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눔방

오병이어의 표적 2부(다섯개의 보리떡과 두마리의 물고기)

스불론의 배 2023. 9. 10. 06:37

말 씀 : 박찬덕 선교사

 

오병이어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이번이 세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제자들과 5천 명의 장정들과함께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 모두를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셔서 자신이 생명의 양식, 유월절 어린양인 것을 보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 중 떡은 생명나무의 과일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기 전 인간은 생명나무의 과일만 먹어도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교묘한 기만과 거짓말에 속아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일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죄라는 독소가 그 몸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피는 생명나무 과일을 먹는다고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에(히 9:22), 아담과 하와의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해서 속죄 양이 그들 대신 피흘려 죽어야 했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그 가죽을 취하여 옷을 지어 입히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운 모습이기에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없애 주기 위하여 아무런 죄 없는 양을 잡아 피 흘려 죽였던 것입니다.

 

 

그 죄 없는 양이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아담과 하와는 얼마나 놀라고 또 말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울며 슬퍼했을 것입니다. 이 기억은 죽을 때까지 영영 잊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양의 피가 그들의 죄를 속량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려 죽게 하고 가죽을 취하여 옷을 만들어 입히므로 일시적이나마 그들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가려 준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3절을 보면,

 

“그때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주의 겉옷을 들고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각자 한 조각씩 가지며, 또한 주의 속옷도 가지니, 그 속옷은 잇지 않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옷을 ‘통으로 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속옷을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들어 주셔서 입혀 주신 옷이 빛의 옷, 영광의 옷, 의의 옷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신 것은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나 인간의 힘과 지혜로 이루어진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일은 이 세상 사람들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미리 정하신 하늘의 계획과 경륜에 따라 성취하신 하나님의 솜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지혜로 하늘의 재료들로 친히 만들었다는 뜻에서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와 수고와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돌로 제단을 쌓을 때 쇠 연장을 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으로 돌을 쪼아서 인간의 눈에 보기 아름답게 만들지 말고 자연적인 돌을 취하여 돌 제단을 쌓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신 뜻대로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신27:5~6)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이나 십자가에 달려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그 모든 것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과 솜씨로 행하신 것이며그 결과로 인간들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옷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나눠 가졌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로 더럽혀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갖게 된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그 겉옷과 속옷을 내어줌으로 말미암아 그 죄를 사함 받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또 훼손하고 소홀히 여기면 안되었는데, 그만 뱀의 간교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법을 어겨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의의 옷, 빛의 옷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미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려분!

깨어 있으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30~37)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긴 것도 이런 영적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도 옷을 지켜서 벗은 채로 다니지 않고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서 벗은 채로 다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 16:15)

 

우리가 값없이 얻은 이 영광의 옷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참혹한 희생을 당하셔서 우리에게 소유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옷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오병이어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육체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히시기 위해서 어린 양을 잡아 피를 흘려 죽게했던 것처럼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옷, 생명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해서 그 육체를 희생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피는 생명 그 자체를 말합니다. 생명을 주고 바꿨다는 얘기입니다.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바꾸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가죽 옷은 어린 양의 생명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 양이 피를 흘려 죽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고 피를 먹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레7:27, 레17:14)

 

왜냐하면, 이 세상 인류가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에, 또 예수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생명의 떡과 피임을 알리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역사를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자신이 창조한 땅에서 오셔서 사셨습니다.

 

보리는 어디서 자라납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에서 자라납니다. 그래서 생명이 되게 하기 위해서 보리 떡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땅에서 생산된 보리로 우리들의 양식이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나온 생선은 타락한 세상의 어둠의 영, 세상 공중권세 잡은 자에 속해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을 구원해내기 위하여, 재창조하기 위해서 타락한 세상속에서 그들을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자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자의 영역인 타락한 세상, 바다 가운데 갇혀서 흉악한 결박과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들을 낚시로 건져내어 구원해 내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4절~27절에 성전 세 납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버나움에서 성전 세로 반 세겔을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님은 왜 세금을 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한 세겔이 하루 일당인데, 반 세겔을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해 보면, 요즘 노동자 하루 일당을 10만으로 볼 때 약 5만 원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 모두 동일한 금액, 반 세겔을 성전 세로 납부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 납부 문제에 대해서, 임금의 아들들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지만 그들로 실족하지 않도록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에서 한 세겔을 얻어 그것으로 세금을 납부하라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공중 권세잡은 자의 영역인 세상 속에 갇혀 포로된 자들을 낚시로 잡아 올려 구원해 내어 자유를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마 4:19, 막 1:17)

 

타락한 세상 속에서 죄에 사로잡혀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을 건져내어 살리라는 얘기입니다. 생명이 있는 다른 영역 속으로 옮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상징하는 죽음의 바다, 죽음의 피, 나일 강의 피를 먹고 살게 되면 결국 일정시간이 지나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들을 그곳에서 건져내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게 하므로 구속함을 받게 하여 에덴동산에 들어가 다시 살게 하라고 사람을 낚는 직분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반 세겔 그 속전에 대한 의미는 우리는 누구든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한 자들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나 높은 자나 상관없습니다. 똑같은 자입니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가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다 귀하고 다 가치가 있습니다.

 

근데 이 원수 마귀가 이 세상에 높고 낮은 것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상하 관계, 계급을 만들어 놓음으로 말미암마 창조 질서의 의미를 훼손시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보리 떡은 또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서 자라나는 보리는 양식으로 삼는 곡식들 중에서 제일 먼저 익어 수확을 할 수 있는 첫 곡식입니다.

 

유월절은 언제입니까?

 

우리나라 시간으로 3월 말부터 4월 초가 유월절입니다. 봄의 기운이 한창일 때입니다. 추운 겨울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이 막 움트는 그런 시기입니다.

 

만물을 보면 다 파랗고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이 만발하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할 때 제일 처음으로 익는 곡식이 보리입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 해질 무렵에 시작되고,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 (1월 15일) 부터 7일 동안을 지킵니다.

 

이 무교절의 의미는 죄 없이 거룩한 삶을 사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속주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 유월절이라면 무교절은 죄 없는 성결한 삶을 사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교절 이튿날 곧 유월절(금요일)로부터 삼일 째되는 아침(일요일)에 초실절 또는 요제절을 지키는데 수확한 보리 이삭 한 단을 가져다가 제사장이 위 아래로 흔드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고” (레 23:10~14)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으로서 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분이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초실절(요제절)은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 얽매일 수 없기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곧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의미에서 초실절 곧 요제절에 제사장이 보리 단을 흔드는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흔드는 보리 단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그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성경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년 수확의 첫 열매를 드리라고 명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런 것입니다. (레위기 23:10)

 

실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날은 구약의 요제절과 같은 안식일 이튿날(일요일, 주의 첫날)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주의 첫날 일찍 살아 나신 후, 전에 주께서 일곱 마귀들을 쫓아내 주신 막달라 마라아에게 먼저 나타나시니라.” (막16:9)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많은 사람이 보리 떡을 먹쟎습니까?

 

보리 떡을 장정 5천 명이 먹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기억하여 그와 같은 삶을 산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 열매로서 보리는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항상 우리가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 성경에 유대인들은 매달 첫째 날(월삭)을 절기로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매달 첫째 날, 매년 첫째 날, 하루의 첫 시간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시간으로 드리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상징하는 그 보리 떡을 먹이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보존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25절에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살펴보십시오.

 

이때는 예수님께서 아직 돌아가시기 전이었지만 “나는 부활 일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지 않고 “나는 부활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주님은 언제나 영원하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은 주님에게 제한되지 않고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예수님이 오시기 2천 년에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 안에서 장래에 이루어질 일을 멀리서 바라본 그 믿음으로 인하여 산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므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산 자의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신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살아 계시는 그분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기 전에도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그리스도라고 얘기하지만, 실상은 그분은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의미로 자신을 찾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리떡과 생선을 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다섯 개의 보리떡으로 이적을 행해 주셨는데 그 숫자 5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4장 6절에 보면, 네 생물이 등장합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이 네 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라는 숫자는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하나’라는 숫자는 고린도전서 8장 6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라는 숫자는 삼위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병이어에서 숫자 5는 피조물인 인류와 그리고 창조주 삼위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린 인류에게 생명이 되는 떡과 피를 공급해 주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숫자 5는 인간을 상징하는 숫자 4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하나’ 곧 엄지 손가락이 연합되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상징하는 네 개의 손가락과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나의 엄지 손가락이 연합될 때, 우리는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 양식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책임을 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엄지손가락이 나머지 네 손가락을 감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보리 떡 다섯개는 피조물 인간을 상징하는 넷이라는 숫자 위에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주인인 그리스도께서 연합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떡과 생명수를 먹여 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므로 우리 인간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일은 죄를 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을 보전하게는 하지만죄를 범한 이후에는 반드시 속죄가 선행되어야 했기에 속죄를 할 수 있는 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죄를 정결케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에 죄 사함을 먼저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뒤에 부활하셔서 다시 사는 일을 통하여 우리가 강건케 된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그를 치료하고 또 여관으로 그를 데려가 돌봐 주도록 했던 것처럼(눅 10:30~35),

죄사함을 받은 후에는 생명 양식을 주어서 죄를 이기고 그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는 일이 필요한데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받아 정결케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이나 실제적으로 죄를 이기는 삶, 구원의 열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만 머문다면 죄만 용서받았을 뿐입니다.

이기는 삶, 다시 사는 삶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효력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속을 받았다 할지라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계속 먹어야 그 열매가 우리 생명에 영양분이 되어서 생명력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의 시험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부활의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부 출신을 대부분 제자로 삼은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낚아 그들의 생명을 구속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표적에서 물고기가 등장한 것은 물고기를 요리하기 위해서 머리를 자르고 다듬을 때 생선에서 피가 나오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구속의 피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제거할 수 있는 효력을 가진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피는 먹지 말라고 한 겁니다.

 

동남 아시아 국가에서는 오리를 잡으면 그 피에 땅콩과 여러가지 야채를 넣어 음식으로 먹기도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피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속죄해주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만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외에는 안 먹는다는 결단으로 다른 피를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소홀히 하고 간과하면 예수님의 피 이외에도 다른 피가 우리를 속죄할 수 있다고 우리가 느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를 명심하십시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흘리신 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인해서 타락된 세상, 곧 인간이 빠져나갈 수 없게 울타리 쳐진 바다속에서 흉악한 결박 아래 묶인 채 죄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운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하여 떡집, 생명의 떡을 의미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또 흑암 속에 행하던 백성에게 큰 빛이 되기 위하여(사 91~2), 망대 또는 등대의 뜻이 있는 나사렛에서 자라시고(마 2:23)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기셔서(마 4:13)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앞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서 주님의 길을 예비했던 침례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은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위해서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 성읍,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신 것입니다. (마 4:12~13)

 

예수님께서 해변가 성읍, 가버나움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이사야서 9장 1,2절 말씀과 같이 사망의 그늘진 세상을 상징하는 바다에 갇혀 흉악한 결박에 묶여 죄의 멍에를 멘 채 자유 없이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 9:1~2)

 

떡을 만드는 보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의 소산물이라면, 물고기는 사탄이지배하고 있는 타락한 세상, 바다의 소산물입니다.

 

바다는 바람과 풍랑과 죽음만이 있는 세상 전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바다가 위험하고 두려운 곳인 줄 알면서도 그들의 생존과 삶의 만족을 위해서 그것을 의존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뜻에서 타락된 세상을 의미하는 바다, 거기에서 나온 생선을 의도적으로 표적에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서 살고 있고 그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처한 형편은 타락된 세상을 상징하는 바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곳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땅으로 올라와야 하며 또 산 위에 올라가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통치자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바다속에 사는 존재로 끝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여 불행한 삶의 결말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의해서 타락한 세상에 사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셨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함에 있어 두 마리의 물고기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에만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보리 떡만으로 표적을 행하여 자신이 생명 양식임을 나타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에 의해 타락된 세상에 거하는 자기 백성을 구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표적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탄에 의해서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들과 같이 사셨지만,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셔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 분은 사탄 마귀의 시험과 유혹, 죄의 충동과 세상의 유혹에도 절대 미혹되거나 오염되지 않으셨고 생각으로도 범죄하지 않으신 완전히 의롭고 성결하신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해안가 접경 성읍, 가버나움에 살고 계셨지만 죄로 타락한 바다에 결코 오염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바다 근처에 있게 되면 그들은 죄악된 바다로 인해서 오염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원수 마귀가 자기 영역으로 삼고 있는 타락한 바다 속에 있을지라도 죄악된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물고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더렵혀지고 타락한 세상에 와서 사셨지만 그 속에서도 전혀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정결한 생명수를 공급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해 주시기 위하여 죄로 더럽혀진 바다와 접해 있는 가버나움을 선교 기지로 삼아 사시면서 갈릴리 지역에 복음 전파를 하셨지만,

그분은 전혀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세상 죄에 부정하게 되거나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나눠줄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세상 공중권세 잡은 사탄 마귀의 영역인 타락한 세상, 바다 속에 동화되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달리 연약한 인간은 이러한 죄의 영역 속에서 죄를 범할 수밖에 없고 부정함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악한 결박에 묶여 있고 죄의 멍에를 메고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세상의 더러운 죄에도 더럽혀지지 않으시고 또 세상에 정결치 못한 어떤 것으로도 오염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두 마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계시록 11장 3,4절에 두 증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러면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더라 이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촛대니라”

 

물고기 두 마리는 “증거, 증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는 일을 부족함없이 온전하고 충만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 양식, 생명수를 공급해 주심에 있어서 모자람이 없이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을 정도로 충만하였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시며 온전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가 되시기에 조금도 미흡한 점과 결여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공급해 주신 다섯 개의 보리떡은 우리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주신 것이며 두 마리 물고기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는 피를 주신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전혀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 양식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변화시켜주고 재창조하기에 부족함 없고 온전하고 풍족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살았을 때는 생명나무의 과실만을 먹고 생명을 보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해서 타락한 이후에는 그것 만으로는 안 되었습니다.

 

죄를 범한 상태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것은 죄 속에서 불행한 삶을 영원히 사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것입니다. 사탄의 정신을 가지고 죄속에서 사는 것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을 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했지만,

 

죄를 범한 후에는 속죄가 먼저 필요했기 때문에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취한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주어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구속을 예표하셨고,

4,000년이 지난 뒤에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온전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졌다는 의미는 생명의 보존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써 다른 일들을 생산해내고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속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고기는 인간을 속죄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동물을 음식으로 주시면서 피흘림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내가 모든 것을 푸른 채소같이 너희에게 주었느니라. 그러나 고기를 생명과 더불어, 즉 거기에 있는 피째 먹지 말지니라.” (창 9:3~4)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에는 사람에게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피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한 생명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는 것이기에(레 17:11),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곧 그의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 흘림이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도록 흙으로 덮어줘야 됩니다. (레위기 17:13)

 

그래서 흉기나 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에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으며 남의 피를 흘린 자는 그의 피도 흘릴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 9:6)

 

사람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생명나무 과일만으로도 생명을 보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범죄한 이후로는 동물의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놀라운 효력을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의 보전을 위해서는 생명나무의 과일도 필요했지만, 죄를 범한 이후에는 동물의 생명 곧 피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모든 희생제물에 항상 식물과 동물의 생명 둘 다를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보십시요.

유월절에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어린 양의 피를 흘려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다음에 바로 무교절이 이어지는데, 무교절은 칠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는 떡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는 죄 없는 성결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동물의 생명을 나타낸 것이라면무교절은 식물의 생명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무교절 떡은 바로 누룩이 들어 있지 않는 보리 떡입니다.

 

곧 유월절에는 동물의 생명을 취해서 그 피로 속죄함을 받아 인간이 새 생명을 얻고 무교절에는 식물의 생명으로 새 생명을 성결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의 다른 생명, 곧 하나는 땅에서 얻은 식물의 생명과 동물에서 얻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것이라야 합니다.

 

바닷가에 접해 있어 타락한 세상의 죄 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은 이미 더러워졌기에 안됩니다.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된 바다에서도 전혀 오염되지 않은 하늘에서 내려온 정결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정결하시기에 인간에게 온전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동물의 생명, 피이고 다른 하나는 식물의 생명,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동물의 생명 곧 어린 양의 피를 흘리는 유월절을 주셨고 그 다음 식물의 생명, 곧 누룩을 넣지 않는 보리떡을 먹는 무교절을 절기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순서입니다.

 

먼저 피흘림으로 인간은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값없이 부여받은 새 생명을 가진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새 생명에 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어 강건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정결한 보리 떡을 칠일 동안 먹는 무교절 절기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창세기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때, 가인은 땅의 소산 곧 식물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것은 속죄함을 받지 않고 식물의 생명만을 바친 행위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3~5)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와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이들도 그들의 죄를 속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바친 식물의 생명으로는 그의 죄를 속죄함 받을 수 가 없었습니다.

 

죄를 가진 인간에게는 죄를 사함 받는 일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죄를 사함 받은 그들이 비로소 식물의 양식을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속의 원리를 가인은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이 바친 식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아벨에게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는 일이었습니다. 죄 사함이 먼저 있어야 식물의 양식이 효력을 발생하여 강건하게 되고 구원의 길로 갈 수가 있는데, 가인은 피 없는 희생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피가 있어야 속죄함을 받아 정결케 되어 충만한 생명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데, 죄를 가진 상태로 영원히 산다면 그것이 저주이고 지옥인 것입니다.

 

아벨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간교한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발생된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피로 죄를 속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죄사함을 받지 못한 채 사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벨은 그걸 알았던 것입니다.

 

이 땅의 양식 식물의 생명과 또 동물의 생명은 인간을 구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4)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는 살과 피, 곧 식물의 생명과 감람나무에서 으깨어진 기름과 같은 동물의 피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은 두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는 동물의 피 곧 오병이어 표적에서 물고기를 얘기하는데곧 예수 그리스도의 못박힌 손과 발과 옆구리에서 나오는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옆구리에서 물도 나왔습니다. 이 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린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함을 받게 하는 구속의 피, 속량의 피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기 위하여 양을 잡아 피흘린 것처럼 피는 생명입니다.

가죽은 양의 생명을 대신해서 얻은 것입니다. 양의 죽음으로 그 가죽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린 피,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죄사함 받아 우리는 정결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나온 물은 강물처럼 그분의 생명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생명나무로부터 발원된 물이 갈라져 네 개의 강이 되어 온 땅에 뻗어 흘러 갔습니다. 그리고 돌고 돌아 생명나무까지 가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또한 맺는다고 계시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에서부터 시작해서 생명나무로 끝나고 있는 것이 창세기와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창 2:10~14, 계 22:1~2)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예수그리스도의 그 피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아 깨끗해졌다면 이제는 생명의 양식인 주님의 살이 공급되어 먹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 모두 생명의 양식을 말하지만, 구속의 순서상 먼저 피를 마시고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아 깨끗해졌기에 그 양식을 먹고 강건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피가 순환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보리 떡을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보리 떡은 생명을 보존하게는 하지만, 죄를 속해줄 수는 없는 것은 바로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찬송가 가사에 얼마나 피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까?

 

피는 예수의 죽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분의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 품성들과 선하심과 의로우심 그리고 그분의 교훈들로 볼 수 있습니다.

 

보리는 피가 될 수 없습니다.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여 정결케 하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면에서 보리 떡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여 정결케 하기 위해서 “내 피를 받아 마셔라”라고 말씀하셨고, 또 우리의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그리고 또 하나의 생명들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내 살을 받아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음식으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린 아이가 가져온 양식으로 표적을 행한 것은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실 때, 냄새나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가장 낮은 자로 태어나시고 고운 모양과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는 연한 순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을 말하고 있고(사 53:2), 또 이 세상 누구나 그 생명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생명을 나눠 주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가져온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보리 떡은 아이의 부모가 먹기 좋게 조각조각 잘라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시고 스스로 작게 되시고 겸손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예수님께서 신분이 아주 높은 세상의 왕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여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땅 냄새나는 짐승의 우리에서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이시고 또 그 탄생은 누구한테도 영접받지 못했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 비천한 직업을 가진 목자들과 먼 이국 땅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로부터 영접받으실 만큼, 그분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낮은 자, 작은 자, 적은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 낮고 천한 자가 되어서 누구에게나 다가가 자신의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먹는 양식을 작게 만들면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그분 스스로를 낮추시고 작은 자가 되셔서 생명을 원하는 누구나 쉽게 다가와서 자신의 생명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남은 조각은 큰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먹기 좋게 아주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나눠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하고 작은 자로 세상에 오셨고 또 섬기시고 봉사하시고 희생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작은 분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 생명의 피를 공급하여 인간을 구속하는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실체는 하늘의 가장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신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 큰 권세와 위엄을 가지시고 영광 가운데서 천군 천사들로 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지만,

 

이 땅에서는 비천한 출신과 직업을 가지셨고 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이 열악한 환경 가운데 사셨음에도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작은 자로, 가난한 자로, 낮은 자로, 섬기는 자로, 희생하고 봉사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해 죽임을 당할 자로 오셔서 원하는 누구라도 그 분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조각조각 나누어져야 했습니다. 남은 조각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낮고 천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기 위해서 어린아이가 먹는 그런 조그마한 보리떡 다섯 개와 조그마한 생선 두 마리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온 세상과 열방이 먹을 수 있도록 생명의 피와 생명의 떡이 되셔서 “내 살을 받아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크고 높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작고 낮은 예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고 또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봉사하시며 때론 우릴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따듯한 마음을 가지신 인간적인 분이시기에 누구라도 쉽게 다가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찬양해야 될 것입니다.

 

정말 낮아지시고 아주 보잘 것 없는 분으로 오신 주님을 찬양하고 늘 깨어서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높은 분으로 또 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면, 어느 누구도 그분께 다가갈 수 없고 그분이 나눠 주시는 생명이 되는 그분의 살과 피를 결코 먹고 마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자(人子)로 오셨다고 요한복음 1장 51절에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계속 말씀하신 것은 인자는 높이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가장 낮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높은 하늘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고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며,

또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 낮고 천한 땅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시는 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또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되기 위해서 가장 작은 자, 가장 낮은 자의 모습, 인자로 오셨고 또 비천한 삶의 모습을 택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자로 오신 주님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로 오시기 위하여 생명의 떡집을 의미하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초라한 집에 있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셔서 짐승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 자, 높은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되고 작은 자, 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삶을 따라 행할 때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남을 섬기고 봉사하고 생명을 나눠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으깨어져서 완전히 산산이 부서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큰 자가 되면 사람들 위에 서서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을 장악하여 지배하려 하고 군림하려 하기에 안 됩니다.

 

내가 낮아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못한 자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부자일지라도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정말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자처럼 보일 때 남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피를 남들에게 양식으로 전달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씹을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대신 씹어 줘야 할 때도 있고 또는 내가 먹여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맛있다고 해서 저 사람도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맛있게 먹고 맛있게 소화시킬 수 있도록 작은 부스러기로 만들어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28절 말씀에 자신을 도와 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그녀의 간구를 거절하는데, 이에 대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대답이 나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기에서 가나안 여인은 ‘부스러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얘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이 여인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비록 유대인들이 개처럼 생각하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도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조각조각 부서진 부스러기와 같은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을 위해서도 생명 양식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도와달라 소리를 지르는 가나안 여인을 귀챦아 했고 그녀를 돌려보내라고 예수님께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개와 같은 삶을 사는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한 여자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풍성한 모든 것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결코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 마리의 물 고기는 그것을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수많은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찰 정도로 풍족하였고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 생명의 피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만큼 풍족해서 온 세상에 흘러넘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정 5,000 명이 먹었다는 얘기는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먹어도 부족함이 없고 아담 때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줄지라도 모자람이 없이 풍족하다는 말입니다.

 

완전한 숫자 1,000에 숫자 5를 곱하여 5,000의 숫자가 나왔는데,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생명의 떡과 생명의 피는 너무나 풍성하고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무한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러한 의미로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도 장정 5천 명을 먹였다면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로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먹일지라도 모자람이 전혀 없고 완전하고 풍족하다는 것입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영원한 숫자입니다.

 

숫자 12은 숫자 3 곱하기 숫자 4를 하면 나오는데 그것은 영원한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의해서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을 전해줌에 있어서 곱하기라는 것을 사용함으로써 온전함과 완전함이 영원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떡 조각들이지만 영원히 충분하고 영원히 만족되고 영원히 공급된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열두 바구니를 거뒀다고 한 것입니다.

 

 

비록 남은 조각이 조각조각 잘라진 작은 그리스도지만 결코 영원히 부족함이없이 풍성함으로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조각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낮고 천한 작은 분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친근히 다가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작지만 실제는 크신 분, 적지만 실제는 많으신 분, 낮지만 실제는 높으신 분이십니다.

 

인간들에게 양식을 먹이시기 위해서 작으신 분으로 쪼개지고 깨어졌지만 그분의 생명의 떡과 생명의 피는 영원하시고 풍족하여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출발했는데,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이 남아 거둔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며 또 신적인 전능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성을 가지신 그분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생명을 주고자 하는 그 자비의 마음이 흘러 넘쳐서 신적인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인성을 가지신 주님이 신성을 보여줄 때가 바로 이런 때입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자가 되어서 우리 또한 인성을 가지고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신성을 소유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낮은자, 작은자, 적은자로 오셔서 우리를 섬기고 봉사하시는 주님의 그런 품성을 우리가 소유하여서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지만 아담 때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주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자신의 양들에게 생명의 떡과 생명의 피를 나눠주시기 위하여 오늘도 높은 산에서 기다리고 계시고 손을 내밀고 계시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