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장9절 생명나무와 선악과인 지식의 나무 6~9부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는데, 우리의 모양은 외형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말하며 우리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신적인 본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 개역개정)
우리는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소유한 제사장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모습, 왕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과 요셉이 바로 왕 같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 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개역개정)
하나님의 모양은 보이는 외형적인 것으로 왕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형상은 내적인 거룩한 성품을 나타낸 것으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만이 구별된 삶을 살기 때문에 거룩함은 그들만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소 뜰에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구속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고 물두멍을 통해서는 손과 발을 씻도록 하여 정결케 하십니다.
그리고 또 첫 번째 성소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오른편에 떡을 진설하는 상이 있고 그 위에 떡을 두줄로 한 줄에 여섯씩을 진설하는데, 이 떡은 성소 안에서 봉사하는 자들에게만 내어준 특별한 하늘의 양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소 안에서 일하는 봉사자들에게 주어진 양식들은 주님을 발견하게 하고 주님과 가까이 하게하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는 빛을 비춰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이것을 잘 몰랐는데 긴 세월을 지나다 보니까 과거에 이렇게 저렇게 일을 한다고 했던 그것들이 양식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것이 양식이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사람이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표현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만 하나님을 드러내고 증거하고 나타낼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할 권리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가 가지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삶>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우리 영혼에 불어넣으셔서 우리의 영이 숨을 쉬며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항상 숨을 들여 마시고 다시 내쉬어야 살 수 있지 몇 분만 숨을 쉬지 못하면 바로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의 호흡도 끊이지 않고 성령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숨,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호흡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숨을 쉬는 자들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그분의 은혜가 없으면 숨 쉬는 것조차도 먹는 것조차 보는 것조차 듣는 것조차 말하는 것조차도 그분의 은혜가 끊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들이마시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삶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손을 놓아 버리시면 불뱀이 나를 물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근데 세상 사람들도 별 문제없이 숨 쉬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는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누림을 상징하고 있는 장자권을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것은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발생된 일입니다.
야곱은 교활한 속임수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또 항상 속이고 빼앗는 자로서 삶을 살아 아주 나쁜 자처럼 보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붙잡고자 해서 그 하나님의 누림인 장자권을 속임수로 빼앗은 것입니다.
비록 그 방법은 거짓말과 교활한 술수로서 잘못된 행동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에게는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한 선한 욕심이 있었고 그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선하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마음과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곧 죽게 되었을 때에 모세가 만든 장대에 높이 들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누구든지 산다는 것을 믿고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 없이 살려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계획과 뜻, 사고 방식이 다 고쳐져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가인과 니므롯처럼 내 방식과 내 뜻대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떠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생각과 사고 방식으로 방향과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내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당신의 마음에 부합되는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옳은 기도이지 하나님께 내가 이것을 원하니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은 옳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할 때는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 말씀은 베드로에게 물론 하신 말씀이지만, 성령님께서 나에게도 이 말씀을 1983년 11월 11일에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개역개정)
성령님께서 나에게 너는 젊었을 때 네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내 형편입니다.
얼마 전에만 해도 나는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방식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하나님 뜻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깨달은 후에는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산에도 일주일 동안 안가고 성령님이 나를 움직이시는 대로 그냥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시기를 원하면 나는 성령님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내가 거기에 처해 있다 보니까 그분과 지금 동행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동행은 마음과 뜻과 시기와 생각하는 것이 모두 일치하는 것이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회개는 내 생각과 내 고정관념, 편견, 내 뜻, 내 계획 이런 것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 안에서의 누림이 없는 육적인 삶을 선택했지만 야곱은 하나님안에서의 누림을 위해서 육적인 삶을 포기하고 20년 넘게 하란 땅, 삼촌집에서 많은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자 하는 그런 간절함이 그 마음의 밑 바닥 깊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통과 외로움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간섭을 하셨다는 것을 벧엘의 사다닥다리 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취하고자 하는 그에게 장차 성육신하신 예수를 통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자리를 주심으로 야곱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삶을 삶으로써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자, 회개한 자, 생각이 바뀐 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됐을 때에는 축복하는 자로 변화되어 나타납니다.
바로를 만나 축복하고 자기 열두 아들들을 축복하고 요셉을 만나도 또 그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는 이제 하늘에 이슬이 뭔지 알고 하늘 이슬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게 회개한 자들의 삶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야곱과 같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기 위한 영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맞바꿀 정도로 그는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의 육체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또 하나님 없이 사는 바로는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야”라고 말할 정도로 사탄의 정신을 이어받은 반역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적과 표적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주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강퍅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기한 일들, 그러한 기적들이 일어나면 두려워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차돌처럼 단단해져서 하나님도 그의 마음을 돌이키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돌이킬 수 없는 차돌과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강퍅하게 하셨다”라고 얘기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계속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셨지만 그럴 때마다 바로의 마음은 더욱 더 차돌같이 단단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애굽기 9:12 개역성경)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재앙을 이집트 땅에 내리지 않은 처음 마음 상태는 아주 강퍅하지는 않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앙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그 마음이 더욱 더 강퍅해져서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인의 모든 장자들을 죽였음에도 그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홍해까지 따라온 그의 애굽 병사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의하지 않은 자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은 권능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이적과 기적을 보고서도 그 마음이 더욱 더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복음의 파수꾼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외칩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시록 14:7 개역개정)
바로와 같은 자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사는 자들인데 이들은 하나님 없이 살려 하고 하나님을 관심에 두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셔서 그들의 마음은 더욱 더 단단해져 완고하고 강퍅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선악과>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떠난 아주 나쁜 사람들에 대해서만 얘기했지만,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아론 같은 자도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일로 인하여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했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것으로 여기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합니다.
또 아론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을 받으러 사십일 동안 올라가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따른 것,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님 없이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르다 보니 송아지 형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금으로 만들었기에 보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그 속에는 뱀에 정신이 있어 죽음과 사망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론이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 이렇게 했더니 이런 것이 나왔다고 핑계를 대고 변명하는 삶이 지속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가 우상으로 나타납니다. 우상은 죽음 앞에 놓인 자들의 마지막 보여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레위기 10장 1절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도 술을 먹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을 분향하였다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 10장 2절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위기 10:1~2, 개역개정)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전혀 다른 것을 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과 같은 불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물로 씻어도 안 되는 것은 불로 태워서 없애 버려 속죄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죄를 하는 것은 반드시 제단에서 나온 불이어야 하는데, 다른 불을 드려도 괜찮겠지 하는 그들의 부주의한 생각으로 그 불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이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무지와 부주의로 잘못된 다른 불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12명의 정탐꾼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생각과 자기들의 지식들,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여 주님을 의지하기보다는 가나안 족속의 거대한 신체만을 보아서 그들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은 자들로 여겨서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와 갈렙은 자신들의 신체적인 조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한 열명의 그 정탐꾼들처럼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거나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주의하면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은 자신의 눈을 따라 자신의 방식대로 그것을 보고 말하며 행동하지 않고 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좋다고 그것을 기뻐하고 또 상황이 나빠진다고 해서 또 슬퍼하고 원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어떤 고통과 슬픔이 올지라도 그것이 좋은 것이 될 수 있고 또 지금 기쁜 일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자만하게 되면 그것이 또 나쁜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행동하는 것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의 특성입니다.
선악과 열매를 먹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사탄에게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때문에 사탄은 점점 크고 분명히 보이고 하나님은 점점 작고 희미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있는 은혜의 빛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더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커 보이지만
하나님을 떠나 뱀을 본 자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자들, 니므롯처럼 에서처럼 그런 삶을 살다 보니까 점점 가면 갈수록 죽음의 올무에 걸려서 잘못된 것을 깨달아 빠져나오려 해도 그것이 자신의 삶이었고 그 삶 속에 너무 깊이 물들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빠져나오기가 정말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열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고정관념, 자신들의 경험, 자신의 능력만을 보고 그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스스로 패배를 미리 확정하였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애굽에서 큰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건너는 기적과 광야의 삶 속에서 이적을 행하시고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신 권능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승리를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보이는 현실적인 환경과 상황을 보지 않고 멀리 계신 그 하나님께 점점 믿음으로 보고 나아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보다 몇 만 배, 몇 천 만배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두려워했던 거인 족속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큰 존재가 아니고 그들이 오히려 메뚜기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뒤에 계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대적자들, 뱀들로 상징되는 그 아낙 자손들은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은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커지는 하나님을 알게 됐고 나머지 열명의 정탐꾼은 점점 가면 갈수록 하나님은 멀어져서 작게 보이고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 아낙 자손들과 대적자들은 점점 크게 보이게 되어 열명의 정탐꾼들은 결국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따라 산 자들, 이 열명의 정탐꾼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자기 지식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고 주님의 생명나무의 그 열매를 믿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에게 자신의 지식을 따라 산 자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는 삶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의지하여 살았던 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사울왕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멜렉 족속의 어린 아이를 포함해 모두 멸절하고 가축과 짐승들까지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지만 그 명령을 온전히 이행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따라 자신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해석해서 그 명령 중 일부만을 이행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결국은 그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왕위에서 물러났고 자신도 비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주신 원래의 지위가 왕이었고 또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의 역할이었다고 전에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그 지위와 그 처소를 빼앗긴 것처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자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위와 그 처소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은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 사탄이 빼앗겼던 그 지위와 그 처소를 대신 가지게 되므로 말미암아 사탄과 악한 영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주님의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닌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 왕이라는 지위와 명예,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하나님 앞에 존귀함을 받는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마는데 그것은 자신의 지식에서 나온 그 삶의 행위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독립하고자 혼자 분리되어서 살려고 하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 하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생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지식에 의해 자기의 방식대로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했던 그런 사람들의 삶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부도덕한 사람이지만, 그녀는 혹시 자신을 통해서 ‘여호와가 나셨다’ ‘구원자를 낳았다’는 그러한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씨를 얻기를 원하였지만 씨가 생기지 않아서 남편의 가까운 친척 중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지만 또 아이가 생기지 않아 또 여러 남자와 관계를 가졌음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잃어버린 자가 바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자임을 아시고 돌고 돌아서 그 여인에게 가서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고자 그런 일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과 만나서 대화할 때 예수님이 야곱보다 크신 분인지 그리고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질문한 것을 보면 그 사마리아 여인은 믿음이 있던 여인이었으나 죄 안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대화내용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들의 관습과 정한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다고 생각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어 그 지식의 흐름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남자 저 남자로부터 씨를 받으려고 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영이고 생명을 나눠 주는 자이며 그녀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고 잘못된 지식의 물줄기의 흐름을 따라서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의 방향을 바꾸어서 생명나무의 길, 생명의 물줄기로 전환하도록 그녀를 우물가에서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명나무 자체이시면서도 사망의 물줄기가 아니라 생명의 물줄기로 틀어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녀는 지식의 열매를 먹고 자란 사람이며 또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예수님이 그를 생명의 길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장대에 높이 달리신 자신을 바라보면 그가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니고데모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그가 가던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길에서 방향을 틀어 생명나무의 길로 바꿔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뱀에 물려 온 몸에 독이 퍼져서 지금 죽을 지경에 처해있기 때문에 그가 새로운 출생, 새로운 생명 곧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로 인해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생명이 없는 지식이 아닌 진짜 생명이 필요함을 말하셨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많은 지식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생명나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바벨론에서 천문을 연구하던 자들로 보이는데, 이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 성경지식이 없었던 세상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에 있었던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성경 지식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 왕이 동방박사로부터 별에 관해 얘기를 듣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날지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정확히 베들레헴이라고 답을 했을 정도로 성경지식이 많았지만, 그들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그들의 많은 지식은 그들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그 말씀을 먹었다면 거기에 가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경 지식이 많다는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멀리 타국에서 그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이였다는 사실은 그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어두워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간 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도 먹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오히려 생명이 있었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알고 있었을지라도 주님께 버림을 받아 그들에게 사망이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얘기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결과는 죽음과 사망이며 그 지식은 결코 인간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없지만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고 인간의 본성을 바꿔 놓으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죄의 독소, 뱀의 독이 그들에게 퍼져 있어서 누구도 생명 안에 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으신 유일한 인자이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해서 뱀의 독소가 그들의 영혼 속에 들어가 그들은 죄에 속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음행 중에 붙잡힌 여자를 데려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할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서 죽여라’ ‘죽이지 말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거의 지식의 열매를 먹은 자들의 대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 또는 “아니라”라고 얘기하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의 문제입니다.
선악과는 이것은 선(善)이고 저건 악(惡)이다고 정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지만, 지금 이해가 안되더라도 나중에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별하는 것, “그렇다” “아니다”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것은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의 삶의 특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아니다” “죽여라” “살려라”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몸을 굽혀서 땅에 쓰시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은 삶을 통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이 말씀은 많이 묵상하고 되새김질을 해야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땅에다가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을 쓰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 여자를 돌로 쳐서 율법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므로 차돌같이 단단하고 강퍅했던 그들의 마음, 양심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과 다를 바 없이 죄인의 삶을 살고 있던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양심을 두드려서 깨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돌아갔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곳에 예수님 외에는 죄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이 찔러 모두 돌아가고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단 둘이 남았을 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얘기는 생명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다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얘기는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 아니오”라고 답을 정하여 선택적으로 그 답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서 “예, 아니오” 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 보면,
베드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지만, 잠시 한눈을 팔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다가 선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그 마음이 혼탁해져서,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그 제자들에게 얘기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할 것이다”고 자신의 생각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물위에서 걸으시는 것을 보고 자신도 물 위로 오라 해달라고 요구해서 물위를 걸을 때는 생명나무의 열매,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데, 그 때 바람을 보고서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 순간에 물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놓쳐버려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삶, 하나님로부터 떨어진 삶입니다.
이 얘기를 계속 강조하는 것은 우린 매 순간에 호흡을 하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생명 안에 있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얘기하고 또 “주님께서 나를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며,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고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았지만 순식간에 자기를 바라봤을 때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맛보고 지식의 길로 가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물에 빠져 죽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사탄이 계속 베드로에게 역사해서 그를 실족시켰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항상 주님께 고정하여 주님을 붙잡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망의 주인인 사탄에게 쇠사슬에 묶인 바 되어서 꼼짝없이 갇히게 됩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런 길로 갔고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고 그 방식과 그 길로 가야 되는데, 모든 군중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가 되어서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외쳐 사망을 가져오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길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보면 우리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주의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큰 일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만 아주 쉽고 간단한 일들까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귀찮게 해드리는 것 같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일까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가 숨을 쉬듯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필요한 것은 우리는 베드로처럼 순식간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나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고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서 주님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내가 아무런 의식 없이 지식의 길을 따라서 지식의 열매를 맛보는 그런 삶의 길을 가게 되면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생활과 삶이 고착화되면 결국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생명의 열매를 맛보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하나가 된 삶을 살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앉아도 일어서도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일체된 삶을 살아야 하고 내가 주님 없이 나의 임의대로 할 수 있다 생각해 독립된 삶, 내 방식대로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바로 단호히 거절해야 됩니다.
거절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인데, 참 거절하는 것이 힘듭니다. 믿음은 세상에 대해서, 죄의 충동에 대해서, 마귀 시험에 대해서 눈으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하는 것들을 내 마음 속에서 거절하는 것인데, 내가 그러한 욕구들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할 때마다 생명 나무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을 거절하는 것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거절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거절하는 것은 내 마음이 달콤함을 추구하는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내 코는 맛있는 냄새를 맡기를 원하고 내 귀는 감미로운 소리를 듣기를 원하며 내 눈은 아주 아름답고 탐스러운 것, 예를 들면 예쁜 여자들 탐하기를 원합니다. 또 내 입은 또 아주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합니다.
이러한 욕구가 생길 때 그것을 제어하고 거절하고 부인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육체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는 해소해 줘야 하지만 그것이 도가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계시록 2장 7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과일을 먹게 하실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시록 2:7 개역개정)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생명나무를 먹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공부를 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를 소홀히 하면 그걸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생명나무와 만나는 그리스도를 의미>
주님께서는 계시록 2장 7절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우리들에게 주어서 먹게 해주신다고 하셨고 또한 계시록 2장 17절에는 감추어둔 만나를 먹게 해 준다고 약속하고 있고 흰 돌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 또 그에게 흰 돌을 주리니, 그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기록되어서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 (계시록 2:17, 개역개정)
이 모든 것은 주어진 순서가 있는데, 먼저는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을 때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범죄하여 에덴동산 동편으로 쫓겨나 그들은 점점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는 삶의 과정을 거쳤고 그들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을 살다가 광야로 가서 광야의 삶을 삽니다.
이 때 광야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백성에게 에덴동산 가운데 있던 생명나무 열매 대신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기 전에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죄를 범한 후 점점 더 죄의 삶을 반복하여 살다보니 더욱 더 안 좋은 생활로 내려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까지 내려 간 것이며 그곳에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탈출시켜서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 생명나무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생명나무와 만나 모두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주셨지 어떤 가르침이나 이런 것들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 자체를 먹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들의 철학이 혼합되어 버린 가르침들, 잘못된 교리들, 사람의 가르침들은 사탄이 주는 것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생명나무와 감추어둔 만나 외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 없습니다.
근데 사탄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나무와 감추어둔 만나보다 훨씬 좋고 맛있고 영양이 되고 유익이 되는 많은 것들, 깊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발람이고 니골라이고 이세벨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바알신을 섬기고 바알 선지자들을 많이 두어서 바알신을 하나님이라고 우길 정도로 그들은 잘못된 가르침과 교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나무와 감추어둔 만나이신 예수님 외에는 주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이 쉬웠으나 이들이 범죄한 후에 점점 세월이 가고 사람들이 죄악으로 물들게 되면서 만나를 먹는 일이 새벽 이른 아침에 정성을 들여서 수고하지 않으면 얻지 못할 정도로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려워진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 감추어둔 만나를 얻기 위해서 계시록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릴 때 그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과 함께 먹을 수 있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먹으려면 그 생명나무의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 안에 우리가 머물러야 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시록 3:20, 개역개정)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받아 내가 숨을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을 쉬듯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들이 마시고 내 쉬는 삶으로 생명을 보존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잠시 잠깐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음 안에 처해있어서 하나님 안에서의 누림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명나무 곁에 있으면 내가 배고플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고 내가 숨을 들이 마실 때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들이 마실 수 있고 또 그 숨을 내 쉴 때 내 쉴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머무는 삶이며 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주님과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생명의 길에서 머문다는 것이 주님의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 안에서의 누림을 내가 누린다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끊임없이 풍족하게 공급을 받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잊어버린 채 예수 그리스도의 곁에 머물면서 부족한 것이 있을 때마다 주님께 ‘나에게 이것을 해주세요’라고 늘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명나무 곁에서 머물기를 원하면서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만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반면, 사탄이 자신의 수하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신의 마음과 방식대로 하려는 사람, 하나님의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독립적인 삶, 자유의 삶을 누리려는 그런 자들입니다.
사탄은 이런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손아귀에 놓고 자신과 같은 생각과 정신을 쫓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강한 자들, 하나님 없이 분리되어 떨어져 살고자 하는 자들, 아주 고집이 센 자들, 자신의 주먹을 믿고 살 수 있다는 자들은 사탄의 정신에 사로잡혀서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에는 사탄과 똑같은 자들이 됩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부터 오고 있고 이미 왔습니다. 그런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자들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냐면 예수를 믿었던 자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 가인처럼 자기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방식으로 드리는 것이지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참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고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들을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뱀의 화신이 된 자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입니다.
지금은 내가 볼 때 그들과똑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곳이 로마 카톨릭교황청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강한 종교세력과 정치적인 권력을 이용해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실체가 이들 로마 교황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닌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고 그 길로 걸어가게 되면 그 사람의 운명은 영원한 생명수 강이 있는 새 예루살렘 땅으로는 가지 못하고 생명수의 물줄기가 끊어져 결국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이들은 또 사탄과 같은 길로 갔기에 결국 사탄과 같은 운명인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의존하면서 하나님 없이는 그렇게 살수 없다는 마음이 가지고 삶을 산 사람이 아브라함, 야곱이고 그런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독립해서 자유로운 삶을 살며 자신의 성을 쌓는 자들의 삶의 운명의 결과는 사탄과 악한 영들이 가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데, 이는 영원히 소멸되어 없어지도록 사망에 처해진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장 6절에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의문(儀文)은 문자적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는 구약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는 “구약은 죽이는 것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 말씀이 감춰 놓고 있는 것은 문자로 성경을 읽으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것과 같아 죽이는 것이 되지만, 영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살리는 것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린도후서 3:6 개역한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에 속한 빛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영은 몸과 더불어 산혼이 되고 하나님께서 생명의 영을 공급하여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영혼이 숨 쉴 수가 없게 된 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 생명나무에 속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러나 지식의 나무에 속한 영은 그 열매를 먹어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공급받지 못해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살을 받아 먹어라”는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희생제물을 드린 것처럼 다섯개의 보리떡만 있어도 됐지만 죄를 범한 뒤에는 반드시 그 죄를 속죄를 할 피가 필요했기에 동물을 피흘려 잡아서 그것을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에서 어린 아이를 통해서 생선 두마리를 생명의 양식으로 나눠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계속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을 살면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에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서 그 열매를 맛보고 사는 가인처럼 그리고 발람처럼,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까지도 그렇게 순식간에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고 순간적으로 뱀의 화신, 사탄의 모습을 드러내고 주님을 대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역심을 품을 수 있는 소지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그분만을 의지해서 살 때 우리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나무 곁에 머물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전하며 매일 죄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계시록 2장 7절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들으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들으라”라고 강한 명령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강한 명령처럼 여러분들 모두 이기는 자 되어 주님께 생명나무의 열매를 받으시기를 바라며 오늘 교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