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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5:1~6:11/ 타락한 모든 사람의 영적상태는 일에 빠져있고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로서 멸시받고 있는 노예의 상태임말씀 나눔방 2025. 4. 22. 16:46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이번 시간은 여러분들과 누가복음 5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5:1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할 때에 그분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5:2 배 두 척이 호숫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시니라. 그러나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자기들의 그물들을 씻더라.
5:3 그분께서 그 배들 중 하나에 오르셨는데 그것은 시몬의 배더라. 그분께서 그가 뭍에서 조금 나아갈 것을 그에게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더니
5:4 이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너희 그물들을 내려 한 번 끌어당기라, 하시매
5:5 시몬이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6 그들이 이 일을 행하니 심히 많은 물고기가 잡혀 그들의 그물이 찢어지니라.
5:7 그들이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그들이 와서 자기들을 도와주기를 바라니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배들이 가라앉으려 하더라.
5: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
5:9 이는 그와 또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잡은 물고기들을 끌어당김으로 말미암아 놀랐기 때문이더라.
5:10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더라.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들을 낚으리라, 하시니
5:11 그들이 자기들의 배들을 뭍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린 채 그분을 따르니라.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가 갈릴리 바다라고 칭하는 그곳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서 생계를 위하여 일에 점유되어져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갈릴리 바다라는 사단의 진영을 암시하고 있는 그 세력에 사로잡힌 바 되어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지 못하는 자인 시몬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누가복음 5장에서는 5가지 방면의 사례들을 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첫 번째는 본의 아니게 이 가족들의 생계와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어찌할 수 없이 생업에 종사함으로 말미암아 일에
점유되어 있는 베드로를 비롯한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문둥병자에 대한 얘기가 5장 12절부터 16절까지 나오는데요.
5:12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다〔마 8:1-4; 막 1:40-45〕〕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5: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레 14:2 이하〕
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반역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의 결과로 나타나진 이 문둥병이라는 오염되고 냄새나고
얼룩진 사람을 깨끗이 씻으시는장면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고요..
세 번째로 누가복음 5장 17절부터 26절까지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5:17 〔중풍병자를 고치시다〔마 9:1-8; 막 2:1-12〕〕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5: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5: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5: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이 팔과 손, 머리, 다리 온전한 신체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워 있는 자로서 움직이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하는 자로서
아무 쓸모없는 그 중풍병자를 치료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활동하게 하시는 이러한 이 타락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사람들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멸시받고 조롱받고 거절당하고 있는 한 세리장이라는 어떤 높은 지위를 가진
자로 보여지는 세리장 마태를 부르셔서 그 멸시받고 조롱받는 그를 높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존중받는 그런 자로 곧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큰 아름다운 품성을 통한 미덕들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5:27 〔레위를 부르시다〔마 9:9-17; 막 2:13-22〕〕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②앉았는지라 〔헬, 기대어 누웠는지라
(유대인의 음식 먹을 때에 가지는 자세)〕
5: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그 이 제자들이 안식일 날 길을 가다가 배고파하는 제자들에게 밀 이삭을 따서 취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허기진
배를 채우게 하는 만족과 그리고 손 어우러진 한 사람의 병을 치유하심으로 사단에게 사로잡힌 바 된 그를 자유케 하여서 잘못 변형된
안식일의 규정을 아주 산산이 산산히 깨뜨리시는 장면이 누가복음 6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6:1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마 12:1-8; 막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6: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6: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삼상 21:6〕
6: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6: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6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마 12:9-14; 막 3:1-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6: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6: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6:10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6: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이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이러한 일에 점유되어지고 문둥병자가 되어서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지고
중풍병자가 되어져서 활동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받고 이런 멸시받는 그 세리 마태와 같은 사람 그리고
이 배고픔과 허기진 배와 그리고 손이 어그러짐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를 위하여 구주께서 만족함과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안식일의 규정을 깨뜨리시는 이 모든 장면들은 사실상 베드로라는 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난 전체적으로 타락한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은 5가지 방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진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각의 어떤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일어난 그런 일들이 아니라 사실상 베드로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이와 같은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이러한 과정과 발전을 통해서 구주 앞에서 참 만족과 참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은 베드로처럼 죄에 빠져 있고 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생업에 종사함으로 말미암아 일에 전념하고 일에 점유되어져서 본의 아니게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구주를 만나기 전에 타락한 우리들의 영적 상태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은 본의 아니게 사탄의 아주 교묘한 세상을 통한 구조적인 일을 통하여 음흉스럽게 생업에 열중하게 하고 그러한 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하게 오염된 자들이고, 그러한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는 본의 아니게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하는
중풍병자들이고, 세리 마태처럼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조롱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자들이며, 그리고 심지어는 손이 어그러진 손 마른
그 손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흑암의 권세 아래 놓여짐으로 말미암아 손이 말라 진 상태가 우리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의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생업에 종사하고 일에 점유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직업에 푹 빠져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갖지 못하는 그 베드로라는 첫 번째 제자들인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주님께서 고기를 잡는 생업에 매달리고 있는 타락한
사람들인 그들을 고기잡이에 관계된 기적들을 베풀어서 오히려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 바꾸어 주시기 위하여 부르셔서
이끄시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로부터 이끌림 받아서 부름받은 자들은 그때로부터 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럽혀진 그 문둥병자와 같이 오염된
자들이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씻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활동하지 못하고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들을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주님으로 부터 치료받고 그리고 그동안의 사단의 속박 아래 놓여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어둠 가운데 처해진 멸시받는 비천한 상태에 놓여 진 그 사람을 높여줌을 통하여 존중받게 하시고 그리고 배고픔과 노예의
생태에 있는 그들을 온전히 만족과 자유라는 것을 안식일날 의식을 관심하지 않고 실제적인 그들의 만족과 자유를 허락해
주시고 해방시켜 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가 구주를 통하여 온전하게 되는 이러한 영적 체험을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각의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수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방면을 통한 각각의 사람들이 이 한 방면만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면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는 마치 우리가 이 종합 선물 세트 연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처럼 타락한 영적인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이와 같이 보여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주에 의해서 친히 그 생업에
점유당하여 있는 우리를 구주께서 친히 이끄시고 그리고 문둥병자처럼 깨끗게 하여 주시고 그리고 중풍병자처럼 온전히 치료하여
주셔서 세리마태 처럼 존중받게 되는 자로 12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삼아 주시고 그리고 그 마지막 단계로서 완전히 만족을 얻고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바로 신성한 속성들을 지니신 구주의 인간적인 말씀과 행동과 그러한 모습들을 통하여 아름다운 품성의
미덕들을 통하여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펼쳐주시는 사역이 바로 누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기본적인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기잡이에 관한 기적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베풀어주심으로서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우리가 누가복음 5장 8절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갈릴리 바다에서 사단의 세력이 구축되어져 있는 그러한 장소에서 본의 아니게 일에 직업에 점유되어져서
거기에 빠져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제자들이었던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또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죄뿐만이 아니라
일에 점유당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없었던 아주 바쁜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문둥병자처럼 더럽혀진 오염된 나병
환자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타락한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일에 점유당해서 일에 바빴던 사람이고 이러한 죄에 빠지고
일에 점유되어진 사람들은 그동안의 삶의 시간들을 통해서 이 나병 환자처럼 부정하게 되고 오염되어짐으로 구주에 의하여 씻어지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중풍병자와 같이 침상에 누워 있어서 활동하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어떤 일을 할 수
없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우리들을 치유해 주시는 일을 통하여 함께 주님을 쫓아 일을 하게 하시고 함께 동행하게 하시는
것을 우리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일을 통해서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죄와 그리고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짐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부르심을 통하여 존중받게 하시고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높여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만족과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잘못 변형된 안식일의 규정을 산산히 깨뜨리시고 참 만족과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이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고 손이 오그라든 자를 온전히 고쳐주심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주님을 쫓아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자들로 만들어 주시는 이러한 일들은 모든 타락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상태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그 부르심을 받아 이끄심을 받아 구원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모든 사람들이
이 직업을 가진 베드로처럼 생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해방될 때 그가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나를 떠나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이 죄 가운데 있었다가 부르심을 받아 해방될 때 죄인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깨닫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마치 깜깜한 어두운 검은색의 천으로 커튼이 가려져 있다가 그 커튼이 살짝 걷어지게 될 때 찬란한 햇빛이 들어오면서 수많은 먼지들이
그냥 그 햇살을 통해서 비춰지는 것처럼 그 수많은 그동안에 보지 못했던 그 방 안에 있었던 더러운 것들이 한눈에 다 비춰 보여지는
것처럼 그 동안의 어두운 권세 아래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해방되어져서 생명의 빛이 비춰지는 순간에 즉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장면이 누가복음 5장 8절 말 씀인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해방되어지는 순간에 갈릴리 지역이라는 그 사탄의 세력이 구축되어지고 있는
그곳에서 주님께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그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 모두가
베드로처럼 죄인임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끄심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았을 때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순간에 우리가 그 어둠 가운데서
그동안의 권세 아래서 해방되어질 때 순간적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단의 흑암 권세 아래에 있어서 이 생업에 종사하고 일에 점유당해져 있었을 때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은 자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단의 흑암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지는 곧 자신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쫓아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할 수도 없고 주님을 위해서 동행할 수도 없던 그들이 바로
직업에서 해방받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간에 해방되어져서 주님을 쫓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자신이 생명의 빛 가운데 거하게
돼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는 자신들이 죄 아래 있음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베드로와 같은 그러한 체험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와 같은 체험이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다 가지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이 생업을 위하여 종사하고 있는 그 일에서 구주에 의하여 이끌림 받고 부름 받은 다음에는 바로 이 나병 환자처럼
씻음을 받게 되는 일들을 우리가 체험 받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에 얼마나 오염되고 마비되어 있음을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이러한 교제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받고
씻음 받게 된 후에는 우리가 얼마나 오염되고 얼마나 마비되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부정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주님에 의하여 씻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쫓아서 어떤 일을 할 수도 없고 동행할 수도
없고 함께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마치 중풍병자와 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로 이렇게 영적 상태가 그런 자들인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바로 주님께서는 또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그가 온전히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쫓아가는 삶
곧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할 수도 있고 또는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가거라
라고 하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베드로처럼 일터에서 끄집어내짐을 당하고 나병 환자처럼 온전히 씻음 받고 그 중풍병자처럼 주님을 쫓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바로 너의 모든 것이 마비되어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줌과 동시에 그 중풍병자를 치료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주님을
쫓아 가는 삶을 살 수는 있지만 그동안에 세리 마태 처럼 사람들에게 경멸받고 조롱받고 거절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아무 가치가 없는
자로 취급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임을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리 마태를 12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불러주셔서 높여주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네 가지 타락한 사람들의 모든 영적인 상태가 일에서 점유된 사람을 이끌어내어 주시고, 오염된 나병 환자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움직이지 못하고 마비되어 있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셔서 걷게 해 주시고, 멸시받는 세리 마태와 같은 사람을 불러주셔서
높여주시지만 그들이 진정 만족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이 오그라진 어떤 기능이 잘못되어져 있다는 것을 이 체험을 통해서 알게 하심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어떤 규정들에 매여 있어서 안식일이라는 의식 때문에 사람들을 오그라뜨리게 하는 자유스럽지 못하고 뭔가 옭아매고 뭔가 활동의 범위를 제한시키는 이 잘못 변형된 안식의 균형을 온전히 깨뜨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참 만족과 참 자유가 필요하다 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처럼 그중에서도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베드로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그를 직업에서 지금의 그 일에 점유당하여진 그 베드로를 완전히 이끄셔서 불러내셔서 직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시고 그리고 나병 환자와 같은 더러움과 오염된 것으로부터 씻어 주시고 그래서 환경을 바꿔주시는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고 우리를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처럼 마비된 자를 고치신 후에 주님 안에서 세리마태처럼 가치 있고 존중받고 높여진 자로 주님께서 친히 부르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이는 자가 아니라 그동안에는 성전 미문 앞에서 성전에 들어가고
나오는 자들에게 거지 옷을 입고 구걸하기 위해서 앉아 있었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덮는 낡은 옷이 아닌 새 옷과 낡은 육체가 아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육신을 가질 수 있는 우리를 덮는 새 옷으로 그리고 새 옷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는 우리를 채우는 새 포도주로
소유하게 하게 하여서 참 만족과 자유를 소유케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5장 36절부터 39절까지 이렇게 새 포도주와 그리고 새 옷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5: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
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라고 우리는 이러한 구주로 인하여 우리를 덮는
새 옷과 내적으로 또한 우리를 채우는 새 포도주를 구주를 통해서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동안에 어떤 전통과 구습과 안식일이라는 잘못 변형된 안식일에 우리를 묶어버리고 옭아매는 그런 묵은 규정들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 완전히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어서 사도행전 1장 2절에서부터 펼쳐져 있는 완전히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위하는
봉사자들이 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1:6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시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이 누가복음 5장 1절부터 11절까지 나오는 일에 점유되어져 있는 베드로의 그 사례들을 통해서 그 뒤에 줄곧 나타내지는
12절부터는 문둥병 걸린 자 그리고 세 번째로는 중풍병을 치료하는 구주 그리고 네 번째로는 멸시받은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높여주는
구주 그리고 사람들의 그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만족과 그리고 손 오그라진 그 활동의 제한을 받는 그 자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잘못 변형된 안식일의 규정을 깨뜨리는 이러한 다섯 가지 사례들이 한 사람의 여러 방면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지
각 사람의 각각의 방면의 상태를 묘사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5가지 방면의 사례들은 모든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일에 점유되어 생업에 점령당하여진 자지만 보통 사람들은 생업보다는 죄에 빠져 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죄에 빠져 있거나 또는 생업에 빠져 있는 자들 이러한 구조적인 어떤 패턴의 발전 단계를 통해서 한 사람의 여러 방면의 상태를
묘사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은 것을 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주께서 오셔서 일에 빠져 있는 사람은
이끌어내시고 그리고 이 문둥병자 같은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이 씻어주시고 중풍병자처럼 마비된 자에게는 친히 주님께서
치료해 주시고 그리고 멸시받는 세리 마태와 같은 사람에게는 친히 주님께서 긍휼과 사랑과 자비로 부르셔서 그 사람을 높여주시고
그리고 잘못 변형된 안식의 규정을 깨뜨려서 배부름과 자유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 모든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에 처해진 사람이기
때문에 구주께서 이와 같이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번 교제에서는 일에 점유된 베드로 곧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를 비롯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서 끄집어내셔서 불러내 주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에 대해서 교제를 나눴던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방면인 문둥병자를 씻으시는 사례를 조금 더 다루어 본다면 이 문둥병자를 구주께서 손을 대셔서 씻으시는 장면은 주님의
그 인간적인 아름다운 품성들 그분께서 그 누구도 제사장 레위인 하다못해 가족들까지도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까지도 그 문둥병이 걸린
사람을 만지지 못하고 오히려 격리시키고 구별시키고 분리시키는 그때에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고 만지시면서
그를 씻어주시는 그분의 모습과 그분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그 인간적인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품성들을 통한 미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하나님께서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구주의 그 문둥병자를 씻으시는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다름 아닌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간절한 이 문둥병자의 절규를 외쳤을 때 주님께서는 간과하지 않으시고 손을 내밀어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주님은 그가 온전히 되고 깨끗이 씻음 받는 것이 그 문둥병 환자 보다 더 간절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문둥병자가 된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멀리하여서 자신에게 혹시 해가 될까 봐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까 봐 격리시키고 단절시키고 분리시키지만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문둥병자를 매우 불쌍히 보시고 동정하셔서 내가 원하노니 네가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 이 말씀이 바로 이 주님의 아름다운 인간의 가장 최고 수준의 거룩한 그 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심을 볼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문둥병자는 하나님 앞에 죄를 가진 자로서 그 어떤 사람과도 전혀 접촉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사람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져서 그 문둥병자가 어디론가 길을 가고자
할 때 자신이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단절된 자요, 사람 앞에 격리된 자요, 사람으로부터 배척당한 자요,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분리된 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라고 이렇게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문둥병자 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종교적 생활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사람 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 문둥병자와 가까이하는 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 앞에 죄로 인하여 벌을 받은 그 죄가 옮겨진다 라고 생각해서 완전히 격리시켰던 그때에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그분의 그 정말 긍휼한 손, 그 자비의 손, 그 사랑의 손을 그 문둥병자에게 대시면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데 네가 깨끗함을
받아라 라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분의 그 인간적인 아름다운 품성의 미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언제 이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누가 복음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까?
바로 이와 같이 문둥병자에게 간절히 긍휼한 마음으로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네가 깨끗함을 받아라 라고 손을 내밀어 그
문둥병자를 만지실 때 신성한 속성들을 지니신 구주께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이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향한 긍휼과 불쌍함과 동정을 통해서 그분의 아름다운 그 품성의 미덕들을 통해서 바로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신성한 속성을 지닌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계시하는 누가 복음을 통해서 그분은 사실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셨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이 문둥병자를 향해서 정말 손을 내밀어 이 오염된 죄로 얼룩진 문둥병자를 만지심을
통하여 그분은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그 자비의 품성들을 통한 미덕들로 충만하셨고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사람의 문둥병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신성한 속성들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는 이 사례를 통해서 주님의 인간적인 아주 깨끗하고도 아름답고도 고상하고 거룩하고 정말 말할 수 없는
최고의 품성들을 지닌 미덕들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신성한 속성들인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한 속성들을 문둥병자를 고치심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문둥병자는 민수기 12장 1절부터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미리암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미리암은 아론과 모세의 누이인데 모세를 향하여 불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역의 마음을 갖습니다.
이 불순종하는 마음과 반역의 마음을 가졌을 때 바로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의 권위를 가지고 히브리 민족 곧 이스라엘 민족들을 지도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그 모세의 권위를 미리암이 거스리고 반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불순종하였을 때 즉시로 하나님 앞에 문둥병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12:1 〔미리암이 벌을 받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12: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12: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12: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2: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이 반역하는 마음과 불순종의 마음이 있을 때 문둥병이 찾아오는 것처럼 또한 이 반대적인 일들이 성경을 통해서 열왕기하 5장 1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이라는 문둥병 환자가 있었는데 그는 요단강 물에 7번 깨끗이 씻고 나오면 치유를 받고
깨끗해지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아만 장군이 걸린 그 문둥병은 순종으로 인하여 깨끗해졌습니다.
5:1 〔나아만이 고침을 받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5: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5: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5: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5: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찌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5: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5: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5:12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5: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반면에 미리암은 불순종과 반역의 마음을 가지고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문둥병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거스린 반역의 마음과 불순종의 마음을 가질 때 걸리고 그 반역의 마음과 불순종의 마음을 돌이켜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온전히 주님 앞에 복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깨끗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타락한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반역과 불순종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인하여 하나님 관점에서는 모두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문둥병에 걸린 자가 없죠. 어떤 사람은 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체 한
사람도 제외함 없이 모든 자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반역과 불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 하나님 앞에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문둥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친히 세상에 오셔서 그들의 반역하는 마음 불순종 하는 마음을 가진 그 문둥병이 된 자들을
주님께서 깨끗이 치유해 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부정하게 되어 이 문둥병이 유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종교적 생활로부터 격리가 되고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삶을 갖게 된다 라고
레위기 13장 45절, 46절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13:45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13: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온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둥병으로 가득한 나병 환자의 부정함과 그 병으로 가득 찬 그를 친히
손을 대시고 만지심으로 말미암아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는 것을 우리가 누가복음 5장 13절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깨끗함을 받는 그것이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둥병으로 오염된 그를 손을 대신 것은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큰 자비와 큰 긍휼과 큰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를 손을 내밀어 만질 수가 있으셨을까요?
문둥병으로 가득한 그를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손을 대셨다라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인간적인 그 품성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고상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품성들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였다는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교통 또한 회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문둥병은 전염도 잘 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병 병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전염이 잘 되고 오염이 잘 되고 손상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진 이 문둥병자를 깨끗게 치료해 주셨다 라는 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를 크게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타락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반역하는 마음과 불순종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문둥병에 걸린 자들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치부되기 때문에 문둥병에 걸린 모든 타락한 사람들은 다른 질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똑같이 치료를 먼저
받아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가 치료되는 장면이 누가복음 5장 17절부터 26절까지 나오는데 이 중풍병자는 모든 기능들이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들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그러한 온전치 못한 기능을 전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중풍병자들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신 하나님을 쫓아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할 수도 없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할 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 번째 방면의 사례를 통해서 그분께서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미덕들을 통해서 주님의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사람이신데 죄사함을 받게 하는 말씀을 이렇게 하였을 때 그 곁에 있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냥 막 웅성 웅성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 여기 있구나. 하나님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가 있느냐 그런데 사람인 이 예수라 하는 자가 감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죄를 용서하고 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하나님의 신성한 권위를 이렇게 모독하고 있구나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큰 소란이 일어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사람으로 오신 구주 안에 계신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신성한 권위를 행사하여 그 중풍병자의 근본적인 죄들을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신성한 능력을 행하셔서 외형적으로 나타난 결과인 중풍병자가 된 그 환자를 치료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의 방면을 통한 사례를 통해서 주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긍휼한 마음, 불쌍한 마음, 하나님이신 구주를
쫓아 그 어떤 일을 도무지 도모할 수도 없고 그 주님과 함께 길을 갈 수도 없는 움직이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하는 그에게 인간적인
아름다운 최고의 도덕적 품성을 가지고 최고의 아름다운 인간적인 미덕들을 가지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24절에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내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라는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풍병자를 통한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인간을 향한 간절한 그 긍휼과 동정심과 불쌍하게 여기시는
그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그 신성한 속성들인 하나님이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5장 24절에서는 바로 그러한 신성한 속성들인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행동하시고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적인 품성들을 통한 미덕들을 보여주시는 긍휼함과 동정심과 인자와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시는 그 인자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는 바로 사람의 형태로 사람의 모양을 지니신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셨지만 근본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지만 밖으로는 외형적으로 사람의 형태로 계신 분이지만 실제적으로 그분의 내적 안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셨다 라고 빌립보서 2장 6절 7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구주이신 분이십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신 그분이 바로 누가복음에 기록하고 있는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밖으로 보여지는 사람의 모양과 형태로 계신 것만 보고 그분을 거절하고 반대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권위를 오히려
행사한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여기고 있는 것은 그분 안에 계신 신성한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죄인들을 구할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용서할 하나님의 권위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할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죄들을 용서할 권한과 권위도 가지셨는데 그분께서 중풍병자를 대하시는 그분의
긍휼과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이러한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들 또한 지니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으로서 중풍병자의 죄는 용서하셨지만 인자로서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름다운 품성의
미덕들을 보여주시는 행동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펼쳐주시는 인자시라는 것을 단언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신성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소유하신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뒤에는 그것으로 종결시키고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에 그 사람의 죄 가운데 있고 일 가운데
점유되어져서 더럽혀짐으로 말미암아 문둥병자처럼 오염되어서 단절되고 격리된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중풍병자의 처지가 되어 있는 사람을 또한 온전히 치료하시고 이끄시고 씻으시고 치료해 주시고 또한 그동안에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있는 세리 마태를 불러주셔서 12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높여주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리 마태는 이 로마인들을 위하여 세금을 모으는 아마 높은 지위의 책임자로서 세리장이었던것 같습니다.
이 세리 마태는 유대인이었지만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비난받고 거절당하고 멸시받고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 받고 아주 그냥
사람으로 상종하지 않는 자신의 동족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빈축을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베드로처럼 고기를 잡는 기적을 베풀어서 베드로를 끄집어내 주신 것도 아니고 그냥 세리 마태는 세금을 징수하는 그러한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그냥 기적을 베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리마태는 따랐습니다.
어째서 그가 바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사람구주의 처음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 이가 열두 사도들 중에 한 사람으로
선택되고 지명되어지는 것은 바로 이 세리 마태가 동족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비난을 받고 조롱과 거절과 반대를 받고 멸시를 받고 아주
그냥 말할 수 없는 욕지거리와 빈축을 늘 동족들로부터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마태는 자기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그런 자들이 아니고서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쫓았다는 이 누가복음 5장 28절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그 예수님을 쫓게 하였던 어떤 이상한 신비하고도 놀라운 그 말할 수 없는 그 어떠한 힘이 있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금을 걷는 세리들은 특별히 세리들의 책임자였던 이 마태라는 사람은 유대 사람들 전체가 아주 말할 수 없이 조롱하고 손가락질하여서 사람 취급을 안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금을 징수하는 이런 자들은 로마 사람들보다도 더 악한 자로 여겨서 동족을 파는 반역자로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인들을 위해서 자기 동족들을 여러가지로 강탈하여 세금들을 모아서 바치고 나머지 또 이윤을 추구하는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유대 동족들은 모두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을 반역자 취급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경에 있었던 세리 마태를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고 모두가 거절하고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는
이 세리들 중에 한 사람인 세리 마태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누가복음 5장 27절에 나를 쫓으라 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어떤 특별한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그렇다고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처럼 고기를 잡는 희한한 그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그를 잡아 끄셔서 이끄시기 위하여 너는 나를 따르라 이 한 말씀뿐이었습니다.
어떤 기적도 없고 놀라운 말씀을 행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태가 예수님께서 너 나를 쫓으라 라고 말했을 때 나타난 그 신비하고 놀라운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여주신 긍휼 때문에 그렇습니다.
긍휼은 뭘까요? 사랑보다도 더욱더 부드러운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에 관해서는 예전에 제가 한번 교제를 나눈것 같은데요.
긍휼은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으시고 기쁨으로 맞이한 그것이 긍휼입니다.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인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돌아보시고 그가 무슨 지경에 빠졌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접촉한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사랑보다도 더 부드럽고 사랑보다도 더 달콤합니다.
사랑보다도 더욱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사랑보다도 부드러워서 그 부드러움으로 접촉하고 달콤함을 나타낼 때의 향기가 그 긍휼이라는
하늘의 그 사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태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따라오라 라는 그 말씀은 신성한 속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외형적인 사람의 모습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품성을 통한 미덕들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에 하나인 긍휼을 내보이는 것입니다.
긍휼은 부드럽고 달콤하고 감미롭습니다. 놀라운 사랑의 향기를 전파하고 벌이 꽃술에 침을 묻혀가지고 꿀을 만드는 것처럼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 오는 아주 달콤한 향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리장이었던 마태는 그 반역자 이상으로 모든 동족들까지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자신을 배척하고 자신을 격리시키고
거절하고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그때에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보이신 그 첫 번째 관문인 긍휼을
나타내셨을 때 나를 쫓아라 하셨을 때 그 세리 마태는 그 감동과 그 놀라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을 껏입니다.
그 예수님의 자신을 향해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그 안에 문둥병자 이상으로 나쁘게 여긴 그 유대인들 모두가 반역자로 여기고
있는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장인 자신을 예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특별한 애정을 가지시고 다가오셔서 사랑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 나를 쫓을래 라고 하신 그 말씀은 아주 부드럽고 달콤하며 아주 향기롭습니다.너무나 너무나 감미롭습니다.
이 감미로운 주님의 이 한 번의 부르심에서 우리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적인 아름다운 품성의 미덕들인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들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처럼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셨고 단지 마태를 말씀으로 나를 쫓으라 라고 단 한마디를 하셨을 뿐이신데도
그 한마디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수많은 말씀들을 그 세리 마태에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베드로처럼 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를 뿐만 아니라 멸시 받는 자 너처럼 조롱받고 배척을 받고 경멸받고 반역자 취급을 받고
문둥병자 이상으로 너를 거절하는 모든 동족들이 너를 거절하고 널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버릴 수가 없노라 라는 그런 사랑의 부드럽고도 달콤하고도 감미롭고도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그 말 한마디로 나를 쫓아오라 라는 그 말씀에 세리 마태가 완전히 매혹되어져서 28절에
보면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쫓으니라.모든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이것저것 판단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것저것을 계산을 해서 이윤이 될까 이것이 나에게 큰 손해가 될까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쫓은 것은 그 한마디
안에 수많은 자기 인생 속에 포함된 모든 슬픔과 애환과 모든 외로움과 그동안에 보이지 아니하던 눈물의 모든 것을 담아놓은 모습을
너는 나를 쫓으라 하신 긍휼의 말씀을 하여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이신 긍휼은 바로 사랑의 관문인 것입니다.
긍휼이 먼저 다가와야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의 형편을 살펴보는 것이 긍휼인 것입니다.
긍휼을 내보였을 때 그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다음에 자비의 마음인 여관에 데려와서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끝까지 책임져주라고 하는 지속적이고도 계속적이고도 끊임없이 책임을 다하는 그 사랑이 자비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사랑 앞에 반드시 긍휼이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긍휼이 없이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5장 29절은 바로 이 자기 앞에 자기 자신을 모두 이해해 주고 자기를 모두 품어주는 그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라고 5장 29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그 세리 마태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킨 것은 바로 마태를 향한 주님의 단 한마디 부름은 나를 쫓아라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긍휼의 호소였고 긍휼의 절규였고 그가 그만큼 세상에게 박탈당하고 세상에게 손가락질 당할 때 주님께서는 그에 반하여 그보다 더
큰 마음을 품으시고 그를 부르셔서 그 슬픔을 내가 다 알았노라.너의 그 박해 받고 그 반역자 취급을 받고 경멸당하고 사람들이 너를
멸시하고 빈축하였던 그 모든 것을 내가 알고 있노라. 이제 나를 따르라 우리의 형편을 모두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신성한 속성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 세리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5: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그가 잔치에 제자들과 예수님을 초대해서 잔치를 했을 때 사람들은 이게 부당하다며저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비방합니다. 그가 베푼 그 잔치는 나쁘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강탈해서 도둑질해서 모아놓은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를 위해서 벌인 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정당하지 않은 돈으로 잔치를 열었다고 경멸하고 경시하고 비방할 때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라고 의사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얼마나 세리 마태를 향해서 긍휼이 넘치시는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의하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없는 심판이 있다 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처지 멸시받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있는 이 세리마태와 같은 가련한 처지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오신 구주께서
신성한 속성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나를 쫓으라 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 긍휼의 호소와 자기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자기가 그동안에 박해 받고 인생의 삶을 산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예수님의 그 한마디에 마태의 마음이 깊이
감동되어져서 주님을 위해 큰 잔치를 예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주님을 위해서 잔치를 예비한 세리 마태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내적으로는 충일하고 외적으로는 충만함을
가지고 기쁨 가운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초대하여서 함께 잔치를 벌일 때 그 돈들은 유대 동족들의 세금을 착취하고 강탈하여서
빼앗은 돈으로 잔치를 하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렇게 같이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비방할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 때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는
반응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인간적인 미덕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고상하고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미덕들인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5장 30절 말씀을 통하여 불평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있느냐고 불평했을 때
건강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도 필요하나니 내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의사로서 사역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사라고 얘기하신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의사는 치료하는 자입니다.긍휼한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모든 정성과 모든 자기의 지식과 힘과 뜻과 정성과 사랑과 행동을 통하여 그를 살리기 원하는 것이 의사 이듯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심판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심판자는 때리는 것입니다. 벌을 주는 자예요. 행한 것에 따라서 그 결과로
공의로 심판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의사로서 치료하는 자로서 사역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바로 의사로서 건강한 자들에게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자들에게는 의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심판관의 심판은
하나님의 그 거룩한 공의를 따른 것이지만 의사의 치료는 공의를 잠시 덮고 긍휼과 자비를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과 자비는 곧 사랑은 공의를 덮습니다. 사랑과 공의는 양쪽 2개의 철도선을 따라 가지만 결국에는 공의를 앞서서 사랑이
먼저 가기 때문에 사랑은 공의를 덮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앞에 놓여진 첫 번째 관문인 긍휼은 예수님께서 이 세리 마태를 향해서 보이신 이 긍휼과 자비는 의사로서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에 따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신 주님께서 심판관으로서 이 불쌍한 사람인 이 세리 마태를 찾아왔더라면 유대 동족들처럼 강탈하는
자로 이 반역자 취급을 하여서 예수님께서도 경멸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관으로서 이 불쌍한 세리 마태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비난하고 거절하고 경멸하고 또 말할 수 없는 반역자 취급을 하고
멸시하고 손가락질 하기위한 심판관으로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의사로서 치료하시는 분으로서 긍휼을 가지신 의사로서
사역하기 위해서 세리 마태에게 오셔서 너 나를 쫓으라 라는 긍휼의 그 한마디로 회복시키시고 생명의 기운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서
그 세리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쫓을 수 있도록 하게 하시고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5장 36절부터 39절 사이에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비유를 들어 새 옷과 새 포도주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리 마태와 같이 멸시받고 조롱받고 반역자 취급을 받고 경멸받는 이러한 자들을 새 옷으로 덮어주셔서 그들의 부끄러움과
수치와 창피함을 모두 덮어주시고 또한 새 포도주로 채우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새 옷은 외형적으로 밖으로 우리를 덮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면 새 포도주는 내적으로 안으로 우리를
채워주시는 영원한 생명이신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신성한 속성을 지니신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덮으실 수 있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으로 우리를 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펼치시는 사람 구주의 인간적인 미덕들을 통한 신성한 존재의 행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오신 구주께서는 사람으로서의 모습과 사람으로서의 행동과 사람으로서의 이런 아름다운 품성들을 통한 미덕들을 통해서
신성한 속성들인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인간적인 미덕들로 사역을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6장 1절부터 11절에서는 이 잘못 변형된 안식일의 규정들을 깨뜨리셔서 사람들에게 만족함과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서 잘못
변형된 안식일의 규정들을 아주 산산히 깨뜨리시는 두 가지 방면의 사례를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배고파하는 제자들에게 배를 채워주는 생명의 양식을 상징하는 만족과 그리고 이 율법의 안식일의 규정들과 관습들과
어떤 잘못 변형된 여러 가지 안식일의 의식들을 통해서 손이 오그라져서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일할 수 없는 그 오그라진 손을
치료해 주시고 완전한 자유를 주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들을 깨뜨리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구약의 율법을 따른 그 예수님 시대에 이 종교 지도자들은 이 규정들을 잘못 판단하여 오용함으로 말미암아 잘못 변형되게
하여서 사람들을 오히려 올가매는 그러한 일들을 초래하게 됐던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로 오셨을 때 이 잘못 변형된 규정들을 관심하지 않고 사람들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셨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사람을 위해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잘못 변형된 안식일의 의식들을 통한 규정들을
의도적으로 산산히 깨뜨리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만족을 위해서 오셨다라는 말씀을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누가복음 6장 1절부터 5절까지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때 바리새인들이 이 일로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이 바리새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안식일에 왜 해서는 아니 될 일을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하느냐 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외형적으로는 의로운 행위만을 고집하는 이 바리새인들 눈에 안식일날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는
문제는 그들의 눈에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6:1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마 12:1-8; 막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6: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6: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삼상 21:6〕
6: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6: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그들은 그 당면한 사람들이 지금 허기져 배고파하는 것은 관심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는 이 의식과 규정만을 관심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고집하여서 예수님께 꼬투리를 잡고자 했을 때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실제적인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만족함에 대한
관심만을 가지셨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5절에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인자이신 그분께서
바로 그 안식일을 친히 제정하신 그 하나님이셨다라는 것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신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오신 구주의 신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처녀 마리아의 몸에 수태되어져 요셉과 마리아의 사람을 통해서 나신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사람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암시함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을 제정하신 그 당사자가 사람으로 오신 구주이셨고 그분이
안식일에 관하여 제정하신 것을 또한 바꾸실 권리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셨고 또는 그 안식일을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서 그렇게 해 놨지만
이제는 새 시대의 도래를 통하여 바꾸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구약 성경의 안식일에 관하여 제정한 그 모든 것을
친히 바꾸실 권리를 가지셨다는 것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만족을 위하여 잘못 변형된 안식일의 규정들을 산산히 의도적으로 깨뜨리신 다음에 또한
두 번째 방면의 사례를 통하여 6장 6절부터 11절까지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6:6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마 12:9-14; 막 3:1-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6: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6: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6:10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여기 6장 1절에서 6절까지 안식일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님께서 또한 바꾸실 권리가
있으셨다 라는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칠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오른손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손입니다. 왼손과 달라요 왼손은 세상 자기 자신의 생명의 유지와 보전을 위해서 쓰임 받는 손이라면
오른손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선용되어지고 사용되어져야 되는 손이 오른손입니다. 여러분 오른손입니다. 왼손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손을 내미니 그 손이 회복되었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긍휼과 동정의 마음을
똑같이 세리 마태에게 베푸신 것처럼 그러한 모든 것을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손마른 그 사람을 만지심으로 말미암아 회복시키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긍휼하신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자신의 긍휼과 동정을 통하여 치료하시는 능력을 보이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인간적인 주님께서 내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함에 그 손이 회복되었다라는 것을 통해서 두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동정을 베풀어서 손 마른 그 사람을 친히 회복시키십니다.
먼저 동정을 베풀고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정하는 사람으로오신 구주의 모습과 그리고 그를 회복시키시는
치료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두 가지 모두를 융합하여서 보여진 것이 바로 이 오른손이 마른
사람을 회복시킨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속성들이 예수님의 그 동정과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내 손을 내밀라 하심으로 말미암아 저가 그리
하매 그 손을 회복시키는 일들을 통해서 인간적인 아름다운 품성들을 통한 미덕들을 통해서 신성한 속성들인 하나님이 표현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방면의 예들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만족하게 해 주시고 잘못 표현된 안식일의
의식들과 규정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행할 수 없는 그에게 온전한 치유를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자유롭게 하여 주셔서
참 만족과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활동하시는 장면을 누가복음 6장1~11까지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5장 1절부터 6장 11절까지 다섯 가지의 여러 방면의 사례들을 포함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이렇게 이 베드로처럼 일에 점유되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하는 이러한 일에 빠져 있고 또 죄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둥병자처럼 오염된 자를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친히 씻어주시고 또 중풍병자처럼 그동안에
오염된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 앞에 반역하는 마음과 불순종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염되어진 사람을 깨끗이 씻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나하나 온전한 상태로의 구원을 위해서 발전 단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쫓아 주님을 위하여 일을 도모할 수도 없고 함께 걸을 수도 없고 동행할
수도 없는 그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걷게 하시고 그리고 멸시받고 조롱받고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반역자 취급을 받는 그
세리마태를 12제자 중에 한 명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높여주시고 그리고 노예 상태에 있는 오른손이 마른 사람을 자유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주시고 그리고 허기진 사람의 생명 양식을 허락해 주셔서 참 만족을 주시는 이러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영적으로
타락한 모든 사람들에 찾아오셔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해내셔서 봉사하도록 부르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이끌림 받아 부름받은 자들은 그동안의 삶을 통해서 온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럽혀진 오염된 문둥병으로
부터 주님께 친히 씻음을 받고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을 치료받고 세리 마태처럼 멸시받는 자를 주님께서 나를 쫓으라는 그러한 긍휼의 말씀을 통해서 높임을 얻는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배고픔과 노예 상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진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의 말씀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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