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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탕자를 자신의 기업인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희년: 눅 15:20~25, 레 25:6~13
    말씀 나눔방 2025. 2. 11. 18:53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전편에서 구약 레위기 25장 9~11절 말씀으로 은혜의 해, 희년의 의의(意義)에 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잃어버렸던 땅이 회복되고 종 되었던 몸이 해방되어 자유자가 되는 은혜의 해 희년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희년이란 하나님께서 잃어버렸지만 다시 돌아온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아들여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때라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희년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집을 나가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이는 해이고 타락하여 죄인이 된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해입니다. 이 희년의 해를 표현해 주는 말이 기쁨과 즐거움인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과 즐거움이며 또한 우리 인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냅니다.

     

    천지창조 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완성되어 보시기에 심히 기쁘고 좋아 제 칠일을 안식의 날로 정하고 거룩하게 하였던 것처럼 희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새롭게 완성된 해이기 때문에 거룩한 해이며 은혜의 해라는 것입니다.

     

    전편에서 은혜의 해 희년은 하나님께서 죄와 세상과 마귀에 사로잡혀 노예의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셔서 기쁨과 평안과 만족과 안식의 누림을 허락해 주신 해라고 여러분들과 교제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희년의 의의에 이어서 희년의 두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의 교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희년의 복에 대한 오늘 말씀은 단순히 기쁨의 해 희년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과 이해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이 우리의 실질적인 복이 되는 것  그리스도 대한 온전한 누림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 총 66권의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그 처음을 구약 성경 창세기로 시작해서 그 마지막을 신약 성경 요한 계시록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경의 시작 창세기와 성경의 마지막 요한 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먹는 양식과 거주하는 거처 이 두 가지에 관한 것임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에덴동산에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거처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생명 양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 인간들의 소유, 우리 인간들의 몫, 우리 인간들의 분깃, 우리 인간들의 기업이 되게 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담는 그릇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또 우리 인간과 함께 거할 처소로 그 에덴동산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를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순서를 보면 에덴동산이라는 땅을 사람에게 먼저 주셨고, 그다음 그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를 두셨으며 창조하신 사람을 그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 앞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거처로 바로 에덴동산을 주셨고 그리고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를 두셔서 그 열매를 취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가운데에 생명나무를 두셔서 그들로 그 열매를 먹게 하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두 가지 곧 생명의 거처와 생명의 양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생명의 땅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거처이고 그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생명 양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소유해야만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양식 곧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두셔서 그 열매를 취할 수 있게 하셨고 또한 사람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필요했기 때문에 인간을 위한 거처로 에덴동산이라는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며 우리의 거처를 위해서 에덴동산이라는 땅을 두셨고 우리들의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에덴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속한 땅과 그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는 모두 사람의 누림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생명의 거처인 에덴동산과 생명의 양식인 생명나무 열매를 주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그 생명의 땅과 생명 양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죄와 세상과 마귀에 사로잡혀 비참한 삶을 사는 우리 인간에게 구약 레위기 25장의 희년 제도는 우리가 어떻게 다시 그 생명의 거처와 양식을 소유할 수 있는 지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희년의 의미를 기쁜 소식, 기쁜 소리, 복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희년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일까요?

     

    희년의 나팔 소리는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고 죄의 종이 되어 억압된 채 아무런 기쁨과 소망도 없이 비참한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 저주의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모든 것들이 회복됨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에 희년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요 최고의 굿 뉴스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은 희년의 도래를 알리는 것으로, 희년은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고 저주받은 삶과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슬픈 운명 속에 갇혀 있던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대가 없이 그 저주의 삶과 슬픈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거처를 기업으로 얻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복을 영원히 누린다는 소식이기 때문에 가장 기쁜 소식, 최고의 굿 뉴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응하게 되는 가장 좋은 소식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우리의 거처인 그 생명의 땅을 잃어버렸지만 우리의 기업이고 몫이며 분깃이었던 그 잃어버린 땅 곧 잃어버린 우리의 거처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다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땅의 권리를 잃게 되고 또 극심한 가난으로 인하여 생존을 위해서 부득이 자신의 몸까지 팔아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 희년이 도래하기까지 사십구 년 동안 비참한 삶을 살아온 노예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으로 우리가 아무런 대가 없이 해방되어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희년의 기쁜 소식을 다시 말씀드리자면, 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기업을 회복시켜 주고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하여 완전한 자유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회복과 몸의 해방과 자유를 알리는 희년의 뿔나팔 소리는 희년이 도래하는 오십 년째 해 일월 일일에 때에 분 것이 아니라 희년이 도래하기 육 개월 전 곧 사십구 년째 해 칠월 십일 속죄일에 전국 방방곡곡에 크게 울려 퍼지게 하여 모두가 회개하여 다가오는 거룩한 희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사역은 다가올 희년을 맞이하기 위해 빨리 돌이켜 회개하라는 나팔 소리였고 실질적인 희년의 도래의 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탄과 죄의 노예 된 상태에 있던 우리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하나님의 기업이 회복되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때입니다.

     

    레위기에서 희년에 회복될 우리의 기업을 말하고 있고 다른 성경에서도 우리가 얻을 분깃 곧 기업에 대하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시편 16편 5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절에는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심히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거처에 관한 말씀을 보면,

    시편 90편 1절에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기업이 바로 우리의 거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는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하고 있어 우리가 바로 거처와 양식을 잃어버린 채 소망 없이 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희년의 해를 선포하시고 희년을 도래케 함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 가장 좋은 소식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은 교회를 핍박하는 바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 말씀하는 내용으로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14절에서도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참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길 원하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년에는 타락한 인간을 위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복이 있는데 그것은 잃었던 기업으로의 복귀와 그리고 종과 노예 상태로부터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복 곧 잃어버린 기업으로의 복귀와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각각의 종류(種類) 대로 각각의 특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 되었지만, 인간만큼은 별도의 인간적 특성을 가진 인간의 종류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아 하나님의 특성을 가진 존재, 하나님께 속한 종류(種類)로 창조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이 사람의 참 실제로서 존재할 때에만 우리 인간은 참 거처와 참 양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 모양을 따라 창조된 존재임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좇아 살지 않고 뱀으로 변신한 마귀에 속아 하나님께 범죄 하여 마귀의 뜻을 따라 사는 존재로 타락함으로써 사람의 참 소유가 되시는 하나님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기업을 잃어버렸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 기업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뱀으로 변신한 마귀의 말에 속아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업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 스스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기업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보면,

     

    둘째 아들 탕자는 성장하기까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탕자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살려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살고자 해서 아버지 집을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를 넘어 탕자의 마음이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아버지로부터 멀어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또 아버지가 그 탕자 아들에게 상속해 주고자 했던 자신의 몫, 자신의 분깃, 자신의 기업으로부터도 떠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하는 둘째 아들 탕자가 집을 나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지만, 탕자 자신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나 오해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 등으로 아버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으로 떠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기업 또한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참 소유이며 기업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4장 18, 19절 말씀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에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의 도래를 선포하셨는데, 도래할 희년의 선포가 알리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잃어버렸던 우리의 개인적인 소유가 우리에게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떠났던 아버지의 집, 아버지께서 주시려는 우리의 기업이 우리에게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희년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탕자와 같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로부터 멀어졌던 그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이신 분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하나님께서 그 크신 자비로 돌아온 탕자와 같은 우리를 기뻐 받아들여 하나님 아버지의 합당한 상속자로 인정하시고 예비하셨던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희년은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 아버지께서 기업으로 주시려는 그 소유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잃었던 우리의 개인 소유를 우리가 다시 찾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복은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뜻을 좇아서 행하다가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실패하게 된 이유를 따져보면 그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운영하는 자신의 능력과 지혜의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그 자체가 실패이며 기업을 잃어버리게 된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을 엄격히 말하면 어떤 부득이한 사정으로 잠시 아버지를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만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 등으로 다시는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떠난 것으로 실상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집을 멀리 떠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참 기업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뒤에 하나님과 그 기업이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혹독한 삶의 어려움과 영적인 기근이 몰아닥쳐서 스스로의 생명조차 보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어서 결국 자신을 세상과 죄와 사탄에게 팔아버려 사십구 년 동안 그것들의 노예가 됨으로써 우리 자신 또한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떠난 자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십 번째 되는 해 희년에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와 세상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하여 자유인의 신분을 회복하고 가족 품 곧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떠났던 자들로 과거 일곱 안식년이 속한 사십구 년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아주 궁핍한 처지가 되어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모든 소유를 팔아버리고 죄와 세상과 마귀의 노예가 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인 하나님 자신을 팔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보존과 유지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죄와 마귀에게 우리 자신을 팔아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탄과 죄에 속박된 채 노예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위기 25장 9절~13절의 희년 제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제 오십 번째 해에 희년이 도래하면 우리의 죄와 허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이 본래대로 회복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던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의 신분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며 오직 하나님 만을 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우리의 기업을 다른 이에게 팔아넘기는 일이 없고 우리 자신을 세상과 죄와 마귀에게 팔아넘기는 일 또한 결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열매는 슬픔과 고통과 허무함과 죽음뿐이지만 제 오십 번째 해 희년이 도래하면 이전 사십구 년의 기간에 속한 모든 옛 것들은 지나가고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의 해 희년, 은혜의 해 희년은 더 이상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없고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한 기쁨과 평안과 만족과 안식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하였고

     

    계시록 21장 3-5절에서도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타락한 첫 사람 아담과 같이 옛 창조, 옛 것에 속한 자들로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집을 떠난 탕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남으로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우리의 기업 또한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분의 집을 떠남으로 우리는 지극히 가난하게 되었고 생명의 양식이 없어서 결국 생존을 위해서 세상과 죄와 사탄에게 굴복당한 채 사십구 년 동안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써 우리의 기업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에 만족함과 배부름을 주는 아버지의 생명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영적인 궁핍과 헐벗음과 배고픔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 아버지만이 오직 생명의 양식인 것을 깨달은 자들이 스스로 뉘우쳐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탕자처럼 영적인 궁핍함과 헐벗음과 배고픔 가운데 있던 자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안식일날에 이사야서 61장 1절 말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를 읽으심으로써 신약 희년의 도래를 알리는 희년의 나팔을 전국 방방곡곡, 온 세상에 거하는 온 인류에게 공개적으로 부셨던 것입니다.

     

    희년의 나팔을 부신 다음 삼 년 반의 공생애 활동을 하시다 그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을 하심으로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영으로 함께 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선포하셨던 희년이 실제적으로 성취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신약 희년이 도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셨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 안에 임재하여 거하심으로써 신약 희년을 실질적으로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희년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이후에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셔서 여러 방면의 말씀들을 전파하시고 또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셔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거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26절 말씀에서 주님은 신약 희년을 선포하시는 자신과 자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을 향하여,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오직 이방 땅 시돈의 사렙다에 거주하는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어 그를 구원하게 하셨고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했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 치유받았다고 말씀하시며 주님의 말씀과 이적들을 불신하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을 크게 질책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주의 성령이 임하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사야서 61장 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희년의 기쁜 소식이 전국 방방곡곡,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할지라도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처럼 그 마음이 가난하여 주님을 영접한 자들에만 희년의 은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 희년을 선포하신 주님께서는 많은 비유의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시고 또 사람들을 만나 행하시는 일들을 통하여 신약 희년의 도래를 친히 예증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말하자면,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를 구원하신 이야기,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죄를 탕감하신 이야기,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그의 하인을 구원하신 이야기,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이야기, 문둥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 등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전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천국의 복음, 그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를 우리 귀로 듣게 하고 우리 귀로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많은 비유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 중에서도 희년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가 모든 것을 잃고 아주 궁핍한 처지가 되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죄인의 마음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거지꼴로 돌아온 탕자 아들을 끌어안고 너무나 기뻐 반기는 그의 아버지에게 탕자는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그저 품꾼의 하나로 여겨서 받아만 달라고 말하려 하였으나 아버지는 그가 하려는 말이 자신에게 결코 합당한 말이 될 수 없기에 탕자 아들의 입을 급히 막으며 그 아들에게 자신의 기업을 물려받을 상속자임을 인정하는 증표로 준비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고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워주고 또 신발을 신겨줍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모두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돌아온 탕자와 그를 반기는 아버지]

    돌아온 탕자가 자신이 아들로서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말하려 한 것을 보면 그는 무거운 죄의 짐에 그의 마음이 짓눌려 있어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감히 자신의 아버지 앞에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다가갈 수가 없었던 상황에서 그를 무거운 죄의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아버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는 자신을 너무나 기뻐 반겨주었음은 물론 자신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서 조금도 책하지 않고 오히려 자격 없는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 증표로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진실로 그 기쁨을 표현하는 아버지를 보고 탕자 아들은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보고 깨달았던 것이며 아버지의 그 참 사랑으로 말미암아 탕자는 더 이상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탕자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줌]

    이 이야기에서 아들의 신분과 기업의 회복 보다 더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진실한 신뢰와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되는 관계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희년은 표면적으로 우리가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자가 되고 잃었던 기업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온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면서 이내 아버지를 잊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탕자 아들이 떠나는 순간부터 결코 한시도 그 아들을 잊어 본 적이 없으며 이제나 저제나 탕자 아들이 돌아올까 하여 날마다 근심 가운데 오매불망 그 아들을 기다려왔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그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없었지만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그 아버지는 근심에서 벗어나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과 만족은 탕자 아들이 용서받고 기업을 물려받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의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기업을 다시 찾은 우리 인간의 기쁨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돌아온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만족하며 아들 또한 아버지로 인하여 기뻐하고 만족하며 아버지와 함께 있는 모든 자들 또한 더불어 기뻐하고 만족하는 때가 바로 희년인 것입니다.

     

    이 희년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간이 온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회복되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베푸는 잔치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그 영적 풍요로움과 부요함이 가득한 그 하늘 잔치에 참여하여 모두가 함께 충만한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늘 아버지는 풍성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모두가 하늘의 신령한 복을 풍요롭게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레위기 25장 11절,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입니다.

     

    하나님께서 희년에 그 어느 누구도 땅을 경작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해, 희년에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서 땀 흘려 힘들게 일해야 하는 품꾼의 삶은 더 이상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풍성한 누림이 있는 아들의 삶만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며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모습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품꾼이어서는 결코 안되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품꾼으로 사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어떤 기쁨과 만족도 없이 여전히 근심 속에서 불행하게 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자신의 죄의 짐에서 벗어나 아들로서 그를 위해서 준비된 것들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버지의 최고의 기쁨이고 만족이기 때문에 품꾼으로 여겨달라고 말하려는 탕자 아들의 입을 그의 아버지가 급히 막았던 것입니다.

     

    탕자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잘못한 일로 인하여 스스로를 감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생각할 수 없어 주인과 품꾼의 관계로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탕자 아들을 품꾼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변함없이 자신의 기업을 물려받을 상속자 아들로 생각해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탕자 아들이 품꾼이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자신의 아들로 돌아와 모든 것을 누리며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너무나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속받는 기업에 관하여,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성도의 기업의 부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들이 얻는 풍성한 분깃이요, 몫이요,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온 후에 비로소 아버지와 그 집안사람들과 천사들까지도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그 풍성한 기업들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이 아버지였고 그리고 집안사람들과 천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은 풍성한 은혜와 사랑 가운데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는 삶이어야 했지만, 탕자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한 가족 모두 근심과 슬픔으로 가득 차 그 무엇으로도 기뻐하거나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집안사람들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그 어떤 잔치도 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온 후에 비로소 아버지와 가족 모두의 근심과 슬픔이 모두 제거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모든 가족들과 천사들까지도 모두 그 기업을 기쁜 마음으로 온전히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근심과 슬픔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충만한 은혜 아래서 기업을 얻고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때가 바로 희년이라는 것을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참된 회심과 용서는

    아버지를 향해 세워졌던 탕자의 높고 두꺼운 마음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 뜨리고고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겨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버지와 탕자의 마음 안에 더 이상 어떤 거리낌이나 불편함과 죄의식도 없는 서로 온전한 사랑과 신뢰로 하나 되는 관계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온전한 사랑과 신뢰로 하나 된 가운데 비로소 아버지와 가족들과 천사들과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기업을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누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희년의 중요한 첫 번째 복은 잃어버렸던 우리의 소유인 그 기업으로 우리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희년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복은 잃었던 우리의 기업인 하나님께로 우리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우리의 기업 곧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우리들의 소유로 얻는 때가 바로 기쁘고 즐거운 해, 희년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취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희년의 가장 큰 첫 번째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우리의 소유 곧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소유는 세상에 있는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에 속한 것 곧 하나님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희년의 해를 선포하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희년을 성취하셨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신약 희년의 가장 중요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소유 곧 하나님을 되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된 사람 안에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생명의 본질이 되시고 소유가 되시고 참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계속적으로 거처에 대한 말씀과 양식에 대한 말씀을 아주 많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참되신 하나님을 그 안에 소유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나 되어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개역개정)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말하고 있고 또 로마서 9장 21, 24절 말씀에서 토기장이가 자신의 뜻에 따라서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쓰실 그릇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어 우리는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된 존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심령 안에 참 내용물이요, 참 실재이신 하나님 자신을 가득 채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감정과 생각과 의지를 가진 혼으로 창조하셔서 그 안에 하나님을 담아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인간 안에 그 내용물이요, 주제요, 참 실재이신 하나님이 담겨 있지 않고 비어 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의 심령 안에는 참 내용이요, 주제요, 참 실재이신 하나님이 담겨 있어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가진 혼적인 존재인 사람 안에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 존재할 때에만 창조의 목적에 맞는 참 사람으로서의 모습과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참 내용이요, 실재이며 주제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분깃이나 몫이나 기업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인간 안에 기업이시며 몫이시고 분깃이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부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인간 안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기업을 소유하지 못한 것임으로 그 그릇은 비어 있는 것이기에 그는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었지만 생명나무 열매가 아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대신에 마귀를 담는 그릇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귀에게서 오는 거짓된 내용물, 거짓된 기업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죄와 마귀의 속박당한 채 사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우리 안에 참 내용이며 참 실재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사람은 매우 가난한 자 곧 아무것도 없는 빈 그릇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그 빈 그릇 안에 세상과 죄와 마귀를 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인데 이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소유가 되신다는 것이며 그 말씀을 사람 안에 담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업이며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양식을 산출하는 땅과 우리가 거주하는 집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 살도록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업이신 하나님을 가져야만 우리의 참 거처요, 참 양식인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풍성한 누림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물질적인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땅과 집이 필요하듯이 영적 하늘의 삶에 있어서도 땅과 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서 에덴동산과 생명나무를 통해서 말하고 있고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에서도 새 예루살렘과 생명나무를 통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에덴동산과 새 예루살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이신 땅이시며 그리고 우리의 생명 양식이신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좋은 땅 가나안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땅을 기업으로 삼아 거주하고 그 땅에서 산출된 양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좋은 땅 가나안은 우리의 거처가 되고 생명 양식의 공급원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짐승들의 젖이 풍성해야 그것들의 새끼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고 식물들의 꽃에 꿀이 풍성해야 벌과 나비들이 모여 그 식물이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표현된 가나안 땅은 우리 인간의 생명이 아름답고 강건하게 성장하기에 너무나 풍요롭고 적합한 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강석과 금과 은과 각종 보석을 생산하는 땅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것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금강석과 각종 금 은 보석은 우리의 육적인 삶에 물질적인 부유함을 줄 수 있지만 그것 자체는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과 거처가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자신 만이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과 거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분명 물질적인 세계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육신의 생명을 위한 양식인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 영의 생명을 위한 양식인데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충족시켜 주는 생명 양식의 공급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2,33, 35절 그리고 6장 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로부터 온 참 떡 그리고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6장 61절에서는 자신을 살아 있는 떡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먹는 사람은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6:32,33 개역개정)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48, 51, 개역개정)

     

    그리고 시편 90편 1절에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하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양식일 뿐만 아니라 또한 거처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기쁨의 동산인 에덴동산을 그의 거처로 주셨고 생명나무 열매는 그의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므로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거처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에덴동산과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거처이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거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덴동산과 가나안 땅 그리고 앞으로 있을 새 예루살렘이 바로 우리의 기업이 되는 땅으로서 우리의 거처이고 그 땅에서 나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바로 우리의 생명 양식과 거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시편 16장 5,6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말하고 있어, 주님이 바로 우리의 산업과 우리의 분깃으로서 실로 아름답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기업과 분깃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면으로 우리의 기업이 되셨는데, 하나는 우리의 먹는 양식으로서, 다른 하나는 우리의 거처하는 집으로서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시편 90편 1절과 시편 16절 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기업이 되시고자 거처가 되는 땅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기업으로 주셔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생명의 양식과 그들의 거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전부터 있었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뜻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람들의 기업 곧 사람들의 소유로서 그들의 생명 양식이고 그들의 거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과 양식이 되시는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흔 내지 아흔의 평생을 사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기초적인고 필수적인 것은 의식주 문제이며 개인적으로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삶의 활동 범위를 향상하는 교통수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중에서도 우리 생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양식일 것입니다. 그다음이 집, 또 그다음이 의복, 마지막으로 교통수단일 것입니다. 양식은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필수 요소이기 때문에 어떤 것보다 더 우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을 상고해 보면, 그들은 아무런 거주지도 없이 충분한 옷도 소유하지 못한 채 걸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장막생활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양식도 없고 거주지도 없고 변변한 옷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는 광야, 생존하기 너무나 어려운 척박한 그 환경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 까요?

    하나님께서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 주신 만나가 그들의 참된 양식이 되었고 하나님의 장막이 그들의 장막과 함께 있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강렬한 뙤약볕에서 그들을 위한 그늘을 만들고 밤의 혹독한 추위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보호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장막]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땀 흘려 얻어야 하는 세상의 양식 대신에 하늘의 양식 만나를 주셨고 정착된 집 대신에 하나님의 거처와 함께 하는 장막 속에 거하게 했고 세상에서는 많은 옷들이 필요했지만 그들의 옷은 40년 광야생활 동안에 결코 해어지지 않았으며 세상은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시간을 단축해서 빠르게 목적지까지 이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곳을 따라가는 여정 속에서 매일매일 자신들의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고 듣고 경험하여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세상의 양식과 거주지와 의복 그리고 교통수단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먹을 양식이 없어 생명이 살 수 없는 척박한 광야로 그들을 인도하셔서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기르셨던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신명기 8:2~4,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 의복이심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벌거벗어 수치를 드러낸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우리의 죄와 불의를 모두 덮어주는 빛나는 의의 옷, 결코 해어지지 않는 의의 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그 옷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의의 옷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를 양식, 집, 옷, 교통수단으로 본다면,

    이 네 가지 요소 중 레위기 희년은 우리의 기업이 되는 땅의 회복을 통해서 우리의 양식과 거주지 집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을 우리가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생명의 양식으로 증거하며 그 양식을 먹을 때 우리가 참 진리이시며 참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거주지 곧 우리의 기업이 되는 그 거주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애굽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광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양의 피를 자신들에게 바르고 그 살을 양식으로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신령한 만나가 그들이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는 그 땅이 산출한 양식이 그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 양식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며 헛된 신을 섬기며 그들이 주는 음식으로 생명을 보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상 음식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을 먹게 하여 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향,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려고 택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그들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에덴동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데 우리의 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참 뜻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양식과 집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기업으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번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생명의 양식과 생명의 거처가 되기 위하여 사람의 소유가 되시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이유가 바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과 거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2,33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을 내려 주신다고 하시며 35절에서는 자신이 바로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떡이신 것을 증거하셨고 이는 하나님께로 온 그 생명의 떡이신 주님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므로 하나님께서 바로 그 떡이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참 생명의 떡이십니다. 생명의 떡일 뿐만 아니라 산 떡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의 산 떡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속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거처라는 사실을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요한복음 15장 4절에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니라고 하시므로 이 거처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식과 거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 우리의 생명의 양식과 생경의 거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거주지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한 참 생명의 양식이요, 우리의 참 거처이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주님을 먹어야만 하고 주님 안에 거해야만 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양식과 거처는 바로 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너희는 내 살을 받아먹어라, 너희는 내 피를 받아 마시라’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말씀을 육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오해가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고 생명의 음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먹고 마시기를 너무나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우리의 참 거처라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참 거처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우리의 참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먹을 때만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장막 옆에 그들의 장막이 함께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장막에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다른 지파와 달리 기업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친 제물이 그들의 생명의 음식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거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음식을 먹고사는 제사장의 삶이 바로 하나님을 소유하는 삶,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과 생명의 양식이 되는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갖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어야 살고 그분 안에 거하여야 안식과 누림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자녀에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게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거처 삼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름아닌 우리의 구속주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시며 이 세상과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분을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고 우리의 거처로 삼게 하신 것이 창세전부터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을 우리 인간이 먹고 그분을 거처 삼아 거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진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참 내용물로서, 참 실재로서, 참 기업으로서, 존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는 존재가 되도록 우리의 참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먹으라고 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생명의 양식이시고 또한 우리가 거하는 완전한 거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년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는 데 바로 희년 안에 거하는 삶, 곧 희년 안에 있는 삶이 계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먹는 삶,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리스 안에 거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먹지 않고 그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희년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희년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업이 되는 하나님을 잃고 가난해져서 생존을 위해 집을 떠나 하나님이 아닌 헛된 것을 섬기는 노예로 팔려 배고프고 아무런 만족과 기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업으로 얻어 우리의 영을 위한 생명의 양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배불리 먹고 우리가 우리 영의 거처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배부름과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희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9절부터 13절까지 희년이 도래한 때에 관한 말씀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 돌아와 기업을 얻은 땅에서 스스로 난 양식을 먹는 일과 그리고 거처가 되는 그 땅에서 사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희년 안에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우리의 집, 우리의 거처로 삼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집이 될 때 우리에게 참 만족과 안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처가 될 때 다윗의 고백처럼 그 거처는 우리가 피할 피난처요, 요새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 사탄과 세상과 죄로부터 오는 온갖 방해와 유혹과 공격을 막아주고 또 모든 환란 곧 강한 비바람을 막아주고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와 한낮의 뜨거운 열기와 온갖 질병을 막아주는 우리의 안식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편 91:2 개역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처가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 생명이 되실 때 우리는 배부름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였고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양식과 거주지로 주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그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 앞에 첫 사람 아담을 두셨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됩니다. 에덴동산은 첫 사람 아담이 거주하는 거처로 존재하였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가 먹는 생명의 양식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인류는 중요한 그 두 가지 요소 곧 생명의 양식과 거주하는 집이 반드시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바로 풍요로운 생명 양식을 제공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거할 거주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땅의 첫 번째 존재 이유는 생명의 양식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지 금 은 보석이나 각종 무기를 만드는 철광석을 산출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셋째 날에 물속에 있던 땅을 드러나게 하신 후에 곧바로 그 땅에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종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게 하셔서 동물들과 사람에게 필요한 생명 양식을 공급하게 하셨고 또한 에덴동산을 창설하셔서 그 땅에서 생명나무가 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땅은 동물들과 사람의 생명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을 내는 것이 그 존재의 주된 목적이며 특별히 첫 사람 아담에게 생명의 양식이 풍요롭게 산출되는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땅 에덴동산을 그에게 주시고 그 앞에 생명나무를 두신 것은 사람은 생명의 하나님을 끝없이 취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생명의 양식과 거처로 삼아 하나님의 안에서 살아갈 때에만 창조 목적에 맞는 행복하고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산이시고 거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바깥에서 살지 않고 에덴동산 안에서 살았습니다. 에덴동산 안에 있었을 때 에덴동산의 생명의 양식되시는 하나님, 거주하는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풍요롭게 누리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의 양식과 자신들의 거처가 되는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양식과 거처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과 생명나무 모두 첫 사람 아담에게 필요한 생명의 풍요와 평안과 안식의 누림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집, 에덴동산에 그가 함께 거하게 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 안에는 사람의 누림이 되는 생명의 양식과 생명의 거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바로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 참 거처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처음부터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처음에 에덴동산 생명나무에서 나는 생명의 양식을 누리며 그 땅을 거처 삼아 하나님과 함께 삶으로 생명의 풍요와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았지만 뱀의 간교한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취함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여서 타락하게 되어 아담은 하나님을 그 안에 소유하는 대신 뱀으로 변신한 마귀를 자신 안에 소유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마귀에게 그 마음과 정신이 점령당하여 사는 죄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기업 또한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취하여 하나님을 자신 안의 내용물로 채워야 했지만 아담은 선악과의 열매를 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는 그의 기업, 그의 소유 또한 그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모습이 바로 오늘날 모든 인류가 처한 불행하고 비참하고 허무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하고 있어 우리는 이전에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기업 또한 잃어버린 채 세상 속에서 저주받은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 안에 있었을 때 곧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기업을 가진 자들로서 생명의 양식과 거주하는 거처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주한 때에는 하나님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께서 제공해 준 거처에서 풍성한 생명 가운데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뱀으로 변신한 마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지식의 열매를 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된 인간 안에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담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탄을 그 안에 담은 인간]

     

    이는 아담이 하나님 대신 마귀를 그 마음에 둠으로써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모든 인류는 땅 위에서 죄의 멍에를 진 채 비참하고 소망 없는 삶을 사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기쁘고 즐거운 해, 희년을 반드시 맞아들여 하나님의 되찾고 그분의 기업을 회복하는 삶을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죄악이 가득하고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며 곳곳에 분쟁과 다툼 그리고 전쟁과 난리, 지진과 기근 등이 가득 차 있는 이 땅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유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임을 자각하여 희년을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회개하여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그처럼 주시고자 하는 희년의 복을 누리는 삶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희년은 죄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우리 인간들이 돌이켜 우리의 기업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바로 희년의 때에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이며 아버지와 모든 가족들이 함께 탕자의 귀환을 기뻐하는 그 기쁨은 돌아온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갖는 하나님 아버지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 모두의 기쁨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년의 기쁨은 돌아와 기업을 되찾은 한 사람만의 기쁨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교회의 성도들과 하늘의 천사들까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자들이 갖는 충만한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람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기업을 잃고 죄의 포로가 되어서 소망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비참한 삶 속에서 해방되어 돌아와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다시 찾고 희년 안에 마련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은 스스로 그 죄의 굴레를 벗고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 9절부터 13절 말씀에서 희년의 제도를 제정하셔서 오십 번째 해에 어떤 대가나 조건 없이 모든 주민들에게 자유를 공포하고 잃었던 자기의 소유지와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도록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계시한 희년의 도래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큰 나팔 소리로 선포하셨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실질적인 희년이 임하게 하시므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우리의 소유, 우리의 기업으로 되돌리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 분깃, 몫은 바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우리의 소유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소유였던 하나님을 우리가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떠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어 기업 또한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준비하신 기업을 우리의 소유로 되돌리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는 이를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에서 외견상 아버지의 집을 나간 탕자가 스스로 뉘우쳐서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이보다 앞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 등 15장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탕자를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목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잃어버린 탕자를 찾아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의 귀환에 앞서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이 먼저 있었고 목자의 음성을 들은 탕자 아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는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성령께서 이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돌아오게 하는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자신을 돌이키게 하는 목자가 필요한 이유는 탕자는 스스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는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이신 아들과 그분의 영의 역사를 통하여 탕자가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가 있었지 탕자 스스로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탕자는 세상과 죄와 마귀에게 사로잡혀 속박당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마귀의 손아귀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백 마리의 양 중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목자이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목자 아들은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 죽음 통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에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과 찾은 양들의 영을 치유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위해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그 사역을 담당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강도를 만난 자의 상처에 기름을 붓고 싸매주고 끝까지 보호해 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선한 사마리아의 모습에서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을 나간 탕자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마냥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돌아올 아무런 힘이 없는 그 탕자가 아버지께 되돌아올 수 있도록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영을 보내셨고 목자이신 그 아들과 그분의 영은 사역을 통해서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참 사랑을 보여주므로 탕자가 아버지에게 가졌던 원망, 불신, 불만 그리고 모든 오해들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완전히 해소시키는 등 탕자의 마음을 아버지께 돌이키도록 모든 여건과 환경을 세밀하게 조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목자 되시는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과 행하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찾으신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30년 동안의 인생의 삶과 3년 반 동안의 고난의 공생애 사역을 하셨고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목자 예수님은 33년 반 동안의 삶 속에서 우리를 찾아 하나님 아버지께 데려가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시고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하여 돌이켜 회개한 우리를 크신 긍휼과 자비로 구원하시고 끝까지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그분께 우리는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1장 14절에서도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 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목자 아들을 보내시고 영 하나님을 보내셔서 이 일을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우리를 향한 지극한 긍휼과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놀라우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얻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하여 우리는 감사하고 그분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일이 바로 희년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7,18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도들을 탄압하는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먼저 구원하시고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주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눈이 감겨 볼 수 없고 어둠 속에 거하던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고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복잡한 과정들과 험난한 길을 걷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 새 언약을 맺으심으로 우리에게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고자 하는 기업은 세상 기업과 달리 신성하고 거룩한 기업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가 본래 하늘 위에서 가지고 계셨던 그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 하늘에 속한 신령한 영적인 기업을 택함 받은 자들에게 베풀고자 창세전부터 이 일들을 계획하시고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 9절에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체현하신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기업을 분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에게 임하는 성령님은 신성하고도 거룩한 기업의 부분을 미리 조금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기업의 보증이 되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희년에 속한 기업의 부분을 조금 맛보게 하는 것이 오늘날 성령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희년에 속한 기업의 부분을 조금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한 기업에 대해 큰 소망을 갖게 되며 그 온전한 희년 안에 있는 우리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만족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신약 희년에 속한 그리스도의 풍성함의 일부를 조금 맛보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위로하고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하여 장성한 믿음과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성장하게 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천년 왕국 그리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 안에서 온전한 희년의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날에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 8절부터 13절의 희년 제도에 있어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잃어버렸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의 기업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26장 18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에서 빛으로 그리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 것이 바로 희년의 완전한 성취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올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기업을 소유받을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희년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탕자처럼 돌아와 기업을 상속받는 복에 참여하도록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희년의 기쁜 소식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가난해져 죄와 세상과 마귀에게 자신을 팔아버려 노예 된 자들에게 전파하여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기업, 그 분깃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기업을 잃어버린 자들을 긍휼히 여겨서 목자 아들과 영 하나님을 보내셔서 잃어버린 그들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로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끌어 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교회의 성도가 된 우리들은 우리들의 소유 곧 우리들의 분깃이며 몫이며 기업이신 하나님을 소유하여 하나님께로 오는 참 생명의 양식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처 안에서 복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데 이 삶이 바로 희년의 삶인 것입니다.

     

    희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풍성함을 누리는 삶이므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고 오직 풍요와 만족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기업을 얻은 자들로서 그리스도를 풍성히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며 오늘 말씀교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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