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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9절 생명나무와 선악과인 지식의 나무 3~5부

스불론의 배 2023. 9. 14. 07:05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세우는 자신의 성(城)>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서 멸망을 당할 자들은 자신들의 성(城)을 세우며 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여 따르는 사람들은 장막을 세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살려 하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도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마음을 채워줄 다른 대체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한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성을 쌓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서 독립된 삶을 산 가인이 에녹성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의 뜻, 자기의 생각, 자기의 방식대로 행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성과 건축물을 세우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 성이 가인이 만들었던 에녹성이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벨탑과 그 성이며, 애굽의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인 것입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세기 4:17, 개역개정)

 

가인이 에녹성을 건축을 한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성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나타난 삶의 결과입니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는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분리되고 또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뜻과 힘으로 살게 됩니다.

 

아마 사람들은 눈에 보인 가인성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놀라고 환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하는 일은 아무리 번영하고 성공하고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무너져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의식했다면 그 성의 이름을 하나님 성이라고 했을 것인데,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아닌 자신의 뜻과 방식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그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나무가 아닌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맛본 자들의 삶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인은 성을 건설하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성이라고 불렀는데, 대외적으로는 인류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기의 성을 쌓는 것이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는 바벨탑을 쌓은 사건에서도 자신들의 이름을 위해서 그 탑과 성을 건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개역개정)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사람들>

 

하지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은 인류를 위한 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의 집을 짓습니다.

 

인류가 자신들을 위해 만든 성은 흙으로 벽돌을 구워서 만든 집이지만, 하나님의 집, 새 예루살렘 성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진 성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만든 집은 흙으로 벽돌을 구워서 만들었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든 하나님의 집은 광석을 다듬고 불순물을 제거하고 연마해서 얻은 금과 은과 보석을 재료로 하여 만든 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집의 건축 재료인 금과 은과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공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이것을 통해서 나의 나쁜 것들이 잘라지고 깎이고 다듬어지고 또 풀무불에 내가 넣어져 내 속에 있던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광물에서 나온 거지만 그 돌이 산 돌이 되고 산 돌이 보석이 되고 그 보석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형체, 그리스도의 형체,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과 닮은 자들이 될 때 그것이 새 예루살렘성을 만드는 금과 은과 보석인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새 예루살렘 성이 정금과 진주와 각종 보석들로 만들어졌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계시록 21:18~21, 개역개정)

 

창세기 2장에도 금과 각종 보석이 나오지만 계시록이 더 좋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그냥 순금으로 표현되지만 계시록에는 유리처럼 맑은 정금으로 나옵니다. 그 금은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도 100K의 정금이기에 유리처럼 맑은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투명한 자,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자가 되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기에서 나타난 보석들과 정금이 변화되고 잘라지고 다듬어지고 깎여져서 그렇게 빛나고 가치 있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많은 고통과 많은 희생과 많은 헌신과 많은 아픔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면 이와 같은 존귀한 보석과 정금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사람과 선악과를 먹는 사람들의 삶> 

 

가인은 자기의 가까운 가족과 친척과 지인들, 더 나아가서 인류를 위해 그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의 이름을 지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나타내고 높이려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나는 살 수 있다”는 선포가 바로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의 삶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체하여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외형적인 것들, 곧 좋은 아파트, 좋은 자가용, 높은 지위,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가지로 붙어서 살려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일체를 이루고 하나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살다 보니까 세상은 안 보이고 하나님의 얼굴만 보니까 내 자신은 누추하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의 울타리를 화려하게 꾸미고 문패도 크게 하고 집도 크게 하고 옷도 화려하게 입고 자가용도 아주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아파트도 아주 비싼 고급 아파트에서 거주하려 합니다. 

 

또 가인과 같이 하나님 없이 산 유명한 사람이 창세기 10장에 나오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일컬어진 니므롯입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바벨왕국을 세운 사람입니다.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세기 10:8~9 개역개정)

 

이 말씀 10절에 그의 나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가인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일컬은 그 성이 발전되고 확장되어서 큰 나라가 된 것입니다. 니므롯이 세운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조그맣게 시작되어 큰 나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사상의 결과물로서 큰 나라를 만들고 그것을 인류에게 보여준 것이 니므롯이 세운 바벨 왕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에노스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노스의 이름의 뜻은 ‘깨어지기 쉬운’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노스 때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있는데, 정결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티끌과 먼지로 한 줌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언제든지 쉽게 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4:26, 개역개정)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성이나 왕국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의 장막을 만들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뒤따라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작은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장막을 세우고 작은 제단을 쌓았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니므롯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아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그가 족장이기 때문에 부유하여 종들도 많았고 양떼와 다른 가축들도 많았기에 한 곳에 머물러서 안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뒤따라서 올라가는 삶을 살고자 하여,

“하나님 없이는 나는 못삽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저쪽으로 옮기시면 나도 가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장막집을 고수하여 산 것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도 제단과 방주 외에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세상에 내보이는 그런 삶, 크게 확장하고 크게 드러나는 그런 삶,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거나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려는 삶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삶, 선악과 열매를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체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나타내려 하고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기뻐하며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에서 돌이켜 생명나무이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혼과 영이 아주 맑고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지는 일에만 전적인 관심과 집중을 하게 되며 나머지 문제는 별로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상 생활의 문제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보다는 많이 뒤떨어진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인데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세상 일에 있어서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높으신 하나님처럼 자신들을 높이려고 높은 성과 탑들을 쌓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은 생명나무의 키가 크지 않고 작아 자신들이 작아도 그 열매를 충분히 따먹을 수 있기 때문에 높아질 필요가 없어 높은 집이나 높은 탑들을 원하지 않기에 외형적인 그들의 삶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을 예를 들면, 바벨 성을 쌓은 사람들, 또 선악과 열매를 먹고 약간 좀 동떨어진 삶을 산 것이 롯입니다. 

 

롯이 가까스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을 지는 몰라도, 또 의로운 자라고 칭한 성경도 있지만 아브라함처럼 생명나무만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그 열매만을 먹는 생명의 길, 생명의 흐름에 있어서는 다른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은 연합하여 흩어지지 않는데 자꾸 자기를 위하여 요단강 유역을 보고 에덴 동산과 같은 생각이 들어 자꾸 동쪽으로 가게 되어 아브라함과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분리와 이별이 없이 연합되고 일치가 되고 하나가 되는데, 자신의 생각과 뜻과 자신의 방식의 관점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좋은 곳, 그 소돔과 고모라 성을 향해서 감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던 것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요단강 유역을 선택하여 간 것은 하나님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곧 자신의 관심에 따라서 자기를 위한 결정을 한 것이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했다면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이 행하는 특징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에 그것이 좋아 보이고 옳은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간 것입니다.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생각을 따라 행하는 것,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방식이 하나님의 것과 같으면 좋지만 그것은 영이 살아 있을 때는 가능하지만, 생명의 호흡을 받아먹지 못해서 혼(soul)이 살아 있는 혼 (a living soul)이 되질 못하고 그냥 혼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교제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혀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과 방식을 따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롯은 자신의 방식, 자신의 뜻대로 자기를 위하여 나아 가려고 눈을 들어 요단 동편 쪽을 보니 그곳이 좋아 보였던 것이며 그래서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 때, 그의 발걸음은 높은 곳,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운 밑으로 내려가는 하향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박히신 뒤 절망에 빠져 있던 두 명의 제자도 예루살렘 성에서 엠마오 마을로 내려 가는 길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을 깨우쳐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향 길로 계속 가게 되면 그 길이 하나인 것 같지만 점점 가다 보면 죽음이 있는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까지 발길이 도착하게 되어 죄가 많은 곳에 정착하게 됨으로써 죽음 곧 멸망의 유황 불이 내리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계시록에서도 이들의 삶의 결과가 유황 불못에 던져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 10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그 곳에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영원 무궁토록 밤낮 고통을 받으리라. (계시록 20:9~10 개역개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들의 삶을 처음에는 가인을 통해서 보여줬고 그 다음에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보여줬고 또 롯의 사건을 통하여 보여줬습니다. 

 

롯은 가까스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가 거주하던 소돔과 고모라성에 유황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자들에게는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 유익하고 좋게 보이지만 실제는 그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성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간헐적으로 유황 불의 심판을 계속 보여줍니다. 계시록에 그 종말의 삶이 이렇게 끝난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지 모릅니다. 지금 성경은 똑같은 얘기를 계속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 뱀 이야기, 사탄에 관한 똑 같은 이야기들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 때문에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었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왜 오셨고 예수님이 하는 얘기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는 들짐승을 잡는 사냥꾼이었지만 야곱은 아주 간교하고 거짓말 잘하고 사기 치는데 능한 자라서 야곱이 훨씬 나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에서는 하나님 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속받는 삶, 제한된 삶이 싫고 불편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독립을 하려하고 자꾸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삶을 산 것이 사냥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장자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낱 배고픔을 위해서 장자의 명분을 너무나 어이없이 판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산 에서가 장자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하나님 안에서의 누림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뜻과 능력대로 행하는 삶 속에서는 그가 당장 많은 유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장자권을 통해서는 당장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에서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믿음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