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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5:9~13, 누가복음 4:18~19/희년의 의의(희년은 일곱 안식년 후 다음 해인 제 오십 년임)말씀 나눔방 2024. 12. 18. 21:39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1편에 이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성취인 희년에 관한 말씀 교제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레위기 25장과 이사야서 61장에서 희년을 계시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초림 하셔서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 날에 해방과 자유를 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알리는 소리가 그들의 귀에 응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먼저 희년에 대해서 계시한 구약 레위기 25장 9절 ~ 13절, 이사야서 61장 1,2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희년을 선포하신 신약 누가복음 4장 18,19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번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13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레위기 25장 9~13절, 개역개정)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사야 61:1,2 개역개정)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장 18~19, 개역개정)
신약 성경 전체가 희년에 대한 말씀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의 선포이며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해방을 주는 것이기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약에 희년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서 수양의 뿔나팔을 붊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온 땅에 기업의 회복과 해방과 자유의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쁘고 복된 소식, 복음 전파는 구약의 희년이 계시했던 실제적인 희년, 은혜의 해가 도래함을 알리는 나팔소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이 30세쯤 되셨을 때 요단강에서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신 후에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는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그때부터 전파하신 주님의 천국 복음이 바로 온 세상에 울려 퍼져 해방과 자유를 선포한 희년의 나팔 소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하여 전파하신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외친 해방과 자유 그리고 기업의 회복의 선포였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해방은 원래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우리들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된 우리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업의 회복의 선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와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적인 생명의 땅을 잃어버려 지극히 가난한 자들이 되었지만 그 잃어버렸던 땅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대가 없이 되찾아 기업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관점으로는 희년은 하나님께 잃어버린 바 되어 하나님과 분리된 채 죄의 노예로서의 삶을 살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은혜의 해를 의미하며 우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희년을 은혜의 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해, 희년은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을까요?
한글 성경의 희년(禧年)의 히브리 원어는 요벨(יובל, yobel)이며 이것의 뜻은 ‘수양의 뿔나팔’입니다. 이 히브리어 요벨을 영어로 음역(音譯) 한 것이 쥬블리(Jubilee)입니다.
희년(禧年) 그리고 쥬블리(Jubilee)는 ‘몹시 기뻐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몹시 기뻐한다는 것일까요?
희년에 울려 퍼진 수양의 뿔나팔 소리는 자신의 몸이 팔려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속박된 몸이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또 조상들로부터 받은 기업을 잃어버려 지극히 가난해져 온갖 어려움 속에서 신음하던 자들이 그 땅을 기업으로 회복한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러한 희년의 제도를 통해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깊은 영적 의미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기업으로 받은 생명의 땅과 하나님 아버지를 잃어버려 영적으로 지극히 가난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죄와 사탄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서 소망 없이 신음하며 사는 처지였는데, 전적인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노예의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게 되고 잃어버렸던 기업 또한 되찾게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주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바로 신약성경 27권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사역을 하셨는데, 이것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탄에게 사로잡혀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자들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고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기쁨과 환희의 희년이 도래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 희년은 첫 사람 아담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너무나 좋은 생명의 땅,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에덴동산을 기업으로 얻어 아무런 부족함 없이 기쁨과 평안과 만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을 풍족하게 누리며 살았지만, 뱀으로 가장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은 생명의 땅을 잃어버리고 또 그 땅에서 쫓겨나 하나님을 잃어버려서 결국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된 채 아무런 소망과 평안과 기쁨도 없이 고통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자신들의 죄와 허물로 사탄에게 자신의 몸이 팔려 노예가 된 채 어둠 속에서 억압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생명의 땅이 회복되고 죄와 사탄에게 속박된 몸이 해방되는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전편에서 희년에 대하여 말씀을 나눴는데 오늘은 이 희년이 무엇인지 그 의의(意義)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여러분과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희년이 되면 전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수양의 뿔나팔 소리를 크게 냄으로써 기업을 잃어버린 자들, 종이 되어버린 자들이 기업을 되찾고 해방과 자유를 얻는 기쁨과 환희의 희년이 도래했다는 사실을 온 땅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희년의 뿔나팔]
우리가 희년을 이해함에 있어 희년의 나팔 소리가 언제 이 세상에 울려 퍼졌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 25장 8절 말씀에서는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라고 일곱 번의 안식년 곧 사십구 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일곱째 달 열흘날 속죄일에 전국에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0절에서
“너희는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말하고 있어 바로 오십 번째 해에 희년이 도래하고 그때에 잃었던 자신의 기업이 회복되고 자신의 몸이 해방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레위기 25장에서 말하고 있는 희년은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1,2절 말씀을 읽으시므로 희년이 그들의 귀에 응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레위기에서는 희년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사야서에서는 은혜의 해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은혜의 해, 희년에 발생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속은 탕자의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는 모든 신약 성경을 집약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계시의 말씀으로 은혜의 해인 희년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은혜의 해, 희년은 하나님 아버지를 잃어버린 자가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잃어버려 마치 죽은 자 같았던 자신의 백성들을 주님께서 받아들이신 해가 바로 은혜의 해, 희년이고 우리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가 우리가 탕자처럼 주님께 되돌아가는 해가 바로 은혜의 해,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편에서는 잃어버린 자를 받아들이는 해, 우리 편에서는 아버지 집을 떠나 이 세상과 죄와 사탄에게 속한 삶을 살다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해가 은혜의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희년은 거룩한 해요, 은혜의 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25장 8절부터 10절까지 말씀의 순서를 보면, 먼저 8절에 일곱 안식년 곧 사십구 년을 계수하는 방법을 언급한 뒤에 9절에서 일곱째 달 십일 속죄일에 뿔나팔을 불라하고 이어서 10절에서 오십 번째 희년에 행하는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9절 속죄일에 뿔나팔을 부는 이야기는 8절 사십구 번째 해와 10절 오십 번째 해 사이에 언급되고 있어 희년을 알리는 뿔나팔을 사십구 번째 해에 분다는 것인지 아니면 오십 번째 해에 분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과연 9절의 뿔나팔은 사십구 번째 해의 속죄일에 불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오십 번째 해의 희년에 불라는 것일까요?
그냥 보편적인 우리의 생각으로는 오십 번째 해 희년이 시작되는 시점에 희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25장 9절에서는 희년이 시작하는 그때에 나팔을 불라고 되어있지 않고 칠월 십일 속죄일에 희년의 나팔을 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8절~10절 말씀을 자세하게 묵상하게 되면 그 나팔을 부는 때가 일곱 번째 안식년이 되는 해 곧 사십구 번째 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일곱 해를 주기로 돌아오는 안식년은 마지막 일곱 번째 해인데, 그때 그 땅으로 안식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씨를 뿌리고 포도나무를 관리하고 땅의 소출을 수확하는 일을 절대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희년을 제정하신 이유가 가난과 구속과 억압과 슬픔 속에 있던 자들이 잃어버렸던 기업을 회복하고 구속되었던 몸이 해방되어 자유를 찾아 모든 사람들이 기쁨과 평안과 만족 가운데서 은혜의 안식을 누리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지치고 힘든 삶 곧 자신과 가족들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서 땀 흘리며 몸이 부서져라 일해야 하는 생존을 위한 모든 일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여전히 이러한 일들 가운데 속박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창조 시부터 인간에게 주시려는 참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결코 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활동 곧 씨를 뿌리고 경작하고 추수하는 일들조차도 금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는 안식에 참여하는 일이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참된 생존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은 땅의 안식이었고 더불어 사람의 안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안식년의 본래 취지가 땅을 위한 안식임에도 이를 간과하고 사람들이 경작활동을 할 수 없기에 사람을 위한 안식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희년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들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사탄에게 팔려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어 자유를 찾게 되었다는 의미는 잘 인지하면서도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기업으로 주신 잃어버린 그 땅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간과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희년의 소식 곧 참된 복음의 전파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것인데, 먼저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소유하는 일 그리고 탕자의 비유처럼 아버지께로 되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편에서는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되찾는 일, 아버지 편에서는 그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아 아들로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희년의 본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는 희년은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바 된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되돌아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되찾는 은혜를 말하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잃어버렸던 탕자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아들을 품꾼이 아닌 아들로 다시 받아들이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전에 원수 관계였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완전히 회복되어 온전한 사랑과 신뢰의 끈으로 맺어진 아버지와 아들로서 영원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함께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로새서 1:20~22 개역개정)
그래서 희년은 은혜의 해요, 진실로 거룩한 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년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큰 나팔 소리로 알리는 때는 오십 번째 해가 시작되는 첫째 날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계시된 안식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부터 매 일곱 번째 해를 안식년으로 삼아 지켰습니다. 이때는 사람뿐만 아니라 땅도 안식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여섯 번째 해까지는 땅을 갈아 씨를 뿌려 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일곱 번째 해 안식년에는 땅과 사람 모두에게 휴식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함을 온전히 누리게 하여 참 안식을 갖게 하였다는 것을 레위기 25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8절에서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하는 데 있어서 매 일곱 번째 해가 안식년이고 그 안식년이 일곱 번째 이르는 해가 사십구 번째 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칠월 십일 속죄일에 전국에 기업의 회복과 몸의 해방과 자유를 알리는 희년의 나팔을 크게 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년의 나팔을 부는 속죄일은 어떤 날일까요?
속죄일(욤 키푸르, Yom Kippur, יום כיפור)은 유대 종교력으로 칠월 십일에 해당하는 절기입니다.
그때는 거룩한 성소를 위해서 속죄하고 회중의 성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회중의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국가적으로 속죄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레위기 16:29~34)
또 이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회를 열어 스스로 괴롭게 하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려야 했고 아홉째날 저녁부터 열흘째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켜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만일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는 자들은 백성중에서 끊어질 것이고 안식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그 백성 중에서 멸망시킬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시므로 그날을 온전히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레위기 23:27~31)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그때 처음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이는 천국 복음의 은혜에 앞서 죄에 대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17, 개역개정)
그렇기 때문에 속죄일에는 모든 백성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여 그들의 죄를 사함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지 않는 자들은 속죄되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고 레위기 23장 27절에서 엄히 경고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온 백성이 속죄되는 칠월 십일 속죄일에 구속의 은혜를 알리는 희년의 나팔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크게 울려 퍼지도록 한 것은 너무나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는 희년이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기쁨과 평안과 안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인 것을 보여줍니다.
칠월 십일 속죄일은 한 해 후반부의 첫 번째 달에 속한 절기로서 레위기 25장 9절은 이 날에 희년의 나팔을 불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나팔을 부는 때는 일곱 번째 안식년 곧 사십구 번째 해에 속한 속죄일일까요? 아니면 오십 번째 해 희년에 속한 속죄일일까요?
우리가 이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를 통해서 희년을 명확히 정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5장 25장 10절에
“너희는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희년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희년이 되면 자신의 잘못과 실수로 남에게 팔아버려 남의 소유가 되어버렸던 그 땅을 다시 찾는 기업의 회복이 있고 또 극심한 가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팔아 종 되었던 자들이 해방되어 자유인의 신분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일 곧 하나님을 잃어버려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자들이 해방되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몸의 해방과 자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십 번째 해 희년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한 것은 당연히 한해 전체를 거룩하게 하라는 의미이므로 희년이 그해 첫날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너무 명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년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을 부는 때는 희년에 속한 속죄일에 부는 것이 아니라 일곱 번째 안식년인 제 사십구 번째 해 칠월 십일에 큰 나팔 소리로 전국에 은혜의 해, 희년이 곧 다가옴을 선포하여 거룩한 해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육 개월 뒤, 오십 번째 해 첫 번째 달 첫날에 희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또한 10절 말씀에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은 그 오십 번째 해에 도래하는 그 희년을 신성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희년이 전하는 메시지는 잃어버린 땅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기업으로 주셨지만 그가 하나님께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그 복된 땅, 복낙원(福樂園)은 잃어버린 땅, 실낙원(失樂園)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복된 땅, 복낙원을 잃어버려서 지치고 억압받고 슬프고 허무한 삶 속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복낙원을 우리 인간에게 다시 찾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을 고통스럽게 했던 실낙원의 삶 속에서 해방되어서 자유자로서 진정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복락원의 삶으로 회복되는 해가 바로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희년이 담고 있는 핵심 주제는 잃어버린 그 복된 땅을 다시 찾는다는 것 그리고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레위기 25장 10절에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그 희년의 해를 신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원래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거룩한 본분이었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그 복된 땅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어서 사탄의 속한 세상 왕을 섬기며 그 왕을 위해서 일을 하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섬기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세상 일을 하며 사는 부정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기업과 본분을 소홀히 하여 그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잃어버려 가난한 자가 되었고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섬기며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우리 인간에게 그 신성한 기업을 다시 찾아주고 신성한 본분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그들이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갖게 하신 때가 바로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이 희년에는 모든 백성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얽매여야 했던 세상에 속한 부정한 일들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기업과 본분을 되찾아 오직 하나님께 속한 신성하고 거룩한 일에 참여하는 해이기 때문에 다른 해와 달리 그 해는 거룩한 해였고 신성한 해였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희년의 도래를 알리는 수양의 뿔나팔 소리는 일곱 안식년의 때인 사십구 번째 해의 칠월 십일 속죄일에 전국에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여섯 달 뒤에 도래하는 거룩한 해 희년이 곧 다가옴을 알리며 세상 속에 살면서 부정하게 된 백성들에게 다가 울 거룩한 해, 희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나팔 소리였던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나팔소리를 듣고 돌이키는 자에게는 희년이 은혜의 해가 되지만 그 경고의 소리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해가 된다는 것을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팔을 여러 가지 목적으로 부는 것으로 나옵니다.
전쟁에 출전할 때에, 총회를 소집할 때, 이스라엘 진영을 이동할 때 그리고 희락의 날과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 나팔을 불고 또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도 천사들이 나팔을 크게 불었으며 적국의 침략 등 어떤 위급한 상황을 경고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래서 칠월 십일 속죄일에 불었던 나팔은 육 개월 뒤에 도래하는 오십 번째 해, 희년을 예고하는 의미와 더불어 그 거룩한 희년을 맞이하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나팔 소리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유대 전통에 따르면 칠월 일일 나팔절에 나팔을 일백 번을 부는데 그때 네 가지 방법으로 나팔을 분다고 합니다.
첫 번째, 나팔을 길게 한번 부는 것은(테키아) ‘왕이 오신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 바밤~바밤~바밤 세 번을 부는 것은(쉐바림) ‘돌이켜 회개하라’는 의미, 세 번째, 나팔을 짧게 아홉 번 ‘빠빠빠빠~’ 급하게 끊어 부는 방법(테루아)은 ‘왕이 곧 오신다. 깨어 있으라’라는 뜻,
네 번째, 나팔을 강하고 길게 한번 부는 것(테기아 하가돌)은 ‘왕이 오셨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희년의 나팔을 오십 번째 해에 속한 칠월 십일 속죄일에 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그때는 희년이 이미 도래하여 땅과 사람이 안식을 취한 지 육 개월이나 지난 시점으로 뒤늦게 희년의 도래를 알리는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안식년 곧 사십구 번째 해 칠월 십일 속죄일에 도래할 희년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속죄일에 희년의 나팔은 부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희년의 선포 곧 복음 전파를 시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신 후 부활 안에서, 부활을 통하여, 부활로 말미암아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인간들에게 그 영을 통해 임하시므로 참 희년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도래하는 참 희년을 알리기 위해서 공생애 동안 복음전파 사역을 하셨던 것이며, 이러한 주님의 복음 전파 사역을 구약 성경에서 예표한 것이 희년 육 개월 전 사십구 번째 해의 칠월 십일 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듣도록 울려 퍼진 나팔소리였다는 것입니다.
희년 육 개월 전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전국 방방곡곡에 크게 내어서 모든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오십 번째 해, 해방과 자유가 있는 기쁨의 희년을 예고하고 아울러 자신들의 모든 죄를 회개하여 속죄함을 받게 함으로써 다가오는 희년을 소망하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 개월 뒤 그 희년이 도래했을 때 그들이 아무런 부끄럼 없이 신성하고 거룩한 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린도후서 7:1, 개역개정)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 10:10, 개역개정)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자면, 레위기 25장 10절의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에 희년 곧 구속의 때가 도래하기 육 개월 전인 사십구 번째 해 칠월 십일 속죄일에 희년의 나팔을 전국에 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구속의 때, 신성하고 거룩한 희년이 곧 도래한다는 소식을 그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큰 나팔 소리로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다가올 그때를 준비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구속의 때 희년에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땅을 지배하던 사탄과 그의 세력들이 완전히 멸망됨으로 말미암아 다시 찾은 땅이 거룩하게 되고 죄와 사탄의 노예로 살던 우리도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를 얻고 거룩하게 된 존재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참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이 희년의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 3년 반의 공생애 기간에 그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큰 나팔 소리로 “회개하고 속죄함을 받아 다가오는 희년을 맞이하라”라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고 마지막에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 사역을 마치셨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17, 개역개정)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먼저 공생애를 통하여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기까지 부르짖었던 그분의 간절한 외침이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희년을 알리는 큰 나팔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외치신 그 희년은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 주는 영이신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누리는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통하여 일을 하시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높이 달려 죽으시기까지 천국복음 곧 희년의 도래를 선포하셨고 죽으신 뒤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주는 영으로서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잃었던 생명의 땅, 그리스도를 다시 찾고 잃었던 하나님을 다시 찾는 참 희년이 실제적으로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갖지 아니하시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과연 희년이 도래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30년 동안 온전한 삶을 사셨고 그 온전한 삶을 바탕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셔서 천국 복음인 희년의 도래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의 선포와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달려 죽으신 일련의 일들이 무엇을 전파하고 무엇을 이루기 위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공생애와 죽음을 통해서 외치신 복음은 죄 아래 갇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구속은 바로 죄와 죽음에 갇혀 그것들의 노예로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해방하여 자유자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서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참 희년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한 복음선포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들이 먼저 실행되지 않았다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는 일 곧 참 희년이 실제적으로 도래하는 일 또한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 9절 말씀, 칠월 십일 속죄일에 전국에 크게 울려 퍼졌던 나팔소리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한 복음선포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의 과정들을 통해 외치셨던 복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희년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진 때는 오십 번째 해가 아니라 희년이 도래하기 육 개월 전 곧 사십구 번째 해 칠월 십일 속죄일에 울려 퍼졌다는 것입니다.
참 희년의 도래를 경고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들은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회개하고 속죄받는 일들이 먼저 있고 뒤이어 참된 희년의 도래 곧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일이 도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고 희년을 경험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거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이나 또는 성장한 어느 시점에 전파된 복음, 그 희년의 나팔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바로 회심하여 바로 희년에 참여한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해진 복음을 들은 후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회개하고 속죄함을 받은 후에 상당한 기간 동안 준비되고 성숙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 다가오는 거룩한 희년,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월 십일 속죄일에 희년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다가올 거룩한 희년을 맞이하기 위하여 속히 회개하고 속죄를 받으라는 것이며 남은 육 개월 기간은 그 거룩한 희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기간 곧 죄를 용서받은 자들이 거룩한 희년에 참여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년을 알리는 나팔이 울려 퍼진 때는 희년이 도래하기 육 개월 전인 사십구 번째 해 칠월 십일 속죄일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그 오십 번째 해 칠월 십일 속죄일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첫 달 첫날부터 거룩하고 신성한 희년이 시작되어서 모두가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신성하게 되는 때 곧 희년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는 때는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후에 교회를 통하여 준비 기간을 거친 다음에 참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참 희년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년 안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레위기 25장에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땅, 우리의 기업을 회복하고 남을 섬기는 종이었던 우리가 해방되어 자유인의 신분을 얻고 가족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돌아온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 탕자는 아버지 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상속받을 땅을 잃어버렸고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다른 가족들과도 완전히 분리되어 아버지와 가족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가 모든 것을 잃고 가난해져 지극히 빈궁한 처지가 되었을 때 회심하여 자신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돌아오는 탕자를 발견한 그의 아버지는 살아 돌아온 자신의 둘째 아들을 얼싸안고 반기며 그 탕자에게 미리 준비한 제일 좋은 옷을 입혀줌으로써 자신의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여 주고 또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줌으로 그 땅의 상속자임을 확인해 줍니다.
[돌아온 탕자]
이 이야기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므로 자신의 기업이었던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기업으로 받은 생명의 땅,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탕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는 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하며 그 탕자가 좋은 옷을 입고 반지를 꼈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들의 신분으로 회복되고 그 잃어버린 생명의 땅을 기업으로 다시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십 번째 해 희년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희년의 해가 거룩하고 신성하게 되어야 한다는 걸까요?
그것은 오십 번째 해 희년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거룩하고 신성한 영역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힘들게 일하고 자신의 몸을 팔아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세상에 속한 일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어그러진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시는 그 거룩하고 신성한 영역의 삶은 죄로 말미암아 발생된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 아래 거하며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곳은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고통당하는 자, 슬픔이 있는 자가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아래 참 기쁨과 평안과 만족 가운데 충만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십 번째 해 희년은 바로 세상의 죄악 된 삶 속에 살던 우리가 해방되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하고 신성한 영역,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십 번째 해 희년에는 세상에 속한 부정한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삶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그 희년이 거룩하고 신성한 해인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13절에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희년에 있는 일은 먼저 남의 소유가 되어버린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 그 땅을 잃어버렸습니까?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그 기업으로 받은 땅에 대한 권리를 남에게 넘김으로써 일정기간 동안 남의 소유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따라 오십 번째 해에 그 땅을 산 사람으로부터 해방을 선포하심으로 당초 기업을 받은 자에게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땅은 거룩한 자만이 기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부정한 민족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그 거룩한 가나안 땅을 잃어버려 그 땅은 칠십 년 동안 남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보응으로 일정기간 동안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는 것으로 그 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셨지만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영원히 남의 손에 두기 원치 아니하셔서 그들이 회개하여 충분히 거룩하게 되었을 때에 남의 땅에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고 그 거룩한 땅 가나안으로 귀환하게 하여 그 거룩한 땅을 기업으로 다시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년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던 거룩한 땅을 자신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자들이 하나님께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고 사탄에 속한 영역 안에서 노예로 살던 삶에서 해방되어 잃어버렸던 그 거룩한 땅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희년에 기업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땅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은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죄에서 해방되어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 곧 우리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둘째 아들 탕자가 그의 아버지를 떠났을지라도 그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그 둘째 아들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고자 한 그 아버지의 정한 뜻을 결코 돌이키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기업으로 받은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갔을지라도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우리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자 한 그 뜻을 결코 돌이키지 않으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죄에서 해방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 땅을 우리에게 다시 기업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 23절에서는 그 땅의 영원한 소유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며 기업으로 받은 그 땅은 영구히 팔지 못한다고 하였고,
24절에서는 만일 형편상 어쩔 수 없이 그 땅을 팔았다고 할지라도 그 땅을 언제든지 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기업을 얻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패나 실족으로 인하여 지극히 가난해져서 어쩔 수 없이 그 기업을 팔아버렸고 여전히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서 그것을 무를 수 없게 되었을지라도 그 땅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오십 번째 해 희년에 그 기업을 판 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다시 그 땅을 되찾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업을 잃어버린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기업을 얻고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찾은 그 기업을 다시는 잃어버릴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업으로 얻은 땅의 소유자가 사정상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일시적으로 남의 손에 넘길 수 있을지라도 생명의 기업이 되는 그 땅을 영원히 넘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하나님의 풍요로운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생명의 땅 에덴동산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뱀의 거짓말에 속아 실족하여 하나님과 그 복된 땅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몸까지 팔아 죄와 사탄을 섬기는 노예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스스로는 결코 그 비참한 저주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참된 가치를 알아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임하게 하셔서 그들을 죄와 사탄으로부터 해방하여 자유자가 되게 하시고 또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그 복된 땅을 기업으로 다시 얻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풍요로운 생명 속에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을 기뻐하신 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실족하고 실패하여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을 팔아서 남의 손에 넘어가고 또 상황이 더 악화되어서 자신의 몸까지 팔아서 남을 섬기는 종이 되었을지라도 돌아오는 오십 번째 해에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의 몸이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잃었던 땅을 다시 기업으로 회복하여 하나님의 풍요로운 생명 속에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 희년의 의의(意義)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나의 실수와 잘못으로 팔아버린 땅의 회복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몸까지 타인에게 팔아 그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 가족을 떠나게 되었던 자들에게 그 종의 신분에서 해방과 자유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25장 39절~4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누가 가난해져서 같은 동족에게 몸이 팔린 경우에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자신을 섬기게 하고 그 희년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그의 가족과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하나님의 종이기에 남을 섬기는 종으로 팔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희년을 정의하는 핵심 단어는 회복 그리고 해방과 자유입니다.
모든 것이 거룩하고 신성하게 되는 희년은 잃어버린 땅에 대한 회복 곧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뿐만 아니라 죄와 사탄의 노예로 살던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우리의 잃어버린 생명까지도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하고 신성한 희년은 신약 성경 27권이 전하는 말씀들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8절에서는 오십 번째 해 희년을 계수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희년을 계수하는 기준은 안식년입니다.
매 칠일을 주기로 마지막 일곱 번째 날이 안식일인 것처럼 매 일곱 해를 주기로 마지막 일곱 번째 해가 안식년입니다. 그 안식년이 일곱 번째 되는 해가 사십구 번째 해이고 그다음 해, 오십 번째 해가 바로 기쁨과 즐거움의 희년입니다.
이처럼 안식년을 기준으로 희년을 계수하고 있어 그 희년 안에는 안식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곱 안식년이 지나고 오십 번째 해, 기쁨의 희년이 도래하면 그 해 첫날부터 그 땅과 사람들에게 안식이 시작되고 또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잃었던 기업을 회복하고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오십 번째 해 희년은 매 일곱 해를 주기로 돌아오는 안식년은 아니지만 희년 또한 안식년이기에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에 오는 여덟 번째 안식년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완전한 안식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매 여덟 번째 날이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날인 것처럼 희년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해, 죄와 사탄에게 속했던 모든 것들이 해방과 자유를 얻어 새롭게 되어서 거룩하고 신성해지는 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19, 개역개정)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시록 21:5, 개역개정)
이렇게 오십 번째 해 희년 곧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희년의 도래를 수많은 안식일과 일곱 안식년을 통해서 끝없이 예고해 왔던 것입니다.
희년은 성령이 강림하신 오순절을 계수하는 방법과도 아주 유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섯째 날 유월절에 죽으시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시고 그다음 여덟째 날에 죽음에서 해방되어 부활하심으로 그분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여덟째 날부터 계수하여 일곱 안식일이 지난 그다음 오십 번째 날이 바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의 생명의 씨가 심령에 떨어져 충실한 열매으로 자란 자들을 수확하는 오순절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 안식하신 뒤에 여덟째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여덟째 날을 부활의 날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계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희년은 일곱 안식년이 지난 다음 해 곧 오십 번째 해로서 순서상 여덟 번째 안식년에 해당하는데, 이 여덟 번째 안식년이 부활로 완성되는 완전한 안식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희년을 부활로 완성되는 완전한 참 안식 안으로 들어가는 삶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완전한 참 안식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어 안식일에 안식을 가지신 뒤에 그다음 날 한 주의 시작인 여덟 번째 날에 장사된 지 삼 일 만에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참 자유를 얻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참 자유를 얻는 것이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오십 번째 해 희년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그래서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희년의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생명 주는 영’을 그들에게 부어 주셔서 근본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은 죄의 본성을 가진 육체의 삶과 그 결과인 죽음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 없는 참 안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은 죄와 사망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충만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안식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 안에 사는 희년의 삶을 간절히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천연적인 생명의 본성을 좇아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희년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희년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채 여전히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희년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까요?
희년은 일곱 번의 안식년을 거치고 그다음 해 오십 번째 해에 도래하는데 먼저 안식년이 있은 다음에 희년이 도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음날 안식일에는 안식을 하시고 또 그다음 날 여덟 번째 날에 죽음에서 부활하시므로 희년이 도래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안식 뒤에 희년이 오며 그 희년은 부활로 말미암아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희년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십 번째 해 안에 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어 삼 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 주는 영이 되셨는데 이 생명 주는 영 안에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는 희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희년을 여러 관점에서 말씀드렸는데, 희년의 의의(意義)에 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하여 거룩하고 복된 에덴동산의 땅을 잃어버리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담의 후손들로서 타락한 세상 속에서 죄와 사탄에 사로잡혀서 노예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십 번째 해 희년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고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된 신분에서 우리가 해방되고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 신약 성경 27권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희년의 의의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허리에서 난 자들로서 희년이 도래하기 전 49년 동안 물려 받은 땅을 팔고 또 우리의 몸까지 팔아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된 채로 아무런 희망 없이 죄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희년이 도래하기 육 개월 전 속죄일에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전국 방방곡곡에 큰 나팔 소리를 울려 기쁨과 은혜의 희년이 도래함을 선포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잃어버렸던 복된 땅을 다시 찾아 소유하게 하시고 생명마저 빼앗겨 노예로 사는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통해서 아담의 허리에서 나서 죄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옛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더 이상 죄가 없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옷을 입은 영광스러운 새로운 존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개역개정)
바로 이것이 구약 성경 레위기에서 계시한 희년에 이루어질 실제 모습이며 이러한 모든 일들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희년의 큰 은혜를 깨닫고 너무나 놀랍고 큰 감동 가운데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 거룩한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희년이 도래하기 전 사십구 년 동안에 우리는 기업이었던 땅을 팔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생명까지 팔아 죄와 사탄의 노예로 살고 있었는데, 오십 번째 되는 해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잃었던 기업을 회복하고 노예였던 몸이 해방되어 자유자가 됨으로써 모든 옛 것들은 지나가고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어서 거룩함을 입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생명을 소유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는 희년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희년은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임한 것이 아니라 육 개월 전 사십구 번째 해에 속한 칠월 십일 속죄일에 희년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을 붊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가오는 거룩하고 신성한 희년을 맞이할 준비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사역을 통하여 다가오는 희년에 관한 기쁜 소식,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문두병자를 고치시는 일들을 통하여 다가오는 희년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크게 내셨다는 것입니다.
희년이 도래하기 육 개월 전 곧 사십구 번째 해 칠월 십일 대속죄일에 희년을 알리는 수양의 뿔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희년의 도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에 기초하여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11절과 12절에서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풍성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까요?
이 말씀은 그러한 의미의 말씀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파종하지도 말고 포도원을 가꾸지도 말고 그 열매를 거두지도 모으지도 말고 단지 땅의 소산을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 천연적인 생각으로 살지 말고 주님의 방법에 따라,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정하심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방법이나 천연적인 힘과 노력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희년에 동참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거나 파종하거나 낫을 대어 거두거나 수확하고 열매들을 모으지 말라는 이 말씀은 우리의 천연적인 방법이나 천연적인 생각이나 천연적인 힘과 노력들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희년에 동참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천연적인 우리의 수고나 우리의 지혜나 우리의 힘과 노력 그리고 일반적인 종교적인 방법들이나 선행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희년을 누리려는 시도들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희년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사람들의 흘린 땀의 양과 그 노력과 선한 일들을 행한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년을 위해서 인간의 천연적인 관념을 좇아서 수고하거나 선을 행하려 하지 말고 또 그것을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 희년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종교적인 행위나 또는 사람들에게 내보이기 좋은 외형적인 선행들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절대 소유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 곧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길을 갈 때에 우리는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희년이 도래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그 땅의 소산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깊이 체득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들의 생각과 관념으로 깊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희년의 안식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법에 따라서 은혜로 값없이 주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린 인간적인 생각과 관념들을 쫓아 행하려는 모든 일들을 멈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 10절은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희년은 우리가 거룩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희년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거룩한 해입니다. 이 해는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신성해야 하며 또한 우리에게도 거룩하고 신성한 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 안식일에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안식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맞게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 안에서 그분을 지극히 섬기며 사는 것이 바로 거룩하고 신성한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 그 기업을 잃어버렸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굴복하여 그것들의 노예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희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희년이 도래하기 전 육 개월 전 속죄일에 큰 나팔을 불어 빨리 회개하고 속죄함을 받아 거룩함을 입으라고 선포했던 것이며,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난 침례 요한도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주님의 사역에 앞서 생명이 없는 광야와 같은 심령을 가진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외치며 회개의 침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정녕 회개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 분의 신을 들 만한 자격도 없느니라. 그 분은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마태복음 3:11, 한글 KJV)
이렇게 주님께서는 희년의 도래를 알려 육 개월 전에 큰 나팔 소리를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게 했던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돌이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모두 잃어버린 자들이고 사실상 죽은 자들입니다.
잃어버린 자이고 죽은 자였던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희년을 알리는 나팔을 크게 불었던 것이며 그 나팔 소리를 듣고 회개하여 돌아온 자들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해가 바로 은혜의 해,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편에서는 희년은 죽었던 자들, 잃어버린 자들, 집을 나간 자들을 받아들이는 해이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해라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던 자들이 해방되고 자유자가 되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기업을 다시 찾게 되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는 해, 모든 것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귀속되는 해이기 때문에 그 해는 거룩하고 신성한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희년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해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도 은혜의 해이며 사람 편에서도 은혜의 해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희년의 의의를 다시 정리하자면
희년, 은혜의 해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가 이루지는 해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들이 마귀에게, 세상에게, 죄에게 굴복하여 스스로를 팔아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버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죄와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신 주신 해가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년은 우리의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는 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을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팔아버려 더 이상 생명의 땅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게 되는 해가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희년에는 온전한 자유와 충만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때이기에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36절에서 “만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질서에서 벗어나 어그러졌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회복되고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희년을 신약 성경 27권 전체가 전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누가복음 4장 18,19절 말씀은 신약 성경 전체의 주제인 희년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첫 사람 아담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은 생명의 땅,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려 죄와 사탄에게 굴복되어 그들의 노예로 살아야 했지만,
은혜의 신약 시대에는 주님께서 구원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와 죽음의 권세와 맞서 싸워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승리하여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를 해방하고 참 자유를 주는 은혜의 희년을 가져옴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얻고 그분 안에 있는 참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인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소유하여 희년의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사시길 기원드리며, 다음 교제에서는 희년을 맞이한 자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참된 가족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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