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서2장 24절/ 죄와 사망을 이긴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 2편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죽음의 어두운 터널을 사망을 이기는 체험을 하나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저를 그때까지
살려주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이 사망과
죽음을 이기는 체험을 부분적으로 저에게 갖고 오게 했다는 것을 1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에서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에서 벗어나는 체험과 사망을 이기게 하는 것까지도 원하고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가 인식하고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망을 이기는 체험을 했을 때 그 사망의 근원인 그 사망의 문제가 무엇에서 부터비롯
되었는지를 우리가 밝히 빛을 통하여 비춰짐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벗어나지는 것이
수월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여러 가지 세속적으로 다가오는 유혹들을 내가 떨쳐버리는 거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제하고 다스리고 그래서 영의 온전한 통치함을 받아서 내 몸까지도
혼에게 종속되고 혼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영에게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탄을 이기는 삶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엇도 이기고 무엇도 이기고 자아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사탄도 이기고
죄도 이기고 했지만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 사망을 이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70~80이라는
주어진 삶의 시간에 사망을 이기는 체험과 경험이 없으면 우리가 죄를 이기고 자아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세상을 이겼다 할지라도 반쪽밖에 안 된다는 거에요.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뭔가 온전하지 않은 승리라 이 말입니다.
완전한 승리는 이 사단으로 부터 비롯된 죄도 이기고 자아도 세상도 사탄도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결과물인 죄의 삯은 사망 이라는 이 사망과 죽음을 이기는
이러한 승리를 가져오지 않으면 아까 제가 고린도 전서 15장 26절을 읽었는데 다시 한번 볼까요
마지막으로 없어질 원수는 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걸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뒤따라오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사도 바울 선생님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원수이며 사단이 궁극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세인 이 사망은 하나님의 원수라면 우리들의 원수임이 당연한 것이죠.
만약에 우리가 이 사망을 간과하고 소홀히 하고 이것을 이기는 체험을 살아나가면서
하지 않고 살게 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사단을 완전히 이기지 못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 사단까지도 우리가 대적하여 승리하는 사람
그러면 대적하여 승리하는 삶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은 또 어떻게 하셨고
또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나는 그런 상황과 죽음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냐 물어본다면 참 대답을 못해요.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겠죠. 죽음이 당장 나에게 다가 온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배신하지 않고 사드락,메삭,아벤느고 처럼 다니엘처럼
내가 그렇게 담대하게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총에 맞아서 죽을지라도 고문에 의해서
내가 죽을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사망을 이기는 것이겠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우리에게는 사탄이 준 이 사망 때문에 만물들까지도 우리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고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만물들까지도 훼손이 되고 파괴가 되고 모두 다 사단으로부터 비롯된 사망인 것입니다.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니까 사단을 우리가 가증스럽고 가장 미워하는 존재로 가장 대적하게 될 자로 가장
원수인 자로 그러니까 이 원수가 사망을 갖고 오게 한 당사자라는 것을 이렇게 외치고
전해지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이 문제가 해결되어진
것을 보고 알아질 때 영광 돌리고 감사하고 참여할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크게 역사하겠습니까?
크게 역사했을 때 이 정말 하늘이 뒤집혀지고 땅이 뒤집혀지는 이런 부분적인 체험이 나에게 있을 때
이 체험을 겪고 지나고 나보니까 이런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또 특권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또 이렇게 말씀을 보내주셔서 말씀을
읽게 되고 또 이렇게 카톡으로 연결돼서 말씀을 전하게 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성령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길에 의해서 우리가 이끌림을 당하고 있다 라는 면에서
아주 또 좋은 희망과 기쁨과 즐거움과 안식을 그분 안에서 누려봅니다.
우리 몸 안에는 어쩔 수 없이 죄로 인하여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사망은 죽음은 끊임없이 조금씩 아주 보이지 않게 우리
속에서 활동하고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망을 결코 피할 수 없는 당연히 우리에게 찾아와 주는 당연히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당연히 우리가 겪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결과물 이라는 것으로
그렇게 인지를 하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사망이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조금씩 보이지 않게 우리를 잠식하여 우리를 사망
가운데로 끌어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망이 하는 일의 과정이고 수순이고 마지막에
어떤 결과물일 뿐이지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요.
제가 어제 저녁 7시부터니까 한 6시간 전에 사단이 나의 영을 막 공격을 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저에게 체험된 것을 얘기를 합니다.
사망은 이와 같이 죽음은 갑작스럽게 느닷없이 멀쩡하게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어떤 환경들을 통해서 사건들을 통해서 또는 의지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불순한 행위를 저지르는
그런 일들을 하게 하지만 갑작스럽게 이런 이 뱀과 전갈들에 의한 아주 집요한 공격들이 있다 라는 것은
세상의 악한 영들이 그렇게 활동한다 라는 것을 여러분 우리가
기억하고 인식을 해야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 사망이 죽음이 왜 우리의 영을 공격할까요.
우리의 영에는 하나님만이 존재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접촉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오실 수 있는 통로예요.
이 사단은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외곽 외적인 몸을 통해서 역사를 합니다.
몸을 통해서 훼손시켜서 혼을 파괴시키고 그 파괴된 혼을 통해서 영에 까지도 전염시키게 하는
바깥의 세계로부터 이렇게 흘러 흘러 들어오게 하는 역사가 사단의 역사라면 하나님의 역사는
가장 내밀하고 은밀한 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보좌로부터 지성소가 어디에 있어요.
하나님이 계신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지성소 지성소를 나가면 성소가 있죠.
성소를 나가면 성소뜰이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몸에도 세 가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돼 있는데 사단은 몸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역사해 온 것이 바로 몸입니다. 육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는 영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몸의 문제까지도 해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내밀하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 영의 영역을 이렇게 자리 잡고 거듭나게 하여서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그 참 생명의 영이 거듭나는 순간에 오셔서 우리의 영을 새롭게 새창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영이 생명의 능력이 신성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 그때 들어오는 것입니다.
부분적이지만 하여튼 들어와요 이얘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때 일어서게 되는 겁니다.
일어서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아는데 그것을 쭉 유지시키고 쭉 성장하고 쭉 충만하게
하여서 쭉 성장되게 하고 그것을 영의 통치함을 받을 수 있는 단계까지 나가면 좋은데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아요 순간에 반짝했다가 어느 순간에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죽음이라는 것이 이 사단의 역사가 왜 몸을 통하여 혼을 공격하고 혼을 통하여
왜 우리의 영을 마지막 부분인 그 영을 잠식하고자 빼앗고자 그렇게 역사를 할까요.
왜 그렇게 할까요.
사단은 죄의 삯인 사망이 몸으로부터 들어온 시발점이 몸인 것을 알기 때문에
몸을 공격하여 몸을 연약하게 만듭니다.
그게 죄의 결과물로 말미암아 질병을 갖고 오게 그 질병은 뭐냐 결국 죄로 인하여 발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이 연약하고 질병을 지니게 되면 우리의 "혼" "나" 자신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이런 모든 것을 이렇게 나 자신의 인격체인 그 혼을 혼미하게 합니다.
정신 못 차리게 해요 감정도 나예요. 의지도 나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그런데 잘못된 결정을 하게 하고 나쁜 감정을 주게 하고 좋은 생각이 아닌 나쁜 것들을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혼미하게 해요 마치 나쁜 마약을 주는데 그 마약이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이 아닌 그 지식의 열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반짝해서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음의 길로 가게 하고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단은 우리의 몸을 처음에 범죄한 것도
몸이지만 몸을 통하여 우리의 몸을 연약하게 하여서 이게 중요합니다.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혼을 혼잡하게 술을 마시면 해롱 해롱되고 정신 못 차리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우리의 감정 감각들 우리의 주장들 모든 결정하는 이런 것들을 잘못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이건지 저건지 잘 알지 못하도록 그렇게 우리의 혼의 생각과 혼의 감정과
그 감정이 주장하는 의지들을 혼미케 하여 올바른 선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선을 갖지 못하게 하고 악을 행하도록 합니다 섞여져 있기 때문에 무엇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그러니까 몸을 첫 번째로 연약하게 합니다.
병들게 합니다. 죄로 인하여 그리고 혼를 혼미케 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들을 막 어지럽혀 혼미하게 하고 술취한 것처럼 마약에 취한 것처럼
주사를 맞은 것처럼 그래서 결국은 영의 활동을 결핍하게 만들고 모자라게 만듭니다.
영의 활동 기능들을 무너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기능들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영의 활동을 극대화시켜야 되는데 그것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로마서 말씀을 읽어 드렸습니다.
로마서5:17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사망이 왕노릇 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몸을 다스리고 몸을 통하여 혼을 혼미케 하고 혼을 혼미케 하여서
영의 감각을 떨어뜨리게 기능들을 아주 미비하게 만드는 그런 일을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전체를
관리하고 다스리고 주장하고 주지하고 통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망의 다스림이 몸을 통하여 들어온 이 일이 혼에 들어오고 혼에 들어온 것이
영에까지 침투가 돼서 침투라는 이 단어를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침투함으로 말미암아 몸에 사망의 다스림이 적셔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라고 얘기하신 이유가 이 사망이 결국은 영에게 속해
있고 그 중간 과정에 혼에도 침투해 있고 첫 번째 그 과정에 발을 딛고 있는 전진 기지가 사단이
지금 발을 딛고 싸우고 있는 공격의 그 근본 기지가 몸입니다.
몸 안에 사망이 있다는 얘기예요. 몸 안에 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시기 직전까지 또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수한이 있기까지는
아직도 우리가 죽지 않고 있지만 죽음과 사망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몸과 혼과 영을 통해서 발생되어진 이 사망의
어둠의 그림자 죽음의 그러한 독소들을 온몸까지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에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세 가지 문제 영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어야 영이 살고 영이 혼에게
혼이 몸에게 이렇게 흘러 흘러 배급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라는 온존재가 완전해지는 일을
예수그리스도 안에계신 삼일 하나님 곧 완성되신 그 영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만 생각해요. 아니에요. 영과혼과 육입니다.
영이 주인이요 혼은 청지기요 몸은 종의 기능의 역할을 하며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삼일 하나님의 영을 담는 존귀한 보배함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문제가 온전히 구원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고 소원이고 갈망이고 목적이지
사람들은 영만 생각하고 영만 관심 두고 영만 주의하고 영에게만 집중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강건해진 것 같이 범사에 너희의 몸이 일하는 그것들까지도
잘 되기를 내가 원한다 라고 말씀을 그렇게 써 있잖아요.
모두가 강건해지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 몸은 죽을 목숨이니까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을 하는것이 사단의 속임수라는 얘기에요 혼이야 뭐 보이지도 않고 몸이야
어차피 7~80년 살다가 죽을 건데 뭐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생각하고 그냥 내동댕이
처버려요 아니에요.
영이 중요한 것처럼 예수님은 몸을 더욱더 귀중하게 더욱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면 얼마나 놀랄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망이 왕노릇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의와 생명이 왕노릇 하는 것은
영과 혼과 몸 이 세 가지를 완전히 주님 안에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고 가게 하시고
그리고 그 나무에 달려 돌아가게 하시고 그 나무를 통해서 사람을 죽인 그 사탄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나무를 통해서 사탄을 죽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와요.
얼마나 지혜와 지식이 가늠해 볼 수 없는 그러한 분임을 골고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나무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더라면 사단이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그 선악과 나무를 제시했을까요. 천만에요. 전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찍은 도끼에 자기 발이 찍혀나간다는 말처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거죠
하나님의 지혜에 감히 누가 이렇게 마주할 자가 있겠어요 없죠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망을 이기는 것 또한 죄를 이기는 문제와 상호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왜죠 죄의 삯은 사망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간에 그 과정의 문제를 통로를 뚫어가지고 철철철철 흘러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그빛이 등불을 통하여
온전히 비춰지기 위해서는 이 사명의 문제를 이기는 체험과 경험을 해야 이 문제가 서로
완전한 구원인 영과 혼과 이 몸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23절이 죄의삯은 사망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로마서 6장 7장 8장에 이 전체적인 얘기가 이 사도 바울 선생님이 얘기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한번 언제 시간을 두고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세요.
읽으시면 죄 자체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는데 그것보다도 더욱 죄의 결과인 사망을 중요시 하고
사도바울이 죄에 대한 결과인 죽음을 더 중요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라고 그렇게 단호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5: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죄와 의를 마주하게 죽음과 생명 곧 사망과 생명을 이렇게
마주하게 하여서 이 두 가지 문제를 온전히 해결받을 수 있도록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죄들을 이기는 것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만 죄의 삯이
사망인 죄로 인하여 발생되어진 이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결코 관심을 두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이 죄와 사망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이해를 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왜 부활하셨는지를 우리가 더욱더 가깝게 다가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빛을 제공해
주시는 그 신성한 생명력과 영원한 생명력 이신 피와 살을 먹고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기억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를 통하여 아까 십자가 얘기 우리가 계속했죠.
나무를 짊어지시고 그 선악과 나무에 달리신 일을 통하여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걸 기억하셔야 됩니다.
선악과 나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선악과 나무 자체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없어지지 않고 있는 한 따 먹게 되죠.
그런데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선악과는 10만 90만 100만 그루가 있다 할지라도
이미 예수님께서 제거하신 나무이며 없어진 나무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나무를 짊어지시고 그 나무에 달려서 우리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없애고 제거해
주셨다는 것은그리스도께서 달리신 그 나무에 우리가 함께 달렸고 함께 죽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혼자 달린게 아니에요 예수님만 혼자 달렸다면 그 선악과 나무는 아직 까지도
나와 연관되고 연계된 나무일 것입니다.
나를 죄로부터 온전하게 구원하실 수 없는 그러한 충분한 조건과 충분한 요소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죄로부터
선악과 나무로 부터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달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분이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다. 이것을 기억하고 믿고 신뢰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에요
죄가 우리를 다스리고 사망이 우리 몸에서 죽음이 우리 몸에서 왕노릇 하는 삶을 지금까지는 살았지만
이천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믿는 그 순간에 거듭나는 그러한 일을 통하여 순식간에
거듭나는 일을 통하여 사망이 우리 몸에서 왕노릇 한 그 사망 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의 칭의로 주신 그 의와 생명 안에서 우리가 살게 되었다.
곧 죄에 대해서 죽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살게 되었다 라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그런일이 가능해졌죠 그분이 나무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시는 일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주의 죽으심 안에 우리가 연합되어진 것이다.
주의 죽음 안에서 함께 우리가 죽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함께 부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늘 날 한 가지만을 해결하고 한 가지만을 믿고 신뢰하고 이기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우리가 비록 죽었었지만 우리는 죄인으로서 죄의 삯은 사망으로
죽음이 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사망이 당연하게 그냥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사망이 죽음이 왕노릇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선악과 나무에 대신 달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 대신 나를 끌어안고
나를 담당해서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사망은 그분의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없어진 바 되었다.
죽은바 되었다. 제거된 바 되었다.곧 사망이 우리 몸에서 왕노릇 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는 그 연합된 삶을 통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곧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되었다라는 것이
로마서 6장 11절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할 수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주장할 수 없듯이 사망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주장할 수 없다는 얘기가 6장 9절에 나와있습니다.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를 주장할 수 없어요.
너 내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어요.
사단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자기 권세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심을 통하여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처럼 우리 또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로마서 6장 9절 말씀이에요 한번 읽어볼까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되었다고요? 연합되었다고 그러고요
왜 그리스도가 나무를 짊어지고 나무에 달렸어요.
그 나무는 사람이 범한 나무예요 첫 사람 아담이 가지려던 나무예요.
아담이 취했던 나무예요 그 나무 때문에 모든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아담의 후손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모든 자들을 포함하고 담당하고 짊어진
연합된 사건이기 때문에 사망과 죽음이 그리스도를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연합되어진 그리스도와 함께
달린 우리 또한 그 사단이 우리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활했을 때
우리를 끌어내릴 수 없다 절대 자기 것으로 이렇게 도모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무력화하고 무효화시켰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를 이제는 사망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이 이제는 우리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어요.
우리는 사단의 쇠사슬로 묶인다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의 것으로 대체가 되었다라는 것이
로마서 6장 1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러한 놀라운 바꿔치기를 해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우리가 소유 받게 되었는데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구원을 통하여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면 사망이 생명으로 대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가 의로 바꿔졌다니까요. 이 말은 다른 말로 십자가에 도는 십자가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시고 달리신 그 일은 의로 죄를 대신했다 생명으로 죽음을 대신했다라는 얘기입니다.
아니! 죄 대신에 의가요? 사망 대신에 생명으로 예~ 선악과 나무를 그가 짊어지시고 가시고
왜 짊어지셨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그 십자가에 달린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그 나무가 분명한 선악과 나무라는 것을
지칭하게 하기 위해서 짊어진 그 나무에 그 예수님이 달리셨다는 겁니다.
짊어지는 것은 무거운 나무였었고 십자가에 달리신 나무는 다른 나무였을까요.
그런 게 아니라 그 분이 준비되었던 예비되었던 그 나무는 무거운 그 나무는
인류 전체의 죄의 짐을 담당한 무거운 나무였겠죠.
그것을 끌고 가니 인류 전체의 죄를 끌고 가신 예수님이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그것을 질질 끌고 가다가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가다가 쓰러지고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을 휘둥거리고 그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자이지만 그 처절한 모습에 그 무거운 십자가 나무를 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끝까지 담당하시고 가는 그것을 정말 애처롭고 정말 인간적인 어떤 본능에 의해서 그렇게 눈시울을
흘리고 있었을 때 로마 병정이 그 눈물을 흘리고 애처롭게 쳐다보고있는 구레네 시몬을
손가락질 하여서 불러서 끄집어 내서 대신 짊어지게 했던 거예요.
그것이 자신을 죽게 했던 자신의 나무 구레네 시몬이 짊어지고간 나무는 나의 나무에요
시몬이 짊어지고 갔지만 내가 짊어지고 간 거예요.
여러분 아십니까 그게 다른 나무가 아니라 구레뇨 시몬을 통해서 내가 짊어지고 간 나무라는 걸요
그것이 그렇게 무겁다 라는 것을 구레네 시몬이 알았던 것입니다.
그때는 몰랐죠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그런데 그가 훌륭한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버지가 됐던 거예요.
자식들이 감독들이 되고요 나중에 교회를 후원하고 세우는 일에 동참했던 자들이 됐던
것입니다 왜 그 십자가의 나무의 비밀을 알았던 겁니다.
죄가 사망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가시고 그 나무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은혜로 바꿔주시고 사망과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주신 그 일이 십자가 그 나무
그 선악과 나무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없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듣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이 정리돼서 밝혀지게 되면 야~ 이게 에덴 동산에
있었던 아담이 범한 우리들이 범한 우리들이 먹었던 그 선악과 나무야
그럴 때 더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나의 죽음이에요 나의 죄에요 예수님이 그것을 다 끌어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와 사망 가운데 죄 하나만 온전히 해결 받는다면 이거는 반쪽짜리 구원이에요
불완전한 것입니다 안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절은 뭐라고 써 있냐면 생명의 성령님의 몸이
죄에서 너를 해방하였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의 법은 우리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죄를 짓게 하는 능력은 우리를 죄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우리 몸을 통하여 죄로 인하여 우리는 무기력하고 어떻게도 할수도 없고 죄에게 지배 당하고 조종당하며
나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원치 아니하는 일을 행하게 합니다. 이 죽음의 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려
할때는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죄를 범하려 할때는 무감각하게 하는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삶을 살아나가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문제를 통해서
제거하고 해결 받는 일이 이렇게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소유케 한 생명의 성령님을 통하여 부여해 주신
신성한 생명력과 그리고 영원한 생명력 영원한 생명과 신성한 생명이신 성령님의 법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 라는 것을 로마서 8장 2절에 당당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우리는 죄뿐만 아니라 사망을 이기는 이런 경험을 날마다 날마다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아까 제가 얘기를 했죠.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벤느고 다윗 그리고 엘리사의 그 밀가루를 뿌리는 사건으로 독소를 제거하는 일
또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천사를 이렇게 뛰어넘는 일 죽음을 맛보지 않은 에녹과 엘리야 얘기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우리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죄를 이기는 경험은 했지만 사망을 이기는 이런 체험을 가지고 있었나요
제가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망을 아니! 선교사님 제가 언제 사망을 이기는 체험을 가지고 있었죠.
저는 죄를 이기는 경험은 혹간 있지만 사망을 이기는 경험은 없는데요 라고 저에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언제 여러분들이 사망을 이겼느냐고요 ? 예수님을 처음 믿고 예수님께서 전혀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창조되어진 것이 아닌 순수한 하나님의 참것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참 생명이 들어온
순간에 거듭났을 때 그 영이 들어온다는 게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 신성한 생명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에 여러분도 그때 죄를 부분적으로 이겼고 사망을 부분적으로 이겼던 체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을 못할 수도 있어요 저는요 그걸 기억을 해요.
1년 동안 그런 현상들이 일어났으니까요.
죄와 사망을 이긴 체험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뒤로 유지하지 못했어요 그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에서 완전하게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요즘에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제가 다시 조금씩 조금씩 회복되고 조금씩 조금씩 이겨나가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데 그 기쁨은 조금씩 조금씩 적셔지고 조금씩 조금씩 침투되고 조금씩 조금씩 흘러
내 안에 하늘의 이슬처럼 뭉쳐져가지고 참 기쁨이 무엇이고 참 안식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나 저나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을 신뢰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순수한 하나님의 참 생명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지 아니한 전적인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부분적인 면에서
그때 당시에 죄와 사망을 그리고 지금의 삶을 살면서도 부분적으로 그것을 연속적으로 가지게 하는 생명의
활 동을 가질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죄와 사망을 이기는 그 높은 고차원적인 높은
그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높은 수준에 우리가 너무나
미흡하고 결여돼 있고 부족하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를 이기는 삶 무엇이 사망을 이기는 체험이 되는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전적이고도 완전하고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가만히 나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저의 얘기를 합니다. 우리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의보다는 죄를 더 많이 행하고요 생명보다는 사망이 죽음이 내 안에서 더욱더 만연해 있고
선한 것을 파괴하고 진리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을 쫓지 못하게 하고 더욱더 죄라는 어둠의 그림자가
우리 영안에 디덮혀 있어서 몸을 통하여 혼이 훼손되고 혼을 통하여 영에 침투된 그 나쁜 독소들에
의하여 사망과 죄가 우리 안에서 더욱더 심하게 활동하고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생명보다는 사망이 더 역사하고 있다니까요.
우리의 삶에 의보다는 죄가 더 많이 우리 삶속에 보여지고 있다니까요.
왜 그렇습니까 ? 우리가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대신 짊어지고
가신 우리 대신 담당하신 그 나무에 달리신 그 나무를 보고 죄와 사망을 동일하게 똑같이
가치 있게 중요시하게 아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알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겨야 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 안에서 의보다는 죄가 생명보다는 사망과 죽음이 더욱 더 많이 활동하고 역사하고
있음을 우리가 볼수 있습니다.
간혹 가다가 선을 행하는 것보다도 의를 행하는 것보다는 죄를 범하는 것이 훨씬 더 많아요.
생각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잘못된 결정을 하면 아까 그랬죠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몸을 연약하게 함으로 첫째로 몸을 연약하게 함으로 질병을 가져오게 합니다.
질병은 당연 하다고요 사람에게 살아나가는 죄의 결과로요 아니에요
이미 이것이 없어졌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것이 사단의 속임수로 그것이
우리의 것인냥 붙어 있는 것인 것처럼 당연히 따라오는 그러한 결과물인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다니까요.
연약하고 질병이 있게 하는 것은 또 혼을 혼미케 하고 영의 감각을 결여케 하는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나무를 짊어지시고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다 제거하셨다고
이사야서 53장5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아~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 분이 다 가지고 갔는데
“그것은 말씀일 뿐이야 2천년전에 오신 그분은 그렇게 얘기하시지만 실제는 그냥 우리의
구원에만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만 있을 뿐이지 그런 거는 에이 아니야 그렇게 살도록 높은
차원의 목표를 제시하시고 도달하게 하신 것이지 실제 그런 사건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역사고 교회에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런 죄와 사망을 이겨야 된다 라고 이 믿음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일을 예수님을 통하여 제시해 주시고 해결책을 주셨다 라는 그 솥을 통하여 죽음이 있습니다.
양식을 먹으면 죽기 때문에 우리가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가루를 만든 거 그게 십자가 예수님의 죽으심 오병이어의 역사입니다.
12광주리와 7광주리나 남게 하신 그 부쓰러기가 되어서 라도 생명의 양식을
모든 이들에게 그 모든 이들 속에는 믿고 구원받고 거듭난 자들을 얘기합니다.
그 모든 이들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가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것 사망에 이르지 않는것 “에이 그것은 죽은 다음에 벌어지는 일이지” 그렇다면 엘리야와 에녹은 왜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까 왜 하나님에 의해서 들림받아 하나님 품에 갔습니까
왜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벤느고가 사자 입에서 무서운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구원을 얻었죠?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 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십자가 사건이 아직도 있지 않을 때예요.
가루가 뭐예요? 왜 가루를 던졌나요?
왜 그 들판의 야생박을 끓이고 있는 솥에 가루를 던졌어요.
그 가루가 무슨 가루인지 나타나고 있지 않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래서 내 살을 받아 먹으라고 얘기하신 거예요 그게 가루예요.
왜 나뭇가지를 던졌죠? 쓴물 이 마라의 우리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는 바로 그때 ! 나무 하나를 던졌어요 어떤 나무인지 몰라요
그 나무는 십자가나무 선악과 나무가 아니겠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잘못 취함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해골을 십자가의 그 나무를 통해서 대신 우리를 죽게 하고 우리를 멸망케 한 그 나무 그대로
사단의 머리를 창세기 3장 15절 예언의 말씀이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그 사건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청사진은
우리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3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가 어떻게 청산되고
사망이 죽음이 어떻게 그것이 사망의 문이 활짝 열려가지고 모든 이들에게 죽음이 무효화된 이 사실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연히 보여주신 사건들이 아까 제가 얘기한 것처럼
출애굽기 15장 27절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와 엘림에서 겪은 그 쓰디쓴물
출애굽기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애굽기15: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걸 통해서 나무를 집어던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본 그 나무는 나무의 이상은 십자가죠.
그 십자가 그 치료하는 십자가 뭘 치료해요 병 ,연약함, 아니 그것을 뛰어넘어서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 그것을 치료하는 것이 문제지 아니 죄와 사망은 치료하지 않고 내가 걸린 암
내가 걸린 오십견 내가 걸린 어떤 질병들 그런 것을 치료하는 것이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 즉 치료하는 십자가 상징이라는 것을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얘기하고 있는 것은 치료하는 그 속에 연약함과 질병도 있지만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 예수님의 공생애을 통해서 연약함과 질병과 귀신 들려서 정말 고통당하는 자들을 다 치료해 주신 거에요
많은 시간을 통해서 그런데 거기에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 죄와 사망의 문제를 치료했다는 거예요.
그게 중요하다는 얘기에요
제가 어저께부터 밥을 안 먹고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이게 이상해요.
여러분들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말씀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내가 준비되어야 내가 모르는데
내가 성경을 알고 내가 준비 되어야 전하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싶은데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입을 열고 전합니다 하면 성령님께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어떤 것을
주셔서 이 일을 기뻐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겁내지 마세요.
어떤 일을 할 때 두려워하지 마세요.
비록 우리는 연약하고 형편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안에 계십니다.
에베소서: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 연약함 속에 주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의존하고 신뢰할 때 놀라운
일이 놀라운 능력이 놀라운 또 하나의 생명의 힘이 나와 함께 역사하는 것을 여러분이
체험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게 사망을 이기는 체험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십자가의 골고다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와 엘림에서 쓴물을 달게 만든 그 십자가 나무를 통해서
체험하는 그 쓴물을 먹으면 죽게 돼 있죠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열왕기하4:40~41)
또 야생 박을 먹으면 그 독소로 인하여 사람들이 당연히 죽게 되죠.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죽음과 사망에 거하고 사망과 죽음의 짙은 그림자가
이렇게 밀려온 이 세상을 결코 떠날 수 없어요.
이 죽게 되어진 사망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이 골고다의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승리의 근거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골고다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문제 죽음과 사망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죽음과 사망을 해결해 줬다는 것이 뭡니까 마라의 쓴물을 달게 만들어줬다는
것이 뭐예요 왜 쓴 호박을 먹으면 죽게 되는데 그것을 먹었는데 죽게 되지 않았죠.
이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줬다는 얘기예요.
이 죽음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물로 오기 때문에
죽음은 그 먼저 보이지 않는 그 속의 실체가 죄라는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아까 제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죄와 이 죄의 결과물인 죽음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사단에게 모든 자신의
생명 모든 구원의 문제를 맡기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이런 마음 내버려 두고 이건 당연히 우리가 70 내지 80평생을 살면 당연히 죽는
문제인데 사람이 살다 보면 질병이 있고 암도 찾아오고 감기도 걸리고 뭐 이렇게 다치기도 하고
사고도 있고 뭐 그런 것이지 하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한 이렇게 수동적이고도 안이하고 어떤
피동적이고 그리고 그냥 이렇게 자기 자신을 너무 그냥 이렇게 임의로 소홀히 하고 내동댕이 쳐두고
하면은 결코 여러분은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망을 죽음을 결코 벗어날 수 없어요.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자신의 계획이죠.
우리가 사망을 이기는 것을 실제적인 일로 여기라는 겁니다
이것이 연속되어지고 지속되어지고 반복되어졌을 때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가 주님의 사람의 줄들과 생명의 끈을
붙잡고 생명의 통로를 따라 생명을 소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이게 실제적인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이제 우리가 이 교제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 가면 아~ 이게 실제적인 일이구나 이게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것이구나 라고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그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비아 돌로로사)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을 가는 동안에 3번이나 넘어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결코 권고하고 지치고 밤새 고문 당하고 밤새 채찍질에 맞고 밤새 여기로 저기로 대제사장들과
또 헤롯 왕에게 빌라도에게 끌려다니고 조롱 당하고 취조 당하고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결코 싫어하지 않으셨어요.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왜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는 알았던 거예요.
그 사랑 그 사랑의 힘에 감동되어진 예수님은 그 본성에 의해서 인성에 의해서 결코
물러나거나 포기하거나 잠시 그것을 뒤로 내 동댕이 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나무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구레네 시몬이 그 예수님의 그 끊임없이 지침에도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힘으로 밤새 취조 당하시고 고문 당하신 그 몸으로 결코 1m 5m도
갈 수 없는 그 몸으로 바닥을 기어서 라도 그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에 박혀 있는 것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죄와 사망을 이기는 문제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결코 내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가서 그 나무에 달려서 내가 너희 모두를 끌어안고 이렇게 연합해서 죽는다.
내가 죽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 연합해서 죽는 것이다.
나와 함께 죽은 자는 죄와 상관이 없다.
이걸 보여주고자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세력을 죄의 그 무서움과 그 가증함을 보여주시고
사망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위하여 3일 만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를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것이고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 나무를 짊어지고 끌어안고 달리셔서 죽으시고 고통을 당하신 십자가의 골고다의 문제를 통하여 세상과 나 자신과 사단과 죄를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너희도 이와 같이 사망과 죄를 이기라고 우리에게 십자가 높은 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와 대적하여 싸우라는 것입니다. 대항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과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는 한 영에 속하지 않는 한
우리 태도는 미온적인 것으로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백전백패입니다.
싸우려는 의지가 있고 싸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뭔가 나타나는 것이지 죄와 사망을
대적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먼저는 대항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견고해지지 않으면
이 연약해진 몸 질병을 가지고 온 이 몸이 혼에 그러한 혼이 생각과 주장하는 의지를 혼잡하게 하고
혼미하게 하고 나약하게 하여서 결정을 못하게 합니다.
사단과 죄와 싸우는 문제는 고사하고 다른 것조차도 이기지 못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사단의 일이에요
우리는 죄와 대적하고 대항하고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것처럼 사망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와 더 이상으로
우리는 단호하게 맞서서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망이 사탄으로 인하여 선악과 나무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왔어요.
아담에게 찾아온 그것을 아담의 허리를 통해서 발생되어지고 산출되어진 우리 모든 인류
전체에게 가차 없이 매몰차게 사망과 죽음이 임하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것은 당연히 수긍해야 돼요 수긍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늘의 법칙에
어긋나는 거예요 수긍해야 됩니다. 죽어야 됩니다 사망에 순종해야 돼요
그런데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2천년전에 오셨잖아요 그분이 바꿔놨잖아요.
십자가 나무를 짊어지셨잖아요 그리고 그 나무에 달렸잖아요 그리고 죽으셨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사망에 순종하면 이제 안 된다는 겁니다.
첫사람 아담에 속한 자는 사망에 순종해야 되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은 사망과 죽음에 순중하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는 예~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긍해야 됩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어서 바꿔 놓으신 것은 십자가
그 선악과 나무을 통해서 대신 짊어지시고 가시고 그리고 대신 짊어지신 그 나무를 통해서 달리셔서
우리를 끌어안고 담당하고 연합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우리 모두를 끌어안았다는 것은 아담
한 사람을 끌어안았다는 얘기에요
아담 한사람 안에는 허리에서 산출된 우리 모든 자들이 있다는 인류 전체가 있다는 얘기에요
이제는 둘째 아담에 속한 자들은 마치 예수님이 죄와 싸워 이긴 것처럼 사단과 싸워 이겨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와 같이 살아야 되는데 왜 우리가 그와 같이 못 살고 있죠 제가 이것을 요즘에 알고
“야~ 이거 사단이 엄청나게 공격 하겠구나”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이 말씀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 전하게 한 거예요 내가 지금 느낀 것이 사단이 이것을 어마어마하게 싫어하는구나
죄와 사망 그건 자기 고유의 권한이에요.
사망이 자기의 것인데 아직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무력화시키고
파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일이 언제 있었어 꿈속에서나 있었지 라고 우리를 미혹하고
속이고 거짓말로 살짝 아니야 아직까지 너희는 내 손에 있어” 라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것이 완전히 무력화되고 제거되었어요 이제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 물론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우리가 승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도 매일의 삶 속에서도 다시 이 사망을 이기는 체험
부활의 삶이 연속되어지는 연속되어진 사망을 이기는 이 경험을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오실 때 당연히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여러분들이 삶을 통해서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바로 세워진 것처럼 사망에 대한 인식과 이 관념도 완전히 바뀌어져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망 당하신 것은 우리의 사망을 가져가시기 위해서 사망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첫사람 아담에게 속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기 전의 모든 사람들 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믿지 못하고 하는 모든 자들은 아담 안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사망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요한복음 19장 34절 말씀입니다.
34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죠 아담을 예수님께서 그를 고이 잠들게 한 다음에 갈비뼈 한 대를 취하여
빼내서 여자 하와를 만들어놨죠.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갈비뼈 하나를 취했을 때 물과 피가 나왔을까요? 안 나왔을까요?
당연히 나왔겠죠 사람인데 똑같아요
예수님께서 옆구리에 창에 찔림 받았을 때 물과 피가 나온 것은 자신에게 속한 둘째 아담
생명을 주는 죄와 사망을 없애게 하는 제거해주고 해결해 주는 그 산출되어지는 생명
30배 60배 100배의 밀알들을 산출시키기 위해서 피와물을 쏟아내신 것입니다.
아담 옆구리에서 산출되어진 생명들은 사망에 순종만 할 수밖에 없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피와 살을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받아 먹어라 이 의미를 아는 자들은 사망에게 대항하고
대적하고 싸워야 됩니다. 죄와 사망과 싸워서 이겨야 되요
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절대 죄와 사망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70년 80년 살다가 죽으면 당연히 죽게 되는 거죠.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했잖아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사는 것이고 살아도 사는 것이고요
우리가 이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싸워서 대항하지 못하고 이기지 못하면
결국 죄와 사망에 농락당하여서 계속 쇠사슬에 묶인바 되어서 영원한 죽음의 무덤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에게 속한 당연히 죽어야 될 사람들
둘째 아담 자신의 생명의 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십자가에 그 나무를 짊어지시고
달려서 돌아가시고 고통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을 사람들 죽을 그 후손들 죽을 아담의 후손들을
자신의 후손이 되어서 죽지 않도록 영원한 생명 창조되지 아니한 새 생명 그게 거듭날때 주어지는 거예요.
창조되지 아니한 새생명 창조되어진 영이 아니에요.
창조되어진 생명도 아니에요 창조되지 아니한 새생명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되지 아니한 새 생명이요 그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이 골고다에 그 나무를 짊어지시고
가셔서 나무에 달리셔서 죽으셔서 그 골고다의 사단의 머리를 파괴시키고 해골에 처박아서 멸하신
아~ 여인의 후손이 바로 이분이시구나 라고 믿는 순간에 만질 수 없고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지만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신 신성한 생명이 순식간에 들어와서 죄와 사망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속되어져야 되었는데 지속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나도 역시 그랬어요.
나도 그분께서 강하게 붙잡고 있었을 때는 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있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세상에 세속에 눈을 돌리고 귀를 돌리고 하니까 이것이 첫 사람 아담에게
다시 속한자가 되어서 거듭나는 것이 훼손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거 참 사단이 그렇게 얼마나 가증스럽게 얼마나 역사를 하는지 무서운 존재입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 속한 그 인생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너무나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당연히 죽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4천 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에게는 2천년 또 어떤 이들에게 2100년 주님 오실 때까지 유예 기간을 주어서 이 하나님이
보내신 영원한 구원의 해결책이신 그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지 않겠냐는 죄를 제거해 주시겠다는 할렐루야 !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이 원수는 하늘에서 쫓김 당하여서 역사하고 있는 이 어둠의 악한 영들은 이 사실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 목적과 뜻과 하나님의 갈망과 소원대로
여러분들이 삶을 살고자 하면 사단이 악한 영이 뱀과 전갈을 통해서 악한 영과 귀신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역사할 것입니다. 마주할 것입니다.
불화살 공격을 말할 수 없이 끊임없이 할것이나 여러분들이 포기하는 순간에 그 공격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새롭게 더욱더 가중되고 넘치고 더욱더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더욱더 깊이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 생겨버리면 사단은
여러분들을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이것을 예수님께서 아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39절 말씀 가장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이죠.
내 원대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저에게 요한복음 21장 18절 19절 말씀을 주셔서 제가 어저께
하늘이 뒤집어지고 땅이 뒤집어지는 이 죽음의 역사가 왔을 때 딱 순식간에 스쳐가는 생각들이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주셨지 않습니까 순식간에 생각나는 이 주마등처럼 막 쏜화살같이
바람보다 더 빨리 시간보다도 더 빨리 번개보다도 태양의 빛보다 더 빨리 스쳐 지나간 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할 일을 주셨지 않습니까 그 일을 이룰 때까지 죽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나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죽음을 내가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사망에 내가 순종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 약속을 지키십시오 그 말이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하나님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세요
내가 할 일이 아직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망과 마주했던 것입니다.
그때 불화살이 더 이상 오지 않고 아마 거기서 내가 그런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 그것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더 큰 불 화살이 나에게 집중 공격되어서 내가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당시에도 내가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서도 이 기도 내가 지금 하는 이 기도가
하나님이 친히 보시고 계시고 나를 돕는 천사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사이다 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외쳤을 때 더 이상의 집요한 무서운 불화살이 쏟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당시에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도무지 눈조차도 감을 수 없었던 내가 한 2시간 3시간 지나니까
눈을 감게 되고 그 어질어질한 가운데서도 조금씩 조금씩 아침이 되니까
그런 기운이 거의 사라지고 어제부터 지금까지 종일 밥도 안먹었어요 물한모금도 안마시고 있어요
왜냐면 이상한 힘이 이 신성한 생명이신 성령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힘이 이렇게 놀라우세요
우리의 성품이나 본질을 바꿔주시는 것은 아닌데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것이라(마태복음 4장4절)
떡도 필요하죠 저 어저께 사람들이 와서 약을 주더라고요
하나만 먹으면 당신이 살 테니까 하면서 저에게 권했지만 저는 먹지 않았어요.
내가 그때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가 죽으면 죽었지 약 안먹을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약을 먹고 소생하는 게 낫지 당신 너무 엉터리고 너무 완고하고 너무 보수적이고 너무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고 그래 그렇지만 저는 절대 그러지 않았어요.
물론 그 파라돈 이라는 의약품을 제가 먹었다면 어쩌면 치유받을 수는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또 그 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생명을 제가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의약품을 통해서 그 문제 병의 치유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 외에 덧붙여진 그것들은
저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떡을 먹어야 살죠
마태복음4: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근데 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 양식으로 먹어서 주어지는 것 외에 그 사람이 떡으로
주어지는 그 건강을 유지하고 보장하게 해주는것 외에 더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아서 참조하시라고 신명기 8장 말씀 전체를
삽입해 드립니다 이 말씀으로 떡외에 더해지는 영적인 양식이 무엇인지 저는 깨달아 졌기에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세상에서 주는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유지 하기 위해 먹어야 할 양식이
분명 있어야 하나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는 마태복음4:4 말씀 처럼
그 외에 더해지는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말씀이 있음을 잘 되새김 하시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8:1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4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5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6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11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12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20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이해가 됩니까 양식을 먹으면 제가 배가 불러요 예~ 맞아요
제가 지금 배고픈 거 먹으면 좋죠 만족스럽죠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위로가 있죠.
그런데 그 양식이 주는 것 외에 말고 다른 것을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다는거에요
양식의 문제는 물론이고 궁극적으로 맨 나중에 가서는 그것을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양식 이 주는 것 보다 더한 어떤 신령한 것 더하는 어떤 하늘의 것 더한 어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려는 그 어떤 그것 그것을 양식이 아닌 그 말씀을 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어제 약을 안 먹었다는 거에요
약을 먹으면 거기서 내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겠죠.
그러면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 내가 약을 먹고 치료받았습니다.
약도 하나님이 주신 약이죠! 구원의 도구죠! 예 맞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은 이 경험뿐만 아니라 그 외에 더한 거 내가 약을 먹었으면 하나님이
나를 접촉하고 어루만지고 나를 불화살을 막아주고 이런 걸 내가 갖지를 못했죠.
하나님의 생명이 이렇게 충만하게 내가 밥을 안 먹었다고요!
내가 보통 하루에 2끼를 먹는데 보통 11시에부터 11시 반에 꼭 먹어요.
안 먹으면 배고파요 그래서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두끼를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눠 먹은 적도 있는데
이런 지금 같은 마음이고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저는 10일 20일 30일도 안 먹어도 넉근 할 것 같아요.
하나님의 힘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거예요.
이게 하늘의 생명이 오신 성령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께하심이 아니면 있을수가 없어요
이런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제가 약을 안 먹었던 거예요.
여러분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약을 안먹은 겁니다.
몇 사람이 와서 약을 먹으라고 갖고 왔는데 제가 그걸 집어던졌어요.
허허 이거참 하면서 어리석다고 아이고 죽던지 말던지 하면서
그리고 다 나가버리더라고요 죽어도 자기들은 안 도와주겠다는 얘기죠
그런데요. 그들은 다 나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내가 의약품을 버렸으나 하나님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은혜를 맛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났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근데 만약에 내가 그들의 말을 듣고 약을 먹었다면 그들의 말을 듣고 건강을 유지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내가 감지 하지 못하고 교통이 관계가 단절되어졌다고 생각할 때
내가 얼마나 슬프겠어요.
이 깊은 관계 때문에 아~그래서 저는 천연적인 어떤 그런 거 물론 일정한 어떤 건강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어떤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서 건강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야 될 때 어떤 그런 것이 이렇게 나타나가지고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있을 때는 단호하게 내가 거부하는 나를 보면서
조금은 제가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약을 거부하기가 힘들어요.
이거 먹으면 당신 낫는데 왜 안 먹느냐? 아 참 바보다 어리석다는 얘기에요
이거 먹으면 그냥 온몸이 다 깨어난다는 거에요
여러분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일이 주어졌을 때 세상의 생명과 세상의 만족과 위로와 안식과 평안이 주어졌을 때
다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한 가지만을 바라보고자 하나님의 손을
여러분들 기다릴 수 있나요? 저는 어저께 기다렸어요.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매일 매 시간 매 시간 가졌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저는 어쩌다가 한 번 가졌지만 예수님은 날마다 날마다 매시간 매시간
생애 전체를 그러한 시간을 가졌다는 얘기에요 저는 어쩌다 한번 가진 것이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이라는 거는 그 속을 드려다 볼 수만 있다면 하나님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다른 걸 찾으려고 해도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밖에 없으신 것 같아요.
신뢰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가 흙암의 어둠의 터널 죽음의 구렁텅이에 깊게 헤어나올 수 없는
그런 깊은 골짜기에 도단이라는 구덩이에 빠져봤을 때 자기 자신의 믿음이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게 돼 있어요. 그 외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내가 어떤 자인지 하나님과의 문제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4절에 15절에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십자가가 사망을 이기는 근거가 되는 말씀을 기록해 놨어요.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귀의 모든 그 권세를 자신에게 빼앗았던 정말 가증스럽게 거짓말로
아담으로부터 취해진 그 모든 것들을 무력화시켰다.
무력화시키고 완전히 없애 제거해 버리셨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마귀는 아직까지도 가장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무효화 무력화시켰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못하도록 깨어 있으면 안 되니까 "무효화시켰어 죄도 사망도 그렇게 제거되고
해결되고 구원된 거야?" 이걸 알면은 마귀가 설 자리가 없는 거예요.
사람 속에 역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모르도록 교회 안에 다른 곳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들어가서 그렇게 혼잡스럽게 바벨론의 행위를 저지르고 있어요
천주교는 둘째 치고 일반 교회에서도 지금 이런 것을 목사를 통해서 간증이나 증거들
그래서 제가 이 간증이나 이런 얘기를 잘 안 하는 이유가 그런 의미에서 그러는 겁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자들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해방시켜주시기를
놓아주시기 위해서 골고다 십자가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친히 죽음을 당하신 그것이 우리가 사망을 이기는 근거가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사단은 아직까지도 십자가를 통하여 무효화된 자기의 권세와 죽음과 사망을
아직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권세를 잡은 것처럼 이 권세와 죄와 사망, 죽음
이런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었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빼앗겨 버린 사실을 세상
모든 믿는 자들이 알지 못하도록 “싹“ 혼탁하게 안개를 뿌려놓은 것입니다.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놓고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감게 하고 마음의 눈을
닫게 하여서 이 죄를 해결받지 못하고 사망의 권세를 잡은 이 사단이 무력화된 그것을
제거되어서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자임을 알지 못하도록 바로 그것을 감춰놓았다.
그런데 이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잡은 근거가 죄이기 때문에 몸을 통해서 죄를 계속 사람들에게
범할 수 있도록 죄라는 것을 지금 뿌려놓고 그것을 통해서 사망을 가져오게 합니다.
왜 사망을 가져오게 하려면 질병이 찾아와야 되고 연약해야 되고 연약함과 질병이 찾아오게 되면
혼의 모든 문제들이 간과해지고 혼미하게 되고 또 이 결여되고 좀 전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몸이 연약해지면
혼의 모든 것들을 헛갈리게 하고 또 영의 감각하는 것들 또는 양심의 문제나 영의 자각하는 그런 것들이
모두 혼미하게 됩니다.
제가 아까 로마서 5장 10절 말씀을 읽는 것처럼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가 사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그는 지금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고 귀를 닫게 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도록 세상과 세속적인 것을 계속 뿌려놓고 죄를 짓게 함으로 말미암아
질병이 찾아오게 하고 그리고 연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연약함과 질병이 찾아온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 한 번 더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의로우신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골고다의 선악과 나무를 짊어지시고 대신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대신 사망을 경험하고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가 의와 생명을 가져오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친히 경험함으로 죄라는 것이 무엇이고 죽음의 최후의 경계 최후의
그 마지막 종점에 도달해서 무엇이 있는지를 친히 경험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의 문제를 알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죽음의 경계까지 마지막 경계까지 가봤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그 길을 가본 자만이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데려가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라고 말씀하신겁니다.
가보지 않으면 죽음의 경계까지 가보지 않은 자가 야~~ 죽어 봐봐 아니 죽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 얘기할 수가 있어요 안 되는 겁니다.
죄를 마주하고 싸워보고 대항해 보지 않으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힘이 센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얼마나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지 얼마나 그 세력이 강한지 정사와 권세를 함께
짊어진 그 마귀의 영의 세력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얼마나 가증스럽고 얼마나
큰지를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그것을 다 경험하시고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하여 사단이 가지고 있는 죄의 권세 죄의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잃어버린 바 됐고 사망 역시 권세를 잃었다.
사망은 권세를 이기고 죄는 능력을 잃었다 이게 물증이에요
다시 한 번말씀 드립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골고다 나무를 짊어 지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무가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지금 2장 24절을 말하는 겁니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는 능력을 잃었고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죄를 짓고
있어요. 왜? 이걸 몰라서 그래요 지금 얘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능력을 잃었고 이거 여러분 잊어버리지 맙시다.
죄가 능력을 잃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살면 돼요 그럼 저절로 이기게 돼요
그런데 이걸 잃어버리면 그때 우리가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사망은 뭐예요 사망은 죄의 결과물 아닙니까 마지막 표현이에요.
마지막 죄의 절정이에요 죄의 절정이 연약함과 질병을 통해서 찾아오는 것이 뭐냐하면
사망인데 그 사단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세 그 권세를 빼앗겨버린 거에요
잃어버린 거예요.
왜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이게 중요합니다.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에 달렸다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를 짊어졌다는 거예요.
죄를 짊어지고 나무에 달림으로 말미암아 죄가 능력을 잃었고 이게 얼마나 중요 몰라요
그분이 첫 사람 아담의 죄를 짊어지고 나무에 달림으로 죄가 능력을 잃었고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3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권세를 잃었다.
의로우신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가 없는거예요.
자~~ 다시 한 번요 사망이 자신의 권세 사단의 권세인 사망이 그 권세를 잃어버렸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능력을 잃어버렸고 선악과 나무을 대신 짊어 지시고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가 능력을 잃었고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시는 사건을 통하여 사단이 더 이상 그 예
수님의 발꿈치를 붙잡아 매달려 이 땅에 끌어들일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것을 얘기하고 있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망의 세력을 무너뜨린 것이고 무효화시킨 것이고 그리고
죄를 무력화시킨 것이고 골고다를 통해서 예수님이 성취한 모든 것이 이러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 라고 예수님이 고개를 떨구시고 “숨” 혼이 떠나가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권세를 이루었어요 인간에게 가장 최종적인 마지막 문제가 뭐예요
그게 사망이에요 그 사망의 처음의 시작은 죄예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 시작점이 죄가 원인이 되어 마지막 절정인 사망이
능력으로만 발생된 최종의 그 권세를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하여 죄를 없이
하시고 사망의 세력을 무너뜨리셨다.
그래서 우리의 이제 온 존재 뭡니까 몸과 혼과 영의 문제
이 영과 혼과 육의 이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이것이 사망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이것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창에 찔림 받아 물과 피를 흘리신
이 사망을 경험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가 자유하게 되고 해방받게 되었다.
우리의 온 존재가 죄와 사망의 우겨쌈에서 해방받게 된 것은 예수님이 죄의 나무에 달리시고
그리고 죄의 결과물인 죽음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에 나 대신 그가 연합되어진 그분이
이러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해방받고 자유함을 얻은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2부의 교제의 시간을 마치고 3부에서
다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시킨 십자가 나무에 대한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