이

    오셔야만 성령님 보혜사가 오셔야만 이 일이 될 수 있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혼이 아주 자기  자신인 그 혼이 너무나 너무나 슬퍼서 죽을 정도가 되어서 자기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간절히 요청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로 주님이 곁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이 곁에 있어서 주님이 함께 임재함으로 말미암아 어쩌면 그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심신이 또 피곤하기도 하고 또 이 심부름 때문에 바로 유월절 지내기 위한 방을 마련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곳저곳을 다녔기 때문에 많이 지치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이 잠을 잤지만 주님의 임재로 인하여 어쩌면 피곤함과 동시에 주님이 곁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잠이 들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듭니다. 그래서 바로 이 게세마네의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기름짜는 틀인

    거기에서 짓눌림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영을 흘려내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이 협착한 십자가의 외진 길을 통과하기 위한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한쪽 구석진 곳에서 주님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을 통해서 바로 이 승리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6장 41절 말씀을 통해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서

    기도하라 라고 영적인 일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영은 원하는데 우리의 육신이 약하여서 우리가 이게 행동 따로 마음 따로

    이 영의 간구하는 소원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는 천연적인 출생으로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 이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왕국을 위할 수 있는 생명과 그리고 전혀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의

    생명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게세마네 동산 그 기름 짜는 틀에서 짓눌림을 당하고 으깨어지고 파쇄 당하고 쪼개지는 이것은 자신에게

    생명 주신 영이신 영을 흘려내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한 일을 지금 하고 있는 반면에 지금 이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이 3명의

    제자 그 12제자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모습은 왕국을 위하는 주님과 같은 그러한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을 따라사는 삶이 아니라 천연적인 출생의 천연적인 생명의 모습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천연적인 출생에 의해서는 바로 왕국을 위할 수 있는 생명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고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첫 아담 속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천연적인 출생으로 인하여 갖게 된 그 생명은

    천연적인 생명임으로 말미암아 전혀  부활 생명의 영이 있는 왕국을 위해서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짜는 그 틀에서 바로 이 생명의 영을 흘려내기 위하여

    무거운 것에 의하여 으깨짐을 당하고 쪼개짐을 당하고 파쇄함을 당하고 아주 가루가 될 정도로 그렇게 이 기름 짜는 틀에서

    자신의 혼이 슬프고 고민하여 죽을 정도까지 되심에도 불구하고 이 게세마네 동산에서의 그 짓눌림 받는 세 번의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준비를 하시는 것은 바로 인자로서 사람의 아들로서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신 그 신선한 영 생명의 영, 가장 높은 그 영에 의해서 사는 신선한 생명, 가장 높은 생명,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그 부활 안에서의 부활 생명의 영을 쫓아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가 실패하고 참패하는 반면에 그 기름 짜는 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그 뜻 성경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준비를 하시고 계신 예수님의 삶과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이기는 자의 삶과 바로 패배한

    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는 아직까지도 천연적인  출생으로 인하여 베드로 자신이 갖게 된 천연적인 생명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 체포당할 때 가롯 유다가 자신이 섬기는 그 선생님을 잡기 위해서 암호로 예수님께 다정히

    입맞출때 입맞춤을 당한 그분이 바로 당신들이 체포할 자라는 것을 이렇게 암호로써 가르쳐 줬을때 베드로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칼을 빼가지고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잘라냄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이 장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왜 그런가하면 천연적인 출생을 가진 베드로의 그 천연적인 생명으로는 왕국을 위한 삶도 살 수 없고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좁은 외길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 될 수가 없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이 원하지 아니하는 말고의 오른편 귀를 잘라냈다는 것은  뭐죠?

    오른쪽 귀가 있고 왼쪽 귀가 있는데 오른쪽 귀는 생명의 말씀이신 하늘에 속한 말을 듣는 귀가 바로 오른쪽 귀인 것입니다.

    그 오른쪽 귀를 잘라내면 그 말고라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그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라.성령님의 그 검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은 그들의 오른쪽 귀를 통해서 생명을 소유하게 해서 천국 백성이 되게 해야 되는데

    너는 지금 엉뚱하게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천연적인  생각과 행동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돕는 것 또한 아닌 오히려  그를 실족시키고

    그를 하늘에 속한 생명의 말씀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통로까지도 막아 버리는 것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아주

    크게 진노하여서 베드로를 경책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해서 염려하여서 지금 칼집에서 이 칼을 꺼내서 말고의 귀를 이렇게 잘라냈는데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하시면서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가진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일을 어그러뜨리고 문제만 야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 얘기를 통해서 또 한편 암시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이 부활 생명의 영이신 그 주님의 생명 주시는 그 영을 쫓아 살지 않고 우리들의 천연적인 출생에 의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부활 생명의 영을 가지고 사시는 그분은 이기는 삶이요 승리하는 삶이요

    왕국을 위하는 삶이요 협착한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천국 백성으로서 가장 먼저 들어가서

    주가 되실 수 있는 그러한 놀라운 부활 생명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하고 왕국을 위한 삶을 살 수도 없고 그리고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죽음의 길도 통과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의 실패는 바로 예수님이 전적으로 게세마네 기름틀에서부터 기도를 통하여 승리하는 모습과는 달리

    온전히 참패하고 실패하고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을 통해서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살 수도 없고 주님의 왕국을 위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같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바로 이렇게 천연적인 베드로와 그리고 부활 생명의 영 안에서 승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왕국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과 될 수 있는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실패하고 패배하고 참패하는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베드로가 주님을 위한 일에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러한 자로 보여지지만 사도행전 2장과 3장과 4장에서는 부활 안에서 사는 삶, 부활 안에서 사는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부활한 베드로 그럼 부활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부활한 베드로를 우리가 보게 되죠?

    그가 바로  유다 백성들에게 주님의 경륜적인 능력의 영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언하는 그 베드로의 모습이 다름 아닌 부활한 베드로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 속에서 나타내 보이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패배한 베드로를 보지만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왕국을 위한 좁은 외길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부활 생명의 영이신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나 되어 예수님을 뒤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부활 생명 안에서 승리하는 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승리하시는 모습과 패배하고 참패하고 실패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부활 생명의 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57절부터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에 대해서 나오는데요.

    바로 예수님께서 여기서 승리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더욱더 적나라하게 비밀스럽고도 은밀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 산헤드린  공회에 의하여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에 대해서 나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증거에 의하여 말할 수 없이 부당한 있지도 아니하는 일을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 말미암아 거짓 증인들을 동원시키면서까지 예수님을 고소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그 들을 동원하여 거짓 증거를 주장하여 주님께서 고통을 받으시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변호를 위한 그 어떤 말씀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는 장면을 우리가 59절부터 63절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26: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26: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26: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26: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께서 부당한 고소를 받으시고 거짓 증거에 의하여 정말 참말을 하여도 거짓이라고 하고 또  진리를 얘기해도

    부당한 말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자신을 배척하고 반대하고 거절하는 자들에 의하여 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한마디도 않으시고 침묵으로 대하시는 것은 바로 승리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공회 앞에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침묵을 지키시면서 그 어떤 변명조차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이사야서 53장 7절의 말씀을 이루고 성취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이 대제사장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우리에게 말하십시오 라는 얘기는

    마태복음 4장 3절과 6절에 기록되어 있는 마귀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라고 말씀 하시죠.

    하나님의 아들은 당연히 돌을 떡으로 만들 수가 있겠죠. 예 모든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시험할 때도 그리고 대제사장이 바로 마귀가 주님을 시험할 때 사용한 거와 똑같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 우리들에게 말을 하여 보십시오라고 했을 때 64절 말씀을 통해서

    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라고 얘기합니다.

     

    대제사장은 지금 주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니면 아닌지를 물어봄으로 말미암마

    그에 대한 대답을 듣기를 원했으나 주님께서는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귀가 시험을 할 때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십시오라고 했을 때 돌을 떡으로 만들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분께서 이루시는 십자가와 부활, 이 모든 세상의 죄들을 제거하고

    청산하시려는 그분의 일이 이 무가치하게 아무런 효력을 가지고 오지 못하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물었을 때 사람의 아들로서 대답을 하십니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33년 반 동안의 인생을 산 그것도 땅 위에서 사람으로서 사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도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때도 사람의 아들로서 앉아 계신다 라고 사도행전 7장 56절에 스데반이 돌팔매질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할때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 7장 56절 말씀입니다.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부활하신 후에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분은 인자로서 사람으로서 앉아 계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33년 반 동안에도 땅 위에서 사람으로 사셨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메시아의 왕국의 주인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늘에 속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공중의 구름을 타고 바로 강림하실 때 구름 위에서 세상에 오실 때에도

    바로 인자로서 오신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바로 이 왕국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천국을 세우고 천국 백성을 이끌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반드시 사람이 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목적이 이 세상에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이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목적은 땅 위에서 수행될 수가 없고,

    천국이 이 땅 위에 세워질 수도 이루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 인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의 아들 인자로서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승리하시고 쟁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쟁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무것도 안 해도 다스릴 수가 있죠.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실패할 수도, 참패할 수도, 패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서 그가 승리하시고 사람으로서 그가 이기시고, 사람으로서 좁은 십자가의 외길을 통과하셨다는 것은

    똑같은 우리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는 영적인 말씀의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혼인 잔치를 열기 위해서 구름 위에서 다시 올 때도 바로 그분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있을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있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실 때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서 두 종류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으나 응애하고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에서 태어났을 때는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고 인성을 지니신 자로 태어나셨으나 공생애를 사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닌 사람의 아들로서 사셨기 때문에 광야에서 마귀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관하여 시험받았을 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라고 했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라고 사람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너에게 지금 시험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에게 시험받을 이유도 없고, 이 모든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너에게 시험받고 있는 것이 아

    니라 바로 사람으로서 너에게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찮은 마귀에게 시험받아야 될 이유도 없고 시험받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일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서 마귀가 지금 마주하고 있고 그분의 생애의

    전반적인 모든 것들이 사람으로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제사장이 하는 질문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리스도이십니까 라고 얘기한 것은 마치 광야에서 있었던

    마귀의 시험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 사단과 마귀의 아주 교묘한 시험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지고 그가 정면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얘기하지만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드러내고자 말씀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거절과 반대와 배척을 당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그 대제사장의 관원들이 옷을 찢으며 참담한 말을 했다고 해서 사형에 해당된다고 말을 하면서 얼굴을 때리고 침을 뱉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치고

    침을 뱉고 말할 수 없는 그 조롱을 하는 장면을 볼수가 있습니다.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26: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26:68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여러분 이렇게 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무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변명하려는 그 어떤 말씀도 한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침묵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이사야서 53장 7절에 이름과 같이 승리의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이 아무 변명도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심으로 말미암아 곧 실패하고 있는 삶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는 베드로와

    승리의 침묵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대조시킴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전해주려고

    의도적으로 행동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3장 7절 말씀을 이루시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멀찍이 떨어져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한 비자가 나아와 베드로에게 예수님과 같이 있던 것을 보았다고

    했을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참패하고 폐배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조롱하고 때리고 침뱉음을 당하고 말할 수 없는 정말 세상에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조차없는

    그런 모욕을 다 받으셨지만 실패하고 있는 베드로 앞에서 당당하게 침묵으로 일관하시면서 승리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오직  주님의 부활 안에서 나타나는 부활 생명의 영을 통해서만이 바로 왕국을 세우는 일과 도모하는 일에 적합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왕국을 위해 일할 수도 없고, 왕국을 세울 수도 없고 왕국 백성이 될 수도 없고,

    왕국을 가기 위한 협착한 길로 들어설 수도 없고 모든 일이 불가능하지만 바로 이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직 예수님의

    생명 곧 주님의 부활 안에서 나타난 부활 생명의 영이신 생명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만 살 때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삶의 길을 갈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였습니다.

    가장 강한 자, 가장 믿음이 있었던 자 그렇게 강한 자였지만 그러나 그렇게 강하고 담대한 사람의 생명 일지라도 그것은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의 것이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속한 그 생명 가지고서는 바로 이 부활 생명의 영이 존재하시는 그 왕국의 부활 생명의 영이 있는 곳에는 적합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베드로처럼 강하고 담대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왕국을 위해서 살 수도 없고 왕국의 백성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가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담대해도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69절부터 70절에 쭉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잠시 전에만 해도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내가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떠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 그런 일이 있지 않습니다라는 얘기를 바로 마태복음 26장 33절에 모두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주님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아주 강하고 담대한 자기 자신의 신뢰를 가지고 얘기를 하지만 베드로가  첫 번째로 부인하게 되는 이 시험과 유혹이 다가올 때 첫 번째 부인한 것이 가장 연약하고 작은 여자아이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작은 여자의 그 질문을

    향해서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실패하는 참담한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6:69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하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왜 베드로가 강하고 담대할지라도 이렇게 참패하는 일이 반복 될까요? 그것은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왕국을 위해서

    절대로 살 수가 없고, 왕국을 위한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왕국 백성이 될 수도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하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들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번의 시험으로 베드로가 완전히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시험 세 번째 시험이 계속 연결되어져서 연속적으로 발생되어지는 것은 세 번의 시험과 부인을 통해서 완전히 천연적인 생명의 그 실제적인 존재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검증하게 하고자 세 번의 시험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 속에서 베드로가 가장 연약하고 작은 하녀에게 철저하게 시험받음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삶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신뢰를 가지고 나는 절대 실족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아주 당당하게 말했던 그 자신을

    절대 신뢰하지 말아야 된다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 나타난 것들은 하나도 믿지 못할 것들이며 결국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그런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 곧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우리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세 번의 시험과 세 번의 검증을 통해서 세 번의 부인을 통해서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만을 의존하고 주님의 그 부활의 생명의 영을 쫓아 사는 삶을 나중에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삶을 갖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러한 안배를 펼쳐 놓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을때 또다른 하속이 곁에 와서 내가 보니까 너가 진실로 그 당이라

    너 말투가 갈릴리 말투가 아니야? 갈릴리 말투가 약간 사투리가 섞여져 있는 우리가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아마도 베드로의 그 말투가 갈릴리 특유의 말투가 나타났던 것이 73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이라고 얘기했을 때 바로 처음에 그들은 베드로는 아주 연약한 작은 여자에게는 말로써 그의 질문에 실패합니다.

    두 번째 부인할 때는 맹세를 합니다.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처음에는 간단한 말로만 했고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대답을 했고, 세 번째 자기가 예수님과 모르는 자라고 부인할 때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면서 맹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절대 왕국 안에서의 그 속한 품성을 가진 자가 절대 될 수

    없다라는 주님의 그 십자가의 외지고 협착한 길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라는 천국 백성이 절대 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러한 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 세 번 아주 연약한 이 작은 하녀 작은 여자를 통해서 말로서 실패를 하고 맹세하면서 대답하면서

    또 패배를 하고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면서 맹세 함으로 말미암아 참패하여서 완전히 자기 자신이

    주님 잡혀 오시기 바로 전에 말씀 해 주신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 하리라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말할수

    없는 통곡을 하는 장면을 75절을 통해서 볼수 있습니다.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바로 여기에서 얘기하고 있는 장면의 의도가 뭡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 인자로서 부당한 재판을 받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거절당하고 반대 당하고 주먹으로 때림을 당하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며 이렇게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의 주님을 말할 수 없이 조롱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당한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승리하시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에 베드로는 그보다도 훨씬 좋은 환경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철저히 부인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 31절에서 75절까지의 예수님과 베드로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베드로의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는 절대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고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 왕국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협착한길 좁은 외길은 더더욱 통과할 수가 없으며 또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라는 얘기입니다.

     

    이 열두 제자의 대표이며 교회 안에 성도를 상징하고 있는 베드로를 통해서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고서는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도 따라갈 수가 없고 아무리 담대하고 강한 생각과 담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결말에서는 실패하여 부인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베드로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대환란 때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극심한 핍박과 박해가 올 때 바로 이러한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자는 

    베드로와 같이 담대하고 강한 마음을 가지고 절대 나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의 각오로

    주님 앞에 나아가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얘기해도 소용이 없다 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베드로가 당한 그런 시험들을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게  마주하고 직면할 것입니다.

    마지막 대환란 때 시대의 종결 때에는 이 적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의 세력에 의하여 우리가 이러한 시험들이

    이보다 더 크게 올지도 모릅니다. 그때에는 절대 우리가 이 적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앞에서 베드로와 같이 실패하고 패배하고 참패하는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방문함으로 말미암아 친밀한 친교의 방문을 가져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회개할 수 있고 자백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희망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이 아닌 또 하나의 주님이 인자로서 사람으로써 어떻게 이 세상과 죄와 마귀를 이겼느냐 그러한 온갖 배척과 거절과 반대와 말할 수 없는 그러한 일들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침묵을 행하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아니한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이 아닌 주님께서 소유하신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높은 생명인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 되신 예수님의 영이신 생명 주시는 영, 그 영을 쫓아서 살았다는 거죠.  곧 다시 말해서 생명 주시는 영이시요, 높은 생명이시요, 신성한 생명이 되시는 바로 주님의 그 세 가지 신성한 생명, 높은 생명, 가장 그 영원한 생명, 그 주님의 생명

    안에 우리가 들어가서 그 생명 안에 젖어 녹아지는 우리가 이 생명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실패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고 참패하지 않고 주님처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려고 마태복음 26장 31절부터 75절까지 기록됐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패배하고 실패하고 참패함으로 말미암아 땅에 속한 검은 색을 우리가 보게 되지만 예수님을 보게 되면

    하늘에 속한 승리의 색, 승리의 흰색, 땅에 속한 그 검은색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흰색을 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계시록 19장 11~14에 보면 흰말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의 그 뒤따르는 백마를 탄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이긴 신부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9:11 〔백마를 탄 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헬, 로고쓰〕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아마겟돈 전쟁에 신랑되신 예수님과 혼인잔치를 행한 다음에 주님을 따라 백마를 타고 싸움을 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가는 장면을 보듯이 우리는 주님에게로부터 하늘에 속한 하얀색을 보게 되지만 베드로를 통해서는 땅에 속한 검은색을 봄으로

    말미암아 패배와 참패와 실패한 어둠의 색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흰색이 승리의 색이 되기까지는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짜는 틀이신 그 틀에서 자신이 완전히 파쇄가 되고

    짓눌림을 당하고 생명 주시는 영, 그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 되시는 그 영을 흘려내기 위하여 거기서 짓눌림을

    당하고 무거운 부담에 의해서 으깨짐을 당하여서 우리에게 이 생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게세마네 동산에서 으깨짐과 짓눌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세마네 동산에 제자를 데리고 기름짜는 곳을 데려가셔서 그곳에서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다른 생명,

    너희에게는 이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생명이 아니라 바로 이 기름틀을 통해서 생명 주시는 영을 흘려내기 위한

    그 영인 또 다른 하늘에 속한 생명을 받아야만 이길 수 있고 승리할 수 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와 같이 게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름틀에서 생명 주시는 영을 흘려내기까지는 땅에 속한 검은색 패배한 삶의

    모습을 볼 수밖 없지만 예수님께서 그 게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승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그 생명 주시는 영, 바로 이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 되시는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속한 신성한 생명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신 가장 높은 생명을 주시려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으깨짐을 당하고 눌림을 당하고 쪼개짐을 당하고 파쇄를 당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하심으로

    우리들에게 생명 주신 영을 허락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침묵으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변명하면은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침묵으로 그 모든 일을 감내하고 부담을 가진 것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넘겨주신 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예언의 말씀들을 이루시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그 생명만이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국 백성으로서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좁은 외길을 통과하고 갈 수 있도록 하늘에 속한 바로 그 세 가지의 신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 가장 높은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의 부활 안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에  삼일 후에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 되시고자 게세마네 동산을 찾으셔서 으깨어지는 고통과 짓눌리는 부담을 다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3장 4장을 보면 부활 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 바로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의 영이 되시는 능력의 영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언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경륜적인 그 영, 신성한 영, 생명의 영, 가장 높은 생명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생명 안에서

    삶으로 말미암아 부활한 베드로를 우리가 보게 되는것입니다.

     

    어린 여자 아이의 질문에도 어찌 할줄 몰랐던 그 런 천연적인 생명을 가진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게세마네 

    동산의 기름틀에서 짓눌리시고 으깨어 지시면서 흘려주신 그 영, 신성한 영, 생명의 영, 가장 높은 생명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삶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부활의 삶 이기는 삶을 사는자가 되었다는것을 말씀드리면서 오늘의 교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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