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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아들과 다윗의 아들로 오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 마태복음 1:1~2

스불론의 배 2023. 9. 23. 11:30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본문 말씀 : 마태복음 1장 1절, 2절

말씀 주제 : 아브라함의 아들과 다윗의 아들로 오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며 구주로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혈통 곧 열네 대로 이루어진 위대한 족장들의 혈통을 따라오셨고 또 왕의 혈통 곧 열네 대로 이루어진 왕의 혈통을 따라오셨다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강을 건너온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인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소유 받아 그곳에서 생명의 씨를 산출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었고 또 다윗을 왕으로 세워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되는 나라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택함 받은 다윗 왕의 훌륭한 혈통을 이어받은 그의 후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 1장 11절 여고냐(여호와 긴) 왕이 바벨론의 사로잡혀간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경륜에 따라 택함 받은 족속의 대표자인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주님의 품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땅, 가나안 땅에 그와 그의 후손들이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였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게 했지만 다윗의 후손들은 훌륭한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임에도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겨 실족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이방 세력에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갔고 심지어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여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사로잡힌 시드기야(맛다니야) 왕이 두 눈이 뽑혀진 채 바벨론에 끌려가게 된 것은 그 당시 선민 이스라엘의 타락한 신앙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부르심 받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진 왕국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갔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가의 혈통 중에 여고냐 왕의 손자인 스룹바벨을 세우셔서 바벨론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스룹바벨은 왕은 아니지만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왕의 직무를 대행하는 자로서 그가 포로 된 동족들을 이끌고 멸망당한 유대 땅으로 돌아온 것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왕국이 멸망당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는 다윗 왕가의 혈통은 가졌으나 평범한 일반인으로 그 신분이 전락한 자들로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6절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 또한 왕가의 혈통이었지만 비천한 직업인 목수 일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평범한 신분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왕가의 혈통이었지만 평범한 신분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것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으나 타락하여 평범한 신분으로 전락한 채 비천한 삶을 사는 모든 인간들의 왕이시며 구주로서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 모든 인간들을 그분의 품에 안으시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천국 백성,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계보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계 혈통을 따르는 이스라엘의 계보는 남자 이름만 기록되는 것이 원칙으로 여자 이름은 절대 기록될 수가 없는데도 마태복음의 계보에는 특이하게도 다섯 명의 여인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섯 명의 여인들 중 다말, 라합, 룻, 밧세바 이 네 명의 여인들은 과거의 어두운 흔적이 있는 부정한 여인들이고 오직 그리스도를 낳은 동정녀 마리아만 정결한 여인입니다. 이 부정한 여인 4명 모두 재혼을 통해서 생산한 아들이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다말은 누구입니까?

다말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녀가 유다의 첫째 아들 엘과 결혼하였으나 남편 엘이 죽자 계대 결혼법에 따라서 둘째 아들 오난을 남편으로 맞이하였으나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죽게 되었고 유다가 막내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는 것을 꺼려 하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근친상간을 통하여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여인입니다.

 

또 라합은 누구입니까?

여리고 전쟁 때 이스라엘이 보낸 정탐꾼을 숨겨준 여인으로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던 창녀였습니다. 그녀의 직업이 창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많은 영적인 암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의 불과 유황불로 멸망을 당할 때 도망을 나와서 큰 딸과 작은 딸과 부지중에 근친상간을 해서 큰 딸이 낳은 아들 모압은 모압 족속을 이루었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 벤암미는 암몬 족속을 이루어 요단강 동편에 살게 되었는데 룻은 모압 족속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압 족속이 선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모압 땅을 지날 때 떡과 물로 영접하지도 않고 오히려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압과 암몬 족속은 십 대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그 이유를 신명기 23장 3절과 4절에 기록하고 있고

또 이스라엘 총회가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따라서 염병으로 24,000명이 죽는 일이 발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5장)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명기 23:3,4 개역개정)

 

롯과 그 딸들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생산된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은 선민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뒤따라 다니면서 고통스럽게 하였는데, 근친상간을 통해서 나온 그 성향과 기질로 이스라엘을 미혹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진노의 심판을 내리도록 하는 일들을 도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신 분노로 그들을 십 대까지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지만 믿음 있는 모압 여인 룻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우리가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 6절에 우리아의 아내로 표현된 세 번째 여인은 바로 다윗의 충직한 부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로 다윗 왕과 불륜을 저지른 여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가 임신하자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은폐하고자 우리아를 치열한 전투에 내보내어 그를 죽게 한 뒤에 밧세바를 아내로 삼아 아들 솔로몬을 얻었는데 성경은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말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로 말하고 있는 것은 밧세바가 다윗 왕과 불륜을 벌였던 부정한 여인인 것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상적인 계보라면 남자의 이름만 기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혹, 여자의 이름을 기록해야 한다면 신앙의 모범을 보인 정숙한 여인들 곧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그리고 야곱의 아내 레아나 라헬과 같은 여인들을 기록하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인지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과거의 어두운 흔적이 있는 부정한 여인 네 명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특별한 영적인 암시를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시아버지와 근친상간한 여인 다말 그리고 창녀 라합, 저주받은 모압 족속의 딸 룻, 우리아의 아내였던 불륜녀 밧세바, 모두 어두운 과거의 흔적이 있는 부정한 여인들이지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인해 실족하는 삶을 살았던 우리를 모두를 끌어안으시기 위해 세상 가운데 나타나신 왕이시며 구주라는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낳은 아들에게 아주 빛나는 이름 베레스를 주어 오실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었고 또 살몬은 창녀였던 라합을 통해서 보아스를 낳아 오실 그리스도의 계보 잇고 보아스는 저주받은 모압 족속의 여인을 통해서 오벳을 낳아 오실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을 낳아 오실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상식으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된 다섯 명의 여자 중에서 네 명의 부정한 여인은 모두가 재혼한 여인들로 과거의 어둠의 흔적들이 아주 깊고 뚜렷하게 남아 있는 여인들입니다.

 

시아버지와 근친상간한 여인 다말, 창녀였던 이방 여인 라합, 저주받은 모압 족속의 딸 룻 모두 어둠의 흔적이 있는 여인입니다.

 

또 밧세바는 어떻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을 때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 간음을 한 뒤에 밧세바가 임신하자 그것을 은폐하고자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내어서 집에 돌아가게 하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하려 했지만, 의로운 우리아는 자신의 동료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자신만 집에 가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아내를 취할 수 없다고 하며 왕의 말을 따르지 않자, 다윗 왕은 의로운 그를 죽일 계략으로 요압에게 그를 맹렬한 전투에 보내게 하여 죽게 한 뒤에 밧세바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운 왕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남의 아내를 탐한 죄, 간음 죄 그리고 살인 죄, 남의 아내를 도둑질한 죄,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거짓말한 죄를 범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 사람에게 행하여야 할 법을 모두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회개한 다윗이 취한 밧세바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 나왔고 그가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사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그 혈통 안에 있는 부정한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우리들의 실질적인 모습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부정한 여인들과 같이 과거에 어둡고 흔적 있는 삶을 살았던 자들로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지만 실족하고 타락하여 사탄에게 다시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끄집어 내어서 선민 이스라엘을 큰 나라로 만들었지만 다시 그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갔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왕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 스룹바벨을 세워서 다시 그들을 빼내어 주시고 그들이 또 사로잡히면 또다시 빼내 주시는 반복된 역사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은 우리들을 구원하는 왕으로서, 구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계보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한 다말 그리고 여리고 성에서 창녀 생활을 하던 라합, 전쟁터에 나간 남편 우리아를 저버리고 다윗 왕과 간음을 한 밧세바 그리고 큰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낳은 저주받은 모압 족속의 딸 룻, 과거의 흔적이 있고 죄로 얼룩진 이들을 성경에서는 왜 굳이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 대해 탐심을 가져서 그녀를 취하여 간음을 한 뒤 자신의 부끄러운 흔적을 은폐하고자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고 도둑질을 한 다윗과 같은 자 또 유다와 같이 정욕적인 마음을 가진 자 또 창녀 라합처럼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다 부정하게 된 자 그리고 근친상간을 통해서 생산된 자의 후손, 모압 여인 룻의 모습들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서 우리들의 모습들이 시아버지와 근친상간한 유다의 며느리 다말로 나타났고 그리고 이방 여인 창녀 라합으로 나타났으며 또 저주받은 족속의 여인 룻으로 나타났고 간음한 여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밧세바는 다윗 왕이 취하여 음행을 저질렀지만 밧세바 또한 그 불륜에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고 그 불륜에 응한 자로서 간음의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여인들은 부정하고 죄로 얼룩진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임에도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며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더럽고 부정하고 죄의 어두운 흔적들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부정하고 죄 많은 우리들을 위해서 흠 많고 부정한 사람들의 혈통을 통해서 오심으로써 그러한 부정한 자들을 다 품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근원을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친인척들의 삶, 10년, 20년, 30년, 40년, 60년, 70년 살아온 삶들의 뒤안길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마태복음에 기록된 부정한 여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왕의 혈통을 가졌으나 실족하여 하나님께 폐위되어서 사탄에게 다시 포로가 된 그들과 같이 우리가 온갖 죄악을 저질러 역한 냄새 나는 부정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도무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된 네 명의 여인들과 같은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네 명의 부정한 여인들보다도 훨씬 더 냄새나고 오염되고 부정하며 더 악한 죄를 범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네 명의 여인 외에도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된 남자들 또한 타락하여 뒤로 물러나 죄악된 세상에 동화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포로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죄악되고 부정한 우리 인간들의 혈통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구주로서 오셔서 죄악되고 부정한 우리 모두를 다 품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핏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시며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복음을 우리들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들의 참 구주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마태복음이 기록된 것입니다.

 

여인 다섯 명 가운데 부정한 여인이 네 명, 숫자 4가 나옵니다. 이것은 어떤 내용입니까?

 

가장 먼저는 시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베레스를 낳은 다말 그리고 여리고 성에 살던 창녀 라합이 보아스를 낳고 그리고 10대까지뿐만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저주받은 모압 족속의 후손 오벳을 낳은 룻이 나오고 다윗과 불륜을 벌인 뒤 그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은 밧세바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부정한 네 명의 여인들을 통해서 오실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아들들이 출생되었고 오직 마태복음 1장 16절 순결한 여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성령님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잉태한 순결한 마리아를 제외한 네 명의 부정한 여인들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의도적으로 기록된 이유는 온 인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창녀 라합, 시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한 다말, 저주받은 모압 족속의 딸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로서 불륜을 저지른 밧세바와 같은 부정한 죄인들이라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부정한 죄인들의 혈통을 따라오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우리들의 왕, 우리들의 구주이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신 것을 마태복음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명의 부정한 여인들, 피조물을 상징하는 숫자 4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정한 우리 모두를 십자가에서 끌어안고 죽으셔서 구속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등록된 부정한 자들이며 그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된 5명의 여자 가운데 4명의 부정한 여인은 온 인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의 계보에 부정한 여인들의 혈통을 통해서 죄인들의 구주이시고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의 혈통을 통해서 오셔야 했다면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10 기록된 바와 같이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12 모두가 탈선하여 함께 무익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한글KJV)

 

그래서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에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들, 좋은 여인들을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라나 리브가나 레아나 라헬이 아닌 부정한 다섯 명의 여인 가운데 네 명의 부정한 여인들, 과거의 어두운 흔적이 있는 네 명의 이름, 그 숫자 4는 세상 모든 인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상징하고 또한 그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마태복음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족장들의 계보를 이룬 열네 대에는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있고 또 왕의 혈통을 이룬 열네 대에 다윗 왕의 가문들에 대한 얘기도 있고 그리고 실족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된 이후 열네 대에는 왕의 혈통임에도 평범한 일반인으로 전락해서 미천한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가난 속에서 삶을 산 마리아와 요셉 얘기도 있다는 것입니다.

 

숫자 4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상징한다고 얘기했는데, 그리스도의 계보는 세상에 있는 존귀한 자들, 또 왕의 혈통을 가진 자들, 평범하고 미천한 일반 백성들, 좋은 사람들, 나쁜 사람들 할 것 없이 온 인류를 포함하고 있으며 죄인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계보에 등장한 5명의 여인들 가운데 오직 한 여인, 마리아만 정결한 처녀이고 나머지 네 명은 죄로 얼룩져서 어둠의 흔적이 있는 부정한 여인들이며 재혼한 여인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에 마리아는 순결을 지킨 깨끗한 처녀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순결한 마리아의 혈통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온 인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죄로 얼룩져 있는 죄의 혈통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 있다고 단정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려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3:22 한글KJV)

 

그래서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혈통은 모두 죄의 혈통에서 나왔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신성과 인성,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죄인들의 왕으로 오신 분으로서 흠과 점도 없이 온전히 정결한 분이시다는 것을 드러내어서 그분 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이신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 곧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선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다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것입니다.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다윗의 아들은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다윗의 왕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지만 다윗 왕의 왕권을 물려받는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물려받지 못하면 왕의 계보를 잇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없기 때문에 다윗의 아들은 바로 다윗 왕으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은 솔로몬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마태복음 22장 42절과 45절, 그리고 계시록 22장 16절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42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고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다윗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더라. 45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그를 주라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고 하시니 (마태복음 22:42,45 한글KJV)

 

나 예수는 교회들에 관한 이런 일을 너희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나의 천사를 보내었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또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시니라. (계시록 22:16, 한글KJV)

 

다윗 왕의 아들이 실제로 솔로몬 왕이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다윗 왕권을 물려받은 아들,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 빌라도가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으니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여 있더라. (요한복음 19:19, 한글KJV)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어떤 방면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었을까요?

 

첫째로 솔로몬은 왕국을 상속받은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다스리던 왕국을 상속받는 다윗의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었다는 것을 사무엘하 7장 12절과 13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네 연수가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씨를 네 뒤에 세우고,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울 것이요, 내가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사무엘하 7:12~13, 한글KJV)

 

다윗 왕이 솔로몬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왕권을 이어받아 그가 왕이 되어서 그 왕국을 통치하는 자가 되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을 상속받는 왕으로서 세상에 나타났다고 누가복음 1장 32절, 33절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2 그는 위대하게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요,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 33 그는 야곱의 집안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무궁하리라."고 하니라. (누가복음 1:32,33 한글 KJV)

37:55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지혜의 왕입니다. 솔로몬 왕에게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스바 (에티오피아) 여왕이 온갖 금은보석을 예물로 가지고 찾아왔던 것처럼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 세상에서 지혜의 말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의 왕이신 것을 마태복음 12장 42절에서

심판 때에 남방의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 여인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라.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이 가졌던 지혜보다도 더 큰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곧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솔로몬에게 그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베풀어 주신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시며 구주로서 지혜의 말씀으로 천국 복음, 왕의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뭡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너무나 건설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셨으나 그는 강대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전쟁 속에서 그의 손에 너무나 많은 피를 묻혀서 그에게는 부정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대신 다윗의 왕국을 상속받은 그의 아들, 피 흘림이 없는 깨끗한 솔로몬 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게 하셨다는 내용이 사무엘하 7장 13절 그리고 역대상 22장 8절부터 10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울 것이요, 내가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사무엘하 7:13, 한글KJV)

 

8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피를 많이 흘렸고 큰 전쟁들을 치렀으니, 너는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말라. 이는 네가 내 앞에서 땅에 많은 피를 흘렸음이라. 9 보라, 한 아들이 네게 태어나리니, 그는 안식의 사람이 되리라. 내가 그에게 그의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안식을 주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라. 내가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화평과 평안을 주리라. 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니,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리라. 내가 이스라엘 위에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우리라.' 하셨나니 (역대상 22:8~10, 한글 KJV)

 

[솔로몬 성전]

 

솔로몬 왕이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왕국을 상속받은 왕이시며 둘째, 솔로몬의 지혜보다도 더 큰 지혜의 말씀을 가지신 분이시며 셋째,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교회를 건축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 다윗의 자손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왕의 계보와 더불어 또 하나의 계보를 가지고 계신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의 계보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계보는 성경에 등장하는 훌륭한 인물들 중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과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밝힘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다윗과 아브라함의 두 가지 혈통을 따라서 세상에 오신 분이신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이삭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신 것을 계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출생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임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어떻게 출생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의 타고난 힘과 천연적인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서 약속한 아들을 얻으려고 애굽에서 취한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는 실상 불법의 아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믿음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좇아서 인간적인 힘과 방법으로 생산한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고 남편과 자신은 점점 더 늙어가고 있는 상황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아주 그럴듯한 말로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땅에 대한 복과 씨에 대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는데도 나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고 우리는 점점 더 늙어가는데 당신이 더 늙기 전에 아이를 생산할 기력이 있는 지금 제 여종 하갈을 취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를 받으면 될 것 아닙니까? 저의 몸으로는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사라는 아주 현실적인 말로 아브라함을 설득하였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의 말을 듣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갈망을 좇아 난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육적인 힘과 천연적인 관념을 좇아 난 자식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생산할 수 없을 것 같던 아브라함의 나이 백 세 그리고 사라의 나이 구십 세에 낳은 이삭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낳은 자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출생은 약속을 따라오신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많은 사람을 가리켜 씨들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을 가리켜 너의 씨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는 그리스도시라. (갈라디아서 3:16, 한글 KJV)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예표이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이삭과 같은 주요한 세 가지 방면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방면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주는 복을 가져오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에게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음성에 복종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네 씨’는 이삭을 말하며 이삭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씨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삼일 하나님의 영 곧 보혜사이신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그리스도를 복으로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4절과 16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복은 그 영이라고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4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함이며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

16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많은 사람을 가리켜 씨들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을 가리켜 너의 씨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는 그리스도시라. (갈라디아서 3:14,16, 한글KJV)

 

유대인과 이방인들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을 가져오는 자가 이삭이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영적인 복을 친히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3절에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인 모든 복들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는 복되시도다. (에베소서 1:3, 한글KJV)

 

그리고 두 번째로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면에서 똑같은 방면이 있을까요?

 

두 번째는 이삭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 제물이었고 죽음에서 부활한 첫 열매였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들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자신의 아버지의 뜻에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자식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믿음을 보시고 이삭을 죽이는 것을 제지하시고 대신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셨던 희생 제물, 뿔이 수풀에 걸려 있던 그 숫염소를 번제물로 바치게 함으로써 이삭은 살게 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12절)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이에 관하여 신약 성경도 언급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11장 8절부터 19절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고 19절에는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로부터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부활신앙의 믿음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러한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음이라. 이로써 그는 모형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11:19 한글KJV)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려 그를 죽이려 할 때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여 그가 살아나 부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는 번제물로 드려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이것은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쳐진 사건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여준 방면은 첫 번째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을 가져오는 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희생 제물로 바쳐져 다시 살아나 부활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방면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부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타고난 힘, 자신의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얻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님을 알고 순종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과감히 버렸을 때 생명의 씨,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그의 나이 100세에 얻게 되었고 그리고 이삭조차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실 거라는 믿음으로 주저함 없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 아들을 살려 부활시키셨고 더불어 그로 말미암아 하늘의 엄청난 복을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내려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쳐진 후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부를 찾기 위해서 성령으로 상징되는 엘리에셀 종을 자신의 친족이 거주하는 하란 땅으로 보냈고(창세기 24:1~9),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친족 중에서 이삭의 신부 리브가를 찾아서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므로 이삭은 리브가를 자신의 신부로 맞이합니다. (창세기 24:67)

 

[이삭이 신부 리브가를 영접]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삭처럼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을 가져오는 생명의 씨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져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을 하셨고 또 이삭이 자신의 신부인 리브가를 아내로 영접한 것처럼 요한복음 19장 34절 말씀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 자신의 신부 곧 교회를 산출하게 되어 그 신부를 영접하게 것 되는 것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나타낸 세 가지 방면은 모두 약속된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온 자가 이삭이지 아브라함 자신의 육적인 힘과 타고난 능력과 지혜를 따라 낳은 이스마엘은 육의 사람으로서 결코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나이 99세 때 그리고 아내 사라 나이 89세로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년 뒤 그의 나이 100세에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임을 고지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손길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1년 뒤에 사라의 몸에서 생명의 씨인 이삭을 낳게 하신 것은 이삭은 인간의 육신을 통해서 낳은 육에 속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산출된 하나님의 영에 속한 아들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아들로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져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들에게 미치는 복을 가져오셨고 또 그분을 통하여 자신의 신부들 곧 교회가 산출되었고 그분이 장차 자신의 신부를 영접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실한 종 엘리에셀, 성령님을 상징하는 그 종이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아브라함의 뜻에 따라 친히 움직여서 하늘에 속한 정결한 신부 리브가 곧 교회의 성도들을 찾아서 하늘에 속한 이삭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신부를 영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부를 찾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으로 상징된 아브라함의 뜻에 따라서 성령님으로 상징된 신실한 종 엘리에셀이 금은 패물과 코걸이 반 세겔, 십 세겔의 금팔찌 한 쌍과 신부와 그의 모든 가족들이 입을 수많은 옷들을 하란 땅에 예물로 친히 가지고 가서 신부와 그 가족들에게 나눠주어 모두를 기쁘고 만족하게 하고 신랑 이삭이 지극히 풍요로운 자의 상속자인 것을 밝혀서 하늘에 속한 정결한 신부 리브가, 교회의 성도들을 아들 이삭 곧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것을 예표 한 것이 바로 이삭이 신부 리브가를 맞이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뜻에 따라 성령님을 예표하는 신실한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신부 리브가를 찾아와서 이삭이 신부 리브가를 영접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흘림으로 교회가 산출되었고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를 영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신부들은 자신의 지체이며, 그분의 지체인 신부들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먼저는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참 성전이 되셨고 또한 성전을 구성하는 신부들 곧 교회들을 산출하였던 것입니다.

그 성전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곧 성도가 구성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지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신부인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린도전서 12:27 한글 KJV)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들이 다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 사람이 서로의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4~5, 한글KJV)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귀중한 모퉁잇돌이 되셨고 21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며 22 또한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니라. (에베소서 2:20~22 한글KJV)

 

이것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이 왕국을 상속을 받고 지혜 있는 말로 백성을 다스렸고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다윗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을 상속받았고 지혜의 근원자로서 지혜의 말씀을 선포하셨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민족들에게 미치는 복을 가져오셨고 희생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는 순종을 보임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의 신부, 교회를 산출시켜서 그 신부들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방면에 있어서 다윗의 아들이고,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솔로몬과 같은 세 가지 방면,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삭과 같은 세 가지 방면 총 여섯 가지 방면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자신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얘기해온 유대인과 온 인류의 왕이시고 그들을 구원하는 구주이신 것을 알리셨고 육체가 되신 몸으로 왕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주어진 사명을 행하시므로 모든 일들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예표한 것들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드리셨고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생명의 영, 부활의 영이신 그분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셔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 생명 주시는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삼일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부어 주고 계시며 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 부어진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 생명 주는 영, 그리스도 자신의 영, 그 삼일 하나님의 영을 이 땅에 내려보내셔서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 안에 그 영을 부어주므로 말미암아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그분께서 친히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진 자들, 아름다운 정금과 은과 12가지 형형색색의 보석들로 그리스도께서 지금 열심히 조성하고 계신 자들 곧 빛나고 깨끗한 예복을 입은 그들을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영접하실 거라는 얘기가 계시록에 21장에 기록된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다윗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솔로몬처럼 지혜의 말씀을 하셨고 왕국을 상속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처럼 하나님의 복을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가져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성육신과 33년 반 동안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다윗의 아들과 아브라함의 아들이 내포하고 있는 여섯 가지 방면을 모두 이루실 분임을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솔로몬을 통해서 보인 세 방면과 이삭을 통해서 보인 세 방면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하는 분임을, 그리고 왕이신 자신이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구주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부활하셨음을, 또한 30년 동안의 인성의 삶을 사신 기간에 하나님과 성령님에 의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셔서,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기간에 지혜의 말씀을 선포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씨 이삭을 통하여,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에 이르도록 자신을 번제물로 드려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 그리스도의 찢어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육체 속에 갇히셨던 삼일 하나님의 영이 해방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분께서 이 땅에 선포하셨던 천국 복음을 믿고 영접한 자들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하고 계시며 또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신부, 그리스도의 아내 될 자로 조성하고 계신다는 것 그 신부들을 영접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번 세상에 오실 것을 계시록에서 계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한 솔로몬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행하실 때 수많은 소경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누구를 위한 왕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로서 오셨습니까? 왕이시며 구주로서 오신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의 혈통을 따라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아들)으로서 오셨다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큰 복을 주는 분으로서 오셨다는 것이며, 반면에 아브라함의 자손(아들)으로 오셨다는 의미는 유대인들을 위한 복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 모든 민족들, 전 인류에게 복을 가져오는 분으로서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세상의 모든 민족들, 이방인들을 향한 복의 통로자이시고 다윗의 아들은 오직 유대인들 만을 향한 큰 복의 통로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을 베풀기 위해서 오신 분이었는데, 유대인들이 그분을 거절하고, 부인하고, 반대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여서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그 복들이 이방인들에게 돌아가 이방인들이 수혜를 보게 된 것입니다. 참 감사한 일이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입니다.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복을 가져온 분이었고 반면에 아브라함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 복을 가져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에게만 관계하셔서 그들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이셨으나 이제는 아브라함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미친다는 것이 창세기 22장 18절 말씀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14절, 16절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다윗의 아들이여, 다윗의 후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고 “아브라함의 아들이여, 아브라함의 후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내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후손을 찾았다”라고 얘기하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은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의미가 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은 전 인류의 모든 사람을 모두 포함한 의미로서 그 대상이 훨씬 더 넓고 포괄적입니다.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이방 민족들까지도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 곧 삼일 하나님의 영, 생명 주시는 영, 발아시키는 영, 분발케 하는 영, 촉진시키는 영이신 그분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복을 가져오신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함이며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3:14, 한글 KJV)

 

반면에 다윗의 아들은 유대인들에게만 관계되는 것으로 유대인을 위한 온전한 복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오셨다는 것은 그분께서는 전적으로 유대인만을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며, 반면에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오셨다는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류를 위해서 오신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만약에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아들로서의 계보는 없고 다윗의 아들로서의 계보만 기록되었다면 그분께서는 유대인들 만을 위해 오셔서 그들에게만 복을 주시는 유대인의 왕, 유대인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이방인인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아들일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브라함의 아들로 오신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시게 될 때 우리 또한 아브라함의 영적 아들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나라들, 이방인들, 세상 모든 민족들, 인류 전체는 아브라함의 씨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복은 삼일 하나님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삼일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육체에서 해방되셨고 해방되신 삼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 안에 부어질 수 있도록 분배된 것입니다.

 

그래서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된 영이신 예수그리스도 영 곧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 되고 우리 안에 삼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새로운 출생을 갖게 하시고 또 거듭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조성되어 예수님과 같은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방인들인 우리는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전적으로 유대인들 만을 위한 복이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들,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 이방 나라들을 향한 그 복은 아브라함의 씨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삼일 하나님의 영 안에 우리가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신령한 영적인 복들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삼일 하나님의 그 영,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말씀 갈라디아서 3장 1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함이며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3:14 한글 KJV)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해 주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바로 삼일 하나님의 영,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그 복은 창세기 18장 22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그 복이며 그 복의 실체는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서 말하는 성령님 곧 삼일 하나님의 그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고 계셨던 그 영은 십자가를 통해서 해방되시고 부활을 통하여 산출되셔서 우리에게 분배될 수 있도록 영적인 몸을 취하여 생명 주는 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바로 삼일 하나님의 영의 궁극적인 실체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복, 그 영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고 삼일 하나님 안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과 다윗 자손에 대한 마태복음 1장 1절의 계보에 대해서 교제를 나누고 있는데요, 마태복음에서는 족장들의 14세대, 그리고 왕의 혈통을 지닌 존귀한 자들의 14세대,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후 왕의 혈통이었으나 일반인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14세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계보와 비교하여 좀 더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계보는 처음에 누구로부터 시작합니까? 그리고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계보는 누구로부터 시작합니까?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계보가 시작합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족속, 택함을 받은 족속의 대표자인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계보가 시작되어 그리스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아담과 그 후손 모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계보는 그리스도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으로 아담과 그 후손 모두를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3장 38절을 보면 “카이난은 에노스의 아들이요, 에노스는 셋의 아들이요, 셋은 아담의 아들이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부터 아담에 이르는 사람들은 언급하지 않고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에 이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책이 누가복음이기 때문에 누가복음의 계보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자들의 이름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모두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그의 아들 셋, 셋의 아들 에노스, 카이난, 말랄레엘, 야렛, 에녹, 므드셀라, 라멕, 노아 등 그의 후손들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전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구원을 말하는 책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첫 사람 아담과 그의 허리에서 선출된 그의 후손들까지도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안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계보를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마태복음은 하나님 왕국과 천국 복음에 관한 것으로서 그 왕국의 백성들, 곧 마태복음 1장 1절에 기록된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예수그리스도의 혈통과 천국 복음에 관하여 선포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 곧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족속만을 대상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계보의 형식은 택함을 받은 족속을 대표하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까지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식 구조를 취했지만 누가복음의 계보는 평범한 사람, 마리아의 남편 요셉으로부터 시작해서 첫 사람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상향식 구조를 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꾸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계보는 요셉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아담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사실은 솔로몬 왕의 혈통에서 나온 후손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혈통은 다윗의 직계 아들인 솔로몬과 나단으로부터 나뉩니다. (마태복음 1:6, 누가복음 3:31)

 

다윗 왕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중 평범한 삶을 살았던 솔로몬의 형 나단(대상 3:5)의 혈통을 통해서 나온 사람이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였고 솔로몬의 왕가의 혈통을 통해서 나온 사람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입니다. 이는 두 가지 계보의 혈통을 통해서 조그만 점과 흠도 없고 결격 사항이나 부족함이 없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 계보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전반부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다루었고 12장부터 하나님께 선택받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후 계시록까지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족속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은 족속과 반대개념인 피조된 족속은 누구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담과 그 허리에서 나온 아담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통해서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려고 하셨지만 아담이 타락하였고 이후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그의 후손인 아담 족속 역시 죄의 길을 좇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은 그 아담 족속의 죄로 가득 차게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노아와 그 가족 8명을 제외한 그 피조된 족속 모두를 홍수에 멸망시켜 세상을 정결케 하신 뒤에 살아남은 노아와 그 아들들로 세상을 번성하게 하셨지만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적과 갈망을 저버리고 바벨 성과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피조된 족속, 아담 족속으로 이루려 했던 계획을 철회하시고 대신 부름을 받은 족속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서 바벨론의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던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된 족속, 그 아담 족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려 하였으나 그 피조된 족속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과 바벨 성을 건축하는 장면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꿈을 접고 대신에 부름을 받은 족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와 그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경륜의 목적 곧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고 그들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게 하는 일을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족속의 대표자 아브라함이 누구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 지역에 속한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왼쪽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있고 오른쪽에 티그리스 강이 있는 두 강 사이의 땅이며 그곳은 사탄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곳으로서 귀신의 처소이며 우상의 장소인 것입니다.

 

귀신의 처소, 우상숭배가 만연한 죄악의 장소, 사탄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그 바벨론 지역에 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빼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곳으로부터 빼내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며 갈망인 것입니다.

 

하지만 끄집어내면 뭐 합니까? 일정한 시간이 지나 또 하나님께 범죄하여 포로로 잡혀서 바벨론에 끌려간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포로 된 백성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 왕의 직무를 맡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스룹바벨과 고레스 왕을 통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끄집어내면 돌아가고 또 끄집어내면 또 돌아가는 죄악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엘서 1장 4절에 “모충이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자벌레가 먹고, 자벌레가 남긴 것을 풀쐐기가 먹었도다.”라고 메뚜기 군대들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침략당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그리고 메데 페르시아 제국에 의하여 그다음은 헬라 제국에 의하여 또 로마 제국에 의하여 끊임없이 사로잡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적 그리스도의 후원을 받은 정치적인 바벨론, 종교적인 바벨론, 물질적인 바벨론이 계속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 세력 안으로 끌어당겨 사로잡고자 하는 것이 원수 사탄과 적 그리스도가 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 1절, 2절 말씀으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부터 아담 족속으로 이루려고 했던 하나님의 계획을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언제부터라고요?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시점,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그때부터 아담 족속을 통해서 이루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경륜 곧 부르심을 받은 족속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이루고자 아브라함을 부름 받은 족속의 대표자, 머리, 권위자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모든 꿈과 생각과 관심을 그에게 두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족속은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족속입니다. 천연적인 본성을 따르는 족속이 아니라 믿음으로 변화된 족속이요, 믿음으로 조성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족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조성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족속을 위한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집, 영원한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집은 부르심을 받은 족속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아브라함의 후손이 돼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영적 이스라엘이 돼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믿음을 통하여 조성된 아브라함의 족속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타락한 피조된 족속 곧 아담 족속과 하나님의 왕국은 결코 함께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천국이 37번 언급할 만큼 천국을 강조하고 있고 오직 부르심을 받은 족속들이 천국이 소유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타락한 아담 족속, 피조된 족속, 창조되었으나 실족한 족속을 위한 것이므로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아담부터 목수의 삶을 살았던 요셉까지 등장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족속에 속했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후에는 당연히 부르심을 받은 족속으로 전환된다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의 얘기인 것입니다.

 

먼저는 타락한 족속에 속했던 우리를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타락한 족속에서 부르심 받은 족속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 누가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 아담의 후손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부르심을 받은 족속의 후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7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으로 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라.”라고 얘기를 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아담의 아들일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의 아들일까요?

 

우리는 아담의 아들이었지만 타락한 족속으로부터 나와서 부르심을 받은 족속으로 전환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는 것이며 로마서 2장 29절 말씀과 같이 우리는 참 유대인으로 일컬어진다는 것입니다.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로마서 2:29 한글KJV)

 

우리가 바로 유대인인 것입니다. 원래는 아담의 아들, 돌감람나무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어 부르심을 받은 족속으로 전환되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참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담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피조된 족속의 범주 안에 있었지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 부르심을 받은 족속의 범주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로마서 11:17, 개역개정)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면 마태복음에 왕이시며 구주로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복,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최종 완성된 그 영, 생명 주신 영이 되셔서 우리에게 그 영을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 수 있는 그 복, 마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그 영의 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3장 7절과 29절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담의 씨도 아니고 다윗의 씨도 아닌 바로 아브라함 씨,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약속에 따른 상속자로서 마태복음에서 얘기하는 아브라함의 복에 당연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알지 못했을 때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지 못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천국 복음의 메시지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에클레시아(ecclesia)는 문자적으로는 ‘밖으로 불러 모으다’라는 뜻으로 ‘부르심을 받아 나온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 그래서 천국을 상속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에클레시아 곧 교회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첫 사람으로 교회의 시초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만드는 자로서 살고 있었습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두 강 사이에 형성된 땅, 메소포타미아는 귀신들의 처소이며 우상숭배의 장소인 그곳에서 삶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흑암과 죽음 아래 놓여 있었던 아브라함을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좋은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부르신 것이 에클레시아, 교회의 시초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갈대아 우르는 죽음의 장소로서 사탄의 세력이 있는 곳입니다. 귀신의 처소요, 우상의 장소인 그곳은 두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방이 막힌 감옥과 같아서 빠져나오기가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죽음의 강을 건너서 결국 그곳을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의 뜻이 바로 ‘강을 건너온 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스스로 그 강을 건너고자 시도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족집게로 갈대아 우르에서 끄집어내어 그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원래 바벨론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죽음의 장소인 바벨론에서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너게 하시고 마지막 가나안 땅에 가기 전에 혼적인 몸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론에 거주하던 자들로서 하나님을 반대하고 거절하며 하나님 대신에 죄악된 세상과 그에 속한 것들을 의존하고 그곳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바벨론에서 끄집어 내셔서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집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높은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 높은 땅으로 우리를 마치 강제로 집어넣으셔서 그곳에 올려 넣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 에클레시아,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벨론 안에 갇혀 있는 우리를 강제로 끄집어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높은 땅인 가나안 곧 올라가는 삶이 있는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집어넣어 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여러분 정말 오묘하신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 대해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세력 안에 있던 우리, 그 귀신의 처소요, 우상숭배의 장소이며 죽음의 장소에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족집게로 끄집어내셔서 좋은 땅, 높은 땅인 그리스도 안으로 강제로 집어넣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들은 세상에 자신들의 역사와 세상 역사를 의지하지만, 부르심 받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바벨이라는 사탄의 세력에서, 죽음의 장소에서, 우상의 장소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서 강을 건너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 가운데로,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으셔서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그 역사를 믿고 순종한 자들이 부르심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죽음의 그늘 아래 거하던 자신들을 불러서 생명의 빛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그에게 속한 친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2:9, 한글KJV)

 

반면에 자신들의 관념과 생각과 힘과 방법을 좇아서 자신들의 역사로 살고 있는 자들은 계속 바벨론 안에 살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사탄과 함께 불과 유황불 못 속에 던져져서 고통을 당하다가 영원한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를 부인하고 여전히 죽음의 장소인 바벨론에 속해 있으면서 인간들이 만든 종교와 사상과 신념을 좇아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한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로마서 3장 20절을 통해서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 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 (로마서 3:20, 한글KJV)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에 따라서 부르심 받고 타락한 아담 족속, 피조된 족속으로부터 탈출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힘으로는 죽음의 강을 스스로 건널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왜 빼내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강제로 빼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스스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곳에서 빼내어 강을 건너게 하지 않으시면 그 좋은 땅, 높은 땅,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절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힘이 아닌 우리를 돌보시며 생명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모든 믿는 이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갈라디아서 3장 9절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난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느니라. (한글KJV)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을 완전히 무효화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믿음을 가진 자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를 믿는 자들을 죽음으로부터, 죄로부터,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참 자유자가 되게 하시고 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인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하셨다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9절에서 위대한 선포를 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믿음으로 난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느니라. (갈라디아서 3:9, 한글KJV)

 

하나님께서 창세기 22장 18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의 모든 족속들이 받는 그 복은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기록하고 있는 그 영 곧 성령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함이며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3:14 한글KJV)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복은, 그 영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한 것입니다.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전적인 역사를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이 받는 복을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주시기 위해서 사탄의 세력에 포로가 되어서 죽음의 장소에 갇혀 영원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불러내셔서 강을 건너게 하시고 좋은 땅, 높은 땅,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복의 본질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의 생명의 영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자들의 영 안에 부어 줌으로써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삶, 연합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주 좋은 땅이기 때문에 생명의 양식과 생명의 음료들을 먹고 마셔서 그 생명의 요소들을 통해 조성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전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분깃, 복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안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던 것이며,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삶은 그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장차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떠나가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떠났다”라고 말하고 있고, 9절에서는 “믿음으로 그는 타국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기거하여 그와 함께 그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들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의롭게 된 믿음으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 부르심을 받은 자들, 족집게처럼 끄집어내어져서 강을 건넌 자들, 높은 땅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들, 하나님의 약속을 갈망하면서 사는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힘과 방법대로 살거나 행동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살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살고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천연적인 힘과 세상에서 체득한 사람의 지혜와 관념과 세상의 방식들을 모두 내려놓고 부르심에 합당한 믿음을 따라 살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서 사는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하여 살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신의 소욕을 거절하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정욕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은 죽고 대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움직일 때 내가 움직이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쓰시면 내가 쓰임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안식을 하시면 나도 안식하는 것이 믿음에 의하여 살고 믿음에 의하여 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으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한글 KJV)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믿음으로 살게 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뜻을 좇아 살려는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믿음으로 살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하여 살고 행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나를 부인하고, 나를 반대하고, 나를 거절하고,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제쳐 놓고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의 움직임을 따라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가면 나가고, 서면 서고, 누우면 눕고, 앉으면 않고, 쉬면 쉬고 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동안에 나의 천연적인 본성과 타고난 능력과 힘과 인간적인 관념들을 좇아서 했던 모든 것들을 모두 다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쉽게 말하자면 물 흐르는 대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1장 31절과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이는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간 스데반 집사가 대제사장과 공원회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이를 인용한 것을 사도행전 7장 2, 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11:31 테라가 그의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인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칼데아 우르로부터 나와서 카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더니, 그들이 하란에 와서 거기에서 거하니라. 12:1 그때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한글KJV)

 

2 스테판이 말하기를 "부형 여러분, 들으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3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을 떠나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시니 (사도행전 7:2~3, 한글KJV)

 

창세기 말씀과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나타나 “네 고향과 네 친족을 떠나서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는 믿음이 연약해 주저하며 행동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아브라함을 떠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 데라의 아들인 하란, 아브라함의 형제이면서 롯의 아버지인 그 하란을 갈대아 우르에서 죽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란을 죽게 했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재앙이 닥친 것은 아닌지 그의 아버지 데라에게 얘기를 했을 것이며 데라는 큰아들을 잃은 큰 슬픔 속에서 아브라함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데라가 앞장서서 모든 가족들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에 도착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최초로 아브라함을 부르셨지만 연약한 믿음으로 주저하며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자 데라를 앞장세워 그 죄악된 장소를 떠나 하란 땅에 정착하게 하였고 그리고 창세기 12장 1절, 하란 땅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나타나 그를 부르시며 본토와 친척뿐만 아니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은 모든 혈육과 친족을 떠나서 오직 아내만 데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얘기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지 못해서 온전한 생명으로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비를 잃은 조카 롯을 데리고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 받았을 당시에는 그의 믿음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이 당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관념 속에서 자신의 타고난 힘과 지혜와 능력을 의존하며 사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고 가나안 땅에 이끌어서 양들을 치며 장막 속에서 사는 삶 가운데서 그를 믿음 있는 자로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인간적인 관념과 자신의 천연적인 힘을 의지하여 그릇되게 행한 사례가 바로 여종 하갈을 취하여 낳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상속자로 세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관념을 좇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믿고 행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천연적인 것들을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벗겨 내시고 제거해 나가시는 연단의 과정을 겪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천연적인 본성과 지혜와 힘을 좇아 행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으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 자신의 천연적인 힘과 지혜와 관념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타락한 아담 족속으로부터 나와 부르심을 받은 족속이 된 우리는 천연적인 나, 육체적인 나, 타고난 힘과 능력들을 의지하는 마음을 육체의 겉 부분을 잘라내는 할례를 행함 같이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 지낸 바 되게 하고 사도 바울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하는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사실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고백을 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참 후손이 되고 참 유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것을 떠나야 하며, 모든 것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 만을 믿고 갈망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나 타고난 힘이나 천연적인 어떤 관념들은 모두 거부하고 내가 할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움직이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그분께서 지시하는 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혹독히 다루시고 벗기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욥처럼 그리고 얍복강가에서 여호와의 천사로 나타난 그리스도와 씨름했던 야곱처럼, 또 집을 나간 탕자처럼, 주님께서 혹독하게 다루시고 만져 주시는 특별한 훈련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굉장히 위대한 자로 생각할 수 있지만 처음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굉장히 연약하여 주저하여서 갈대아 우르에서 자발적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자였고 또 하란 땅에서 주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그의 인간적인 생각을 좇아 조카 롯을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을 떠나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천연적인 관념들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창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셔서 그를 강제로 빼내어 주셨던 것이며 두 번째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조카 롯을 의뢰하였고, 나중에는 자기에게 자식이 없어서 하란에서 데려온 신실한 종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아 기업을 물려주고자 했으며(창세기 15:2~4), 그다음에는 자신의 인간적인 관념에 따라 현실적인 방법을 택하여 여종 하갈을 취해서 낳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상속자로 세워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뜻을 이루려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뜻과는 전혀 무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약속한 씨는 너의 인간적인 관념과 너의 육체의 힘으로 얻은 씨가 아니라 나 하나님의 생명의 손길을 통하여 태어날 생명의 씨란다. 내가 그를 통해서 천하 만민을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네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네 조카 롯 그리고 너의 신실한 종 엘리에셀, 그리고 네가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도 육에 속한 사람일 뿐 내가 너에게 약속한 씨, 너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단다”라고 인간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상속자 문제와 그의 삶 속에서 만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가르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작정하신 구속의 섭리에 어긋나는 아브라함의 선택들 곧 조카 롯과 신실한 종 엘리에셀도 거부하셨고 그리고 육에 속한 자녀는 약속의 자녀와 함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마저 단호하게 내쫓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환경이나 그 어떤 사람이나 그 무엇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의 삶의 문제들 속에서 그 자신의 힘과 관념을 좇으려는 아브라함을 계속 벗겨 나가는 삶의 과정들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타고난 힘과 능력, 세상에 속한 지혜와 관념,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과 의견들 또한 모두 버림으로써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서 그의 삶을 살고자 하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게 될 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어 육에 속한 것들을 버리게 하셨던 것처럼 내 안에 있는 육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야곱은 사람들을 통해서 벗겨지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거되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얍복강가에서 그의 환도뼈를 치셔서 그를 불구자로 만들어 쩔뚝거리게 하심으로 야곱 안에 남은 것까지 버리게 하셨고, 자신의 딸 디나가 겁탈당하는 사건을 통해서 그가 도피할 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 하나님의 집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겜 땅은 야곱이 있을 곳이 아닌데 자꾸 거기에 안주하고 머물러 있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에서를 피해 도피할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겜 땅을 구경하러 간 그의 딸 디나가 겁탈당하는 사건과 그것에 분노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족속들을 칼로 잔혹하게 죽인 사건을 통해서, 야곱의 발길을 벧엘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자를 끊임없이 따라다니시면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은 야곱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 이스라엘 한 사람 안에 우리 성도들, 교회가 있기 때문이며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한 삶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니까 하나님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를 행로 중에 죽게 하셨고(창 35:8) 또 그처럼 사랑했던 아내 라헬 마저 에브랏 길에서 죽게 하셨으며(창 35:19) 그다음에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귀한 보물,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사랑하므로 그를 시기한 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리게 하여 그 역시 빼앗아갑니다.

하지만 그 요셉을 빼앗기니 이제는 베냐민과 열 명의 아들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한 가뭄과 기근이 있게 하여서 이집트에 양식을 구하러 가는 일을 통해서 베냐민과 열 명의 아들들을 그 마음 속에서 빼앗기는 고통을 당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하여 그를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성숙한 자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만남]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들을 다루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 한없는 책임감을 가지시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쫓아다니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며 그 가운데서 우리를 진정으로 굴복하게 만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사랑을 우리로 맛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아들들로 만들어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와 관념을 모두 버리고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하나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요,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성도들을 대표한 아브라함과 야곱이 타락한 아담 족속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다루어지고 조성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아들들은 이처럼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다루어지고 조성돼서 온전한 생명으로 성숙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삼일 하나님의 생명의 영의 부음을 받은 아브라함의 씨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나 자신을 버리고 나 자신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분과 연합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거부하고 또 그리스도가 아닌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졌던 것처럼 육에 속한 나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파쇄시켜서 내 안에 그리스도만을 모시는 것, 내 안에 그리스도만 채워지는 것,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인 것이며 이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닌 나 자신의 방법이나 나 자신의 힘이나 나 자신의 능력이나 타고난 어떤 것을 의지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움직이심을 따라 행하면 되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내가 모른다면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그분께서 바람을 불게 하셔서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움직임 곧 물이 흘러가는데 그 물을 거슬러 행하려 하고 또 바람이 부는 데 그 바람을 거슬러 행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고통이 뒤따르며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로 말미암아 선민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노예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의 족속, 피조된 족속은 나 자신의 힘과 관념을 좇아서 무언가를 하길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안 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안 해서 마치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과 관념을 좇아서 무언가를 하려 하는 것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됩니다. 또 힘쓰기를 멈춰야 됩니다. 무언가 하기를 좋아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씨를 자신의 힘과 관념에 따라서 얻으려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육에 속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움직임 없이 내 힘과 관념을 좇아서 스스로 무언가 하려 하고 힘쓰기를 좋아하는 족속이 바로 타락한 아담 족속, 피조된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겠다고 일하는 것에 힘쓰지 말고 먼저 내 힘과 내 뜻을 좇아서 살려 하는 나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고 반대하고 거절하는 일에 무엇보다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자아가 죽게 되어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될 때 그분의 움직임을 좇아서 힘써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부르심 받은 족속이기 때문에 너의 힘으로 애쓰지 말고, 너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하려 하지 말고, 너의 타고난 힘과 능력으로 어떤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과거를 생각하지도 말고, 네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도 잊어버리고, 네가 가진 것조차도 잊어버리고, 오직 네 안에 계신 그리스도 만을 온전히 신뢰하여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함께 움직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분께서 친히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끄시며 뒤에서 밀어주시고 앞에서 끌어주시고 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우리로 좋은 땅, 가나안 땅, 올라가는 높은 땅 곧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만을 신뢰하며 살게 될 때 그것이 참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참 갈라디아인들이요, 타락한 아담 족속이 아닌 부르심을 받은 족속, 아브라함의 후손, 곧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분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자기 자신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을 좇아 행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좇아서 살게 될 때 우리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이 된 우리들,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왕자들인 우리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통하여 자신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소유함으로써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혈통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 아담 족속으로 살았던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재능이 있습니까? 능력이 있습니까? 힘이 있습니까?”라고 하며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여기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족속, 아브라함의 씨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고 세상 관념을 좇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없는 육에 속한 자,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여종 하갈을 취해서 나온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탄생시키는 일을 방해하는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뜻과 내 방법대로 취한 그 이스마엘을 내가 손수 버릴 때 그제야 생명의 씨,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출생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바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내 속에 있는 가장 귀한 이스마엘을 포기할 때, 내 속에 있는 가장 귀한 엘리에셀을 포기할 때, 내 속에 있는 귀한 아내를 포기할 때, 내 속에 있는 유모 드보라를 포기할 때, 내 속에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인 요셉을 포기했을 때, 나중에는 나머지 열한 명의 아들마저 모두를 포기하게 됐을 때, 그리고 자신마저 포기하게 됐을 때, 그때 이삭의 출생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요셉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애굽의 통치자가 되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고 자신의 가족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께만 두고 그분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와 모든 삶을 나 자신을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움직이심을 좇아 사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후사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높은 땅, 좋은 땅인 가나안 땅 곧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영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나이 99세, 그의 부인 사라 나이 89세 때 하나님께서 약속한 씨를 주신다고 하셨을 때는 그들 모두 신체적으로 노쇠하여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웃었을 만큼 그들의 생리적 기능은 이미 다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씨, 이삭의 출생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들의 생리적 기능이 모두 중단된 때에 그 누구도 소망을 가질 수 없는 때에 하나님의 생명의 손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이삭을 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과 꿈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의 힘과 능력과 지혜와 관념을 좇아서 하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버렸을 때, 그의 믿음 없는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 용서함을 받았을 때 취해진 결과물이 이삭인 것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씨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것은(창세기 21:2), 아브라함 안에 이삭이 보물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들도 그의 마음속에 두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쫓아내셨던 것이고 또 이스라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이삭, 자신의 생명과 같은 그 이삭이 그의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은혜로 주셨던 그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여 다시 빼앗아 오셨던 것이며 이것은 아브라함 안에 오직 그리스도만을 소유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 것들, 인간적인 것들에 기울어져서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들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믿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요셉과 같은 아들이 생산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다가 다시 빼앗아 가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리 안에 오직 그리스도 만을 소유하게 하도록 그와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많은 재물을 주셨습니까? 좋은 건강을 주셨습니까? 보물과 같은 자식들을 주셨습니까?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족속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들을 바치라고 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셔서 간직하게 한 생명처럼 소중한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다시 바치라고 얘기할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우리의 손으로 취한 것들도 있을 것이며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자녀, 재물, 직장, 명예 등 여러 가지 세상 것들에게 우리들의 마음이 빼앗겨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다시 되돌려달라고 얘기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왔을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칼을 들고 죽이려 했던 믿음을 보였던 것처럼, 내 안에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치라고 하신 가장 귀한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여서 그분께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부활 안에서 사는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쳤을 때 그의 이름을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처럼 그의 이름을 높이고 좋은 선물, 세상 모든 민족들이 받는 복을 약속받고 그의 아들 이삭이 죽음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가 그와 같은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최종 완성된 삼일 하나님의 영이 부어짐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는 삶, 부활 안에서 사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는 복되시도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우리 안에 오직 그리스도만을 소유함으로써 그분과 연합하여 부활의 삶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풍성한 복을 누리는 여러분들 되시길 기원하며 오늘의 교제 말씀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