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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10:38~42/ 마리아의참다운섬김 (주님의마음속의갈망과선호에따라행하는것)
    말씀 나눔방 2024. 7. 31. 18:22

    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한참 무더위가 지속되고 있는데요.

    여러분들의 건강을 챙기시면서 주님과 함께 평안의 날을 보내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인 누가복음 10장 28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으로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누가복음 10장을 기록한 누가라는 저자는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10장 28절부터 37절 말씀을 통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요.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38절부터 42절 사이에 베다니에서

    마르다에 의하여 영접받음으로 말미암아 봉사를 통하여 섬기는 마르다와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배열되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과 그리고 구주를 영접하여 섬기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하나로

    묶인바 되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구원을 받은 후에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향한 이 사랑의 마음을 어떠한 섬김으로

    나타내야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주로부터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의 긍휼과 그 사랑과 그 자비를 통하여 아주 비참한 처지,

    불쌍한 처지에 빠져 있었던 이 강도를 만난 율법사가 주님의 큰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보살핌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인하여 구원받은 후에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같이 주님을 향한 섬김을 다해야 되는데

    그중에서도 마리아가 보여준 그 행위가 주님께서 참으로 바라시고 갈망하시는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과 교제를 나눌 이 누가복음 10장 28절부터 41절 사이에 기록된 이 전편에서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교제를 나누었으니까 연결하여서 강도만난 사람이 주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구원받은

    후에는 과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섬겨야 되는가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예수님을 섬겨야 되지 라고 생각은 하고 고민은 하고 궁금해 하지만

    그 섬김에 대해서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섬기는 것을 그냥 단지 우리의 어떤

    갈망과 어떤 선호하는것과 주님이 내가 이렇게 하면은 주님이 좋아하시겠지라는 그런 막연한 생각을 통해서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그 섬김과는 아주 완전히 동떨어진 섬김의 행동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38절과 42절 사이에 오늘의 교제의 중심의 말씀인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베다니라는 곳에서 마르다에 의하여 영접되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말씀 뒤에 바로 연결되어져서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과 마르다와 마리아가 구주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섬기는 이 두 방면의

    이 기록은 그 관계가 밀접하게 서로 상호 간에 연관이 되어져 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아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라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를 만난 이 불쌍한 처지에 빠져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시고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셔서

    그의 상처에 친히 바르셔서 싸매어주시는 이 장면을 통하여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리고 자신이 타고 가시는 그 짐승 나귀를

    통하여 그 죽을 곤경에 처해 있는 그를 태워서 주막집인 오늘날의 교회로 상징되고 있는 주막집에 그를 옮겨서 끝까지 챙기고

    돌보시고 그 사람이 완전히 치료되고 완쾌되어 정상적인 활동을 할 때까지 치료해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든다면 내가 돌아와서

    반드시 그 비용을 배상을 해 드릴 것입니다 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주께서 베푸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인식한 그 구원받은 자는그 구원해 주신 그분을 섬겨야 하는데 그 섬김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그 섬김이 우리가 생각하는 섬김과 아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섬김과 구주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어떻게 섬겨야 되는가를 이 짤막한 38절부터 42절까지의

    다섯 구절을 통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구주를 섬기는 것이 참으로 주님께서 만족해야 하는 섬김인가 이러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10:38 〔마르다와 마리아〕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마르다는 ③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헬, 봉사하는〕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분의 크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구원받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섬김을 행함에 있어서 분명히 그 섬김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할 때 그 섬김을 주님께서 흡족해 하고

    만족해 하고 기뻐받으신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먼저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크신 긍휼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누가 복음 10장 33절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가는 중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이 가까이 가는 마음이 긍휼이라면 그 상처가 나서 거반 죽게 된 그 원인이 되는 그 상처 부위에 기름과 포도주인

    바로 이 성령님과 신성한 생명을 통하여 원기 회복을 시켜준 그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찬히 싸매어주는

    이 모습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려와서 그 주막 주인에게 치료를 부탁하면서 비용을 모두 주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그 비용에 대한 것을 또 더 크게 지불해 줄 것이라는 이것은 끊임없이 끝까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 구주께서 베푸시는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참으로 인식한 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이 구원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은 것에 감사해서 그분을 위해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이 심령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나타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가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을 섬기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 섬겨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아주 비밀스럽게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크신 불쌍히 여기심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는 정말 그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분이 선호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가 행해야지

    그냥 스스로 이 마르다와 같이 내가 주님께서 먼 길을 지금 갈릴리에서부터 사마리아 동네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가기 위한 여정 중에 있으니까 그 주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육신의 몸이 굉장히 피곤하고 핍절하고 배고파하기 때문에 음식으로 대접해

    드리는 것이 가장 주님을 섬기는 것일 것이다 라고 마르다는 자신의 의견과 자신의 관념과 자신의 이해에 따라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의견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관념과 자신의 소망과 자신의 이해에 따라 섬긴 마르다 대신에

    마리아를 극구 칭찬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이후에 교제의 말씀을 나누겠지만

    그분을 섬김에 있어서 그분이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방법에 따라서 그분을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이 갈망하시는 대로, 그분이 좋아하시는 대로, 그분이 선호하시는 대로

    그분을 섬길 때 그 섬김을 주님께서는 흡족하게 여기고 기쁘게 여겨서 그 이름을 이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할 정도로

    주님께서 특별하게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38절에서 저희가 길 갈 때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갈릴리에서의 30년 동안에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역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갈릴리 도성을 지나치고 이제  6개월 후에 발생되어질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께서 한 촌에 들어가셔서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10장 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곳은 고통의 집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베다니라는 바로 나사로와 이 마르다와 그 누이 마리아가

    살고 있던 곳이라고 요한복음 12장 1절과 마태복음 21장 17절에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 그 뒤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셨는데 거기에는 이미 죽었던 나사로 곧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자가 있더라. 

    12:2 거기서 그들이 그분을 위해 저녁 식사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섬기고 나사로는 그분과 함께 상에 앉은 자들 중에 있더라. 12:3 그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그래서 39절에 마르다 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서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 주님의 말씀을 듣더니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은 뭡니까? 마리아가 주님을 더

    지극히 그 주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구원받은 후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특별히 섬기기를 위하는

    마음이 그 마르다보다 훨씬 더 컸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이것은 그분을 영접하여 대접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마리아보다도

    훨씬 컸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큰 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것이 최적의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다섯 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10:38 그들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주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니 이름이 마르다라고 하는 한 여인이 주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10:39 그녀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고 있더라.10:40 그러나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이 많아서 경황이 없더라. 그러므로 그녀가 와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에 나 혼자만 남겨 놓은 것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그녀에게 말씀하셔서 나를 도와 주라고 하소서."라고 하니10: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10: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이 주님께서는 자신을 배척하고 거절하는 사마리아 동네를 거쳐서 그분의 시작은 고난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마구간에 태어나심부터 쉴 자리가 없어서 구유에서 누워 계신 주님의 모습과 그리고 이 조롱받는 나사렛에서 이 삶을

    사시고 30년 동안을 그곳에 살면서 갈릴리 사람들한테 수많은 조롱과 반대와 거절을 당한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한 그 사마리아라는 동네를 거쳐야만 갈 수가 있는데 그곳 사람들에 의해서도 주님께서 심히 배척을 받고 반대를 받고 거절을 받아서 쉴 틈이 없는 아주 연속되어진 고난으로 인하여 그분의 33년 반 동안의 삶의 모습은 전체가 아주 고난 가운데 사신 삶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이 방문하셔서 하나님의 경륜의 뜻을 따라 행하셔야 될 그 죽음과 부활을 이렇게

    행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6개월 남짓 된 그 시점쯤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낮에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서 활동을 하시고  저녁에는 간혹 가다가 간헐적으로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신다든가 아니면

    감람산 동쪽 비탈에 위치한 바로 이 나사로의 집과 시몬의 집이 있는 바로 베다니의 집에 가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묵으셔서 그곳에서 여정을 쉬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갈릴리에서도 사마리아 동네에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이제 이 6개월 남짓한 마지막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갖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을 때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거절과 핍박과

    배척을 당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분께서는 나사렛에서뿐만 아니라 갈릴리에서도 가시는 곳마다 사마리아 도성에서도 그리고 예루살렘

    그 자기의 동족들인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심한 거절과 핍박과 배척을 당하셨지만 베다니에서는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구속주로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 의하여 환영을 받으시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거절 당하시고 핍박을 당하시고 반대를 당하시지만 특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문둥이 시몬의 가족들처럼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38절과 39절에서는 이 나사로라는 이름은 제외하고 언급하지 않고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르다라는 이름이 뭘까요? 우리는 이 이름을 알아야 주님께서 이 다섯 구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섬김에 대한

    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람어인 갈대어에서 파생된 이 마르다 라는 이름은 반역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라는 이름은 헬라어 이름으로써 원래 구약 성경에서는 이 마리아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미리암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서는 히브리어 미리암이 신약 성경을 통해서 헬라어 마리아로서 나타나는 것이 민수기 12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1

    2장 1절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였더라.

    이 히브리어 미리암이라는 이 말이 신약 성경에 와서는 헬라어로 마리아로 바뀌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헬라어 이름의 뜻은 그들의 반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역 그러니까 마르다라는 이름도 그 여자는 반역적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라는 이름도 그들의 반역이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이름들은

    바로 이 첫 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되어져서 옛 창조 안에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갖게 된 반역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이름들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들 모두의 이름의 뜻 안에는 반역의 뜻, 반역의 사상, 반역의 생각을 의미하고 우리에게 반역의 사상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뭡니까? 뱀으로 변신한 마귀에 의하여 그들이 천연적인 생명을 가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어찌할 수 없이 반역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가족들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그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크신 구원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 반역적인 사상을 가진 이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반역적인 이 두 자매를 순종적인 사람으로 곧 주님을

    위하여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주님의 이 크신 구원의 놀라운 능력은 이 반역적인 사람을 순종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반역하는 미리암과 같은 민수기 12장 1절부터 나오죠 12:1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혼인한 에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였으니 이는 그가 에디오피아 여인과 혼인하였음이더라.12:2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느냐? 우리를 통하여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시느냐?" 하니 주께서 그것을 들으셨더라.12:3 (그런데 그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 위의 모든 사람보다 더 온유하더라.)12:4 주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세 사람은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들 셋이 나아갔더라.12:5 그러자 주께서 구름기둥 속에 내려오셔서 성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니 그 두 사람이 나아가더라.12:6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만일 너희 가운데 선지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 가운데서 그에게 나를 알게 할 것이요 꿈 가운데서 그에게 말할 것이니라.12:7 나의 종 모세는 그와 같지 아니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신실하니라.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분명히 말하고, 난해한 말들로 아니하며, 또 그가 주의 모습을 볼 것인데 어찌하여 너희가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시고12:9 주의 노를 그들에게 발하시고, 그 분께서 떠나시더라.12:10 구름이 성막에서 떠났는데, 보라,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어 눈같이 희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쳐다보니, 보라, 그녀가 문둥병이 들었더라.12:11 아론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하였고 우리가 죄를 지었으나, 내가 당신에게 간구하오니 우리에게 죄를 지우지 마소서.12:12 그녀로 자기 어미의 태에서 나올 때에 그 살이 반쯤 소멸되어 버린 죽은 자같이 되게 마소서." 하니12:13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지금 그녀를 낫게 하여 주소서." 하니라.12:14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녀의 아비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녀가 칠 일 동안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녀를 진영 밖에 칠 일 동안 가두었다가 그 후에 그녀를 다시 받아들일지니라." 하시니라.12:15 미리암이 진영 밖에 칠 일 동안 갇혔고 미리암을 다시 데려올 때까지 백성은 이동하지 아니하다가12:16 그 후에 백성이 하세롯에서 떠나 파란 광야에서 진을 쳤더라.

     

    이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를 비방하여서 반역을 나타내는 미리암과 같은 사람이 이 신약 성경을 통해서 마리아라는 지극히

    순종하는 사람이 된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외형적으로 크게 나타났던 마르다라 이름 하는 그 마리아의 언니는 사람으로 오신 그 구주를

    영접하지만 마리아는 바로 그 예수님의 발 아래에 앉아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이 몸이 피곤하고 먼 길을 여행하시는 가운데서 잠시 이렇게 들리신

    구주를 보고 아주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식사를 준비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와 함께

    그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따라온 다수의 여자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마르다는 그 무엇보다도 준비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분주하였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분주하였다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관계 설정에서 빛나갔다 라는 것입니다.

    이 마르다가 식사를 준비하는 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분주했다는 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상암 축구장에서 오후 6시에 거기서 경기가 열리니까 특별히 그 일번 문 입구에서 우리가 만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주하였다 라는 말은 뭐냐 하면 6시에 상암 축구 경기장 1번문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축구 경기에 푹

    빠짐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의 6시에 만나기로 한 것을 잠시 소홀히 하고 간과하는 것이 마음이 분주한 것입니다.

    이 분주하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여 시선 돌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이 갈망과 이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식사를 준비하는 마르다의 마음과는 빗나감으로 말미암아

    어긋나졌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주한 마음입니다.

    이 성경에서 나오는 이 헬라어 원문의 뜻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식사를 준비할 때 너무나 손이 모자라서 그 주님과 함께 따라온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12 제자를 비롯해서 그곳에는 또 70인 제자 중에 몇 명이 있었겠죠.

    그리고 심지어는 그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러 명의 여인들이 주님의 필요를 섬기기 위해서 또 따라온 자들

    그러면 적어도 이 예수님을 따라서 이 여정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엄청 많은 숫자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마르다가 너무나 분주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 봉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주님! 내가 이렇게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데 내동생은 예수님의 그 발아래 앉아서 턱을 받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는 그 마리아 내 동생에게 말 좀 해 주십

    시오. 이제 제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상관하지 마시고 마리아야 너 언니 마르다를 좀 도우려므나라고 말만

    하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40절 장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41절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마르다야 두 번을 지칭하고 있죠.

    내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절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고 하시더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어요. 이 좋은 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마리아는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좋은 편을 택했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죠?

    이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교제를 통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섬김에 대한 얘기인 것입니다.

    참된 섬김이 무엇인가를 주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암시해 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는 그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바로 주님을 주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그분의 소원과 그분의 갈망과 그분의 뜻을 모른 채 그냥 무작정 이런 일을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

    겠지. 구주를 위해서 헌금을 하면 기뻐하시겠지, 교회를 위해서 또 성도를 위해서 이렇게 내가 선한 행위를 하면 좋아하시겠지

    라는 이러한 것을 그분의 뜻을 모른 채 구원받은 자들이 마르다 처럼 그분의 뜻을 모른 채 그냥 그분의 그 허기진 배고픔을

    해결해 드리기 위해서 봉사하는 그 마음은 주님의 갈망과 주님의 뜻과 주님의 소원과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소원과 바람과 뜻과 갈망과 선호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을 먹고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선호하시고

    그분이 갈망하시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39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어 주님의 발 아래 앉아 그 구주의 말씀을 듣더니 예 그렇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 두 자매 이야기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인 28절부터 37절까지의 비유의 말씀 뒤에서 곧바로

    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특별한 상호 간의 연관이 특별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두 방면의

    사례를 통해서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것으로 구성되어야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참 이웃으로 나타나신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베푸시는 그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구원받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죄인이 참다운 이웃으로 불쌍한 처지에 있고 강도를 만난 것과 같은 그러한 가련한 처지에

    있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셔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베풀어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영접하여서 우리의 구주이신 그분을 섬기고 그분이

    원하고 그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우리는 소망하는 마음이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나타나신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는 구주의 그 긍휼과 자비와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을 베풀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주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의 그 갈망과 좋아하심과 주님의 뜻하시는 것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주님이 선호하시는 것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섬김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주님이 선하시고 바라시고 갈망하시고 선호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따라서 우리가 섬길 때 바로 그 섬김이 온전한 섬김으로 나타난다 라는 것을 성경은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로부터 그분에 의하여 구원받은 후에는 우리가 주님을 향한 섬김을 가져야만 되는데 마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구주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알고 인식할 때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처럼 섬김을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이 무엇이고 갈망하고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분을 온전히 섬길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우리를 향한 각자 사람에게 다르죠.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 개별적으로 다른 그 사람들에게 그 일일이 그 주님께서 자신의 갈망과 선호와 바람과

    그분의 뜻을 이 기도를 통하여 계시하여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이끌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섬기도록 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다니라는 이 고통의 집에 오셨을 때 마르다는 그분을 정말로 구원받은 은혜 그분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구원을 받은 것에 감사해서 그분을 친히 영접하기 위하여 자기 집으로 이 마르다라 이름 하는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장면을 우리가 특별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마리아보다도 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주님의 그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더 많이 인식하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받은 것에 감사해서 그분을 친히 영접하기 위하여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르다는 무엇이 문제였냐 하면 그분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르다는 자기 자신의 뜻 자기 자신의 관념과 자기 자신의 생각과 자기 자신의 이해에 따라

    곧 육체적인 천연적인 관념을 따라 구주를 섬기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곧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시니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해 드려서 바로 그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이

    구주를 섬기는 것일것이다 라고 이러한 자신의 관념과 이해와 뜻과 천연적인 관념의 생각을 따라 구주를 섬겼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 마르다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위해 위하여 수많은 것들을 하느라고 분주했습니다.

    주님의 생각과 어긋났던 것입니다. 주님의 관념과 이해와 빗겨나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념은 지금 무엇입니까?

    지금 예루살렘이라는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은 죽으러 가시고 있는 여행 도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득 찬 주 예수님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는 그 마음으로 고정되어 있고 그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죽음을 가득 가지고 있는 예수님께 아무리 진수성찬에 잔치를 배설한다 하여도 그 잔치는 조금은 퇴색될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이 고통의 집으로 상징되고 있는 마르다의 집으로 오셨을 때 바로 이 마르다의 개인적인

    이 생각은 갈릴리에서부터 사역을 하셨던 그분께서 많은 핍박과 많은 반대와 거절을 당하시고 갈릴리 동네에 또 이르러서는

    아주 말할 수 없는 조롱과 배척을 당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에 자신의 집에 들르신 예수님께서는 무척이나

    피곤하고 무척이나 배고파하고 어떤 물질적인 어떤 음식들로 인하여 배부름을 채워주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을 구원해

    주신 구주를 섬기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예 마르다의 바램은 물질적인 것들로 보이는 것들로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으로 그분을 섬기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가인과 아벨에서 아벨과 달리 가인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관념과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으나 주님께서 농산물로 드려진 그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 아벨의

    그 하나님의 관념과 하나님의 이해와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일치되어지는 양을 피의 제물로 드렸을 때 그것을 받은 것처럼

    구주께서는 이 마르다가 구주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이 물질적인 것들로 섬기고자 했을 때 그 섬기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아주 섬김에 대한 것이 잘못된 섬김은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결과만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음식으로 주님을 봉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100명 중에 아마 99명 정도는 그 당시에 바로 이 갈릴리에서부터 사마리아라는 도성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이 사역의 여정을 가고 있을 때 그분을 위해서 해드릴 할 수 있는 것은 마르다처럼 맛있는 음식으로

    그분에게 대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섬김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100명 중에99명은 하였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적인 방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음식을 통해서 섬김을 받는 것은 진정 주님의 바람은 아니었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바람은 실질적으로 그분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하는 이 여행길은 그분 안에서 바로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취하여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자, 곧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될 자들이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분의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진정한 바람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왜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눈치챌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분의 발 아래에서 턱을 맞추고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제자들도 못 깨닫고 그곳에 있는 모든 자들도 못 깨닫고 마르다조차도 깨닫지 못한 것을 마리아는 깨닫고

    마태복음에 기록된 말씀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처럼 옥합 향유를 부어서 주님의 장사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장면은

    바로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마음에 있는 소원이 그분의 마음에 있는 그러한 뜻과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관념과 그분의 것들이 지금 무슨 마음으로 가득 차고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주로 영접하여서 구원받은 자들이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이 진정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진정한 바람이고 소원이고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친 몸을 이끄시고 오셔서 배고픈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먹는 것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으셨습니다.

    먹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바로 자신이 지금 그 노정의 여행길에 종착역인 예루살렘에 왜 가고 있는지 그 주님의 마음을

    앎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서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어 동일시되는

    삶을 통하여 희년안에 누리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갈망이요, 주님의 관심이고 주님의 진정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먹는 것 배고픈 허기 있습니다. 말할 수 없이 허기 집니다. 그러나 거기에 관심 갖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진정 바라는 것은 그  마르다가 초청한 그 잔치집에 주님께서 지금 바라는 것은 12 제자들과 그리고 70인

    제자들과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무리들과 또 주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그 여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이 잠잠히

    마리아처럼 그분과 함께 앉아 그분의 턱 아래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을 파악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뜻대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하고

    관심 갖고 그분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밥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죽음으로 인한 마음이 가득 차 번민하고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앎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지금 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분이 지금 이러한 것을 하기를 원하시는구나,

    선호하시는구나 갈망하시는구나라고 앎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처럼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기 위하여서 그분의 말씀을

    턱을 받치고 그 말씀만을 듣는 마리아를 주님께서는 온전히 섬기는 자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참답게 섬기고 싶습니까?  마르다가 섬기는 자였습니까? 예 마르다는 봉사자로서 섬기는 자였습니다.

    마르다가 아니면 누가 그  많은 사람들 주님과 함께 따라온 수많은 무리들을 누가 먹일 수가 있겠어요? 중요하죠.

    교회 안에는 마르다와 같은 자도 있어야 되고, 마리아와 같은 자도 있어야 되고, 또 나사로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된 이 나사로를 통해서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그러한 간증하는 자들도 필요한 것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마르다와 같은 자가 있습니다.

    마리아 같은 자들도 있어요.

    나사로와 같이 주님의 은혜 안에 있어서  직접적인 증거를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바로 마리아가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고자 주님의 발 아래에서 턱을 받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앎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은 전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10장 39절에 기록된 그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어 주님의 발 아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더니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는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인 죽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고 주님은 죽음을 갈망하고 있고 죽음을 선호하고 있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이가 나중에 여러 성경을 통해서 나오고 있지만 마태복음 26장 12절에서도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도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5천만원 상당의 옥합 향유를 깨어서 자신의 신체 맨 위에 부분인 영광의 상징인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 신체의

    가장 낮은 부분인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그분의 머리에 붓는 이것은 그분이 이 10장 39절에서 이 마르다의 집에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마음에 있는 죽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 마리아는 옥합 향유를

    깨어서 주님의 장사를 위해서 예비하고 준비하는 자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이 죽음에 대해서 얘기했었어요.

    누가복음 9장 22절에서도 오병이어 표적 이후에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해 주시고 9장 31절에서도

    두 번째로 변화선상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별세할 것을 두 번에 걸쳐서 말씀했지만

    그 열두 제자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얘기가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9: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전체가 그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은 그 예루살렘에서의 별세함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류에게 희년의 누림 안에 들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희년을 선포하기 위한 일 때문에 그분의 이 마음에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얘기를 두 번에 걸쳐서 얘기했으나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마리아는 누가복음 10장 39절에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더니 턱을 받치고 아주 자세하게 듣는

    것입니다. 이 분주한 마르다나 제자들은 분주한 마음으로 허기진 마음 때문에 배고픈 육체 때문에 아주 음식을 먹고자 하는

    마음이 상당히 많았겠죠.

     

    그런데 오직 그 가운데서 이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만이 구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여 들음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죽음을 갈망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지금 당당하게 큰 포부를 가지고 큰

    각오를 가지고 가시고 계시는데 이것을 알게 된 자는 바로 구주의 발 아래에서 귀를 집중하고 마음을 집중하고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혼을 다해서 영을 다해서 예수님의 말씀 하시는 것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이 마리아는 주께서 지금 갈망하시는 것이

    죽음임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을 알게 되어서 자신의 전 재산인 300데나리온 하루 일당이 20만 원이라면

    6천만원 여러분 그 마리아가 예수님께 옥합 향유 6천만 원 상당의 사랑의 증표인 그것을 드린 것은 전 재산인 것입니다.

     

    여러분 전 재산을 드릴 수 있나요? 이 마리아라는 여인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선호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의 마음속에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옥합 향유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 그냥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마르다도 있었어요. 나사로도 있었습니다. 시몬도 있었어요.

    문둥이 시몬도 문둥병에서 고침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이렇게 전체를 그분의 장사를 예비하는 징표인 이것을 드리는 자는 마리아 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긍휼과 크신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것에

    감사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그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죄사함 받았을 때

    거듭남을 통하여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그렇구나.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이 구원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구원이 계속 소유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의 은혜에 감사해서 행하는 어떤 행위에 달려 있다라고

    그렇게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어떤 것을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들 누가복음 10장 28절부터 37절 사이에 기록되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주님 앞에 할 수가 없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강도 만난 자는 그 강도들에 의하여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매를 맞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옷을 뺏기고

    거반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반 죽게 되어서 자기 몸을 가눌수 없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할수 있습니까?

    그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주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만을 가지고 자신의 상처를 싸매주고 자신의 상처에 기름을

    부어주고 바로 원기 회복을 시켜주는 신성한 생명을 부어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것을 해야 할 그런 행위가 필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드려야 하는데 드리지 못함을 통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처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가 자신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전혀

    무능한 자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나오는 사람처럼 강도를 만나 옷 벗김을 당하고 매를 맞아서 거의가 죽은 상태로

    버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내버려진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일어날 수 없고 주님을 위하여 무언가

    드릴 수 없는 완전히 무능한 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구주께서 우리를 구원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충분하신 구주만이 필요하다 라는 것을 알 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어떤 다른 것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주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인식하고 그 인간적인 미덕들과 주님의 그 신성한 속성들의

    충만한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에 대한 의미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참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어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모든 것을 온전케 해 주시는 그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구원받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타락한 사람은 우리의 그 어떤 주님을 향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주님께 마음에 드는

    수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라는 사실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는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나요?

    전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그 강도 만난 자는 아무것도 주님 앞에 할 필요가 없었고 그냥 온전히 주님의 100% 1000% 10000%

    그분에 의하여 불쌍히 여기심으로 다가오셔서 상처에 기름을 붓고 원기 회복을  위해서 신선한 생명인 포도주를 부어

    주시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려가시고 또  두 데나리온을 지불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와서 반드시 배상해

    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 전적인  구원은  강도 만난 사람처럼 자신이 구원받기 위하여 주님께

    그 어떤 행위도 행동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할 필요도 없다 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방면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구주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인식해야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구원을 받게 된 후에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또 무엇인가 어떤 수많은 일들과 행동들을 하려고 생각을 하고

    또 그분을 위한 것들을 하느라고 분주한 그냥 쓸데없이 마르다처럼 그 많은 예수님과 함께 따라온 예수님을 쫓은

    수많은 무리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 마르다처럼 분주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주했을 뿐이지 섬김에 대한 열매가 전혀 안 나타났습니다.

    그의 공로는 물론 주님께서 잊지는 않으셨겠죠.

    그런데 그 봉사로 섬기는 것보다도 물질적인 음식을 통해서 대접하는 것보다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참다운 주님을 향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너무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섬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자꾸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하지 않으면 내가 구원의 길에서 탈락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강도 만난 사람처럼 구원을 받기 위해

    그가 구원받을 때 그 어떤 조그만 행동이라도 한 것이 있나요?없습니다.

     

    그냥 쓰러져 거반 죽게 되었던 것을 전적으로 주님께서 100% 그에게 다가가셔서 보살펴주고 치료해 주시고 또 옮겨주시고

    주막에 가서 또 비용까지 대가를 치름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한 것이지 그 사람이 어떤 행동 때문에 그가 그를 구원시켰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구원받은 사람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언가 어떤 것들을 하려는 생각을 대부분이

    가지고 있습니다. 전혀 그 생각을 주님을 위하여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분을 위하여 그분이 좋아하시는 어떤 것들을

    하려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그 사랑에 감사해서 가만히 생각해 본 결과 주님을

    위하여 무언가 일하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신학 공부를 하고 봉사자가 되고 교역자가 되고 교사가 되고 하지만 여기에서

    주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은 이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려는 관념 마르다와 같이 봉사하려는 관념을

    가지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우선되어야 되는 것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이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좋아할 것이라는 그러한 어떤 관념과 그러한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와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행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주를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까?  많은 헌금을 드릴까? 학교를 만들까? 무료 병원들을 이렇게 만들까?

    고아원을 설립할까? 이런 여러 다른 종류의 활동들을 통해서 주님께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서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하기를 원하지만 실제 주님의 바램은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하신 것에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을 파악하고 주님이 선호하는 것이 무엇이고 주님이 갈망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앎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더불어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다운 주님의 갈망이요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바삐 마르다처럼 봉사하는 것이 주님을 위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자들을

    대접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일 것이다 라고 자기 이해와 관념과 자기 뜻을 따라 했지만 주님은 그것보다도

    더 먼저 중요한 것이 있다 라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마르다는 누가복음10장 38절부터 42절 말씀을 통해서 그 주님을 대접하고 주님을 쫓은 수많은 무리들의 식사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 음식을 만드는 일 때문에 너무나 바빴고 너무나 분주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오히려 주님을

    번거롭게 하고 주님을 바쁘시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마르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가  주님과 주님을 쫓는 무리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식사를 대접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주님의 뜻과 주님의 갈망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분주하게 하고 주님을 바쁘게 하는 그런 반대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르다는 주님께 식사를 대접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과 그리고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턱을 받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전적으로 듣는 장면을 보고 마리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삐 일하는 자신을 비롯한 그 많은

    사람들이 식사 대접을 위하여 봉사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잠잠히 그분의 말씀만을 듣고 있는 그 마리아를 보면서 속상해했지만 오히려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발 앞에 앉아서 자신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온 마음으로 온몸으로 집중하는 그 마리아를 오히려 기뻐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들이 마르다를 속상하게 했고 바로 예수님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있는 마리아에게 나를 좀 도우라고

    얘기 좀 해주세요. 내가 너무나 바빠서 정말 너무나 분주해서 다른 일까지도 못할 정도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곧 주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은 대부분

    마르다처럼 자신의 기호와 자신의 뜻과 자신이 생각하는 이해대로 어떤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나타난 그 생각과 관념을

    따라 그 주님을 섬기려고 애쓰느라고 분주하고 바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에요.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응 보면은 이러한 방식으로 섬기는 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많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들은 주님을 위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물질적인 음식을 만드는 것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내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분주한 것

    때문에 근심을 하는데 라고 41절에서 말씀을 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주님을 아는 자들은 주님의 그 마음 안에 있는 그 뜻과 그 소망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갈망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그분의 발 앞에 잠잠히 앉아서 그 말씀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지금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는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를 앎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같이 하는 행동이야말로

    구주를 진정 섬기는 일 참으로 섬기는 자라고 인정을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주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소망하는 것 구주가 지금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마르다와 같이 자신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일하고 물질적인 음식을 통해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주하고 바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애쓰는 것이 아니라 밥은 언젠가 먹어야 되지만서도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바라고 갈망하고 소망하는 가장 크고 가장 가치가 있고 가장 귀한 것은 주님 앞에 앉아서 잠잠히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다 집중하고 관심을 갖고 집중하여 구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구주의 말씀을 들어야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고 죽음에 대한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위해서 예비할 수 있는 옥합 향유를 깨어서 부은

    일이라는 것을 마태복음 16장 12절과 요한복음 12장 3절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마음이 온통 예루살렘에서의 그 갈보리 십자가 언덕에서의 죽음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이 누가복음

    10장 39절에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어서 주의 발 아래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더니 라는 그 베다니 마르다의

    영접을 통하여 주님께서  그집에 앉으셨을 때 주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은 전체가 예루살렘을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6개월 남짓 후에는 주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첫 인류를 향한 죽음을 다 경험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은 온통 그 자신의 죽음에 고정되어 있고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의 마음 안에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그때 아무리 맛난 음식 맛난 반찬을 준비한다 할지라도

    그 만난  반찬이 맛난 음식들을 맛있게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마르다는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그분은 지금 자신이 죽기 위하여 갈릴리에서의 3년 정도의 하나님을 위한 희년의 사역을 선포하신 다음에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에 잠시 들린 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들을 다 내려놓고 곧 마르다처럼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런 행동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죽음에 대한 얘기 죽음과 관계된

    이야기들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함께 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따르는 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들 마르다 처럼 분주하게 쓸데없이 주님의 그 갈망과 마음의 뜻과 소원과

    바람과 그런 것과는 전혀 상반된 음식을 만드는 일에 분주한 그런 일들을 다 내려놓고 쟁기질 하는 사람은 쟁기를 내려놓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생업에 종사하는 일들을 내려놓고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야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친히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고자 하는 희년의 누림 안으로 들어가서 정말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다 내려놓고 천연적인 관념과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모든 일들을 다 내려놓고

    예루살렘에 함께 감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셨지만 가는 동안에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냐

    주님 영광 가운데 앉을 때 나를 오른편에 나를 또 왼편에 앉혀 주시옵소서 심지어는 주님을 위하여 귀신을 쫓는 자

    주님을 위하여 사역을 하고 일하는 자를 금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이기적이고도 아직도 이 땅에 속한 천연적인 관념의

    생각들로 가득 참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그 갈망이 무엇이고 주님께서 지금 선호하는 것이 무엇이고 주님의 마음속에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세상 것이 가득 참으로 말미암아 그 높아지고자 하는 명예 세상에 주고자 하는

    그 지위로 인하여 가득 찼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러한 문제들로 바빴고 또 마르다는 봉사하는 것으로 바빴고 어떤 자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바빴을 때 주님은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으로 간 여자 중에 마리아가 있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열두제자들과 그리고 70인 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남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그 지위에

    대한 욕망과 그 야심으로 바빴고 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같은 그 여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음식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고 바빴다는 것입니다.

    자매들은 봉사하느라고 바빴고 형제들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빴고 오직 섬기는 것으로 인하여 바쁜 자는

    마리아밖에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라는 반역의 마음을 가진자 라는 이가 주님의 이런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하나 되는 죽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주님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삶의 모습을 가져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이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바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자는 분주하지 않았고 잠잠하였으며  조용했습니다.

     

    오직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히 발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그분이 소망하고, 그분이 갈망하고, 그분이 뜻하고 그분이 소망하고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말씀 듣는 것에 집중하였다 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그가 갈 수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 결과 그녀는 주님의 마음에 있는 죽음을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 그리스도의 장사를 위하여

    예비하는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의 몸에 향유를 부은 사실이 마태복음 26장 12절에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도 문둥이 배다니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가 주님께 전 재산  300데나리온이 나오는 것은

    당시에 마리아가 가진 전 재산 모든 하나도 예외됨이 없는 모든 것을 다 주님의 사랑의 증표로 드렸다 라는 것입니다.

     

    이 전 재산을 드린 행위는 바로 주님께서 먼저 마리아를 사랑하였다라는 얘기이고 옥합 향유를 부은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또한 마리아 라는 여자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라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고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이 상호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이야기가

    바로 이 옥합 향유를 부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 선제적으로 주님께서 사랑이 부어져야 그 부음받은 사랑을 가지고 대신 주님의 것으로 사랑을

    내보일 수가 있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죽으시러 지금 가시는 중이구나.

    그래서 그분은 지금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든 자들이 가기를 원하시고 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신의 죽음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미 사전에 두 번 누가복음 9장 22절 오병이어 표적 이외에도

    이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9장 31절에서도 변화 선상에서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주님의 제자들과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누구 하나 귀담아듣는 자가 없었지만 마리아라는 이 여인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취하여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바로

    마리아라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는 주님의 바로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집중하여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소원하시고 갈망하시고 그분이

    바라시는 일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의 죽음을 받아들인 후에 그 마리아라는 그분이 죽으시기 전에 그분께 옥합 향유를

    깨어서 자신의 전체를 기름으로 부을 기회를 찾은 것이 마태복음 26장 12절인 것입니다.

    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자신의 전재산인 옥합 향유를 드렸다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혼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10장 38절부터 42절 사이에서 특별히 39절에서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어 주님이 바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더니 죽음과 관련된 전반적인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그 여정의길이 죽음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마리아는 그분에게 지금 아주 신속하게 아주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그 죽음을 미리

    예비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옥합향유를 깨어서 바로 이 향유를 부어드린 사실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가시는 그 사역의 노중에 있어서 바로 이 9장 51절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가 차감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는 9장 51절에 예수님께서 이러한

    자신의 죽음을 또 한 번 암시해 주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9:51 〔사마리아의 촌에서 예수를 받아 들이지 않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승천을 하실 때가 차간다는 것은 뭡니까? 죽음을 통과한 후에 부활이 있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40일 후에 승천이 있기 때문에 승천하실 때가 채워졌다라는 것은 죽음의 때가 매우 가까이

    심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주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을 가지셨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음을 당해야 된다는 그 한 가지 생각으로 마음 전체가 가득 고정되어 있고 가득 채워진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가득 찬 그 예수님께 그 어떤 맛있는 식사 대접을 한다 할지라도 그 식사는 그냥 단순한 식사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셔서 가시는 도중에 바로  베다니에 잠시 들려서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갈망이요 하나님의 그 경륜의  목적이며 그 마음에 있는 유일한 예루살렘에서의 다가오는 주님 자신의 죽음을

    갖기 위해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그것을 그곳으로 가시는 중에 지금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다니에서 계셨을 때 마리아를 통하여 영접받는 이 사건을 통하여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통하여 그 주님께서는 자신의 갈망이요 하나님의 뜻인 그분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남자들이 됐든 그 제자들이 됐든 쫓아온 예수님의 수많은

    무리가 됐던 그 어떤 무리가 됐든 또 봉사하는 마르다가 됐던 바쁘고 분주한 그들은 각각의 다른 마음들을 가지고

    바쁘고 분주하였기 때문에 이 그분의 죽음에 관한 것을 마음에 간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마리아라는 이 마르다의 동생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죽음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잠잠히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앉아 있던 유일한 이 사람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 곧이어 있을 잔치를 배설했을 때

    그 잔칫집에서 죽음을 예비할 그 기회를 전혀 놓치지 않고 그 기회를 손에 꼭 잡기 위해서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옥합 향유를

    깨어서 부은 사건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그런 300이라는 숫자를 여러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갈망과 선호가 무엇인지 마리아는 그분의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잠잠히 아무 말도 않고 바쁘지도 않았습니다.

    분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구주의 말씀만을 청종하고 집중하고 관심 갖고 그분의 마음 안에 있는 갈망이 무엇인지를

    앎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구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바쁘지 않았던 자, 분주하지 않았던 자, 아무 일도 안 했던 자,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었던 이 마리아라는 여인만

    주님의 뜻이 무엇이고, 주님의 갈망이 무엇이고 바램이 무엇이고, 선호하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를 향해서 하시고자

    하는 것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기를 원하시는 장면을 보고 그 모든 것을

    예비하고 함께 따르는 여인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옥합 향유를 깨어서 부은 여인이 죄 많은 여인이라고 표현한 그 이유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라고 알고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나사로의 누이이며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10장 25절부터 42절까지에서는 두 방면의 사례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바로

    10장 38절부터 42절까지 구주를 영접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마르다에 의하여 영접되어지는 이러한 말씀은 서로 개별적인 어떤 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져 나타나서 한묶음으로 우리에게 깊은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는 곧 구원받은 자들은 구원 안에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아야 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들은 바로 그분의 참다운 섬김을 위하여 봉사자로서 참다운

    섬김을 위하여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지금 마음 마음먹고 계신 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갈망하시고 선호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알아야 되고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먼저 인식해야 되고 그리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섬김을

    위해서는 그분의 갈망과 뜻과 선호하시는 것과 마음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 두 방면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구원과 연관된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알고 인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의 섬김에 연관된 봉사와 섬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지금 마음에

    먹고 있는 일 주님의 그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이 선호하는 것이 무엇이고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전한 섬김을 위해서는 구주의 갈망과 선호를 우리가 아는 일이 중요함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듣는 일이 필요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구주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구원 안에서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알아야 되고 섬김을 위하여 봉사자로서 그분의 갈망과 선호를 알 때 우리들은

    바로 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을 다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봉사자로서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강도를 만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자처럼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그 어떤 행위도 그 어떤 일도 손 하나 꿈쩍할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전적으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받은 자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섬김을 하고자 할 때 우리 스스로 어떤 것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자기의 관념과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소망에 따라서 예수님이 지금 배고프시니까

    물질적인 음식을 만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려야지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이고 가인과 같은 생각일 뿐이지

    주님이 갈망하고 주님이 선호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르다처럼 바쁘지 말라. 분주하지 말라. 오히려 마리아처럼 바쁘지 않고 분주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갈망과

    그 선호를 알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일이 진정 섬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일과 봉사자로서 섬기는 일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천연적인 어떤 사랑을 버리고 주님의 신성한 속성으로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십자가 위에 있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우리를 구원시키고자

    하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알게 되고 우리가 봉사자로서 섬김을 위한 그분의 갈망과 선호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있어야 됩니다.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얘기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주님의 마음 안에는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차고 죽음으로 고정되어 있다라는 얘기를

    통해서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되어 죽는 어떤 그런 동일시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분의 갈망과

    선호를 알게 되어 온전한 그분의 구원하신 그분의 사랑뿐만 아니라 봉사자로서 참 섬기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섬김의 일을

    할 수 있다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모두가 반역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름의 뜻입니다.

    아람어 갈데어에서 나온 그녀는 반역적이다.  마리아는 구약 성경에 히브리어 말로 나타난 미리암이라는 모세의 누이죠.

    이것이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에서는 마리아로 기록되어져서 마리아 또한 그들의 반역을 의미함으로 말미암아

    이  반역의 마음을 가진 사탄의 뜻을 쫓아  반역의 마음을 가진 이 자들이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은

    그분의 큰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가진 구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통하여 반역하는 사람이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하나 된 자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원래 마리아의 본성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사단의 뜻을 쫓아 사는 그런 반역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지만

    주님의 큰 긍휼과 사랑과 크신 자비를 통해서 신성한 속성들로 충만해짐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서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하여 순종적인 사람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순종적인 사람이 대치가 되는 이 변화의 과정 가운데 그분이 갈망하시고

    마음에 선호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말씀을 집중하여 듣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약 성경을 통해서 누구도 어떤 사람도 마리아와 같은 자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갈망이 무엇인지 주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이 선호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최고도로 가장 높은 경지에서 만진 유일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마리아처럼 주님의 갈망과 주님의 선호를 이렇게 제대로 올바로 인식한 자가 세상에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표본으로 말하여지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26장 12절 말씀인 것입니다.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13절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이것은 무엇입니까?섬김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바로 주님이 선호하시고 주님이 갈망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서 바로 말씀 안에 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앎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갈망을 최고도로 유일하게 만진 유일한

    사람임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의 모든 행한 일 이 마리아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주님의 갈망과 주님의 선호와 주님의 소원과 주님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섬김이지 다른 것이 섬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최고의 모범적인 모델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그분을 섬김에 있어서 마리아와 같이 바쁘지 말아야 됩니다.

    마리아 같이 분주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행하는  일들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여서 마르다처럼 분주하고 바빴던 자는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10장 42절 말씀입니다.

    너 몇 가지만 하든지 또는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리라.

    마리아처럼 분주하지 말고 바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는 분주하여 10가지 100가지 일을 하고 있구나.

    차라리 한 가지 두 가지만 해라. 그러면 좀 좋았을 텐데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다.분주하지 않았다.

    바쁘지 않았다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얘기를 통해서 참다운 섬김이 무엇인지를 마리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그녀가 원래 반역적인 사람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베푸신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오신 긍휼과 자비를 그 마리아에게 베품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순종적인 사람이 되고 또한 마르다조차도 주님을 사랑하고 섬김으로 말미암아 똑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순종적인 사람으로서 섬김을 나타내는데 마르다처럼 자기 의견이나 자기 노력이나 자기 뜻이나 자기가 선호하는 그 천연적인

    관념의 뜻은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반면에 그 마리아처럼 분주하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고 오직 주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주님이 선호하고 주님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주님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집중하여

    듣는 것이 바로 온전히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갈망하고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주님께 합당한 섬김이 되기 때문에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섬기는 봉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구원받고 그분의 사랑에 너무나 감사해서 그분을 섬기는

    일을 할 때는 마리아처럼 분주해서도 바빠서도 안 되는 이러한 삶을 가져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얘기를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그 인간적인  품성들을

    통하여 나타난 최고의 미덕들과 신성한 속성들로 충만한 책이 바로 누가복음이기 때문에 누가 복음을 통하여 누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전도사역의 노정의 길에서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그분의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이러한 사역의 일들이

    수행되어지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인간으로 오신 인간적인 품성을 통해서 나타난 미덕들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라는 것이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을 기록한 누가라는 저자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묘사하시고 베다니에서

    마르다에 의하여 영접 되심으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사건을 나란히 한묶음으로 배열해서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고 구원받은 후에는 그분을 어덯게 섬기는 것이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마리아와

    같은 분주하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고 오직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알기 위하여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하는 삶이 참다운 섬김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니까 여러분들 많이 상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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