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7장 1부/매맞아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이야기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가 가진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는데 호렙산은 시내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호렙산은 빛의 세계에 대한 것들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하며 시내산은 어둠의 세계, 어둡고 부정적인 것을 말할 때 사용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읽으면 은혜의 빛이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호렙산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4, 개역개정)
그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그들의 끝없는 원망과 불평에도 그들을 한 번도 떠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하셨던 영적인 반석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초창기, 물이 없어 목말라 불평과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지팡이에 매 맞아 쪼개져 물을 내어주었던 그 반석이(출 17:6) 광야생활이 끝나갈 무렵에도 원망과 불평하는 그들에게 변함없이 물을 내어 준 것은(민 20:8~11) 광야생활 40년 내내 그들에게 끊임없이 생명수를 공급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수기 20:8~11, 개역개정)
제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세가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때린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직접적이고도 온전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견고한 반석을 모세의 지팡이로 때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엄정한 율법에 따라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 맞음을 당하실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그 반석을 때린 모세의 지팡이가 무엇을 의미하냐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 5절,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치던 그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호렙산 반석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구약 성경 곧 율법을 상징하고 있는 자이며 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 권위를 나타내며 특히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석을 때린 것이 바로 율법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세의 지팡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실질적인 이유가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개역개정)
하나님의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 맞음을 당하여서 깨어진 그 반석은 광야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물을 내어 자신들의 백성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셨던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생수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예표한 것입니다.
생명수에 대한 말씀을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기에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37~39절 말씀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7~39, 개역개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자가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대표하여서 매 맞음을 당하시고 생수를 쏟아 내기 위한 반석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범한 우리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팡이, 권능의 지팡이, 권위의 지팡이, 심판의 지팡이로 우리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으시고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아 내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9장 34절입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34, 개역개정)
성경은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물과 피”라 하지 않고 “피와 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습관적으로 “물과 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틀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서상 왜 피가 앞에 나와야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먼저 구속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가 구속되어야 주님께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가 우리 안에 들어와 온전히 적셔지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구속의 순서대로 “피와 물”로 기록한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까지 진리를 정확히 나타내고 있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호렙산 그 반석을 모세의 지팡이로 쳐서 쪼개신 사건이 신약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모두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옆구리를 로마 군병이 창으로 찌른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반석이 하나님의 율법, 권능의 지팡이로 매 맞음 당함으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쪼개지고 부서져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목마른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부족함 없이 마실 수 있는 풍요로운 생명수가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매 맞아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명수는 바로 요한복음 19장 34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 나온 피와 물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 생명수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 곧 한 분 하나님 안에 계신 세 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 그 모든 하나님의 어떠하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 인간을 지으셨던 그 형상과 모양은 하나님의 인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그 인격 자체, 하나님의 그 어떠하심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우리 안에 흘러 들어와 흠뻑 적셔지고 내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 곧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 하나님의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영,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종을 하심으로 온전한 의를 이루어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지 않으셨다면,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말씀처럼 우리 안에 생명을 주시는 영께서 결코 내주하실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개역개정)
성경에 생명수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창세기에서는 에덴동산의 가운데에 있는 생명나무에서 발원되어서 생명수가 흘러 나갑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세기 2:10, 개역개정)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생명수의 근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시록 22:1,2 개역개정)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로마 병정의 창에 그 옆구리가 찔려서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물과 피가 아니라 구속을 상징하는 피와 생명을 주는 성령을 상징하는 물입니다. 이 생명수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하나님의 생명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생명 자체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을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 자신의 영,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그냥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 자체라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 세분 하나님 전부 포함한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전부, 하나님의 어떠하심, 인격 그 자체, 창조되지 아니한 생명을 주시는 영, 그 자체를 생명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반석이 되신 것입니다.
아무런 흠과 점도 없으셨지만 그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에 의해서 우리 대신 매를 맞으신 것은 죄인인 우리를 자신의 피로 구속하여 의인 되게 하시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로마 병정에 의하여 그 옆구리를 찔림 받지 않으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그분의 피와 물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의로우신 그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매 맞음을 당해 반석처럼 쪼개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 피로써 인간을 구속하고 또 우리에게 생명수 곧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는 어찌 우리의 입술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창에 찔려 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 피와 물, 생명수는 영원 전부터 흘렀고 지금도 흐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흐를 것입니다. 계시록 22장 1절,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와 흐르는 생명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영원히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를 구속하는 생명수의 근원이라고 제가 조금 전에 얘기한 것처럼 이 생명수의 흐름은 영원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 생명수는 처음과 나중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되었고, 2천 년 전에 성육신하시므로 인자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들과 함께 대화하시고 숙식하시며 함께 생활하신 30년 동안의 생애를 보내신 뒤에, 3년 동안의 공생애를 보내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통하여 계속해서 흘러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는 십자가를 통해서 갑자기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만세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수에 대해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4장 10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 4:10, 개역개정)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개역개정)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면 여러분도 놀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성경이나 신약의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신부를 얻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들입니다.
성경에 신부를 찾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어 이삭의 신부를 찾으러 머나먼 하란 땅으로 보낸 사건이 있는데 아마 생각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얻기 위해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끊임없이 찾아다니다가 그 신붓감 백 명, 천 명 중에서 한 명, 두 명을 만나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구애해서 신부로 삼기 위한 글들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의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신부를 찾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애절한 사랑을 아가서를 통해서 표현하시므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 그렇게 깊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애굽의 종으로 속박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분의 강한 손으로 구원하시므로 구애를 시작하였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호렙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구애를 표시한 것이 바로 십계명을 주신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을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언젠가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십계명, 율법을 주신 사건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청혼한 사건임을 깨달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이는 어떤 남자가 결혼하고 싶은 어떤 여인에게 자신의 모든 정성과 사랑과 애정을 담아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비해서,
“내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니 나와 결혼하지 않을래요? 당신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이런 조건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열 가지 조건을 준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인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직접적인 길로 가지 않으시고 돌아 돌아서 사마리아 여인이 살고 있는 수가 성에 가신 의도는 자신을 남편으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함께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자를 찾아서 그에게 구애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수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 흘러나오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부활 안에서 계속 흐르고 있고 지금도 흐르고 있고 앞으로도 흐르며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흐른다는 것을 계시록 21장 생명수의 강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계시록 22:1~2, 개역개정)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우리는 이 생명수를 영원히 마셔야 하고 또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의 열매를 영원히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먹고 마시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사실을 잘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요? 생명수와 생명나무 열매 이 두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흘렀던 그 생명수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부터 발원되어서 흘러가던 그것이 계속해서 흘러나와서 십자가에서 그것이 터져 흘러나왔는데 이것은 출애굽기 15장의 엘림 사건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출애굽기 15:27, 개역개정)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임하셔서 사랑의 표시로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 안에 내주하셨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여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된 생명수의 흐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왔고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 생명수는 에덴동산에서 끊임없이 발원 되어 흘러 나갔고 호렙 산 반석이 쪼개져서 나온 생수를 통해서 보여주셨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자로서 사람들과 함께한 삶과 공생애를 통해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발원 되어 끊임없이 흐르고 있고 지금까지도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 영원까지 흐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 예수님께서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도 생명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지 생명수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혼하는 자의 그 선물을 여인이 받아야 그 혼인이 성립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선물로 준비하여서 진심을 담은 사랑으로 구애의 표시를 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밤중에 은밀히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지 않느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네가 나를 결코 만날 수 없다”라고 구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도 요한복음 21장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구애의 표시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한 의미를 요즘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1983년 11월 11일 새벽 시간에 저에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몇 년이 지났습니까? 저는 거의 39년 동안이나 그 말씀이 구애의 표시였다는 것을 정말 몰랐습니다. 그 말씀이 사랑의 표시였다는 것을, 이제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쪼개진 반석에서 나온 그 생명수, 로마 병정에 의해서 그 옆구리를 찔림 받아 쏟아져 나온 생명수는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으며, 영 하나님,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신성하고도 영원한 생명, 하나님께 속한 모든 품성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앞에서 살펴본 계시록 22장 1,2절에 나오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1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계시록 22:1~2, 개역개정)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신성한 생명수는 결코 멈춤이 없이 계속 흘러오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흘러나왔고 부활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통해서 지금도 지속적으로 흘러 흘러 우리들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우리 안에 침투해 들어와서 우리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맞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 때 영원한 생명이 되는 생명수를 우리가 받아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로마서 6:5, 개역개정)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먹어라”라고 외치신 것이 바로 그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생명수 흐름, 신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의 그 인격 자체, 하나님의 그 본성 그 자체, 하나님의 그 속성 그 자체를 우리 안에 내주하게 하기 위해서 그 생수가 흘러 흘러 적셔지고 침투하게 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간 생명수를 우리 속에 침투시켜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을 마시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부활의 영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도 이 생명수가 흘러 나가고 지금도 그 흘러 나가고 있는 생명수를 영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또 마시고 있는데,
이 생명수의 흐름을 통해서 그 생명수를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성전을 우리 안에 건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전이 건축되면 그 안에 누가 산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건축된 성전에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개역개정)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2, 개역개정)
하나님이 사는 그곳에서 우리와 같이 동거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둘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인 관계로 함께 동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개역개정)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 1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2:12~13, 한글 KJV)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거처는 곧 누구의 거처입니까 우리의 거처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잘 지을수록 나의 집을 잘 짓는다는 말은 참 깊은 얘기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 흘러나온 생명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부터 발원되어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그 생명수를 우리가 마시는 데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야만 그 생명수가 우리에게 참으로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이 된 그 생명수가 우리에게서 다시 또 흘러 나가야 된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7장 38절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라고 하시니 (요한복음 7:38, 개역개정)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어떠하심, 하나님의 그 인격,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피와 살이 예수님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곳에 날마다 뱀의 피를 먹는 사람이 있는데, 날마다 뱀의 피를 먹으면 결국 뱀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초식 동물들은 풀만 먹고 사니까 그 기질이 얼마나 온순합니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냐가 그 성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먹던 수많은 음식들은 모두 금하시고 오직 반석에서 나오는 생명수와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만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만을 먹고 마시게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먹고 마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부터 사탄 마귀가 주는 것들을 먹고 마셔서 그 마음이 죄로 물들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성을 완전히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광야 40년 동안 생수와 만나만 먹는 생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광야생활 한 달쯤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음식과 물이 다 떨어져 그들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까지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기다리셨다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반석을 쪼개어 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만나와 생수를 주지 않으시고 그들이 배고프고 목말라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만나와 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옛 생활에 속한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재창조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용어로 쓰이진 않지만 저는 재창조보다는 새창조가 더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만나와 생수만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탄 마귀에 의해서 그 마음이 죄악으로 부패하고 변질되어버려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살기에 적합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세포와 피와 살과 뼈 모든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완전히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분별한 장소인 광야로 그들을 이끌어 내셔서 기나긴 훈련과 연단 과정 속에서 그들을 만들어 나가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부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부, 곧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만나와 생수를 먹고 마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고 왜 여러분들에게 생명수를 허락해 주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로 준비되어서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이 계시록 19장 7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혼의 생명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시록 19:7, 개역개정)
생명수를 흘러 보내서 그것이 우리에게 침투되어 온전히 적셔지고 받아 마시게 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서 뭐 합니까?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성은 어린 양의 신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눈물 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자신이 반석이 되어서 로마 병정에 의해서 그 옆구리를 찔림 받아서 우리에게 생명의 피와 생명의 물을 쏟아 내셔서 우리에게 주시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집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야 그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서 살 수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모두 신부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 만나주시고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표시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라고 물과 피에 대해서 계속 얘기를 하셨습니다. 나의 사랑의 표시, 나의 구애하는 의미를 너희가 모르면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처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알고 교통이 되고 연합되어 하나가 될 때 저절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4, 개역개정)
새 예루살렘 성 그 안에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 계실 것이며 그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곁에는 그분의 수많은 아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얘기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침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를 베푸니 이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더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신부를 취하는 신랑으로, 자신은 그분의 친구로 비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복음 3:29, 개역개정)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하나님이 그동안 찾으셨던 자들, “물과 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라고 말한 니고데모와 같은 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던 베드로와 같은 자, 또 “내가 주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했던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자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21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시록 21:9~10, 개역개정)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에베소서 5:23, 개역개정)
우리가 지금 이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명수,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고자 하셨던 신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고 또 창에 찔려야만 했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희생을 알지 못하면,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므로 우리를 그분의 아내로 삼으시려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수를 마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를 깨닫고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 생명수를 마실 수 있는 자리, 그 위치에 내가 서 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맑은 생명수의 시냇물이 아무리 많이 흘러넘치고 있더라도 그 시냇가를 거닐고 있는 사슴이 목마르지 않으면, 그 넘쳐흐르고 있는 귀한 생명수는 사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갈망하는 자, 간구하는 자, 찾는 자, 그런 위치, 그런 장소에 그런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2장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한글 KJV)
쉽게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계시록 21장 6절을 한 번 더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노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을 값없이 주리라. (개역개정)
먼저, 우리는 갈급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1995년, 27년 전에 서울 서초동에 있던 삼풍 백화점 건물이 무너졌을 때, 마지막 생존자의 경우 16일을 견디다 구조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물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못할지라도 꽤 오랫동안을 견딜 수 있지만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면 보통 3,4일을 견디기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갈급한 목마름이 용솟음쳐야 됩니다. 내가 그런 자리,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물의 중요성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물을 마셔야 될 수밖에 없는 필요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말씀, 요한복음 7장 37절을 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개역개정)
목마름이 먼저 있어야 그다음에 주님께 오는 것입니다. 목마른 내가 주님께 먼저 다가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목마른 나를 찾아서 먼저 다가오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목말랐던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먼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여인을 찾아간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경우,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먼저 찾아왔지만 그것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들어 진리에 목마른 니고데모에게 그 마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목말라하는 자신들의 백성들을 위해서, 자신의 신부를 찾아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목마름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주님께서 목마른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불러 내주시는 그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긍휼함과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부여해 주시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 자신의 자녀, 자신의 신부들에게 이러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들 중에 모든 것이 되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에게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로 만들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오랜 세월을 정성과 사랑을 쏟으시므로 나를 기르신 사실을 깨달으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라고요?
신약 성경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것이 은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긍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전에 있었던 은혜의 그림이고 예표이며 상징입니다.
긍휼과 은혜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구현하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것들 중에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여러분!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것들 중에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좋지 않은 상황, 때로는 물질이 없어도, 때로는 여러 가지 난관과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모든 것들 중에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그처럼 우리를 대하시고 간섭하시고 관계하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어 우리의 믿음이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것을 알고서 환란과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다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시편 18:1~2)
예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요롭게 공급해 주시는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전에 가슴, 유방의 뜻이 담긴 엘 샤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마른 자들이 생명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와야 됩니다.
그러한 자가 니고데모였고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찾고 찾고 찾아다니시다가 제자들을 만나셨고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자들을 대표한 그에게 얘기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지금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만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도 얘기한 것이고요 여러분들 모두에게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구애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애의 표현한 겁니다.
이 사랑에 반응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신부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반응을 해야 합니다. 반응을 하지 않은 자들이 유대인들이고 종교 지도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을 한 자들이 곳곳마다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죄인이라 정죄 당하고 무시당하고 소외되었던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사마리아인, 세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죄인이라 정죄 받은 세리 삭개오가 그랬고, 중풍 병자가 그랬고, 일곱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고요, 이방의 갈릴리 어부라고 무시당했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얼마나 그런 자들이 많습니까.
세상에서는 죄인으로 정죄 당하여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않고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던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그들을 그와 같이 놀라운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시기에 그와 같은 사랑의 구애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 좀 과한가요? 죄송합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오해를 받을 정도로, 예수님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녀가 누굽니까?
죄인 중의 죄수, 교회를 그처럼 핍박했던 사도 바울,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애를 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아가서에 술람미 여인이 그리스도로 대변되는 솔로몬 왕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받다가 그 사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서 이제는 그에게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개역개정)
생명수를 주시는 주님을, 생명수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생명수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요한복음 7장 38절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38, 개역개정)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받아 마시고 그 생명수는 다시 우리에게서 흘러 나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냥 막연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려 죽으시면서 그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온 생명수가 우리 안에 흘러 흘러 들어와 흠뻑 적셔지게 하고 또 내주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죄악된 속성을 따르는 우리의 온 몸, 세포와 근육과 피와 살과 뼈까지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지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 그러한 삶에 소망을 두고서 내 영과 혼과 몸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왜? 무엇 때문에? 그분의 피와 물을 쏟아 내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감동이라고 말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부족한 표현이며 그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그 일들은 마귀의 손에서, 세상에서, 죄에서, 아멜렉으로 상징되는 나 자신의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것,
곧 죄악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왕 바로의 통치와 그 억압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고 또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그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은혜의 실질적인 의미는 신약 성경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드렸고, 구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신약의 은혜를 긍휼로 표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긍휼이 얼마나 깊은 말씀인지 모릅니다. 긍휼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실 수도 없었고, 죽으실 수도 없었고, 피 흘리고 물을 쏟아 내실 수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깊이 알고 믿을 때 생명수를 받아 마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됩니까?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생명수가 흘러 들어와 내가 직접적으로 그 생명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2장 3절,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개역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21, 개역개정)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가 신성하고도 영원한 생명, 생명의 영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석이 쪼개져 흘러나온 물에는 비밀한 것이 있습니다. 비밀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비밀한 것의 영적인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반석에 감춰진 영적인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하여서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과 같이 동일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13, 한글 KJV)
여러분! 출애굽기 16장에 하나님께서 광야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져 배고플 때 무엇을 주셨습니까?
생명의 양식,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만나를 먼저 주셨고 이어서 17장에서 반석을 쪼개어 생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음식을 먹고 그 다음 물을 먹은 순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었을지라도 만일 우리 몸 안에 물이 부족하다면 우리 몸은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할 수 없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 됩니다.
음식과 물은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 신체는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가 없고 그것이 장시간 지속되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만나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이신 뒤에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아멜렉과의 전쟁에 임하게 하셨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또 물을 마시지 않고서 무슨 힘으로 어떻게 대적과 싸워서 그 전쟁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영적인 전쟁에서 사탄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개역개정)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은 사람은 결코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뭡니까? 이기는 자가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여러 가지 꽃씨를 사서 흙에 많이 뿌려놨더니 자라서 지금은 꽃이 만발해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땅에 뿌려 놓은 씨가 모두 싹이 나서 꽃을 피웠을까요?
아닙니다. 이긴 씨앗들 만이 싹을 틔우고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가 있는 것이며 이기는 자들 만이 그 몸은 죽을지라도 부활의 삶이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가 굉장히 비밀스럽지 않습니까?
제가 만나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두세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만나는 비밀스러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에서는 만나에 대해서 깟씨 같이 희고 모양은 진주 같으며 맛은 꿀 섞은 과자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 16:31, 민 11:7)
이렇게 생명의 양식이 신비롭고 매우 비밀하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않으면,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알 수 없게 됩니다.
왜 비밀스럽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만나가 땅에서 생긴 것입니까?
그 만나는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 이슬이 내릴 때에 만나도 하늘에서 함께 내렸습니다. 그 만나는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신비롭고 또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민수기 11:9, 개역개정)
그리스도께서는 왜 비밀스럽습니까?
그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6:38, 개역개정)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별의별 이상한 얘기들을 다 하였는데, 그것은 너무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헛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 얘기하는 것은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이슬과 함께 하늘에서 내린 생명의 양식인 만나가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웠듯이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내린 생수 또한 우리 눈으로 결코 볼 수 없었던 아주 은밀한 곳에서부터 터져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생수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우리 눈으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쪼개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그 물도 비밀스럽고 신비롭다고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나가 하늘에서부터 내렸기 때문에 비밀스럽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래도 좀 쉽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에 매를 맞아 쪼개진 반석 속에서 흘러나온 물은 어느 정도의 양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장장 이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끌고 온 짐승 떼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이 물을 먹는 용도로만 사용했을까요? 음식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고 목욕도 했을 것입니다.
그 쪼개진 반석에서 물이 솟아 나와서 그렇게 많은 생명이 마시고 살게 될 것이라고 누구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만큼 그것은 너무나 비밀스럽고 신령한 물이었던 것입니다.
그 물이 땅에 근원을 둔 물이었다면 메마른 광야 한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 이백만 명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짐승 떼들이 마시고도 남는 풍부한 물이 강물처럼 공급될 수 있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결코 쪼개질 수 없는 그 견고한 반석이 쪼개져서 그 많은 사람과 동물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한 물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와서 강같이 흘렀다는 것은 그 물의 근원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비밀스럽고 신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시편 105:41, 개역개정)
아무리 그 광야에서 물이 많이 흘러나온다고 해도 천 명, 만 명, 십만 명은 해결할 수 있어도 이백만 명과 수많은 짐승 떼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령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물이 그냥 세상의 보통 물이었다면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신령한 음료로 이야기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4, 개역개정)
이 말씀에서 그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를 가든 끊임없이 따라다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그 반석은 그냥 어느 한 장소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반석에 관한 동영상을 보니까 큰 바위가 갈라져 있고 또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던데 그것이 실제 모세가 쪼갠 반석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 신령한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세우신 그 계획에 따라서 그곳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미리 서 있었다는 것을 앞에서 본 고린도전서 4장 10절 말씀에서 ‘따라다녔다’고 한 표현을 제가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 신령한 반석은 영원 전부터, 만세 전부터, 창세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시나이 반도 (Sinai Pen) 남쪽에 있었던 그 반석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시나이 반도 북쪽에도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반석이 끊임없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녔다는 증거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광야생활 초창기에 시나이 반도 남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물을 공급해 주었던 그 반석(출애굽기 16장)은 광야생활이 끝나갈 무렵, 40년 뒤에도 시나이 반도 북쪽 맨 위쪽 가나안 땅 접경 지역에서도 물을 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민수기 20장)
신령한 물이 비밀스러운 반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높은 하늘에서 내려온 비밀스럽고 신령한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령하다’ ‘용하다’라고 얘기하는데 신령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표현될 수 있는 말입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비밀스럽고 신비로움이 많다는 의미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도 비밀스러운 것이 많기 때문에 신령한 음식이다고 얘기할 수 있고 이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명수, 신령한 음료도 다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수도 비밀스럽지만 그 생명의 근원인 반석 그 자체는 더욱더 비밀스럽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말씀, 여러 구약에 있는 말씀과 신약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그처럼 비밀스럽고 신령한 그리스도를 조금씩 조금씩 깨우치고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들은 비밀스럽고 신령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간절히 간구하고 그 아름다움과 그 달콤함을 고백하며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묵상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개역개정)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편 119:81, 개역개정)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편 119:103, 개역개정)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48, 개역개정)
그리스도를 신령하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모든 비밀스러운 계시들이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26~27, 개역개정)
우리 인간 세상에 인간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나타나셔서 그분의 생애 동안 선포하신 진리의 말씀들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그 모든 것들 중에 모든 것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만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비밀, 주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간구하고 열망을 갖고 갈망하는 일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깊이 의식하고 매일매일 주님을 알아가는 일에 힘쓰는 일이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생명의 양식인 만나 그리고 반석 그 자체와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는 모두 신령하고 비밀스럽습니다.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가 부족하거나 제한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너무나 풍요로워서 모든 사람들과 모든 동물들이 원하는 만큼 언제든지 먹고 마셔도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생명체를 부족함 없이 온전히 만족시키는 그 풍요로움이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엘 샤다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그 반석은 광야 생활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시나이 반도 남쪽 처음부터 북쪽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항상 함께하며 그들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반석이 시나이 반도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광야 생활 처음과 마지막에 그 반석이 그들 곁에 있었다는 것은 그 반석이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비밀스러운 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 동안의 여정을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에서 참 비밀스럽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따라다녔을까 생각해보면, 성경에서는 그 반석이 시나이반도 남쪽과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리고 광야생활 처음과 끝에도 그 반석이 여전히 그들 곁에 서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분은 이와 같이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광야와 같은 이 세상 삶 속에서 우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항상 따라다니면서 날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날마다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먹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는 곳곳마다 그 반석이 서 있었다면 아마도 수없이 많은 반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 반석이 광야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때에는 시나이 반도 남쪽에, 광야 생활 마지막 때에는 시나이 반도 북쪽에 있었던 사실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40년 광야 생활 내내 그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영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반석은 비밀스럽고 신령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시나이 반도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그 반석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고 얘기한 것은 그 반석은 생수가 터진 살아있는 바윗 덩어리, 살아있는 반석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 두 개의 반석 중에서 어느 하나의 반석이라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 반석에 대해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개의 반석에서 모두 물이 나왔다는 것은 그 반석은 생명이 있는 살아 있는 신령한 반석이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 승천하시므로 그분이 부활의 영이 되셔서 우리에게 흘러 흘러 들어와 생명수가 되신 사실은 너무나 비밀스럽고 너무나 신령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이 되셔야만 그 생명수가 흘러서 우리에게 침투되고 적셔져서 그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므로 하나로 연합되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조성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새롭게 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과정들을 거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석으로부터 나온 살아있는 생명의 물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곧 부활안에 있는 성령이십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생명수가 흘러나가는 일은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셔서 그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신령한 생명으로 영원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그 십자가의 의로운 죽음을 통해서 솟아 나온 새로운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죽었지만 그 죽음과 어둠과 그 사망에서부터 다시 솟아 나오는 새로운 생명, 이것은 바로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의 지팡이에 매 맞아 쪼개진 반석에서부터 솟아 나온 생명수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를 맞았다는 것은 그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수가 뭡니까?
매 맞은 반석에서 솟아 나오는 신령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생명수를 커다란 바위, 반석에서부터 나오게 했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영원히 살아 존재하시는 분, 참 진리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신 분입니다.
왜 위대하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 전능하신 분이 굳이 커다란 바위, 반석을 이용해서 그 뜻을 펼치십니까? 그냥 말씀으로 ‘물아 솟아 나와라.’라고 명령하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반석을 그 지팡이로 때려 쪼개서 물을 내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리하지 아니하셔도 충분히 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해 주실 수 있으신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천지를 창조하셨던 그 능력의 말씀으로 명령하여 물이 솟아 나오게 하실 수 있는데 왜 모세에게 그 지팡이로 때리라고 하셔서 그 쪼개진 반석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생명수를 흘러 내보냈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는 그 율법의 지팡이에 의해서 그 반석이 매를 맞는 형벌을 당해야만 우리가 구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법을 어겨 죄를 범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의 심판에 따라서 그 공의로운 율법의 지팡이로 매 맞음을 당하는 형벌이 반드시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 반석이 매 맞아 쪼개지는 사건을 통해서 미리 예표로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도 물을 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모세의 지팡이로 때려서 쪼개진 반석에서 물을 내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에 따라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인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매를 맞는 십자가 형벌을 당하셔야 우리 인간에게 구속을 가져다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자로 오시지 않으면, 육신을 입고 인성을 가져서 우리와 똑같은 완전한 사람이 되지 아니하시면, 그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대표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죽음, 인간을 구속하는 죽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 한 사람이 불순종하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자, 마지막 아담의 자격으로 오셔서 하나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는 순종으로 온전한 의를 이루심으로써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2, 개역개정)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개역개정)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모든 사람이 범함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마지막 아담,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끌어안고 대신 심판을 받아서 그 형벌로 매 맞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찢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 생명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세 전부터 계획하여 준비해 두었던 그 생명수를 자신을 믿고 거듭난 자들에게 마침내 공급해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비밀스러운 생명수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그때부터 우리 눈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풍성히 흘러넘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0년 동안의 삶을 사시고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사신 후에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만세 전부터 그분 안에 준비되어 있었던 그 생명수가 솟아 나올 수가 있었으며, 그 생명수는 모든 인류가 마시기에 넉넉하고 풍요로우며 그 생명수의 흐름은 멈춤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사시고 그리고 인류의 죄를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러한 과정들을 다 겪으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뒤에야 비로소 그 물이 그분의 찢어진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4절은 로마 병정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의 지팡이로 매 맞음을 당한 그 반석이 바로 우리의 죄의 짐을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고자,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그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또 그가 이루시는 그 구속의 과정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생명수를 내는 반석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세우신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육신하셔서 사신 인자로서의 삶과 공생애의 삶과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모든 준비를 마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된 그 생명수의 흐름은 로마 병정의 창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찔림을 당할 때 드디어 이 세상 밖으로 솟아 나왔던 것입니다.
아담의 뼈를 통해서 아담 자신과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하와가 산출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의 피와 살을 통해서 자신과 본성적으로 똑같은 생명을 지닌 새롭게 조성된 교회를 산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똑같은 사람, 하와를 만드시기 위해 아담의 갈비뼈를 취했을 때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에 의해서 찔림 받아 흘리신 그 피와 물을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과 똑같은 본성을 지닌 자들, 선한 속성을 지닌 자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그대로 소유한 자들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솟아 나온 피와 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소유한 자, 하나님을 똑 닮은 자로 만드신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만세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반석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은 반드시 사람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성육신하셔야 했습니다. 완전한 사람, 인자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고 그분은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얘기하는 것은 이단 중의 이단이며 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이서 1:7, 개역개정)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은 생애를 사셔야만, 하나님의 그 속성,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 하나님이 그 어떠하신 것들을 우리에게 그대로 부여해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이유는 유대인과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병정에 의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인 율법을 인류가 어겨서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 율법의 권능의 지팡이로 우리 대신 매를 맞는 형벌을 당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주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호렙산 반석에서 솟아 나온 생명수에 관한 이야기 1부를 마치고 2부에서 말씀을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